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주석강해/사무엘상

복음도 경계해야 합니다

은바리라이프 2009. 2. 16. 11:31

복음도 경계해야 합니다

왕상22:05~09; 13~18


복음이라는 말은 단어 그대로 복된 소식, 또는 기쁜 소식이라는 뜻으로서 복받게 하는 말씀이라는 의미를 갖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은 좋은 소식입니다. 그러나 기쁜 소식, 좋은 소식이라고 해서 모두 다 하나같이 복받게 하는 말씀이라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을까요? 복을 받게 하는 말씀으로서의 복음, 복을 받게 하는 기쁜 소식, 들으면 복이 되는 좋은 소식을 가장한 가짜 복음들이 넘쳐나기 때문에 이에 대한 각별한 주의와 민감한 영적대응을 위한 감수성 높은 분별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은 “경계해야 할 복음”이 어떤 것이며 그것들을 “어떤 기준으로 분별해 내야 할 것인지”를 생각해 보면서 깨달음을 얻고자 합니다.


1. 어떤 복음을 경계해야 할까요?


먼저, 누구나 한결같이 긍정적으로 말한다고 해서 복음이라고 단정해서는 안됩니다

본문 6절에 보면 사백 명쯤 되는 선지자들이 모두 한결같이 긍정적으로 말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11절에 보면 시드기야라는 사람은 철로 만든 뿔들을 가지고 상징적인 행동을 보이면서 매우 자신있게 긍정적으로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해낼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면서 왕은 마음먹은 일을 능히 해낼 수 있다고 전했습니다. 여기에 나머지 모든 선지자들이 하나가 되어 그의 말에 힘을 실어 주었습니다. 누구나 한결같이 다 긍정적으로 왕이 마음먹은 일을 능히 해낼 수 있다고 말했던 겁니다.

하지만 이와는 반대로 미가야라는 선지자는 매우 부정적이었습니다. 비록 부탁을 받았기 때문에 입으로는 긍정적인 어투로 말했을지라도 사실은 그의 견해에 따르면 결과는 부정적일 수 밖에 없다는 것으로 결론지어졌습니다. 24절에 보면 이런 부정적인 입장을 표명했던 그는 시드기야 선지자에게 따귀까지 맞았습니다.

이러므로 누구나 한결같이 긍정적으로 말한다고 해서 나를 위한 복음, 나에게 복을 가져다주는 말씀이라고 단정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복음은 귀에 듣기 좋은 소리로 포장되어 들려 올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아무리 긍적적이고 좋은 말이며 누구나 한결같이 ‘옳다 옳다’ 하는 말일지라도 그것이 곧 복을 가져다 주는 기쁜 소식, 복된 소식, 복음이라고 단정하는 우를 범하지 않도록 말씀에 예민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시길 바랍니다.


다음으로, 희망이 넘치는 말이라고 해서 복음이라고 단정해서는 안됩니다.

빼앗긴 땅을 찾고 싶어하는 왕에게 다른 모든 선지자들은 한결같이 찾을 수 있다며 희망을 말했습니다. 그러나 미가야 선지자는 다른 선지자들과는 달리 이 백성이 목자없는 양같은 꼴이 될 것(17절)이라면서 왕의 죽음을 암시했습니다. 심지어 시드기야는 눈으로 볼 수 있도록 상징적인 행동을 나타내면서 강력한 희망을 말하며 넘쳐나는 자신감을 갖고 일을 진행해 나가도록 촉구했습니다. 그렇지만 이와는 달리 미가야만은 늘 왕에 대해 불길하고 부정적인 말만 했기 때문에 왕은 미가야 선지자를 미워한다고 말했습니다(8절,18절).

