救贖史觀과 世界史觀
저작자 : 미상 (저자 연락요망)
A. 기독교 역사관 형성을 위하여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의 주체자는 누구인가? 역사속에는 어떠한 원리가 내재하고 있는가? 우리는 과연 매일의 삶에서 얼마나 소위 ‘역사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는가? 이러한 일이 왜 필요한 것인가? 일반 세계사와 기독교의 구속사는 어떠한 관계가 있는 것인가?
우리가 ‘기독교 역사관’이라는 주제로 우리의 논의를 시작하고자 할 때 이상과 같은 많은 질문 앞에 서게되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과연 우리 인간들에게는 역사의식이 필요한 것인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변은 굳이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인간은 역사와 함께 살아왔고 지금도 역사를 만들어 가고 있으며 더구나 미래를 지향하는 인간의 과제는 당연히 과거와 현재의 삶을 돌이켜 봄으로써 보다 나은 미래를 꿈꾸고자 한다.
또한 기독교인으로서 역사를 이해하는 것은 보다 중요한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기독교는 어떠한 이론적인 가설이나 추상적인 사상에 근거하여 세워진 종교가 아니라 분명한 예수그리스도의 사건과 그의 제자들로 이어지는 역사적 사실들을 근거로하여 ‘살아계신 하나님’을 고백하는 종교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우리의 삶에서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는 역사에 대한 이해를 돕고자 하는 것이 이 단원의 목적이다. 이를 통하여 우리는 우리 자신을 포함하여 내가 속한 사회에 대한 이해를 함에 있어서 수평적인 차원의 이해에 그치기 쉬운 우리의 시야를 수직적인 면에까지 확장시키는 기회가 될 것이다.
1. 역사란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
역사라는 말을 정의할 때 우선 크게 2가지 어의를 갖는 단어를 떠 올릴 수 있다. 희랍어의 ‘히스토리아(Historia)’와 독일어의 ‘게쉬히테 (Geschichte)’가 그것이다. 전자의 개념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희랍의 고대 역사가 헤로도투수(Herodotus)와 투키디데스(Thuchydides)인데 그들에 의하면 이는 ‘발생한 사건의 원인을 탐구하는 것, 탐구한 결과, 탐구한 내용’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이 말은 과거 일어난 사건의 인과관계를 현재라는 싯점에서 조명하여 보는 조직적인 역사의 연구로서 이러한 시도는 그들을 최초의 역사가라 부르는 근거를 제공하기도 하는 것이다. 후자의 개념 역시 마찬가지로 ‘일어난 일’ 또는 ‘발생한 사건’을 의미하는 동시에 그같은 일이나 사건에 관한 ‘지식과 설명’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이들을 정리해 보면 역사란 객관적인 측면 즉 인간의 과거와 관련되어 발생한 사건과 주관적인 측면 즉 일어난 사건에 대한 의미있는 인과관계의 추론과 이에 대한 재 구성, 의미있는 서술이라는 측면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휘튼대학의 Earle E. Cairns 교수의 말을 빌리면 “역사는 고고학자료, 문서자료, 현존자료 등으로부터 과학적인 방법으로 수집되고 조직화된 사실에 근거를 두고 사회적으로 의의가 있는 인간의 과거에 대한 해석이 가해진 기록”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E.E.Cairns, 서양기독교사, 김기달 역, 보이스사 1986, p. 18) 한편 E.H. Carr는 역사에 대한 정의를 내리는 글에서 “역사란 끊임없이 움직이는 과정이고, 인간의 역사는 끊임없는 변화의 과정”이라고 보고 있다. 만일 인간사회에 변화가 없다면 역사는 성립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역사라는 말이 갖고 있는 두가지 의미, 곧 사건으로서의 역사와 기록으로서의 역사는 모두 인간사회의 끊임없는 변화를 전제로 하고 있다고 보고, 다만 역사는 현재의 변화가 아니라 과거의 변화를 대상으로 하고 과거의 인간의 행위, 그것도 사회적으로 중요한 영향을 끼친 행위를 대상으로 한다고 보았다. 즉 과거의 사실이 역사의 대상이라는 것이다.(E.H. Carr, 역사란 무엇인가, 황문수 역(서울:범우사, 1977), 해설, p.214) 사회는 역사가에 대해 이중의 중요성을 갖는다고 Carr는 말한다. 첫째로 역사가는 과거의 사회를 연구대상으로 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역사가 자신도 특정한 시대의 특정한 사회에 속해 있어서 그 사회의 관심과 가치관을 반영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역사는 “역사가와 사실 사이의 상호작용의 부단한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인 것이다.(Ibid. p.215)
그러면 이러한 역사에 대한 정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 이라는 독특한 역사의 사건에 가장 중요한 의미를 두고 전 역사를 해석하는 기독교적 역사관에서도 똑같이 중요한 의미를 지닐 수 있는 것인가? 과연 기독교의 역사관은 과거 사건에 대하여 분명한 객관적인 사실에 기초하고 있는가? 이미 언급한 대로 역사가가 과거의 사실을 연구한다는 점에서 역사의 연구 방법의 원칙을 실증사학적 입장에서 제시한 근대 역사학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독일의 역사가 랑케(Leopold von Ranke)의 이상은 매우 의미심장한 구호가 아닐 수 없다. 즉 ‘실제로 그것은 과연 어떠했는가?(Wie es eigentlich gewesen ist)’를 규명하는 실증의 방법을 통해서만이 역사가 재구성될 수 있다는 역사 고증의 방법은 실제로 그 이후 모든 역사가들의 기본적인 방법론이 될 만큼 설득력이 있는 구호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렇듯 과거 사실의 객관적 실증을 주창한 실증주의 사학은 앞서 언급한 역사의 또 다른 측면 즉 ‘역사의 의미 추구’라는 점에서 주관적인 측면을 소홀히 취급한 느낌을 받는다. 물론 기독교인과 비 기독교인을 막론하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관점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역사 인식에 있어서 필요한 사료를 참조한다는 점에서 양자는 모두 과학적으로 증명할 만한 공정한 법칙을 사용하여야 한다는 것은 말 할 필요도 없다. George M. Marsden 은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한 역사가의 기독교적 가치 체계는 그가 기술하기 위하여 선택한 사실(사료)에 까지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이 말은 기독교인이 기독교적인 신앙전승에 충실하기 위하여 역사 그 자체까지 왜곡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역사가들은 모두 자기 나름대로의 관점과 목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느정도 편향적이거나 왜곡이 불가피하다. 그러나 선입관을 가지는 것이 불가피할지라도 역사가들은 부단히 초연한 자세로 모든 이용할 수 있는 자료를 신중히 검토하고 그것이 자기의 선입관과 편견에 맞지 않더라도 발생하는 사건을 공정하게 기술하려고 노력함으로써 그런 경향을 극복할 수 있다. ”(George M. Marsden, 기독교적 관점에서는 어떻게 역사를 가르쳐야 하는가? 홍치모 기독교와 역사이해 (서울: 총신대학 출판부, 1981), p. 51) 하지만 역사에 있어서 보다 중요한 문제는 역시 역사인식의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에 대하여 마이네케(F. Meineke)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동일인이 서술한 역사라 할지라도 그의 청년시절, 노년시절의 사상적 변화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며, 그 자신의 역사적 인식의 차이에 따라 그 해석 태도 역시 달라질 수 있다.”(이석우편저, 기독교사관과 역사의식(서울:성광문화사, 1989), p. 16에서 인용) 또한 종교사가로 알려진 버터필드(Herbert Butterfield)는 이것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역사적 탐구는 어떤 객관적인 사실의 확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생명들에 직면하여 그것들의 의미를 탐문하고 타인의 삶의 관심을 이해하는 데 있을 것이다.”
콜링우드는 실증주의 역사가들을 비판하면서 “역사가의 일이 외부의 사건을 발견하는 것으로 시작은 될 수 있으나 거기서 끝나서는 안된다. 그는 사건이 행위라는 것과 자신의 주된 사명이 그 행위의 집행자의 생각을 알기 위해 행위 속에서 사고하는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라고 주장하였다.(R.G. Collingwood, The Idea of History, Clarendon, 1946, p. 213) 그가 주장하는 바는 역사속에 일어난 단지 객관적인 사실의 조명에만 역사가의 임무를 제한할 것이 아니라 역사 내적 행위 속으로 들어가서 그 의미를 탐구하는 것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콜링우드에게 있어서 이러한 역사의 의미탐구는 고대 사회의 역사관이 단순히 순환적(Cyclical)역사관에 의한 역사의 특별한 의미부여를 상실한 역사관임에 비해, A.D. 4-5 세기, 특히 어거스틴에게서 보는 선적(Lineal) 역사관의 혁명을 가장 중요한 역사관의 하나로 꼽도록 유도하기도 하였다.
이상에서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으로 역사의 의미를 생각해 보았다. 아울러 이러한 역사의 의미들 속에서 기독교의 역사관이 갖는 위치를 생각해 보았다. 기독교는 역사를 떠나서는 이해될 수 없는 종교이다. M.Bloch의 말처럼 “기독교는 그 자체가 하나의 역사적 종교이다. 기독교는 그 근본적 교의를 역사적 사건에 기초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어느 종교와도 특이한 성격을 드러내 주고 있다. 사도신경에 “나는 본디오 빌라도 치하에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사흘날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나이다”를 보라. 그 그리스도 자신이 하나의 역사적 인물인 것이다.” 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한 면에서 ‘기독교의 진리성은 역사속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다’는 로버츠의 말을 되새겨 볼 필요가 있겠다.
2. 역사에 있어서 주체의 문제
우리의 논의는 역사의 주체는 과연 누구인가? 라는 물음으로 발전하고 있다. 역사가 인간들의 과거의 삶을 통해서 이루어진 하나의 일련의 사건들이 모아져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점에서 역사의 주체를 묻는 질문에 일반적으로 ‘인간의 자유의지’라고 답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예견되었던 사실이다. 역사의 기본 단위를 이루고 이를 구성해 나가는 주체로서의 인간 개개인의 역할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종종 예로 들고 있는 로마역사의 한 에피소드를 구성하는 씨이져(Caesar)의 루비콘 강의 도하 사건(Cross the Rubicon)이나 한국의 역사에 있어서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사건 등의 예를 들어 보더라도 한 개인의 의지적 결단으로 역사의 과정에 커다란 변화를 이루었다는 사실 등은 역사를 이루고 있는 기본 단위로서의 인간 개개인의 의지적 결단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는 점들이 아닐 수 없다.
일찌기 어거스틴은 역사를 정의하면서 “역사는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시작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그가 목도한 역사는 반드시 정의가 승리하는 역사도 아니었고, 아벨의 후손들이 행복하게 함께 거쳐하는 이상향의 현현은 더욱 아니었다. 첫사람 아담의 범죄는 인간들에게 또 다른 범죄의 의지적 결단을 유도하였으며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의 집합으로서의 역사는 그야말로 선과 악이 공존하는 투쟁의 역사요, 파괴와 건설이 함께 숨쉬는 ‘모든 가능성의 총체’로서의 역사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역사는 인간에게 주어진 의지의 잘못된 사용을 통해서 시작된 것이었다. 이러한 아담의 타락이 없었다면 인간은 약속된 파라다이스 속에서 흥망성쇄의 고락이 없는 영원한 ‘하나님의 도성’을 이루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어거스틴 역시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주체적 요소는 ‘인간의 의지적 결단’이라고 보았다 할 수 있다.
