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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제키엘서 - 사랑하는 존재의 죽음

은바리라이프 2008. 9. 12. 14:20

에제키엘서 - 사랑하는 존재의 죽음
일반적으로 우리는 너무 아름답고 과분해서 정신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금방 사라지고 마는 것들을 염원하고 사랑하게 되는 것 같다. 좋아하는 계절, 행복한 시간은 잠깐 머물다가 내 앞에서 사라지고 마니…. 가장 사랑하는 존재의 죽음! 에제키엘 예언자는 자기 아내의 죽음을 통해 이 고통을 체험하게 되는데, 그러한 에제키엘의 슬픔은 하느님의 신탁이 되어 이스라엘에게 전해진다. 이를 통해 그들이 가장 사랑했던 존재, 곧 예루살렘의 멸망이 예고된 것이다.

1. 명칭
하느님의 말씀은 구두(口頭)로만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예언자의 삶과 일생을 통해서도 전달되고, 예언자의 이름을 통해서도 전달된다. ‘에제키엘’이라고 음역된 이 예언자의 본래 히브리어 이름은 ‘에헤즈케엘’이며, 이 말은 ‘강하게 하다’하는 의미를 지닌 히브리어 동사 ‘하자크’에서 파생되었다. 따라서 예언자의 이름은 ‘하느님께서 매우 강하게 하신다’라는 의미이다. 포로가 되어 그 어떤 것도 희망이 될 수 없던 이스라엘을 강하게 할 의무가 예언자에게 있었음을 시사하는 이름이다.

2. 인물
에제키엘은 1차 유배 때 여호야킨과 함께 유배 온 사람이었는데, 이는 그가 상당한 세력가였음을 암시한다. 요직에 있는 인물들만이 1차 유배 때 우선적으로 유배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에제키엘은 사독 계열의 사제로 알려져 있다. ‘사독 가문’에 속한다는 것은 최고의 가문으로 예루살렘 지배층에 있었다는 것인데, 사독이 이스라엘 최고의 가문으로 부상되기 시작한 것은 아주 오래전 솔로몬 시대부터였다. 다윗 통치 말기, ‘왕자의 난’이 터졌을 때 솔로몬을 지지했던 인물이 사독과 나탄이었고, 결국 솔로몬이 권좌에 오르면서 사독가문은 막강한 실세로 국정에 참여하게 된다. 더욱이 성전이 완공되면서 사독가문은 이스라엘의 최고 기득권층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에제키엘의 활동은 두 부분으로 나뉜다. 전반부는 예루살렘의 멸망 이전으로(597~587년), 주로 심판 신탁이 주어진다. 후반부는 예루살렘이 완전히 붕괴된 이후로서(587~572년) 하느님의 새로운 구원 약속을 선포한다. 20여년간 활동한 것으로 추정되고, 예레미야에게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3. 에제키엘 예언서의 특징 : 집대성의 산물
에제키엘서를 보면 그가 대단한 어휘력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천재적 말솜씨를 가지 인물이었든지, 아니면 그의 예언서를 완성한 제자들의 탁월한 어휘력이 반영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수려한 문체는 매우 독보적이다. 이러한 풍요로움은 그의 신학에도 드러나는데, 당대의 신학이 총집대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호세아 ․ 아모스 ․ 제1이사야 ․ 예레미야 등 그 이전에 활동했던 이들의 신학이 집중적으로 반영되고, 이를 통해 북이스라엘의 신학과 남유다의 신학이 균형있게 드러나 있다. 그뿐만 아니라 문학적 측면에서도 돋보이는데, 신탁이 중추적 문체로 되어 있는 예언문학이지만 묵시문학적 양식들과 지혜문학적 양식들이 대거 발견된다.

4. 편집과 구성
에제키엘서는 다른 구약성경 작품들에 비해 비교적 읽기가 수월하다. 마치 에제키엘이라는 1일 저자가 20여년이라는 비교적 짧은 기간(대예언서 중에서는 짧은 기간에 속함) 동안 자신의 체험과 사상을 저술한 것으로 보여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매끈한 흐름은 고도의 편집 기술로 이해될 수 있다. 본래적 1차 자료와 2․3차 자료를 구분해 내기 어려울 정도로 과감한 편집이 이루어졌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이렇게 편집된 에제키엘서는 전반부와 후반부라는 2원적 구조를 사용하고 있다. 간단히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전반부 : 예루살렘 멸망 이전의 신탁(유배 이전이기 때문에 심판 신탁이 주를 이룸)
⑴ 소명의 시작(1-3장)
⑵ 유다의 예루살렘의 파괴에 대한 신탁(4-24장)
⑶ 이방민족들에 대한 신탁(25-32장)
후반부 : 예루살렘 멸망 이후의 신탁(유배 중이기 때문에 구원과 희망의 신탁이 주를 이룸)
⑴ 쇄신에 대한 신탁(33-39장)
⑵ 새로운 백성에 대한 신탁(40-48장)

