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교회의 신유 운동
1. 연구의 방법
역사 기술에서 제일 어려운 점은 지금 일어나고 있는 운동을 기술하는 일이다. 이미 과거에 일어났던 일에 대해 역사적 평가를 하고 기술하는 일은 자료를 찾기가 힘든 일이기는 하나 얻어진 자료에 대해 객관적으로 접근하는 일은 용이한 편이다. 그러나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은 객관적 자료를 만드는 일 자체가 어려운 일이다. 이런 면에서 현대의 신유 운동에 대한 연구를 시도하는 이 논문은 처음부터 논문의 한계가 있음을 전제로 해서 시작한다.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현대의 신유 운동을 종합적으로 정리해서 역사적 평가를 내리기는 현재로서는 쉽지 않다.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운동이라 문헌적 자료로 취합하고 정리하는 일 자체가 쉽지 않고, 현장에 찾아다니면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기록하여 객관적 자료로 만들기는 더욱 어렵다.
이 논문은 일정한 한계 내에서 현대교회가 하고 있는 신유 운동에 대해서 보고하고 평가하려고 시도한다. 우선 몇 가지 연구의 한계를 언급하고자 한다. 첫째, 시기적인 한계로는 이 논문은 ‘현대’를 1950년 이후로 정한다. 거시적 역사 구분에 의해서는 20세기 전체가 현대일수 있지만 이 논문은 특별히 1950년 이후를 연구의 대상으로 삼는다. 둘째, 지리적인 한계로는 미국과 한국이 주 대상이 된다. 아프리카나 중남미에서 신유 운동이 최근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나 이들 지역에 대한 연구는 진행하지 못하였다. 셋째, 자료의 한계를 감안해 연구의 방법도 문헌학적 방법의 수준을 넘어서지 못했다는 점이다. 신유 현장을 목격하고 이에 대한 분석적 연구가 아니라 신유 운동에 대한 문헌적 기술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는다. 넷째, 이 연구는 신유가 오늘날 적합한지에 대한 조직신학적 논의를 전개하지 않는다. 혹은 신유 사역의 내적 구조를 밝히는 일을 하는 것도 아니다.1) 단지 현대교회가 신유의 사역을 해야 한다는 주장을 전제로 신유 운동의 역사적 기술을 하며 또한 신유 운동의 필요성을 다시 강조 하고자 한다.
2. 신유에 대한 일반적 이해
이 논문이 연구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신유’(神癒)의 의미는 신앙이나 기도를 통해서 의학적인 치료를 통한 것이 아닌 하나님의 직접적인 치료를 말한다. 신유라는 말 외에도 ‘치유’(治癒)나 ‘치료’(治療)라는 말이 있다. 이 말들은 일반적으로 의학적인 치료를 뜻하거나 인간에 내재한 자연적인 치료를 뜻할 때 쓰이는 단어이다. 이 논문에서는 특별히 용어 사용에 따라 의미를 달리하지 않는다. 다 동일한 어의를 갖는 것으로 간주한다. 신유는 신적인 치료 또는 신적인 치유라는 뜻으로 사용된다. 신유에 대한 논의가 이렇게 신적인 것인가 아니면 인간적인 것인가 하는 구분이 단순하게 구분되는 것은 아니다. 내적 치료나 대체 의학의 영역에서 본다면 의학적 치료와 신적 치료가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다는 어려움이 있다. 그럼에도 이 논문에서는 애써서 신유라는 용어를 세밀하게 정의하지 않고 사용한다.
