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극/기다리는사람들

시므온과 안나의 신앙(눅2:25-39)

은바리라이프 2008. 9. 8. 15:10

시므온과 안나의 신앙(눅2:25-39)

사람이 마음으로 계획 할 지라도 그 길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예수님께서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실 때 헤롯왕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심지어 대 제사장들까지도 깨닫지 못하여 영접하지 못했다.
예수님께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기 때문이었다.
그 이유 때문에 영접은 고사하고 핍박을 받았다.
핍박이 도를 넘어 예수님을 잡아 죽일 계획까지 세웠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그들이 그렇게 죽이고 싶었던 예수님의 얼굴을 몰랐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님을 잘 아는 사람인것 같으나 가장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이처럼 오늘날 우리들은 예수님을 가장 잘 알 수 있는 위치에 있으면서도 예수님에 대해서 누군가가 물으면 예수님에 대해 너무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은 (요17:3)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라고 하신 것이다.
사도 바울도 예수님이 그가 기다리던 메시야이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을 몰랐을 때는 핍박자 였으나 깨닫고 난 후에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내 놓았다. 그리고 고백하였다.
(고전9:16)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 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지금까지 그가 알고 있던 모든 것을 버렸다. 왜냐하면 그가 바로 살기 위해 지식을 배웠으나 그 지식이 자신을 망하게 하였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빌3:8-9)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것이 복음 안에서 발견되어지는 것. 곧 복음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고전9:23)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
복음을 위하여 행하는 모든 것이 곧 복음에 참여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삶의 목적이 사실 복음을 듣고 전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에 참여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시므온이라는 사람과 안나 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들은 예수님의 결례의 날에 요셉과 마리아가 율법의 전례대로 행하고자 성전에 들어가실 때 성령에 감동하여 아기를 안고 찬송하였다고 증거하고 있다.
결례: 산모가 아기를 낳았을 때 남아의 경우는 33일간 부정하고 여아를 낳았을 경우에는 66일간 부정하다고 하여 그 기간이 지나면 어린양 한 마리나 산비둘기 둘로 번제를 바치게 되어있다. 요셉과 마리아는 가난하여 산비둘기 둘을 제물로 드렸다.
(레12:4)그 여인은 아직도 삼십삼 일을 지내야 산혈이 깨끗하리니 정결하게 되는 기간이 차기 전에는 성물을 만지지도 말며 성소에 들어가지도 말 것이며
(레12:5)  여자를 낳으면 그는 두 이레 동안 부정하리니 월경할 때와 같을 것이며 산혈이 깨끗하게 됨은 육십육 일을 지내야 하리라
헌신례 : 본문에서는 율법의 전례라고만 기록하고 잇는데 여기서 말하는 전례는 할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출애굽시 이스라엘 장자들과 모든 처음 난 것들을 보호하신 후 장자와 처음 난 것에 대한 소유권을 가지시고 이스라엘 장자들은 모두 하나님께 바쳐 저야 했고 그 방법으로 속전제도가 채택되었다. (민18:15-16)여호와께 드리는 모든 생물의 처음 나는 것은 사람이나 짐승이나 다 네 것이로되 처음 태어난 사람은 반드시 대속할 것이요 처음 태어난 부정한 짐승도 대속할 것이며 그 사람을 대속할 때에는 난 지 한 달 이후에 네가 정한대로 성소의 세겔을 따라 은 다섯 세겔로 대속하라 한 세겔은 이십 게라이니라
세겔은 4일 품삯 :11.4g 게라는 0.57g
시므온과 안나는 요셉과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안고 성전에 들어설 때 아무도 그가 메시야인 줄을 알지 못했지만 그들은 정확하게 알아보고 찬송을 올렸다. 그들은 누구였기에 예수님이 메시야인줄 알았을까요?
주석가 풀핏은 시므온이 유대랍비 힐렐의 아들이며 사도 바울의 스승이었던 가말리엘의 아버지로서 A.D.13년에는 산헤드린의 회장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야기들은 모두 막연한 추측일 뿐 정확한 자료나 확증은 없다. 어쨌든 시므온은 평생을 의롭고 경건하게 살면서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음으로 메시야가 오셔서 이스라엘을 위로해 주기를 기다리는 자이었다. 그는 그의 인생에 그리스도가 있다는 사실에 늘 감사하면서 감격과 그리움으로 일생을 보내던 자이었다. 이처럼 우리들의 인생에도 그리스도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그의 삶의 자세와 메시야를 기다리는 모습을 배워야 할 것이다.