그러나 현대의 역사가들은 이러한 인간 개개인의 의지를 역사를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라고 인정하면서 또한 그것에만 만족할 수 없는 다른 변수들을 제시하고 있다. 즉 역사를 이루고 있는 어떠한 법칙이나 규칙 등의 발견과 이에 따른 보다 과학적인 방법으로서의 역사에 대한 접근이 바로 그것이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금세기에 들어서 발생했던 양차대전의 경우만 보더라도 그러한 큰 전쟁이 발발하기까지 일련의 제 원인들이 보다 과학적인 방법에 의해서 규명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제반 원인들은 상당히 명약관화한 것이어서 어떤 역사가는 이미 수년전에 20세기에 들어서 큰 전쟁이 발발할 것이라는 예견을 하기도 하였다. 오늘날의 세기에 와서는 강대국들의 냉전구도가 ‘이데올로기의 종언’과 함께 곧 무너질 것이라는 학자들의 예견을 우리시대에서 목도하기도 한다. 이러한 경우 역사의 주체는 단순히 한 개인의 의지적인 결단을 넘어선 무엇인가 보다 큰 단위를 이루는 법칙으로서의 역사가 존재하는 것과 같은 생각을 할 수 있게 한다. 이러한 보다 큰 단위로서의 역사 법칙이 토인비가 이야기하는 ‘도전과 응전’과 같은 법칙이든지, 혹 ‘탄생, 성장, 성숙, 쇠퇴와 죽음’이라는 하나의 유기적인 삶과 같은 것으로 역사를 이해한 스팽글러(Oswald Spengler)의 순환의 법칙이든지, 혹 역사를 ‘세계정신의 자기구현’이라고 정의한 헤겔의 변증법적 역사관이든지 이들은 모두 역사속에서 역사를 이루고 있는 주체로서의 단위를 한 인간의 의지를 뛰어넘는 일련의 제반 법칙들 속에서 찾아 보고자 했던 것이다. 그리고 인간들의 자유의지의 결정들은 이러한 일련의 제반 법칙들 속에서, 그러한 법칙에 따라서 움직이는 것들로 설명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과학, 혹 법칙으로서의 역사는 언제나 역사속에서 소위 ‘우연’에 관한 사건들이 발생한다는 사실에 대하여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지 어려움을 느끼게 마련이다. 이에 대하여 버터필드(Herbert Butterfield) 는 다음과 같은 예를 들고 있다 “(역사에서 법칙을 확고히 믿는 학자가) 왜 수상이 그 거리를 걷게 되었는지는 설명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지붕에 붙어있던 타일이 늘어졌다가 어떤 순간에 떨어진데 대해 과학적 설명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두 사건이 연결되어서 수상이 마침 그곳에 이르렀을 때 그 타일이 떨어져 맞아 죽었다는 사실은 어떻게 설명을 할 수 없었다.”1 허버트 버터필드, 크리스천과 역사해석, 김상신역 (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82), p. 67.
이러한 좀 극단적이라고 느껴지는 예는 역사에서의 소위 ‘법칙’이 그렇게 단순한 공식처럼 천편일률적으로 적용되기에는 무리가 있음을 알게 해 준다. 그렇다면 역사는 이처럼 어떤 정돈된 법칙이 없는 단지 우연에 의해서 지배되는 산물에 불과한 것인가? 역사를 지배하는 주체는 ‘우연’인가?
성서의 커다란 주제는 하나님이 자신을 역사에 드러내 보이는 방법에 관한 것이다. 성서의 증언은 역사가 단순히 인간들의 의지적인 행위의 결과로만 흘러가도록 남겨두는 것이 아니고, 또한 역사 속에 섭리의 손길을 배제한 폐쇄된 의미의 제 법칙들에 의한 자존적 존재로 역사를 이해하는 것도 아니며 더구나 역사가 우연에 의하여 지배되고 있다고 보고 있지 않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상적인 세속 역사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셨는가?’에 대한 물음과 대답이 성서의 주요 테마인 것이다. 성서에서 등장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을 본질적으로 역사의 하나님으로 고백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역사 설계는 인간의 자유와 조화를 이루면서도 인간의 자유에 구속되지 않는 하나님으로 고백하였다. 하나님안에 역사의 시작과 종말이 있음을 고백하는 것이 이들의 고백이기도 하였다. 이들에게는 역사는 분명한 섭리속의 방향과 목적이 있는 것이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역사 속에서 역사하는 주체로서 하나님의 섭리를 함께 고백하는 것은 기독교인과 비 기독교인의 역사이해에 결정적인 차이를 제공하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마스덴은 “기독교인과 비 기독교인의 역사해석에 있어서의 제일의 차이점은 ‘하나님이 역사를 주관하시며 그 속에서 활동하신다’ 라는 고백의 유무의 차이이다.” George M. Marsden, 기독교적 관점에서는 어떻게 역사를 가르쳐야 하는가? 홍치모 기독교와 역사 (서울: 총신대학출판부, 1981), p. 53.
라고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철학사가 에밀 브레이에(Emil Brehier)는 하나님의 섭리를 배제하는 이신론적 역사관과 섭리를 인정하는 섭리사관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요약하였다. “ ... 우리는 기독교 신앙과 전혀 양립할 수 없는 새로운 인간관이 소개되었음을 분명히 보게 된다. 우주의 놀라운 질서를 창조하고 유지한 조물주 하나님(God the architect)은 자연속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에 기독교 드라마의 하나님, 즉 아담에게 “죄지을 능력과 명령을 거역할 힘”을 주신 하나님의 설 자리는 이제 사라지게 되었다. 하나님은 자연 안에 계신 분이지 더 이상 역사 속에서 섭리하시는 분이 아니다. 그는 자연주의자와 생물학자가 분석한 불가사의 속에 계시지 더 이상 인간의 양심 속에 계시면서 그의 임재 앞에서 느낄 수 있는 감정인 죄, 수치심, 은혜 등을 일으키시지 않는다. 그는 인간이 스스로의 운명을 책임지도록 버려두셨다.” Emil Brehier, The History of Philosophy, Wade Baskin 역 (Chicago: Univ. of Chicago Press, 1967), p. 15.
역사의 주체자로서의 하나님의 영역을 배제하고 인간이 스스로 닫혀진 구도 속에서 기계적인 역사를 창출한다는 사상은 현대인들에게 얼핏 매력적이기는 하지만 그 결과는 많은 파괴적인 양상을 창출하였다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역사의 주체자는 누구인가? 인간의 의지적인 결단인가? 스스로 존재하는 역사법칙인가? 섭리를 주관하는 하나님이신가? 우리가 어떠한 사건을 만나게 되었을 때 우리는 이상의 세가지 관점에서 각각 그 사건의 의미를 조명할 수 있다. 이를테면 우리가 A 라는 장소에 왔다고 하자. 우리는 그 이유를 묻는 물음에 대하여 “내가 오고 싶어서 왔지요.”라고 대답할 수 있고, 또한 “차가 나를 여기까지 데리고 와서”라고 대답할 수도 있다. 그리고 또한 “하나님의 뜻으로”라고 대답할 수도 있다. 이 모두가 가능한 대답일 것이다. 그러나 처음 두 가지의 답변에 머무르는 차원을 성서는 분명히 거부하고 있다. 전술한 어거스틴도 인간의 자유의지의 중요성을 역설한 그였지만 그것을 뛰어넘는 분명한 하나님의 섭리를 덧 붙이기를 잊지 않았다. 성서 속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죄과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이 자신들에게 임하였다’는, 즉 자신들의 이웃 국가보다도 자신들이 더욱 사악하다는 고백을 하는, 그것을 할 줄 아는, 그래서 그들에게 주어지는 역사 속에서 고난의 의미를 이해하는 백성들이었다. 이점에 대해서는 버터필드의 전게서 p. 61을 참조할 것.
3. 역사의 제 유형
역사를 이해하는 방법에 있어서 역사안에 어떠한 원리가 존재할 것이라는 생각은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제기되어 온 문제였다. 동양과 서양을 망라해서 나름대로의 역사에 대한 원리들을 이해하려는 시도가 바로 그것이었다. 이러한 일련의 시도들을 분석해 볼 때 우리는 유사한 유형들이 있음을 쉽게 발견한다. 즉 고대로 올라갈수록, 그리고 동양으로 올수록 역사는 보다 순환적이며 반복적인 역사의 유형을 가지고 있으며 현대에 가까운 서양의 전통은 보다 진보적이며 발전적인 개념의 역사관을 가지고 있다. 성서적 기독교적 역사관은 이러한 양쪽의 사이에 놓이게 된다.
가. 순환사관
순환사관의 의미는 무엇보다도 ‘역사는 어떠한 진보나 발전없이 지나간 과거의 사회나 역사가 반복하여 출현한다’고 하는 가르침이다. 이러한 가르침의 배후에는 주로 ‘신화’의 구조에 의하여 세계의 원리를 이해한 헬라적 요소가 자리잡고 있었다. 즉, 헬라의 신화에 나오는 여러 신들은 이 땅의 인간들과 희로애락을 같이 하면서 함께 역사를 만들어가는 존재들이었다. 이들은 어떠한 초월적인 존재나 도덕적 근거로서의 신들이 아니었고 인간들과 거의 비슷한 운명에 사로 잡힐뿐 아니라 또한 결혼을 하여 또다른 신들도 낳을 수 있는 그러한 존재들이었다. 이들은 단지 죽지않고 능력면에서만 인간보다 뛰어나다. 인간들은 바로 이러한 신들에 의해서 지배당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세계관의 특징은 다분히 인간의 삶을 운명의 지배 아래에서 그 그늘을 벗어나지 못하는 존재로 이해하였고, 인간의 역사 또한 어떠한 도덕적 의미나 교훈 혹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운명의 굴레 아래 순환 내지는 반복하는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이러한 순환사관은 동양에서도 그 모습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고대 중국의 역사가들은 왕조사를 집필하면서 수없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했다가 사라지는 왕조의 역사들을 ‘하늘의 사명’이라는 차원에서 생각하였다. 왕조의 첫째 왕들은 이 사명과 함께 역사의 무대에 등장했고, 필연적으로 이 사명을 망각하는 왕조의 마지막 왕은 멸망으로 운명지워졌으며 새로운 왕조는 이와같이 또다른 ‘하늘의 사명’에 입각하여 이 땅에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정치사관 뿐만 아니라 불교나 힌두교 등에서 보는 종교사관에 있어서도 인간의 역사는 절대 억겁이라는 세월에 비추어 볼 때 일시적인 한 경점에 불과할 뿐이요, 이 역사는 다시 순환의 과정을 통하여 이 땅에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고대 인도의 종교에서는 한 싸이클이 4개의 ‘yugas'로 구성되어 각각 첫번째 ’yuga‘는 4,000년, 두 번째는 3,000년 셋째는 2,000년 그리고 마지막은 1,000년의 역사로 구성되었다고 보고 이들의 흥망성쇄를 이어 또 다른 싸이클이 시작된다고 보았다. 이것은 조로아스터교와 같은 종교에서 세대를 4가지의 연속적인 세대로 구분하여 각각 금, 은, 철 그리고 이들의 합금의 시대로 구분하여 각각 흥왕과 쇠퇴의 연속과정을 대표하는 시기로 생각하는 이치와도 비슷한 것이었다.
