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묘문화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 및 새로운 제안
- 화장문화 도입을 우려하며 -
달구벌기독학술연구회
제8회 정기학술발표회
2000년 9월 30일 14:00 이광호(철학박사)
[서론]
1. 장묘문화의 다양성
2. 우리의 전통적 매장문화의 문제점
3. 화장문화 도입에 따른 문제
4. 성경이 보여주는 장묘문화와 그 의미
5. 장묘문화에 대한 새로운 제안
[결론]
[서론]
우리 시대에 와서 장묘문화는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전 국토 가운데 상당한 면적이 이미 묘지로 뒤덮여 있으며, 해마다 서울 여의도의 두 배에 해당하는 면적이 묘지로 잠식되어 가고 있다고 한다. 계속 이런 식으로 되어간다면 10년이 지나면 더 이상 묻힐 자리가 없을 지경에 처하게 된다고 한다.
그에 대한 하나의 대안으로서 내어놓은 것이 화장문화의 도입이다. 이러한 대안은 일반 시민들 뿐 아니라 기독교계에서도 동일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1998년 12월 16일에는 ‘기독교 화장장려 운동본부’가 발족하였는데 곽선희, 옥한흠, 이동원, 최홍준, 박종근, 최일도 목사 등 나름대로 기독교에 영향을 끼치는 인사들이 그 발족위원이었다. 그들은 ‘화장은 기독교의 부활신앙에 전혀 위배되지 않는다’며 목회자들이 앞장서서 화장문화 도입에 앞장서 줄 것을 당부했다. 그 이후 ‘화장유언 남기기 운동’ 등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현재적 형편에 의해 도입되어도 좋을 문화가 아니라 신학적 검증을 통해 좀 더 신중히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이다.
성경은 매장을 주로 보여주고 있으며 화장에 대해서는 부정적이다. 기독교는 전통적으로 화장을 금했으나 근래에 와서 화장에 대한 개방적 자세를 취하고 있는 형편이다.
우리의 현실을 고려해 볼 때 어떤 형식으로든 대안이 있어야 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어떠한 경우에도 세태에 휩쓸려가는 무책임한 자세를 취해서는 안된다. 성경에서는 그에 대해 어떤 교훈을 주고 있는가 하는 점을 잘 따져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 결과 신학적 검증을 통해 우리의 방법을 제시해야만 할 것이다.
따라서 필자는 이 글에서 장묘문화의 다양성, 우리의 전통적 매장문화의 문제, 화장문화 도입에 따른 문제, 성경이 보여주는 장묘문화와 그 의미, 장묘문화에 대한 새로운 제안 등을 골자로 생각을 전개하고자 한다.
1. 장묘문화의 다양성
1) 장묘방법에 따른 다양성
- 장묘방법이 다양하지만 거의 모든 방법은 인간의 종교성에 기인한다. 즉 사람이 죽은 이후 ‘생명의 회귀’에 대한 어떤 종교적 개념을 가지고 있다. 죽은 사람의 시신을 집밖의 영역에 단순히 처분하는 것이 아니라 장례와 장묘를 통해 죽은 자의 생명을 자연 속에 지속시키는데 살아있는 사람들이 참여하는 것이다.
(1) 풍장(風葬)
풍장이라 하면 죽은 자의 시신을 들판이나 산 속, 혹은 동굴 등에 두게 된다. 그러면 세월이 지나는 동안 시체가 비바람에 자연히 썩어 없어지고 흙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북 아시아, 동남아시아, 멜라네시아, 호주, 북미의 원주민들에게서 볼 수 있는 풍습이다.
(2) 조장(鳥葬)
조장은 죽은 사람의 시신을 들판이나 산 속에 버려 두어 새가 와서 뜯어먹게 하는 장례 방법이다. 거기에는 사실 그렇게 함으로써 죽은 사람의 생명이 새와 같이 새롭게 태어난다는 사상이 내포되어 있다. 몽골의 경우, 나무 위에 시신을 올려놓고 새들이 와서 쪼아먹게 한다.
(3) 화장(火葬)
시신을 불에 태워 그 뼈를 모아 장사지내는 장례방법이다. 그 뼈를 따로 모아 묻기도 하고 납골당에 안치하기도 한다. 한편, 뼈를 추려 가루로 만든 후 강이나 산 등에서 바람에 날려 보내기도 한다.