1. 의롭고 경건한 자였다.
경건이라는 말 자체가 순결한 양심으로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는 마음이다.
그리고 하나님과 더불어 살고 있다는 마음으로 경외심을 간직하여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 가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의롭고 경건하였다는 말에서 보여주는 시므온은 얼마나 율법을 공경하며 준수했는가를 알 수 있다.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 되신 이유가(창26:5)이는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계명과 내 율례와 내 법도를 지켰음이니라 고 증거 하였다. 또 예수님은 (요14:21)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요일5:3)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요일3:24)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고 하셨다. 그러므로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는 말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이었으며 성령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는 것을 나타내 준다.

2. 성령이 지시하심을 철저하게 믿고 따르던 사람이었다.
말라기 선지자 이후 약 400년 동안 이스라엘에는 영감 받은 선지자가 나타나지 않았는데 시므온은 이러한 오랜 침묵의 시대에 살면서도 메시야의 도래를 확신하며 끈기 있게 기다리는 믿음을 소유한 자였다. 오늘날 우리들이 눈앞에 전개되는 타락과 불신의 흐름에 휩쓸려갈 것이 아니라 역사의 끝까지 투시하는 신령한 눈을 떠서 매일 매일을 하나님 앞에서 새롭게 결단하고 인내하는 경건한 삶을 살아야 함을 교훈하고 있는 것이다.
당시 사가랴나 요셉이나 마리아도 성령의 지시를 받은 적이 있었으나 사가랴는 그가 아들을 낳으리라는 성령의 지시를 믿지 아니하였음으로 그의 아들 세례요한을 낳을 때까지 말을 못하게 되었고 요셉은 마리아를 자기 집으로 데려오는 것까지는 했으나 메시야가 났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가정에 아무런 변화가 없었기 때문에 믿음을 잃어버린 것이다. 요셉과 마리야는 환경의 변화에만 관심을 가졌지 심령이 새로워지는 데는 관심이 없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는 예수님은 자신들에게 준 아들이라는 사실은 알았으나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할 자 라는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몰랐던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니 그냥 받기는 했지만 레위 지파의 가문이 아니었기 때문에 천사의 말에 주의를 기울이거나 귀담아 두지 아니했다.
하나님은 환경을 변화시키지 아니하고 그 환경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우리 심령 속에 주신다.
바울은 그의 일생을 통해서 배운 것이 바로 주님의 주시는 능력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과 그의 겉 사람은 후패하나 심령은 날로 새로워진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보이는 환경은 후패하여도 보이지 않는 심령은 새롭게 된다는 것이다.
시므온은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고 하신 말씀을 그의 일생 동안 잃지 않고 믿었다. 그의 인생에 그리스도가 있다는 감격이 모든 것을 이기게 했다.
안나가 혼자된 몸으로 84년을 성전에 살면서도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한 것도 그녀의 인생에 그리스도가 있다는 감격 때문이었다.
마치 다윗이 그 수많은 환난을 왕이 되기 위해서 인내 한 것이 아니라 그가 당한 환난을 주님의 주시는 힘으로 견디어내다 보니까 어느 날 그가 왕이 되어 있었던 것처럼 시므온과 안나는 메시야를 만나는 그 순간까지 그들의 인생에 그리스도가 있다는 감격에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고 인내하였더니 메시야를 만나는 영광이 주어졌다. 당시 성전에는 많은 사람이 있었다.
그중에 제사장들과 율법사들도 있었지만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 두 사람은 메시야를 만나고도 깨닫지 못했던 많은 사람들 중에 속하지 아니하고 메시야를 보게 된 것이다. 경건의 사람이요 기도의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인생에 그리스도가 있다는 사실을 믿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로 그들의 마음에 있었던 그리스도가 어린아이의 눈 속에서 메시야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메시야를 만난 시므온은 자신의 눈이 하나님의 구원을 보았다고 말하였다. 그는 예수님만 본 것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서 구원이 구체화된 것까지 보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하여 시므온과 안나는 메시야를 맞이 하므로써 구약시대를 마감하고 신약시대를 열도록 길을 열어주는 서언적 인물이 된 것이다.
마리아나 요셉은 이미 성령으로 잉태하셨음을 천사장을 통하여 알고 있었고 엘리사벳을 통하여 듣게 되었으며 아기를 낳을 때는 천사들이 와서 수종을 드는 모습을 통해 알 수 있었지만 아기 예수님의 탄생으로 애굽으로 피신을 해야만 했던 일과 환경의 어려움이나 자신의 신분이 목수라는 사실 때문에 메시야가 그의 집안에 계심을 잃어버리게 했다. 그래서 본문 33절에 기이히 여기더라고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왜 그랬을까? 아마 요셉은 하나님의 아들을 잉태했다면 이 땅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환경으로 바뀌어야한 한다는 신데릴라와 같은 꿈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을 잉태한 후에도 여전히 변함이 없는 그들의 삶의 현장이 믿음의 확신을 갖지 못하게 했을 것이다. 심지어는 아기를 낳을 곳이 없어서 마굿간에 들어가야만 했던 그들의 현실이 더더욱 믿음을 갖기 힘들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시므온은 이는 그의 경건한 삶을 통해서 성령이 늘 그 위에 임재할 수 있도록 살아온 그의 신앙생활로 인하여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았기 때문에 메시야를 메시야로 볼 수 있었다.
시므온이 아직 갓난아기의 모습인 예수를 보고서도 그토록 즐겁고 평안한 심정으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강력한 영향을 받았다면 구원의 실제적 내용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완성된 이 복음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얼마나 더 큰 기쁨과 확신을 가져야 하는가를 보여 주는 것이다. 구약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제사장 나라로 삼으사 하나님 나라의 복된 소식을 이방에 전파할 이방의 빛으로 삼으셨다는 약속의 말씀이(사 42:6).
이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말미암아 성취된 것이다.