신유는 기독교의 오랜 실천 가운데 하나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일의 일환으로 병자를 고치시고 완쾌시키는 일을 집중적으로 행하셨다. 네 개의 복음서가 흠정역본에 의하면 총 3,764절로 되어 있다. 이중 마태복음은 총 1,058절 중 99절이 치유에 관한 구절이고(이후 1,058/99의 방식으로 표기), 마가복음은 678/139, 누가복음은 1,149/134, 그리고 요한복음은 879/112로 구성되었다. 이 구절들을 다시 사건을 기록하는 이야기와 예수님의 직접적인 대화와 관련된 구절로 나누면 치유에 대한 비중은 한층 높아진다. 이야기와 관련된 구절은 1,257절로, 각 복음서에서 치유와 연관된 비율은 다음과 같다. 마태복음이 267/99(40%), 마가복음이 339/139(40%), 누가복음이 339/134(35%), 요한복음이 312/112(33%)의 비율을 보인다.2)
사도행전 교회의 사도들도 마찬가지로 신유의 실천을 하였다. 사도행전 전체가 사도들의 축귀와 치유의 사역을 통해 말씀이 전파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설사 사도행전 전체의 구절에 대비한 치유에 대한 구절의 비율이 4.5%에 불과하더라도3) 사도행전 전체에서의 사건의 비율은 상당히 높다. 12제자들에 의한 신유 사역은 바울의 사역에도 여전히 나타난다. 사도행전 이후의 초대교회에서도 이런 신유 운동은 여전히 중요한 기독교의 실천이었다.
그럼에도 신유 사역과 운동이 신학적인 논쟁의 문제로 등장하는 이유는 사도행전 이후에는 더 이상 이런 신유가 없어졌다는 역사적 판단에 대한 논쟁 때문이다. 신유가 성서적인 근거를 가진 실천적 은혜이며 은사이기 때문에 오늘도 여전히 성서에 나타난 동일한 역사가 일어난다는 측과 사도행전 시대에 이 은사는 끝이 났음으로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는 주장을 하는 측이 대립을 한다.4) 은사가 사도행전에 국한되었다는 측의 사람으로 프리스턴 신학교 교수였던 워필드(B. B. Warfield)5)와 에버딘의 그리스도교 대학의 교회사 교수로 있던 맥윈(J. S. McEwen)6)이 있다. 이들은 사도행전 이후 교부 시대에 신유의 역사가 얼마나 나타나는지를 연구한 결과 별로 없었다는 주장을 한다.
반면에, 에블린 프로스트(Evelyn Frost)7)는 초대교회 역사에 얼마든지 치유의 사역이 나타나고 있음을 반증한다. 사도행전 이후에도 신유가 계속되었다는 입장을 지지하는 학자들은 60년대 이후에는 대표적으로 세 사람을 들 수 있다. 버나드 마틴(Bernard Martin)8), 1992년 이래 기독교 치유 사역(Christian Healing Ministries)이라는 단체를 설립하고 활동하는 프란시스 맥너트(Francis MacNutt)9), 인디애나 노틀담 대학교 교수인 몰톤 켈시(Morton T. Kelsey)10)가 있다. 이 사람들 뒤로는 오순절 계열의 학자들이 이런 입장을 적극 지지한다. 필자의 연구도 초대교회에 많은 신유의 역사가 있음을 보고하였다.11)
이런 대립은 단순하게 성서 해석의 차이를 보이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신유를 중심으로 해서 교회가 어떤 현실적 사역에 더 치중하고 목표를 삼아야 하는가에 대한 결정을 해야 하는 문제가 된다. 신유를 인정하는 것과 안 하는 것에 따라 교회가 현실에서 사역을 펼쳐나가는 기본적인 영역과 방법이 달라진다. 신유의 사역을 인정하는 교회는 그만큼 현실에서 초자연적인 사역에 대해 개방적인 모습을 띠게 되고, 반면에 이 사역을 인정하지 않는 교회는 그만큼 교회의 사역을 창조의 자연적인 영역에서 하게 된다.
