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공동체 내의 세례요한그룹 수용
- 마태복음 3:1-17절을 중심으로 발 제 자: 오종신 -
Ⅰ. 서론
Ⅱ. 마태공동체 내의 세례요한그룹 수용 - 외부적 도전 방어측면
1. 외부적 도전
2. 마태의 방어노력
Ⅲ. 마태공동체 내의 세례요한그룹 수용 - 내부적 갈등 해소측면
1. 내부적 갈등
2. 마태의 해소노력
Ⅳ. 결론
초 록-------------------------------------------------------------------
마태복음 3장 1-17절에 대한 이전의 연구들은 세례요한과 예수와의 관계중심으로 되어왔다. 예수와의 밀접한 관계를 제시하건 아니면 예수와의 차별성을 강조하건 간에, 이는 세례요한을 보는 시각을 예수와 세례요한과의 관계에 대해 2차원적 시각으로 제한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본 소고에서는 마태복음이 쓰여질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염두해 두고 마태가 세례요한에 대해 기록하는데 있어, 마태공동체 내에 있는 세례요한그룹을 어떻게 다루었는가에 착안하여 마태공동체 자체에 가해지는 외부적 도전에 대한 방어적 측면, 그리고 마태공동체 내의 세례요한그룹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내부적 갈등에 대한 해소시도 측면을 고려하였다. 결국 이러한 방법은 외부적 도전이 내부적 갈등을 해소하는 촉매제가 된다는 것을 드러내며 마태가 세례요한을 다룸에 있어 마태공동체와 마태공동체 내의 세례요한 그룹 또한 바리새적 유대교와 세례요한공동체를 다차원적 시각에서 접근여 그들을 수용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Ⅰ. 서론
마태복음 3:1-17절에 대한 지금까지의 연구들은 기독론적인 관점에서 예수의 예비자로서의 세례요한 상을 구성하여 세례요한과 예수와의 상관성에 집중해왔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들은 마태공동체 내에 상존하고 있었던 세례요한 그룹에 대한 관심을 가지지 못함으로 마태복음이 저술될 당시의 공동체의 정황을 파악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 마태복음 3:17절 속에서 세례요한은 예수와의 연속성 가운데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을 꾸짖으면서도, 또한 예수와의 차별성을 강조하며 자신을 폄하하기도 한다. 이러한 구절은 세례요한 그룹과 마태공동체의 연합노선이 바리새인으로 대표되는 유대인 지도자그룹과 외부적으로 도전 받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또한 마태공동체 내의 세례요한 그룹에 대한 입장차이로 내부적으로 갈등하고 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이는 본문이 마태공동체와 바리새적 유대교, 세례요한 공동체와 그리고 마태공동체 내에 있는 세례요한그룹의 상호관계를 반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본 소론에서는 마태공동체의 외부적 도전에 대한 방어의 측면에서 세례요한 그룹과의 연합을 꾀하고, 또한 내부적 갈등의 측면에서 세례요한 공동체와의 차별성을 강조하면서도, 자신의 공동체에 속해있는 세례요한 그룹과의 연합을 추구하는 마태의 시도를 규명하고자 한다.
Ⅱ. 외부적 도전 방어측면
1. 외부적 도전
마태복음서는 유대교에 대해 두 가지 상반된 입장이 공존하고 있다. 마태기자는 유대교, 특히 그중에서도 특히 율법과 그 율법이 포함하고 있는 도덕적 요구에 대해서는 상당히 동정적이면서도 유대교의 지도자 그룹에 대해서는 지나칠 만큼 신랄한 비판을 가하고 있다. 이는 마태가 유대교의 제도를 사랑하고 그 신앙의 많은 부분을 공유하지만, 하나님이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 한 더욱 완전한 진리를 찾지 못하는 유대교의 무능력에 대해서는 한탄하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특히 마태복음이 쓰여진 시대는 바리새적 유대교가 전면에 나서는 시기로 성전파괴 이후에 회당과 율법중심으로 모이는 이들을 중심으로 이스라엘 내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 마태기자는 자신이 속해있는 공동체에 대한 이들의 도전을 심각하게 고려하여 어떻게 효과적으로 대응할까에 관심을 가졌다고 할 수 있겠다.