3. 안나는 성전을 떠나지 않고 금식하며 기도하는 사람이었다.
이 말은 성전 중심의 삶을 살았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육체를 쳐서 복종시키면서 하나님을 위해 희생하였으며 하나님과의 대화를 중단하지 아니하고 대화의 창을 항상 열어 놓았다는 말이다.
그녀는 홀로 된지 팔십 사 년이나 된 노인이면서도 열심히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섬기던 자이었다. 당시 유대 사회의 조혼 풍습에 비추어 볼 때 안나는 14세를 전후하여 결혼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때 안나의 나이는 14+7+84=105세 쯤 되는 셈이다. 이처럼 많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안나는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긴 여인이었다. 이는 그녀가 철저한 헌신의 삶을 살았을 뿐만 아니라 메시야를 대망하며 기도했던 여인임을 나타내준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는 조금만 연로해도 주의 일에서 스스로 손을 떼려고 하는 모습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요2:17)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라고 증거하고 있다.
(시5:7)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사랑을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리이다
(시65:4)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살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  
지금 온 천지가 성탄을 알리는 갖가지 장식과 캐롤 송으로 가득차 있다. 심지어 기독교를 반대하는 모슬렘 지역이나 불교권에서도 연말이 되면 어김없이 나타나는 성탄행사는 앞으로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하는 관문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올해도 성탄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우리들은 이 성탄을 통하여 불신자의 마음의 문을 여는 방법을 찾아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기독교 문화를 많이 만들어내어 복음을 거부하는 지역으로 파고 들어가야 할 것이다.
지금 이슬람 권에서는 장사를 위한 한 가지 수단으로 한다고 생각하겠지만 사람들의 마음에는 예수님이 탄생하였다는 사실을 기억속에 남기는 일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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