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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독교적 관점에서 본 자살과 구원 》

은바리라이프 2008. 10. 2. 21:57

《 기독교적 관점에서 본 자살과 구원 》
- 자살한 기독교인도 구원받을 수 있는가? -

1. 서론

요즘 우리 사회에는 자살이 유행병처럼 번지고 있다. 성적 비관, 취업 실패, 카드 빚, 가정 불화 등등 갖가지 이유로 귀중한 생명을 끊어버리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심지어 자신만 자살하는 것도 부족해서 어린 자녀들을 죽이고 자살하는 사람까지 있는 실정이다.

최근에는 사회 저명인사의 자살도 너무 잦아지고 있다. 2003년 8월 4일에는 현대 아산의 정몽헌 회장이 자살한 데 이어 2004년 2월 4일에는 안상영 부산시장이, 2004년 3월 29일에는 박태영 전남지사가 자살했다.

이뿐 아니라 기독교를 믿는 연예인들의 자살도 연이어지고 있는데 지난 2005년 2월 22일에는 영화배우 이은주씨가 우울증으로 자살한데 이어 2006년 1월 21일에는 가수 유니씨가, 2006년 2월 10일에는 탤런트 정다빈씨가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통계자료에 따르면 우리 나라의 자살율은 2002년도에는 인구 10만명당 19.1명으로 OECD에 가입한 국가들 중에서 4위였다. 그러나 그후 3년만인 2005년에는 26.1명으로 급증하여 OECD 가입 국가들 중에서 1위에 올라서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심각한 국내의 자살율은 한국교회에도 큰 책임이 있다고 본다. 특히 정다빈씨 등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알려진 연예인들의 자살은 한국교회가 신자들에게 자살에 대해 냉엄하게 경계하지 못하고 구원과 자살에 대한 바른 신앙교육을 시키지 못한 반증이다.

그러면 성경은 자살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자살자도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 기독교는 예로부터 자살자에게는 구원이 없다고 가르쳐왔다. 가톨릭교(천주교)의 경우 과거에는 자살을 한사람에게는 장례미사를 치루어주지 않을 만큼 자살을 지옥형벌에 해당하는 큰 죄로 여겨왔다.

물론 구원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속한 것이므로 자살한 사람이 반드시 지옥에 간다고 함부로 단죄할 수는 없다. 그런데 성경말씀을 종합적으로 탐구해보면 기독교의 전통적인 가르침과 같이 자살자는 구원받지 못할 가능성이 상당함을 엿보게 된다.

자살자의 구원 여부에 대해서는 기독교에서도 논란이 있지만 필자는 자살자는 구원이 없다는 기독교의 전통적인 가르침에 무게를 두며 그 타당성을 밝혀보고자 한다.

2. 성경에 등장하는 자살 사건

성경에도 자살로 생을 마감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성경에서 제일 먼저 나타나는 자살 사건의 주인공은 이스라엘이 초대 왕 사울이다. 사울이 길보아 산에서 블레셋 족속과 전쟁을 할 때 중상을 입고 전쟁의 승산도 없자 블레셋 사람들이 자신을 모욕할까 우려하여 자기 칼 위에 엎드려져 죽는다. 사울의 병기 든 자도 똑같은 방법으로 죽음을 택한다(삼상 31:1-6).

그 다음으로 자살로 생을 마감한 사람은 아히도벨과 가룟 유다이다. 아히도벨은 다윗 왕의 모사였으나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켰을 때 다윗을 배신하고 압살롬의 편에 선 사람이다. 아히도벨은 다윗의 군대를 칠 책략이 후새의 전략으로 좌절되자 전쟁에 승산이 없음을 깨닫고 고향에 내려가 자살했다(삼하 17:23).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의 하나로서 제사장들에게 은 30개를 받고 예수님을 판 사람이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이 공회에서 정죄를 당하고 부당하게 사형을 선고받자 목을 매어 자살했다(마 27:3-5).

구약의 아히도벨은 신약의 가룟 유다를 예표하는 인물이다. 시편 41:9에는 "나의 신뢰하는 바 내 떡을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 발꿈치를 들었나이다"라는 다윗의 시가 있는데 이 말씀에 나오는 친구는 바로 아히도벨을 가리킨다. 이 말씀은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하게 될 사건을 예표한 것이다.