처음에는 미가야 선지자도 희망적인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미가야 선지자의 입장에서 볼 때 그것은 왕을 위한 진정한 복음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부탁을 받고 그렇게 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모든 선지다들은 왕의 편에 서서 왕이 좋아할 만한 희망을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미가야 선지자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미가야 선지자를 부르러 간 사신이 좋은 말만 하도록 부탁을 했었던 겁니다(13절). 그래서 그도 처음에 왕이 듣기에 희망적으로 말했습니다(15절). 하지만 웬지 아닌 것 같다고 느낀 왕이 강력하게 진실한 것으로 말하라고 하자(16절) 온 이스라엘이 목자없는 양 같이 산에 흩어지므로 하나님이 무리를 향하여 말씀하시길, 주인이 없으니 각각 평안히 자기의 집으로 돌아가라(17절)고 말씀하셨다고 전했습니다.

이 일로 인해 왕은 심기가 매우 불편해졌습니다. 저 사람은 내게 대하여 길한 것을 예언하 않고 흉한 것을 예언한다고 하지 않더냐면서 그의 불쾌해진 감정을 노골적으로 표현했습니다(18절). 그리고 미가야 선지자는 왕의 편에 적극적으로 서 있던 시드기야라는 선지자에게 뺨을 맞아야 했습니다(24절). 미가야의 말에 따르면 자신은 진리의 영에 의해 옳은 말을 전했고 나머지 선지자들은 거짓 영에 씌여 거짓말을 전한 사람들입니다(23절). 미가야 선지자는 이렇게 왕에게나 동료들에게나 쌍방으로 미움을 받았습니다. 가짜 복음을 전하지 못하는그의 성격 때문이었습니다.

이러므로 넘치는 희망을 전하는 말이라고 해서 그 말이 반드시 좋은 소식, 복된 소식, 복을받게 하는 복음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수없이 들려 오는 희망찬 소식을 듣게 되더라도 쉽게 현혹되거나 휩쓸려서 분간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도록 민감하게 반응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시길 바랍니다.


세째로, 승산높은 승리를 확실하게 전하는 말이라고 해서 복음이라고 단정해서는 안됩니다

다윗왕의 아들들 중에 압살롬이라는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는 아버지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다가 백성들에게서 인심을 얻은 뒤 느닷없이 예루살렘 궁성에 난입하여 궁을 접수했습니다. 이 난리통에 아무런 대책도 없이 다윗왕과 식구들과 측근의 부하들은 모두 급하게 피신하여 궁을 빠져 나갔습니다.

궁을 접수한 압살롬은 반란을 마무리짓기 위한 전략을 짰습니다. 그 때 그의 책사인 아히도벨이라는 사람이 군사 일만 이천 명을 주면 밤에 다윗을 추격하여 그가 피곤하고 힘이 빠졌을 때 기습하여 왕만 죽이고 백성들을 다 데리고 오겠다고 하였습니다(삼하17:1). 그리고 이기고 돌아올 때에 다윗왕을 따라 간 백성들을 데리고 올 텐데 그 때 왕은 다윗왕을 따라 간 백성들을 포용하므로서 전국적인 인심을 얻도록 하라고 하였습니다(3절 참조). 그러자 이 작전계획을 다 들은 압살롬 자신 뿐만이 아니라 그를 왕으로 옹립하려는 일단의 이스라엘 장로들이 모두 긍정하고 그대록 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궁에 다윗왕의 친구인 후새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16:16a). 이 사람은 다윗이 달아날 때 함께 도망하지 않고 있다가 압살롬을 환영한 사람이었습니다(16b). 처음에는 압살롬이 그에게 이것이 네가 친구를 대하는 도리냐면서 어찌하여 네 친구인 다윗왕과 함깨 달아나지 않았느냐(삼하16:17)고 물었습니다. 그 때 그는 상황이 이렇게 되었는데 내가 누구를 섬겨야 하겠느냐고 대답하면서 앞으로는 전에 다윗왕을 섬겼던 그대로 그의 아들 압살롬을 왕으로 섬기겠노라고 말하였습니다(19절).

아들 입장에서 볼 때 자신도 아버지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킨 패륜아의 입장이라 친구가 친구를 배신하고 그 아들을 왕으로 섬기겠다는 것에 대해 더 이상 어떤 의심을 품을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압살롬은 그의 말을 액면 그대로 긍정하고 일단 그를 받아들였습니다. 이런 상태에 있던 중에 아히도벨의 계략과는 별도로 후새의 계책은 어떤 것인지 압살롬이 물어 보게 되었습니다(17:5).