(4) 매장(埋葬)
시신을 땅에 묻는 장례 방법이다. 이는 인류의 장묘문화의 가장 오래된 전통이기도 하다. 매장에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것처럼 시신을 땅에 눕히기도 하지만 호주나 뉴질랜드 같은 지역에서는 시신을 세워서 매장하고 있다. 그리고 미국 같은 나라는 평장을 하고 있으며 중국에서 매장을 하는 사람들은, 농지에 매장시 땅속 깊이 시신을 매장한 후 그 위에서 계속 경작을 한다. 매장을 하는 지역에서는 시신이 빨리 잘 썩는 것을 복으로 생각한다.
(5) 수장(水葬)
죽은 사람의 시신을 물에 띄워보내거나 물 속에 넣어 지내는 장례방법이다. 물이 만물의 근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장묘방법이라 할 수 있다.
(6) 고려장(高麗葬)
고려장은 지금은 사라진 장례방법이다. 고려장은 인간세계에서의 삶을 거의 마쳐간다고 판단되는 산 사람을 산이나 들판에 가져다 둠으로서 생명을 마감하게 하여 죽으면 그곳에 매장하는 방법이다.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면 인간으로서 있을 수 없는 잔혹한 방법으로 여겨지지만 그런 시대의 문화에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 올바른 장례문화로 받아들여졌던 특이한 장례방법이다. 고려장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이 ‘불효’의 결과가 아니라 ‘효’의 결과임을 생각해야 한다.
2) 종교에 따른 다양성
- 종교와 지역, 시대에 다른 다양한 장묘문화가 있어왔다. 특히 다양한 각 종교들은 죽은 자의 사후 세계를 제시하기 때문에 많은 역할을 할 수밖에 없다.
(1) 이슬람 지역
이슬람에서는 일반적으로 매장풍습을 가지고 있다. 시신을 매장할 때 얼굴 오른 편은 메카를 향하도록 한다. 죽은 시신을 묻은 다음 조그만 비석을 세우기도 하고, 종교적인 지도자들의 무덤 가운데는 커다란 봉분을 하기도 한다. 대개 공동묘지에 평장을 하는데, 개인이나 가족묘지가 따로 없다.
(2) 불교 지역
불교의 영향을 받은 지역 가운데 많은 지역은 화장문화를 도입하고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예외적이기는 하지만 불교에서는 승려가 죽으면 화장을 하는 것이 보통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다비’(茶毘) 라는 말은 화장을 뜻한다.
그러므로 불교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중국의 경우 99%가 화장을 하고 있으며 일본과 태국도 97%, 90%가 화장을 하고 있다. 불교에서 매장을 할 경우에는 시신의 머리를 북쪽을 향하도록 하는 특색이 있다.
(3) 힌두교 지역
힌두교에서는 주로 화장을 하며 화장한 재를 강이나 호수 등에 뿌린다. 가끔 어린이나 종교지도자들의 경우 매장하기도 한다.
(4) 조로아스터교
조로아스터교에서는 전통적으로 조장(鳥葬)을 했으며 지금도 조장을 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2. 우리의 전통적 매장문화의 문제점
1) 풍수지리설의 폐해
풍수지리설은 매장을 통해 국토를 무분별하게 잠식해 들어가는 근원적 요소이다. 전체적 국토의 개발이나 환경조건 보다는 개인이나 개별 집안의 이기적 욕망으로 인해 자의적으로 묘지를 쓰고 있다.
특히 좌청룡 우백호 등의 산세를 보아 소위 음택(陰宅)을 본다는 것은 매장문화의 극심한 폐해라 할 수 있다.
2) 봉분문화로 인한 문제점
우리 매장문화에 있어서 봉분문화는 묘지의 자리를 엄청나게 많이 차지하게 한다. 우리나라 묘지의 평균면적이 15-20 평1)이나 되는 것은 봉분을 중심으로 한 장묘방법으로 인해 생겨나는 것이다.