자살로 생을 마감한 성경인물들은 한 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모두 하나님의 인정을 받지 못한 부정적인 인물이라는 것이다. 사울은 하나님이 왕으로 세우신 것을 후회하실 만큼 하나님을 거역하고 불순종한 사람이었으며(삼상 15:11), 아히도벨은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켰을 때 그의 편에 서서 주군 다윗에 대한 신의를 저버린 사람이었다(삼하 15:31).

그리고 가룟 유다는 돈을 받고 예수님을 배신하여 기독교 역사에 그 오명을 길이 남긴 사람으로서 예수님으로부터 차라리 세상에 태어나지 아니하였으면 좋을 뻔했다는 평가를 들은 사람이었다(마 26:24). 성경에 자살로 생을 마감한 사람치고 하나님의 인정을 받은 바른 신앙인이 없었다는 것은 자살은 결코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행위임을 밝히 보여주고 있다.

3. 자살에 대한 기독교적 관점

자살자는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이 기독교의 전통적인 가르침이지만 그리스도인들 중에서는 자살자가 생전에 예수님을 믿었으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사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자살자의 구원 여부를 인간이 함부로 판단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그러나 자살의 성격을 성경말씀을 통해 종합적으로 규명해 보면 기독교의 전통적인 가르침과 같이 자살자는 구원받지 못할 가능성이 상당함을 엿보게 된다.

자살에 대한 기독교적 관점을 성경을 통해 규명해 보면 다음과 같다.

⑴ 자살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다.

성경은 모든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이심을 증거하고 있다. "이제는 나 곧 내가 그인 줄 알라. 나와 함께 하는 신이 없도다. 내가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며 낫게도 하나니 내 손에서 능히 건질 자 없도다"(신 32:39).

모든 생명의 주권자는 하나님이시므로 하나님이 생명을 주시고 거두기도 하신다. 자살은 하나님께 속한 생명을 스스로 해하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생명주권에 대한 중대한 거역행위이다.

죄 중에 가장 큰 죄는 하나님의 주권을 거역하는 것이다. 성경적인 의미에서의 죄는 무엇보다도 "관계의 개념"이다. 즉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인 인간 사이에 형성되어야 할 바른 관계가 파괴된 것이 바로 죄인 것이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것이 죄가 되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고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뱀의 유혹에 빠져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맺어야 할 바른 관계를 파괴해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죄의 경중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판가름이 나는 바 하나님의 주권을 거역하는 죄가 가장 큰 죄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구약시대에 우상숭배가 하나님의 진노를 산 가장 큰 죄가 된 것도 우상숭배 그 자체가 하나님의 주권을 부인하는 행위였기 때문이다.

사탄이 타락하여 천상에서 추방된 것도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도전과 거역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자살은 자신의 생명을 하나님의 주권하에 두지 않고 스스로의 주관으로 해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 도전하는 중대한 죄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이 전하신 복음의 중심 메시지는 "하나님의 나라"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가 실현되는 나라, 즉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통치하시는 나라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수용하는 자만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자격이 있다.

⑵ 자살은 살인죄이다.

인간의 범죄행위 중 가장 큰 범죄는 바로 살인죄이다. 그래서 어느 나라에도 살인자에게 가해지는 형벌이 가장 무겁다. 십계명에도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이 있는데 이 계명은 십계명 전체에서는 제6계명에 해당하지만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지켜야 할 계명 중에서는 두 번째에 해당한다.

자살은 바로 인간의 범죄행위 중 가장 큰 죄에 해당하는 살인죄이다. 살인이란 남의 생명만 죽이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남의 것이건 자신의 것이건 살아있는 사람의 생명을 죽이는 것 자체가 살인이다. 그래서 자살은 인간 사회의 가장 흉악한 범죄인 살인죄에 해당하는 것이다. 기독교에서 자살을 아주 큰 죄악으로 간주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세상에서 살인죄를 지은 사람은 가장 무거운 형벌을 받는다. 자살도 살인죄이기 때문에 자살자에게도 무거운 형벌이 따른다. 자살자는 비록 이 세상에서는 살인죄에 대한 형벌을 받을 수 없지만 저 세상에서 하나님의 무서운 형벌을 받게 된다.

