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겨울 열왕기상 제 1 강 말씀/왕상 1,2장 요절/왕상 2:2,3 솔로몬 왕국의 기초
열왕기서는 선민의 흥망 성쇠가 그들의 경제력이나 정치력, 군사력에 연유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과 불순종에 기인한 것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또 왕들에 대한 평가도 그가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일을 행했느냐 아니면 악한 일을 행하였느냐로 내려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윗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자는 예레미야로 보고 있고 쓴 연대는 BC536년 이전으로 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열왕기서를 배우는 가운데 하나님의 눈으로 역사를 보는 안목을 기르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말씀을 상대화 하는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서 행복이 넘치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솔로몬이 다윗의 위를 잇는 과정에서 배반자의 모습과 충성스러운 다윗의 동역자들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다윗의 유언을 통해 우리가 힘써 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가 힘써 대장부가 되고, 말씀을 지켜 행하고, 공의와 선을 베풀어 복된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I. 세움을 받은 솔로몬(1장) 다윗이 늙어 70세 정도가 되자 혈액 순환이 안되고 온도 조절이 되지 않아서 이불을 덮어도 따뜻하지 않았습니다. 그를 간호하기 위해서 아비삭이라는 젊은 처녀를 얻어 왕의 품에 누워 따뜻하게 했습니다. 이것은 고대 헬라에서 노쇠한 사람의 체온을 따뜻하게 유지하는 방법이었습니다. 다윗은 기력이 쇠하자 국정을 살필 수 없었습니다. 자연히 후계자 문제가 모든 사람의 마음에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아도니야는 다윗을 배반했습니다. 그러면 배반자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첫째로, 그는 스스로 높였습니다(5). 인격이 훌륭하고 영적으로 훌륭하면 스스로 높이지 않아도 존경과 높임을 받습니다. 그러나 배반자는 자기 스스로 높여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떠 받들고 높일 것을 강요합니다. 이처럼 그는 교만했습니다. 아담은 교만하여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과 동등되고자 하였습니다. 압살롬은 교만하여 백성들의 마음을 도적질하여 스스로 왕이 되고자 하였습니다. 아도니야도 압살롬처럼 스스로 높여 왕이 되고자 했습니다. 다윗은 역대상 22:9절을 볼 때 솔로몬이 다윗의 위를 이을 왕임을 선포했습니다. 아도니야도 이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교만하여 자기를 위해 병거와 기병과 전배 오십 인을 예비하고 스스로 왕이 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교만하여 배반하는 자들을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역사 이래로 마음이 높아져 자기 유익을 위해 신의를 져버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배반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입니다(잠16:18). 하나님은 교만을 폐하고(겔32:12), 교만한 사람을 돌아보지 않고(욥37:24), 교만한 자를 흩으십니다(눅1:51). 둘째로, 그는 자신의 자랑거리를 내세웠습니다(6). 그는 압살롬 다음으로 준수했습니다. 다윗은 그에게 싫은 소리 한 번 안 했습니다. 그는 칭찬만 듣고 자랐습니다. 그가 훈련을 받지 않고 칭찬을 들을 때 오히려 겸손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것을 이용하여 자신의 야욕을 채우고 명예를 탐닉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자랑거리를 이용하여 다윗의 군대 장관 요압과 제사장 아비아달을 유혹했습니다. 사실 역사적으로 보면 훈련을 받고 자란 사람들보다 칭찬을 듣고 자란 사람들이 배반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그래서 원수는 먼 데 있는 것이 아니고 가까운 데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아름다운 용모와 자랑거리를 주신 것은 큰 축복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용모와 자랑거리에 도취될 때 스스로 자기 무덤을 파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은 자랑하는 혀를 끊으신다고 했습니다(시12:3). 하나님은 자기 힘을 과시한 골리앗, 자기의 높은 위치를 자랑한 하만(에5:11), 자기 의를 자랑한 바리새인(마23:6-8) 등을 저주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자랑거리를 주와 복음을 위하여 써야 합니다. 하나님을 자랑해야 합니다. 오직 자랑할 것은 하나님의 이름이요, 그리스도의 구원의 역사 뿐입니다(대상16:10, 시20:7). 셋째로, 그는 모의했습니다(7). 그는 요압과 아비아달과 모의했습니다. 자신을 위해 파당을 지었습니다. 파당을 지어 전체적인 조화를 깨고 분열을 획책했습니다. 