이러한 고대의 역사관을 어느 정도 극복하려는 의지가 고대 희랍의 역사가들 사이에서 등장했던 것은 사실이다. 페르시아제국의 확장과 헬레니즘의 위기를 주로 그의 역사서술의 주제로 삼았던 헤로도투스(Herodotus)의 경우 자신의 역사탐구의 목적을 크게 3가지로 서술하였다. 즉 첫째로 사실(Fact)의 탐구, 둘째로 가치(Value)의 탐구 그리고 마지막으로 원인(Causation)의 탐구라는 어느 정도 진 일보한 역사의식을 보여주고 있다. 특별히 그는 ‘원인의 탐구’라는 역사서술의 주제와 관련하여 이오니아의 자연과학과 역사정신을 연계시킴으로써 역사의 과학적 이해를 어느 정도 염두에 둔 듯하나 토인비의 지적처럼 헤로도투스도 궁극적으로 시간을 순환으로 생각하는 데에는 예외가 아니었다. 최초의 ‘근대적’ 혹은 ‘과학적’ 역사가로 불리우는 투키디데스(Thucydides)에 와서 역사가 보다 과학적인 연구의 대상으로 발전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는 자기 이전의 역사서술의 약점이 철학적 객관성을 주장하면서도 신화의 차원에 머무르고 있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사물들을 바라볼 때 투키디데스는 그 사물들 자체의 관찰에 끝나지 않고 사건들과 사건들, 또는 인간들과 환경들의 상관관계를 밝히는데 주력하였다. 그러나 그가 “나는 과거에 일어난 사건을 분명하게 이해하고자 하며 미래의 어느 싯점에서 같은 형식으로 반복될 그 사건이 어떻게 진행될지를 분명히 알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해 역사를 집필한다.” Thucydides, The History of the Peloponnesian War, 1/22, trans. Rex Warner(Harmondsworth, 1954), p. 13.
고 고백했을 때 그 역시 역사를 순환적으로 이해하는 역사가의 큰 틀을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이같이 고전적 사가들이 “진정으로 인간과 그들 행위의 동기를 규명하는데 있어서 실패”했음을 선포하고 이에 대한 참 원인의 규명을 모토로 등장한 것은 다름이 아닌 히브리적, 기독교사관이었다.
나. 히브리적, 기독교사관
히브리적, 기독교사관은 고전세계의 순환사관과는 그 모습에 있어서 큰 차이가 있었다. 순환사관의 헬라전통과 달리 히브리적, 기독교의 역사전통에서는 이 세상의 역사 속에 자신을 적극적으로 개입시키는 야웨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중요한 모티프로 삼았다. 기독교역사관의 원류가 되기도 하는 히브리적 역사관 속에는 세상의 시작으로부터 기원하는 인간의 역사 속에는 분명한 ‘역사적 흐름’이 존재하는 것이었고 무엇보다도 그 역사 속에는 분명한 의미가 내재해 있었다. 하나님은 창조의 주인으로서 그의 백성들과 언약을 통해 연결되어 있으며, 이러한 언약 속에서 그는 히브리 조상들을 여행으로 인도하고 또한 약속의 땅을 기업으로 주기도 하는 ‘사랑의 하나님’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역사의 시작은 어느 시공상의 한 싯점에 이 세상을 무에서부터 창조하시는 야웨 하나님의 계획과 함께 시작되고 자신들을세상 속에서 ‘선민’으로 부르시는 과정을 통하여 그들을 훈련시키시고, 때때로 채찍질하며, 또한 그들에게 십계명의 전달자로, 계시로 나타나시는 하나님은 또한 “공의의 하나님”으로서 최종의 역사과정에 있어서 그의 선하신 목적대로 심판주로서 역사를 심판하실 것이라는 믿음이 이들의 역사관이었다.
이러한 히브리적 역사전통을 등에 업고 기독교 사관은 배태되었다. 기독교는 선하신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히브리 전통을 그대로 수용하였다. 그러면서도 기독교 역사속에는 인간의 타락과 그에 따르는 인간의 현존에 대한 보다 엄격한 현실이해가 뒤따른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이러한 인간들의 ‘죄인으로서의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역사 속에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의지의 확고한 계시인 것이다. 히브리인들이 구세주를 대망하였다면 기독교는 이 구세주가 오셨음을 선포하는 데서 시작한다. ‘하나님 자신이 인간이 되어서 역사속에 개입하셨다’는 것이 그들의 선포의 내용이었다.
이같은 히브리적, 기독교적 역사이해는 초대교회 시대에서부터 주변 세계와는 분명히 다른 목소리를 가지고 역사와 세계를 이해하는 초석이 되었다. 져스틴과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맨트와 같은 이들은 유대인과 이교도들에 대항하여 하나님의 구원행위의 연속성 즉, 히브리적 전통의 완성자로서의 기독교의 모습과 역사속에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교육하신다는 기독교 사관의 교육적 목적을 변화하였다. 반면에 이레네우스는 영지주의자들에 반대하여 창조와 계약의 통일성을 주장하였다. 이 속에서 이레네우스는 창조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역사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참 인간됨을 입고 오시는 바로 그 분과 동일한 분임을 강조하고 있다. 오리게네스는 로고스론을 이용하여 역사를 통일된 전체로 파악하였다 즉, 세상 창조의 순간에 이미 로고스로서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계셨음을 강조한다. 한편 유세비우스와 오로시우스는 로마의 평화에 기초한 제국의 신학을 수립하기도 하였다. 기독교를 공인한 로마제국은 더 이상 ‘적 그리스도’의 표징이 아닌 하나님의 나라의 지상의 실현으로 이해될 수 있었던 것이다.
히브리적, 기독교역사관이 ‘직선적사관(Linearity)’으로 분명히 자리잡은 것은 고대말기, 중세초기의 어거스틴의 신학적 작업의 결과이기도 하다. 어거스틴은 주후 410년 여름 알라릭이 고트족을 이끌고 세 번째로 로마를 침공하는 것을 목도하면서 이 책임을 기독교인들에게 묻는 이방인들에 대하여 기독교 신앙의 변증을 위하여 역사철학-신학적인 저서 ‘신의도성’을 집필하게 된다. 이 책은 모두 22권으로 되어 있는 방대한 저서로 그의 ‘고백록’과 함께 대표적 저술로 알려지기도 하는데, 이 속에서 어거스틴은 두 도성, 두 국가, 하나님의 종들과 세상의 자녀들, 사랑의 나라와 자만의 나라 등의 주제를 다루고 있다. 그는 세상에서 선인과 악인에 관계없이 좋은 일과 나쁜 일이 일어나게 마련이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대한 자세의 차이라고 보았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떠한 경우에도 하나님의 도성의 영원함을 아는 것이다. 이 세상은 바로 이 하나님의 도성에 속하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가 서로 뒤섞여 있다. “이 두 도성은 최후 심판에서 서로 분리될 때까지 이세상에서는 서로 섞여 있고 또 꼬여있는 것이다.” 어거스틴, 신의 도성, 제 1권 1장, 34장.
어거스틴의 역사이해는 이처럼 최종의 시한을 향해 의미와 목적을 가지고 진행되는 “직선적 역사(Linearity)”를 강조하는 역사관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이 속에서 고대의 인간들이 “계속적으로 돌고 돌면서 입구도 출구도 즉 죽을 인간들의 시작도 끝도 알지 못하고” 있었던 역사관을 청산하고 “모든 것을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운명을 극복하는 도덕적 의지의 인간과 역사가 창출되는 것이다.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다르게 분명한 의지가 있는 것이다. 이 의지 속에서 ‘하나님의 도성’의 도덕적 인간의 모티브를 발견한다. 즉 ‘하나님 사랑’으로서 ‘자기사랑’을 극복하는 도덕적 결단의 주체자요, ‘뜻없는 운명에의 굴복’을 거절하는 하나님 나라의 건설자인 것이다.
다. 진보사관
진보사관은 일종의 히브리적, 기독교사관의 세속화 형태라고 볼 수 있다. 기독교사관이 역사를 시작과 종말이 있는 ‘직선적(Linear)사관’을 견지하는 것과 같이 진보사관 역시 역사는 발전을 향하여 나아가는 ‘직선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진보사관에서는 역사속에 개입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언급이 없다. 역사는 자체적으로 발전을 거듭하여 스스로 더욱 밝은 미래를 향하여 나아간다.“ 인류의 역사는 인간이 스스로 성인이 되어가는 역사이다. 따라서 성인이 되어가는 역사속의 인간들은 스스로 더 큰 자유를 쟁취하는 역사의 주인공인 셈이다. 고대사회일수록 인간은 제왕이나 권력자에 의하여 자유가 구속되는 삶을 살아왔다. 그러나 역사의 흐름을 따라 인간은 스스로의 투쟁을 통해 더 맣은 자유를 구가할 수 있게 되었고 이러한 계속적인 흐름은 미래로 나아갈수록 더욱 뚜렷하게 나타날 것이다.
진보사관 속에는 이처럼 인간의 가능성에 대하여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미래를 늘 더욱 밝은 것으로 그리고 있다. 진보사관이 어떠한 두 싯점사이의 인간의 순례자적 여정을 그린다는 점에서는 히브리적, 기독교사관과 흡사한 면모를 가지고 있긴 하지만 이들에게는 역사의 시작은 창조도 아니요 또한 역사의 종말도 심판이 아닌 것이다. 이들에게 있어서 물론 어느 싯점에서 인간의 진보를 역행하는 짧은 기간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서양의 역사에 있어서 소위 ‘중세암흑기’는 바로 그러한 시기였다. 이 기간동안 인간의 자유는 심하게 구속되었고 발전을 향한 인간의 역사는 잠시 퇴조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기간은 일시적일뿐이다. 결국은 인간은 더 나은 역사의 길로 나아가도록 되어 있다. 진보를 향하는 인가의 욕구를 막을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러한 진보사관은 주로 18세기의 소위 ‘계몽주의’사상의 시대적 배경을 등에 업고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데카르트식의 명제에서 볼 수 있듯이 이들은 인간을 역사의 중점에 놓고 모든 것을 생각한다. 기독교에서 이야기하는 하나님의 개입으로서의 소위 “계시”도 다름이 아닌 인간의 역사자체인 것이다. 따라서 “계시”는 인간의 이성의 연장인 셈이다. 계시와 함께 ‘섭리’에 대한 개념 또한 새롭게 해석되었다. ‘섭리’자체가 부인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말은 원인과 결과를 규명하는 자연적 인과관계의 틀속으로 갇혀 버리고 말았다. 이를테면 버넷(Burnet) 같은 사람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만일 우리가 자연적 섭리(Natural Providence)에 대해 보다 공정한 사고를 유지한다면 사물의 기원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 필요 이상으로 기적이라든지, 제 1원인 등을 언급함으로 그 인과관계의 사슬을 너무 짧게 끊어서는 안될 것이다.” Burnet, Theory of the Earth, 2, p. 11. D.W.Bebbington, Patterns in History, p. 72에서 재인용.
이처럼 섭리를 재해석하는 인간의 이성은 늘 합리를 추구하는 믿을만한 기능을 수행한다. 이성의 역할로 인간의 미래는 더욱 밝은 행복을 보장받는 것이다. 이러한 계몽주의 사상은 19세기에 이르러서 주로 헤르더(Herder), 레씽(Lessing), 그리고 헤겔(Hegel)의 역사관에 힘입어 더욱 발전하게 되었다.
헤겔(Hegel)의 역사관은 진보사관에 있어서 특히 괄목할 만한 기여를 하였다. 헤겔에 의하면 역사는 ‘세계정신의 자기구현’ 과정인 것이다. 이는 정,반, 그리고 합의 자기 변증법의 과정을 따라 제 3의 가능성을 항상 도출하는 역사의 계속이다. 따라서 역사의 최종 발전 단계는 항상 자기가 살고 있는 현세라는 싯점에서 경험할 수 있다는 결론 아래 헤겔은 쉽게 자신이 몸담고 있는 프러시아왕국을 진보의 종결점으로 보기도 하였다. 역사가에 있어서 에드워드 기브온(Edward Gibbon)같은 이는 “세계의 각 시대는 인류의 참다운 부와 행복과, 지식과 덕조차를 증대시켜왔고 지금도 증대시키고 있다는 유쾌한 결론” E.Gibbon, The Decline and Fall of the Roman Empire, 제 38장. E.H.Carr, 역사란 무엇인가, 길현모역 p. 146 에서 재인용.
