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개혁의 의의와 방법에 대한 고찰
- 한국교회를 중심으로 -
이광호(철학박사, 목사/실로암 교회)
[서론]
우리는 교회 개혁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는가? 그리고 교회개혁이란 무엇인가? 교회개혁이란 조직개혁을 목적으로 하는가, 아니면 성도들의 잘못된 종교조직으로 부터의 해방을 말하는가? 엄밀한 의미에서 우리는 교회의 개혁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이 비성경적인 가르침 가운데 있으면서 유린 당하는 모습을 보며 그들이 말씀의 가르침으로 되돌아 오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 바람을 실천하는 것이 곧 개혁에 참여하는 것이 될 것이다.
필자는 지난해 말 <한국교회, 무엇을 개혁할 것인가>(예영 커뮤니케이션, 도서출판 실로암)라는 제목의 단행본을 출간했다. 의외로 그 책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는데, 우선 이에 관련한 세 방향의 서로 다른 관심을 살펴볼 수 있다. 먼저 '교회 밖'의 관심과 '교회 안'의 관심으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리고 '교회안'을 다시 개혁적 생각을 하는 사람들과 수구주의를 지향하는 자들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필자가 이 책을 출간했을 때 가장 미리 적극적 관심을 가진 쪽은 기독교 내부가 아니라 외부였다. 이 책에 대한 기사를 다룬 신문들은 필자가 직접 확인하기로는 <대구매일신문>(1999.11.15), <영남일보>(1999.11.11), <대구일보>(1999.11.15), <부산일보>(1999.11.13), <문화일보>(2000.1.23) 등이다. 그리고 필자가 직접 기사를 확인하지 않은 몇몇 신문들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일반 신문들 중 다수는 필자의 책을 종교면을 거의 채울 만큼 대서 특필했다. 그리고 기독교 계통의 언론들 가운데는 <주간기독교>(2000.1.16)에서 한면을 할애했으며 <기독교대학>(2000.1월호), <출판소식>(2000.3월호) 등에서 간략하게 소개를 했다. 그리고 월간지 <복음과 상황>(2000.2월호)에서는 이 책에 관한 서평을 4면에 걸쳐 실었으며 책 표지에서 사진으로 소개했다. 또한 <기독교 방송>(2000.2.19)에서 필자와 대담형식으로 약 20분 정도를 할애했다. 이외에 대구 기독교 방송 등에서 이 책자에 대한 소개가 있은 것으로 알고 있다.
한편 이 책에 대한 이야기를 지면 등을 통해 들은 다수의 기독교 언론들에서 책을 보기를 원했고 그 중 일부 언론에서는 인터뷰를 요청해 그에 응하기도 했다. 놀라운 것은 필자가 속한 고신교단의 언론들에서는 책 소개조차 기피하고 있으며 인터뷰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해당 언론지에 소개되지 못했다.
이런 여러 정황들을 통해 필자가 얻을 수 있었던 결론은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 우선 한국교회의 개혁에 대한 관심은 기독교 안이 아니라 기독교 밖에서 더욱 요구하고 있다는 기현상이다. 또한 기독교 내부에서는 이를 환영하는 사람들과 강한 거부감을 나타내는 사람들, 그리고 이에 대한 일종의 두려움을 나타내는 사람들, 그리고 무지한 사람들로 분류할 수 있다. 기독교 내부에서 필자의 책을 환영하는 사람들은 보수주의 안에서의 개혁성향을 지닌 사람들이다. 그들은 어떻게든 한국교회가 변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강한 거부감을 나타내는 사람들은 소위 기득권층에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비교적 안정된 교회에서 목회를 하거나 지도자로 있는 사람들이며 스스로 성공적인 목회를 하고 있다고 느끼는 자들이다. 본인의 책을 통해 일종의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들은 신학자들 가운데서 찾아볼 수 있다. 필자가 알고 있는 다수의 신학자들은 필자의 주장이 옳음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표현하여 인정하기를 주저하고 있다. 그 이유는 만일 그것이 문제가 되었을 경우 공개적 입장표현을 해야만 하며 그렇게 했을 경우에 닥치게 될 복잡한 상황들을 우려하고 있었다. 그리고 무지한 다수의 교인들은 '설마'라는 식으로 고개를 갸우뚱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러한 가운데 필자는 교회개혁의 중심, 교회개혁의 관심대상, 현실교회, 교회개혁을 위한 참여에 대한 논의를 한 후 결론과 더불어 일련의 제안을 하고자 한다.