이 때 후새라는 사람은 아히도벨과는 달리 승리의 확신이 가득히 넘쳐나는 계획을 전했습니다. 그가 제시한 작전은 승산높은 승리임을 확신하게 만드는 대담한 작전이었습니다. 그에 따르면 다윗왕은 용사입니다. 다윗왕이 용사라는 것과 다윗왕을 따르는 장수들도 또한 용사라는 것을 압살롬 자신도 이미 잘 알고 있는 바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 점을 특별히 강조하면서(삼하17:8) 다윗의 지금 심기가 피곤하다고 해서 잠잘 형편이겠느냐며 아히도벨의 작전이 좋지 않다고 했습니다(17:7, 8). 격분할 대로 격분해 있는 다윗은 필경 어느 곳에 숨어있을 텐데(9a) 전체 이스라엘도 다윗왕과 그의 부하 장수들이 모두 용사라는 것을 아는 터에(10b) 행여 압살롬의 군대가 그를 추적했을 때 압살롬 쪽에 피해가 났다는 소문(9b)이라도 난다면 아무리 사자 같은 마음을 가진 압살롬일지라도 패했다면서 상심하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17:10).

이렇게 말하면서 그는 가능한 한 많은 군인들을 모아 직접 전장에 나가 일시에 다윗왕을 기습하여 한 사람도 남기지 말고 몰살시켜야 한다고 했습니다(11~12). 그럴 때 조금이라도 기미가 보일 만한 후한의 자국을 씻어낼 수가 있는 것 아니겠느냐는 식으로 승리에 가득찬 엄청난 작전을 전했습니다. 그 때 아히도벨의 작전을 경청하고 있던 압살롬과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히도벨의 작전보다 낫다면서 그대로 하자는 분위기를 만들게 되었습니다(17:14).

하지만 이것은 진정으로 압살롬을 위한 기쁜 소식, 복된 말, 즉 결코 복음이 아니었습니다. 이 작전이 채택되자 후새는 은밀하게 사람을 보내 다윗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조치를 취했습니다(15~16). 그러므로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압살롬은 아버지를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킨 죄인이긴 하지만 교훈을 얻고자 하는 우리들의 입장에서 볼 때, 아무리 승산높은 승리를 확신있게 전하는 말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곧 내게 기쁨이 되고 복을 가져다 주는 말씀인 복음이라고 단정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가슴벅찬 승리의 메세지를 듣는다고 할지라도 복음으로 포장된 흉계가 숨어 있지는 않은지를 예민하게 살필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 여부를 분별해 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되시길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아무리 마땅하고 타당한 말일지라도 쉽게 복음이라고 단정해서는 안됩니다

따라서 제 아무리 당연하고 앞뒤를 재 보아도 타당하고 심지어 누구든지 상식적으로 볼 때 일반적이고 통상적며 이치에 합당한 말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곧 나를 위한 기쁜 소식, 나를 복받게 하는 소식인 복음일 것이라고 쉽게 단정해서는 안됩니다.

통상적으로 볼 때, 나라가 망하려는 때에 순순히 항복하자고 권유한다면 기쁨으로 동의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한사람도 없을 것이 분명합니다. 오히려 이와는 반대로 강대국의 발에 짓밟혀 초토화되고 있는 나라의 모습을 보면서 앞으로의 국가 운명에 대한 강력한 비전을 제시하고 나라의 미래에 대한 당찬 계획을 나타내며 이 땅에 한 사람도 남지 않을 그 날까지 목숨바쳐 나라를 지키고 건져내자고 할 때 온 백성이 뜻을 한데 모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대 최고의 무기로 빈틈없이 무장한 강력한 군대가 물밀려 오듯 밀려 들어 온다고 할지라도 나라가 망하려는 순간에는 ‘나 하나에 원수 열을 상대하자’면서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것이 마땅하고 타당하고 당연하며 상식에 합한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자고 하는 사람들의 기세에 반대하면서 강대국에 순순히 항복하고 강대국의 통치를 받아야 한다(렘27:12)면서 나선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었는가 하면 그는 이름도 유명한 예레미야..... 예레미야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통상적이고 상식적인 백성들의 정서마저도 무시했습니다. 강대국 바벨론의 왕에게 순순히 항복하고 복종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했습니다(렘27:6~7). 그러면서 순순히 따르지 않으면 칼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벌받게 되리라고 말했습니다(렘27:8).