이라는 말을 자기 저작의 주제에 어긋남에도 불구하고 주저없이 적어 넣었다. 이것은 이들이 크게 진보사관이 시대적 정신이었던 때에 저작활동을 했다는 점에서 항상 이러한 진보의 개념에 영향을받고 있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
역사와 철학에 있어서 진보의 개념을 일단 자율화되기 시작하는 인간 이성의 영역과 내재적인 역사발전의 모티브에 힘입어 사회제반의 다른 영역에서도 함께 발견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자연에 있어서 다윈(Charles Darwin)의 ‘진화’의 개념은 그때까지 헤겔 등이 역사는 진보하는 것이지만 자연은 진보함이 없는 확연히 구분되는 개념이라는 등식까지 뛰어 넘는 새로운 가설을 소개하는 셈이었다. 다윈에 의하여 자연도 진화한다는 개념이 소개되면서 “진보”에 대한 신념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아담 스미스(Adam Smith)는 ‘노동력의 창출에 있어서 가장 획기적인 발전에 대한’ 원인의 분석으로 그의 ‘국부론’을 메우고 있다. 사회 경제의 국면에서도 발전과 진보의 개념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셈이었다. 루소는 ‘에밀(Emile)'에서 자연의 좋은 영향의 경험이 어떻게 이상적으로 아동을 자라게 하는가에 대한 낙관론을 교육학적으로 펼치고 있다.
19세기에 들어와서는 이러한 진보사관의 영향이 신학의 여러 분야에서도 나타나게 된다. 슐라이에르 마허는 구원에 이르는 은총을 설명하면서 ‘신앙은 신에 대한 절대의존 감정’임을 역설한다. 이 속에서 그는 종래의 ‘구원이 위로부터 임한다’라는 기본적인 공식을 거부하고 인간의 주체적 선택을 더 중요한 구원의 요인으로 인식한다. 리츨에 이르러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적 완성이 그를 하나님께서 적극적으로 아들을 삼게되는 배경임을 이야기 하면서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서 우리도 인간적인 자기 완성으로서 비로서 구속에 참여하게 된다고 보았다.
20세기에 들어와서 비로소 이 진보사관은 커다란 딜렘마를 맞이하게 된다. 즉 20세기의 양차대전을 겪으면서 끔찍한 학살의 장면을 목격하는 인류는 진보사관에 심각한 회의를 느끼게 된다. 어렇게 이성의 합리성을 추구하여 찬란한 미래를 약속하는 인간의 행위가 600만 이상이나되는 인간들을 가스굴에 쳐 넣어 생으로 죽일 수 있단 말인가! ‘진보’의 의미가 이러한 끔찍한 결과를 의미하는가? 칼 바르르는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의 한 가운데서 ‘아니오(Nein)!’를 외치면서 성서, 특히 로마서에 나타난 인간성의 부패에 대하여 신랄하게 고발하고 있다. 역사의 교훈 앞에서 인간은 다시금 심각히 자신들의 심성을 장미빛 낙관으로 보아왔던 시각을 겸허히 반성하기에 이르른 것이다.
기독교 사가인 라토렛은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기독교의 역사관이 반드시 진보를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분명한 것은 진보가 일어나고 있는지 어떤지를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진보를 측정할 수 있는 기준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K. S. Latourette, The Christian Understanding of the History, 이석우역, 기독교와 역사이해 (서울: 성광문화사, 1989), p. 229-30.
라토렛에게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진보의 기준이었다. 이 기준이야말로 기독교 고유의 역사인식의 준거인 바 이렇게 그 기준을 이야기하고 있다. “기독교의 측정 기준은 기독교에만 적용되는 것으로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나타내신 하나님의 형상에 얼마나 가까이 갔느냐는 것이다.” Ibid., p. 230.
그에게 있어서 어느 한 시대가 진보를 구가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계시한 하나님의 형상에 가까이 갔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의미안에서 소위 ‘진보사관’은 수많은 값비싼 역사의 교훈을 통해서 비로소 그 원래의 뿌리가 되었던 히브리적, 기독교사관과의 화해를 다시금 약속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라. 역사주의
다음으로 살펴볼 역사관은 ‘역사주의(Historicism)’라고 불리우는 일련의 주장이다. 역사주의는 주로 계몽주의 이래로 등장했던 이성을 신뢰하고 이를 바탕으로 역사의 진보를 주장했던 진보사관에 반기를 들면서 등장한다. 역사주의에서는 진보사관의 역사가들이 이성을 기초로하여 더 밝은 인류의 미래에 대한 가능성을 이야기하면서 주로 간과했던 각 시대별, 지역별 역사에 대한 철저한 탐구를 주장한다. 이들에 의하면 각 시대별, 지역별 역사는 단순히 더 밝은 다음 세대의 역사를 위한 디딤돌 정도로 취급되어서는 안된다는 주장이다. 한 사회, 한 단체가 가지고 있는 현재의 상황은 철저히 역사적 산물이기 때문에 역사의식을 가지고 이를 조명하지 않을 때 우리는 상황에 대한 오해를 가져올 수 있다고 보았다. 역사는 단순히 직선적으로 진보하는 것이 아니라 각 시대의 역사는 각 시대별로 자체안에서 목적이 되어야 한다. 역사가 랑케(Ranke)는 이러한 의미에서 “모든 시대는 직접 신에게 접속되어 있다...” Leopold von Ranke, The Theory and Practice of History, ed. G.G.Iggers (Indianapolis, 1973), p. 53.
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러한 지역별, 시대별 역사의 중요함을 강조하는 역사주의는 18,9세기의 내쇼날리즘(Nationalism)의 사성적 근간이 되기도 하였다.
역사주의 사관의 옹호자들이 진보사관에 특히 동의하지 않는 부분은 역사를 이해함에 있어서 ‘이성’을 중요시했던 그들의 태도이다. 역사주의가 보는 역사는 단순히 가설에 입각하여 순수한 이성적 추론을 거쳐 추출되는 수학적 공리와 같은 산물이 아니었다. 역사는 인간들이 그 속에서 실제로 남겨놓은 ‘삶’의 흔적이며 어떠한 가설이나 공리가 아닌 것이다. 한 물건의 이모저모를 가장 잘 알 수 있는 사람은 그 물건을 만든 사람이듯이, 역사는 사람들이 만들어 낸 산물이기 때문에 우리가 사람의 어떠함을 올바르게 파악해야만 역사를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역사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방법은 이성적 추론을 통해서가 아니라 ‘심정적 직관’을 통해서이다. 인간의 심성속에 시대를 뛰어 넘어서 그 어떠함을 파악할 수 있는 방법은 이성적 분석보다는 ‘이해’라고 불리우는 직관을 통해서 가능하다는 것이다. 방법은 이성적 분석보다는 ‘이해’라고 불리우는 직관을 통해서 가능하다는 것이다.
역사주의사관의 대표적인 인물들로는 18세기 이태리 프로렌스의 비코(Giambattista Vico), 독일의 가테러(Johann Christoph Gatterer), 그리고 간접적으로 역사주의에 영향을 끼쳤던 아이디얼리즘(Idealism)의 칸트(Immanuel Kant), 낭만주의의 괴테(Goethe) 등이다. 비코는 데카르트의 방법론을 배격하는 일에서부터 그의 역사주의를 펼쳐나간다. 역사는 수학의 공리와 같은 것은 아니다. 한 개물을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은 다름이 아닌 그 물건을 만든 사람이다. 인간은 실험을 통하여 자연의 오직 일부만을 이해할 뿐이다. 오직 창조의 주인인 신만이 전체적인 사실에 대하여 알고 있다. 역사적 지식은 과거의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는 우리 인간들 자신의 마음을 잘 연구함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보았다. 비코는 히브리인들의 역사에 그들의 신이 개입하심을 인정했다. 그러나 그는 그외의 다른 나라의 역사에서는 인간들이 그들 역사의 주인이라고 봄으로써 기독교적 역사관을 부인한다. 이러한 역사에서의 인간이 주체라는 사관은 포이에르바하(Feuerbach)를 거쳐 다음에 등장하는 칼 막스(Karl Marx)에게 영향을 주게 된다.
칸트에 이르러 모든 것을 이성의 진보에서 찾으려던 진보사관은 일단 제동이 걸린다. 칸트에게 있어서 인간의 마음 혹 정신은 인간 밖의 세계를 통해서 받아들여지는 감각적 인상들에 ‘범주들’을 제공한다. 이러한 범주들(이를테면 단?복수의 개념, 원인, 그리고 필연 등)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의 경험들을 조직화하는 것이다. 인간의 이성의 기능은 단순히 생각하고 분석하는 것 이상이다. 인간의 총체적 ‘정신’이 지식을 얻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것은 실천이성을 포함한다. 이와같이 넓은 의미의 소위 ‘관념들’이 세상을 이해함에 있어서 필수적이기 때문에 이것은 관념주의(Idealism)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와같은 칸트의 관념을 통한 지식의 획득은 감정, 상상력, 통찰력, 직관 등의 덕목을 중요시하는 역사주의와 쉽게 손을 잡을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괴테 등의 낭만주의자들이 생각하는 모든 만물에 신성이 있다는 사상 역시 역사주의가 선호했던 사상이었다. 자연을 포함하여 인간의 역사, 그리고 모든 사물들을 이러한 애정으로 바라보고 싶어했던 것이다.
이러한 역사주의의 방법론인 ‘직관’에 문제의식을 느끼고 이를 뒷받침하여 인식의 해석학적 통일을 가져오고자 시도했던 것은 딜타이였다. 왜냐하면 딜타이 자신도 역사에 있어서 실존적인 인간의 경험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지만, 그는 개개인의 ‘직관’에 역사해석을 맡기는 것은 너무나도 주관성이 강한 것이고 따라서 자의적인 역사해석을 야기할 수 있다는 문제점을 또한 알고 있었다. 실제로 헤르더(Herder), 드로이센(Droysen) 등의 자의적 역사해석을 힘입어 독일은 군국주의를 표방할 수 있게 되었다. 19세기의 국수주의적 민족주의(Nationalism)운동들 역시 개별 국가를 지나치게목적으로 보는 역사주의적 방법론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딜타이는 이러한 자의적 역사해석을 막는 해석학적인 원리를 제공하려고 시도하였으나, 얼마나 많은 역사주의 사가들이 통일성있는 해석학적 원리를 가지고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마. 마르크스주의사관
이제 마지막으로 막스주의 사관을 살펴보자. 마르크스(Karl Marx)의 이론을 이해하는 것은 그의 선구자격이었던 헤겔의 역사관을 이해함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헤겔은 카아(E.H. Carr)가 지적하듯이 기독교사관의 섭리의 법칙을 이성의 법칙으로 바꾸어 놓은 사상을 토대로 하고 있었다. 그는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의 철저한 추종자였다. 헤겔은 세계정신의 합리적 목적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개인이 ‘자기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과정속에서 등시에 그 이상의 일을 달성한다’고 보았다. E. H. Carr, op. cit. p. 179.
그에게 있어서 역사상의 발전은 자유의 개념을 향한 발전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발전의 개념의 공식은 갖추었지만 그 내용은 없는 것과 같다’고 19세기 러시아의 문인이었던 헬젠(Alexandr Ivanovich Herzen)은 비판한다. Ibid., p. 180.