[본론]
1. 교회개혁의 중심
1) 하나님의 말씀
교회의 올바름을 가늠하는 유일한 잣대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인간의 경험이나 판단으로써 교회개혁의 여부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즉 교회개혁의 중심은 어떠한 경우에도 '나/우리'가 아닌 '하나님/하나님의 말씀'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교회가 일반적 관점에서 보아 정의로우냐, 정의롭지 못하냐 하는 것도 역시 교회의 올바름의 기준이 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알지 못하면 교회의 올바름에 대해서도 알 수 없다. 교회개혁을 위한 가장 기본적인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참된 지식의 소유라 할 수 있다. 오직 말씀을 통해서만 교회가 교회다운지 그렇지 않은지 분별할 수 있으며 그것을 기준으로 개혁의 출발이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2) 하나님의 사역: 성령의 일하심
어떤 개혁운동도 인간이 주도할 수 없으며 인간의 공로가 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참된 백성은 하나님의 일하심에 겸손하게 참여할 따름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참된 성도는 주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자연스럽게 개혁운동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원칙적으로 어떤 사람의 결단에 달려 있지 않다. 한 개인이나 집단의 결단이 교회개혁을 주도하게 되면 또다시 개혁해야 할 다른 양상을 양산해 낼 따름이며, 외적으로 보아 상당히 성공적이라 판단될지라도 진정한 생명력은 없을 수밖에 없다. 신앙이 있는 성도들은 자기 시대를 살아가면서 주님의 말씀이 가르치는 바와 그 말씀의 의미를 기독교회 가운데 끊임없이 말하며 살아가게 된다.
3) 인간의 정의감과는 무관함
교회 개혁은 인간의 정의감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인간의 정의감이란 시대와 지역에 따라 항상 가변적이며 상대적이다. 그리고 경험적이다. 즉 정의를 외치는 인간, 특히 기독교 가운데서 정의를 외치는 자들은 모두가 자신을 정의의 편에 둘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서로 자기가 정의롭다는 생각을 함으로써 끝없는 불필요한 투쟁만 지속될 우려가 있다.
교회개혁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교회내에 일반적 의미에서의 정의를 실현할 목적으로 그 일을 시도하지 않는다. 참된 교회개혁에 참여는 '말씀회복 운동'에 따른 성령으로 인한 자연 발생적 사역의 결과라 할 수 있을 것이다.
2. 교회개혁의 관심대상
1) 비성경적인 교회조직
교회 개혁의 대상은 비성경적인 지도자들이 아니다. 즉 잘못된 교권주의자들을 몰아내는 것이 개혁의 목적이 아닌 것이다.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정치적 논리에 입각한 것이다. 다시 말해 참다운 교회개혁운동은 제도나 조직의 개혁을 그 일차적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만일 교회개혁의 대상이 조직이나 제도라면 우리는 더 이상 개혁(reformation)이라 말하지 말고 혁명(revolution)이라 불러야 옳을 것이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개혁'과 '혁명'을 혼동하고 있으며 교회개혁을 외치면서 혁명적인 것을 추구하고 있다. 그러나 진정한 교회개혁은 결코 혁명적 방법을 통해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
2) 개혁의 관심은 신음하는 성도들에게 있다.
