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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능력한 지도력을 극복하려면 {야고보서 3:1~ 18}

은바리라이프 2008. 8. 1. 0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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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능력한 지도력을 극복하려면 {야고보서 3:1~ 18} 설교 강론

2005/08/15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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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능력한 지도력을 극복하려면

{야고보서 3:1~ 18}

 

아프리카에서 원숭이를 잡는 방법 중 한 가지입니다. 조롱박에 원숭이의 손이 겨우 들어갈 만한 구멍을 뚫어놓고 그 안에 원숭이가 아주 좋아하는 과일을 넣어두는 것입니다. 그러면 원숭이가 그 조롱박 안으로 손을 간신히 넣고 열매를 쥔 다음에 손을 빼려고 하는데 안 빠진단 말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가까이 오는 동안에 열매를 놓고 손을 빼고 도망을 가면 되는데 원숭이는 그러지를 못합니다. 열매 놓는 것이 너무너무 아까워 열매를 그대로 쥐고 손 못 빼다가 결국은 사람들에게 붙잡히고야 만다는 것입니다.
  현재 이렇게 원숭이와 같은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절대로 지도자로 나서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지도자가 되려면 다섯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는 것을 저희들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무능력한 지도력을 극복하려면,

  첫째, 가능하다면 지도자로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함부로 나서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고보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 받을 줄을 알고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약 3:1)

  지도자가 되려면 반드시 갖추어야 할 조건이 몇 가지가 있습니다.
  그 중에 첫째는, ‘준비하는 능력’입니다. 사람들이 지각을 왜 하겠습니까. 준비하는 능력이 결여되어 있어서 그렇습니다. 그런데 준비하는 능력이 결여되어 있는 사람이 지도자가 되면 자신만 어려운 것이 아니라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도 함께 어렵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슨 일을 미리 준비하는 것이 귀찮고, 즐겁지 않게 느껴지고, 오히려 고통스러운 사람들은 지도자를 하지 말든지 그 일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사람이 지도자적 자질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미리 준비할 일들을 성실하게 준비 할 줄 아는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을 평가하는 방법은 그렇게 많은 것을 테스트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습니다. 신발 끈 하나 묶는 것, 신발 한 켤레 벗어 놓는 것, 마늘 한 개 껍질 벗기는 것, 조그만 공간 청소 하나 하는 것만 보게 되더라도 ‘아 저 사람에게 일을 맡기면 어느 정도 해결해 내겠다.’는 것을 대략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 받을 줄을 알고’라는 말씀은, 다음과 같은 뜻입니다.
  때로는 오히려 ‘명성이 원수와 같다.’고 하지 않습니까. 차라리 완전히 무명한 사람 같으면 이 일하다가 안 되면 다른 일을 하면 되고, 다른 일을 하다가도 안 되면 저 일을 하면 된단 말입니다. 그런데 여러 사람들 앞에 이미 드러난 사람들은 이 일 저 일을 쉽게 선택을 할 수 없단 말입니다.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선입견이나, 이미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자존심 때문에 잘 안 된단 말입니다.
  그러므로 준비도 안 된 상태에서 지도자적 위치로 나서기만 하려고 하고, 그 혜택만을 바라보려는 자들이 있는데 그것은 오히려 손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더 큰 심판을 받게 되는 길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백만장자의 사고 방식과 아주 가난하게 사는 사람의 사고 방식은 현격한 차이가 있다는 것이 통계조사 결과 나타났습니다.
  혼다 켄이라는 분이ꡐ부자가 되려면 부자에게 점심을 사라’는 책에서 그러한 통계를 다루었습니다.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현재 백만장자인 사람들은 성공하기 위한 조건으로 평소 성실성으로 70% 이상이 필요하다고 주장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아주 가난하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사람이 성공을 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조건으로 행운적 요소가 우선적으로 절대 필요하다는 주장을 한 사람들이 70%가 넘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벌써 사고가 다른 것입니다.
  이미 백만장자의 꿈을 이룬 사람들은 ‘사람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는 운도 중요하지만 성실한 노력이 필요하다’라고 말 한 사람이 100명 중 70명이고, 백만 장자가 아닌 사람들은 ‘사람들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될까요?’라는 질문에 ‘행운이 따라야 된다’라고 말한 사람이 100명중에 70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차이는 백만장자인 사람들은 사소한 일에 별 신경을 안 쓴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현재 세상을 어렵게 사는 사람들일수록 사소한 일에 목숨을 건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무슨 말이냐 하면, 성공한 사람들은 중요한 일에 힘을 집중적으로 기울일 줄 알고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에 그렇게 열정을 낸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 백만장자들의 심리적 특징 중 또 한 가지는 사람들의 인간성을 중시 여긴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 대부분은 ‘인간성 그것은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다. 사람이 오늘 상대하다가 기분이 나쁘면 배신도 하는 것이고 그런 거지 ...’라는 생각들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아주 경박한 사고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나에게 도움이 되면 친절하고, 별 도움이 안되면 즉시 돌아서고, 달면 삼키고 쓰면 뱉고 ...’ 주로 그런 사고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현재 어려움을 남보다 많이 겪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백만장자인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인간관계를 대단히 중시 여긴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패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늘 사람과의 관계성을 별로 중시 여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순간적인 이득이 있으면 이리로 붙었다가, 또 저쪽이 이득이 많을 것 같으면 즉시 그 쪽으로 붙었다가, 그렇게 늘 왔다 갔다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이라도 조그만 성취라도 이룬 사람들은 때로는 자신이 손해를 볼 때 보더라도 평소 관계성을 중시 여긴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백만장자와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특징의 차이라는 것입니다.

  미국과 캐나다, 그리고 세계적인 역사학 교수들과 특별히 미국사에 전문가인 역사학자들 719명이 힘을 합해서 미국의 역대 대통령 41명에 대해 만든 책입니다. 이 책에서는 미국의 역대 대통령 41명의 특징, 지도력, 업적, 위기 관리능력, 정치력, 인사관리 능력 그리고 도덕성을 조사해서 1위부터 41위까지 순위를 먹였습니다.
  초대 조지 워싱턴 대통령으로부터 클린턴까지, 41명을 낱낱이 심층 분석 연구해서 랭킹을 매긴 책으로서   "Rating the Presidents"라고 하는 책입니다.
  41명 중 모든 면에서 1위를 차지한 사람은 링컨 이었습니다.
  그런데 가장 높은 점수를 받게 된 링컨의 결정적 특징이 무엇인가 살폈더니 다른 사람보다 도덕성 점수가 높았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 일에 참여한 사람들이 내린 결론으로 ‘지도력은 도덕성과 정비례를 한다.’는 결론을 내 놓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평소 신뢰하기 어려운 사람들은 지도력도 약하다는 결론인 것입니다.
  사람을 만나보면 악수를 한번 하든지, 대화를 하든지 하고 나서도, 돌아서면 왠지 모르게 신뢰가 안 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무리 믿어 보려고 해도 도대체가 신뢰가 안 가는 사람들이 있단 말입니다.

  물론 그렇게 바라보는 사람이 의심이 많아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런 느낌의 원인 제공을 하는 당사자들도 상당한 책임이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
  야고보는 ‘가능하면 지도자 되지 말아라. 차라리 안 되면 별 문제가 없지만 ... 모난 돌이 정 맞는다고, 튀어나온 못이 망치 먼저 맞는다고, 차라리 지도자가 안 되었다면 평가라도 덜 받고, 그러면 당사자와 주변 사람들이고 아픔이라도 덜 겪을 것 아닌가?’라는 의미로 이 말을 하신 것입니다.
  어쩔 수 없이 하나님께서 부르셔서 지도자를 안 하면 안 되니까 하게 되는 경우라면 어쩔 수 없어서 하지만, 괜히 지도자가 누리는 어느 정도의 혜택, 거기에만 욕심을 내서 지도자로 나서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대가를 치르기를 원치 않으면 선생 되지 말아야 합니다.
  선생이 되려면, 미리 미리 가르칠 교안도 성실하게 준비하고, 미리미리 학생들을 가르칠 준비를 성실하게 하는 사람이 선생 합니다. 그런데 아무 준비도 안 했다가 강의 나가기 전에 참고서 손가락을 끼워 나가다가 갑자기 누군가 악수를 하는 바람에 가르칠 곳을 잊어버리고 다시 급히 찾고 ... 그러면 그것은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지도자로 나서지 말아야 할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셋째는, 장애물 극복 능력이 없는 사람들도 지도자 하지 말아야 합니다.
  장애물 극복 능력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하버드 대학 로체트 로젤 교수팀이 다음과 같은 실험을 했습니다.
  세 그룹의 학생들에게 쥐를 나누어주면서 A그룹에게 '이 쥐는 우수한 쥐니 영리하게 훈련을 시키라'고 말했습니다. B그룹에는 '이 쥐는 보통수준의 쥐와 같으니 그저 그럴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C그룹에게는 '이 쥐는 아주 지능이 안 좋은 쥐이니 훈련을 시켜도 별 효과가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러한 조사도 안 된 상태에서 선입견 실험을 하기 위해 그렇게 말을 한 것입니다.
  그랬더니 선입견을 받은 대로 아주 영특한 쥐라고 지목 받은 쥐에 대한 훈련 결과가 뛰어났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들 가운데는 우리를 선입견에 의해서 평가해서 우리에게 여러 가지 장애물 역할을 하는 분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러한 분들에게 항변을 한단 말입니다.

  예를 들면, 어떤 여청년들은 그렇게 말을 합니다.
  ‘아니, 요즘 회사는 예쁜 사람만 인정을 하고 안 예쁜 여성은 인정도 안 하고 ...’ 그것이 현실입니다. 그것을 본인이 어떻게 뛰어 넘느냐, 그것은 본인 능력에 달린 것이지, 그것을 불공정하다고 불평해서는 안 됩니다. 원래 세상은 그런 것이란 말입니다.
  어떤 분들은 교회에 나와 가지고 그렇게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목사님은 말이야, 돈 많은 성도는 예우하고, 돈 없는 성도는 예우도 안하고 ...’ 그러면 어느 목사가 돈 많은 성도부터 예우하고, 돈 없는 성도 예우하지, 그러면 돈 없는 성도 예우하고, 돈 많은 성도는 가든지 말든지 내버려두는 목사가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그것을 지금 말이라고 하는 것입니까? 당연한 것을 가지고 왜 그러십니까.
  우리 교회는 특별히 돈이 없고 어려움이 있어도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려고 하는 분들이 그나마 가장 우선적으로 예우를 받는 교회입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보고 계십니다. 내가 양심적으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님들 가운데 돈은 많은데 신앙 생활을 열심히 안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한 분은 돈도 없는데 신앙 생활을 열심히 안 합니다. 그러면 제가 누구를 더 예우하겠습니까? 당연히 돈 많은 사람부터 예우를 합니다. 똑같이 신앙 생활을 안 하는데 그러면 제가 가난하고 게으르고 돈 없는 성도부터 예우를 하겠습니까. 저는 그런 일은 못합니다. 그런 것은 기대도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상식은 두었다가 어디다가 쓰시려고 그럽니까.
  어떤 분들은 그렇게 말합니다.
  ‘왜 목사님은 똑똑하고 사회적 명예가 있는 분들은 기도 안 해도 내버려두고 ...’ 그 분은 사회적 명예가 있고 똑똑하니까 내버려둬요. 알아서 먹고사니까 ...
  그런데 아무 것도 준비도 안 해 놓고 기도도 안 하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해야 좋겠느냐는 것입니다.
  기도라도 열심히 하잔 말입니다. ‘나는 기도 힘들어서 못하겠다.’ 그러면 그렇게 현재처럼 예우를 받고 살다가 그렇게 끝내면 됩니다. 그것을 불공정한 편파라고 얘기하지 말자는 말입니다. 현실적인 인식을 바로 하자는 말입니다.