아담 스미스와 헤겔의 제자였던 마르크스는 세계가 합리적인 자연법칙에 의해서 지배되고 있다는 사고방식에 출발한다. 헤겔의 입장과 같은 것이긴 했지만 이보다 좀더 실천적이고 구체적인 방법을 취한다. 그는 “법칙에 지배되는 세계가 인간의 혁명적인 이니셔티브에 대응하면서 합리적 과정을 통하여 발전한다는 견해에로의 전환을 이룩하였다.” 마르크스의 결론적인 견해를 종합해보면 역사에는 다음과 같은 세가지 법칙을 따라서 전개된다고 한다. 즉 이 세가지는 불가분의 관계를 이룸으로써 한가지 합리적 과정을 연출한다고 보았다. 첫째는 역사가 객관적인 주로 경제적인 법칙을 따라서 전개된다는 것이고, 둘째는 이에 대응하여 변증법적 과정을 통하여 이룩되는 사상의 발전이며, 마지막으로 이에 따른 계급투쟁의 형태하의 실천이라는 것이다.
역사의 진보의 과정은 헤겔식의 관념을 통한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구체적인 경제적 조건의 진보로 말미암고, 이러한 진보는 계급투쟁의 실천을 통한 변증법적 과정을 거쳐 최종적으로 역사 속에서 실현될 것이라는 마르크스의 역사관은 자본주의의 분배적 모순을 극복하고 이른바 ‘사회적 공산주의’의 실현으로 역사의 진보가 가시적으로 나타날 것이라는 것이다. 모든 갈등은 정신적인 것보다는 경제적인 욕구에서 시작되었다. “국가안의 모든 갈등, 민주주의와 귀족정치, 군주정치간의 갈등, 선거구 내의 갈등 등은 단지 서로 다른 계급들이 싸우는 진짜 갈등이 환영적인 형태로 보여짐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다. Marx and Engels, The German Ideology, ed. and trans. by R.Pascal, Part (New York: International Publishers, 1939), p. 24. 김기홍, 역사와 신앙 (서울: 두란노서원, 1990), p. 45 에서 재인용.
이러한 의미에서 마르크스의 역사관을 계급투쟁을 통한 ‘유물사관’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리고 이는 또 다른 형태의 진보사관으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마르크스주의는 후에 레닌의 러시아혁명을 거치면서 소위 지구상에 ‘공산주의’의 출현으로 가시화되긴 했지만, 그의 유물사관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끊임없는 비판의 소리를 면할 수 없었다. 역사 속의 수많은 위대한 예술적 성취도 빵, 의복, 집을 얻기위한 인간의 행위였는가? 세익스피어의 희극속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들은 오로지 빵을 위한 인간들이었나? 미국의 역사 속에서는 단순히 인간의 경제적 욕구가 인간의 행위의 전부가 아님을 보여주는 극적인 노예해방이라는 사건이 있지 않는가? 무엇보다도 작금의 20세기 후반의 역사에서 나타나는 사회주의국가의 해체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역사주의’가 그래도 인간 속의 ‘정신’을 통한 이상을 잃지 않고 이를 추구하는 노력을 보이는데 비해서 마르크스주의는 이에서도 한참 벗어나 있다고 볼 수 있다.
결론
이상의 역사에 있어서 제 유형들은 그 강조점에 있어서 다소의 차이는 있지만 히브리적, 기독교사관을 제외하면 역사의 유형을 순환에 의한 ‘운명의 힘’이나 인간 자신이 신적 개입을 배제한 이성, 혹 총체적 ‘정신’, 그리고 이를 넘어선 ‘물질’의 원리 속에서 찾고 있다. 히브리적, 기독교사관이 역사속에 하나님의 개입을 ‘섭리’의 차원에서 고백하고 있는 것은 단지 이스라엘이라는 특수한 선민집단의 역사 속에만 그치는 것은 아니다. 물론 ‘구속사’로 불리우는 성소 속의 하나님의 계시의 역사는 히브리적, 기독교사관의 중심을 이루는 가장 핵심적인 사안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하나님께서 히브리인, 혹 기독교인들만의 하나님이라는 자의적인 역사이해는 배제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일반 세계사와 성서 속의 구속사는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인가? ‘기독교적 역사관’을 이야기할 때 반드시 규명해야하는 주제일 것이다.
4. 일반사와 구속사의 상관관계
최근의 기독교 역사 신학의 범주에는 일반 세계사와 구속사의 관계를 조명하고자 하는 일련의 노력들을 찾아볼 수 있다. 이는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라는 신학의 출현과 특히 로마 카톨릭의 ‘제2 바티칸 공의회’ 신앙 선언 이후에 더욱 활발히 거론되는 신학적 주제로서 하나님께서는 세상 ‘창조의 주인’이실 뿐 아니라, 그 세계의 ‘관리자’라는 신학적 통찰로부터 유래하고 있다. 즉 세상의 창조와 함께 시작된 역사속에서 이스라엘을 선택하기 위하여 그의 조상 아브라함을 불러 갈대아 우르를 떠나게 하시고 그의 후손들을 훈련시키시어 급기야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시는 파노라마식의 구속사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직접 그 입안자와 관리자가 되시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지만, 더 나아가 구속사적 경륜과는 상관없이 보이는 일반 세계사의 흥망성쇄에도 하나님의 실제적 주권이 내재해 있음을 고백하는 시각이다.
이러한 일반 세계사와 구속사와의 관계를 규명함에 있어서 판넨베르그(Pannenberg)는 구속사와 세계사의 통일성을 언급하면서 “구속사를 일반적인 사건과는 다른 종류의 영역으로 구분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미리 앞당겨 일어난 구속사는 세계사와 마찬가지로 원칙상 이성에 의하여 인식될 수 있다. 그것이 사실상 인식될 수 있는가?의 문제는별개의 것이다” W.Pannenberg, Heilsgeschehen und Geschichte, in: Grundfragen systematischer Theologie, S.47. 김균진, 기독교조직신학 p.360.
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판넨베르그는 구속사와 일반 세계사의 질적 구분을 용인하지 않고 있는 셈이다; “물론 하나님은 이 세계와는 전혀 다르다. 그러나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이 세계안에 있음을 뜻하며, 역사는 그의 창조 세계 속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행동이다. 역사의 모든 사건들은 하나님 자신이 일으키는 구원의 사건들이요, 이 사건의 역사가 곧 세계사이다. 그러므로 역사, 곧 세계사는 하나님의 계시이다” Ibid. p. 113
판넨베르그는 성서 속의 묵시 사상가들이 바로 구속사를 보편사 곧 보편적 세계사로 확대시킨 인물들의 대표적인 예라고 보았다.
그렇다면 피와 음모 그리고 암투 등으로 점철되는 세계사의 부분들도 구속사의 연장이라고 볼 수 있다는 말인가? ‘구속사는 일반 세계사와는 구분이 되지만 그 속에서 전개되는 것’이라는 것이 주로 오스카 쿨만 등의 구속사학파에 속하는 학자들의 입장이다; “구속사는 역사안에서 전개되며 이러한 뜻에서 구속사는 역사에 속한다. 구원사는 역사 옆에 나란히 있는 또 하나의 역사가 아니다. 구속사는 점진적 감소와 점진적 확대의 형식으로 일어난다. 즉 창조-인류-이스라엘-남은자들-예수 그리스도라는 감소의 형식으로 일어나며, 예수 그리스도-사도들-최초의 공동체-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의 교회-세계라는 확대의 형식으로 일어난다” O. Cullmann, Christus und die zeit, s. 141 김영한, 바르트에서 몰트만까지, p.215.
고 한다. 이에 비해 바르트는 구속사를 ‘모든 역사의 지속적 위기’라는 형태로, 또한 몰트만은 역사의 의미를 보편사 속이 아닌 ‘개인의 실존’ 속에서 각각 찾고 있다.
이상의 이론들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관점은 ‘하나님의 구속사는 세계사와는 구분이 되지만 분리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즉 구속사는 세계사의 밖이나, 개인의 실존에서만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니라, 전 역사를 포함하는 미래적 지평을 가지고 전개되며 따라서 종종 세속사의 역사과정 속에서 구속사적인 영적 모트비가 발견된다는 사실이다 이에 대하여 라토렛(Kennet Scott Latourette)교수는 “The Christian Understanding of History”에서 기독교 신앙과 학구적 역사가 통합될 수 있다고 믿었다; 기독교는 전체 인류를 배경으로 놓고서 이해되어야 한다. 기독교의 전망은 그 범위에 있어서 우주적이기에 기독교 역사를 개괄하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 서술의 주요 단계마다 그것을 우주적인 배경에 비추어 관찰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K.S. Latourette, 기독교사(상), p.22.
고 보았다. 그러한 의미에서 크리스토퍼 도슨(Christopher Dawson)이 ‘The Dynamics of World History'에서 역사의 핵심적인 원동력은 종교라고 하면서 동양 문명에도 비판적인 차원의 기독교적 역사해석 연구가 적용될 수 있다고 말한 것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구속사는 본질적으로 보편적 역사와 동일시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구속사는 역사내에 있는 한 과정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좁은 한 과정은 그것으로 끝이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구속사와 세계사의 철저한 구분을 주장하는 바르트의 개념 즉 “하나의 은폐된 역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역사안에서 활동해 오셨으나 ‘구속사’에 위배되지 않게 활동하신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구속사는 그 자체를 위하여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일반 세계사를 위하여 일어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구속사의 목적은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피조물을 구원하는 데 있다. 한편 보편적 세계사는 구원사의 외적인 근거를 형성한다. 일반 세계사의 목적 역시 그 자체에 있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로 시작된 구속사를 위해 봉사하며 그 목적이 성취되는 자리에 그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다.
B. 기독교 세계관 모색을 위하여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다. 그리고 행동하는 동물이다. 이 두가지 명제를 합하여 말하자면 ‘인간은 생각하는 대로 행동하는 동물이다’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인간의 사고가 인간의 행동과 삶의 양식을 규정한다는 점에서 한 인간이 어떻게 사고하고 어떻게 결단하는가는 매우 중요한 결과를 낳게 되는 법이다. ‘세계관’이라는 말은 그러한 의미에서 한 인간이 살아가면서 소유하는 사고의 유형이라고도 볼 수 있다. 제임스 사이어는 그의 “기독교 세계관과 현대사상”이라는 책에서 세계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세계관이란 무엇인가? 간단히 정의하면 세계관이란 이 세계의 근본적 구성에 대해 우리가(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견지하고 있는 일련의 전제(혹은 가정)들이다” 제임스 사이어, 기독교 세계관과 현대사상, 한국기독학생회 출판부 p. 19.
이 세상의 근본적 구성에 대해 모든 인간들은 나름대로의 전제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무신론자든, 유신론자든 상관없이 나름대로의 세계관을 형성하고 살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렇다면 어떠한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가? 우리 주변에서 보이는 세계관은 어떠한 경로를 따라 우리에게 전달되는 것인가? 성서적 기독교에서는 과연 이 세계의 구성에 대하여 어떤 전제들을 가지고 있는가? 이러한 문제에 답하기 위해서는 동?서양의 세계관을 포함하여 제반 세계관을 비교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일 것이다. 통상적으로 동양과 서양의 차이에 따라 커다란 세계관의 차이를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자는 본고에서 주로 첫째: 서양사상의 흐름을 一考함으로써 오늘날 세계관의 흐름을 간파하고 둘째: 바람직한 성서적 기독교 세계관을 제시하며 마지막으로: 그러한 세계관을 따라서 살아가는 삶의 본보기를 제시함으로써 본 단원의 과제를 수행해 보는 것으로 범위를 제한해 보기로 한다.