교회의 참된 개혁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은 조직의 개선 뿐 아니라 어떤 획일적 '운동'(movement)에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교회개혁은 기존의 제도를 개선한다든지 정책을 발전적으로 도모하자는 것이 아니다.
물론 이것은 어떤 회개운동과도 다르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개혁은 자신의 잘못된 행위에 대한 회개를 통해 이루어진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진정한 회개는 외적인 자기 행동의 잘못을 뉘우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요구에 벗어나 있는 자신을 뉘우치는 것이다. 참된 회개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이들 가운데는, 집단을 이루어 '우리가 미리 회개하며 자복하자'고 이야기하며 모두가 자신들을 따르도록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교회개혁은 그렇게 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교회개혁이 관심을 가지는 것은 주의백성들에 대한 관심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조직화된 잘못된 시대교회 가운데서 주의 백성을 이끌어 내려는 노력이 곧 교회개혁운동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개혁이 이루어짐으로써 주님의 몸된 교회가 회복되기를 바라며 그것을 추구하는 것이다.
3. 현실교회
1) 역사적 종교개혁 시대와 우리시대의 차이
중세 종교개혁 시대에는 개혁의 '소리'가 있었을 때 즉각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우리의 시대에는 즉각적 대응이 아니라 무반응함으로써 문제를 야기하지 않으려 하는 경향이다. 이는 앞에서 이미 이야기했듯이 기독교 언론들의 태도를 보면 알 수 있다. 기독교 언론에 종사하는 이들이 이미 기득권층에 있기 때문에 그들 자신이 변화를 싫어하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의 현실교회는 중세의 타락한 기독교 보다 오히려 더 악한 상태일지도 모른다.
누가 무슨 소리를 해도 나에게 직접 손해를 끼치지 않으면 애써 무관심해 버린다. 그러나 자신에게 어떤 손해가 돌아올지도 모른다고 판단하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강하게 나오는 것이 우리시대의 특성이다. 우리의 시대는 무딘 시대이자 무소신의 시대이다. 우리시대의 다수 기독교 지도자들은 불리한 대화를 피하고 다시금 '조용한 때'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것을 최선으로 생각하는 듯 하다.
2) 타협에 익숙한 신학자들
우리시대의 신학자들은 철저히 교권화 되어있다. 즉 신학이 교권의 시녀가 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으며 우리 시대에는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 준비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의 신학교들은 100% 사립학교들이다. 그 사립학교들에는 학교법인을 운영하는 이사회가 구성이 되어 있으며 신학교수들을 임용하는 권한을 교권 소유자인 이사회가 가지고 있다. 우리의 기독교 사회 분위기가 일반 목사보다는 교수가 더 나은 것처럼 인식되고 있는 것은 커다란 병폐이다.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박사학위를 소유하고 있어서 학식과 경험이 풍부하다고 여기는 반면 일반 목회자들 중에는 보증할 수 없는 목회자들이 많은 현실적 분위기를 스스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학자들은 교수가 되고 싶어하며 또한 그 자리에 연연해 할 수밖에 없다.
교수들은 교권의 눈을 벗어나서는 곤란하다. 자칫 잘못 보이면 재임용이 위태로울 경우가 있는가 하면 이사회에 밉게 보여서 진급에서 누락된 경우는 허다하다. 그런 형편에서 신학은 교권의 시녀역할을 할 수밖에 없고 교권에 추파를 던질 수밖에 없으며 타협에 익숙해 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신학과 신학자들의 자세가 그렇다면 한국교회의 타락은 이미 예견된 것이나 다를 바 없다.