  저는 목회 시작하면서 결심한 바가 있습니다. ‘돈 없고 가난해도 신앙 생활 열심히 하면 우리 교회에서 최고로 모신다.’ 이것은 제가 미리부터 결심한 사항입니다. 그러나 돈 없고 가난한데 신앙 생활 열심히 안 하면,  돈 있고 신앙 생활 안 하는 분들을 더 우선적으로 여긴다 그것이 제 두 번째 순위입니다.
  그 다음에 무식해도 신앙 생활 열심히 하면 그 분을 우선적으로 여기지만, 아는 것도 없으면서 신앙 생활 안 하면 그 사람은 유식한 사람에게 밀린다는 것이 제 세 번째 순위입니다.

  지도자는 장애물 극복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에서 목사도 사람을 차별하는데 어디가면 차별을 안 하겠습니까? 당연히 차별을 합니다. 그것을 극복해 내는 능력, 그것을 지도력이라 합니다.
  그리고 네 번째로 지도자는 다른 사람들보다 욕심이 덜 해야 합니다. 마음에 욕심이 더덕더덕 많이 붙은 사람들은 지도자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문제가 됩니다.

  그리고 다섯 번째로는, 격려하는 능력이 없는 사람들은 지도자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누가 물어 봤다고 합니다. 장세동씨에게 말입니다. ‘왜 그렇게 전두환씨한테 충성을 다 하느냐?’고 말입니다. 그랬더니 장세동씨가 그러더라고 합니다. ‘그 분은 저를 인정해 줍니다. 그 분이 저를 인정해 주니까 충성을 다하는 것이지, 그 분이 나를 인정도 안 해주는데 무엇하러 충성하겠습니까?’ 맞는 말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우리를 따르는 자들에게 고마움도 표시도 안 하고, 감사한 마음도 없고, 인정도 안 해 주면서 희생만 해 달라는 것입니다. 누가 해 줍니까? 도대체. 아니 인정도 안 해 주고, 감사도 안 해 주고, 고마운 줄도 모르고. 순간적인 자기 이득만 보려고 하고, 희생하든지 말든지, 어려움은 뭐가 있는지 없는지 알아보려고 하지 않고 도와만 달라면 누가 도와주겠습니까. 바보입니까? 도와주는 사람들은 ...
  그냥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이래도 예, 저래도 예, 이래도 아멘, 저래도 아멘.’ 그러니까 바보인 줄 압니까. 세상에 자기 계산이 없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다른 사람에게 위로하고 격려하고 인정해 주고 칭찬해 주고 그런 일에 인색한 사람, 그런 것이 귀찮은 사람들은 지도자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도대체 왜 하는 것입니까? 왜 다른 사람들을 피곤하게 만들려고 그러느냔 말입니다. 도대체 그런 분들은 지도자 하지 말아야 하는데 왜 또 이번에도 나오려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냥 쉬어야 됩니다. 그 분들은 별 다른 지시사항이 없을 때까지 푹 쉬어야 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는, 공부하기 싫은 사람은 선생 되지 말아야 합니다.
  앤드류 존슨 대통령은 3살 때 아버지를 잃은 분이었습니다. 그는 너무 가난해서 링컨처럼 학교를 못 다녔습니다. 결혼을 해서 아내에게 글을 배웠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분이 나중에 알래스카를 소련으로부터 7백20만 달러에 구입하는데 쓰임 받은 역대 미국의 제17대 대통령이란 말입니다.
  무엇이 그 분을 그렇게 달라지게 했는가 했더니, 그 분은 결혼하면서부터 계속 아내에게 ‘나 좀 가르치라’고 요구를 하여 계속 공부를 그렇게 열심히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더니 결국 대통령이 되더라는 것입니다.
  적어도 이런 자질만 있어도 우리는 그러한 지도자를 용서합니다.
  ‘아, 저 분은 조금 인내해 주면 지금은 부족해도 잘 하겠구나!’라고 말입니다. 뭔가 희망이 있어야 기다릴 것 아니겠습니까?

  둘째, 평소에 언어를 잘 다스릴 줄 모르는 상태에서 지도자로 나서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고보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우리가 말을 순종케 하려고 그 입에 재갈먹여 온 몸을 어거하며 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 사공의 뜻대로 운전하나니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어떻게 작은 불이 어떻게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며 벌레와 해물은 다 길들므로 사람에게 길들었거니와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뇨 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뇨 이와 같이 짠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하느니라”(약 3:2-12)

  야고보 주장은 그것입니다.
  말을 잘 다스릴 줄 못하겠거든 지도자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괜히 여러 사람들 어렵게 하고 그러지 말라는 것입니다.
  ‘말은 곧 그 사람의 인격이다.’라는 말도 있고, 에머슨의 말처럼 ‘한 마디의 말로 곧 그 사람의 초상화를 그리는 것과 같다.’는 말도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정중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아빠에게는 정중한데 엄마에게는 정중하지 않은 자녀들이 있습니다. 그 자녀는 아빠에게 힘으로 밀려서 정중한 것이지, 진정으로 정중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다른 여성들에게는 아주 간도 빼줄 것처럼 친절한데, 자신의 아내에게는 함부로 대하는 남편들이 있습니다. 그러한 남편은 언젠가 지금 친절한 그 여인에게도 함부로 할 남자입니다. 그냥 그것도 모르고 자기한테만 친절하게 잘 해 주는 남성을 좋아하는 여성들이 있는데 뒤를 밟아보란 말입니다. 다른 여성들에게는 어떻게 하나? 그래서 이 여성에게도 정중하고 저 여성에게도 정중하고 그런 사람이 끝이 좋은 것이지, 자기 아내는 헌신짝처럼 버리고 함부로 얘기하고 자기한테만 ‘미스 김’이 어떻고 ... 그런 말에 속아넘어가지 말란 말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말을 들어 보면 그 사람의 지도자로서의 신용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말의 실수가 없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 2절에서 야고보가 한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 외에 말의 실수가 없을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문제는 그것이 얼마나 빈번하냐 하는 것입니다. 그 신용도가 얼마나 높으냐, 낮으냐 그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도자가 되려면 말부터 잘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셋째, 현재 자신의 행동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모범을 보일 수 없는 상태에서는 지도자가 나중에 되든지, 준비해서 되든지, 되지 말든지 하여야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고보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뇨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약 3:13)

  미국 34대 대통령이었던 아이젠하워는 기자들이 ‘지도력의 핵심은 무엇입니까?’라고 묻는 기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1m 쯤 되는 실을 바닥에 놓고 뒤에서 밀어 보십시오. 구부러질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앞에서 잡아끌어 보십시오. 반듯하게 따라올 것 아니겠습니까? 지도력은 앞에서 모범을 보이는 것입니다.’
  앞에서 가든지 말든지 뒤에서 밀기만 하는 것은 지도력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행함으로 모범을 보이고 싶지 않거든 선언하란 말입니다.  ‘나는 지도자가 아니다’
  그러면 우리가 지도자가 아니면 무슨 일을 해야 되겠습니까?
  마음속으로 다음과 같은 생각들을 하는 분들이 있겠지요.
  ‘나는 해야 할 일이 또 한 가지 있지 ... 그것은 지도자를 괴롭히는 것 ... ’
  우리는 지도자가 되든지, 아니면 지도자를 돕는 자가 되든지 그 둘 중에 한 가지만 해야 합니다.
  그런데 ‘내가 괜히 지도자 안 하려고 하는 줄 알아. 나는 자질이 없어. 그래서 안 하는 거야. 나처럼 양심적으로 살라고 해 ... 그러나 나에게는 할 일이 있지. 그것은 지도자를 못 살게 구는 것 ... ’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왜 지도자 안 하는 줄 알아. 나는 지도력이 부족해서 그래 ... 그러나 나는 할 일이 있어 ... 그것은 지도자를 꾸준하게 속 썩이는 것이지 ...’
  이러면 안 된단 말입니다.
  우리는 지도자를 하든지, 지도자를 돕든지 둘 중에 한 가지를 해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말고 오직 양무리의 본이 되라”(벧전 5:3)

  그러니까 지도자는 모범만 보이면 되는 것입니다. 자녀들에게 모범을 보이면 되는 것이고, 직장에 나가서도 수하 사람들에게 모범을 보이면 되는 것이고, 아내에게도 모범을 보이면 됩니다.

  현재 예수님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전 세계에 없는 곳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영향을 받은 분들은 저마다 ‘기꺼이 순교를 하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직접 책을 한 권 쓰셨습니까? 논문을 한 편 쓰셨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영향력이 있으셨습니다. 왜이겠습니까? 모범을 보이셨기 때문입니다.

  넷째, 개인적인 욕심을 이루려는 수단으로 지도자를 하려고 나서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고보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스려 거짓하지 말라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니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요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니라”(약 3:14-16)

  야고보는 개인적인 욕심을 이루려는 수단과 방법으로 지도자적인 위치에 서려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지도자는 두 스타일로 나누어집니다.
  한 스타일은 현재 계속 성장 중인 지도자가 있고, 또 한 스타일은 현재 몰락 중인 지도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고난 중에 있었지만 성장 중인 지도력을 가진 전형적 스타일이었습니다. 반면에, 사울 왕은 당시 왕이었지만 몰락 중인 지도자 유형이었습니다.
  모세는 40세에 자기 자신에 대한 평가를 너무 높게 했습니다. 결과로 사람 한 명을 죽게 만들었습니다. 즉시 도망갔습니다. 40년 동안 낮아지고 비참한 생활을 했습니다. 완전히 낮아져서 더 이상 낮아질 수 없을 그 시점 즈음에 하나님께서 모세를 들어서 사용하셨습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한 개인에게 욕심이 사라지고 난 다음에 사심이 없는 상태에서의 사람을 사용하기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현재 나의 위치로, 나의 지도자적인 위치로 뭔가 특권을 누리려고 하는 사람들은 지도자로 나서려고 하면 안됩니다. 그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손해를 많이 끼칠 수밖에 없는 그런 심리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그냥 지도자를 따르는 것에 만족을 해야지 여러 사람들 앞에서 나서므로 발생되는 명예적 이득이나, 그 외의 신뢰적 이득을 탐닉하기 위해 나서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세상에 지도자 할 사람이 누가 있느냐? 다 그만 두어야 하지 않겠느냐?
  다윗이 하나님 앞에 범죄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다윗의 직무를 중단시키시지는 않으셨습니다. 대신에 철저하게 징계하셨습니다. 대가를 치르게 하셨습니다. 다윗이 밧세바와 나은 첫 아이가 죽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압살롬의 반역을 겪게 하셨습니다. 다윗은 철저한 대가를 치렀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가능성이 있는 지도자였기 때문에 그의 직무를 중단시키지 않으시고 연단을 시켜 사용하셨던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분별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보고 ‘아웃! 너는 이제 그만 짐을 싸라’고 하시는 것인지, 아니면 ‘너는 징계를 받으면서 라도 계속 지도자적인 위치를 걸으라’고 하시는 것인지를 말입니다.