1. 현대인과 세계관
가. 고대사회의 물활론(Hylozoism)과 ‘인격성’에 대한 개념
근대과학의 성격을 규명하는 글을 쓰는 가운데 종교사가이며, 또한 예술사가이기도 한 쉐퍼(Francis Schaeffer)는 “근대과학은 ‘닫혀진 체계 속의 자연 원인의 제일성’에 대한 탐구로 그 성격을 규명할 수 있다”고 간파하였다. Francis Schaeffer, Escape from Reason, 이성에서의 도피에서 시작하는 전제
즉 자연의 궁극원리를 규명하는 과학의 정신이 세계내적 제원인들로 말미암는 원리라는 것이다. 이러한 근대과학 정신의 뿌리를 캐나감에 있어서 쉐퍼는 그 사상사적 원류를 ‘자연과 은총’의 종래의 구분을 포기하고 ‘은총’의 상층부를 인정하지 않았던 아퀴나스(Thomas Aquinas)이후의 철학, 신학사조에서부터 유래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오늘날 이러한 근대과학, 철학의 정신이 소위 ‘의미’를 찾는 ‘반정립(反定立)’의 사고구조를 더 이상 포기하고 여러 가지 형태의 비약 즉 우연성, 즉흥성, 무의미성 등으로 규명될 수 있는 갖가지 삶과 문화, 그리고 종교의 형태로 나타난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쉐퍼의 지적이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가지고 있다고 보면서 필자는 한걸음 더 나아가 고대사회의 물활론(Hylozoism)에 까지 그 원류를 거슬러 올라가 찾아 보고자 하는 것이다.
‘기독교와 고대문화’의 저자인 코크레인(Charles Norris Cochrane)은 고대사회속에서 물활론이 탄생하게 되는 배경을 설명하는 가운데 물활론 체계의 전제가 바로 ’닫혀진 세계속에 상호관련성‘으로 자연의 변경을 규정하려는 시도에서 출발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Charles Norris Cochrane, Christianity and Classical Culture, p. 422.
이러한 닫혀진 체계의 관련성에서 소위 ‘물활론’ 이라 일컬어지는 물, 불, 공기, 땅 등의 요소들( , elementa mundi)이 사물의 궁극적 인식이 되기에 이르른다. 이와같이 물(Thales), 공기(Anaxamenes), 불(Heraclitus), 규명할 수 없는 어떤 요소(Anaximander), 그리고 어떤 제한된 형태( , Phytagoras) 등으로 사물의 궁극적 존재를 인지함에 따라 이것이 가장 첫째되는 원리(Arche) 혹은 근본(Causa Subsisterdi, Causa principiunque rerum) 등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물론 이 첫째 원리(Arche)는 계속해서 ‘존재하는 것’과 ‘되어가는 것’에 대한 두번째의 원리 즉 ‘운동의 원리’(Ordo vivendi or finis omnium actionum)를 찾기에 이르렀고 이 원리는 곧바로 세번째 원리 즉, ‘지성의 원리’(Ordo or ratio intelligende, lumen omnium rationum)를 필요로 하는데로 발전되었지만 이 모든 소위 ‘원리들’의 배경에는 역시 닫혀진 체계로 존재의 개념을 이해하려는 시도들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고전세계 내지는 고대사회의 진리 체계속에서 기독교의 ‘3위일체 하나님’(Trinity)의 개념은 하나의 폭탄과 같은 가히 혁명적인 것이었다. 아타나시우스(Athanasius)에서 시작된 ‘진리체계의 인격성’에 대한 탐구는 어거스틴(Augustine)에게 이르러서 그 절정에 이르렀던 바 어거스틴은 아타나시우스의 ‘희랍적 구조의 3위일체’를 보다 역동성있는 상호 관계성 속에서의 통일성을 유지하는 “인격적 하나님”의 모습으로 돌리는 데 획기적 공헌을 하였다. 어그스틴이 보는 ‘3위일체의 하나님’은 서로 관계없이 존재하는 ‘존재자(Being)’일 뿐 아니라 ‘사랑의 매는 줄(Binclum Caritas)’을 통하여 적극적으로 ‘되어져가는(Becoming)’, 곧 인격적 관계를 수반하는 그런 역동적인 관계였던 것이다. 이러한 역동성을 수반하는 ‘인격적 진리’가 ‘닫혀진 체계’ 속에서가 아니라 ‘열려진 체계’ 속에 존재하며 이 진리가 실존한다는 사실에 대해 어거스틴은 그의 삶의 경험을 소개하였고, 이로부터 추출할수 있는 ‘진리의 인격성’을 소개하는 셈이 되었다.
이러한 입장에서 니케아(Nicene)신조 이전의 기독교와는 달리 니케아 이후의 기독교는 더 이상 이방세계의 ‘과학’을 두려워할 필요없이 대담한 자세를 가지고 ‘모든 진리는 기독교의 진리(All truth is Christian truth)’라는 논리를 전개하면서 ‘애굽을 점령하자(Spoil the Egyptians)!’라는 실천적 구호를 만들어 내었던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그들은 기독교와 고전주의 철학 사이의 갭을 줄일수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이러한 과정에서 ‘믿음의 진수(The Essentials of the Faith)’는 타협할 수 없고 또한 그렇게 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Ibid. pp.359-360.
나. ‘보편개념’을 둘러싼 중세인의 경험
근세 철학, 신학의 탄생을 이해함에 있어서 중세 스콜라주의 철학(Scholasticism)의 중요한 논제였던 ‘보편개념’으로부터 논의를 시작해 보겠다. 중세의 소위 ‘스콜라주의’는 신학과 철학의 대화를 통한 진리에의 접근을 모색함으로써 성립된 철학적 신학체계였다.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는 철학과 신학이 본질적으로 다른 내용이 아니라 진리로 접근하는 방법의 차이라고 보았다. 곧 신학은 계시된 진리를 통하여 하나님에게 이르고 철학은 경험에서 출발하여 자연 경험을 초월해 있는 본질에 도달하는 데 양자의 궁극적 목적은 하나님이라는 전제를 가지고 있었다. 곧 신학은 성서의 가르침에 의해서, 철학은 이성적 성찰의 결론으로 세계는 존재론적으로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보편’의 개념에 있어서도 아퀴나스는 온건한 실재론을 지향하였다. “보편은 스스로 자조하는 것이 아니라 개별자 안에 존재한다” 즉 보편은 사물안에(in re), 구체적인 사물로 존재한다. 그러나 보편들은 사물에 앞서서(ante rem) 하나님의 마음속에 실재하는 데 분리된 실체로서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으로 실재한다. 마지막으로 보편은 사물보다 후에(post rem) 추상의 과정을 거친 결과로서 인간의 마음속에 존재한다고 보았다. Thomas Aquinas, Summa Contra Gent. 1:65.
, Summa Theologia, I, q. 55. art. 3
, q. 85. art. 2 등에서 언급하는 보편개념
이렇게 함으로써 아퀴나스는 인간의 이성과 신적 실존에 대한 조화를 시도하였다. 그의 구원론에 있어서도 구원하는 사랑(Charity)은 인간 자신의 것이라 부를 만한 것으로부터 일어나는 자발적인 행위이어야 했다. 그는 “Faith is formed by love” 라는 구호 아래 영혼 속의 은혜는 인간의 타고난 실재 즉, 비록 그 기원이 신적인 것이라고 해도 인간이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그 사랑이 인간의 habitus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라고 보면서 ‘finitum capax infinitum’의 길을 제시하고 있다. 그에게는 은총, 혹은 은혜라고 하는 상층부의 개념이 이성, 혹 합리성이라고 하는 하층부의 개념과 분명한 경계를 이루고 있기는 하지만 양층의 존재를 인정하고 또한 이성의 활동을 통한 철학으로서 보편적 상층부의 개념에 이르를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스콜라주의의 전제는 곧 이어서 등장하는 오캄(William of Ockham) 등의 유명론자들의 등장에 이르러 해체되어가는 양상을 띄게됨을 볼 수 있다. 이들은 ‘보편은 다만 명치이고 사물 다음(post res)에 존재한다’고 보았다. 보편개념은 사물에 앞서서도 또 사물안에도 존재를 가지지 않고 그 자체는 단지 인식 주관에만 존재하는 단순한 사고의 산물로 보았다. 이러한 유명론의 입장에서 오캄은 추상적 지식에 대해서 직관적인 지식 즉, 내적 및 외적지각을 중시했는데 이와같이 생각하면 신학이라고 하는 것은 이러한 경험적인 직관적 지식위에 기초지워질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당연히 학문으로서 성립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게 될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이와같이 오캄에게 있어서는 지식(이성)과 신앙의 분리는 불가피한 결론이었다. 이로써 신앙을 이성에 적합하게 정립시키려는 스콜라철학의 고유한 목표는 해체되고 철학상의 진리와 신학상의 진리가 서로 전혀 구별되는 것이라고 하는 ‘이중진리설’의 입장에 서면 철학은 더 이상 교회의 교의에 구속됨이 없이 자유로이 자신의 영역속에서 탐구를 행할수 있게 된다. 소위 근세철학의 탄생은 이러한 흐름과 연관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후의 신의 개념은 오로지 신앙의 대상이지 철학내지 학문적, 또한 이성적 추구의 대상은 되지 못하는 셈이었다.
다. 자율화된 이성의 세계; 근대사고의 형성
계몽주의 이후의 사상은 모든 것을 이성으로 해석하려는 시도가 두드러진다. 이때의 가장 중요한 단어는 ‘이성’ ‘자연’ ‘자율’ 등이었다. 인간의 자율적인 이성은 자연의 법칙과 잘 조화를 이루어가면서 인간을 무지와 미신에서 자유케 해야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 땅은 점점 질서를 잡아가고 낙원이 되어 갈 것이라고 믿었다. 무엇보다 인간의 이성은 절대적인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 모든 전통이나 귄위는 이성의 도마위에서 시험을 당한 뒤에야 받아 들여졌다. 일단 이성의 영역이 자율적으로 독립하면서 은총이나 신의 보편적 영역들은 쉽게 자취를 감춰버리는 ‘이성만능주의’의 사조가 찾아오는 것이다. 볼테르(Voltaire)는 “자연이 인간만을 위해서 가지고 있던 완전의 단계에 인간이 도달할 것”이라고 보았다. 그리하여 태양이 모든 지성의 자유인들에게 비칠 날이 오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들에게는 이성외에는 주인이 없었다. 즉, 상층부의 세계는 잠식당한채 또 다른 ‘폐쇄된 세계 속의 자율’이 범람하는 시대적 경험을 맞이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계몽주의 시대의 사상 사조는 헬라사상의 확장이었다. 김기홍, 역사와 신앙, 두란노서원, 1990. p. 41.
라. 키에르케고르의 ‘비약’과 근대신학
근대철학이 합리성의 영역에서 신앙을 내어줌으로써 신학과 합리적 이성에 괴리가 생긴 이후 19세기의 실존적 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이러한 의식을 신학에 도입하기에 이르렀다. 반면에 그는 중요한 것은 모두가 신앙의 비약에 의해서 성취된다고 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합리적인 것과 논리적인 것을 신앙의 영역에서 완전히 분리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합리적인 것과 신앙의 영역은 상호간에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러한 사상의 귀결로서 쉐퍼는 “만일 합리주의적인 인간이 인간생활의 실제적인 것들 즉, 목적, 의미, 사랑의 타당성 같은 것을 취급할 경우 합리적 이성을 버리고 부득이 거대한 비합리적인 신앙의 비약을 감행할 수 밖에 없는 것으로 보았다.”라고 언급한다. Francis Schaeffer, God who is there, 기독교와 현대사상, p. 28.