3) 무지몽매(無知蒙昧)한 지도자들
현실교회의 지도자들은 대개 성경말씀과 복음사역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 무지몽매하다. 즉 그들은 성경의 가르침을 떠나 있으면서도 자기의 신앙과 종교적 활동이 옳은지 그른지 조차도 알지 못한다. 그들은 자기가 행하고 있는 신앙적 방법이 옳다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그들은 그렇게 믿고 있다. 그들이 아무리 학식이 높고 경험이 다양하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알지 못하는 한 말할 수 없이 순박한 사람들일 수 있다. 그들이 그렇도록 무지몽매하게 된 것은 기독교적 경험과 사회현상에 크게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계시하고 있는 진리의 가르침 보다 역시 옳지 않은 선배들이나 종교전통, 그리고 주변 사람들로부터 받은 영향과 경험이 자기 신앙의 기준이 되어 있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교훈하는 바를 모르는 상태에서 다른 사람들을 지도하고 있다. 그런 지도자들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끼리 모여 서로간 비교하면서 자신의 종교적 현실을 의미화하기를 즐겨하는 것이다.
4) 우민화(愚民化)된 성도들
잘못된 지도자들에게서 교육을 받은 많은 성도들은 어리석음에 빠져있다. 그들 또한 인본적인 기독교 조직에 충실함으로써 자신을 충성된 신앙인이라 오해하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계시하고 있는 그 의미 보다 자기를 지도해주는 지도자들을 더욱 신봉하고 있는 것이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경우와 같은 것이다.
어리석은 교인들은 그래도 전능하신 하나님이 자기의 지도자로 세워 무언가 일하지 않을까 하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잘못된 종교전통과 말씀에 무지한 교사들을 통해 모든 것을 배운 교인들은 성경말씀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에 대해 미쳐 관심을 가질 겨를조차 없는 것이다.
5) 교회 안의 불신자들
현실교회 안에는 불신자들이 많이 들어와 있다 . 이것은 참으로 심각한 문제이다. 그들 가운데 상당수는 성도가 아니면서 교회에 들어와 지도자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기독교라는 종교적 행위와 방법을 익혀 교인들에게 잘못된 교훈을 주며 주의 백성들을 기만하고 있다. 물론 어리석은 교인들은 그 지도자들이 불신자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미쳐 알지 못하고 그들을 추종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교회 안의 불신자들 스스로도 자신이 불신자인 줄 모른다. 자신의 종교적 경험에 의해 교인이 되어 있기 때문에 자신을 진짜 기독교인으로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교회 타락의 한 원인은 충분한 검증없이 함부로 세례를 주는 것에 기인한다. 이미 오래 전부터 있어온 일이기에 우리의 한국교회가 지금 이렇게 되었으며 지금도 무분별한 세례를 베푸는 그 일은 그대로 행해지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과 그의 은혜에 대한 교회를 통한 올바른 고백이 있지 않은 상태에서 세례를 남발하고, 그들 가운데 세월이 흐르면 집사, 장로가 되고 심지어는 목사의 직분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더구나 그 기준이 말씀에 의한 일차적 확인이 아니라 세속적 지위나 부, 학식에 달려 있다면 무엇을 더 말하겠는가?
4. 교회개혁을 위한 참여
1) 외침의 의미의 한계
해마다 종교개혁주일이 되면 많은 사람들이 교회개혁을 외쳐왔다. 그리고 많은 단체들은 개혁선언을 해왔다.
그러나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으며 어떤 역할을 했는가? 그 외침의 소리를 들어야 할 사람이 누구인가? 기독교인가? 아니면 신음을 당하고 있는 주의 백성들인가? 우리는 개혁을 외치는 자들의 신앙도 신뢰하지 못할 상황에 처해 있다. 그들의 외침이 말씀에 근거하지 않고 자기 정의에 기초한 것이라면 아무런 보증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말씀에 의한 보증이 없는 상태에서의 개혁에 대한 외침은 확증없는 종교적 메아리에 지나지 않는다. 그나마 그 메아리는 아무런 의미를 발휘하지 못한 채 굳어버린 기독교 조직에 잠시 다가 왔다가는 사그라지기를 되풀이하고 있는 것이다.