  다섯째, 좋은 지도자는 그의 처리하는 일에 다음과 같은 덕목의 열매가 맺혀지게 되므로 열매를 판별한 후에 세움을 받거나 나서거나 하고 그렇기 전에는 나서지 않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가장 이상적인 지도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약 3:17-18)

  이런 조건을 가진 지도자들이 정말로 좋은 지도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의 열매를 맺는 지도자가 좋은 지도자임으로 이런 지도자들은 스스로 지도자를 안 하려고 하더라도 지도자를 시키라는 것입니다.

  가드너 교수라는 분이 어린이의 세계를 관찰 연구하였습니다.
  네 살 박이 어린이의 세계에도 지도자적인 자질이 있는 아이들은 그 특징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 아이들 중에서도 주먹으로 우격다짐하고 남의 사탕이나 빼앗아가고 세 번도 아니고 한 번에 손톱으로 자국을 내곤 하는 아이들은 성장을 해도 지도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똑같이 어린아이인데도 양보하고, 자기 것을 포기할 줄 알고, 다른 친구들을 도와주려고 하는 아이들은 현재 어떤 상태라도 커서 반드시 좋은 지도력을 발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반에서 1등과 2등을 하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2등은 아무리 공부를 해도 1등을 못 이기겠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절호의 기회가 왔습니다. 1등이 감기 몸살에 걸렸습니다. 이번에는 1등을 차지할 수 있었는데 그 때도 그 2등을 하던 아이는 선생님이 강의 한 내용을 가지고 학교 끝나면 1등을 하던 아이의 병실에 가서 그대로 전달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달도 그 아이가 1등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두 아이가 똑같이 70세가 넘었습니다. 그런데 노벨상을 누가 탔느냐? 2등하던 아이가 탔다는 것입니다.
  좋은 지도자는 좋은 성품적 열매를 맺습니다.

  소달구지를 끌고 가는 사람에게 한 자가용이 멈추어 서더니 길을 물었습니다.
  “제가 가고자 하는 길은 다음과 같은데 어디로 가야 합니까?”
  그랬더니 소달구지 끄는 분이 “내가 잘 알고 있지요. 내 뒤를 따라 오시오” “얼마나 가면 됩니까?”
  “한 20리밖에 안 되니 잔 말 말고 따라오시오.”
  이게 말이 됩니까?

  지금 아이들은 인터넷으로 전 세계 정보를 손쉽게 활용하고 있는데 엄마는 타자도 못 치면서, ‘엄마가 하라는 대로 해’ 어떻게 엄마가 하라는 대로 하라는 것입니까. 엄마 따라 하면 망하지요.
  그러니까 엄마가 가지고 있는 지도력에 아이가 가지고 있는 과학적 능력이 합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과학적 능력을 우리 아이들이 잘못 활용해서 문제인데, 원터치로 엄마 오면 화면 넘기고, 가면 또 넘기고, 이것이 문제이기는 한데, 그것을 어쩌겠습니까? 자기 복이지요.
  우리 아이들이 컴퓨터 할 때 갑자기 문 열어보세요. ‘다다닥’ 소리납니다. 화면 보면 얼마나 건전한 것을 보고 있는 줄 모릅니다. 나오면 갑자기 다시 ‘다다닥’ 소리납니다. 다시 이상한 화면이 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부모의 지도력과 자녀의 과학적 능력이 합해져야 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앉은뱅이를 소경이 업었다고 하잖습니까. 소경은 다리가 튼튼하고 앉은뱅이는 눈으로 볼 수 있으니까 힘을 합해서 문제를 해결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과학은 다리라고 하면 신앙은 눈과 같습니다. 75초 후에 폭발할 지도 모르고 쏘아 올린 것이 우주선입니다. 미래를 보는 눈이 없어서 그렇단 말입니다. 과학의 한계입니다.
  그런데 과학은 다리로만 되는 줄 아는데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 자녀들은 튼튼한 다리는 가지고 있지만 부모님들처럼 앞을 내다 볼 줄 아는 그런 시야는 아직 갖추지 못했단 말입니다. 지도자는 과학적 능력은 좀 부족해도 산술적 능력은 좀 부족해도 성품적 열매를 맺으면 됩니다.
  그래서 자녀들로부터 신뢰받으면 됩니다.‘우리 어머니 아버지는 배운 것은 없어도 양심적이다.’그러면 됩니다. 그러면 그 집안은 반드시 인물을 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아버지 어머니는 사기 7단도 오면 다 넘어간다.’ 자녀들로부터 그런 평가를 받으면 그건 곤란합니다. ‘사기 10단도 우리 아버지한테는 못 당한다.’ 그러면 그건 안 된단 말입니다.

  남침례교단의 유명한 빌 핸드릭스라는 교수님이 계셨습니다. 그 분은 교단 전체에서 존경을 받는 대단한 학자였습니다. 침례교단의 지도자들이 그분을 골든게이트 신학교의 학장으로 모시기 위해서 부탁을 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핸드릭스 박사께서 그 부탁을 거절하면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저는 교장을 할 지도자적 자질이 부족합니다. 대신에 제 제자 중의 한 사람을 내가 눈 여겨봤는데 이 친구는 학장으로서 지도자적 자질이 충분합니다. 그 친구를 제가 추천하겠습니다.”
  침례교단에서 이 핸드릭스 교수가 간곡하게 말을 하니까 그 제자를 학장으로 임명하고 그 핸드릭스 교수는 그 수하의 교수로 일을 계속했다고 합니다. 누가 지도자이겠습니까? 학장 직함만 가지고 있다고 그 분이 지도자였겠습니까? 그 수하에서 교수를 하면서 자기 제자를 섬긴 그 분은 지도자가 아닙니까?
  대학만 나오면 다 지도자입니까? 그러면 초등학교 나온 부모님은 지도자 아닙니까? 누가 대학 나오게 했습니까?
  예수님께서 논문 한편 쓰셨습니까? 예수님께서 책 한 권을 쓰셨습니까? 예수님께서 써 놓으신 편지 한 장 이 있습니까? 그런데 왜 전 세계 사람들이 예수를 위해서 오늘도 기꺼이 죽겠다는 것입니까? 영향력 때문이 아닙니까! 그런데 왜 수 백 권의 책을 쓴 사람, 그 저자를 위해서는 죽겠다는 사람이 아무도 안 나오느냐는 말입니다. 영향력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지도력이라는 현실적 차이가 무엇이겠습니까? 영향력입니다. 진정한 영향력을 미치려면 오늘 야고보서 말씀처럼 성령의 열매를 맺을 줄 아는 자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욕심을 가지고, 모범도 보이지 않고, 말도 온전치 못하고, 선생 되지 말아야 할 자들이 그냥 선생 되어서 여러 가지 상황들을 어렵게 만드는 그런 사람들은 준비를 더 해서 나오든지, 아니면 지도자를 잘 돕든지, 아니면 나오지 말든지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지도자로 나선 사람들은 예수님의 지도력을 계속 배우고, 하나님 앞에 끊임없이 기도를 드리고, 회개하고, 노력해서 날로 자기 자신을 향상 발전시켜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무능력한 지도력이 극복되면 국가가 지금보다 훨씬 더 행복해 질 것입니다. 가장의 지도력이 지금보다 더 향상되면 우리 가정이 훨씬 지금보다 더 행복해 질 것입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지도력을 향상시키겠습니까, 그냥 이대로 살다가 말겠습니까.
  우리 모두 다 현재 가지고 있는 지도력을 지금보다 더 향상시키는데 최선의 노력을 다 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바라겠습니다.

 

바디매오가 문제해결을 받은 이유

 {마가복음 10:46~52}

 

한 포도원 주인이 포도원 밭에서 일 할 일꾼들을 불러모았습니다. 아침부터 와서 일을 열심히 한 일꾼들도 있었습니다만 오후에 온 일꾼들도 있었습니다. 오후에 온 일꾼은 두 시간 동안만 노동을 했습니다. 일을 다 마치고 품삯 계산을 하는데 주인이 두 시간 노동한 사람이나 아침부터 와서 노동한 사람에게 같은 품삯으로 계산을 해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아침부터 일한 일꾼들이 몹시 싫은 표정을 지으면서 “이것은 불공평합니다.”하고 따졌습니다. 그 말끝에 주인이 “무엇이 불공한가?”라고 되물었습니다. 그러자 “이것은 시간적으로 볼 때 불공평합니다.”라고 일한 사람들이 답변들을 했습니다. 주인이 다시 “내가 보니까 당신들이 아침부터 한 일이 이 사람이 두시간 동안 한 일들보다 양이 더 적소. 그런데 뭐가 불공평하다는 말이요? 물론 시간적으로 볼 때는 불공평하겠지만 일을 해 낸 양으로 볼 때는 오히려 두 시간 동안 일을 한 사람에게 더 주면 더 줬지, 덜 주는 것이 불공평하다고 생각하오.”라고 답변을 했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소경 바디매오는, 문제 해결을 받은 이유가 다음과 같습니다.
  바디매오는,