3) 죽은 조상에 대한 ‘효’와 연관된 과시성의 문제
우리 문화에 있어서 죽은 조상에 대한 ‘효’사상은 매장문화에 엄청난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러므로 조상이 죽으면 가급적 좋은 자리에 많은 돈을 들여 대형 묘지를 쓰기를 원한다. 돈이 있어 형편이 되는 사람들은 자기 형편에 따라 그렇게 하고 있으며 돈이 없는 사람들은 형편상 그렇게 하지 못할 따름인 것이다. 뿐만아니라 시신을 넣는 용기인 관(棺)을 사용하는 데서도 효사상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소위 상류계층의 사람들은 고급 석관(石棺)을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며, 일반적으로는 목관(木棺)을 사용하는데 고급나무에 옻칠을 하여 효심을 나타내 보이려 하기도 한다. 그러나 잘 썩는 나무를 관으로 사용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
4) 현재의 공원묘지의 한계
얼마 전부터 유행하는 공원묘지도 한계가 있기는 마찬가지이다. 몇 십 년이라는 일정기간이 지나면 묘지를 없애도록 하고 있지만 결국 그 유골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여전히 해결해야만 할 과제이다. 공원묘지에 매장을 했다가 유골을 모아 다시 납골당을 만들게 된다면 별다른 효과를 기대하지 못할 것이다.
3. 화장문화 도입에 따른 문제
1) 납골당으로 인해 예견되는 문제점
(1) 흉물(흉가:凶家)로의 전환 가능성
죽은 사람의 시신을 화장하여 납골당에 안치한다면 결국 세월이 흐르면서 그것은 흉물처럼 되어갈 수밖에 없다. 조그만 납골당에서부터 대형납골당에 이르기 까지 다양한 납골당들이 생겨날 것이며 국토 여기 저기 납골당들이 들어서면 어떻게 할 수 없는 흉물로 전락해 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2) 영구보존에 대한 욕망
현재 우리 민족의 전통이나 속성상 납골당에 안치된 유골을 한시적으로 보관했다가 일정기간이 되어 완전히 없애버리기는 어렵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조상의 유골을 납골당에 영구 보존하기를 꾀할 것이며 그렇게 되면 지금과는 다른 방식으로 국토잠식이 될 것이 뻔하다.
(3) 종교중심화의 우려
납골당은 세월이 흘러가는 동안 결국 ‘죽은 조상들의 집’이 되고 말 우려가 있다. 납골당을 장려하게 되면 이 나라 곳곳에 크고 작은 납골당이 들어서게 되고, 거기다가 돈 있는 자들의 ‘호화 납골당’과 일반 시민들의 ‘서민 납골당’이 생겨 또 다른 종교중심지로서의 폐해를 가져 올 것이다. 이는 조상숭배의 개념이 남아있는 한 피할 수 없는 문제이다.
그렇게 되면 ‘납골당’에는 사자(死者)에게 바쳐지는 향 내음이 그치지 않을 것이며, ‘납골당 꽃공해’ 마저 우려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2) 완전화장으로 인해 예견되는 문제점
(1) 핵가족과 문중의 해체
우리의 시대는 그렇지 않아도 가족이 해체되고 있는 시대이다. 과거에는 10촌 이내는 한 가족이라는 생각이 팽배했지만 지금은 4촌과도 자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없을 정도가 되어버렸다.
(2) 집안(문중)의 우애를 위한 전통문화의 해체
우리의 묘지문화는 그 동안 집안을 결속하는 역할을 해왔던 것이 사실이다. 즉, 어떤 의미에서는 죽은 자를 위한 묘지문화가 아니라 산 사람들의 우애와 결속을 위한 역할을 해왔던 것이다.
불신자들은 묘지에서 제사를 지내기 위해 일년에 몇 차례씩 만나서 교제했으며, 묘지의 벌초를 위해 약속된 날 함께 만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화장문화가 도입이 되면 더 이상 벌초를 하기 위해 집안이나 문중이 만날 일도 없어지게 될 것이며 납골당에 조상의 유골을 안치한다해도 묘지가 있을 때와는 전혀 다른 양상을 띠게 될 것이다.