3. 주류 교단들의 신유에 대한 일반적 입장
신유의 현대적 필요성을 놓고 거의 모든 교단은 명확하게 어느 한쪽만 지지하는 극단적 결정을 하지 않는다. 한 쪽의 “경향성”을 강하게 띠는 경우에도 명확하게 구분하여 극단적 입장을 취하는 것은 아니다. 극단적 입장은 대부분 교단의 공식적인 입장과는 상관없이 목회자 개인이나 교인 개인의 신학과 취향이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이런 가운데서도 일부 교단들은 전인적인 건강의 개념을 전제로 하고 난 다음 신유를 분명하게 교단의 사역의 목표로 삼고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음을 본다. 주로 성결교회 및 오순절 계열의 교단 교회들은 신유를 교리의 핵심 내지 전도의 핵심 내용으로 삼는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전체적으로 제 2차 바티칸 회의 이후에 보다 현대 문명에 대해 적극적인 자세로 나와 병원 사역이 단순하게 수녀들과 자원봉사자의 영역이 아닌 보다 전문화되고 과학적인 의술 치료를 주장한다. 이들의 신학의 학문적 관심은 북 아메리카 지역에서는 낙태에 대한 사회적 논쟁의 심화의 결과로 의학 윤리에 초점이 주어졌다.12) 그러면서도 교회 한편에서는 여전히 성례를 통한 치유를 행한다.13) 카톨릭 교회가 워낙 방대하다보니 그 소속된 사람들의 다양성을 생각해보면 능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14)
동방 정교회는 예부터 지금까지 “신학적으로 훈련된 의사, 과학적 의술에 대한 존경, 하나님의 치유 능력에 대한 신뢰, 성인들을 통한 기도, 기적적인 것에 대한 믿음, 환자를 위한 기도, 치유의 성례”15)를 중시한다. 한편으로는 전통적인 신유를 위한 기도를 통해 초자연적인 역사를 기대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과학적인 치유의 영역을 인정한다. 동방 정교회는 기도를 통한 신유를 안수 기도보다는 예전적 예배의 참여를 통해 이루어진다고 믿는다.16)
개신교 개혁의 종주였던 루터교는 오늘날에도 마틴 루터의 입장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루터는 인간을 영원히 의인이자 죄인으로 본 것처럼 인간에게는 건강과 질병이 동시적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하였다. 인간의 이런 모습에 따라 하나님의 돌봄(caring)과 치유(curing)의 과정이 있고 이 과정에는 의학적 치료와 기도가 동시에 필요하게 된다.17) 루터는 처음에는 초자연적 신유보다는 과학적 의술에 더 많은 비중을 두었다. 루터 자신은 결석으로 인해 평생을 고생하였다. 그는 자신의 아들 폴(Paul)을 삭소니와 브란덴부르크의 영주의 궁전 의사로 봉직하게 하였다. 중세교회의 미신적인 상황을 많이 보았던 그에게 신유의 사역은 너무도 많은 미신적인 요소들이 내재해 있다고 간주하였다. 정부의 보조로 공중 병원을 설립하도록 애를 썼다. 이런 전통은 경건주의의 산실인 할레 대학에도 이어졌다. 할레 대학은 독일 내의 대학으로서는 처음으로 의학 기관을 세우고 첫 번째 의학과 교수로 호프만(Friedrich Hoffmann)과 스탈(Georg E. Stahl)을 채용하였다. 이런 전통은 독일의 의학을 전 세계의 최고의 권위를 가지도록 성장시켰다. 현재도 국가적인 관심과 교회의 관심은 사회 제도 면에서 의학이 낙태, 노인, 결혼 등에 놓여있다.18) 루터는 그러면서도 의학이 인간 질병을 치료하는 최종적 수단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여전히 인간에게는 하나님께 병을 고쳐달라는 기도의 수단이 남아있음을 인식하였다. 현대에 와서 루터교 내에서도 카리스마 운동에 관심 있는 사람들은 믿음을 통한 치유를 강조하며 이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19)
신유를 강조하는 요한 웨슬레의 전통을 따르는 미국과 유럽의 감리교회는 신유에 대한 강조가 20세기로 넘어 오면서 약해지기 시작하였다. 한 연구는 1954년 감리교 교역자의 29 퍼센트만이 영적 치유를 행하였다고 보고한다.20) 감리교회는 지난 30여 년간 신유가 제한적인 의미에서 자연적이고 과학적인 치료에 보충할 수 있는 것으로 간주해왔다.21) 신유를 특별히 강조하던 사람들은 영국의 웨더헤드(Leslie D. Weatherhead), 워렐(Olga Worrell), 1968년 감리교에 들어왔다 다시 탈퇴한 오랄 로버츠(Oral Roberts) 등이다.
