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주석강해/사무엘상

3년 동안 도망가는 압살롬

은바리라이프 2009. 2. 13. 18:58

3년 동안 도망가는 압살롬

34절 “이에 압살롬은 도망하니라”

암논을 죽인 압살롬은 3년 동안 도망갑니다.

38절 “압살롬이 도망하여 그술로 가서 거한 지 삼 년이라”

어디로 도망갔습니까?

37절 “압살롬은 도망하여 그술 왕 암미훌의 아들 달매에게로 갔고”

달매가 누구입니까? 3:3에 나오는 다윗의 여섯 아내 중 달매의 딸이 있습니다. “마아가”인데 압살롬이 마아가의 아들입니다. 그러니까 달매는 압살롬의 외할아버지입니다. 외할아버지에게로 도망간 것입니다.

거기서 3년을 지냈습니다. 아버지에게 죄를 짓고 할아버지에게 피합니다.

도망 다닐 필요가 없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어디서나 당당하면 좋겠습니다. 비겁한 인생의 모습입니다. 도망해야 할 일을 하지 말아야지요. 도망할 일이 생겨도 당당하게 책임지고 당당하게 해결하고 지나야 합니다. 도망가는 것으로는 결코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습니다.

죄를 짓고 도망하는 압살롬이나 암논이나 같습니다.

2년 동안 회개하지 않고 반성하지 않고 잊어버리는 암논도 도망한 것이고 죄를 짓고 다른 나라로 도망하는 것도 역시 같은 모습입니다.

도망하는 것으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양심으로부터 도망할 수 없습니다. 주님을 피해 도망할 수 없습니다. 잊어버리는 것으로 도망하거니 물리적으로 처벌받을 장소를 피하는 것 모두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아닙니다. 회개와 반성, 사죄와 징계가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더 악해진 3년

3년을 도망가서 지내면서 압살롬은 무엇을 합니다. 단지 죄의 결과인 심판을 면하려고만 합니다.

그러면서 이 3년이라는 긴 시간에 회개와 반성, 그리고 새로운 삶의 변화는 없습니다.

3년간의 도망자의 의 기간 그는 처벌만 면하려고 했지 새로운 인생을 위한 변화가 없었습니다.  뒤에 나타납니다. 이것은 2년 동안 회개와 반성을 하지 않으므로 압살롬의 손에 죽은 암논과 동일합니다.

가인은 아벨을 죽인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하나님과의 대화에서 자기 살길만 찾습니다. 죄에 대한 회개나 반성은 없습니다. 이것이 죄성의 특징입니다.

압살롬은 암논의 죄는 죽일 죄라고 생각하고 죽였지만 자기의 죄는 덮고 갑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정죄하고 비난하면서 그와 똑같은 삶을 살 수 있다는 위험을 안고 있습니다. 조심하십시오.

압살롬은 3년 지나고 나서 돌아와서는 오히려 더 악한 자가 됩니다. 형을 복수를 위해 죽이더니 돌아와서는 아버지를 향해 칼을 갑니다. 복수도 아니고 자기 욕심을 위해 그렇게 합니다.

세월을 흘리는데, 나이는 먹고, 경륜은 쌓이는데 전혀 성장하지 못하고 진보하지 못하고 오히려 퇴보하고 망가지고 황폐해지는 인생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시간의 흐름은 복이어야 합니다. 시간의 흐름만큼 더 성장하고 거룩해져야지요.

아버지의 슬픔

압살롬이 도망가 있는 동안 아버지 다윗의 3년은 어떠했는지 봅시다.

37절 “다윗은 날마다 그 아들을 인하여 슬퍼하니라”

다윗은 그 아들로 인하여 날마다 슬퍼했습니다. 아버지에게 슬픔을 드리는 것도 큰일입니다. 슬픔의 3년을 보냅니다.

당연히 슬펐을 것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슬픔의 세월을 보내기보다 영적으로 가정을 돌아보고 영적으로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생각해야 했습니다.

그 자신이 지은 죄가 이렇게 가정에 비극을 가져왔음을 돌아보고 또 자녀들을 어떻게 영적으로 건강하게 세워야 할지 묵상했어야 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냥 슬퍼하면서 지납니다. 그리고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 큰 비극들이 가정에 꿈틀거리며 준비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압살롬을 그리워합니다.

39절 “다윗 왕의 마음이 압살롬에게 향하여 간절하니 암논은 이미 죽었으므로 왕이 위로를 받았음이더라”

단순한 아버지의 본능만이 있습니다. 아버지로서의 기능은 없습니다. 이것이 다윗의 한계입니다. 걱정하고 보고 싶어 하면서 지냅니다.

죽은 암논은 불쌍하지만 이미 죽었으니 어쩌겠냐며 위로받고 압살롬을 보고 싶어 합니다.

눈치 빠른 요압이 알아챌 정도입니다(14:1).

요압은 작전을 세워 다윗이 압살롬을 불러들일 수 있도록 합니다(14:21).

이어지는 예루살렘에서의 허무한 2년

그 다음의 아버지로서의 다윗은 더 큰 잘못을 저지릅니다.

14:24 “왕이 가로되 저를 그 집으로 물러가게 하고 내 얼굴을 보지 말게 하라 하매 압살롬이 자기 집으로 가고 왕의 얼굴을 보지 못하니라”

14:28 “압살롬이 이태 동안을 예루살렘에 있으되 왕의 얼굴을 보지 못하였으므로”

다윗은 돌아온 압살롬을 2년 동안이나 만나주지 않습니다. 오라고 하고는 얼굴을 보지 않습니다. 2년은 참 중요한 기간으로 계속 등장합니다.

암논의 악행에 대한 칼 가는 기간이었고 이 2년은 아버지에 대해 악을 준비하는 기간이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뻔뻔한 압살롬은 요압과 아버지를 원망합니다.

요압이 만나주지 않으니 요압의 밭에 불을 지릅니다(14:29-30). 그리고 아버지가 자기를 만나주기를 강력하게 요구합니다. 얼마나 뻔뻔스럽습니까? 이것이 압살롬입니다. 5년 동안 이렇게 더 악해진 것입니다.

다윗이 먼저 불러 징계를 하든지 용서를 하든지 교육을 하든지 훈계를 하는 것이 필요했지만 그것을 회피합니다. 그래서 생긴 결과입니다. 악을 키웁니다.

결국 압살롬의 요구대로 다윗은 압살롬을 만나 입을 맞춥니다.

14:33 “요압이 왕께 나아가서 그 말을 고하매 왕이 압살롬을 부르니 저가 왕께 나아가 그 앞에서 얼굴을 땅에 대어 절하매 왕이 압살롬과 입을 맞추니라”

회개도 용서도 없는 입맞춤은 다른 칼만 손에 쥐어 주는 결과를 낳습니다.

15:1이하에서 아버지를 배신하는 반역이 이루어집니다.

압살롬의 입맞춤은 예수님을 파는 가룟 유다의 입맞춤과 같은 모습입니다.

도망간 압살롬의 3년, 다윗의 3년 그리고 예루살렘 돌아와서의 2년 이렇게 의미 없게 오히려 더 악해지는 시간의 흐름이었습니다.

압살롬과 아버지 다윗이 함께 만든 결과입니다.

시간의 흐름이 우리에게 복되게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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