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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자키 하야오 영화를 읽기 위한 몇 가지 코드들

은바리라이프 2008. 8. 1. 0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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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자키 하야오 영화를 읽기 위한 몇 가지 코드들 영화를 보다

2004/11/14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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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1. 판타지와 상상력

1.1. 미야자키 하야오 애니메이션의 매력은 특유의 판타지에 있다. 그의 작품 세계에서 일상과 가상의 시공간은 모두 판타지다. 판타지를 현실 원리로부터 고도로 자유로운 정신적 행위이다(프로이트). 그것은 지금-여기라는 시공간의 현실 원칙으로부터의 자유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인간의 유적 원형(인간의 집단적 기억의 영원한, 그러나 억압된 사상들) 개인의 기억(금기된 자유의 이미지들) 담지하고 있다. 판타지( 상상력) 무의식의 기억을 표상하여 심층의 무의식을 고도의 의식성의 산물과 연결시킨다. 상상력의 진실은 판타지 자체가 형식을 취할 최초로 실현된다. 이러한 형식화 작업이 예술이다. 예술은 그러므로 가장 확연한 억압된 것의 귀환이다. 신화가 인류 시원의 기억들을 노래한 이후, 서사시, 서정시, 연극, 음악, 회화, 건축, 조각, 소설, 사진, 영화, 만화, 애니메이션 모두 미적 예술적 형식의 매체인 동시에 장르이다. 매체의, 혹은 장르의 역사는 그러한 판타지( 상상력) /영토화하는 창조적 실천의 과정을 통해 발전해왔다. 그러한 발전 과정에서 애니메이션은 영화 시대 이후 인류가 고안해낸 가장 최근의 매체 하나로, 인간의  상상력을 판타지의 극한까지 추동하는 위력한 도구 하나다. 미야자키는 자신의 미적 형식으로 애미메이션을 선택한다.  

 

1.2. 판타지는 본질적으로 저항적이다. 왜냐면 개인의, 그리고 집단의 억압된 사상들과 금기된 이미지들을 표상하기 때문이다. 개체와 전체의, 욕망과 현실의, 행복과 이성의 조화가 현실 원리에 의해 유토피아로 사라진 이후 판타지는 그러한 조화를 다시 실재화시키기 위한 기제가 되었다. 미학적 형식 배후에 감각성과 이성의 억압된 조화에, 지배자의 논리에 의한 삶의 조직화에 저항하는 수행 원칙에 관한 비판이 놓여 있는 것이다. 미적 현상으로서 예술의 비판적 기능은 그러므로 판타지( 상상력) 자체로부터 발현되는 것이다. 미야자키는 유려한 이미지와 사운드의 스펙타클을 창조하여 다양한 문화적 역사적 철학적 코드들을 배열한다. 그의 코드들은 반전 반파시즘 친환경 자연주의 아나키즘 진보의 코드로 해독되곤 한다.  이러한 진보의 코드들은 그의 이상주의적 주제가 재현되는 시공간이 항상 지금-여기를 반성하기 위한 기획으로 읽히는 까닭이기도 하다.

 

2. 낭만적 상상력 혹은 낭만주의

2.1. 미야자키 하야오의 시공간 창조 능력은 특유의 판타지에서 생겨난다. 지금-여기의 주체() 대상() 사이의 화해불가능한 요구들을 이어주는 다리는 시간적으로는 지금이 아닌 ,” 공간적으로는 여기가 아닌 으로 놓인다. 그의 상상력은 (1)시간적으로는 현재가 아닌 과거, 혹은 미래로 열려 있다. (2) 공간적으로는 여기가 아닌, 혹은 여기에 존재하지 않는 (으로서 유토피아/디스토피아) 열려 있다. 이러한 판타지의 상상력은 낭만주의 그것과 매우 닮아있다. 예를 들어 [붉은 돼지]에서 포로코가 지금-여기(전쟁 직후의 대공황) 벗어나는 방법으로서 인간에서 돼지로 변하는 마법은 낭만적 상상력에 다름아니다. 그러나 미야자키 영화에서 마법은 방법일뿐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좋은 마귀할멈이 일러주듯, “마법으로 만들면 아무 것도 남지 않는까닭이다. 판타지의 낭만적 상상력은 (과거) 회귀뿐 아니라 (미래) 지향으로서, 현실에 대한 저항이자 부재하는 것에 대한 구도(救道)이다.