이에 더하여 많은 사람들이 아무리 희망에 찬 메시지를 전한다고 할지라도, 이사람 저사람 가릴 것 없이 한결같이 다 똑같은 희망의 말을 선포하면서 바벨론의 왕을 섬기지 않게 되리라고 말한다 할지라도 그 말을 듣지 말라고 하였습니다(렘27:9). 한술 더 떠서 그렇게 말하는 그 말은 거짓 예언이라고도 하였습니다(렘27:10). 그러면서 순순히 항복하고 강대국의 왕을 섬기라는 것이었습니다(27:11)

심지어는 바벨론의 군대가 탈취해 가버린 하나님의 성전 기물을 되찾아 갖고 오게 되리라는 가슴벅찬 메시지를 누군가가 전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거짓 예언이니 듣지 말라고도 하였습니다(렘27:16~18). 그렇기 때문에 상식적이고 일반적인 견해에서 본다면 이렇게 말하는 예레미야는 적국에서 뇌물을 받았거나 사주를 받고 백성들을 유혹하는 매국노로 보일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결국 타당하고 마땅하고 상식에 맞는 말을 전했던 하나냐는 거짓 예언자로 판정되었고 비상식적이고 매국노의 오해를 받았던 예레미야의 말대로 하지 않으면 민족의 씨가 말라 버릴 상황이 되어 마침내 유대 백성들은 예레미야가 전한 메시지대로 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고 말았습니다.

따라서 아무리 타당하고 적당하고 상식에 맞는 말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곧 기쁨이 되고 복을 가져오는 복음일 수는 없다는 것을 알아 복음과 비복음을 구분할 줄 아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말씀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그런 분별력을 갖고 참된 복을 받을 수 있게 되길 바랍니다. 그럴 때 복음을 위장한 것들에 현혹되는 일이 없을 것이며, 속는 일이 없을 것이며, 희망과 비전을 빙자한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게 될 것입니다.


2. 그렇다면 기쁜 소식, 좋은 말, 복된 소식인 것 같은 말들이 전혀 복음이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 구별해 낼 수 있을까요?


먼저, 하나님께서 하시고 싶어 하시는 말씀인가, 사람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인가를 살펴야 합니다.

미가야 선지자를 미워한 왕은 북이스라엘의 아합왕입니다. 그는 백성의 땅을 빼앗은 사람입니다. 억울한 누명을 씌워 죄도 없는 백성을 돌로 쳐 죽인 사람입니다. 바로 나봇의 포도원 사건이 그것입니다(왕상21장).

그러나 그와 남유다의 여호사밧 왕은 매우 친하게 지냈습니다. 그러면서 주변국들과도 전쟁이 없이 삼 년 정도를 지내왔던 터였습니다(22:1). 그러던 어느날 남유다의 여호사밧 왕이 북이스라엘의 아합왕에게 왔습니다(2절). 그 때 북이스라엘의 땅이었던 길르앗 라못을 되찾고 싶은 마음이 생긴 아합왕이 여호사밧 왕에게 협조를 구했습니다(왕상22:3~4a). 그러자 여호사밧 왕은 우회적으로 대답하면서(4b) 아합왕에게 그 자리에서 그러겠다는 대답을 피하고 하나님께 먼저 물어 보고 결정하자며(5절) 신중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 때 아합왕은 길르앗 라못을 되찾는 수복 전쟁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국내 선지자들을 소집하여 물어 보게 되었는데(6a) 미가야라는 선지자는 평소에도 아합왕에 대해 부정적이거나 불길한 예언만을 했었기 때문에 그날 그는 초청받지 못했었습니다(7~8a). 하지만 뒤늦게 부름을 받고 나가 기껏 전한다는 말이 왕상 22:17절의 “목자 없는 양”이란 제목의 예언이었습니다. 여기서 아합왕의 심기가 대단히 불편해지고 말았습니다.