합리적인 것 혹은 논리적인 영역의 이성활동의 결과는 개별적인 것, 무목적, 무의미, 그리고 인간을 하나의 기계 이상으로 보지 않는 개별자적 존재로의 이해가 불가피하고 오직 비합리적, 비논리적 비약속에서만 궁극적인 경험을 유지할 수 있다고 하는 이러한 키에르케고르의 ‘비약(Leap)’에 관한 개념은 오늘날 근대 정신세계와 현대신학의 형성에 이르기까지 심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듯이 보인다.
마. 현대신학에 대한 조명; 현대인의 세계관의 단면
불트만(Rudolf Bultmann)은 신앙과 역사를 단절시키는 역사관을 가지고있었다. 기독교는 그가 보기에 “과거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보다는 “현재 신자들의 경험속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에 더 관심을 쓰고 있다. 그는 “역사의 의미는 언제나 현재에 있고, 현재가 신자들에게 종말론적인 현재로 느껴질 때 역사에 있어서 의미는 실현된다.”고 보았다. Carl Braaten, history and Hermeneutics, Westminster, 1966. p. 133.
그에게 있어서 이천년전에 역사에 어떠한 일이 일어났는가는 그리 중요한 것이 못된다. 그것이 오늘날 신자들에게 주는 의미가 중요하다. 아마도 불트만이 역사와 신앙을 분리하는 사고를 주장하게 된 것은 더 이상 초자연적 상층부의 존재를 믿지않는 20세기의 사람들을 향한 “복음의 재해석을 위한 시도”에서부터 유래했을 것이다 “예수가 물위로 걸었다든지, 귀신을 좇아냈다든지, 육체로 다시 부활했다든지 하는 내용은 복음의 본질이 아닐뿐 아니라 해로운 것이라는”것이다 불트만은 소위 ‘신앙’은 합리성이 결여된 즉, “세계(혹 과학)와 역사와의 접촉의 결여”라는 형태로서 인식하고 있다. 따라서 모든 합리성은 ‘과학적 증명과 역사를 포괄하는 것이다’라고 볼 때 이제 더 이상 비합리적, 신화적 요인들을 이야기하지 말고 오늘날 우리의 실존에 필요한 합리적인 그리고 비신화적인 요인으로 복음을 재해석하자는 것이다.
로빈슨 등의 ‘신의 죽음의 신학’은 ‘하나님’이라는 용어까지 포함시켜 모든 것을 불필요한 것으로 믿는 나머지 제거해 버리고 있다. 신의 죽음을 실제로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죽었다고 했을 때 그들은 현대의 세속적인 세계에 있어서 하나님의 음성은 거의 들을 수 없게 되었다는 것 뿐만 아니라 ‘신은 본래부터 존재하고 있지 않았다.’(But that he never was)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표현들은 이들을 “그리스도교적 무신론자”라고 호칭하는 근거가 되고 있는데 이들과 낙관주의적 휴머니스트들과의 실제 사고구조속에서 별다른 차이를 찾아보기 어렵다.
틸리히 역시 기독교의 신앙이 나사렛 예수의 실제 삶과 죽음위에 세워져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한 그의 신앙의 개념은 아무런 객관적인 지식위에 세워져 있지 않고 역사적 인물 예수와 관련도 없다. 틸리히는 오로지 “역사의 실존적인 의미에 관심이 있다. 즉, 보편역사가 아닌 초역사에... ” Paul Tillich, The future of Religions, p. 33.
그는 존재에의 용기에 대해 “아무도 또는 아무것도 자신을 받아줌이 없어도 받아들여졌음을 받아들이는” 용기로 정의하였다. Paul Tillich, Courage to be. p. 185.
틸리히에게는 ‘절대적 신앙’이 신앙의 대상으로서 ‘아무 또는 아무것도’없이도 가능한 것이 된다. 이러할 때 전통적인 기독교의 신앙의 개념을 초월한, 어떠한 객관적 계시도 필요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는 ‘신을 넘어서는 또다른 신’의 개념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그는 ‘기도하지 않고’ 다만 ‘명상할 뿐’이라고 종종 그의 주변 사람들에게 고백하곤 했다 한다.
현대신학이 ‘신은 죽었다’고 이야기할 때 인간의 실존적 의미 즉, 합리성을 추구하는 논리적 귀결은 인간을 ‘폐쇄된 체계속의 존재’로 갇히게 하던가, 아니면 비합리적인 비약을 통한 비인격적 신과의 만남을 그 주제로 설정하는 분위기를 배태하였다. 합리적 이성을 가진 인간이 인격적인 성품을 가진 신과의 만남에서 기독교의 본질을 찾으려 했던 교회사속의 많은 인물들의 시도는 오늘날 ‘낡은’ 신앙의 모습일까? ‘열려진 세계’의 본질 개념은 아마도 ‘인격적 하나님’의 개념일 것이다. 오늘날 근대과학의 정신적 근간이 고대 희랍의 ‘물활론의 부활’이라는 비판을 면하기 위해 인격적 진리를 고수하는 전통의 부활이 시급히 요청된다고 할 수 있겠다.
- 맺는말
이상에서 현대적 세계관의 일단을 형성하는 서구사상의 흐름을 일견하였다. 이 밖에도 여러 가지 다양하고 복잡한 세계관이 존재하겠으나, 본고에서는 서론에서 밝힌대로 이상의 범위로 제한한다. 이제 이어서 성서적 기독교의 세계관에 대한 전제를 살펴보기로 하자.
2. 성경적 기독교 세계관
성서의 세계관을 정리하기 위해 편의상 신의 본질과 속성, 우주의 본질, 인간의 본성, 인간의 사후에 무엇이 일어나는가, 그리고 윤리의 기초와 역사의 의미 등의 기본적인 문제들을 다루어 보고자 한다.
먼저 신의 본질과 속성에 관한 기독교의 증언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시작 이전에 스스로 혼자 계셨으며, 그 분은 삼위일체의 인격적인 교류속에 계셨고, 무로부터(ExNihilo)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시다는 것이다. 그는 세상을 창조하실 뿐 아니라 세상의 보전자로 세상속에 인간의 역사속에 개입하시며, 인간의 구원을 위한 섭리를 펼쳐나가시는 분이라는 전제이다. 삼위일체의 인격적 교류는 성부, 성자, 성령으로 대표되는 ‘3위격의 하나님’이 또한 전체적으로 사랑의 교제를 통하여 ‘하나’를 이루고 계시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무로부터 창조하셨다’는 것은 그 분이 창조의 주인이심을 의미하는 동시에 어떤 ‘필요(Necessity)’나 ‘강제(Enforcement)’ 때문이 아니라 그의 ‘선하심(Goodness)’ 때문에 이루어진 사건임을 의미한다. 따라서 모든 피조물의 존재는 하나님의 존재를 상대화시킬 수 없다. 그러한 의미에서 하나님은 절대 타자로서 존재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절대 타자로서의 하나님은 초월의 존재인 동시에 우리 인간의 역사에 내재하시어 개입하시는 하나님이시기도 하다. 이러한 하나님의 개입은 다름아닌 ‘예수 그리스도’ 사건을 통하여 가장 잘 나타나고 있는 바,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창조 이전부터 성부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나 역사의 한 싯점에 ‘인간과 세계 구원’이라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시기 위하여 이 땅에 성육신하신 분이시다.
하나님의 ‘선(Goodness)하심’은 두가지 하나님의 성품을 통해서 나타나는 바 거룩은 악의 그림자도 용납하지 않는 그의 절대 공의를 강조한다. 사도 요한이 말했듯이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요일 1:5)라는 말씀으로 나타나신다. 하나님의 선은 또한 사랑으로도 표현된다. 요한은 다른 구절에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니라”(요일 4:16)고 가르친다. 이 사랑의 하나님께서 자기를 희생해 가면서까지 그의 은혜를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보여주시는 것이다.
두 번재로 우주의 본질에 대한 기독교의 이해는 하나님께서 우주를 ‘개방체계(Open System)’속에서 ‘인과율의 일치체(Uniformity)’로 운행하도록 하셨다는 것이다. 이 ‘개방체계’ 속의 ‘인과율의 일치체’라는 용어는 프란시스 쉐퍼의 것으로서 그 의미는 먼저 우주는 무질서하게 창조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우주의 질서는 명료하며 이러한 질서속에서 내일도 ‘해가 뜰것’을 예견하게 된다.
또 다른 의미는 우주는 이미 프로그램화되어버려 폐쇄된 형태가 아닌 하나님께서 계속적으로 우주의 운행의 전개 유형에 끊임없이 관여하고 계신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이신론 등에서 보는 ‘폐쇄된 체계속에서 인과율의 일치체’로 우주를 이해함으로써 결정론적인 성격을 지니며 따라서 어떠한 기적도 일어날 수 없다고 보는 세계관과 좋은 대비를 이루고 있다. ‘개방체계’에 대한 신념은 하나님께서 우주의 진행에 관여할 뿐 아니라 인간도 역시 우주의 재조정(Reordering)에 참여함을 의미한다. 우리는 인간이 세계를 잘 보전함으로 공해없는 세계로 만들든지, 아니면 심각한 생태계의 유발을 가져올 각종의 행위로 다시금 우주의 질서를 재편할 수 있음을 진지하게 고려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 세계는 인간과 하나님에 대하여 그 미래가 열려있는 것이다.
세번째, 인간의 본질에 관한 기독교의 세계관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함을 받았고 시공상의 한 싯점에 인간은 타락하였으나, 그리스도는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시어 자기의 자녀로 부르시어 영화스럽게 하신다는 점이다. 먼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는 사실은 인간은 인격적인 존재이며 동시에 자기초월성, 지력, 도덕성, 사회성, 창조성 등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 인간은 무소부재하거나 전능이라는 하나님의 속성에 관하여 그 형상을 닮았다는 의미가 아니고 하나님의 인격적 속성을 공유하는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을 가지고 있다. 그러하기에 인간은 스스로 손해를 각오하며 이타적 사랑을 실천하는 자기초월의 존재이며, ‘하나님이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라는 말처럼 끊임없이 그 삶 속에서 하나님의 재창조의 역사에 동참하는 창의력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하는 인간은 끊임없이 그와 교제를 나누며 살도록 초청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격성을 공유하면서 피조된 인간은 시공상의 한 싯점에서 창조주가 유일하게 금하신 명령을 어김으로써 타락의 길을 걷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형상을 지닌 인간이 자신과 밀접한 관계를 가질 자유도, 관계를 끊을 자유도 주셨던 것이다. 이후 인간의 도덕성, 자기 초월성, 지력, 사회성 등에서 심각한 결손을 야기하는 각종의 딜렘마를 초래한다. 다시말해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다른 사람들로부터, 자연으로부터, 심지어 자기 자신으로부터도 소외된 것이다. 이것이 타락한 인간의 본질이다. ‘보시기에 심히 좋은’ 이 세계에 각종 질병, 전쟁, 갈등 등이 생기게 됨은 이러한 타락의 결과였고, 이제 피조물은 심각히 자신의 구속을 신음하면서 바라보고 있는 상태로 전락된 것이다.
이러한 인간이 구속될 수 있다는 것이 기독교에서 이해하는 ‘복음’의 의미이다. 성경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이야기, 즉 자기를 버리고 떠난 인간을 향하여 자신의 아들을 보내심으로 구속의 사랑을 보여주심으로써 그 소외상태를 극복하고 자신과 다시금 화목하기를 바라시고 계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근본적 은혜와 풍성한 사랑을 통하여 사람들은 다시금 새 생활의 가능성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원래 피조시에 부여받은 ‘하나님의 형상’ 즉 인격성, 자기 초월성, 도덕성 등을 회복하는 것을 의미하며 동시에 영화로운(glorified) 삶에 이르는 부르심이기도 하다. 영화로운 삶이란 하나님, 이웃, 그리고 자신과 화평을 누리는 상태의 삶을 의미한다.