즉 경쟁자로서 또한 도전자로서 마태가 이들을 제어하며 공격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마태복음 내에서도 여러 곳(3:7; 5:20; 9:11,14,34; 12:2,14,24,38; 15:1,12; 16:1,6,11,12; 19:3; 21:45; 22:15,34,41; 23:2,13,15,23,25,26,27,29; 27:62)에서 이 도전자들에 대한 부정적인 언급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구절들을 통해 마태기자는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없앨 모의를 하는 자들로 그리기(12:14)도 하고, 제자들에게 그들의 가르침을 경계하라고 훈계하는 예수를 그리기(16:12)도 한다. 그리고 심지어 마태는 예수가 그들을 '독사의 자식'이라며 꾸짖는 모습을 그림으로 이들에 대한 부정적인 모습을 통해 그들을 공격하고 있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이러한 바리새인에 대한 부정적인 언급이 세례요한의 입을 통해서도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요한은 많은 바리새파 사람들과 사두개파 사람들이 세례를 받으러 오는 것을 보고,
그들에게 말하였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닥쳐올 징벌을 피하라고 일
러주더냐? 회개에 알맞은 열매를 맺어라. 그리고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다'하고
말할 생각을 하지 말아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
라함의 자손을 만드실 수 있다. 도끼를 이미 나무 뿌리에 갖다 놓았으니, 좋은열
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는 다 찍어서, 불 속에 던지실 것이다."(마3:7-10)
이 부분은 요한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세례를 받으러 오는 것을 보고 행한 그의 설교단락이다. 여기서 요한의 설교 대상을 누가의 경우 '무리'(눅3:7)라고 설정하는 반면 마태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으로 설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해 슈바이쪄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하나님의 진노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을 향해있고, 누가에게서처럼 전체 이스라엘을
향하지 않는다. 이 도입문에서는 이스라엘의 각기 다른 신학적 판단이 단순히 반영
된다. 누가는 세례자가 이스라엘 전체를 비난하는 것으로 본 반면에 마태는 이스라
엘 내부에 있는 복종하는 자와 불복종하는 자 사이를 더 강하게 구별하고 자신의
교회 내부에서도 복종하는 자와 불복종 하는 자를 구별한다(3:10=7:19)
이러한 슈바이쪄의 견해가 이 구절에 대하여 마태기자의 의도에 관심을 두어서 해석한 것이라면, 이를 더 발전시켜서 마태기자가 이러한 것을 의도하게 된 상황, 즉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의 대립상황의 흔적을 여기서 발견할 수 있다. 즉 마태기자는 자신의 공동체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과정에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의 대립각을 세움으로 자신의 공동체를 방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 마태의 방어노력
이러한 외부적인 도전에 직면한 마태공동체의 정황안에서 마태기자는 자신의 공동체를 방어하려고 시도한다. 이에 대해 군드리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다른 공관복음과 대조적으로 마태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을 예수와 대조적으로 다루
고 있다. (16:1-12) 이 두 구절(3,16절)을 통해 우리는 종말론적 시대를 고려하여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실패를 읽을 수 있다. 마태는 유대교 지도자들과의 반대되는
주제를 다루길 원한다.
이러한 군드리의 견해는 예수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의 차별성을 부각한데 있어서는 타당하지만, 이 두 구절들이 세례요한의 입을 통해 행해졌던 사실에 간과하여 세례요한과 예수의 메시지를 너무 일률적으로 해석함으로 마태공동체의 정황을 살피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반면 테일러(J. E. Taylor)는 3:7에 대한 주석에서 마태기자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마태의 목적은 예수와 요한을 함께 분류하는 것과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으로 대변되는
유대적 권위들과의 반대되게 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테일러는 마태의 두 가지 의도를 밝힌다. 먼저는 예수와 요한을 함께 분류하는 것이고 둘째는 이들이 유대적 권위들과 반대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를 공동체의 정황에서 해석해보면 마태기자는 마태공동체와 유대교와의 차별성과 마태공동체와 세례요한 그룹과의 연관성에 관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마태는 이러한 의도 속에서 요한의 설교를 제시한다. 상설하였거니와 설교의 도입부분을 마태는 누가와 다르게 다룸으로 이 메시지를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에게 국한시킨다. 그런데 요한의 설교가 유대인들에게 행해지고 있음을 주목하여서 예수가 이방인까지 포괄하는 복음을 전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요한의 세례는 유대인에게만 국한된 것으로 본문을 해석하는 입장이 있다.