 

2.2. 미야자키는 영화의 소재 선택에 있어 다시 고전으로라는 낭만주의 전략을 그대로 따른다. 그가 그리스 신화에서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 일본 전통 설화에서 [이웃의 토토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그리고 영국 낭만주의 문학에서 [천공의 라퓨타] 배경과 소재, 그리고 주제를 발견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의 상상력은 그러나 단순한 과거에로의 회귀에 머물지 않고 미래의 세계를 내러티브의 중심에 둔다. 예를 들어 [미래 소년 코난] [천공의 라퓨타] 미래를,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 묵시록 이후의 세계를 그리고 있다. 그는 과거-현재-미래라는 단선적 시간을 용해시켜 자신만의 독특한 판타지의 시간을 창조하는 것이다. 과거가 미래에 재현되고, 미래가 현재를 반영한다. 이처럼 탄력적으로 시간은 여기와 다른 공간으로 흐른다. “바람 계곡”([바람 계곡의 나우시카]), 구름 저편의 라퓨타”([천공의 라퓨타]), 아드리아의 무인도([붉은 돼지]), (근대의 공간으로서 도시와 대비되는) 시골([이웃의 토토로]), “터널 저편의 신비한 마을”([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미야자키 영화의 배경은 시간의 휨으로써 가능해진 공간들인 것이다.  (미야자키 영화의 낭만주의적 특징은 낭만주의 소설가나 시인의 작품을, 예를 들어 [천공의 라퓨타]에서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 [붉은 돼지]에서 바이런의 시를 직접 인용하는 데에서도 드러난다).

  

[이웃의 토토로]

 

2.3. 낭만주의는 지금-여기를 반성하기 위한 기획이다. 낭만주의자들은 궁극적으로 지금-여기를 전복코자 한다. 혁명이란 그러한 시공간적 전복의 최고 형태이다. 근대 유럽의 낭만주의자들은 프랑스 혁명 당시 공공연한 지지와 동경을 표명했다. 그들이 전복코자 구체적 대상은 근대()이다. 이성과 합리로 세계를 계몽하려던 근대() 시도가 잉여와 결핍이라는 양극으로 원심력을 작용하기 시작하자 그들은 특유의 낭만적 상상력으로 세계를 전복코자 한다. 낭만주의자들은 타락한  현실에 대항하도록 민중을 선동하는 무기를 감성, 자연, 전설, 설화, 민요, 일상( 언어)에서 찾았다. 민중은 낭만주의자들의 마음속에서 거의 신비적인 통일성을 부여받는다. 미야자키의 경우 낭만적 전복성은  일본, 더나아가 세계에 대한 감독의 문제의식과 맞물린다. 그가 전쟁과 평화, 개발과 환경, 남성과 여성, 어른과 어린이, 도시와 시골이라는 주제를 세심한 미장센과 유려한 몽타주로 재현할 , 관객은 화해불가능한, 그러나 아름다운 환타지를 본다. 그가 /창조한 세계는 시간적으로는 현재가 투영된 과거, 혹은 미래이되, 공간적으로는 (미래의) 희망이 구현되는 시공간이다. 그것은 실현되지 않았으나, 실현될 있는 가능성에로의 항해이다. 항해의 출발지는 신화이고, 목적지는 유토피아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3. 신화와 전설