  첫째, 예수님께 간절하게 기도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다음과 같은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단 말입니다.
‘아니 왜 바디매오는 기도하자 마자 응답을 주셔서 눈을 덜컥 뜨게 해 주시고, 나는 눈 떠달라고 하는 것도 아니고 훨씬 더 간단한 응답을 요구하는 것인데 왜 그렇게 오랫동안 기도를 드려도 응답을 안 해 주시는 겁니까?’
  그런데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조금 전 말씀드린 포도원 주인 입장과 같으실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단 두 시간 동안 기도를 드린 양이 하루 종일 기도를 드렸던 양보다 많고 간절할 경우 부득불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두 시간 기도를 간절하게 드린 사람에게 하루 온 종일 기도한 사람과 같은 양의 응답을 주실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문제는 기도는 많이 드린다고 드렸는데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간절성과 정성이 부족한 것입니다. 그런데 소경 바디매오 같은 사람은 기도를 드린 시간은 짧았지만 그 간절성이 오랫동안 기도를 드린 사람보다 더 강했던 것입니다. 그랬을 때 하나님 입장에서는 소경 바디매오의 기도응답 해주는 것을 외면 할 수가 없으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마 6:8)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들을 미리 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무엇이 필요한 지, 몰라서 안 주시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는 태도를 보시고 응답을 주시느냐, 안 주시느냐를 결정지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이 필요한지 몰라서 안 주시는 것이 아니고, ‘알아서 미리 주시는 것’도 아닌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을 해 본다면 우리는 기도에 대한 가치관을 재정립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기도만 시작했다면 하나님께서 마치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모르시기 때문에 그 제목을 알려드려야 하는 것처럼 나열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방식의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오늘도 제게 주셔야 할 것을 간단하게 정리요약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무엇 둘째, 무엇 셋째, 무엇 넷째, 무엇 다섯 번째, 무엇 ... 그리고 끝”
  그리고 다음 날 또 기도를 드리러 가서 “하나님, 제가 어제 말씀드린 것 혹시 잊으셨을지 몰라서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요새 필요한 것을 자꾸 말씀드려도 응답이 안 오는 것 보니 하나님 잘 모르시는 것 같습니다. 첫째, 둘째, 셋째 ... ”

  바디매오의 기도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심히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막 10:47-48)

  결과로 예수님께서 바디매오의 기도를 들으시고 다음과 같이 반응을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저를 부르라 하시니 저희가 그 소경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너를 부르신다 하매”(막 10:49)

  비행기가 처음 이륙을 할 때 연료의 거의 절반을 소모한다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를 드릴 때 아주 간절성을 가지고 기도를 드리기 시작하면 하나님께서 그 때의 우리에게 사용이 되는 열량, 칼로리, 간절성 등을 계산하십니다.
  그런데 ‘응답을 주시면 좋고, 못 받으면 어쩔 수 없고 ...’라는 식으로 기도를 드려버릇하면 하루 종일 일을 했으나 품삯은 두 시간 일한 사람이나 거반 다름없이 받아갈 수밖에 없는 경우가 있단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도대체 왜 기도를 간절하게 안 드리는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성을 너무 믿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아, 아버지와 나하고 사인데 뭐 ... 아, 알아서 좀 주셔야지 ... ’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음의 말씀을 보면 기도 응답은 관계성도 중요하지만 강청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됩니다.
  “또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벗이 있는데 밤중에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빌리라 / 내 벗이 여행 중에 내게 왔으나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 하면 / 저가 안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소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 /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됨을 인하여서는 일어나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강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소용대로 주리라 /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 너희 중에 아비 된 자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면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 알을 달라 하면 전갈을 주겠느냐 /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눅 11:5-13)

  그러니까 위의 말씀은 관계성으로 봐서는 친구 관계이므로 ‘좀 ... 갔다가 내일 날 밝으면 다시 오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찾아온 친구가 도무지 물러갈 기세를 안 보이고 계속 문을 두드리는 것입니다. 그러자 어쩔 수 없이 ‘내가 너와 벗됨을 인해서는 주지 않을지라도 강청함을 인하여 내가 네게 구하는 것을 주겠다.’라고 응답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도 응답이란 관계성 때문에도 오지만, 더 중요한 것은 강청함 때문에 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꼭 기억할 것은 우리 형제들이, 가족들이 우리에게 뭔가 아쉬운 일이 있다고 해서 우리가 알아서 돕게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계속 전화로 또는 찾아와서 독촉을 하면 그 때는 못 이겨 들어주게 되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는 것입니다.
  강청의 원리!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도 무엇인가를 구해서 받을 때‘알아서 주시겠지’라고 기다리고 있으면 응답이 참으로 안 옵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 그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자가 이같이 이르노라 /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2-3)

  그러므로 기도 응답이란 비록 사람이 모자랄지라도 부지런히 부르짖으면 받는 것이고, 사람이 훨씬 똑똑할지라도 부지런히 부르짖지 않으면 유감스럽게도 응답을 못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야고보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약 4:2)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마 7:7)

  우리 인간은 창조주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현실 파악을 제대로 해야 합니다. 우리는 피조물들입니다. 결핍된 존재들입니다. 그러므로 창조주 하나님께서 무엇인가를 주시고 우리는 그 하나님께 구해서 받아야 하는 존재들입니다. ‘주시면 좋고, 안 주시면 어쩔 수 없고 ... ’ 그런 여유가 만만한 존재들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인가가 필요하면 아주 결사적으로 매어 달려 구해야 응답이 빨리 오고 안 그러면 응답이 제대로 안옵니다.
  기도는 왜 하는 것이겠습니까?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을 기도로 구하는 겁니까? 그런 것은 기도 해도 안 옵니다. 왜냐하면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들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직접 해결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을 간구해서 응답을 받는 제도, 그것을 기도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다른 말로 기도란 불가능에 도전하는 것을 기도라고 합니다. 그런데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일들을 기도로 하나님께 아뢰어 응답을 받아야 하는 우리들이 너무 여유가 많은 것 같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창 18:14)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눅 1:37)

  그런데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이 언제 우리에게 전달이 되느냐 하면 우리가 부르짖어 현재의 낙심된 우리의 상황들을 간절하게 아뢸 때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요 14:13)

  우리는 우리의 필요를 반드시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 자녀들에게 필요한 것들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쉽게 잘 안 주는 이유는 우리 자녀들이 그것을 요청할 때까지 기다리기 위함입니다. ‘요청 안 해도 주면 되지 않느냐?’ 요청 안 했을 때 주면 귀중성을 몰라서 관리 능력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아, 안 구해도 막 생기는구나!’라고 귀중성을 몰라서 받은 것을 소중히 여기지 않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관계성은 생각을 안 하고 주는 부모를 수단과 목적으로만 생각합니다.
  그런데 무엇인가 필요해서 열심히 결핍된 것을 구하다가 보면 이득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왜 응답이 빨리 안 올까? 내가 뭐 잘못한 것이 있어서일까?’라고 생각을 점검하게 됩니다. 그리고 또 회개도 하게 되고, ‘내가 자꾸 구하기만 하면 안 되지, 하나님을 자주 뵈어야지’라고 생각을 해서 관계성도 더 많이 생각하고, 아무튼 여러모로 좋아지는 부분들이 많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무엇인가 필요 할 때, 응답이 빨리 잘 안 올 때, 열심히 회개를 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 제가 이런 것도 잘못 했구요, 저런 것도 잘못 했습니다.’라고 열심히 회개를 하다가 보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구하는 것을 주시되 우리가 예측치 못했던 훨씬 더 좋은 방법으로 주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면 깨닫습니다. ‘아, 내가 잘못했다고 하나님께 회개를 하다가 보니까 오히려 내가 예측했던 것보다 하나님께서 더 좋은 것들로 주시는 경우가 있구나’ 그런 경우도 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라고 하는 기도의 제도를 두신 것은 이리저리 우리에게 유익하게 하시기 위해서 두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구하는 제도를 두시되 바디매오처럼 적극적으로 구하면 훨씬 더 응답도 빨리 오고 훨씬 더 가치와 보람도 느끼고, 그리고 평생 그 은혜를 잊어버리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거 내가 어떻게 구해서 받은 응답인데 ...’라고 생각을 하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적당히 구해서 받게된 응답은, 적당히 노력해서 받은 대가와, 적당히 노력해서 얻은 품삯은 귀하게 여기질 않습니다. 다음에 또 벌면 되니까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귀중성을 알기 위해서 간절해질 때까지 기다리시는데 바디매오는 바로 문제해결을 받은 원인이 그러한 간절한 기도의 대가를 치렀던 것입니다.
  바디매오는 다른 사람이 평생을 부르짖은 간절성을 다 합해야 될 만큼의 간절성을 단번에 길에서 예수님 지나가신다는 소문을 듣고 ‘이 기회를 놓치면 나는 끝이다. 내가 어디 가서 또 눈을 뜨겠느냐?’라는 마음을 가지고 부르짖었던 소경이었습니다.

  만일에 예수님 말고도 자신의 눈을 또 뜨게 해 주실 수 있는 분이 있다면, 그렇다면야 ‘다음에 또 기회가 있겠지 ... ’라고 여유를 부릴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디매오는 ‘나는 지금 이 기회를 놓치면 더 이상 기회가 없다.‘라고 생각을 하고 간절하게 소리질러 부르짖어 기도 드린 결과 응답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어떻게 드려야 응답을 빨리 받느냐 하면, ‘다음 기회가 또 있겠지 ... ’라고 생각을 안 하는 것입니다.
‘이번 기회가 마지막이다.’라고 생각을 해야 합니다.
‘이 새벽에 ... 오늘 새벽에 못 받으면 내일 새벽에 다시 구해 받지’라고 생각을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오늘 새벽이 마지막이다. 내일 새벽에는 내가 살아 있을지 죽어 있을지 모른다. 내일 새벽에 내가 살아 있을 수 있다는 보장이 어디 있느냐?’라고 생각을 하고 간절하게 구해 버릇해야 합니다.
  병이 있는 분들은 ‘이번 달에 못 고치면 다음 달에 고치지 ...’라고 여유 있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다음 달에 내가 살아있을 수 있는 보장이 어디 있느냔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매 번, 매 시, 매 순간, 이번, 지금 이 자리에서 드리는 기도가 ‘내 마지막 기도다.’라고 생각을 하고 간절하게 기도의 대가를 치러 버릇을 해야 응답을 훨씬 더 빨리 받을 수 있게 된다는 겁니다.
  바디메오가 문제해결을 받게된 첫 번째 비결은 간절하게 기도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다음과 같이 고백을 한 바가 있습니다.
“환난 날에 여호와께서 네게 응답하시고 ...”(시 20:1)
“여호와께서 환난 날에 나를 그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바위 위에 높이 두시리로다”(시 27:5)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 50:15)
“주는 나의 산성이시며 나의 환난 날에 피난처심이니이다”(시 59:16)
“나의 환난 날에 내가 주께 부르짖으리니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리이다”(시 86:7)

  우리가 환난 날에 간절하게 부르짖으면 환난에서 훨씬 더 빨리 건짐을 받습니다. 그러나 환난이 우리에게 다가와 있는데도, 벌써 오래 전에 와 있는데도 도무지 급한 것이 없으면 응답도 그만큼 천천히 오거나 안 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사기에 보면 20년 동안 고통을 받아도 기도를 안 하면 응답이 안 왔습니다. 40년 동안 고통을 받아도 기도를 안 하는 사람들에게는 응답이 안 왔습니다.
  그러나 기도는 아주 짧은 시간에도 간절하게 부르짖어 응답을 받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오래 시간도 기도를 드려도 ‘응답이 오면 좋고 안 오면 어쩔 수 없고 ...’라는 식으로 기도를 드려 응답이 더디 오거나 못 받은 경우의 분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둘째, 바디매오에게는 장애물을 극복하는 능력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세상만사를 살펴 볼 때 그 어떠한 상황도 장애물이 없는 경우는 없습니다.
  오늘 본문 47절에 보면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 하라”는 말씀처럼 바디매오가 예수님께 도움을 요청하였을 때 제일 먼저 당면한 것은 장애물이었습니다.
  자동차가 앞으로 달리려면 제일 먼저 공기의 저항을 받아야 하고 그 장애를 극복해야만 합니다.

