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주석강해/모세오경

1. 야곱의 저주

은바리라이프 2008. 8. 26. 22:07

1. 야곱의 저주

 

자기 아들을 저주한 야곱

창세기는 야곱이 죽는 것으로 끝나는데, 하나님은 구약 성경에 나오는 많은 인물들을 통해 당신의 뜻을 나타내고 계신다. 예를 들어, 요셉이나 다윗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그림자이고, 야곱은 인간의 모습을 가장 적나라하게 나타내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사람이다. 야곱의 생애를 보면, 그에게는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 인간적인 사랑과 연민 등 인간에게서 나올 수 있는 모든 성품들이 적나라하게 나타나고 있으며, 또 그러한 인간들 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도 분명하게 나타난다. 야곱은 정말 인간적인 사람이었다. 하나님은 잔꾀가 많고 수단이 뛰어난 야곱을 통해 인간의 마음에 있는 모든 것을 나타내시려고 마음을 쓰셨다.

 

창세기 49장에는, 야곱이 죽기 전에 열두 아들을 불러 축복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르우벤으로부터 그 아들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각 사람의 분량대로 축복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야곱은 자기 아들들 모두에게 축복만 내린 것이 아니라 어떤 아들들에게는 저주를 내렸다.

 

야곱은 장자인 르우벤에 대하여 “르우벤아, 너는 내 장자요, 나의 능력이요, 나의 기력의 시작이라. 위광이 초등하고 권능이 탁월하도다마는 물의 끓음 같았은즉 너는 탁월치 못하리니, 네가 아비의 침상에 올라 더럽혔음이로다.”(창 49:3,4)라고 말했다. 죽음 앞에서 자기 아들의 허물을 용서하고 잊을 만도 한데, 야곱은 르우벤이 자기 침상에 오른 것을 저주하였다. 시므온과 레위에 대해서도 저주하는 야곱을 볼 수 있다.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잔해하는 기계로다. 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지어다.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예하지 말지어다. 그들이 그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그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음이로다. 그 노염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분기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창 49:5~7)

 

나는 야곱이 자기의 아들들을 축복하려고 불러놓고는, 물론 유다나 요셉은 축복하였지만, 몇몇 아들들을 저주하는 것을 보면서 처음에는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창세기 27장에서 이삭이 에서를 축복하려 했다가 저주를 내린 말씀이 생각나면서 놀라운 사실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삭은, 자기가 죽기 전에 아버지 아브라함으로부터 내려오는, 자기의 자손 가운데서 그리스도가 태어나는 축복을 아들에게 내리려고 했다. 이삭에게는 야곱과 에서가 있었는데, 이삭은 맏아들 에서를 축복하려고 했다. 그러나 정작 이삭이 축복한 사람은 에서가 아니라 야곱이었다. 에서가 돌아와서 동생 야곱이 자기의 축복을 빼앗은 것을 알고는 울면서 아버지에게, “아버지께서 나를 위하여 빌 복을 남기지 아니하셨나이까? 내 아버지여, 내게도 축복하소서! 내게도 그리하소서!” 하고 자기에게도 축복해 주기를 간청했다.

 

내 생각 같으면 이삭이 에서에게도 “그러면 너는 건강하고, 복되고, 부유하게 살아라.” 하고 축복할 수 있었을 텐데, 조금 전까지만 해도 ‘축복할 테니 별미를 만들어 오라.’고 했던 아들에게 “너의 주소는 땅의 기름짐에서 뜨고, 내리는 하늘 이슬에서 뜰 것이며, 너는 칼을 믿고 생활하겠고, 네 아우를 섬길 것이며…” 하고 축복이 아닌 저주를 내렸다.