개혁교회와 침례교회는 전반적으로 인간의 통전적인 건강을 위해 균형 잡힌 치유의 개념을 가질 것을 주장한다. 이들 교단들은 대체적으로 사도행전 이후 교부들 시대에는 기적이 중지되었다고 보는 입장을 표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신유의 미신적인 요소들에 대해 매우 강렬한 어조로 비난한다. 칼빈을 따르는 교회가 건강과 신유를 역동적인 관계를 유지해왔다고 주장해도22) 전반적으로는 초자연적 치료를 기대하는 것보다는 더 많은 관심과 에너지를 과학적 의술의 발달과 국가의 사회 보건 시설에 투자할 것을 주장한다. 침례교회는 건강과 신유를 중심된 과제로 삼지는 않았다. 전도하고 교회 건축하는 일에 더 많은 신경을 써왔다.23) 그럼에도 초기에 의학과 기도의 조화의 전통을 잃지 않는다.
4. 미국 내의 주된 신유 운동
주류 교단들이 신유에 대해 우호적인 태도를 취함에도 사실은 교회가 온힘을 내어서 활동하는 운동은 아니었다. 신유에 대해 개방하는 자세는 인간의 한계성에 대한 소극적 반성이지 신유에 대한 적극적 개방은 아니었다. 이미 언급한 데로 신유 운동은 성결/오순절 교단을 제외하고는 교단 전체의 운동이라기보다는 개인적인 운동의 성격이 짙다. 이런 개인적인 운동이 같은 성향의 사람들로 연합하여 초교파적인 운동의 성격으로 발전하게 되고 있음을 본다.
이 논문은 주된 신유 운동에 대한 보고를 채플(P. G. Chappell)의 구분법에 의한다. 채플의 구분법을 택한 이유는 신유 운동에 대한 그의 보고의 마지막 부분을 오순절 운동 이후의 사람들 소개로 잘 정리하였다고 보여지기 때문이다. 이미 박명수 교수의 “20세기 신유운동의 역사와 신학”24)이라는 논문이 전후의 오순절운동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어서 가능한 한 중복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소개하고자 한다. 특히 오순절 계열 사람들의 신유 운동은 박명수 교수의 논문에서 잘 다루어지고 있어서 가능한 한 이 논문에서 다루지 않으려고 한다.
채플은 1960년대를 기준해서 카리스마 운동이 극적으로 확대되기 시작했다고 본다. 물론 카리스마 운동의 핵심에 신유 운동이 들어있다. 그러나 카리스마 운동의 신유 운동은 앞 세대의 부흥사들의 신유 운동과는 다르다. 하렐(David Edwin Harrell, Jr.)에 의하면 1940-60년대까지 신유를 중심으로 한 부흥 운동이 오순절 계열의 사람들이 중심되었지만 지도자들의 도덕적 타락 등으로 이 운동은 60년대에 와서 “신오순절적”(neopentecostal) 운동에 의해 도전받게 되었다. 더 이상의 교단 중심보다는 독립적인 성격이 강하게 나타났다. 특히 신유 운동이 이제부터는 “만화경적인 패턴”(kaleidoscopic pattern)25)으로 변하게 되었다고 진단한다. 70년대 중반에는 외적인 신유 운동이 오순절 계열이 아닌 사람들에게 확산되었다. 당연히 확산의 일차적 공헌을 오순절 사람들에게 돌려야 되지만 반면에 오순절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으로 더 이상 자신들을 오순절이라고 부르지 않는 사람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채플은 오순절 밖의 이런 신유 운동을 네 가지 운동권으로 나눈다.26)
첫째 운동권은 성공회와 로마 카톨릭 교회의 인물들로 존 버톨루치(John Bertolucci) 신부와 프란시스 맥너트(Francis McNutt)이다. 이들은 샌포드(Agnes Sanford)의 신유 사역에 영향을 받았다고 본다. 이들은 주로 예전적인 기도를 통해서 역사가 일어난다고 본다. 소위 “젖어드는 기도”(socking prayer)란 치유의 은혜가 마치 물이 점차로 젖어들어 오듯이 점진적으로 육체를 지배하게 된다는 것이다. 맥너트는 질병의 유형이 영의 질병(개인적인 죄로 인해서 영혼이 병이 듦), 감정의 질병(과거의 고통스러운 감정적 상처로 인해서 정서적 어려움을 겪음), 육체의 질병(사고나 질병이 원인이 됨), 사탄의 지배에 의한 질병(위 세 가지 이유가 없음에도 생기거나 또는 위의 병과 함께 사탄의 지배를 받음으로 생기는 병)으로 구분하고 각 유형에 따라서 맞는 기도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영의 질병을 위해서는 개인적인 죄를 회개하도록 촉구하고, 감정의 질병을 위해서는 내적 치유를 비는 기도를 해야 하며, 육체적인 질병을 위해서는 단순하게 육체의 치유를 위한 기도를, 사탄으로 인해 생긴 병을 위해서는 귀신을 쫓아내는 기도를 해야 한다고 구분한다.27) 어떤 면에서 본다면 이들은 교회의 대표적인 예전인 세례가 형식적이었던 것에 다시금 내용을 넣어서 세례가 가지고 있던 원래의 기능을 회복하려는 운동으로 볼 수 있다.
