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극/기다리는사람들

주님이 주목하시는 가정

은바리라이프 2008. 9. 8. 09:49

주님이 주목하시는 가정
말씀:누가복음 1:5-17
요절:누가복음 1:17 "저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리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

  지난 11월 19일 삼성 이건희 회장의 셋째 딸 윤형씨가 미국에서 자살했다는 뉴스가 저희들에게 큰 충격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아무리 부잣집 딸이고, 외국유학을 하고, 유산을 2000억이나 받아도 그것이 전부가 아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나라 최고의 재벌 가문, 사람들은 누구나 한 번쯤은 그런 가정을 부러워했을 법합니다. 그런데 오늘본문에는 이런 가정과는 전혀 다른 한 가정이 등장합니다. 그 가정은 아무 것도 내 세울 것이 없는 가정이었습니다. 그 가정에는 자식도 없었습니다. 두 사람은 나이 늙어서 이제 별 소망도 갖기 힘들었습니다. 그 가정은 사가랴와 엘리사벳의 가정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가정을 주목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가정에서 메시야의 선구자인 세례요한이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저희들이 오늘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주목하시는 가정, 하나님께서 은혜 베푸시는 공동체는 어떤 곳인가 살펴보는 가운데 은혜 받을 수 있길 기도합니다.

  첫째로, 사가랴와 엘리사벳 가정은 힘든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 앞에서 살고자 애쓰는 가정이었습니다.먼저 우리는 이 시대의 상황에 대해서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때 왕은 누구였습니까? 5절에 보면 헤롯이었습니다. 헤롯은 정통 유대인이 아니고 유대인들이 이방인 취급하는 에돔사람이었습니다. 에돔은 에서의 후손을 가리킵니다. 그런데도 그가 로마 황제의 측근으로서 33년 동안이나 왕권을 유지했다는 것은 그가 얼마나 교활하고, 기회주의적인 사람이었는가 말해줍니다. 그는 자신의 정권을 유지하는데 있어서 방해가 된다 싶으면 누구를 막론하고 죽였습니다. 심지어는 그의 처 마리암내도 죽였습니다. 그리고 그녀와의 사이에서 낳은 알렉산더와 아리스토불루스라는 두 아들도 죽였습니다. 그는 결혼을 열 번을 하고, 15명의 자녀들을 두었는데 이로서 인해서 말년에 자녀들 사이에 왕권다툼이 심해졌습니다. 이 와중에서 황태자인 첫째 아들 안티파터도 죽였습니다. 그래서 당시에는 "헤롯의 아들이 되느니 차라리 그 집 돼지가 되는 것이 더 낫다"라는 말이 유행했다고 합니다. 그 정도로 잔인하고 교활한 왕이 30년 넘게 통치를 하고 있으니 그 나라가 어떠했겠습니까? 불의가 판을 치고 부정부패가 만연했을 것입니다. 또 당시에 대제사장은 안나스였는데 그는 그의 다섯 아들과 사위 가야바를 모두 대제사장직에 옹립하였습니다. 그 안나스 일가는 성전제사에 유통되는 상품들을 독점함으로서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제사장들이 약 18000명 정도 있었는데, 제사장들의 3분의 2가 부활도 영의 존재도 믿지 않는 사두개파들이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즉 지극히 현실적인 사람들이 제사장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제사장들이 정치권력과 결탁한 어용종교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후에 보면 성전에 들어가서 장사하는 자들을 둘러 엎으시며 호통을 치실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 시대는 정치적으로 종교적으로 심히 부패한 시대였습니다. 사회적으로는 어떠했습니까? 17절에 보면 세례요한이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돌아오게 한다고 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시대가 패역함을 말할 때에 자식의 마음을 아비에게로 돌이킨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로 돌아오게 해야 할 만큼 가정이 엉망이었습니다. 부모가 자식들에게 대해서 애정이 없고 책임감이 없는 시대였습니다. 아마 당시에도 오늘날과 같이 부모들이 자식들을 놔두고 집을 나가고 아이들을 학대하는 그런 못된 부모들이 많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다가 사가랴와 엘리사벳의 가정 상황은 어떠했습니까? 7절을 보십시오. "엘리사벳이 수태를 못하므로 저희가 무자하고 두 사람의 나이 많더라" 사가랴와 엘리사벳 두 사람은 자식을 낳지 못하고 늙어가고 있었습니다. 사가랴와 엘리사벳 가정을 둘러싸고 있는 상황은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사회적으로, 또 그 가정 내부적으로 매우 어두웠습니다. 이때 보통 사람 같으면 아무 소망도 없이 양로원의 노인들처럼 TV나 보면서 나날을 보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 부부는 어떻게 살았습니까? 다같이 6절 말씀을 한 목소리로 읽어보시겠습니다. "이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니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더라" 그들은 헤롯왕 앞에 살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제사장이기 때문에 대제사장인 안나스의 눈치를 보며 살기 쉬운데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 시대의 시류를 따라 살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오직 하나님 앞에 살았습니다.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를 볼 때 그들이 얼마나 믿음으로 살고자, 말씀대로 살고자 몸부림을 쳤는가 알 수 있습니다. 8절에 보면 사가랴는 제사장의 직무도 하나님 앞에 행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당시에 제사장들이 성전예배를 우습게 생각하고 형식적으로 드렸던 것에 비하여 사가랴는 하나님 앞에서 두렵고 떨림으로 제사장 직무를 수행하는 그 시대의 의인이었습니다.    

