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주석강해/사무엘상

다윗 (David ; ?~BC 961)

은바리라이프 2009. 2. 10. 19:59

다윗 (David ; ?~BC 961)

  고대 이스라엘의 제2대 왕으로서 이스라(이새)의 아들이며, 소년시절 사무엘이 사울왕(王)의 후계자로 지목하였다. 그리고 사울의 딸 미갈과 혼인하였다. 성장하여 사울왕을 섬기고 페리시테(블리셋)의 거인 골리앗을 돌로 때려죽여 용맹을 떨쳤으나, 사울의 질투로 적대시당하였다.

  결국 다윗은 유다 남부와 팔레스타인 해안 평야에 자리잡은 필리스티아으로 도망쳤으며, 그곳에서 뛰어난 지혜와 예지력으로 출세를 위한 기초를 쌓기 시작하였다. 현상금이 붙어 추방당한 후, 다윗은 자신의 지파(유다)의 사막 접경지대에서 로빈후드 같은 생활을 하였다. 다른 추방자들과 난민들을 조직하여 지도자가 되었는데, 성서는 이 사실을 "억눌려 지내는 사람, 빚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 그밖에 불평을 품은 사람들이 다윗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다윗이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들은 지역 주민들을 도적떼로부터 보호해주고, 만일 약탈당하면 약탈자들을 추격하여 빼앗긴 물건을 도로 찾아다주어 점차적으로 지역 주민들과 좋은 관계를 갖게 되었다. 비록 사울 왕의 추격을 피하여 가끔 가트 지방의 필리스티아 왕들에게 보호를 받기도 했지만 다윗은 유다 동족들에게 자신은 여전히 애국자로, 심지어는 정신 질환을 앓고 있는 사울왕의 결백하고 충직한 종으로 보이기 위해 애썼다. 또한 그는 여러 가지 정치적 행동을 취함으로써 유다 장로들의 호감을 샀다.

  사울 사후 BC 1000년 유대의 왕, BC 994년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 그리고 예루살렘으로 신의 언약궤를 옮기고, 제사제도(祭司制度)를 정하였으며,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유대교[猶太敎]를 확립하였다. 필리스티아를 철저히 무찔러서 다시는 이스라엘의 안전에 큰 위험이 되지 못하게 했고, 해안지대를 이스라엘 영토로 병합했다. 그는 에돔·모압·암몬 등 이스라엘에 접한 여러 소왕국의 대군주가 됨으로써 제국을 건설하게 되었다.

  그러나 만년에는 자식들 간에 왕위계승의 싸움이 일어나는 등 평온하지 못하였다. 즉, 그는 왕국을 구성하는 여러 집단을 결속시키기 위해 그들 가운데서 아내를 얻었고 후궁전을 만들었다. 이렇게 해서 생겨난 가족관계는 전통적인 씨족 사회의 혈연관계와는 거리가 멀었다. 다윗의 아내들은 서로에 대해 매우 소원했으며, 그 자식들도 갈등을 해결하고 왕위계승을 확립하는 선례들을 제공했던 기존의 사회형태를 지지하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다윗의 셋째아들 압살롬이 맏형 암논을 죽였다. 암논이 이복 누이동생인 다말, 즉 압살롬의 친여동생을 강간하자 거기에 보복을 한 것이다. 이 일로 유배를 당한 뒤 아버지 다윗과 다시 화해하게 된 압살롬은 백성과 궁정대신들 가운데서 인기를 얻어 반란을 일으켰다. 다윗은 요르단 강을 건너 도망하였고 압살롬은 한동안 예루살렘과 후궁전을 지배하였다. 그러나 결국 압살롬 군대는 패하고, 압살롬 자신은 다윗의 장군 요압의 손에 죽었다. 결국 왕위를 계승한 사람은 다윗과 바쎄바사이에서 태어난 솔로몬이었다.

  또 하프의 명수였고, 시인으로서도 명성을 떨쳤으며, 구약성서 시편의 상당부분은 다윗이 지은 것이라고 알려졌다. 그의 사적(事績)은 구약성서 《사무엘 상(上)》 l6장 이하와 《열왕기 상》 2장 및 《역대기 상》 11∼29장에 자세히 기록되었다.

<두산대백과사전>참고

<브리태니커백과사전>참고

- 차석찬의 역사창고 홈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