어떤 공동체든지 자신의 유익을 위해 모의하여 공동체를 깨서는 되지 않습니다. 때론 자기의 목소리를 내야 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일신상의 유익과 자신의 탐욕을 위해 목소리를 내어서는 안 됩니다. 공동체의 선을 위해 자기 목소리를 내야 합니다. 자기 유익을 위해 모의하는 것은 배반자입니다. 가룟 유다는 자기의 유익을 쫓아 대제사장과 모의하여 예수님을 배반했습니다. 아도니야도 결국 자기 유익을 위해 당을 지어 다윗을 배반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신다고 했습니다(롬2:8). 당 짓는 것은 육에 속한 일입니다(갈5:20). 그리고 그는 기회를 틈 타 다윗을 배반했습니다. 기회주의자는 배반자입니다. 아도니야는 소와 양과 살진 송아지를 잡고 솔로몬을 제외한 모든 왕자들과 나단과 사독을 제외한 왕의 신복, 그리고 유다 사람들만을 초청하여 기름 부음을 받지도 않고 스스로 왕이 되었습니다. 그는 중대한 일을 앞에 놓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가 왕이 된 것을 기뻐한 사람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니라 유다 지파의 몇 명이었습니다. 지도자란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기름을 부으시고 백성들로부터 세움을 받아야 합니다. 다윗은 일생에 3번 기름 부음을 받았습니다. 그는 기름을 부음 받고 왕이라고 자신을 높이지 아니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세워 줄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그가 왕이 된 것은 백성들 위에 군림하여 섬김받고자 함이 아니라 백성들을 섬기고자 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백성들의 위에 군림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실지라도 오히려 섬기셨습니다. 그러나 아도니야는 백성들 위에 군림하고, 자신의 탐닉을 위해 스스로 왕이 되었습니다. 결국 그는 비극적인 종말을 고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 높아지고, 자기의 자랑거리로 자기를 드러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어야 합니다. 반면에 목을 내놓고 충성하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그는 나단 선지자와 제사장 사독과 다윗의 충신들입니다. 그들이 끝까지 충성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군대 장관인 요압과 대제사장인 아비아달이 아도니야 편에 설 만큼 대세는 이미 아도니야에게로 기울어졌습니다. 대세란 역행할 수 없습니다. 이제 나단 선지자도 대세에 따라 아도니야 편에 설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대세를 따르지 않고 솔로몬을 왕으로 세우고자 합니다(11-21). 그가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솔로몬을 왕으로 세우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았고, 무엇이 진짜며 무엇이 가짜인지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알고, 무엇이 진짜인 것을 알면서도 자기 유익을 위해 대세에 따르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그는 일시적인 부귀영화를 위해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고, 다윗을 배반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불이익을 당할지라도 대세보다 진리를 택했습니다. 그는 조금도 타협하거나 양다리 전법을 쓰지 않고 믿음의 중심을 지켰습니다. 그는 끝까지 하나님 편에 섰습니다. 그는 가짜를 택하지 않고 진짜를 택했습니다. 유한 것을 택하지 않고 영원한 것을 택했습니다. 나단 선지자는 결정적일 때마다 하나님 편에서 다윗을 도왔습니다. 결정적일 때 다윗에게 찾아가 회개토록 했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일 때 다윗을 도와 솔로몬을 왕으로 세웠습니다. 그는 충성스러운 다윗의 동역자입니다. 이런 충성스러운 동역자를 둔 다윗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성경은 “많은 사람은 각기 자기의 인자함을 자랑하나니 충성된 자를 누가 만날 수 있으랴(잠20:6)” 했습니다. 충성된 사람을 만난 사람은 열 성을 뺏는 것보다 낫습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저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의 주위에 충성스러운 많은 동역자들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나단 선지자의 보고를 들은 다윗은 어떻게 했습니까? 다윗이 누구의 손을 들어 주느냐에 따라 하나님의 역사 방향은 판이하게 달라집니다. 그러나 그는 솔로몬을 왕으로 세웠습니다. 사실 이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는 늙어 누워 있습니다. 그리고 압살롬의 반역의 슬픈 사연이 있기 때문에 ‘좋은 것이 좋다’ 는 식으로 타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늙어 육신은 쇠했지만 불꽃 같은 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때 그는 하나님 편에 서서 솔로몬을 세웠습니다. 그가 그럴 수 있었던 것은 눈이 쇠하도록 성경을 읽고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32-40절을 보면 제사장 사독과 선지자 나단은 솔로몬에게 기름을 부었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은 양각 나팔을 불며 만세를 불렀습니다. 