  사실 그들은 여러모로 불신과 인간적인 생각에 휩싸이기 쉬웠습니다. 이 나라가 이렇게 되도록까지 하나님은 도대체 뭘 하고 계시는가? 헤롯같이 불의한 자가 왕으로 30년 넘게 통치하고 있는데 하나님은 왜 침묵하고 계시는가? 대 제사장 안나스가 저렇게 부패했는데 왜 하나님은 가만 놔 두시는가? 헤롯같은 사람도 자식을 15명이나 낳는데 왜 우리 가정에는 자식을 한 명도 주시지 않는가? 그들은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며 아무렇게나 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어떤 힘든 상황가운데서도 하나님 앞에 살았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경외심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붙들고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가랴와 엘리사벳 가정을 주목하시고 메시야의 선구자 세례요한을 탄생케 하시고자 한 것입니다.

  우리도 때로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시대가 이처럼 혼탁하고 거짓과 부정부패 투성이인데 나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산다고 무슨 의미가 있을까? 사람들이 다 실리와 자기 유익을 좇아 살아가는데 우리 한 가정이 의롭게 살고자 애를 쓴들 그것이 무슨 힘이 있을까?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을 주목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가정을 눈 여겨 보십니다. 그리고 때가 되면 반드시 그 사람과 그 가정을 귀하게 들어 쓰십니다. 당시 그 시대는 도무지 소망이 없어 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시대에 메시야 탄생의 장엄한 역사를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캄캄한 어둠을 뚫고 구속역사의 여명이 밝아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여명의 눈동자가 될 사람이 누구인가? 구원사의 서곡을 장식할 가정이 누구인가? 두루 감찰하시다가 여호와의 눈길이 마침내 사가랴와 엘리사벳 가정에 포커스가 맞춰진 것입니다. 시편 102:19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 하늘에서 땅을 감찰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시편 7:9절에 보면 "의로우신 하나님이 사람의 심장을 감찰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온 세상을 두루 감찰하시는 하나님은 때가 되면 반드시 action을 취하십니다.