결국 현대문화와 더불어 화장문화로 인해 집안의 우애를 위한 우리의 전통문화는 해체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3) 허무주의적 사고의 급증에 대한 가능성
죽은 자의 시신을 화장하게 되는 것에 익숙해 지면 ‘인간은 아무 것도 아니다’는 허무주의적 사고가 급증할 우려가 있다. 기독교에서 인간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표현하는 것은 안개와 같이 지나가는 나그네임을 나타내는 말이라면 화장으로 인해 생겨나게 될지도 모르는 허무주의는 그와는 다르다. 어떤 사람들은, 이미 동서양을 막론하고 화장문화가 도입된 나라들이 많이 있지만 그렇게 염려할 바가 아니지 않았느냐고 반론을 펼 자들이 있을 줄 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 이후 포스트모더니즘의 급격한 경험을 하고 있는 우리의 시대는 그렇지 않음을 기억해야 한다.
4. 성경에서 보여주는 장묘문화와 그 의미
1) 성경에서의 매장에 관한 예
성경에는 장묘에 관한 기록이 여러군데 나타난다. 구약성경에는 아브라함 가족의 장묘에 관한 기사가 여러차례 나오는데 매장을 하고 있다. 물론 매장의 방법은 오늘날 우리의 매장후 봉분을 만드는 것과는 다소 차이가 난다. 그들은 주로 굴에 장사를 지냈는데 그들에게도 우리의 선영(先塋)과 비슷한 개념으로서의 집안 소유매장지가 있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그들의 집안 소유 매장지에 장사되었던 것이다(창 25:9; 50:13 등 참조). 성경은 그들이 매장(buried)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장사하기 전에 사람이 죽으면 입관하는 풍속이 있었다. 요셉의 장례에서 그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창 50:26 참조). 그 이외에도 여호수아(수 24:29), 다윗(왕상 2:10), 솔로몬(왕상 11:43) 등도 매장되었다.
신약성경에는 나사로의 장례를 볼 수 있는데 그 또한 굴에 매장되었던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또한 굴에 매장을 당했으며 수의를 입혔던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나인성 과부의 아들의 시체를 관에 넣어 장례식을 행했던 기사(눅 7:11-17)도 매장풍습을 보여주고 있다. 예수께서는 사람의 죽은 상태를 ‘잔다’(요 11:11)고 말씀하셨고, 사도바울은 죽은 성도들을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살전 4:13,14) 이라고 표현했는 데 이는 매장을 전제로 한 표현이다. 이처럼 구약시대와 신약시대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성경의 장묘문화가 매장이었음을 알 수 있다.
2) 성경에서의 화장에 관한 예
성경에서 자연스러운 죽음이후에 매장이 따르는 반면 화장에 대해서는 매우 부정적이다. 구약성경에서는 언약의 저주를 받은 사람들에게는 매장이 금지된 예들이 자주 나타난다(풍장, 조장의 형태-신 28: 25, 26; 왕상 13:22; 14:10,11; 렘 16:4, 참조). 그리고 성적인 범죄와 연관된 사람들을 화장하여 죽였다(창 38:24; 레 20:14; 21:9, 참조). 성경에 나타나는 훌륭한 인물들이 매장을 당한데 비해 사울 같은 사람은 화장을 당했다. 사울왕이 자살하고 나서 나중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 그 시체를 가져다 불태우고 그 재를 묻는 모습은 화장에 대한 부정적인 면을 보여주고 있다(삼상 31:12,13). 이처럼 성경에서는 죽은 자의 시신을 화장하는 것이 이방인들이 하는 행위이며 벌하는 방법으로 사용되고 있다.
또한 시신을 불에 태우는 행위는 종종 이방종교에서 신탁을 구하며 인신제사를 지내는 것과 연관되어 있다. 성경은 이것을 죄악으로 이야기 하고 있으며 이런 죄악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진노하시고 저주하시는 것으로 나타난다(왕하 3:26; 렘 7:31-33; 미 6:7, 참조). 이처럼 성경에서는 화장제도에 대해서는 전반적으로 부정적이다.
3) 성경에서 보여주는 바 매장문화의 의미
물론 우리는 성경의 매장문화 자체를 우리가 절대로 따라야 하는 진리의 개념으로 볼 것인가 하는데는 상당한 문제가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흙으로 지어진 인간이 흙으로 돌아간다는 자연스런 이치를 생각해 볼 때 함부로 생각해 버릴 문제가 아님도 분명하다.