  제가 청년 때 오산리 기도원을 갔습니다. 기도 굴을 다 두드려 보니까 사람들이 다 있었습니다. 그래서 벤치에 앉아 기도를 드리는데 아마, 충청도에서 올라오신 어느 여집사님 같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기도 내용의 말이 충청도 말이었기 때문입니다. 저하고는 의자 세 개 정도가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각자 기도를 시작하는데 저는 “하나님, 오 거룩하시고 사랑이 많으시고 ... ”라고 천편일률적인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 집사님은 거두 절미하고“아버지! 곤쳐 주실 거지 유”라고 기도를 큰 소리로 드리는데 제가 아무리 집중하고 기도를 하려고 해도“아버지! 곤쳐 주실 거지유”라는 그 큰 기도 소리 때문에 제가 도대체가 헷갈려서 기도를 집중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어떤 분이 하나님께 1억을 달라고 기도를 집중하고 있는데 뒤에서 어떤 사람이 “주여, 만원만 주시면 ...”이라고 큰 소리로 기도를 드리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1억을 구하던 사람이 지갑에서 10,000원을 즉시 꺼내 주면서 “이거, 내가 만원을 줄 테니까 제발 좀 그만 기도하고 조용히 가시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세월이 많이 지났는데요. 벌써 20년이 더 지났는데도 저는 그 분이 응답을 못 받았을 것이라고 한 번도 의심의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 분 응답 받으셨을 겁니다. 그 때 그 기도 동산이 흔들리게 기도를 드린 것으로 보아 아마 하나님께서 도저히 외면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바디매오는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 하라’고 말을 하든가 말든가 그는 ‘더욱 심히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러니까 바디매오는 장애물을 극복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바디매오를 부르셨습니다.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저를 부르라 하시니 저희가 그 소경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너를 부르신다’
  장애물은 극복하고 나면 오히려 우리에게 도움이 됩니다.
  장애물로 역사 하던 사람들이 오히려 바디매오를 돕는 자들로 변했기 때문입니다.

  노련한 뱃사공은 바람과 파도를 역으로 이용한다고 합니다.
  우리가 누구와 함께 뛰느냐에 따라 장애물을 극복할 수도 있고, 장애물을 극복하지 못하기도 합니다.
  왜, 운동회 때 그런 경기를 해 본 적이 없습니까? 달리기 주자로 나간 선수들이 뜁니다. 그리고 쟁반 위의 밀가루에 얼굴을 파묻고는 접혀진 종이를 입술로 물어 그 종이를 펴면 ‘할머니와 같이 뛰기’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선수는 거기서부터 속력이 줄어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뒤 처지던 선수가 종이를 펴보니 까 ‘체육선생님과 같이 뛰기’ 그것은 이긴 것입니다. 누구랑 같이 뛰느냐가 그 승패 여부에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장애물을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극복하면 너무 쉽습니다.
‘워치만 니’라고 하는 분은 폐병이 걸렸습니다. 간절하게 기도를 드렸습니다. 꿈에 하얀 옷을 입은 사람이 나타나더니, ‘얘야, 네가 탄 배가 앞으로 나가는데 앞에 가로막혀 있는 바위를 옮겨주랴, 아니면 물을 불려서 바위 위로 지나가게 해 주랴’워치만 니가‘물을 불려 바위 위로 지나가게 해 달라’고 요청했더니 그 장애물을 통과하게 해 주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병이 나았다는 것입니다.
  장애물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마가복음 2장에 보면, 중풍병 걸린 사람이 네 명에 의해 옮겨왔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러 갔더니 사람들이 너무 많아 그 장애물들 때문에 그 집으로 못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지붕으로 올라갔습니다. 이번에는 지붕이 장애물 이었습니다. 뜯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환자를 끈으로 예수님 앞에 내렸습니다. 마침내 고침을 받았습니다.
  장애물이 없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무엇인가 응답을 받기를 원한다면 반드시 장애물은 나타날 것이고, 그 장애물은 우리가 빨리 극복할수록 기도 응답도 더 빨리 받을 수 있게 됩니다.

  나환자 스텐리 스타인이라는 분은 눈까지 완전히 멀었습니다. 그런데 절망하지 않고,‘나에게 남아있는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했습니다. 그는 늘 그렇게 생각하다가 자신에게 정상적인 정신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책을 쓰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 때부터 글을 쓰기 위해서 좋은 생각이 날 때마다 녹음을 시켰습니다. 마침내 그는 「이제는 외롭지 않다」라는 책을 남겼습니다. 그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나에게 현재 있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을 통해서 장애물을 더 빨리 극복할 수 있습니다.

  무디 목사님께 누가 물어봤다고 합니다.
“당신에게 가장 큰 장애는 무엇입니까?”
  무디 목사님이 대답했다고 합니다.
“나에게 있어서 가장 큰 장애는 바로 나 자신입니다.”

  우리의 가장 큰 장애물은 무엇 같습니까?
  우리는 무슨 괜찮은 생각을 한 가지를 하고 나면, 또 연이어 하게 되는 생각들이 ‘그것은 이래서 안되고, 저것은 저래서 안 되고 ... ’ 그래서 ‘관 둬. 그래 맞아.’라고 생각한 후 포기를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괜찮은 생각 한 가지하고, 안 괜찮은 생각 다섯 가지 하고 그럽니다.
  우리처럼 우리 자신에 대해서 큰 장애물은 없단 말입니다.
  정말로 우리가 무엇인가 하기를 원하면 하나님도 못 말립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큰 장애물로 우리 자신에 대해서 역사를 하고 있습니다.

  빨간 신호등을 몹시 싫어하는 사람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빨간 신호를 몹시 불편하게 여겼다는 것입니다. 어느 날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그 때부터 빨간 신호등이 들어오면 양쪽 옆 백미러도 보고, 후광 백미러도 보고, 차안도 살펴보고 ... 여러 점검을 하는 계기로 삼았다는 겁니다.
  나에게 어떤 장애물이 나타났을 때 그것을 귀찮아만 할 것이 아니라 ‘뭐 주변을 둘러 볼 것이 없나?’ 하며 그 시기와 그 상황을 잘 활용하면 우리에게 좋은 경험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이 바디매오는‘잠잠하라. 소리지르지 말고 조용히 하라’는 장애물을‘너는 기도 응답을 받을 자격이 없다. 너는 눈 뜰 자격이 없다. 너는 지금 눈뜨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너는 지금 이 시기에 눈을 뜨는 것은 하나님의 시기가 아니다. 범사에 때와 기한은 하나님께 있는데 너는 아직 좀 더 간절하게 부르짖어야지, 지금 네가 눈을 뜰 시기는 지금 상황이 아니다. 왜냐하면 장애물들을 봐라. 그러므로 지금 나설 시기가 아니다.’라고 해석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바디매오에게 나타난 그 장애물은 ... 모든 상황에는 장애물들이 있기 마련인데 ‘장애물은 일을 그만 두라고 하는 신호가 아니라 내가 이 일을 지금 해야만 하는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귀한 깨달음을 주시는 기회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장애물만 나타나면 ‘맞아, 하나님의 뜻이 아닌가 봐.’장애물만 나타나면 ‘맞아, 하나님의 무슨 심오한 뜻이 있으신가 봐’ 장애물만 나타나면 ‘맞아, 나는 죄가 많거든’장애물만 나타나면 ‘맞아, 지금은 내 때가 아니야’라고 생각을 하고 포기하는 것부터 먼저 시도를 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장애물은 일을 중단하라고 하는 신호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장애물이 있었으나 소리를 지른 바디매오를 에수님께서 불러 세우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나사렛 예수 시란 말을 듣고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 하라 하되 그가 더욱 심히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저를 부르라 하시니 저희가 그 소경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너를 부르신다 하매”(막 10:47-49)

  셋째, 바디매오가 문제를 해결 받은 이유는, 눈을 뜨게 된 이유는 좋은 선택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름을 받은 바디매오는 다음과 같이 반응하였고 마침내 눈을 뜨게 되는 응답을 받게 되었습니다.
  “소경이 겉옷을 내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 예수께서 일러 가라사대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소경이 가로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저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좇으니라”(막 10:50-52)

  그런데 바디매오는 50절 말씀처럼 꼭 겉옷을 내어버리고 가야 합니까?
  그냥 입고 가면, 예수님께서“너 왜 겉옷을 입고 왔어? 응. 안 고쳐 줘”라고 하시겠습니까?
  바디매오에게 겉옷은 잠 잘 때는 이불이었습니다. 바디매오에게 겉옷은 더울 때는 깔고 앉는 도구였습니다. 바디매오에게 겉옷은 전 재산과 같았습니다. 바디매오에게 겉옷은 추울 때 유일한 피난처였습니다. 바디매오에게 친구가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바디매오에게 있어서 겉옷은 친구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러한 겉옷을 내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님께 나아왔다는 겁니다. 당시 그곳은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 때 그 곳에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는데 그 겉옷을 버리고 가면‘허다한 무리’들이 그 곳에 있었다고 하는데 그렇게 겉옷을 내어버리고 갔을 때 그것이 발에 밟혀서 못 쓰게 될 수도 있고, 또 누군가가 주워가도 다시 찾으러 갈 수도 없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겉옷을 내어버리고 예수님께 나아갔다는 것은 전적인 투자를 했다는 것입니다.

  한 나라에 예쁜 공주님이 죽을병에 걸렸습니다. 그런데 멀리서 삼 형제가 살고 있었는데, 이 삼 형제는 저마다 한 가지씩 아주 좋은 공주의 병을 고칠 수 있는 도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형제 중 한 명이 망원경으로 보니까 궁궐에 공주가 죽을병이 걸려서 아파 누워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까지 갈 수 있는 도구가 없단 말입니다. 그런데 또 한 형제가 날으는 양탄자를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타고 가면 된다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를 이 공주를 살려야 하는데 먹일 약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형제 중 막내가 공주가 먹기만 하면 살아날 수 있는 사과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 셋은 그 공주만 살리면 사위가 될 수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그래서 ‘일단 살리고 보자’고 의기투합하여 셋이 형제의 양탄자를 타고, 망원경으로 본 위치로, 사과를 가지고 날아갔습니다. 그래서 공주방에 도착을 해서 사과를 먹여 살렸는데 문제는 누가 그 공주의 남편이 되느냐는 겁니다. 저마다 한 역할씩 했단 말입니다. 망원경 없었으면 못 발견했고, 양탄자가 없었으면 타고 날아가지 못했고, 사과를 안 먹였으면 못 살렸습니다.
  그런데 왕이 사과를 준 막내를 사위로 삼았습니다. 그러니까 형들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아니 이럴 수가 있습니까, 내 망원경이 없었으면, 내 양탄자가 없었으면 ...’ 그러니까 왕이 그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망원경 그대로 있느냐, 없느냐?”
“있습니다.”
“양탄자 그대로 있느냐, 없느냐?”
“있습니다.”
“사과 있느냐, 없느냐?”
“없습니다.”
  왕이 말했습니다.
“내가 ‘전적인 투자를 한 네 형제들 중 막내에게 나의 딸 공주의 남편이 되게 해 주겠다.’는데, 뭐가 아쉽냐. 너희들은 있는 것을 그대로 가지고 돌아가면 되지 않느냐.”
  우리가 전적인 투자와 뭔가를 남겨놓고 하는 투자는 하나님께서 알아서 계산을 하십니다.

