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주석강해/사무엘상

도망하는 압살롬/ 삼하 13:30-39

은바리라이프 2009. 2. 12. 16:50

도망하는 압살롬/ 삼하 13:30-39


30 ○그들이 길에 있을 때에 압살롬이 왕의 모든 아들들을 죽이고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였다는 소문이 다윗에게 이르매
31 ○왕이 곧 일어나서 자기의 옷을 찢고 땅에 드러눕고 그의 신하들도 다 옷을 찢고 모셔 선지라
32 ○다윗의 형 시므아의 아들 요나답이 아뢰어 이르되 내 주여 젊은 왕자들이 다 죽임을 당한 줄로 생각하지 마옵소서 오직 암논만 죽었으리이다 그가 압살롬의 누이 다말을 욕되게 한 날부터 압살롬이 결심한 것이니이다
33 ○그러하온즉 내 주 왕이여 왕자들이 다 죽은 줄로 생각하여 상심하지 마옵소서 오직 암논만 죽었으리이다 하니라
34 ○이에 압살롬은 도망하니라 파수하는 청년이 눈을 들어 보니 보아라 뒷산 언덕길로 여러 사람이 오는도다
35 ○요나답이 왕께 아뢰되 보소서 왕자들이 오나이다 당신의 종이 말한 대로 되었나이다 하고
36 ○말을 마치자 왕자들이 이르러 소리를 높여 통곡하니 왕과 그의 모든 신하들도 심히 통곡하니라
37 ○압살롬은 도망하여 그술 왕 암미훌의 아들 달매에게로 갔고 다윗은 날마다 그의 아들로 말미암아 슬퍼하니라
38 ○압살롬이 도망하여 그술로 가서 거기에 산 지 삼 년이라
39 ○다윗 왕의 마음이 압살롬을 향하여 간절하니 암논은 이미 죽었으므로 왕이 위로를 받았음이더라




아들이 죽었다는 통보를 받은 다윗은 슬퍼하였습니다. 범죄를 저지른 압살롬은 도망하였고 자신으로 비롯된 불행을 바라보는 다윗은 압살롬에게 연민을 느끼게 됩니다.

다윗의 통곡(30-33) 다윗은 아들 모두가 죽었다는 통보를 받고 참을 수없는 슬픔에 빠집니다. 사실과는 다른 보고가 다윗 왕에게 전달된 것은 당시 현장이 그만큼 절박한 상황이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도망쳐 나온 자들은 미처 진상을 파악하지 못한 채 빠져나와 성급하게 보고하였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옷을 찢고 주저앉을 만큼 충격적인 슬픔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요나답은 왕의 아들들 모두가 죽은 것이 아니라 암논만 죽었다는 사실을 보고 하였습니다. 요나답은 자신의 간교로 다말에 대한 추행사건이 일어나고 난 뒤, 지난 2년 동안 압살롬의 동정을 예의 주시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압살롬에 대한 살해사실과 살해동기에 대해서도 왕에게 보고할 수 있었습니다.

도망하는 압살롬(34-36) 본문은 암논을 살해한 압살롬이 도망하였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이것은 압살롬의 범죄가 단순한 것이 아니라 친족을 죽인 크나큰 범죄자임을 부각시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전성기를 주도한 다윗의 권세에 압살롬의 도망은 실질적으로 의미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다윗이 잡으려고만 한다면 압살롬을 체포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다윗은 적극적으로 압살롬을 잡으려는 행동을 취하지 않았습니다. 요나답의 보고대로 다윗의 다른 왕자들이 무사하게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고 다윗은 그들과 함께 통곡하였습니다.

압살롬의 피신(37-39) 압살롬이 도망하여 그술왕 달매에게로 피합니다. 다윗은 당시 그술왕 달매의 딸 마아가와 정략적인 결혼을 하였는데, 마아가에게서 태어난 자식이 바로 압살롬입니다. 따라서 압살롬은 자신의 외할아버지에게로 피신하였던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범죄로 시작된 집안의 여러 가지 불행에 깊은 자책감을 갖고 있어 범죄하고 도망간 압살롬에 대한 연민으로 슬퍼하였습니다. 압살롬이 그술로 도망하여 3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음에도 다윗 에게 압살롬을 향한 마음이 간절하였다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는 압살롬을 율법에 따라 처벌하기 보다는 자식에 대한 걱정과 그리움, 안타까운 심정이 묻어나는 대목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묵상도우미

뒷산 언덕길(34) 히브리인들은 동쪽 방향을 앞쪽이라 불렀고 서쪽 방향을 뒤쪽이라 불렀습니다. 따라서 이 말은 예루살렘 서쪽에 있는 산길을 의미함.
그술(37) 아람 소국들 중 하나로 이스라엘 북쪽에 인접해 있던 나라.

죄로 병들어 고통 받고 신음하는 이 땅을 고치기 위하여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인물로 프로크루스테스가 있습니다. 그는 아주 거대한 괴물로 사람들을 붙잡아 침대에 눕히고는 침대길이보다 짧으면 사지를 잡아 늘여 길이를 맞추고, 너무 길면 그 사람의 사지를 그냥 잘라냅니다. 이것은 하나의 상징적인 이야기로 우리가 자신이 만든 이상형에 폭력적인 방법으로 적응하는 양상을 설명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처럼 자신이 갖고 있는 이상형의 크기만큼 자신을 늘리거나 혹은 잘라내면서 스스로를 파괴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생긴 그대로의 모습으로 만드셨다는 것을 용납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상형을 하나님의 뜻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한 규격을 제시하지 않으셨고, 각 사람에게 지금 좋은 것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하여 그 사람 안으로 들어가는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