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주석강해/사무엘상

압살롬 콤플렉스

은바리라이프 2009. 2. 10. 19:54

소돔과 고모라 성이 죄악의 범람으로 심판을 피할 수 없게 되었을 때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려”는 것이냐며, 심판을 면해 줄 것을 간청합니다. 하지만 심판을 되돌릴 수 없음을 알게 된 아브라함은 다만 몇 사람이라도 구할 생각을 하게 됩니다. 50인으로부터 시작하여 45인, 40인, 30인, 20인까지 내려가다가 마지막 10인에 이르러서는 절규하듯, “노하지 마소서 이번만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라고 간청합니다. 구약학자 칼 델리취는 “이번만 더”를 ‘서술’이 아닌 ‘탄원’으로 읽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탄원이야말로 “참된 기도의 본질”이라고 합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무한한 거리를 이어주며, 끈질기게 호소하고, 호소가 이뤄질 때까지 끊이지 않는 “신앙의 파렴치성”이라고도 합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인간의 하나님을 향한 신앙은 파렴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누구나 하나님 앞에서는 자존심을 버리고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처럼’ 오직 자비를 빌어야 합니다. 내 힘으로는 악의 끈질김, 사악함을 이길 수 없기에 그러합니다. 천길 절벽 아래로 곤두박질치는 절망을 벗어날 수 없기에 그러합니다. 예수께서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 7:11)고 하신 이유가 다른 데 있지 않을 것입니다.

다윗과 압살롬의 고사가 있습니다. 압살롬이 아버지 다윗을 밀어내고 제 스스로 왕이 되기 위해 반란을 일으켰을 때입니다. 압살롬이 다윗 성을 공격해오자 다윗은 궁을 지키는 몇 사람만을 남기고 모두 소개 疏開시켰습니다. 아들과 싸워 무고한 피를 흘리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때 레위인과 제사장들이 법궤를 메고 나왔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법궤를 제 자리에 갖다 놓으라고 합니다(삼하 15:25-26). 왕권의 보증수표나 마찬가지인 법궤를 왜 원수의 손에 들어가도록 한 것일까? 신명기 역사가는, 다윗은 압살롬의 반란을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여기고,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복종하려 했기 때문으로 보고 있습니다. 실제로 그는 이스라엘의 왕이 되기 위해 억울한 피를 너무 많이 흘렸습니다. 아들 압살롬의 반역은 그런 죄악의 결과이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다윗은 하나님의 자비에 자신의 운명을 온전히 맡기는 선택을 한 것입니다.

문제는 압살롬입니다. 다윗성에 무혈 입성한 압살롬은 참모들과 작전회의를 합니다. 참모 둘이 각기 다른 전략을 내놓았습니다. 아히도벨은 도피한 다윗을 신속하게 기습 공격할 것을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후새는 온 이스라엘 백성들을 불러 모아 그들을 앞세워서 다윗을 압도하는 것이 좋겠다고 합니다. 압살롬의 허영심을 잔뜩 부풀게 한 계략입니다. 압살롬은 아히도벨의 작전을 물리치고 후새의 계략을 선택합니다. 치명적인 실수를 하는 순간입니다. 허영심과 자기 과시 때문에 궁성을 빠져 나간 다윗이 반격해 올 수 있도록 충분한 시간을 주게 된 것입니다. 결국 압살롬은 다윗의 병사들에게 죽임을 당합니다.

인간은 자기 인식이 결여된 존재, 착각하는 존재, 망상에 사로잡힌 존재입니다. 특히 ‘실상’이 아닌 ‘허상’에 중독된 현대인은 그 정도가 더 심합니다. 이를테면 ‘압살롬 콤플렉스’에 걸린 존재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입니다. 영웅이 되고 싶어 하고, 압도하고 싶어 하고, 환호를 받고 싶어 하고, 패자를 조롱하고 싶어 하는 심리가 그러합니다. 인간은 자기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압살롬은 교만함과 허영심으로 부풀려진 자기 인식으로 인해 파멸을 자초했으나, 다윗은 비록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음에도 하나님의 자비에 운명을 맡김으로서 새로운 삶을 얻었습니다.

요즘 정부 실세들의 행태를 보면 ‘압살롬 콤플렉스’가 생각나는 것은 왜 그럴까요? 아직도 승리에 도취된 얼굴에는 배려도 없고, 관용도 없고, 두려움도 없어 보입니다. 국가 정책이라고 내 놓는 걸 보면 생활고에 시달리는 이들을 위해 아브라함처럼 “이번만 더”라는 절박함이 없어 보입니다. 자기 과실을 인정하는 목소리에는 다윗처럼 하나님의 자비에 위탁하는 겸허함이 보이지 않습니다. 나라의 지도자가 압살롬이 아닌 다윗이 되기를 바라는 것은 필자만이 아닐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