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극/기다리는사람들

마가복음 1:1-13 [ 세례 요한과 그 세례 ]

은바리라이프 2008. 9. 6. 16:02

마가복음 1:1-13 [ 세례 요한과 그 세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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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 2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예비하리라 3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4 세례요한이 이르러 광야에서 죄 사함을 받게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5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라 6 요한은 약대털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 7 그가 전파하여 가로되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8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거니와 그는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시리라
9 그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10 곧 물에서 올라 오실쌔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같이 자기에게 내려 오심을 보시더니 11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12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 내신지라 13 광야에서 사십일을 계셔서 사단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고 해 놓고선, 마가복음은 예수이야기보다 먼저 세례 요한에 관한 이야기를 꺼냅니다. 마가는 세례자 요한이 구약에 예언된 대로 온 사람이라고 밝힙니다(2). 세례요한이 구약에 예언된 대로 왔다는 것을 마가복음의 서두에서 굳이 밝히는 것은 ‘예수를 밝히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다른 일을 위해서 온 사람이 아니라 예수가 누군지 밝히기 위해서 온 사람이기 때문입니다(7ff.).

6절을 보면 요한은 약대털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 wild horney 을 먹습니다. 이 모습은 그가 광야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과 선지자 무리 중 일원이라는 것을 보여 줄 뿐 아니라 그가 바로 오리라 한 엘리야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신약시대의 우리보다 이스라엘 백성이 당연히 먼저 받아들입니다.
그들은 참으로 엘리야를 기다리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과 나라가 이방 민족과 나라인 로마에 눌려 살고 있던 당시의 난국을 해결해 줄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메시아가 오기 전에 엘리야가 먼저 오리라 하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말 3:1; 4:1,4). 그래서 그들은 어딘가에 엘리야와 같은 사람이 나타났다는 소문이 들리면 부지런히 찾아다니면서 그 모임에 참석하기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마치 무슨 기도원에, 무슨 교회의 은사집회에, 무슨 무슨 학교에, 무슨 무슨 세미나에 부지런히 좇아다니는 풍조와 비슷한 점이 있는지도 모릅니다.

말라기는, 기쁨의 구원을 성취하고 두려움의 심판을 내리칠 메시야가 오기 전에, 오는 메시야를 가리켜 ‘이 사람이 바로 그 메시야다’라고 할 사자가 먼저 올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앞서 오는 사자의 이름은 엘리야입니다. 그가 엘리야라는 것은 나중에 9장에 가서 예수님의 입으로 다시 확인됩니다.

엘리야와 같은 선지자가 다시 나타나면 그것은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곧 임박했다는 징조입니다(말4:). 그것은 마치 아침안개가 그날이 쾌청하고 햇볕이 맑을 것이라는 것을 가리켜 주는 지표가 되고 징조가 되는 것과 같습니다. 둥근 달무리가 환하면 내일은 흐리거나 비가 올 것을 알 수 있음과 같이 요한이 온 것은 예수가 온다는 것을 가리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요한은 엘리야의 심정과 능력으로 왔습니다(눅1:16). 엘리야의 심정은 언제나 죄에 대하여 심판을 선언하던 심정입니다. 그는 나봇의 포도원을 강탈한 아합과 이세벨에게 (하나님께 범죄한 자의) 비참한 죽음을 선고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연놈들과 싸우던 사람입니다. 그의 싸움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걸려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왕과도 싸우고 왕비와도 싸웁니다. 그는 가리지 않고 싸우던 사람입니다.

그런 엘리야가 다시 나타났다는 것은 그 시대가 아합과 이세벨의 때와 같음을 나타내는 것이고, 사람들이 아합과 이세벨의 정신으로 살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가 나타났다는 것은 또 그 시대가 엘리야가 싸워야 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이름으로 싸워야 하는 세대임을 대변합니다. 나중에 헤롯과 헤로디아는 자신의 죄를 지적하는 요한을 잡아 죽임으로서(6:17~29) 헤롯의 나라가 곧 아합의 나라이며 헤롯의 시대가 곧 아합의 시대임을 스스로 증명합니다. 헤로디아는 스스로 자신이 이세벨과 같은 년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아합/이세벨의 정신이 충만한 시대가 바로 엘리야의 등장시기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율례와 법도의 핵심을 자비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교권자들(마3:7)이나 무리들(눅3:7)이나 세리들이나 군병들이나 모두 세례요한으로부터 오직 한 가지를 요청받습니다. 그것은 자비였습니다(눅3:10ff.).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를 모르는 처사입니다. 이스라엘은 1만 달란트를 탕감받은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는 까마귀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자비는 유월절 희생과 다른 것이 아닙니다. 구약은 유월절 희생양으로 말미암아서만 살 길이 있다는 증거들입니다. 스스로의 능력을 부양하는 사람마다 유월절 정신을 버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살게 되었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인간의 권세나 지위를 이용하여 자기 배를 불리는 사람마다 어린양의 피안에서 받은 은혜를 버리는 것입니다. 요한은 이 유월절 정신이 사라져 버린 시대를 향하여 분명한 싸움을 겁니다. 독사의 마음으로 독사의 시대를 살아가는 독사의 자식들에게 돌아갈 것은 하나님의 진노뿐입니다. 요한은 이것을 드러내려고 온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요한을 만난 사람은 회개하고 죄사함을 받지 않으면 끝장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만나는 사람에게 이것을 알려 주지 않는다면 요한은 오리라 한 엘리야가 아닙니다.