두 번째 운동권은 ‘신앙 운동’(Faith Movement) 또는 ‘말씀 운동’(Word Movement)라고 부르는 운동이다. 이 운동은 교단 교회 밖의 운동으로 주로 복음주의적 부흥주의(evangelistic revivalism), 근본주의적 문자주의(fundamentalistic literalism), 오순절적 경험주의(Pentecostal experientialism) 계열의 사람들의 연합 운동이다.28) 대표적인 사람으로 케네스 하긴(Kenneth E. Hagin)29)을 든다. 하긴의 라디오 방송은 180 여개의 타 방송사에 프로그램을 제공하며 레마 성서 훈련 센타(Rhema Bible Training Center)에는 이천여명의 학생이, 그리고 홍보지인 잡지 Word of Faith는 거의 20만부의 구독자를 확보한다. 하긴의 영향 아래 케네스 코플랜드(Kenneth Copeland),30) 프레드 프라이스(Fred Price),31) 노벨 헤이스(Norvel Hayes),32) 로버트 틸튼(Robert Tilton),33) 챨스 캡스(Charles Capps),34) 제리 세이블(Jerry Savelle)35) 등이 이 노선에 동조한다. 이 운동을 ‘말씀 운동’ 또는 ‘신앙 운동’이라고 하는 이유는 말씀을 입으로 고백하는 힘, 또는 신앙을 고백하는 힘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신앙을 고백하면 모든 질병에서 벗어나며 축복의 삶을 살게 된다는 강조를 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효과는 단지 우리의 죄만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를 질병으로부터 회복시키신다고 본다. 신유를 구속의 필연적인 한 영역으로 포함시킬 경우 그 역논리에 위험성이 도사리고 있음이 경계된다. 구속 받은 사람이 건강해질 수 있는 것은 능히 이해가 가지만 반대로 건강하지 않은 사람의 경우를 구속과 연관시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즉 건강하지 않은 사람은 구속받지 못한 사람으로 오해되기 쉽다는 것이다. 이미 이런 관점에 대한 논의는 한 세기 전에 있었던 “대속 안에 있는 치유”36)의 논쟁의 재론이 될 여지가 있다.