우리가 고려해야 할 바는 성경에서 보여주는 매장문화가 단순한 문화로만 볼 것인가 하는 점이다. 필자가 이해하기로는 기독교에서의 매장은 부활에 대한 신앙적 가치관과 연관되어 있다. ‘화장을 한다고 해서 부활을 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하는 물음에 대해서는 직접적으로 할말이 없다. 그러나 죽은 시신을 매장함으로서 묻을 때 기억되는 그 성도의 부활을 소망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죽은 사람의 시신을 인위적인 화장을 통해 그냥 없애버리는 것이 아니라 매장을 통해 자연스럽게 흙으로 동화되어 가는 과정을 기억하며 하나님께서 자기의 형상에 따라 흙으로 창조하신 인생을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되는 것이다.
성경은 인간의 죽음을 ‘잠’으로 묘사하는 데, 이는 죽은 성도의 시신을 매장함으로써 그 의미를 더욱 잘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곧 신약시대의 매장문화가 결코 부활사상과 무관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5. 장묘문화에 대한 새로운 제안
1) 평장에 대한 이해
(1) 풍수지리설에 대한 대의적 포기
풍수지리설이 있는 한 묘지문화의 개선은 불가능하다. 화장문화를 도입하거나 납골당 문화를 도입한다면 어차피 풍수지리설은 포기하는 것과 같다. 필자가 제안하는 바 평장을 하게 된다면 풍수지리설에 대한 포기를 해야한다.
(2) 봉분으로 인한 불필요한 면적 차지
앞에서 이미 언급한 것처럼 한 사람의 시신을 묻기 위해 평균 15평-20평 정도의 땅이 필요하다. 거기다가 부유한 사람들일수록 묘지와 묘지의 간격을 크게 하게 되면, 그보다 더 넓은 면적을 차지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봉분을 없애게 되면 문제가 완전히 달라진다. 이에 대해 구체적인 제안을 해 보고자 한다.
2) 구체적인 묘지 작업에 관해
(1) 묘터에 대한 완전평탄작업
현재 우리 장묘문화에서는 각 묘지가 아래로 향해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즉 묘터 자체를 산의 형세에 따라 위로부터 아래로 약간 기울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가 제안하고 있는 바를 실행하기 위해서는 완전히 평평한 평탄작업을 하는 것이 좋다. (물론 이것은 권장사항일 따름이다).
(2) 병렬식 혹은 계단식 묘지 나열이 아니라 원형식 묘지 나열 권면
현재 우리나라의 묘지 형태를 보면 무계획 산발적인 것이 보통이다. 그런 가운데서도 문중묘지일 경우 산의 위에서부터 점점 아래로 내려온다. 촌수를 보아 촌수가 높은 쪽이 산의 위를 차지하게 되고 촌수가 낮을수록 아래로 내려오게 된다. 그러므로 촌수가 낮은 사람의 묘가 촌수가 높은 사람의 묘 보다 위에 놓일 수는 없는 것이다.
이것은 달리 말하면 어느 집안의 선영(先塋)이 아래까지 다 내려오게 되면 그 산은 더 이상 묘지를 쓸 자리로서는 값어치를 잃게 된다.
여기에 혹 계단식 계획을 세운다해도 마찬가지이다. 자기의 직계 조상의 시신을, 선영의 더 나은 자리 혹은 높은 자리에 묻고자 하는 심성들이 상하좌우의 위치를 정하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병렬식은 결국 산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지 않을까?
그러므로 필자는 원형식 묘지나열을 제안한다. (타원형도 좋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평평하게 닦아둔 묘터를 원형으로 하여 빙 둘러가며 묘지를 쓰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더 나은 자리 못한 자리에 대한 개념을 줄일수 있을 것이며 촌수가 높고 낮음에 따라 묘지의 위치를 잡아야 하는 불필요한 번거로움도 덜게 되는 것이다.
위의 그림 처럼 평평한 원의 가를 따라 묘지를 쓰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우리나라 묘지의 평균면적이 15-20평이라 했을 때 하나의 묘지를 쓸 자리에 최소한 20기 정도의 묘지를 쓸 수 있다.