• 맞춤식 복음은 결코 진정한 복음이 아니다

우리는 바로 이 지점에서 복음과 비복음을 구별할 줄 아는 분명한 기준을 한가지 보게 됩니다. 욕심을 이루기 위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맞춤식으로 들려 주는 것은 결코 복음이 아니라는 진리입니다. 욕심을 이루기 위해 점을 보는 것과 같은 행태의 맞춤식 예언으로 나타나는 말씀은 결코 복음일 수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복을 주시려는 하나님쪽에서 복받을 만한 사람에게 복을 받게 하시려고 제공해 주시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합왕은 자신의 욕심을 이룰 수 있겠는지(왕상22:1~4a)에 대한 가능성을 타진하고 이에 대해 심리적인 뒷받침을 받고자 맞춤식 복음을 듣길 원했던 겁니다. 그러나 그럴 경우 대개는 거짓 영에 사로잡혀 죽음의 길을 가게 됩니다(왕상22:20, 23).

따라서 아무리 좋은 말, 아무리 좋은 소식, 아무리 기쁜 이야기일지라도 하나님께서 하시고 싶으셔서 하신 말씀인지, 사람쪽에서 자신의 욕심에 맞춰 듣고 싶은 말을 듣고자 하는 말씀인지를 분간할 때 복음을 가장한 가짜 복음을 분별해 낼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참다운 복음은 듣고 싶은 말을 들려 주는 말씀이 아닙니다. 참다운 복음은 복을 주시길 원하시는 하나님쪽에서 우리를 사랑하시사 우리를 복되게 하시려고 우리를 향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진정한 복음만을 들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다음으로, 제대로 된 관계성을 바탕으로 들려오는 말씀인가 아닌가를 살펴야 합니다.

압살롬에게 승률높은 확실한 승리를 보장하며 자신감을 갖게 해 준 계략을 제시했던 후새는 다윗왕을 쳐죽여야 할 뿐만이 아니라 다윗왕을 따르는 사람들마저도 몰살시켜야 할 만큼 깊은 원한을 가졌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참모로 계책을 세웠던 아히도벨도 다윗왕만 죽이고 나머지 백성들은 살려야 한다는 쪽으로 백성들의 목숨을 중히 여기는 곳으로 무게를 두었었는데 압살롬은 이를 전혀 간파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압살롬이 아무리 아버지를 거역한 패륜아였다고 할지라도 아버지의 친구마저도 자신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그를 순순히 받아들였던 것은 그의 한계였습니다. 그래서 성경말씀도 그가 그의 참모인 아히도벨의 계략을 버리고 후새의 계략을 취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이뤄진 일이었다고 평가합니다(삼하17:14).

성경을 통해 교훈을 받아야 하는 우리들의 입장에서 볼 때 분명해지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성을 바탕으로 들려 오는 말씀인가 아닌가를 살펴야 한다는 점입니다. 아무리 천하를 다 준다고 할지라도, 아무리 내 인생을 뒤바꿔 놓을 만한 신통한 능력을 전달해 준다고 할지라도 나와의 관계성 속에서 심각하게 생각해 보고 예민하게 반응하는 영적인 감수성을 발동시켜 합니다. 그럴 때 기상천외한 복을 가져다 줄 만한 말씀이라고 판단되는 놀랍고도 기쁜 소식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과연 나를 복되게 할 만한 복음인지 아닌지를 구별하게 됩니다.

저와 여러분은 우리의 친구이신 주님의 희생의 터 위에서 믿음의 한 가족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입을 통해 전달되는 모든 언어는 서로를 축복하고 서로를 격려하면서 소망을 주는 복음의 나눔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앙망합니다.