세 번째 운동권은 피터 와그너(Peter Wagner)가 부르는 “제 3의 물결” 운동이다. 와그너는 자신이 첫 번째 물결은 오순절 운동으로, 두 번째 물결을 은사주의 운동으로 명명하고 제 3의 물결은 무엇이라고 규정짓지는 않았다. 존 윔버의 제자들인 죠지 엑카르트(George Eckart)와 캐시 쉘러(Cathy Shaller)에 전통적인 복음주의 교회 안에서 치유사역을 실습하게 하였다.37) 이 운동에 속한 사람들은 보수적인 복음주의 계열의 사람들로 성령의 능력의 체험을 오순절 계열의 사람들과는 다르게 경험하는 것을 주장한다. 보통은 피터 와그너와 다음에 소개할 존 윔버(John Wimber)와 함께 묶어 소개하지만 채플은 피터 와그너를 따로 떼어 소개한다. 채플이 이렇게 구분한 것은 아마 윔버는 독립교회의 성격을 띠었다면, “제 3의 물결”의 사람들은 여전히 전통적인 교단에 속해 있기를 원한다는 면에서의 구분일 것이다. 와그너는 자신의 신앙의 경력을 통해 당시 퀘이커 파의 목사였던 존 윔버를 만난 것이 제 3의 물결이라고 명명하는 성령의 역사를 실천하게 된 계기였다고 말한다. 두 사람이 풀러 신학교에서 함께 “표적, 기사, 교회 성장”(Signs, Wonders and Church Growth)라는 과목을 가르쳤고 많은 면에서 동일한 길을 걸어가고 있지만 와그너는 보다 학문적인 면을 견지하고자 한다. 이런 경향 때문에 보수적인 달라스 신학교(Dallas Theological Seminary)의 교수 세 명이 이 운동에 가담을 하였다.38)
네 번째 운동권은 독립교회들로 구성된 운동이다. 어떤 제도적인 연계보다는 목회적 실천의 방향이 같아서 같은 노선을 걷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찬양과 경배’를 강조하고 신유를 적극적으로 실천한다. 이 운동권의 대표는 빈야드 교회의 존 윔버39)이고 래리 리(Larry Lea, the Church of Rock of North America)40)와 도어티(Billy Joe Daugherty, Victory Ministry Fellowship)41)가 함께 한다. 존 윔버는 제 3의 물결 운동을 앞의 두 단계와 차이가 난다고 주장한다. 윔버에 의하면 제 1의 물결인 오순절주의는 “분명하게 규정된 경험, 신학, 그리고 결과”42)를 가지고 있었고, 방언을 성령 세례의 확실한 증거로 삼는다. "성령의 세례"(Baptism of the Holy Spirit)의 운동이다. 제 2의 물결은 방언을 성령세례의 필수적인 것으로 보지는 않고 “성령 안에서 세례받아지는 것”(being baptised in the Holy Spirit)으로 간주된다.43) 제 3의 물결은 “성령충만”(filled with the Holy Spirit) 또는 “성령에 의한 능력의 덧입힘”(empowered by the Holy Spirit)으로 표현한다.44) 윔버는 성령충만을 어느 한 순간에 완성되기 보다는 영적 성장 과정에 있어서 하나의 중요한 단계로 인식한다. 그는 이 물결이 “온전케하는 물결”(equipping wave)이 되어 단순하게 은사 운동의 일환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은사를 경험하면서도 성도들의 전체 삶을 온전케하는 사역으로 전환될 것이라고 한다.45) 제 1의 물결이 교역자 중심으로, 제 2의 물결이 평신도 지도자 중심으로 진행되었다면 제 3의 물결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능력 사역(power ministry)을 할 수 있도록 훈련한다는 것이다. 모든 교인들이 다 신유의 사역을 행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5. 신유 운동의 필요성 재확인
한국교회 입장에서 위에 열거한 신유 운동을 어떻게 평가해야 하느냐는 것은 교단과 개인의 신학적 입장에 따라 상당히 다르다. 특히 위에서 언급한 세 번째와 네 번째 운동은 한국교회에도 상당히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운동이기 때문에 그 판단이 사실 어렵다. 극단적으로 비난하는 측, 위험성은 있으나 선별해서 배우자는 측, 그리고 무조건 환영하고 지지하는 측으로 구분할 수 있다.
비난하는 측의 주장은 은사란 인간 삶의 전체에서 지극히 작은 한 부분이기 때문에 보다 중요한 강조는 성령의 열매 맺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외적이고 가시(可視)적 현상을 성서의 현상으로 간주해서 교리화 하는 위험성도 있고, 또 지금 당장 능력이 나타난다고 반드시 최종 승리를 보장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위험성이 너무 많다는 지적을 한다.46) 이런 비난은 비단 빈야드 운동에 대한 비난만은 아니다. 신유 운동을 하는 사람들 전체에 대한 비난일 수도 있다. 존 맥아더(John MacArthur)는 은사주의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잠재의식 속에 심어넣는 영성”(subliminal spirituality)을 하고 있다고 비난한다.47) 즉 한번의 잠재의식의 조절을 통해 성화(sanctification)에 이른다는 생각을 신유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다고 비난한다. 신유 운동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들의 공통적인 지적은 성령의 역사를 너무 은사 중심이고 외적인 징표로 삼음으로 균형 잡힌 성령의 역사 이해에 장애가 생긴다는 점이다.48) 사실 기적적인 표적으로 믿음을 경험하는 것에 집착할 위험성이 있고, 외적인 표적이 없으면 믿음이 없는 것으로 간주될 위험성을 안는다.