3.1. 태초에 이야기가 있었다. 그것은 이성=로고스=언어로 기록되지 않은 판타지다. 판타지는 구조나 논리에 의해 제어되지 않는다. 판타지( 상상력) 언어로 기록되기 시작한 역사 시대 이전의, 그리고 현실( 원리) 의해 조직화 되기 이전의 심리의 구조와 경향들을 존속하고 있다. 판타지야말로 하위역사적 과거(subhistorical past)” 기억을 간직한다. 그것은 인간의 (그리고 우주의)  원형적 과거, 원형적 시공간이다. 그러한 시원의 원형적 경험들을 우리는 신화에서 읽는다. 역사 시대에 들어선 이후 모든 예술은, 과도한 일반화의 오류를 무릅쓰자면, 신화의 차용 혹은 변용이다. 미야자키의 영화 또한 예외일리 없다. 그의 영화들은 (1) 대개 탄생-버려짐-고난-시험-투쟁(여행)-승리(귀환)” 이어지는 영웅 신화의 서사구조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2) 영화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대부분 신화의 주인공처럼 고아다. 시타 ([천공의 라퓨타]), 나우시카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 코난과 라나([미래 소년 코난]) 모두 고아다. (3) 영화에서 드러나는 주체적 여성과 모성의 강조는 여성성이 충만한 시대로의 신화적 회귀 혹은 신화적 전망을 보여준다.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 그리스 신화에서 작품의 인물을 직접 빌려와 미래의 신화로 재구성한다. 여기서 신화는 인류의 기원인 동시에 목표이다. 작품의 엔딩씬에서 보여지는 구원자의 모습과 나우시카의 부활의 이미지는 성경의 메시아 사상을 변용한 것이다. (성경은 종교의 성스러운 책이기 이전에 창세기와 출애굽기에서 보여지듯 역사 시대 이전의 이야기를 다룬 신화에 다름아니다.) 원형적 기억을 담지한 또다른 원천은 전설이다. [이웃의 토토로] 등장하는 정령들(마쿠로 쿠에스케, 스스와타리, 토토로 ) [센과 히치로의 행방불명] 등장하는 토지신과 다양한 요괴들은 모두 일본 전래의 전설에서 차용한 판타지다.

 

3.2. 신화야말로, 특히 제우스가 로고스로 신과 인간과 세계를 재편하기 이전의 신화야말로, 부연하자면 여신 중심 신화가 남성 중심 신화로 변모되기 이전의 신화야말로 에로스적 모성과 생명으로 충만한 여성성의 세계이다. 미야자키가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에서 남성적 우월성과 빛()이 강조되는 [일리아드]와 대비해서, 여성성과 지금-여기 너머의 지식이 강조되는 [오딧세이]에서 나우시카라는 캐릭터를 빌려온 것은 아주 전략적인 신화의 차용이다. 물론 그의 전략은 신화적 여성성, 우주적 모성의 회복이다. 게다가 이 여성을 기존 신화속에서 반복되어온 전형적인 남성 영웅을 완벽하게 대체하는 인물로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남성 중심 신화를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탈신화화 또한 엿보인다.

그는 현실의 주변부에 머물러 있던 여성을 신화적 판타지의 세계로 소환하여 내러티브를 끌어가는 중심적 역할은 부여한다. 그의 판타지적=신화적=낭만적 상상력이 세계를 /창조하는 방식은 주로 상징이나 은유의 수사법이다. 그의 영화에서 여성성( 충만한 세계) 드러내는 방식은 주로 나무 바람 등의 상징을 통해서다.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에서 바람 계곡의 , [천공의 라퓨타]에서 라퓨타의 하층부 기단을 형성하는 거대한 나무의 뿌리, [이웃의 토토로]에서 시골의 거대한 녹나무 등은 나무의 상징성과 주제를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나무는 영원한 생명, 불사의 영혼, 불멸, 여성성, 보호자라는 다양한 의미를 상징한다. 나무는 때로 , 예를 들어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에서 트로메키아가 부활시킨 거신병으로 상징되는 파괴의 대척점에서 불모의 대지를 끌어안는 모성을 보이기도 한다. 바람은 생산의 도구이자 소통의 매개이고 소리(음악)의 원천이다. 그것은 부해(腐海)의 세계에서 생명의 자양이자, 바로 그런 까닭에 신적 지위를 부여받기도 한다([바람 계곡의 나우시카]).