성경은 살인자가 받을 형벌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거하고 있다.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여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계 21:8).

"개들과 술객들과 행음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 밖에 있으리라"(계 22:15).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요일 3:15).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 저희가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롬 1:29, 32).

위의 말씀에 의하면 살인자에게는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여", "성 밖에 있음",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함", "사형에 처해짐" 등의 형벌이 따르는데 이같은 형벌의 공통점은 바로 지옥이라는 것이다.

물론 살인자라고 해서 다 지옥에 가는 것은 아니다. 비록 살인을 했어도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받으면 구원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자살은 아래 ⑶항에서 서술하는 바와 같이 회개의 기회가 없기 때문에 죄사함을 받기 어렵다.

⑶ 자살자에게는 회개의 기회가 없다.

회개는 구원의 필수조건이다. 성경은 구원은 단지 믿음으로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믿고 회개함으로 얻는 것이라고 증거하고 있다(막 1:15;눅 13:3). 특히 자살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거역이자 살인죄에 해당하는 중죄이므로 반드시 회개가 필요하다. 그런데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 이같은 회개의 기회가 없어진다.

회개가 구원의 필수조건이라면 자살하기 전에 회개하면 되지 않으냐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회개라는 것은 과거에 지은 죄에 대한 뉘우침이지 미래에 지을 죄에 대한 뉘우침은 아니다. 그래서 죄를 짓기로 작정하고 회개한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물론 자살자는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주장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다. 그들이 제시하는 근거는 구원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얻는다는 교리이다. 즉 구원은 예수님을 믿고 안 믿고에 달린 것이기 때문에 자살을 했다고 해서 그 구원이 무효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성경은 믿는 것만이 유일한 구원의 조건이라고 증거하지 않는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를 회개함으로써 주어지는 것이다. 회개는 믿음의 열매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도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이미 참 믿음이 아니다. 구원은 믿고 회개해야 얻는 것이다. 따라서 자살은 믿음을 배반하는 행위가 아닐 수 없다.

예수님은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는다"(마 7:16-17)고 말씀하셨다. 이어서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마 7:19) 하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자살은 나쁜 열매이다. 그래서 직혀서 불에 던지울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자살은 믿음을 배반하는 행위요 이를 행한 후에는 회개의 기회가 없기 때문에 자살자는 구원을 얻지 못할 가능성은 상당히 높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자살행위는 이 세상에서의 삶뿐 아니라 저 세상에서의 삶까지 비참하게 만드는 어리석은 행위이다.

⑷ 자살은 사탄의 미혹에 빠지는 것이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사실은 자살 충동은 자신의 생각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사탄의 미혹에 기인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잘 모르고 사탄에게 속고 있다. 사탄은 가능한 많은 사람들을 지글지글 타오르는 지옥불에 던지고 싶어한다. 왜냐하면 지옥은 바로 사탄이 사는 곳이며 그들이 다스리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탄은 사람들의 마음을 충동질하여 스스로의 목숨을 끊도록 미혹한다.

가룟 유다가 자살을 하게 된 것도 사탄의 미혹을 받았기 때문이다. 성경은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게 된 것은 사탄이 가룟 유다를 미혹했기 때문이라고 증거하고 있다. "열둘 중에 하나인 가룟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단이 들어가니 이에 유다가 대제사장들과 군관들에게 가서 예수를 넘겨 줄 방책을 의논하매"(눅 22:3-4).

위의 말씀은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하게 된 것은 사탄의 흉계임을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다. 사탄의 흉계에 넘어간 가룟 유다가 결국 자살을 하게 된 것을 봐도 자살은 바로 사탄의 미혹임이 확실하다.

혹자는 가룟 유다가 지옥에 갔다면 그것은 그의 불신앙 때문이지 자살이 직접 원인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기실 가룟 유다의 자살은 그의 불신앙이 원인이 된 것이다. 즉 그의 자살은 불신앙의 열매라는 것이다. 그래서 불신앙과 자살을 별개의 것으로 볼 수 없다.