  바디매오가 겉옷을 내어버리고 그리고는 완전히 전적인 투자를 하고 예수님께 나아갔더니 예수님께서 51절에서 다시 물어보십니다.
“예수께서 일러 가라사대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소경이 가로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막 10:51)

  바디매오는“집을 원합니다. 예쁜 아내를 원합니다. 돈도 원하고, 떡도 원하고 ... ”라고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랬다고 합니다.“술하고, 떡하고, 꿀 중에 무엇을 먹을 것이냐?”고 했더니,“술안주로 떡에다가 꿀을 찍어 먹겠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바디매오는 “보게만 해 주세요.”딱 한 가지를 원했다는 말입니다.

  바디매오는 보이게만 해주면 나머지는 알아서 자급자족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벌써 그 정도 적극성이 있는 사람이니까 그토록 소리를 질러 예수님께 불려 나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입니다.
  한 아버지가 임종 직전에 멀리 있는 아들이 도착 전에 죽게 되었습니다. 아들에게 재산을 물려주고 가야하는데 노예가 밀사를 보내어 아들을 못 오게 죽일 수도 있고, 또 재산을 빼 돌릴 수도 있을 것이란 말입니다. 그렇게 고민을 하다가 그 집에서 가장 오래 된 노예에게 재산을 다 물려 줍니다. 그리고 유서를‘아들아, 너는 이 집안에서 딱 한가지만 가질 수 있다.’라는 내용으로 써서 노예에게 전달해 주기를 바라고 죽었습니다.
  재산을 물려받은 노예가‘그거야 제가 잘 전달을 하지요.’하고 받아서 아들이 왔을 때 그 유서를 보여주었습니다. 아들이 볼 때 아버지가 너무 섭섭하거든요. 재산은 노예에게 다 물려주고 ...
  그런데‘추신 : 무슨 말인지 모르겠거든 지혜로운 랍비에게 물어 보거라’는 내용을 본 후 랍비에게 가지고 갔습니다.
  그랬더니 랍비가“이 사람아, 만일에 아버지가 자네에게 재산을 물려주라고 그 노예에게 시켰으면 그 종이 자네가 오기 전에 자네를 죽일 수도 있고, 재산을 빼돌릴 수도 있잖은가. 그러나 한 가지를 가지라면서 그러면 자네는 노예만 가지게 그러면 그 노예 재산이 다 자네의 것이잖는가?”라고 일러 주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만 제대로 찾아 나가면 나머지 문제는 다 해결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마 28:18)

  그리고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통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롬 8:32)

  어차피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다 받아 가지고 계신 분이십니다. 그런 예수님을 우리가 예수님 한 분만 친구로 제대로 모시고 있으면 우리가 필요한 것은 얼마든지 받을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은 과거 선택의 결과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가 선택하는 것은 10년 후에 우리가 누릴 결과일 것입니다.

  어차피 사람의 선택이란 다 거기서 거기입니다.
“범죄치 아니하는 사람이 없사오니 ...”(왕상 8:46)
“범죄치 아니하는 사람이 없사오니 ...”(대하 6:36)

  문제는 회개를 얼마나 잘 하느냐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계 2:5)

  좋은 선택을 하지 못했던 것을 어느 시점에서 했는가 다시 한 번 살펴 보라는 말입니다.
  바디매오가 소경이 되고 싶어서 되었겠습니까? 우리가 지금 이렇게 살고 싶어서 삽니까? 우리가 언젠가 다 좋지 못한 선택한 결과로 지금 우리가 고난당하면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역시 계속해서 좋지 못한 선택을 해야 되겠습니까? 아닙니다. 그 맥을 끊어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 이 시점부터라도 우리가 좋은 선택을 해 나가면 우리에게 5년 후, 10년 후에는 참으로 좋은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 줄 믿습니다.
  바디매오는 과거의 소경이 되기 전에는 좋지 못한 선택을 했을지언정 예수님을 찾아 나와서 간절하게 부르짖는 그 선택, 참 좋은 선택이었습니다.

  오늘 주일날 예배를 드리러 나오는 선택, 너무너무 좋은 선택을 하셨습니다. 나의 간절한 부르짖음을 가지고 세상 신에게 가지 않고 하나님께 나아온 것, 너무너무 좋은 선택을 하셨습니다.
  바디매오는 좋은 선택을 한 결과로 문제 해결을 받았단 말입니다.

  넷째, 분명한 비전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바디매오는 예수님께 자신의 소원을 다음과 같이 아뢰었습니다.
  “소경이 겉옷을 내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 예수께서 일러 가라사대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소경이 가로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막 10:50-51)

  그러면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말을 한 사람이 비전이 없었겠습니까?
  ‘그냥 나는 소경으로 이렇게 살다가 죽을 거야’ 그런 사람이 뭐가 아쉬워서 겉옷을 내버리기까지 하고 예수님께 나오겠습니까? 뭔가 남다른 비전이, 다른 소경과 달리 비전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 앞에 나온 것 아니겠습니까.
  당시 소경이 얼마나 많았는데 왜 바디매오만 예수님께 나왔겠느냔 말입니다. 남다른 비전 때문입니다.

  한 마을에 댐을 만들기로 결정이 되어 물로 덮이게 되었습니다. 정부에서 보상을 해주고 ‘이사를 가라’고 했습니다. 그때부터 나타난 특징입니다. 쓰레기를 안 치우더라는 것입니다. 어차피 물로 덮여질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잠언 기자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잠 29:18)

  왜 회개를 안 하느냐?
  이루어야 할 비전이 없기 때문입니다.
  왜 노력을 안 하느냐?
  비전이 없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살다가 죽으면 그만이거든요.
  그러면 왜 노력하고, 왜 회개하고, 왜 부르짖어 기도를 드리느냐?
  이루어야 할 비전이 있기 때문입니다.

  두 정원사가 있었습니다. 한 정원사는 정원을 내버려두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 한 정원사는 계속 해서 정원을 아름답게 가꾸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무슨 차이인가 봤더니, 정원을 계속 가꾸는 정원사는 정원을 아름답게 만들어야 하겠다는 비전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정원을 내버려두는 정원사는 그냥 아무 비전도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분명한 목표물을 바라보면 분명한 행동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냥개 열 마리를 풀어놓으면 제일 선두에 달리는 사냥개는 중간에 포기를 안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뒤를 뒤좇아가던 사냥개들은 우왕좌왕하다가 장애물이 나타나면 포기한다고 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선두 사냥개는 분명한 목표물을 바라보고 뛰기 때문에 포기하지 않는 것이고, 뒤쫓아가는 사냥개들은 목표물을 중간에서 잃어버렸기 때문에 포기를 잘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목표물이 분명한가 아닌가에 따라 그 결과가 다릅니다.

  마하트마 간디가 한 말입니다.
“정확한 목표의 힘은 군사력의 힘보다 더 강한 것입니다. 조직적인 정신력은 조직적인 군사력보다 위대한 것입니다”

  나폴레옹이 한 말입니다.
“나는 오직 목표만을 바라볼 뿐이다. 분명한 목표를 향해 전진해가면서 장애물이 생기면 생기는 대로 그것들만을 없애면 되기 때문이다.”
  세상에 있는 길을 우리가 다 볼 수 없습니다. 세상의 길들은 너무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꼭 우리가 가야 되는 길만 다니다가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가야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세상일을 다 처리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께 지시받은 일들만 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세상의 좋은 일들 하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분명하게 하라고 지시하신 일을 하기를 원하십니다.

  1953년 예일대 졸업생 중 3%만 구체적인 인생의 목표를 글로 써서 제출했습니다.
  1975년에 그 사람들을 추적 조사해 보니, 인생의 목표를 글로 써 낸 3%의 학생들이 나머지 97%의 학생들을 모두 합친 것 보다 목표를 더 많이 달성했다는 것입니다.
  목표를 세운다는 것은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아는 행위와 같습니다.
  목표를 세운다고 그 목표가 다 진리는 아닙니다. 방향 전환이 필요할 때도 있고, ‘괜히 목표로 세웠다.’고 생각을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있는 사람, 분명한 비전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자기가 자기 자신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분명히 아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 비전도 없고, 아무 목표도 없다면 자기가 자기 자신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그렇단 말입니다.

  미국의 슬로건입니다.
  “꿈꿔라 그리하면 이루어질 것이다.”

  바디매오가 남달랐던 것은 분명한 비전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께 나아와서 눈뜨고 보게 해달라고 요구했다는 것입니다. 바디매오가 비전 없는 사람이었다면 그냥 그렇게 눈감고 구걸하기가 더 좋았을 것입니다.

  다섯, 믿음의 분명한 대가를 치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디매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저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좇으니라”(막 10:52)

  이 말씀은 다음과 같은 뜻입니다.
“네가 치른 믿음의 대가가 너의 눈을 뜨게 하였느니라.”
“네가 가지고 있는 믿음이 그토록 소리질러 나를 부르게 하였느니라”
“네가 간절하게 부르짖은 부르짖음이 나를 멈춰 서게 하였느니라”
  
  52절의 말씀을 다시 자세히 보시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바디매오에게‘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갔습니까? 안 갔습니까?
‘예수를 길에서 좇으니라’라는 말씀을 볼 때 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디매오에게 “너 이제 눈을 떴으니까 알아서 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안 갔습니다.
  믿음의 대가를 치렀던 바디매오가 구걸하려 마음을 먹었다면 예수님께서 “가라”고 했을 때 “그러면 안녕히 가십시오.”라고 인사하고 갔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열 명의 문둥병자를 치료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아홉 명은 인사도 없이 갔습니다. 얼마든지 바디매오도 그리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오히려 예수님을 좇아나섰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믿음대로 살고 싶지 않았는데도 예수님을 따라나섰겠습니까?
  바디매오가 그 옛날에 ... 지금도 소경이 눈을 떴다고 하면 큰 이적인데 당시 2000년 전에 눈을 뜰 수 있었다는 것은 우연히 뜬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바디매오가 치루었던 대가를 오늘 우리도 치르기만 하면 우리 생애에 기적이 일어날 줄 믿습니다.
  우리 모두 남은 생애 동안 반드시 바디매오와 같은 대가를 치르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바라겠습니다.