 

3.3. 신화란 분명 현실을 벗어나는 유혹이다. 그것은 현실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갈등을 주관적으로 해소해버리는 유혹일 있다. 미야자키 영화의 유혹이 치명적일 있는 이유이다. 감독이든 관객이든 신화의 미궁을 여행하는 중에도 아리아드네의 실타래 쪽은 현실의 기둥에 단단히 매어둘 일이다.

 

4. 유토피아

현실 원리는 이성과 감성, 현실과 욕망, 주체와 대상, 자아와 타자, 개체과 전체가의 조화를 제거하여 유토피아로 유폐시킨다. 유폐된 유토피아는 역설적이게도 모든 시대를 막론하고 인류가 꿈꾸는 세계의 원형이 된다. 그리스 신화가 회상하는황금 시대”, 성경이 기억하는에덴 동산”, 도연명이 노래한무릉도원토마스 모어 묘사한유토피아 지금-여기에는 존재하지 않는 과거의 원형적 경험archaic experience이다.  모든 위대했던 종교, 사상, 예술은 모두 찬란했던 황금 시대와 이토록 비루하고 타락한 지금-여기 사이의 거대한 간극을 메우려는 시도들이었을지도 모른다. 마르크스가 인류의 마지막 종착지라고 예언한 공산주의마저 실험으로 끝나버린 포스트모던 사회에서마저도 인류는 여전히 지금-여기와는 다른 세계를 꿈꾼다. 그러나 우리 모두 아다시피 그런 시대는 쉽사리, 혹은 결코 도래하지 않는다. 아니 현실은 오히려 반대의 묵시록이다. 미야자키가 그리는 유토피아의 이미지에 묵시록적 현재, 혹은 미래가 겹쳐지는 이유일 것이다. 라나의 고향 하이하바 대비되는 인더스트리아,” 나우시카가 사는 바람 계곡 대비되는 부해,” 시타와 파즈가 찾아 나선 이중적 이미지의 하늘의 라퓨타,” 붉은 돼지가 사는 아드리안의 무인도는 모두 그러한 묵시록적 유토피아의 시공간이다. 묵시록적 유토피아는 작품의 시공간이자, 더나아가 작품의 주제를 구성하기도 한다. 주목할만 것이 푸른색과 붉은색의 몽타주로 재현되는 천공의  라퓨타의 이중적 이미지다. 라퓨타 상층부는 거대한 나무 줄기를 중심으로 형성된 자연의 낙원이다. 반면 하층부에는 라퓨타 에너지 원천인 중추 비행석과 대학살용 무기 장치. 전투형 로보트 병사들의 제조 공장과 격납고가 자리잡고 있다. 라퓨타의 기능적 이중성은 전적으로 그것을 지배하는 자의 의지에 따라 낙원이 수도 있고 엄청난 무기가 수도 있다. 이렇듯 미야자키가 그리는 유토피아의 이미지들은 단지 쾌락 원리로 충만한 과거 혹은 미래의 이상향에 머물지 않고 현실 원리가 작동하는 지금-여기를 포함하는 것이다. 그는 라퓨타가 파괴되어 가는 과정에서 불합리한 이중성을 해소하려는 이상주의적 시도를 보여준다. 여기서 그의 전언은 확연하다: “과학 기술은 자체로서 가치중립적이다. 정작 문제는 그것을 사용하는 인간의 태도정치적 윤리적 태도다. 그러므로 여전히 희망은 인간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그의 유토피아적 전망이 마르크스주의와 닮아 있는 부분이다. ([천공의 라퓨타] 경우 파즈의 보스인 더피 아저씨의 집에는 사회주의자 포스터가 붙어있다.) 그의 진보적 전망은 [붉은 돼지] 경우에서처럼 국경을 초월하여 코스모폴리탄적 공동체를 지향하는 아나키즘으로 흐르기도 한다. 

 

 [천공의 성 라퓨타]

 

5. 반성적 해페엔딩

5.1. 미야자키 영화에서 내러티브를 추동하는 동인은 인물들 사이의 외적 갈등이라기보다는 인물의 정체성이다. 인물들 사이의 갈등은 필연적으로 () () 구분한다.

