진정한 세기말은 지금일까? 신세기가 시작된 지 10년이 지나지 않았지만, 다시 세기말의 징후가 나타나고 있다. 문학과 영화와 만화가 손을 모아 종말을 그리고, 입을 모아 종말을 경고한다. 그런데 오늘의 종말은 지난 세기말의 종말과 다르게 그려진다. 20세기 종말론이 절대적 존재에 의해 인간이 도저히 어쩌지 못하는 절대적 종말론에 가까웠다면, 오늘의 종말은 인간 스스로 자초한 종말에 가깝다. 현실화된 종말론, 종말론의 현실화. 이렇게 다가온 종말론 현상에 대중은 열광한다. 지금 여기, 종말을 실감하게 만드는 삶의 위기가 일상화됐기 때문이 아닐까? 더구나 이제 막 초입에 들어선 경제위기의 기나긴 터널 속에서 종말론은 더욱 실감나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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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이후 한국을 포함한 전세계에서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이 큰 인기를 끌었다. 히틀러의 득세, 케네디 암살 등을 맞혔다는 중세의 예언가 노스트라다무스가 남긴 시를 해설한 책은 베스트셀러가 됐고, 더불어 <쎄븐 싸인> <엔드 오브 데이즈> 등 종말을 다룬 영화나 소설도 줄지어 나왔다. 당시의 종말론에는 예언을 넘어선 현실적인 근거도 있었다. 미-소 냉전이 극에 달했던 시기였기 때문에, 언제든지 핵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는 공포가 깔려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새로운 천년이 시작되는 세기말이라는 시기는 한 시대의 종말을 예감하게 하는 상징처럼 여겨졌다. 그 덕에 일부는 종말론 교회에 가서 휴거를 기다리기도 하고, 누구는 도시를 떠나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기도 했다. 하지만 2000년이 돼도 아무 일이 없자 종말론은 지레 수그러드는 듯했다.
불임·바이러스로 멸종 맞는 인류
하지만 21세기가 시작된 지 채 10년도 지나지 않은 지금 다시 종말론이 위세를 떨치고 있다. 종말론을 다룬 책들은 물론 종말을 그린 영화와 소설, 만화 등이 무수히 쏟아지고 있다. 최근 종말의 위기를 강변하는 많은 소설과 영화 등이 말하는 것은, 과거의 종말론과는 약간 다르다고 할 수 있다. 20세기 말의 종말론은 대개 절대적인 종말을 주장했다. 인간이 피하거나 극복할 수 있는 사건이 아니라 전혀 손쓸 수 없는 미증유의 종말이 닥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성경의 요한 묵시록에서 예언하는 세계의 종말처럼. 하지만 최근의 종말론은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모순을 확장시킨 경우가 많다. 영화 <칠드런 오브 맨>은 2027년을 배경으로, 환경오염 탓에 불임의 시대가 도래해 인류 멸종의 위기가 닥친다는 이야기를 그린다. 화학약품이나 플라스틱 때문에 정자의 활동량이 줄어들거나 수가 감소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인간의 편리를 위해서 만들어낸 물건들 때문에, 결국은 모든 생명이 절대적으로 추구하는 종족 번식의 가능성마저 사라져버리는 것은 인간 스스로가 초래한 종말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로도 만들어진 우라사와 나오키의 만화 <20세기 소년>은 ‘친구’라는 정체불명의 사교집단이 전세계에 바이러스를 살포하고 거대 로봇을 동원해 지구를 멸망시킨다는 내용이다. <20세기 소년>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자신들의 꿈을 잃어버린 채 사교집단에 미래를 위탁하는 사람들이다. ‘역사의 종말’이라는 말처럼, 지금은 꿈이 사라진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이 사회가 나아가서 어디에 도착할 것인지, 비전 자체가 사라진 것이다. 그 혼돈과 절망 속에서 사람들이 가장 쉽게 빠져드는 것은 순간적인 향락이거나 신비주의다. <20세기 소년>에서 벌어지는 종말의 시나리오는 주인공인 켄지가 소년 시절에 만들어낸 것이다. 켄지는 그 사실을 떠올리며 경악스러워하지만, 동시에 그가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기억하게 된다. 