  헤롯왕가는 한때 세상의 영화를 다 누렸습니다. 그러나 두루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눈길앞에 마침내 저주를 받습니다. 헤롯은 자신이 죽인 아내 마리암내의 유령에 시달리다가 괴로운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의 왕위를 계승한 아들 헤롯 아켈라오는 수많은 양민들을 학살하다가 로마정권에게 불신임을 받고 쫓겨납니다. 그의 동생 헤롯 안디바는 세례요한의 목을 베는 등 죄를 범하다가 프랑스의 이름없는 지역으로 추방당합니다. 헤롯 아그립바 1세는 사도행전 12장에 보면 사람들이 환호할 때에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챘다가 충에 먹혀 죽습니다(행12:23). 헤롯 왕가의 최후는 모두 비참했습니다. 지금 당장 높은 자리에 오르고 세상 사람들의 부러움과 인기의 포커스가 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은 우리가 별로 특출 난 것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추운 겨울 김장채소 밭에 야무지게 속이 꽉 찬 배추가 되지 못하고 그 배추 옆에 붙어서 찬 서리에 눅눅해진 겉절이용 배추 이파리 같을 수도 있습니다. 무서운 헤롯 정권 치하에서 자식도 없이 늙어 가는 사가랴와 엘리사벳 노부부는 김장채소밭에 버려진 우거지용 배추이파리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을 곱게 주워 짚으로 엮어서 양지 바른 큰 기둥에 걸어두시고 지친 나그네의 영적인 시장기를 달래주는 구수한 된장국 같은 인생이 되게 하셨습니다. 저희들도 다른 사람들야 어떻게 산다 할지라도 우리는 오직 하나님 앞에 살아서 하나님의 주목을 받는 자들이 될 수 있길 기도합니다. 지금은 비록 속이 꽉 찬 배추처럼 상종가를 치지 못할지라도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보시고 귀하게 써 주시는 주의 종들이 될 수 있길 기도합니다.