자살은 사탄의 미혹에 빠져 자신을 파멸시키는 확실한 지름길이다. 혹 우리에게 자살에 대한 충동이 일어난다면 이것은 바로 사탄이 우리를 파멸시키려고 미혹하는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4. 자살자가 가는 곳(기독교의 전통적 관점에서)

사람들은 괴롭고 힘든 인생의 도피처로 자살을 선택한다. 즉 사는 것이 너무 괴롭고 힘들기 때문에 자살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살은 결코 괴로운 인생에 대한 도피처가 될 수 없다. 도리어 더 큰 고통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비극을 초래한다.

요한계시록 9:6에는 "그 날에는 사람들이 죽기를 구하여도 얻지 못하고 죽고 싶으나 죽음이 저희를 피하리로다"라는 말씀이 있는데 지옥이 바로 이와 같은 곳이다. 자살자가 사후에 가게 되는 곳은 죽음이 없는 지옥이다.

"죽음이 없는 고통"을 상상할 수 있는가? 이 세상에서처럼 너무 고통스러운 나머지 죽을 수만 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지옥은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곳이다. 거기서는 자살이 통하지 않는다. 지옥의 형벌 자체가 죽음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지옥보다 더 무섭고 고통스러운 곳이 어디 있겠는가?

우리 속담에는 "노루를 피하다 범을 만난다"는 말이 있다. 이 속담의 의미는 작은 피해를 피하려다가 더 큰 피해를 본다는 것이다. 자살은 이 속담처럼 작은 고통을 면하려다가 이보다 비할 수 없는 더 큰 고통을 당하게 되는 비극을 초래한다.

세상에서의 삶이 아무리 비참하고 고통스럽다 해도 지옥의 고통보다는 중하지 않다. 세상에서의 고통은 일정 시간에만 국한되고 언젠가는 끝날 때가 있지만 지옥에서의 고통은 영원히 지속된다. 그러기에 자살은 영원한 파멸을 자초하는 어리석은 행위인 것이다.

5. 결론

사람들은 문제 해결의 방법으로 자살을 선택한다. 그러나 자살은 결코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 도리어 혹을 떼려다 더 큰 혹을 붙이는 어리석은 행위이며 자신을 확실한 파멸로 이끄는 지름길이다.

자살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거역행위이며, 살인죄이며, 회개의 기회가 없으며, 사탄의 미혹에 빠지는 것이다. 그래서 자살자는 기독교의 전통적인 가르침과 같이 구원받지 못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자살자가 가는 지옥은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고통스런 곳이다. 자살을 선택하는 것은 결국 지옥 백성이 되어 사탄의 영원한 노예로 살겠다는 선택에 다름 아니다.

자살은 스스로를 더 큰 파멸과 더 큰 비극으로 몰아넣는 행위이다. 자살은 이처럼 무서운 결과를 초래할 수 있기에 우리는 아무리 사는 것이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자살을 해서는 안된다.

성경에는 자살을 하려던 사람이 바울의 말을 듣고 자살 대신 구원의 길을 선택한 사람이 있다. 그는 바로 빌립보 감옥의 간수이다. 전도성구로도 유명한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 16:31) 하는 말씀은 죄수들이 탈출한 줄 알고 자살을 하려던 간수에게 선포된 말씀이다.

이 말씀은 자살과 구원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시사한다. 그 간수가 그때 자살을 했다면 구원받지 못하고 지옥에 떨어졌을 것이다. "주 예수를 믿으라"는 말은 그 간수에게 있어서는 "자살하지 말고 생명을 얻으라"는 말과 같은 의미였다. 이것은 자살과 구원은 양립할 수 없는 것임을 시사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처럼 기독교는 "자살하지 말라!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으라!"고 선포하고 있다.

삶이 힘들고 죽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면 하나님을 더욱 믿고 바라고 의지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1:3 이하에서 "하나님은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분"이라고 증거했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면 세상을 이기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

2007년 3월 6일 * 샬롬방 신앙공동체(www.shalombang.com) 김경호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