젊은 날에 꿈꿨던 미래, 진짜 미래가 사라진 이유는 우리가 꿈을 내동댕이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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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갑자기 다수의 초능력자들이 등장해 세계가 혼란에 빠져든다는 내용의 TV 드라마 <히어로즈>에서는 새로운 세계를 만들기 위해 뉴욕을 파괴하려는 악당들의 음모가 나온다. <히어로즈>에는 예정된 미래, 종말을 바꾸기 위해 싸우는 영웅들이 있다. 끔찍한 미래가 온다는 것을 안 영웅들은, 자신들의 힘을 이용해 미래를 바꾸기 위해 헌신한다. <히어로즈>에서 다수의 슈퍼히어로가 겪는 갈등이나 고뇌는 보통 사람들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 자신에게 맡겨진 의무와 책임 그리고 가족을 지키기 위해 그들은 스스로 미래를 만들어간다. 종말은 이미 예정된 것이지만, 그 미래를 바꿀 수 있는 힘은 인간에게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세상에는 영웅이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이다. 국내에서도 베스트셀러가 된 코맥 매카시의 <로드>는 문명의 종말 이후 어디론가 희망 없는 여행을 계속하는 부자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로드>에서는 명확하게 종말의 이유를 말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책을 읽기 시작하면 이유 같은 것은 문제가 될 수 없음을 곧 감지하게 된다. <로드>를 읽다 보면, 현실의 종말이 오지 않았음에도 소설 속의 정처 없는 여정이 지금 우리의 일상과 너무나도 닮아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로드>는 우리가 이미 종말의 시대를 살고 있음을 설파한다.
현실적 불안이 노스트라다무스 대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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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미래가 불안하다고 설파하는 종말론은 곧 현재 사회에 대한 불안을 반영하는 것이다. 냉전이 해체된 뒤 많은 사람들은 핵전쟁의 위기가 사라졌다고 생각했다. 미국과 소련이 경쟁하듯 위성국가들에 무기를 지원하며 국지전을 일으켰던 시대는 지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냉전이 해체된 뒤 오히려 위험과 불안은 가중됐다. 미국이 과장하기는 했지만, 누구나 희생자가 될 수 있는 테러리즘의 시대가 온 것만은 분명하다. 게다가 광우병이나 조류인플루엔자(AI) 등 새로운 질병들이 심각한 위협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환경오염으로 인한 지구온난화가 가속돼 북극의 빙하가 녹아내리는 등 전세계에서 환경 재난이 속출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은 심각한 금융위기가 전세계를 강타했다. 21세기가 됐지만, 오히려 상황은 악화됐다. 지금까지 신뢰했던, 안정됐다고 믿었던 시스템마저 송두리째 흔들리는 위험사회를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 미래가 불안하지 않겠는가. 누가 이 세계가 평화롭게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고 믿겠는가.
현실적인 불안과 함께 노스트라다무스를 대체할 새로운 예언도 등장한다. 내년 개봉 예정인 롤랜드 에머리히의 영화 <2012년>은 이 지구가 종말을 맞이하는 때가 2012년이라고 못박는다. 2012년 거대한 재난이 닥치면서 인간의 문명이 사라진다는 예언은, 중남미에 살았던 마야인의 달력에서 기인한다. 2006년 미국에서 대니얼 핀치백의 <2012: 케찰코아틀의 귀환>이라는 책이 출간됐다. 이 책에 따르면 마야인들은 천문학에 능통해 대단히 정확한 달력을 지니고 있는데, 이 달력이 2012년 12월23일에 끝이 난다고 한다. 마야인의 달력은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시작과 끝을 가지고 있으며, 5128년을 주기로 지구상의 문명이 소멸과 생성을 반복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에 새로운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이나 컴퓨터를 활용한 미래 예측 등이 모두 2012년을 종말의 해로 지목하고 있다는 말이 퍼지면서 2012년이 주목을 받고 있다.