그리스도에게 속하지 않은 모든 것에 저주를 내리시는 하나님

우리는 이 두 이야기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몇 가지 귀한 사실들을 발견할 수 있다. 왜 이삭은 에서에게 저주를 내렸는가? 그것은 이삭의 본의(本意)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좇아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삭은, 야곱의 후손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나게 하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깊은 섭리를 깨달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삭이 에서를 냉정하게 저주한 사실은 무엇을 나타내고 있는가? 그것은 이삭이 ‘그리스도에게 속하지 아니한 모든 것이 저주를 받는다.’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창세기 49장에서, 우리는 야곱이 몇몇 아들들을 저주하면서도 유다를 위하여는 긴 시간 동안 축복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그의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 암나귀 새끼를 아름다운 포도나무에 맬 것이며”(창 49:10,11)

 

야곱이 그 아들 유다에게 한 축복은 전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축복인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유다를 축복하신 이유는,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들의 생애 동안 예수 그리스도가 나신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을 통해 그리스도가 나셔야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축복해 주셨던 것이다.

 

야곱은 한평생 인간적인 방법으로 살아왔는데, 죽음 앞에서 인간의 참된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하지 아니한 모든 것이 저주를 받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뒤, 그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유다를 축복했고, 그리스도의 예표(豫表)인 요셉을 축복했던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축복하시되 그리스도 안에서 축복하신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 가운데 그리스도 밖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하나도 없다. 에베소서 1장을 보면,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이 많이 나오는데, 3절에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라고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축복하실 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축복하시고, 당신의 뜻을 나타내실 때에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내신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가져야 할 소망이나 기쁨, 우리의 자랑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만 참된 평강을 얻을 수 있고, 참된 기쁨과 안식을 누릴 수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진정한 의(義)를 발견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밖에 있는 모든 것이 저주를 받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들만이 영광스럽게 나타날 때,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 앞에 나아와 그 은혜와 축복을 사모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사단은 우리가 예수님만을 향해 나아가지 못하도록 계속해서 우리를 속여 왔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 밖에도 평강이나 안식이 있는 것처럼, 예수 밖에도 행복이 있는 것처럼 속고 있어서 예수님과 상관없는 것을 얻고자 애쓰고 있다.

 

그 동안 나는 목회를 해 오면서 교회 안에서 목사나 장로 등 인간을 높이는 일에 대해서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아무 생각없이 사람들을 세우고 높이기도 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이 높임을 받으면 상대적으로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그리스도가 멸시를 받기에, 높임 받는 사람들은 결국 신앙 생활을 할 수 없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가 높임을 받기 위하여 교회 안에서는 목사를 비롯하여 모든 성도들의 마음이 낮아져야 한다. 교회 안에서는 사람의 소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만이 중요한 것이다. 그 소리가 하나님의 음성이라면 어린 자의 말일지라도 경청해야 할 것이다. 인간이 높아지는 만큼 주님은 멸시를 받기에 교회 안에서는 그리스도 외에 어느 누구도 높임을 받아서는 안 되며, 그리스도에게 속하지 않은 모든 것은 저주를 받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으려면

사단은 그리스도께로 향해야 할 우리의 마음을 그리스도가 아닌 것으로 흘러가도록 끊임없이 유혹한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려면 우리의 의(義)가 아닌 하나님의 의(義)가 있어야 한다. 예수님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마 5:6)라고 말씀하셨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처럼 의를 사모하는 자는 복이 있다는 것이다. 주린 마음은, 단순히 배가 고픈 정도가 아니라 며칠 동안 굶주린 사람이 음식을 애원하며 찾듯이, ‘나에게는 진정 의가 없구나!’ 하는 마음으로 예수님 앞으로 나아와 의를 간구하는 마음을 말한다. 그런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의로 배부름을 얻고, 하나님 앞에 당당히 나아갈 수 있는 의인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참된 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밖에 없는데, 사단은 우리들의 마음을 유혹해서 자신의 행위로 말미암은 의를 들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도록 속이고 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자신의 의를 버리고 예수님의 의를 마음에 받아들여 그 의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좀더 열심히 기도하고 말씀에 순종하고 율법을 지킨 것으로 말미암은, 자신의 의를 들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려고 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잘하고 있거나 하나님이 보시기에 잘한 일이 있다고 여겨지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데 당당하지만, 잘못하거나 죄를 지으면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를 두려워한다.