 

 

과거의 좋지 못했던 선택의 결과들을 극복하려면

{신명기 30:15~20}

 

뉴욕의 한 법정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지나가던 행인이 지하철 공사장에 공사 진행 상황을 지켜보기 위해서 머물러 섰습니다. 공사 현장에 있던 감독이 “당신 여기 이러고 있다가는 다칠 수도 있습니다. 비켜주십시오.”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내가 여기서 지나가는 행인으로써 건물 지어지는 광경을 볼 자격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여기서 공사과정 지켜 볼 수 있는 자유의 권한을 침해하지 말아 주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감독관은 더 이상 그 사람과 실랑이하고 싶지 않아 자리를 비켰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 그 건물 위에서 자재가 떨어져 그 사람이 맞아 큰 부상을 입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부상당한 사람이 소송을 제기하였습니다. 그 사람의 주장은 ‘건물에서 공사를 진행하다가 건물측에서 안전 부주의로 기물이 떨어져 자기가 다쳤기 때문에 보상을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마침내 법원에서 결심이 선고되었습니다.
  재판장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당시 감독관은 분명히 ‘당신이 거기 있다가 다칠지도 모른다.’고 경고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에서 당신은 그 광경을 지켜볼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 주장하며 당신이 선택을 한 것이니 만큼 당신에게는 피해 보상을 할 수 없으며, 안 해도 괜찮다는 결정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당신은 스스로 선택한 책임도 져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모든 선택에는 책임이 따른다고 하는 것입니다.

  지난주간에 국회에서 청문회가 열렸습니다.
  그러면 청문회의 핵심사안은 무엇이겠습니까? 그냥 한 개인의 과거 비리를 드러내는 것이 청문회의 핵심 사안이겠습니까? 청문회의 핵심 사안은 ‘당신 과거에 이런 선택을 한 일이 있습니까?’라고 묻고, ‘당신 과거에 이런 선택을 한 것으로 봐서 앞으로도 이런 선택을 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이 드는데 그 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라고 묻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인이 ‘아, 그때는 내가 그런 선택을 했지만, 지금은 그것이 잘못된 선택이었다는 판단이 들기 때문에 이후로는 그러한 선택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라는 대답을 듣게 되면 그 청문회에서 질문한 사람들은 정상을 참작하여 선택을 결정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과거 생활들을 뒤돌아볼 때, 우리가 언제나 나쁜 것들만 선택하지는 않았습니다. 우리는 좋은 것들도 많이 선택을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과거의 좋지 못했던 선택의 결과와 좋은 선택의 결과들 두 가지 다를 동시에 맞이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얼마 전 TV의 한 프로에서 이번 국회의원 17대 당선자들 가운데 서울대 출신들로만 모여진 모임이 있는 자리를 다루었습니다.
  그들 중 한 의원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내가 세상을 살다보니까 ‘내가 서울대학을 졸업했다.’는 것이 큰 재산이 되었습니다.”
  물론 그 프로는 서울대 출신들을 옹호하기 위해 제작된 프로는 아닙니다.
  그러나 제가 그 프로를 보면서 느낀 것은 ‘그들은 자랑할만하다.’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좋은 선택이었습니다. 그것은 그 분 말이 맞았습니다. ‘살다가 보니까 서울대를 졸업했다는 것이 큰 재산이 되더라’ 맞습니다.  그 자리에 모인 분들은 그러한 자긍심을 가질 만 했단 말입니다.
  참 좋은 선택이었습니다.










  문제는 그러한 좋은 선택을 한 여세를 몰아서 계속적으로 더 좋은 선택을 했느냐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유의지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선택능력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매일매일 좋은 성품에 대한 선택의 순간들을 많이 맞이합니다.
  ‘용서할 것인가, 미워할 것인가?’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 18:35)

  이 말씀은,
  ‘너희가 용서하지 않는 것을 선택하면 하나님께서도 너희를 그렇게 예우할 것이다.’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좋은 선택할 일들이 많습니다.
  효도할 것인가, 말 것인가? 하나님 경외할 것인가, 말 것인가? 안식일 준수할 것인가, 말 것인가? 십계명 잘 지킬 것인가, 말 것인가? 원수를 갚을 것인가, 말 것인가? 회개 철저하게 할 것인가, 말 것인가? 기도를 간절하게 드릴 것인가, 말 것인가?
  이러한 것들은 전부 우리의 선택 사안들입니다.

  우리는 지금 과거의 좋지 못한 선택들로 인하여 아주 심각한 마음의 고통들을 당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가 과거 사용했던 언어와 생각과 태도와 습관과 행위와 성취의 결과들에 대하여 일일이 말은 안 하지만, 많은 고통스러움들을 경험하고 있는 중입니다.

  선택이라는 단어의 핵심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명예로워질 수 있는 선택을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가장 좋은 선택은 ‘명예로운 느낌을 보상받을 수 있는 선택’입니다.

  하나님께서 잠언 기자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재물보다 명예를 택할 것이요 ...”(잠 22:1)

  인간에게는 좋지 못한 선택을 하고 난 결과는 ‘후회’라고 하는 고통이 따르게 됩니다.
  사람은 좋지 못한 선택을 한 사람들에 대하여 비웃고, 멸시하고, 천대하고, 비난을 가합니다. 그러므로 좋지 못한 선택을 한 사람들은 당사자들도 고통을 겪어야 하고, 그 자손들도 역시 고통을 겪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친일파라고 하는 선택을 한 부모는 그 부모의 이름이 친일파 명단에도 오름과 동시에 그 자녀들까지 그 부모의 좋지 못한 선택으로 인하여 고통을 겪게 된다는 것입니다.

  첫째, 그러면 인생에 있어서 가장 올바른 선택 방법은 무엇이겠습니까?

  ① 믿어지든지 안 믿어지든지 성경에 위배됨이 없는 것들을 선택해야 합니다.
  아무튼 성경 말씀에 위배된 선택을 하면 반드시 언젠가는 고통을 당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② 하나님의 뜻에 위배됨이 없는 선택을 해야 합니다.










(성경본문 신명기 30:15~20)
  “보라 내가 오늘날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곧 내가 오늘날 너를 명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잠언 기자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는 바르나 하나님 보시기에는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잠 14:12 : 16:25).

  그러니까 사람들은 괜찮은 선택이라고 생각이 들어 했는데 하나님 보시기에는 사망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잘못된 선택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택은 주변의 몇 사람, 내가 보기에 ... 그런 식으로 결정해서 선택하면 후회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③ 상식에 위배됨이 없어야 합니다.
  한때 우리에게 많은 인기가 있었던 모래시계라고 하는 프로에서 검사가 평생을 폭력배로 살아온 친구에게 사형을 구형하면서 했던 말이 있습니다.
  “피고는 언제나 상식에 위배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사형을 구형합니다.”
  올바른 상식에 위배되는 선택을 하면 우리는 언젠가 반드시 후회하게 됩니다.

  둘째, 우리가 과거에 잘못 선택한 일들에 대한 원인은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면 우리가 과거의 잘못된 선택을 한 것들에 대한 변명의 여지는 없는가? 있습니다. 왜 우리가 잘못된 선택을 했겠습니까?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원인들이 있습니다.

  ① 무지

  ‘몰랐다.’는 것, 이유가 됩니다. 그러나 사람은 알고 잘못 선택했든, 모르고 잘못 선택했던 선택은 선택입니다.
  그래서 그런 말이 있습니다.
  ‘깡패도 예방주사를 맞으면 전염병에 안 걸리고, 성자도 예방주사 안 맞으면 전염병에 걸린다.’
  알고 행했든 모르고 행했든 선택의 결과는 우리가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며칠 전에 유로 2004년 프로 축구가 열렸습니다.
  4강에 진출하기 위해서 잉글랜드와 포르투갈이 경기를 했습니다. 접전 끝에 2:2로 경기가 끝났습니다. 승부차기를 실천해야 했습니다. 잉글랜드 측에서 감독은 첫 번째 킥커로 유명한 베컴을 선택했습니다. 그런데 이 친구가 볼을 골대를 넘기는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결과적으로 졌습니다.
  잉글랜드 감독은 베컴을 기용한 것은 결과적으로 좋지 못한 선택 이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베컴은 세계적인 선수입니다. 그리고 페널티킥을 실수할 확률이 가장 적은 선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최근 그의 가정사를 볼 때 컨디션이 안 좋습니다. 그러므로 감독은 그의 유명도나 그의 과거 전적만을 볼 것이 아니라 현재 그의 심리적 컨디션도 참고를 해서 과감하게 킥커로 기용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그랬다면 잉글랜드는 이번에 승리를 할 수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감독은 베컴을 선택했고, 결과적으로 그 팀은 졌습니다. 이렇게 선택에는 결과라는 것이 얻어지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선택은 과거의 고정 관념적인 것만 참고로 해서 선택을 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선택을 하려면 여러 가지 정황을 잘 살펴서 해야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우리가 지난 월드컵 때 히딩크를 감독으로 선임한 것은 좋은 선택이었습니다.
  그것은 결과적으로 볼 때 아주 좋은 선택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 너무너무 좋은 선택이었습니다.
  다음 말씀을 볼 때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5-11)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린 선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큰복을 주시겠다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지시하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곳에 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놓고 그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단 나무 위에 놓고 /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더니 /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가라사대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 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 22:9-12)
  “가라사대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창 22:16-18)

  이와 같이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서 좋은 결과를 얻을 수도 있고, 좋지 못한 결과를 얻을 수도 있습니다.

  ② 게으름

  우리가 과거 좋지 못한 선택을 한 것에 대한 이유로 ‘게으름이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게으름을 선택한 사람들은 훗날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다음의 말씀들을 살펴볼 때 그렇습니다.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되느니라”(잠 10:4)
  “게으른 자는 그 부리는 사람에게 마치 이에 초 같고 눈에 연기 같으니라”(잠 10:26)
  “부지런한 자의 손은 사람을 다스리게 되어도 게으른 자는 부림을 받느니라”(잠 12:24)
  “게으른 자는 마음으로 원하여도 얻지 못하나 부지런한 자의 마음은 풍족함을 얻느니라”(잠 13:4)
  “게으른 자는 말하기를 사자가 밖에 있은즉 내가 나가면 거리에서 찢기겠다 하느니라”(잠 22:13)
  “게으른 자는 그 손을 그릇에 넣고도 입으로 올리기를 괴로워하느니라”(잠 26:15)

  우리가 좋은 선택들을 몰라서 못하는 수도 있고, 게을러서 못하는 수도 있습니다.




  ③ 실수

  그런가 하면 우리는 알면서도 실수로 잘못된 선택을 하는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삼손은 들릴라와 가까이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가까이 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그는 두 눈까지 뽑혔던 것입니다.

  “블레셋 사람이 그를 잡아 그 눈을 빼고 끌고 가사에 내려가 놋줄로 매고 그로 옥 중에서 맷돌을 돌리게 하였더라 ”(삿 16:21)

  성경에 보면 두 눈을 뽑힌 사람이 두 사람이 있는데, 한 사람은 삼손이고, 또 한 사람은 왕으로 시드기야라는 사람이었습니다.
  특징은 둘 다 교만했다는 것입니다.
  시드기야 왕은 눈이 뽑혀서 죽는 날까지 사슬로 결박당하고 바벨론으로 끌려가서 감옥에서 죽었습니다.