20세기 말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이 주목받았던 이유 하나는, 인간이 도저히 제어할 수 없는 지구 전체의 재난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중국 쓰촨성의 지진이나 인도양을 덮친 쓰나미처럼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막을 수 없는 운명적인 종말. 그런 광경은 롤랜드 에머리히가 만든 영화 <투모로우>에서도 본 적이 있다. <투모로우>에서 지구는 새로운 빙하기를 맞이하게 되고, 순식간에 모든 것이 얼어붙는다. 아무리 과학이 발달하고 인간의 능력이 뛰어나다 해도 거대한 자연의 분노 앞에서는 하찮은 존재일 뿐이다. 종말론은 인간이 너무나도 작은 존재임을 깨닫게 한다.
사실 종말이 오는가, 오지 않는가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종말은 언젠가 분명히 올 것이다. 인간이 영원한 존재라고는 결코 생각할 수 없다. 지구의 역사에서 인간이 존재했던 시간은 너무나도 짧고, 우리는 지구 곳곳에서 사라져버린 문명의 흔적을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다. 크기의 차이가 존재할 뿐, 인간은 이미 수많은 시작과 끝을 경험해왔다. 자연의 모든 것에는 끝이 있는 법이고, 인간만이 자연의 법칙에서 제외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그 종말의 순간에 무엇을 할 것인가이다. 지진과 태풍, 화산 등 자연재해가 유난히 많았던 일본에서 만들어진 <드래곤 헤드>나 <일본 침몰> 같은 작품들에서 배울 점은 한 가지다. 어떻게 피해를 최소화하고, 어떻게 재난 이후의 삶을 살아갈 것인가. 그 점을 미리 생각하지 않는다면 인간의 미래는 더욱 어두워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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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를 바꿀 힘은 우리에게 있다?
봉준호 감독이 영화화하겠다고 밝힌 장마르크 로셰트의 만화 <설국열차>는 빙하기가 닥친 뒤 ‘현대판 노아의 방주’가 된 1천1량의 기차에서 펼쳐지는 미래상이다. 종말의 위기에서 살아남았음에도 현실은 변하지 않는다. 정치인과 군인 등 일부 계급은 여전히 호의호식하고 다수인 보통 사람들은 생존하기 위해 수많은 고통을 겪어야 한다. 상황과 조건이 열악하다는 이유로 자유와 평등은 유보되고, 폭압은 당연한 것으로 주어진다. 오히려 현재보다도 암울한 디스토피아의 미래다. 사실 많은 공상과학(SF) 영화나 소설 등에서 말하는 종말 이후의 미래는 낙관보다 비관적인 묵시록의 세계다. 약육강식의 법칙만이 지배하는 폭력적인 세계. 재난이 닥치고 자원이 부족하거나 생존의 위기가 닥치면, 세상은 다시 정글이 돼버릴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종말론을 다룬 영화나 소설 등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히어로즈>가 말하듯 미래를 바꿀 힘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 <설국열차>가 역으로 던지는, 억압과 폭력에 굴복하지 말라는 메시지? <로드>는 종말 이후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이 너무나도 끔찍하고 고통스러울 것이라고 말해준다. 하지만 그 암울함 속에서도, 결코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그 어둠 때문에 더욱 희망의 존재를 믿고 갈구하게 된다. 결국 종말론을 다룬 작품들을 통해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종말의 유무가 아니다. 종말이 닥쳐왔을 때, 그 이후 우리가 살아가야 한다면 결코 잃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는 것이다. 일종의 선행학습으로서.
김봉석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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