해피엔드는 절대선이 악을 이기는 권선징악의 윤리학을, 비극은 선이 절대악에 불가항하는 숙명론을 잉태한다. 미야자키 영화에서 () () 구분이 전혀 없다고는 없지만 적어도 할리드우식의, 혹은 월트디즈니식 절대선 절대악과는 다르다. 이분법적 선악의 구분은 모호해진다. 악당들은 희화화되어  나쁘지만 미워할 없다. [천공의 라퓨타]에서 도라 일행은 해적이지만 삶의 터전인 하늘에서 낭만을 꿈꾸는 인물들로 창조된다. [붉은 돼지] 공적(空賊) 순진하다 못해 귀엽기까지 하다. 인물들 사이의 대결구도는 여전하지만 그들은 나름의 충분한 논리와 진정성을 가지고 있다는 설정이다. 선과 악은 각각의 진정성을 갖는 하나의 모순이며, 이는  인간 존재의 본질과 관련된다. 미야자키는 이처럼 모순으로 존재하는 /악을 그린다. 선과 악은 인물들 사이에 극명하게 금이 그어지지 않는다. 대신 인물은 하나의 캐릭터가 아닌, 이중적 혹은 다중적 캐릭터로 설정된다. 그러므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이러한 정체성의 문제를 전면적으로 다룬다. /치히로, 쌍둥이 자매 유바바/제니바, “오물신”/“강의 ,” 등은 모두 다른 이름을 가진 동일인이며, 하쿠, 보우, 가오나시는 내부에 서로 다른 캐릭터를 가진 인물들이다.

 

 [붉은 돼지]

 

5.2. 해피엔딩이란 현상태status quo 평정equilibrium 옹호하는 지배자의 이데올로기를 대변한다. 현상태를 선으로 전제하는 보수의 정치학이다. 해피엔딩의 서사 구조에선 말의 올바른 의미에서 지금-여기를 부정하는 판타지적 낭만적 신화적 상상력은 애당초 불가능하다. 낭만적 상상력이 지금-여기의 부정이라는  전복적 혁명성을 거세한 , 아름다운 세계를 꿈꾼다면, 꿈꾸기는 현상태와의 화해라는 다소 기이한 방법으로 해소된다. 낭만주의가 말의 진정한 의미에서 낭만주의적이려면 필연적으로 비극이어야만 하는 이유이다. 미야자키의 낭만주의는 그러나 해피엔딩이다. 그의 해피엔딩은 그러나 선과 악의 배타적 대결에서 나오는 아니다. 모호한 선악의 구분은 권선징악이라는 간편한 해피엔드를 애당초 불가능하게 만든다. 그리고 인물 안에 /악의 공존은 정체성 문제를 전면적으로 부각시킨다. 그의 해피엔딩은 인물들 사이의 갈등이 아닌 인물의 깨달음에서 온다. 그러므로 그의 헤피엔딩은 (타자) 배타적이 아니라 오히려 (자아) 반성적이다. 같은 맥락에서 그가 단순히 유토피아를 지향하지 않는다는 것도 분명하다. 오히려 그의 영화들은 묵시론적 혼돈 속에서라도 살아야 한다 전언을 담고 있는데, 이런 점이 바로 그의 영화( 세계) 대한 윤리적 태도를 대변한다.  

 

뱀발: 미야자키 하야오의 영화를 보면서 텍스트로서 영화 읽기  영화의 재미를 반감시킨다는 다시 경험합니다. 스펙타클로서 영화란 우선 보고 듣는 즐거움이어야 할테지요. 카츠히로 감독의 [아키] 텍스트로서 아주 의미있고 논쟁적인 영화지만, [이웃의 토토로] 스팩터클로서 끌리는 이유입니다. 작품 모두 현대() 대한 반성적 성찰로서, 전자가 날카롭고 정확하다면, 후자는 부드럽고 따뜻합니다. 누군가 어느 쪽을 좋냐고 묻는다면 나는 주저없이 따뜻함을 택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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