2) 교회를 향한 경고 의미의 한계
성경을 떠난 기독교도 자신이 스스로 잘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는데 문제가 있다. 이러한 예는 이미 성경에 명확히 소개 되어있으며 인간의 속성이기도 하다. 오죽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는 유대인들 조차 자신들의 행위를 훌륭한 것이라 오해했을까? 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는 것이 곧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 믿었던 것이다. 하물며 예수님을 직접 십자가에 못박는 지경에 있지 않은 많은 사람들의 자기 믿음이야 오죽할까? 그들에게 성경을 가지고 경고를 해도 그들은 자신은 주님을 위해 그렇게 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또한 예수님 당시의 많은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지도자들은 잘못된 신앙을 가지고 있으며 종교생활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스스로 잘하고 있는 것으로 여겼다. 그들은 열심히 십일조 하고, 간음이나 강도 등 불의를 행하지도 않고, 이레에 두 번씩 금식도 했다. 그들은 그런 행위를 하는 것이 곧 의로움이라 오해했던 것이다.
우리시대의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을 비롯한 일반교인들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다. 열심히 새벽기도하고 십일조하며 총회나 노회의 일을 열심히 하니까 그것을 곧 하나님에 대한 충성인양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스스로 충성스럽고 의롭다고 믿고 있는 그들에게 다른 경고의 말이 먹혀 들어갈까?
3) 신학의 변혁: 교권과의 대결
교회 개혁에 있어서 신학의 변혁은 필수적이다. 신학은 계시된 말씀이 주는 의미를 그대로 수용해야 하며 그것을 교회를 향해 끊임없이 쏟아내 놓아야 한다. 그렇게 될 경우 건강한 교회시대에는 현실교회와 상호협력이 이루어지겠지만, 지금의 우리 한국교회의 경우에는 엄청난 상호마찰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할지라도 신학과 교권은 대결해야만 한다. 교회는 올바른 신학을 소유해야 하며 신학교육기관은 교회를 위해 끊임없이 신학의 원리를 제시하는 그 일을 도모해야 한다. 동시에 교권이 행하는 모든 일에 대해서는 말씀을 통한 비판을 쉬지 말아야 한다. 만일 신학이 교권과의 대결을 피해 무책임하게 교권의 손을 들어준다면 교회의 타락양상은 전혀 이상하지 않은 것이다.
4) 신학자들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
그래도 우리 한국교회에서는 신학자들의 입장이 일반 목회자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낫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그들의 신학에 대한 지식적 이해 때문으로 볼 수도 있지만, 목회자들이 아니므로 물질적, 가시적 욕망이 덜 드러난다는 점 때문이기도 하다. 즉 그들은 일반 교인들을 이용해 자기성취를 추구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을 기억해, 그래도 비교적 착실한 신학자들을 끊임없이 도전해야 할 의무가 우리에게 있다. 만일 신학자들에 대한 건전한 경고성 메시지를 제공하는 이들이 없다면 앞으로의 한국교회는 지금보다 훨씬 더 추한 지경에 놓이게 될 것이다.
5) 신학생들을 말씀으로 돌이킴
신학교에 입학하는 학생들은 아직 신학을 잘 모르는 교인들이다. 대부분의 그들은 신학교에 입학을 하면서 올바른 신학을 공부하여 주님의 복음을 위해 살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말씀이 가라면 가고 서라면 서겠다는 자세를 견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학생들을 졸업할 때 까지 올바른 신학으로 지도해야 하는 것은 신학자들의 몫이다.
신학생들을 자각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들로 하여금 말씀으로 사고 하는 힘이 생기도록 독려해야 하며 교단이나 기독교의 앞선 선배들을 무작정 따라가는 태도를 막아야 한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목회하는 방법을 익혀 소위 훌륭한 목사가 되는 것이 목적이 될 수 없음을 알게 해 주어야 한다.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임무는 주의 몸된 교회에 주의 말씀이 올바르게 선포하는 일에 참여하는 것임을 일깨워 주어야 한다.