필자가 굳이 원형식 나열을 주장하는 이유는 병렬식으로 인한 사라지기 어려운 폐해를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병렬식이 될 경우 가까운 가족, 부부, 부자, 모자 등 죽어서도 더욱 가까이 묻히기를 좋아하기도 하며 자녀들 또한 그러한 생각을 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나아가 시아버지와 시어머니를 멀리두고 그 사이에 다른 가족이 묻히는 등, 특별한 촌수일 경우 나란히 묻히는 것이 어색하다는 생각을 여전히 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원형식일 경우 동일한 의식을 가지고 있다 해도, 나란히 묻혀있지 않지만 마주보며 묻힌다든지 하는 생각으로 상당부분 자리 문제가 해소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3) 표지석 세우기
평평한 공동의 묘터에 원심적 가장자리에 빙 둘러가면 약 20기의 묘지가 있다고 치자. 물론 이미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평장이기 때문에 봉분이 없다. 그 대신 가로 세로 약 20-30센티미터 정도, 높이 60-70센티미터 정도의 지석을 만들어 그 윗면에 <OO의 묘, 19oo - 20oo> 라는 간단한 표시만 하여 지석의 상부 15센티 정도를 남기고 땅에 묻으면 될 것이다.
그런 식으로 하게 되면 나중에 원형의 가장자리 부분에 여러 지석들이 놓여있게 될 것이다. 그것은 그렇게 흉물스럽지도 않으며 최소한의 면적에 다수의 묘지를 쓰게 될 것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다시 그 바깥 부분에 한번 더 묘지를 쓴다면 엄청나게 많은 묘지를 쓸 수 있게 될 것이다.
물론 매장지 바로 위에 세우는 지석은 석물공장에서 맞추는 깍은 돌이 아니어도 자연석을 이용할 수 있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3) 이장(移葬)에 대한 고려(考慮) 및 권면
필자는 우리 민족이 묘지 문화 개선을 위해 대대적인 이장운동이 일어나기를 기대해 본다. 현재 많은 문중들을 보면 선영을 옮겨 새로운 집안 묘터를 구해야할 실정이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산의 위에서부터 써오던 산소가 이제 거의 산 아래부분까지 왔음으로 인해 획기적인 변화가 있지 않은 한 후손들은 더 이상 그 선영에 묘를 쓰지 못하게 되어있다. 그러므로 기존의 선영은 오랜 조상들의 공동묘지가 되고 이제 새로운 묘지터를 구해야 되는데 거기에는 어차피 적잖은 경비가 들어간다. 문중의 묘터를 위해 조그만 산을 하나 산다고 해도 상당한 고액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 보다는 기존의 선산을 다시 사용하기 위해 흩어진 조상들의 묘를 한곳으로 이장하면 된다. 경비도 새로 선산을 사는 것에 비해 수십분의 일 정도밖에 들지 않을 것이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그 산은 즉시로 공원화 될 수 있다. 우리 산야에 이미 수목들이 풍성하며 여기 저기 무원칙하게 흩어져 있는 수십기의 묘들을 하나의 묘지에 해당하는 면적에 해당하는 한 곳으로 모으게 된다면 나머지 공간은 훌륭한 공원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뿐만아니라 현대사회에서 또 하나의 골칫거리로 떠오르고 있는 벌초 문제도 간단하게 해결이 된다. 해마다 벌초 할 때 즈음이 되면 흩어진 산소들을 벌초하기 위해 많은 노동력이 동원되어야 한다. 나이 많은 세대들이 이를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반면 젊은 세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 우리의 세태이다. 앞으로, 이러한 장묘문화를 두고 세대간 갈등이 일어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만일 필자가 제시하는 방법이 활발하게 일어난다면 엄청난 노동력을 동원한 벌초에 대한 염려도 깨끗이 사라지게 될 것이다.
(4) 공동의 묘터의 공원화(가족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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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묘터는 사실상 선산(先山)의 한 부분이므로 나머지 공간을 가족공원화 할 수 있다. 현재의 선산에 여러 묘지들이 흩어져 있는 것을 한 곳에 모이게 됨으로써 공원화가 가능한 것이다. 묘지의 주변에는 좋은 수목들과 아름다운 꽃들을 심을 수 있다. 고인(故人)의 교훈을 기억하기 위해 생전에 고인이 좋아하던 장미를 심는다든지, 코스모스를 심을 수도 있다. 국화나 백합, 백일홍 등 각양 꽃들을 심는다면 얼마나 훌륭한 공원이 될 수 있을까?