요한의 하나님 나라 선포의 원래 의도는 열두 부족의 실제적인 재건이며(3:7a-9)
… 예수는 요한으로부터 열두 부족의 개념을 이어 받아 열두 제자를 임명하여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10:1)에게 보낸다
여기서 게이저는 요한을 유대교 내에서 재생 운동을 하는 지도자로서 그림으로서 그가 유대교 내에서 활동한 자로 그리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본문을 살펴볼 때 타당하지 않다. 요한이 비록 바리새파 사람과 사두개파 사람들'에게' 설교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는 설교에서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드실 수 있다(9절)'고 역설함으로 마태기자는 요한이 어떠한 종교적인 특권의식도 거부하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마태는 회개에 알맞은 열매를 맺으라고 주장함으로 제의적인 확신도 멀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요한의 설교가 유대교 내에만 국한된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오히려 요한의 설교는 바리새적 유대교와의 차별성속에 놓여져 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마태는 이러한 차별성을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 요한의 선포를 예수의 선포와 같이 제시함으로 마태공동체 내부의 세례요한 그룹과의 결속을 다진다.
그 무렵에 세례자 요한이 나타나서, 유대 광야에서 선포하여 말하기를 "회개
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3:2)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 나타나서, 죄를 용서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
다.(막1:4)
요한은 요단 강 주변 온 지역을 찾아가서,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눅 3:3)
마태는 세례자 요한을 소개함에 있어 그의 선포내용을 삽입하고 있다. 이 선포의 내용은 바로 회개의 선포이며 하나님 나라의 임박성이다. 그런데 슈바이쪄는 이 부분에서 마태의 의도가 죄를 용서하는 예수의 세례와 도덕적 회심으로 불러들이는 요한의 설교의 차이점을 강조하는데 있다고 한다. 즉 죄의 용서가 요한에게는 결합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마가와 누가와의 차이를 근거로 한다. 과연 마가와 누가와는 다르게 마태기자가 세례요한은 죄의 용서에 대한 권한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을까? 물론 슈바이쪄의 이러한 비판은 죄의 용서를 예수에게 집중함으로 얻게 되는 마태공동체의 독자성을 드러내는 좋은 증거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예수의 선포와 직면하여서는 설득력을 잃게 된다.
그때부터 예수께서는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하고 선포하기
시작하셨다.(4:17)
세례요한 선포의 중심은 죄사함의 회개가 결여된 것에 있지 않고 예수의 선포와의 연관성에서 찾을 수 있다. 즉 마태는 요한이 옳은 길을 보여주었다(21:32)고 함으로 그에 대해 긍정적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세례요한의 외침을 '주님의 길을 예비하고 그의 길을 곧게 하여라'(3:3)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구절을 통해 마태는 세례요한과 예수와의 연속성을 표현함으로 마태 공동체 내에 있는 세례요한그룹을 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뉘우치지 않았으며, 그를 믿지 않았다'(21:32)고 유대교지도자들을 꾸짖음으로 인해 그들과의 차별성도 부각시키고 있다.