  둘째로, 사가랴와 엘리사벳 부부는 싸인이 보이지 않아도 끝까지 간구하는 가정이었습니다. 9절을 보십시오. 사가랴는 어느날 주의 성소에 들어가 분향하는 일을 맡게 되었습니다. 여기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제사장의 숫자가 하도 많아서 평생에 한 번도 주의 성소에 들어가 제사 드리는 기회를 못 얻은 자들도 많았습니다. 더구나 성전에서 분향하는 것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직분으로서 제사장의 직무 중에서도 가장 귀한 직무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직무에 사가랴가 뽑혔다는 것은 하나님의 어떤 섭리가 있었던 것입니다. 마침내 사가랴는 주의 성소에 들어가서 분향하며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때에 다른 모든 백성들도 성전 바깥뜰에서 기도를 하였습니다. 이로서 제사장 사가랴의 기도와 백성들의 기도가 합해져서 향기로운 연기가 되어 하나님께 올라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우습게 생각합니다. 기도한다고 무슨 일이 이루어질까? 며칠 기도생활하지 않고 적당히 지낸다고 무슨 잘못된 일이 일어나겠는가? 기도는 결국 자기암시가 아닌가? 기도와 명상이 무슨 차이가 있는가? 이처럼 기도에 대해서 나름대로 인간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11절을 보십시오. "주의 사자가 저에게 나타나 향단 우편에 선지라" 주의 사자가 언제 나타났습니까? 사가랴와 백성들이 기도하고 있을 때에 나타났습니다. 우리는 제사장 사가랴와 백성들이 합심해서 간절히 기도하고 있을 때에 천사가 나타났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때 천사가 한 말이 무엇입니까? 13절을 다같이 읽어 보시겠습니다. "천사가 일러 가로되 사가랴여 무서워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천사는 사가랴에게 말하였습니다.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여기서 '간구함'이란 단어는 헬라원어에 '      (데시스)'로서 '스스로를 졸라매듯 간청하다' '탄원하다' '간청하다' 그런 뜻이 있습니다. 성경에서 일반적으로 '기도하다'는 헬라어에 '           (프로슈코마이)'를 씁니다. '           (프로슈코마이)'는 '하나님께 구하였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데시스)는 의미가 훨씬 더 강합니다. 이를 볼 때에 사가랴의 평소 기도생활이 어떠했을까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는 보통 사람들이 하루 세 번 식사 기도하듯이 형식적으로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당시에 보통 제사장들이 길거리에서 자신들의 기도하는 모습을 자랑하기 위해서 멋있게 유창하게 길게 기도하는 그런 기도와도 달랐습니다. 그는 정말 스스로를 졸라매듯이, 탄원하는 심정으로, 애원하는 심정으로 기도하였습니다. 그의 그런 기도생활이 얼마나 간절하고 애절했으면 천사가 직접 나타나서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라고 했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특별히 스스로를 졸라매듯이 하는 기도, 군급한 심정으로 드리는 기도, 과부와 같이 한 맺힌 심정으로 드리는 기도는 반드시 들으십니다. 시편 94:9절에 "귀를 지으신 자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자가 보지 아니하시랴"라고 하였습니다. 시편 18:6절에 "내가 환난중에 --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나의 부르짖음이 그 귀에 들렸도다"고 하였습니다. 사가랴의 가정이 평소에 무슨 기도를 드렸을까요? 단지 아들만을 주시도록 기도했을까요?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적어도 사가랴는 그 시대에 이스라엘의 제사장입니다. 더구나 그는 무늬만 제사장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사는 의인이요, 주의 모든 규례와 계명대로 흠이 없이 행했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는 제사장이었다면 적어도 민족의 현실을 바라 보고 그는 가슴아파하였을 것입니다. 나이 늙도록 자식 없는 자신의 가정도 안 됐지만, 도덕적 영적 부패가 심각한 그 민족을 생각할 때 그는 더욱더 마음이 아팠을 것입니다. 어쩌면 나이 늙도록 아이를 갖지 못하는 그의 아내 엘리사벳의 상태가 잉태치 못하고 구로치 못하는 이스라엘의 상태와 같게 느껴졌을지도 모릅니다. 이사야 54:1절에 보면 이사야 선지자는 이스라엘을 가리켜 "잉태치 못하며 생산치 못한 너는 노래할지어다 구로치 못한 너는 외쳐 노래할지어다"라고 하였습니다. 사가랴는 자신의 가정이나 그의 민족 현실이 불임 여인의 상태와 같음을 생각하고 심정을 졸라매듯 기도하였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그의 간절하고 통절한 기도를 들으시고 주의 사자를 급파하신 것입니다. "사가랴여! 무서워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하나님은 기도하는 개인과 가정을 절대로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사무엘서에 나오는 한나도 보십시오. 사무엘상 1:10절에 보면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통곡하며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15절에서는 "여호와 앞에 자신의 심정을 쏟아 부으며 기도했다(I am pouring out my soul to the Lord)"고 했습니다. 이때 마침내 하나님께서는 한나의 기도를 응답하사 아들 사무엘을 주셨습니다. 누가복음 18:7,8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고 하였습니다. 야고보서 5:16절에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저희들이 아무리 힘든 상황 가운데서도 얼른 응답이 없을지라도 사가랴, 엘리사벳 부부와 같이 간구하여 기도하므로 그 간구함이 하나님께 상달되고 기도의 응답을 받는 저희들이 될 수 있길 기도합니다. 미국 캔사스시티에 Noah Lee, Sweety Lee 선교사님 가정은 20년 동안 자녀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방양들을 자녀같이 키우며 말씀대로 헌신했을 때에 20년 만에 아들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중앙센타에 한 학사 가정은 10년동안 아이가 없었는데 이번에 아이를 잉태하여 온 센타가 축제분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센타는 지난 4년 동안 시련기를 거치며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제자양성도 잘 되지 않고, 캠퍼스 역사가 막막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올해 사모님들과 풀 타임 목자님들이 매일 합심기도를 하였습니다. 여름에는 가장 더운 2시에 졸리는 눈을 부벼가며 기도하였습니다. 그랬을때에 지난 제자수양회때에 11명의 천로역정 심포지움 강사들을 굳게 세워 주셨습니다. 지난 세례성찬식 때는 18명의 형제자매들이 세례를 받게 하셨습니다. 힘들게만 느껴지던 의대 땅에도 유수웅 형제를 굳게 세워주셨습니다. 수없이 실패를 거듭한 교대 캠퍼스에도 목자같은 양 임상은 자매를 세워주셨습니다. 대가 끊길 뻔한 보건대에도 윤은영, 이어지나 양대 산맥을 세워 주셨습니다. 광주여대에도 조은량자매와 같이 좋은 양을 세워 주셨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안대섭목자가 체육관을 그만두도록 간절히 기도했는데 3년만에 마침내 그렇게 되었습니다. 저는 올해역사를 보면서 하나님께 간구하며 드리는 기도를 하나님께서 반드시 들으시고 응답하신다는 사실을 깊이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저희들이 인간적인 눈으로 상황만 바라보지 말고 믿음으로 간구하여서 주님의 주목을 받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셋째로, 사가랴와 엘리사벳의 가정은 성령 충만한 가정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가랴의 기도를 들으시고 과연 어떻게 응답을 베풀어 주셨습니까? 13b절을 보십시오.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마침내 그 가정에 아들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름은 요한이라고 하였습니다. 요한은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도다" 이런 뜻입니다. 하나님은 사가랴의 가정에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벳이 나을 아들은 단지 사가랴 가정만을 위한 아들이 아니었습니다. 다같이 14-16절을 함께 읽어 보시겠습니다.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요 많은 사람도 그의 남을 기뻐하리니 이는 저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저희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니라" 요한이 탄생하면 사가랴의 가정은 물론 기뻐하겠죠. 그러나 다른 많은 사람도 그의 탄생을 기뻐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가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저희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가장 큰 문제가 무엇입니까? 겉으로 볼 때에 로마제국으로부터 민족을 해방시키는 것이 급선무처럼 보입니다. 가난한 민족으로 경제적으로 부강하게 하는 것이 중요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보다 더 크고 근본적인 문제는 하나님으로부터 떠나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돌이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장에 보면 동방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분이 어디계시냐고 묻자 온 예루살렘이 소동했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만약에 하나님께 관심이 있었다면 하나님께 마음이 있었다면 과연 소동했을까요? 기뻐하고 기뻐해야 할 것입니다.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야가 마침내 오셨다고 찬송하며 축하하고 환영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에는 온갖 세상적인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육신적인 욕망, 물질적인 소욕으로 충만해 있었습니다. 도대체 영적인 소원이 없었습니다. 우리나라가 요즘 그렇잖습니까? 지난 주 신문에 보니까 우리나라가 마침내 수출 5000억 달러를 달성했다고 보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5000억 달러 하니까 별로 개념이 안 잡히십니까? 저희가 초등학교 다닐 때에 앞으로 1980년대가 되면 수출 100억 달러 시대가 될 것이라고 박정희 대통령이 한참 선전했습니다. 아침마다 "새벽종이 울렸네" 새마을 노래가 울려 퍼졌습니다. 교실마다 80년대가 되면 국민소득 1000불, 수출 100억 달러 시대가 될 것이라는 신동우화백의 만화그림이 도배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국민소득 15000불, 수출 5000억 달러, 국민소득은 그때의 15배, 수출은 50배가 되었습니다. 집집마다 차 없는 집이 없습니다. 83년 이 센타를 지을 때에 주차장을 하나 만들라고 구청에서 지시가 내려왔는데 우리에게 무슨 차가 필요하냐? 언제 저 주차장에 차 세울 날이 올까? 생각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센타에 차가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나라를 엄청나게 축복하셨습니다. 그러면 지금 사람들의 마음 속에 하나님의 은혜로 가득 차 있습니까?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기쁨과 영적소원으로 충만해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은 갈수록 황폐해져가고 있습니다. 이기적이 되어 갑니다. 육체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저는 2주에 한 번씩 기차 타고 서울 가는데 역에서 헤어지는 연인들이 수 많은 사람들이 보는 대합실에서 아무 서스름이 없이 껴안고 뽀뽀하는 모습을 많이 봅니다. 우리가 캠퍼스에서 피싱해 보면 말씀공부에 소원있는 양 한 사람을 얻기가 얼마나 어렵습니까? 누구 가수가 온다. 누구 인기 연예인이 온다, 코메디 웃찾사, 게그 콘서트 녹화한다 하면 압사 당할 정도로 사람들이 많이 모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들을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런 젊은이들의 마음을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께로 돌이킬 수 있습니까?  