 

가령 내가 자동차로 며칠 동안 여행을 해야만 하는데, 내 자동차가 너무 낡아 고장이 났다고 하자. 그래서 걱정하는 나를 보고 내 친구가 자신의 새 차를 빌려 주었다면, 나는 더 이상 고장난 그 차에 대해 신경을 쓰거나 염려할 필요가 없다. 우리의 의는 마치 고물이 되어 고장난 내 자동차와 같고, 예수님의 의는 전혀 고장이 안 나는 친구의 새 차와 같다. 나의 고물 자동차로는 여행이 불가능하니까 친구의 차를 빌려서 가는 것처럼, 우리의 의로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어 예수님의 의를 가지고 가는 것이 바로 믿음이다. 안타깝게도 참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의만을 의지하지 않고 고물이 되어 고장난 자신의 의를 다듬어 나아가려 하고 있다.

 

내 차를 아무리 고쳐도 좋아질 가망이 전혀 없다면 그 차를 버리고 친구의 새 차를 이용하겠지만, 만일 조금만 고치면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다면 내 차를 가지고 가려고 애를 쓸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의가 어느 정도 괜찮아 보이고 가능성이 있어 보이면, 사람들은 자기의 의를 세우려고 애를 쓰지 예수님의 의를 힘입으려고 하지 않는다.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때 예수님의 복을 받은 사람들은 무얼 잘하거나 착하고 진실되게 산 사람들이 아니라, 살인하고 간음하는 등 자기의 의가 전혀 없는 사람들이

었다.

 

야곱이 자기 아들들을 저주하고, 이삭이 에서를 저주했듯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하지 않는 모든 것은 저주를 받아야 한다. 예수님께로부터 나지 아니한 평강은 예수님의 평강을 가리고, 예수님께로부터 나지 아니한 거룩함은 예수님의 거룩함을 가려서 사람들로 하여금 온전치 않은 평강이나 거룩함을 좇도록 하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나지 아니한 기쁨이나 만족, 행복은 다 저주를 받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이다. 이삭과 야곱은 그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고,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들이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 없는 모든 부분에 대하여 저주를 명했다.

 

우리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지 않은 것이라도 그것이 우리 보기에 괜찮고 말씀과 비슷하면 만족하지만, 하나님은 그것이 얼마나 선하고 의로우며 거룩한가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그 선함이나 의로움이나 거룩함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인간에게서 나온 것인지를 살피신다.

 

로마서 10장 3절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사단에게 속아서 인간에게서 나온 것인데도 자기 보기에 아름다우면,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아름다운 것으로 알고 거기에 온 마음을 쏟는다.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라.”(잠 14:12)는 말씀은 바로 이런 사람을 두고 하는 말씀이다. 사단은 오늘날 이 땅의 많은 종교인들의 마음을 속여서 그들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도록 애쓰게 한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인간에게서 나온 것의 결과는 저주요 사망인 것이다.

 

참된 믿음을 가지려면 먼저 우리의 의가 부서져야 하고, 우리에게 있는 선이 저주를 받아야 한다. 우리가 잘한 것이나 우리에게서 나온 모든 아름다운 것들이 가차없이 부서져 버릴 때 비로소 우리는 우리 안에 선한 것이나 아름다운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바로 그 때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리스도에게서 나오는 의를 힘입을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말씀을 따라 선하게 살기를 바라시는 것이 아니라,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 3:10)라는 말씀처럼 우리에게는 의가 없다는 사실을 철두철미하게 깨닫게 되기를 원하신다. 자기 속에 의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은 자신의 의를 세우려고 노력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으며,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본다.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에게 속한 모든 것이 부인되어 우리 속에 예수 그리스도만이 온전히 세움을 입고,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에게서 나온 의로움과 거룩함, 그리스도에게서 나온 행복만을 추구하도록 하는 것이다.

 

나는 이 글을 읽는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사단의 궤계(詭計)에서 벗어나, 자신의 의로움이나 선함, 거룩함이 다 거짓된 것임을 깨달아 철두철미하게 자신을 부인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움과 거룩함,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을 그 마음에 믿음으로 받아들이기를 바란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축복을 받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다음 >>

'성경주석강해 > 모세오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멜기세덱  (0) 2008.09.12
[지명]멜리데   (0) 2008.08.26
창조  (0) 2008.07.02
제2장. 제1世代와 아담  (0) 2008.05.25
라멕  (0) 2008.05.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