모든 백성들이 왕을 따르며 피리를 불고 크게 즐거워하였습니다. 그들의 소리가 얼마나 컸던 지 땅이 갈라지는 듯 했습니다. 그러나 아도니야를 따르던 사람들은 모두 흩어져 제 갈 길로 갔습니다. 이를 볼 때 그들이 자기 유익을 위해서 아도니야를 따랐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대로 솔로몬이 왕이 되었습니다. II. 다윗의 유언(2장) 다윗이 죽을 날이 임박하여 솔로몬에게 유언을 합니다. “내가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의 가는 길로 가게 되었노니(2a)” 다윗은 물매와 돌로 거대한 골리앗을 쳐서 죽인 세기의 용사요, 영웅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도 이제 세상 모든 사람들이 가는 길로 가게 되었습니다. 죽음은 누구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영원토록 살 것으로 생각하고 욕심을 부리고 탐욕스럽게 살아갑니다. 그러나 저나 여러분은 언젠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놓고 가야 합니다. 죽음 앞에는 명예도, 권세도, 돈도, 아름다운 아내도, 자식도 놓고 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는 날 동안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2b-9절을 보면 다윗의 유언이 나옵니다. 우리가 살면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세상을 어떻게 살 것인가’ 일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힘써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무엇을 위해 힘써서 살아야 합니까? 첫째로, 힘써서 대장부가 되어야 합니다(2b). 대장부가 무엇입니까? 대장부는 졸장부에 대조되는 단어입니다. 우리는 대장부의 삶보다는 졸장부의 삶을 많이 살아 왔기 때문에 졸장부의 삶과 대조하면 대장부가 무엇인가를 쉽게 알 것입니다. 졸장부는 생각하고 행하는 것이 천박합니다. 그러나 대장부는 생각하는 것이나 행하는 것이 크고 장엄합니다. 졸장부는 가치관이 육신적입니다. 그러나 대장부의 가치관은 영적입니다. 졸장부의 삶의 철학은 어떻게 하면 먹고 마시고 즐길 것인가입니다. 그러나 대장부의 철학은 어떻게 하면 시대와 민족을 위해 살 수 있을까입니다. 졸장부는 자기만을 위해 삽니다. 그러나 대장부는 시대와 민족을 위해 고뇌하며 그들을 위해 삽니다. 졸장부는 실패를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대장부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실패하여 넘어졌다가도 다시 일어섭니다. 졸장부는 패기가 없습니다. 그러나 대장부는 패기가 있습니다. 졸장부는 허약합니다. 그러나 대장부는 강합니다. 졸장부는 책임감이 없습니다. 그러나 대장부는 책임감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졸장부는 두려움이 많습니다. 그러나 대장부는 어떤 상황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께 징조를 구합니다. 졸장부는 땅만을 바라보고 삽니다. 사람들의 인기에 좌우되고, 쉽게 분노하고, 쉽게 좌절합니다. 그러나 대장부는 독수리처럼 하늘을 향하여 힘찬 삶을 삽니다. 무엇보다도 졸장부는 비전과 꿈이 없습니다. 고작 꿈이래야 대학을 졸업하여 직장 다니다가 시집이나 가고, 장가나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장부는 웅장한 꿈과 비전을 가지고 살아 갑니다. 우리가 어떻게 대장부가 될 수 있습니까? 하나님 안에 있을 때 꿈과 비전을 가진 대장부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안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두신 계획을 알 수 있고, 또 그 계획을 기대할 수 있고, 그 계획을 시도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 있을 때 대장부가 될 수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2:1절을 보면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네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속에서 강하고” 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과 깊은 인격적인 관계성을 맺고,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 있으면 대장부와 같이 강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6:13절을 보면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여라” 고 했습니다. 우리가 깨어 믿음 위에 설 때 대장부가 될 수 있습니다. 깨어 믿음 위에 굳게 설 때 승리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힘써서 말씀을 지켜 행해야 합니다(3,4).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을 지켜 그 길로 행하여 그 법률과 계명과 율례와 증거를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무릇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할지라. 