목사가 되고 교사가 되는 목적이 자기 인생을 화려하게 하고자 함이 아니며, 기독교 지도자로서 출세하고자 함이 아니다. 신학교수들이 교권의 그늘에서 벗어나 말씀의 원리에 입각한 자세로 신학생들을 지도할 수 있을 때 비로소 한국교회에 소망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결론 및 제안]
필자는 한국교회의 개혁을 위해서는 신학자들과 신학교에 호소하는 것밖에 달리 길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교회개혁에 관심을 가진 우리로서는 현실교회의 현상에 대해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신학자들의 신학적 양심을 지적하는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신학자들과 신학생들은 함께 말씀의 원리를 찾아 추구하는 훈련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현재의 한국교회의 조직이나 제도, 틀을 뒤바꾸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 그 틀을 바꾸려다 오히려 불필요한 소모전으로 끝이 날 가능성이 훨씬 많을 것이다. 그것은 혁명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새로 시작해 보는 것이다. 혹 돌아오는 메아리가 전혀 없다 하더라도 외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틀린 것을 옳다고 고집하는 사람들이야 어찌하랴 마는 앞으로 교회의 교사가 되려 하여 신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에 대해서는 다르다. 그들은 아직 경험을 통해 자기 종교세계를 굳히지 않은 사람들이므로 신학자들은 마땅히 그들을 말씀의 올바른 길로 인도해야 할 것이다.
이 일을 위해서는 신학자들의 역할이 엄청나게 크다. 필자는 한국의 신학자들 중에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있는 학자들이 다수 있다고 믿는다. 한국교회를 위해서는 그들이 먼저 교수라는 '자리'에 연연해하지 않고 말씀 앞에 분연히 일어서야만 한다.
그러나 교권 앞에 초라하게 서 있는 그들 신학자들을 우리는 바라본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이 제자리를 찾도록 힘을 주며 교회로부터의 메시지를 던져야만 한다. 그래도 그것이 유일한 방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제안>
필자는 한국교회의 진정한 개혁을 위해 하나의 제안을 해본다. 우선, 필자가 최근 쓴 책자 '한국교회, 무엇을 개혁할 것인가'에 대한 신학자들의 견해를 묻는 방법이 있을 수 있다. 한국의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의 주장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데 그 대응은 다양하다. 물론 기득권을 가지고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이나 현실에 안주하기를 바라는 자, 그리고 무지몽매한 지도자들은 필자의 견해에 상당한 부담을 느끼고 있다.
문제는 신학자들에게 있다. 개혁주의를 지향하는 신학자들 가운데 많은 이들은 필자의 주장에 전반적으로 동의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 학자들과의 직접적인 교제와 대화를 통해 확인한 바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공적으로 표현하기를 주저하고 있다. 역시 막강한 교권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형편 때문이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이 책자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기를 기대한다. 즉, 여러 신학대학 및 신학대학원들, 즉 보수주의 및 개혁주의를 주장하는 고신대학(원), 총신대학(원), 합동 신학원 등의 교수회에 이 책의 주장들이 과연 옳은지 그른지 질문해 볼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그에 대한 답변은 해당 신학생들은 물론 보수주의를 지칭하는 한국의 교회들이 공유할 수 있을 것이며, 신학과 실천에 대한 잘못된 현실의 문제를 논의의 장으로 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하나님께서 이 땅에 자신의 신실한 백성을 얼마나 예비해 두고 계시는지 하나님의 일하심을 따라 우리 모두가 함께 경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필자는 우리가 생각하는 교회개혁이 일과성 운동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신실한 주의 백성들의 끊임없는 문제제기가 필요하다. 이는 잘못된 종교 조직 속에서 신음하는 주의 백성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부단없이 추구해 나가야할 종교개혁, 혹은 교회개혁의 의의는 주의 백성/성도에 대한 사랑 때문임이 명백하다. <제5회 달구벌기독학술연구회 발표원고, 2000. 3.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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