네번째, 인간의 죽음은 하나님 및 그의 백성과 함께 누리는 생명의 길이든지, 인간의 갈망을 궁극적으로 채워주실 유일하신 분과 영원히 갈라서는 문이든지 둘 중의 하나이다. 기독교에서의 죽음은 영원한 윤회의 시작도, 무에로의 진입도 아닌 또 다른 세계에 변형된 모습으로 존재함을 의미한다. 이것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의 존재상태인 영화된 존재로 변하거나, 아니면 영원히 하나님에게서 분리된 존재로 변하게 된다는 믿음이다.
마지막으로 윤리의 근거는 초월자이시며 동시에 내재하시는 하나님의 속성, 즉 사랑과 거룩함에 근거한다. 이러한 윤리적인 기준을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공생애 기간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인간들에게 보여 주신다. 이렇듯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행위를 통하여 인간의 윤리적 준거를 얻게 된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둘째 아담이라고 불렀다.(고.전 15:45-49)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는 온전한 인간으로서 완벽한 도덕적, 윤리적 삶의 본을 보이셨음을 의미한다. 그 분은 우리와 같이 시험은 받으셨지만 죄는 없으시고, 또한 자신이 십자가에 달리시면서까지 인간들을 사랑하시고 또한 자신을 십자가에 메어다는 인간들을 ‘용서해 주시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는 사랑의 차원을 인간들에게 윤리적 준거로 보여 주셨다.
이상에서 본 바 대로 기독교 세계관의 핵심은 ‘하나님의 장엄하심’에 있다. 오직 그 분께만 영광을(Soli Deo Gloria)! 이것이 이 세계관을 사는 사람들의 고백인 것이다.
3. 기독교 세계관의 실제: 기독인의 삶과 소명
이제 우리의 논의의 마지막으로 역사속에서 기독교 역사관과 세계관을 소유하면서 이 땅에서 그러한 삶을 살다가 간 역사 속의 인물들에 대하여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한다. 이들은 자신들을 부르시는 하나님 앞에 ‘소명’을 가지고 살았던 사람들이었다. 이들의 삶을 교회사적 조명을 통하여 살펴 보기로 하자.
가. 초대교회에 있어서 기독인의 삶과 소명
기독교 복음의 시작은 유대교로부터 그 근원을 두고 있지만, 유대교를 뛰어 넘는 그리스도의 복음의 사건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 근원은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구속하셨다!’라는 복음의 인식이었다. 그러한 면에서 모든 신앙인은 하나님의 은혜로 직접 그 앞에 나아가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며 기도하고 자신의 죄를 위해 중보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직접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는 성서의 발견은 그들도 ‘하나님 앞에 책임적 존재’로 서야하는 자각을 갖게 해 주었다. 이것은 소위 ‘만인제사장직’이라는 교리적 발견인데 이것은 루터의 시대에 이르러서 비로소 강조된 것만은 아니었다. 교회사적으로 볼 때 이미 초대교회의 전통에서 이러한 “모든 세례받은 그리스도인의 제사장직”에 대한 이해가 폭 넓게 다루어진 바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믿는 자들은 모두 영적은사를 받았다. 이 가르침에 예외적인 신자는 아무도 없다.” 거룩한 사도들의 헌장, 제8권, sec. 1, Anti-Nicene Fathers vii, p. 480.
이와같이 그리스도의 은혜에 참여한 모든 기독인이 각각 하나님께로부터 받게되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위해 쓰임받는 위치에 놓여 있게 된다.
5세기 교부중 한 사람인 라베나(Ravenna)감독 피터 크리소로구스(Peter Chrysologus)는 모든 기독인이 사제직에 비견되는 나름대로의 소명을 받고 있음을 다음과 같이 가르치고 있다. “자, 이제 우리가 사도들의 권면을 귀담아 들읍시다. “네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롬 12:1)” 이와같은 권면을 통하여 사도는 모든 기독인들을 사제직의 차원으로 끌어올리면서 권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름받은 여러분, 여러분은 희생제물이며 동시에 제사장이 되셔야 합니다. 거룩한 권세가 여러분에게 베풀어 주시는 이 직분을 누리되 거룩함으로 옷입고, 정절로 띠를 띠우시기 바랍니다.” Peter Chrysologus, sermons, 108, Fathers of the Church 17, pp. 168-169.
이와같은 기독인의 소명은 초대교인들에게 그들의 일상생활에서 금욕적이며, 계율적인 생활을 중요하게 생각하게 했으며 “기도보다 금식이 더 좋으나, 그 둘보다 더 좋은 것은 자선이다”라는 모토 아래 가난한 사람들, 과부, 고아들에게 사랑을 베푸는 행위로 나타나곤 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을 돕기 위해 스스로 노예가 되는 일까지 있었다고 한다.
나. 중세인의 경우; 성, 프란시스의 삶
중세교회의 경우 “기독인의 소명”에 대한 자각은 주로 수도원 운동의 역사와 함께 이해되어질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보나벤투라(1212-1274)는 특히 앗시시의 성 프란시스의 경우를 소개하면서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자신의 전 인생을 드리는 한 기독인의 헌신적인 삶을 그리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어린 프란시스의 가슴속에 특별히 가난한 자들에 대한 깊은 동정의 마음을 불러 일으키셨다. 그의 유아기 시절부터 그의 마음은 무한한 관대함으로 가득 채워졌던 바 그는 복음의 부르심에 대해 벙어리가 되지 아니하고 구걸하는 자에게는 누구든지, 특별히 “하나님의 사랑”에 호소하는 모든 자들에게 자선을 베풀 것을 결심하였다.” Bonaventure, The Life of St. Francis. The Classics of Western Spirituality. p. 186.
이러한 프란시스의 결심은 실제로 모든 가난한 자들 뿐 아니라 심지어는 동물들에 이르기까지 넓은 사랑의 실천을 베풀기에 이르르며 그의 빈곤, 겸손, 그리스도의 명상으로 이어지는 절대적인 소박한 삶의 모범은 중세 교권주의로 타락되어가는 교회에 신선한 충격을 가져다 주는 운동으로 정착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프란시스의 선행은 그가 어린 시절에 경험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보여 주시는 한 “소명” 내지는 “비젼”을 통한 것이었음을 보나벤투라는 전하고 있다. 즉 그가 아직 자기 아버지의 사업을 돕고 세속적인 사업에 관계하고 있었을 때 그의 집에 한 남루한 기사가 찾아와서 동냥을 한다. 좋은 가문에 태어난 기사였지만 그의 가세가 기울어 옷도 제대로 입지못해 떨고 있는 기사를 본 프란시스는 자신의 외투를 벗어 그에게 덮어 주는 데 그 일이 있은 그날 밤 프란시스는 꿈 속에서 찬란한 궁중에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그려진 수많은 무기들이 있는 것을 바라본다. 이것들이 누구것이냐고 프란시스가 물었을 때 그것은 자신과 그가 낮에 도왔던 기사의 것이라는 음성을 듣고 프란시스는 잠에서 깨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형통함을 보여 주심을 믿고 마태복음 13:44-46의 지혜로운 농부와 같이 그의 모든 소유를 팔아 밭에 감추어둔 보화를 사는 심정으로 자신을 하나님께 드렸다고 한다. 기독교 세계관에 따라 살아간 기독인의 한 모습이 아닌가 한다.
다. 루터와 칼빈에게 있어서 “기독인의 삶, 소명”
종교개혁기에 들어서면 본격적으로 “기독인의 소명”의 주제가 활발히 논의되기 시작한다. 루터는 “만인제사장직”을 통해 기독인들의 삶이 어떠해야함을 가르치고 있다. 그리스도의 복음의 사역으로 직접 ‘제사장’으로서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가게 된 기독인은 이제 타인의 고통과 어려움을 담당하는 ‘이웃사랑의 소명’에 부름을 받아 타인을 위한 ‘제사장’의 직분을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루터의 윤리는 참다운 세속화를 지향하는 ‘수도원의 울타리를 벗어나 세상의 한 복판에서’ 기독인의 소명과 부르심을 실천하는 과제로 표현되는 것이다. 기독인은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을 위해 “게으르지 않고, 몸에 필요한 것을 공급하고 보존하며,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이러한 일들을 행해야 한다.” 그런 후에 이제는 “빈궁한 자들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엡 4:28)” 자기 몸을 돌아 볼 뿐더러 지체되는 자신의 이웃을 돌아보아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부르심, 혹 소명의 동기는 무엇보다도 ‘사랑’인 바 그리스도이들은 억지로나 율법의 요구때문이 아니라 사랑으로 우러나오는 실천자인 것이다.
칼빈의 경우에는 ‘기독인의 소명’을 살게하는 하나님의 뜻으로서의 율법의 발견이 매일 매일 그리스도인의 삶을 위한 지침 내지는 인도자가 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칼빈은 시 19:8-9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며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규례는 확실하여 다 의로우니”의 말씀과 시 119:105 의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의 말씀에서 보는 바와같이 적극적인 율법의 기능을 받아들임으로써 마치 주인에게 온 마음과 정성을 기울여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는 종의 모습처럼 기독인이 매일 매일 하나님의 뜻을 잘 알아서 섬겨야 하는 것이다. 이러할 때 율법은 그 자체가 현대의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축복’ 혹은 ‘하나님의 현현’과 같은 것으로서 더 이상 무거운 것이 아닌 ‘기독인의 세계관’을 더 철저히 살게하는 좋은 채찍이 되는 것이다.
라. 근대교회에서의 교훈
종교개혁자들의 뒤를 이어 근대교회를 넘어 오면서 교회의 부흥기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기독인의 소명’의 절박성과 이를 검증하여 개개인의 삶에서 실제로 적용하고자 하는 일련의 움직임들을 볼 수 있다. 영국의 청교도로서 영적부흥의 기수이기도 했던 리챠드 박스터(1615-1691)는 기독인의 소명을 고취한다. 또한 ‘예수회’를 창시하여 중제 도미니크와 프란시스의 수도원 운동의 부활을 꿈꾸었던 이그나티우스로욜라는 각 기독인이 하나님께 받은 소명을 확인하고 자신의 선택에 대하여 확증하고자 할 때 다음의 4가지 원리에 입각하여 생각해 보아야 한다고 전하고 있다; “첫번째 법칙은 나로 하여금 이러한 선택을 하도록 역사한 사랑이 위로부터 즉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왔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서 나의 최종의 선택이 하나님 사랑 때문이 아닌지를 살펴볼 기회가 됩니다. 두 번째 법칙은 내가 한 번도 보거나 만난 적이 없는 한 사람에게서 온전한 모습의 사람을 볼 수 있기를 희망한다는 가정을 전제해 봅시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가 선택하여야하는 그 무엇에 대하여 그에게 충고를 한다고 합시다. 이와같은 방법으로 나의 선택을 위해서도 다른사람을 충고할 때와 같은 방법을 적용하여 봅시다. 세 번째 법칙은 내가 죽음의 순간에 이르렀다고 가정하여 보고 지금 내가 선택한 이 선택이 그때 어떠한 영향과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지 생각하여 보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내가 설 때 지금 내가 한 선택이 어떠한 모습으로 비쳐질지에 대하여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Ignatius Loyola, spiritual Exercises, pp. 103-104.
이처럼 ‘기독교 역사관과 세계관’을 따라 사는 삶은 하나님 앞에, 역사 앞에 늘 자신의 선택이 최선인 것인지를 되물으며 사는 삶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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