  당시 이스라엘 가운데서도 이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일을 사가랴와 엘리사벳의 가정에서 태어날 아들 요한이 감당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가 어떻게 이 막중한 사명을 감당합니까? 다같이 17절 말씀을 함께 읽어 보시겠습니다. "저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리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이를 감당한다고 했습니다.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 이것은 한마디로 영적 전쟁을 치루는 투사의 스피릿을 말합니다. 아합 시대에 백성들은 모두 다 바알신에게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이런 이스라엘백성들의 마음을 돌이키는 것이 어디 쉽겠습니까? 선지자도 바알선지자는 850명이나 되는데 여호와의 선지자는 엘리야 한 사람 뿐입니다. 850:1의 전투입니다. 인간적으로 도저히 승산없는 전투였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 전투에서 누가 승리했습니까? 엘리야가 이겼습니다. 어떻게 이겼습니까? 그 심령과 능력으로 이겼습니다. spirit and power! 엘리야의 영적 권세가 850명의 바알선지자들을 다 물리치고 온 이스라엘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이킨 것입니다. 세상에 힘든 일이 많이 있지만 가장 어렵고도 힘든 일은 사람의 마음을 돌이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체험을 통해서 익히 알잖습니까? 양들을 붙들고 "수양회 갑시다" "한 번만 성경공부 합시다" 맛있는 것을 사주고, 영화 보여주고, 같이 놀아주고, 어려운 전공공부 도와주고, 별의별 짓을 다 해도 그것만으로 사람의 마음이 돌아오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만 먹고 떨어지는 양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는 오직 심령과 능력, spiritual power, 영적 권세로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스가랴 4:6절에 보면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신으로 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바로 그 엘리야의 심정과 능력을 세례요한은 타고난다는 것입니다. 엘리야의 심정과 능력은 죄에 대해서는 불같이 분노하지만 그 사람의 영혼에 대해서만은 화산처럼 뜨겁게 사랑하는 목자의 심정을 가리킵니다. 바알 선지자들에 대해서는 노를 발하여서 다 처단하지만 무지한 백성들은 모두 거기서 빼내와서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는 마음, 이것이 바로 엘리야의 심정과 능력입니다. 실제로 세례요한이 나중에 광야에서 메시지를 전하자 수많은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몰려왔습니다. 그에게는 어떤 인간적인 매력도 없었습니다. 그가 입은 옷, 약대 털옷은 광야패션으로서 투박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광야에서 집회를 하고 나서 무슨 맛있는 것을 주는 것도 아닙니다. 무슨 볼 거리도 없습니다. 그저 한 사람 한 사람 요단강으로 끌고 들어가서 물 속에 머리를 쳐 박고 세례를 줍니다. 그의 메시지는 단순하고 원색적이었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워왔느니라(마3:2)" "이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마3:7)"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1:29)" 그러나 그의 메시지에는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간절한 사랑이 살아 숨쉬고 있었습니다. 강력하게 회개를 촉구하는 성령의 불을 품는 메시지였습니다. 그것은 마치 거대한 자석과도 같아서 어떤 쇠덩이같이 완악한 사람들의 마음도 끌어당기는 강력한 견인력이 있었습니다. 마치 예수님의 십자가가 어떤 죄인의 마음도 녹이는 용광로 같은 힘이 있듯이 세례요한의 삶과 메시지는 몇 만 볼트의 영적 전류를 흘려 보내는 발전기와도 같았습니다. 이로서 세례요한은 메시야의 길을 예비하게 됩니다. 이런 메시야의 선구자 세례요한이 사가랴의 가정에서 태어납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처럼 대단한 인물을 사가랴와 엘리사벳의 가정에서 태어나게 하십니까?