이런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신유 운동을 강조해야할 이유가 있다. 무엇보다는 이 신유 운동이 성서적인 실천이기 때문이지만, 여기서는 신학적인 논의는 삼가고 의학계에서 제기하는 문제를 다루면서 그 필요성을 말하려고 한다. 오늘날 의학계에서 제기하는 기도와 명상이 육체 및 정신 치료에 어떤 영향이 있는가 하는 문제 제기에 어떤 형태로든 신학은 대답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의학계의 임상 연구에 따르면 정기적으로 예배에 참석하고, 개인적으로 기도하고, 하나님과의 관계 및 다른 사람과의 사회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의 94%가 치료와 건강에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49)
이런 유의 의학 연구는 요즈음 수없이 많다. 과장해서 말한다면 이제는 기도를 교회보다는 병원에서 더 권장하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이다. 아직 국내의 의학계는 이런 면에서 관심이 덜 하지만 서구의 의학계는 대체 의학의 일환으로 명상과 기도에 관한 논의에 열심을 낸다. 그리고 기도와 영적 실천이 물리적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이유를 다음의 몇 가지로 추측을 한다. 종교 단체가 가지고 있는 금욕주의적 습관, 종교 단체가 소속원들 사이에서 맺는 사회적인 관계, 예배와 종교적 신념이 갖는 정신 역학(psychodynamics), 신앙의 정신 역학이 갖는 플라시보 효과, 안수 등이 갖는 면역 반응의 증진 등을 제시한다.50) 의학계에서 가지는 결론은 기도의 효과를 통해 얻게 되는 치유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간섭에 의한 치유가 아니라 인간에게 내재한 능력의 증진으로 생긴다는 것이다. 의학과 영성의 상호 협력을 주장하는 한 의학측의 주장에 따르면 “영성”이란 사람이 다른 동물들과 구분되어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특성, “반성을 할 수 있는 능력, 인간관계를 맺을 수 있는 능력, 감정적인 애착, 기억과 기대를 할 수 있는 능력, 자기를 인식하는 능력”51)을 뜻한다. 초자연적인 영역에 대한 용어라기보다는 인간의 내적 영역에 대한 용어로 영성이란 말을 사용한다. 이제 인간의 DNA 해부도를 완성되면 모든 질병의 치료가 인간 손 안에 놓이게 된다고 믿는다. 외부적으로는 명상과 기도를 말하기 때문에 육체적 영역 너머의 영적 세계를 인정하는 것 같아도 실제 내부적으로는 이제 더 이상 인간의 영역에서 초자연적 개입을 인정하지 않는 결과를 가져온다. 마틴 로이드 존스(Martin Lloyd-Jones)가 “기술적인 의학과 첨단 치료 요법이 제공해 줄 수 있는 것을 뛰어넘어서... 전인적인 온전한 인간이 될 수 있는 유일무이한 바로 그 길”52)은 영적인 영역에서 찾아야지 의학적인 실험과 기술적 치료에서 찾아서는 안 된다는 지적은 정당하다. 로이드 존스는 교회가 의학의 한 분야로 전락해서 안 된다는 점을 반복해서 분명히 한다.53)
의학의 이런 은밀한 유혹 외에도 교회의 신유 운동에 혼돈을 주는 영역이 있다. 한편으로 도움을 받으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마찰이 될 수밖에 없는 영역인 심리학이다. 기독교적 신유가 전인적인 건강을 위한 노력으로 이해한다면 심리학이 신유의 영역에서 제외될 수 없다. 심리학은 인간 실존의 심층을 이해하고 치료 기법으로 인간 속사람에게 얽혀있는 문제의 타래들을 풀어냄으로 인간에게 건강을 수여 한다. 심리학과 신앙이 만나면서 요즈음 각 신학교마다 목회상담을 근간으로 하여 여러 형태의 심리적 치료의 영역들이 확대되어 가고 있다. 전인적 치료라는 이름으로 내적 치료, 가족 치료, 기도 치료, 찬양 치료 등등의 관심이 한국교회 .전체에 크게 고조되고 실천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리학적 접근의 이런 좋은 공동작업의 한계성이 종종 문제시 된다. 치료가 신앙에 의한 초월적 치유인지 아니면 인간에게 내재한 능력의 나타남인지 그 한계 영역을 구분하는 것이 어려워졌다. 이 한계 영역을 분명히 하지 않으면 최면술이나 유사 심리학적 접근에 의한 치료도 여과 장치 없이 신앙 치료에 도입될 여지가 있다.