Ⅲ. 내부적 갈등 해소측면
1. 내부적 갈등
마태공동체는 세례요한 공동체와 완전히 분리되었는가? 이 문제에 있어 마태는 세례요한 공동체에 대하여 마태공동체와 금식과 같은 항목이나 혹은 금욕적인 항목(11:18)에서 차이를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마태기자는 이와 동시에 마태공동체 내에 세례요한 공동체가 일부 유입되었음을 시사하는 단락을 포함시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그 시체를 거두어다가 장사지내고 나서, 예수께 와서 알려드렸다.(14:12)
마이어는 마태가 세례요한 공동체에 강한 유대감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지적하면서 이 부분에서도 세례요한공동체의 구성원들이 마태공동체에 유입되었을 가능성에 대하여서는 회의적인 태도를 갖는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타당하지 않다. 왜냐하면 이 구절은 공관복음서에서 마태복음에만 나오는 구절로 마태공동체의 정황을 반영한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 하기때문이다. 즉 마태공동체 내에 세례요한 그룹이 어느 정도 상존하고 있음을 나타낸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러한 주장의 근거 금식에 대한 단락에서도 드러난다. 마태기자는 9:14-17에서 금식에 대한 논쟁부분에 있어 '새 포도주는 새 가죽 부대에 담아야 둘 다 보존된다(9:17)'고 이야기함으로 요한의 제자들에게 반박하고 있다. 그러나 마태기자는 이러한 금식에 대한 요한의 제자들의 주장을 일소하면서도 6:16-18절을 통해 올바른 금식이란 무엇인가를 논증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마태의 이러한 다소 모순적인 태도는 마태복음 자체가 갖는 성격 즉 '가장 유대적이면서도, 유대교에 가장 적대적인' 입장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여기서 마태기자는 세례요한 공동체의 주장에 대해 반박하지만, 그러한 금식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함으로 세례요한 공동체 내에 상존하고 있는 그룹을 수용하려고 시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한편 바리새적 유대교와 외부적으로 도전받고 있는 마태공동체는 내부적으로 여러 가지 갈등을 겪고 있었다. 이방인과 유대인간의 갈등(10:5-6, 8:10 비교)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또한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세례요한 공동체와의 갈등도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 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와서 물었다. "우리와 바리새파 사람은 자주 금
식을 하는데, 왜 선생님의 제자들은 금식을 하지 않습니까? (9:14)
이 본문은 금식논쟁으로 불리는 것으로 세례요한 공동체의 일면을 살펴볼 수 있는 구절이다. 여기서 요한의 제자들은 자신들의 금식을 바리새인의 금식과 같이 두어 마태공동체를 비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해 마이어는 마태가 세례요한 공동체를 바리새인 공동체와 동일선상에 놓치를 피하기 위해 비록 질문은 같이 하는 것으로 묘사하지만 담화내용에서는 빠지는 것으로 설명한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왜냐하면 마가복음(2:18)에서는 대상을 3인칭으로 두어 '사람들이' 와서 질문한 것으로 처리한 반면 마태는 요한의 제자들이 직접 와서 그에게 묻고 있음을 표현함으로 그들에게 직접적인 언급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마태는 세례요한 공동체와 바리새인을 같은 맥락에서 처리함으로 마태가 자신의 복음서에 일관되게 비판하고 바리새인들을 금식에 대한 항목에서 세례요한 공동체를 같이 비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마태는 6:16에서 금식에 대한 잘못된 실행을 비판하는 구절에서 세례요한 공동체와 바리새인을 '위선자들'이라고 간접적으로 표현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또 그는 세례요한 공동체가 주장하는 물세례와 마태공동체의 성령세례를 분명하게 구별하고 있다.
나는 너희를 회개시키려고 물로 세례를 준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나보다 더
능력이 있으신 분이시다. 나는 그의 신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다. 그는 너
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3:11)
이 구절은 본문상으로 요한의 설교가 이어지는 단락이지만 카터는 요한의 설교가 7-10절에서는 종교적 지도자들에게 향해있었지만 이 부분에서 그에게 세례를 준 그룹에게로 옮겨졌다고 밝히고 있다. 즉 그는 5-6절에 설정된 그에게 오는 자들에게 설교를 베풀고 있다고 하면서 오실이의 다른 세례를 강조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러한 카터의 견해는 설득력이 없다. 왜냐하면 본분(7-10절)에서 분명히 마태는 바리새인들에게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들이 세례를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의 여부는 밝히고 있지 않기 때문에 대상의 전환이 이루어졌는지의 여부는 모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구절에서 마태는 바리새인과의 대립각을 여전히 세우면서도 세례요한과 예수와의 차이점을 분명히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경쟁적인 바리세인 공동체와 더불어 세례요한 공동체와의 갈등정황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갈등의 구체적인 내용은 바로 세례에 관한 것이다. 마태기자는 물세례와 성령세례로 요한과 예수의 역할을 구분하면서 구체적으로 예수를 '더 능력이 있으신 분'이시며 요한은 '그의 신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는 이로 그림으로 세례요한 공동체를 제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 마태의 해소노력
마태기자는 세례요한 공동체에 대해서는 강경한 입장을 취하면서도 공동체 내에 유입된 세례요한 그룹에 대하여 포용한다. 이러한 내용은 예수의 수세 장면에서 목격할 수 있다.