여호와께서 내 일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만일 네 자손이 그 길을 삼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진실히 내 앞에서 행하면 이스라엘 왕위에 오를 사람이 네게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신 말씀을 확실히 이루게 하시리라(3,4).” 이것은 비단 다윗이 솔로몬에게만 권한 권면이 아닙니다. 일찌기 가나안을 눈 앞에 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향한 모세의 권면이기도 합니다(신6:32). 또한 가나안 땅을 정복한 여호수아에게 하나님께서 친히 명령하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이는 성경 전체에 흐르는 도도한 물결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흐름은 우리에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계명과 율례를 몸과 마음을 다해 행하고 지켜야 합니다. 우리는 말씀을 행해야 합니다. 말씀과 삶이 일치가 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날 성도들이 욕을 먹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삶과 말씀이 일치가 안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말씀을 지키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말씀이 점점 상대화되고 있습니다. 이 때 우리는 말씀을 지켜야 합니다. 복음을 사수하여야 합니다. 특별히 시련 중에 말씀을 행하고 지켜야 합니다. 다윗은 시련 중에 말씀을 지켰습니다(삼하12:23). 어떤 사람은 목자님 말씀대로 순종했는데 나에게 남은 것이 무엇인가, 되는 것이 없다고 하면서 나름대로 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세상 욕심 때문에 한번이라도 믿음으로 순종해 보았는지 의심스럽습니다. 그러나 이제라도 망하는 한이 있어도 끝까지 믿음으로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상급을 주십니다. 욥은 재산 뿐만 아니라 가계 전체가 멸망을 당하고도 말씀을 지켰습니다(욥1:21). 위기의 상황에서도 말씀을 지킨 다니엘의 세 친구들이 있습니다(단3:1-30). 우리가 말씀을 행하고 지킬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어디를 가든지 형통케 하여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축복의 비결은 말씀을 지켜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거룩한 백성이요 제사장 나라로서 뜻을 두시고 택하셨습니다. 이를 위해서 왕이 힘써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입니다. 셋째로, 힘써서 공의와 선을 행해야 합니다(5-46). 다윗은 무죄한 피를 흘린 요압과 다윗을 저주한 시므이에 대해 공의로운 응징을 하라고 합니다. 요압은 자기 감정에 기초하여 아브넬과 아마사를 죽였습니다. 왕의 뜻은 피를 흘리지 않고 통일 이스라엘을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피를 흘려 통일 이스라엘을 지연시켰습니다. 그는 열심이 있었으나 자기 열심이 강해 하나님의 역사 방향을 크게 방해했습니다. 그는 앞으로도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실제로 그렇게 했습니다. 아브넬을 죽인 것은 그의 개인적인 원한과 복수심때문이요 아마사를 죽인 것은 시기심때문이었습니다. 개인적인 감정을 따라서 행하다보니 하나님의 역사를 거스르게 되었습니다. 그는 솔로몬을 세워야 할 때 아도니야를 세웠습니다. 시므이는 다윗이 압살롬에게 쫓겨 갈 때 다윗을 저주했습니다. 베냐민 지파로서 그는 다윗이 사울의 왕권을 강탈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다윗을 폐하고 사울 집을 다시 왕으로 세워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다윗을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 때 그는 다윗을 저주했습니다. 그리고 다윗이 압살롬의 반란을 진압하고 돌아오자 먼저 나가서 자기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는 기회주의자였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그에게 거주제한을 시켰습니다. 만약 그것을 어기면 죽을 줄 알라고 했습니다. 결국 3년 뒤에 작은 욕심을 이기지 못해서 그는 죽고 말았습니다. 요압이나 시므이는 하나님 편에서 역사를 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분별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역사성이 없고, 자기를 앞세우는 인본주의자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제거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선행을 베푼 바실래 가정을 잘 돌보도록 했습니다. 그는 어려울 때 다윗을 도왔습니다. 다윗은 임종을 앞두고도 자기에게 선행을 베푼 사람들을 기억하는 선한 목자였습니다. 솔로몬의 왕국은 한마디로 말씀과 공의에 기초한 왕국이요, 선행을 베푼 하나님 왕국의 모형입니다. 하나님께서 새롭게 마더 사라 배리 선교사님을 우리 모임의 대표로 세우셨습니다. 우리가 이 분을 중심으로 하나가 되어서 성서 한국, 세계 선교 역사를 줄기차게 이루어 나가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성경 지식이 좀 부족하더라도 배운 바 말씀을 지켜 행하는 가운데 영성이 충만하고 열매가 풍성하기를 기도합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