신유 운동은 전인적 건강의 개념에서 출발하고 성서적인 원리에 따라 실천되어야 한다. 인간의 이성이 하나님의 역사의 한계를 결정하는 일이 없어야겠지만 신비적 치유라는 이름으로 모든 비지성적인 활동이 다 용인되어서도 안 된다. 특별히 한국 교회에서 신유 운동을 강조하는 것은 상당한 위험성을 안고 있다. 무엇보다도 이단적인 사상과 활동을 하는 교회 밖의 이단적 인물들이 모두 신유 운동을 통해 저들의 세력을 확장하고 있기 때문에 이들 이단들과 연관이 있는 활동으로 오해되기 쉽다. 이들 이단 가운데는 할렐루야 기도원의 김계화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할렐루야총회라는 별도의 교단을 만들고 활동하고, 성락교회의 김기동목사, 만민중앙교회의 이재록목사, 이초석목사 등이 신유를 매개로 하여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 이들 외에도 아직 검증이 되지 않은 많은 신유 운동에 관련된 목사들이 많이 활동하고 있다. 이들은 특정 교단에 분명하게 소속되어 있지 않고 독립적으로 자체의 선교단을 구성하는 특징을 보인다. 출신 배경과 학력이 분명하지 않다. 요즈음은 인터넷을 통해 활발하게 선전을 하며 활동을 한다. 한국 교회가 신유 운동에 보다 열심을 내야한다는 주장은 과학을 무시하거나 인간에게 주신 이성이나 내재적 능력을 경시해서도 아니다. 교회가 병의 치료를 의학에 넘기는 동안 의학은 신학을 그저 대체 의학의 한 분야로 간주하고, 아직도 신유를 바라는 사람들은 이단적인 단체로 내몰리고 있기 때문에 더욱 이들을 교회에서 수용하려면 보다 적극적인 자세로 신유 사역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
교단 시작부터 신유를 전도의 중요한 표제로 삼고 나왔던 성결교단의 활약이 기대되는 시점이다. 그간 한국의 많은 신유 운동이 세심한 전인적 목회 지도나 신학적이고 영적인 지도를 할 수 없는 개인들에게 맡겨짐으로 피해를 양산했다면 이제는 보다 깊은 신학적 이해와 교단적 관심 아래서 신유 운동을 전개할 때이다. “신유는 더 이상 오순절 운동이나 은사운동의 점유물이 아니다.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을 위한 하나님의 뜻이며 교회의 양적, 질적 성장을 이루는 역동적인 동인인 것이다.”54)
방성규 (한영신학대학교 교회사 교수, 기독교영성연구소 연구위원)
'기독칼럼·논문·서적 > 기독논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장묘문화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 및 새로운 제안 (0) | 2008.11.25 |
---|---|
교회개혁의 의의와 방법에 대한 고찰 (0) | 2008.11.25 |
구약 외경 및 위경 연구 (0) | 2008.10.15 |
救贖史觀과 世界史觀 (0) | 2008.10.15 |
장렬히 순교했던 초대교회 교인들의 신앙 (0) | 2008.09.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