굳이 벌초나 제사를 지내기 위한 성묘가 아니라 할지라도 집안의 공원으로 일년 몇 차례 교제하며 즐거운 시간들을 보낼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러한 제안이 제도화하게 되면 묘지를 공원화하는 것이 아니라 집안의 공원의 한 켠에 묘지들이 있는 것으로 인식전환도 가능하리라 생각한다.
3) 후손들에게 맡겨야 할 일
오랜 세월이 흘러 조상의 묘지가 수 십년 혹은 그 이상의 세월이 흘렀을 경우 표지석을 빼버리게 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 주변과 그 묘지들의 자리에 유실수나 값어치 있는 아름드리 나무를 심을 수는 없을까?
[결론]
장례나 장묘방법에 대해 우리는 어떤 절대 윤리적 잣대를 제시하지 않는다. 현재 우리의 문화에서 볼 때 만일 누군가가 자기 부모의 시신을 조장, 풍장, 수장 등 우리에게는 생소하고 특이한 방법의 장례, 장묘 방법을 사용한다면 천하에 없는 불효로 인식될 것이다. 반대로 우리와 다른 장례, 장묘방법에 익숙한 문화 아래 사는 사람들이 부모의 시신을 매장한다면 역시 이해할 수 없는 불효자가 될 것이다.
만일 필자가, 화장도 결국은 국토의 상당부분을 잠식할 수 밖에 없으니 조장이나 풍장을 장려한다면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필자가 자연과 국토이용에 대한 염려를 하며 부모의 시신을 산이나 들에 내어 버리도록 서명운동을 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화장이 부활에 관계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조장이나 풍장 또한 부활에 아무런 상관이 없지 않은가?
장묘문화에는 절대적 철칙이라는 것이 없는 것이 사실이다. 시대나 지역에 따라 다양한 장묘문화가 있을 따름이다. 그렇지만 성경말씀을 절대기준으로 하는 우리로서는 성경이 제시하는 문화를 기억하지 않을 수 없다.
필자는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장묘문화에 대한 구체적인 한 형태를 제시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잘 고려해 보아야 할 한 형태일 따름이다. 이러한 생각을 기초로 건전하면서도 다양한 장묘문화가 형성되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화장문화의 도입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반대한다. 나아가 신학적 검증의 절차 없이 우리의 현 상황만을 보고 성도들에게 화장을 적극적으로 권면하는 것은 무책임한 발상이라 생각한다. 우리는 이 땅에 일어나는 상황을 보고 그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자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을 말하고 있으며 그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신학적 검증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성경적 교훈에 비추어 보아 매장이 타당하다고 하는 것은 죽은 그 몸 자체가 부활할 것이라는 단순한 생각 때문이 아니다. 즉, 화장을 하면 부활사상에 배치된다는 논리를 세우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몸은 썩어 땅으로 돌아갈지라도 그 흙으로 돌아간 몸이 다시금 부활하게 되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케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흙으로부터 지음받은 인간이 흙으로 되돌아가는 모습을 기억하는 가운데 우리가 얻을만한 값있는 교훈이 있음을 주지해야 하는 것이다.
위에서 필자가 제안한 것처럼 성경의 교훈에 반함이 없이 새로운 매장문화를 도입하게 된다면 오히려 화장문화를 도입하는 것 보다 훨씬 우수한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국토잠식의 문제라든지 환경에 관련된 모든 문제에 있어서 그렇다. 완전화장을 함으로써 죽은자의 유골을 완전히 없애버리지 않는 한 다양한 형태의 납골당 등이 생겨나게 되고 이전에 있지 않던 또 다른 종교적 흉물들이 등장하게 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새로운 매장문화를 잘 세워 정착해 감으로써 실제적인 우리의 미풍양속이라 할 수 있는 집안의 결속이 훼손되지 않게 될 것이다. 죽은 사람들의 무덤은 산 사람들에게 교훈이 될 수 있다.
앞에서 이미 언급한대로 기독교적 입장에서는 이를 더욱 심도있게 고려해 보아야 한다. 화장문화가 장려될 경우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하는 이방인들의 허무주의적, 냉소적 사상이 발흥할 위험이 있다면, 건전한 매장문화는 그를 통해 인간의 삶에 대한 교훈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기독교적 입장에서는 성경에 화장문화에 대해 지극히 부정적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필자는 매장문화 보존을 요구하면서 새로운 형태의 장묘문화를 제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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