5. 신학
⑴ 사제적 관점
앞에서 소개한 것처럼 에제키엘은 사독 가문의 사제였기에 사제적 관점을 간과하고는 그의 신학을 설명할 수 없다.
① 초월적 신관 : 예레미야서는 남유다의 전승을 반영하고 있기에 하느님과 인간 사이가 매우 막역하다. 하느님을 마치 친근한 선배나 동료를 대하듯 불평하고 싸움 걸고 다시 용서를 청하고 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에제키엘서에 오면 상황은 달라진다. 하느님은 거룩하신 분이시기에 그 거룩함을 유지하기 위해 인간들과 떨어져 존재하시는 분으로 제시되기 때문이다.
유배 중에 있던 당시 사람들에게 팽배해 있었던 물음은, 하느님은 바빌론의 수호신인 마르둑보다 열등한가? 그래서 우리가 유배를 오게 되었는가? 아니면 하느님이 이스라엘을 버렸는가? 등이었다. 이에 대하여 에제키엘은 초월적 신관을 근거로 답을 제시한다. 10장에서 보면 하느님께서 예루살렘을 떠나셨기에 바빌론에게 멸망했다고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이 도래한 이유는 ‘거룩함’이라는 하느님의 초월적 제1속성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라고 본다. 곧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 현존하시기 위해서 가장 요구되었던 것은 이스라엘의 동질화(하느님과 같은 속성을 유지하는 것)였는데, 죄에 빠진 이스라엘은 ‘거룩하신 초월적 존재 하느님’과 공존을 불가능하게 했고, 그래서 하느님은 성전을 빠져 나가실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② 종교 의식(전례)에 대한 관심 : 문서 예언자들의 의무는 ‘이스라엘의 죄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하느님은 비가시적 존재이시니 그분과의 관계가 어긋나 있어도 그것을 감지하지 못하던 이스라엘에게 죄(하느님을 망각하고 외면했다는)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예언직이었던 것이다. 에제키엘서에서 무엇보다도 강하게 고발되고 있는 이스라엘의 죄는 그릇된 예배였다. 마음 없이 형식적으로만 드리는 예배를 고발하면서 그의 사제적 관점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준다.
③ 새 성전에 대한 청사진 : 새 성전에 대한 부분은 에제키엘의 독특한 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성전이 완전히 무너진 상황에서 이 성전을 새롭게 재건해야 한다는 이슈를 신학적으로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의 멸망이 하느님께서 성전을 떠나심으로 표현되었다면, 이제 이스라엘의 회복은 새 성전의 재건과 하느님의 성전 귀환으로 제시되고 있다. 40 - 48장을 보면 완전히 초토화된 이스라엘이 어떤 모습의 도시로 거듭나야 하는지 새 도읍 예루살렘의 청사진이 제시되는데, 이 청사진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으로 부각되어 있는 점은 ‘성전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고, 이는 결국 사제 그룹(사독 계열)이 어떤 지위보다 우위에 있어야 함을 암시한다. 에제키엘서가 제시하고 있는 성전의 모습은 당대 최고하고 정평이 나 있던 바빌론의 성(궁)터를 밑그림으로 한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⑵ 환시를 보는 사람
에제키엘 예언서에는 상징적인 표현들이 매우 자주 등장하고 있다. 그러한 이유로 라삐들은 이 예언서를 읽는 것을 서른 살 이전까지 엄격하게 금했다고 한다. 환시나 묵시문학적 장면이 주관적으로 해석될 것을 염려한 때문이었다. 에제키엘이 보았던 환시 중에 가장 가슴 아픈 내용은 아내의 죽음이었다(24, 15-27). 사랑하는 부인의 죽음이라는 환시를 통해서 ‘가장 사랑하는 존재의 죽음’, 곧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한 것이다.
⑶ 새 마음
이 주제는 예레미야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를 통해 에제키엘은 이스라엘의 미래가 이스라엘 자신의 철저한 변화에 달려 있음을 강조한다. 곧 이스라엘이 새롭게 태어나기 위해서는 새 심장(새 마음)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실천만이 구원의 가장 필요한 덕목임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새 마음을 가질 때만이 비로소 ‘마른 뼈’처럼 죽어있던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생기로 거듭나 살아날 수 있게 된다(37장 참조).
⑷ 개인주의
이전까지의 이스라엘 신학이 다분히 공동체적인 측면을 강조하고 있었다면 에제키엘서에서는 ‘개인주의’가 부상한다. 그런데 에제키엘서가 제시하는 ‘개인주의’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이기주의’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개인이 존중되고 강해져야 공동체도 유지될 수 있음을 강조하는 성숙한 개인주의이기 때문이다. 이는 이스라엘 의식 발전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데, 왕실도 무너지고 성전도 무너지고 민족도 흩어진 고통 속에서 이스라엘이 배우게 된 것은 그러한 ‘악조건에서도 유다인으로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타인들의 나라에서 살아가면서도 유다인으로서의 정체의식을 지키고자 하는 이러한 개인주의는 유다이즘의 단초가 된다.

‘계속 불행한 것’보다 더 힘든 것은 ‘행복했다가 불행해지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사실 진정한 삶은 바로 거기서부터 시작한다. 행복했다가 불행해져 봐야 자신이 얼마나 행복했는지를 비로소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도 유배를 통해 그들이 누렸던 특권을 비로소 깨닫고, 자기 삶을 진심으로 살아가는 개인으로 서는 법을 배우게 된다. 유다인들이 지그까지 당당하게 살아남아 최고의 민족이라는 찬사를 받게 된 비결도 바로 여기 숨어 있는 게 아닐까. 원고를 정리하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개인이 한 인간으로서 열심히 살아갈 때 세상은 그 개인을 알아본다. 진심으로 살겠다는 절실함보다 더 강한 힘을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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