옛날 엘리야도 그랬고 지금의 엘리야 요한도 그렇고 그들이 싸우는 방식은 독특합니다. 그들이 싸우는 것은 자기들이 싸우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싸움을 거는 일밖에 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그들이 하는 일이라곤 싸움을 거는 일밖에 없습니다. 싸움터에 나가서, ‘우리 편에 놀라운 장수가 있다. 그러니 각오해라. 겁나면 항복해라. 이 나쁜 놈들아!’ 하고 말하는/외치는 것이 그들이 싸우는 방식입니다. 엘리야가 하나님을 업고 큰 소리치듯이 요한이 지금 큰 소리치는 것(4)은 자기 뒤에 유명하고 유력한 싸움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싸움꾼의 이름은 예수입니다. 이 요한이 믿는 싸움꾼의 등장은 요한이 주는 세례와 관계있습니다.

마가는 요한이 전파하는 것이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라고 적고 있습니다. 그러나 물에 잠기기만 하는 것이라면 누구나 세례를 받을 수 있을 것이고, 물만 찍어 바르는 것이 회개라면 개들도 받을 수 있는 것이 회개일 것이며 원숭이도 세례를 줄 수 있을 것입니다.
물에 들어가는 모든 것을 세례라고 부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또, 요한의 세례가 예수께서 베푸시는 세례와도 다른 것이라고 한다면 요한의 세례는 무엇으로 이해를 해야 하겠습니까?
요한의 세례는 세례를 받는 사람들의 신분을 드러내는 것이며 예수가 받을 세례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세례를 받는 사람들마다 죄인의 자리에 들어가게 됩니다. 여기에는 예수님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오셔서 요한이 베푸는 세례를 받습니다. 이렇게 예수께서 요한의 세례를 받으심으로 - 죄인의 자리에 들가심으로 인해 요한의 세례가 참된 회개의 세례로서의 의미를 획득하게 됩니다. 요한이 예수를 지목하러 온 것이라면 요한이 주는 세례도 예수가 받음으로 참회개의 세례가 되는 것입니다.

5절과 9절에 나타나 있는 대로, 백성들이 받는 세례와 예수께서 받으시는 세례의 의미와 그 분명한 대조를 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나아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세례를 받지만 그들은 죄를 토해 놓기만 할 뿐이지 아직은 죄로부터 도망갈 수도 없고 떠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마가는 곧바로 요한과 예수를 만나게 합니다. 요한의 세례는 예수께서 오시는 길을 예비하는 것이며 예수께로 가는 길을 가리키는 이정표입니다. 죄를 떨어지게 하는 능력과 죄로부터 출애굽시킬 수 있는 능력은 오직 성령만의 것이며, 죄를 드러나게 하는 일은 율법에게 맡겨진 일입니다. 요한은 여기서 율법의 대표입니다. 이 요한은 예수를 가리키는 손가락입니다. ‘내게는 능력이 없다. 저 분에게로 가라’고 예수를 가리켜 말하는 일이 요한에게 맡겨진 일입니다. 이 말은 곧, 너희가 받는 세례로서는 다가오는 심판과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길이 없다 오직 예수의 세례 받으심만이 진노를 피하는 첩경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자신이 받는 세례가 ‘모든 의를 이룸(마3:15)’이라고 하신 것은 바로 이런 까닭입니다.

이렇게 요한은 여기에서 예수에게 세례를 주는 자로 등장합니다. 그가 주의 길을 예비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어 그들로 ‘직접’ 회개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죄 있음을 선포하고 그들이 받는 세례를 동일하게 예수에게 베푸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예수를 광야에 나와 있는 사람들과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백성들과 예수는 동일한 자리, 즉 임박한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야 할 자리에 함께 서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서있는 자리는 같지만 그 의미까지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동시에 광야로 나가서 다 세례를 받고 가나안 땅으로 다시 들어온다 해도 예수의 세례를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의 세례는 사람들의 죄를 자기 것으로 하여 자복하는 것이지만 사람들은 자기 죄를 자복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요한이 세례를 받는 사람들에게 요구한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그들은 맺을 수 없습니다. 회개의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사람들은 ‘자신’이 광야를 지나가야 하는 것이 아니라는 깨달아야 합니다. 복음서는 그것의 기록입니다. 이것은 옛날에 이스라엘이 광야를 지나갈 때 ‘그들 자신’이 40년간을 광야를 지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지나가시는 것이었다는 것을 깨달아야 했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이 하나님의 품에 쌓여 광야를 건너고 있다는 것을 믿고 감사하며 따라야 했습니다. 원망없이 불평없이. 그러나 그들의 광야 행진은 실패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버리고 또는 버리면서 걸었기 때문입니다. 옛날에 그들이 하나님의 인도를 버리는 것이 옳지 않았듯이 이제는 예수의 세례와 예수의 광야행진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제 예수께서 성공하시면 우리도 그 안에서 성공하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께서 순종하시면 우리도 그의 순종을 얻게 됩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를 버리면 하나님을 버리는 것이 됩니다. 우리에게 있는 이 예수의 소식을 늘 기억하고 사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