마지막으로, 듣기 싫고 굴욕스럽고 수치스럽다고 할지라도, 또는 지금의 것을 다 포기해야 한다고 할지라도 생명을 위한 말씀인가, 아닌가를 살펴 보아야 합니다.


• 충언역이 이어행 양약고구 이어병(忠言逆耳利於行 良藥苦口利於病)

한(漢) 고조(高祖) 유방(劉邦)과 연관된 고사성서(故事成語) 중에 “충언역이 이어행 양약고구 이어병(忠言逆耳利於行 良藥苦口利於病)”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한고조 유방이 충성스런 신하들의 "충언(忠言)"을 받아들이므로 마침내 거대한 대업을 이루게 되었다는 일과 관련된 말입니다.

초(楚)나라의 항우와 경쟁상태에 있었던 한고조의 유방은 진(秦)나라의 수도인 셴양에 항우보다 먼저 입성하여 진시황의 왕궁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그는 산더미처럼 쌓인 금은보화와 하나같이 절세의 미모를 지닌 궁녀들에게 그만 마음을 몽땅 빼앗겨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때 이것을 알아 챈 그의 수하 장군 번쾌가 어서 이곳을 떠나 적당한 자리에 진을 치라고 간언을 했습니다. 그렇지만 유방은 그 말에 귀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의 수하 중에 장량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고조에게 말하길, 진시황으로 부터 계속 고통을 받아 온 이 백성들을 위하여 상복(喪服)을 입고 예를 갖추는 것이 옳은 일인진대 왕이 보물과 미녀에 눈이 팔려 진시왕이 하던 일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으니 이것은 백성을 위하는 선정을 베푸는 것과는 극히 거리가 먼 일이라면서 계속 이러고 있게 된다면 그것은 진시왕보다 더욱 포학한 왕이 되고자 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고 했습닏다. 그러면서 고조에게 “충언역이 이어행 양약고구 이어병(忠言逆耳利於行 良藥苦口利於病)”는 말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아모쪼록 번쾌의 충언에 따라 선왕이 되시길 바란다고 했습니다.

그 때 한고조 유방은 정신을 차리고 충심으로 진언하는 신하들의 말에 따라 처신하여 결국 자신보다 네 배나 많은 군대를 갖고 있던 항우를 제압하고 대륙을 통일할 수 있었습니다. 부하도 잘 두었지만 부하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처신했을 때 부하들의 말은 그를 복되게 하는 그를 위한 복음이 될 수 있었습니다.

예레미야는 맥성들에게 굴욕스럽고 수치스러울지라도 바벨론 왕이 메워주는 멍에를 메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면서(렘27:7a) 생명을 보존하라고 선언하였습니다(27:17).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굴욕스럽고 치욕스럽고 고통스럽더라도 와신상담하는 마음으로 생명을 보존하라고 권하는 말을 통해 복음의 능력을 힘입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복음이 제시하는 말씀 가운데서 참다운 희망을 볼 수 있습니다.

TV 채널을 바꾸기만 해도 얼마나 많은 말씀들이 넘쳐나는지요. 얼마나 기쁘고 즐거운 이야기들이 넘치고 있는지요. 말 그대로 현대인들은 말씀의 홍수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수많은 말들, 걷잡을 수 없이 쏟아지는 이야기들, 셀 수 없이 많이 선포되고 있는 설교들 중에서 과연 우리 자신을 복스럽게 하는 귀한 복음이 얼마나 될까요?

오늘도 하나님의 뜻 가운데 생명을 주시되 풍성히 주시기 위해 우리의 친구로 오신 주님고의 끊어질 수 없는 관계성을 생각해 보면서 믿음으로 한 가족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다 참다운 복을 받는 복음의 수혜자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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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은
감신대및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현재 동대학원의 신학박사(신약학) 과정 중에 있으며 2006년 6월에 중앙대 후문 쪽에 한책의교회를 개척하여 목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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