  15절을 보십시오. "이는 저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사가랴와 엘리사벳 가정은 포도주나 소주를 멀리하는 가정이었습니다. 엘리사벳의 모태는 성령으로 충만한 모태였습니다. 하나님은 메시야의 선구자를 탄생시킬 가정을 아무나 택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가정은 하나님 앞에 사는 가정이었습니다. 말씀을 사모해서 말씀대로 사는 가정이었습니다. 기도하는 가정이었습니다. 시대의 세속주의 상징인 포도주와 소주를 멀리는 가정이었습니다. 대신에 성령으로 충만한 가정이었습니다.

우리는 다들 세례요한과 같은 시대를 돌이킬 위대한 인물들을 키우고 싶습니다. 우리의 자녀들을 그리고 우리의 양들을, 우리리더들을 그렇게 키우고 싶습니다. 한 사람을 키워도 시대의 흐름을 바꾸어 놓을 수 있는 영적인 거목들로 양성하고 싶습니다. 이때 우리는 세례요한을 탄생시킨 사가랴와 엘리사벳 가정으로부터 배울 것이 많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 자신부터 먼저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 가정과 요회와 모임을 기도하는 공동체로 만들기에 힘써야 하겠습니다. 우리 모든 동역자들이 성령 충만한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서 우리의 허리에서 이 시대를 감당할만한 위대한 영적 지도자, 주의 길을 예비하는 주 앞에 큰 자들을 많이 배출 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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