요한은 "내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선생님께서 내게 오셨습
니까?" 하고 말하면서 말렸다. (3:14)
이 구절은 마태복음서에만 나오는 구절(막1:9-11, 눅3:21-23 비교)로 세례요한이 스스로 예수의 우월성을 인정하는 장면이다. 여기서 마태는 요한을 통한 예수의 세례가 공동체에 문제를 안겨주었음을 지적하고 마태가 역사적으로 예수의 세례에 대해서 실제적인 문제를 지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예수가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는지의 여부에 대해서 구드맨은 세례를 받았다고 가정하며 "이러한 사실은 초기 기독교공동체에 문제의 원인이 되었으며, 요한보다 예수가 열등하다는 비난을 받았음에도 예수의 세례 받은 이야기는 너무 잘 알려져서 제거할 수 없었고, 또 예수의 사역에서 너무 중요한 부분이라 복음서에서 제거시킬 수 없었다"고 이야기한다. 이러한 구드맨의 견해는 '요한보다 예수가 열등하다는 비난'에 대한 설정이 지나친 비약이라는 비판을 받을 수 있겠지만 본문의 갈등정황을 설명하는데에 그 의의가 있겠다.
그러나 마태는 본문을 통해 분명히 세례요한 공동체의 주장을 일소하며 세례요한 보다 못하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지만, 예수의 말을 통해 둘과의 관계가 완전히 분리되지 않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셨다. "지금은 그렇게 하도록 하십시오.
이렇게 하여, 우리가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옳습니다." 그제서야
요한이 허락하였다.(3:15)
여기서 예수는 요한과 '우리'라는 공동어로 결합되어 있다. 이것은 앞에서 언급한 것(3:2, 4:17 비교)과 마찬가지로 세례요한과 예수의 연속성의 일부이다. 이러한 '우리'라는 표현은 마태기자가 마태공동체와 세례요한그룹과의 연관성에 주목하여 그들을 수용하고 자 하는 표현이다. 이러한 연속성은 바로 '모든 의'를 이루는 데에서 찾을 수 있겠다.(21:32 비교) 베어는 의라는 개념에 대해서 바울의 율법의 공로와 구별된 신앙의 사람에게 부여되는 '하나님의 의'라는 해석과 다르게 산상수훈에서의 가르침과 같이 하나님의 계명에의 순종함으로 성취되어야 하는 의를 설명한다. 베어는 더 나아가 이러한 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의보다 나아야 된다는 구절(5:20)을 인용하여 대비시키고 있다. 베어의 견해를 종합해 보면 여기서의 '의'란 크게 '하나님의 의'를 성취하는 행위로 해석할 수 있겠다. 또한 이러한 '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보다 더 나아야 하는 것으로 마태는 5:20절을 통해 마태공동체를 이들보다 더 나은 '의'를 행해야 하는 공동체로 설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의'의 성취에 있어서 마태기자는 예수와 요한을 '우리'로 병렬시킴으로 마태공동체와 세례요한 그룹과의 연속성을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Ⅳ.결론
마태기자는 마태복음이 쓰여질 당시의 시대적인 정황을 3:1-17절에 반영하고 있다. 즉 바리새적 유대교가 득세하여 마태공동체를 위협하는 상황가운데서 마태는 이러한 그들의 위협을 '독사의 자식'으로 설정함으로 자신의 공동체를 방어하고 있고, 이러한 외부적 도전에 맞서 내부적으로는 예수와 요한의 선포의 연속성을 근거로 세례요한 그룹과의 결속을 다지고 있다. 또한 마태기자는 자신의 공동체 내부의 갈등 즉 세례요한 그룹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해 의견이 엇갈리는 가운데 세례요한 공동체와 바리새적 유대교를 같은 맥락에서 취급함으로 어느정도의 거리는 유지하고 있지만, 자신의 공동체에 편입된 자들에 대해 수용하고자 하는 의지를 분명히 하고 있다. 이러한 의도는 예수와 요한과의 대화에서 드러난다. 이와 같이 마태기자는 외부적 도전과 내부적 갈등상황을 적절히 배열함으로 인해 마태공동체 내에 있는 세례요한 그룹에 대한 수용을 피력하고 있다. 이러한 정황은 공동체가 외부적 도전을 받을 때 내부적으로는 결속력이 더 높아진다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다.
#참고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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