  “시드기야의 아들들을 저의 목전에서 죽이고 시드기야의 두 눈을 빼고 사슬로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끌어갔더라”(왕하 25:7)
  “시드기야의 두 눈을 빼고 사슬로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끌어다가 그 죽는 날까지 옥에 두었더라”(렘 52:11)

  교만한 선택을 실수로 했든 실수로 하지 않았든 그 결과를 하나님께서는 오바댜를 통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너를 열국 중에 미약하게 하였으므로 네가 크게 멸시를 받느니라 / 바위 틈에 거하며 높은 곳에 사는 자여 네가 중심에 이르기를 누가 능히 나를 땅에 끌어내리겠느냐 하니 너의 중심의 교만이 너를 속였도다 / 네가 독수리처럼 높이 오르며 별 사이에 깃들일지라도 내가 거기서 너를 끌어내리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옵 1:2-4)

  우리는 미국이 지금 무리한 전쟁을 하고 있는 것에만 너무 관심이 치우쳐 있습니다. 그러나 거슬러 올라가서 후세인이 교만하지만 않았으면 저 전쟁은 안나도 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잘못했습니다. 내가 물러나겠습니다.’ 그랬으면 전쟁을 안 해도 되었단 말입니다. 왜 버티다가 전쟁이 나게 하느냐는 말입니다.
  원인은 따져보면 많습니다. 선택의 결과입니다. 얼마든지 피해를 안 낼 수 있었단 말입니다. 잘못된 선택을 한 사람들은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결과를 얻게 될 것입니다.
  앞으로 언젠가는 무고한 김선일을 죽인 저항 단체는 그런 선택을 한 결과로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인간은 어떤 행동을 하든지 반드시 결과라는 것을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셋째, 선택은 어떠한 방식으로 해야 하겠습니까?

  간디는 학생 시절에 성경을 진지하게 읽고 기독교로 개종할 것을 고려했었다고 그의 자서전에 쓰여져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가르침 속에 인도 사람들을 구별했던 카스트라는 계급제도에 대한 해결책이 있으리라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느 주일, 가까운 교회에 찾아가 예배를 드리고 목사님께 기독교인이 되는 것에 대해 묻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배당으로 들어서자 안내원은 그에게 그가 앉기 원하는 자리 내주기를 거부하였습니다. 그 때 간디는 만일 기독교인들에게도 계급의 상하가 있다면 자신은 그냥 힌두교인으로 남아 있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길로 그 다음부터는 교회에 안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나는 그리스도는 마음에 드는데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마음에 안 든다.’라고 말하면서  교회 다니는 것을 중단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간디는 너무 성급했습니다. 그는 좀 더 자세히 알아 봤어야 했습니다. 성경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통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전 12:13)




  간디는 예수 믿는 사람들 몇몇 사람들이 평등의 법을 안 지켰을 뿐인 것을 알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간디는 마치 그것을 전 세계 그리스도인들이 보편적으로 행하는 것이고, 그것이 교회의 제도인양 잘못 판단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잘못된 판단을 내리고, 잘못된 선택을 하고, 잘못된 정보에 의해서 자신이 예수님을 안 믿었던 것입니다. 그는 좀더 진지하게 살펴보고 선택해도 늦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매사를 자세히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매 순간 좋은 선택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음은 마르다가 예수님께, 그리고 예수님께서 마르다에게 하셨던 말씀이십니다.
  “저희가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촌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아래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가로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시나이까 저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 / 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눅 10:38-42)

  우리는 매 순간 ‘내가 지금 옳은 선택을 하고 있는가, 옳지 않은 선택을 하고 있는가’를 잘 분별해야 합니다.

  나무꾼들이 산 속으로 들어가 한 짐씩 나무를 해서 지게에 지고 돌아오는 길에 함정에 빠진 사람들을 발견했습니다. 자세히 보니 한 사람만 살았고 나머지는 다 죽은 것 같았습니다. 착한 나무꾼이 동료들에게 "보고만 있지 말고 구하자."고 했으나 동료들은 "우리도 힘들고 바쁜데 ..."라고 말하며 현장에서 떠났습니다. 착한 나무꾼은 목숨을 걸고 살아있는 한 사람을 구했는데 알고 보니 그 나라의 왕자였습니다. 왕자가 신하들과 사냥을 나왔다가 왕자를 죽이려는 함정에 빠졌던 것입니다. 왕이 이 '착한 나무꾼'에게 '큰 상'을 내려 잘 살았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좋은 선택, 선행의 선택을 얼마든지 할 필요가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전도자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네 식물을 물 위에 던지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전 11:1)

  다음은 사람이 기회 있을 때 행하지 않으면 나중에 후회하게 되는 것들입니다.
  “부모님께 효도 안 하는 선택을 하면 돌아가신 후에 후회하게 된다.”
  “젊을 때 공부 열심히 안 하는 선택을 하면 나이 든 후에 후회하게 된다.”
  “풍족할 때 저축 안 하는 선택을 하면 가난 할 때 후회하게 된다.”
  “봄에 씨 안 뿌리는 선택을 하게 되면 가을에 후회하게 된다.”
  “문단속 안 하는 선택을 하게 되면 도둑 맞고 후회하게 된다.”
  “평소에 말을 조심해서 안 하는 선택을 하게 되면 말실수를 한 후에 후회하게 된다.”
  “손님 잘 대접 안 하는 선택을 하게 되면 손님 돌아간 후에 후회하게 된다.”

  누군가가 아인슈타인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다고 합니다.
  “박사님은 세상에 다시 태어나면 무엇을 하고 싶으십니까?”
  그러자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합니다.
  “저는 제가 발견한 원자 에너지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를 폭발시키는 일에 사용 된 것에 대한 죄책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다시 태어나면 막노동꾼이 되고 싶습니다.”

  뮤지컬 남태평양의 원작자 제임스 미치너라는 사람은 1,925회라는 공연 기록에 의해 백악관으로부터 초청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초청을 정중하게 거절하였습니다. 약속이 겹쳐진 이유에서였습니다. 그는 이미 퀴크 메튜스라는 선생님에게 초청을 받은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은사와 약속한 것을 지키기 위해서 백악관 초청을 거절했던 것입니다.
  좋은 선택이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선택이 있고, 손해가 되는 선택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에게 이득이 된다고 해서 반드시 후회하지 않는 선택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현재는 과거의 성적표와 같습니다.
  ‘우리가 과거에 어떻게 살았는가?’ 그것은 ‘현재 우리에게 어떤 결과가 나타나 있는가?“를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살아가고 있는 방식은 훗날의 성적표와 같습니다. 결국 우리는 지금의 선택이 훗날을 결정할 것이고, 과거의 선택이 지금 현재를 결정짓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당신이 하루를 어떻게 살아가는가? 그 과정을 나에게 보여주십시오. 그러면 내가 당신의 미래를 전망해 드리리다.’’라고 말한 사람도 있습니다.

  다윗이 하루는 인구 조사를 실천해 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 조사가 하나님의 뜻은 아니었습니다. 다윗은 그 조사를 하나님의 지시에 의해서 모세처럼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군대가 얼마나 강성한가를 알아보고 싶은 교만함에 의해서 한 것입니다.

  결과로 그 조사를 행한 다윗에게 하나님께서 선견자 갓을 보내셔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다윗이 아침에 일어날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다윗의 선견자 된 선지자 갓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 가서 다윗에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네게 세가지를 보이노니 너는 그 중에서 하나를 택하라 내가 그것을 네게 행하리라 하셨다 하라 / 갓이 다윗에게 이르러 고하여 가로되 왕의 땅에 칠년 기근이 있을 것이니이까 혹시 왕이 왕의 대적에게 쫓겨 석달을 그 앞에서 도망하실 것이니이까 혹시 왕의 땅에 삼일동안 온역이 있을 것이니이까 왕은 생각하여 보고 나를 보내신 이에게 대답하게 하소서”(삼하 24:11-13)

  이 일 후, 다윗은 다음과 같이 여호와께 말씀을 드렸습니다.
  “다윗이 인구 수를 조사한 후에 그 마음에 자책하고 여호와께 아뢰되 내가 이 일을 행함으로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여호와여 이제 간구하옵나니 종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내가 심히 미련하게 행하였나이다 하니라 다윗이 갓에게 이르되 내가 곤경에 있도다 여호와께서는 긍휼이 크시니 우리가 여호와의 손에 빠지고 내가 사람의 손에 빠지지 않기를 원하노라 / 이에 여호와께서 그 아침부터 정하신 때까지 온역을 이스라엘에게 내리시니 단부터 브엘세바까지 백성의 죽은 자가 칠만인이라 / 천사가 예루살렘을 향하여 그 손을 들어 멸하려 하더니 여호와께서 이 재앙 내림을 뉘우치사 백성을 멸하는 천사에게 이르시되 족하다 이제는 네 손을 거두라 하시니 때에 여호와의 사자가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 곁에 있는지라 / 다윗이 백성을 치는 천사를 보고 곧 여호와께 아뢰어 가로되 나는 범죄하였고 악을 행하였삽거니와 이 양무리는 무엇을 행하였나이까 청컨대 주의 손으로 나와 내 아비의 집을 치소서 하니라”(삼하 24:10-25(대상 21:1-30))

  우리는 고난 때 선택한 일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기를 좋아합니다.
  “그 때 워낙 고난이 심해서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기록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고난 때 우리가 선택한 일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네 죄악이 네 입을 가르치나니 네가 간사한 자의 혀를 택하였구나”(욥 15:5)
  “보라 내가 너를 연단하였으나 은처럼 하지 아니하고 너를 고난의 풀무에서 택하였노라”(사 48:10)

  그러니까 사람은 고난 때 어떤 선택을 하는가를 보면 그 사람의 됨됨이를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세월 좋을 때, 환경 좋을 때, 여건 좋을 때 어떤 선택을 하느냐를 봐서는 그 사람의 참 됨됨이를 제대로 알 수 없습니다. 사람은 ‘정말 어려울 때 어떤 선택을 하느냐?’ 그 됨됨이를 보면 알 수 있다는 말입니다.
  사람은, ‘억울할 때 어떤 선택을 하느냐? 가난할 때 어떤 선택을 하느냐? 배고플 때 어떤 선택을 하느냐?  아주 극심한 고난 중에 어떤 선택을 하느냐?’를 보면 그 사람을 잘 파악 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어려울 때 선택한 것이 ‘바로 나’인 것입니다.
  ‘아, 그때 내가 상황이 어려워서 그랬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 그것이 ‘바로 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을 고난의 풀무에서 선택하신다는 것입니다.




  마틴 루터가 설교하는 교회에 전도사 한 분이 방문했습니다.
  그는 광고시간을 빌려 자신이 사역하던 빈민촌의 처참한 상황을 설명하고 그곳에 고아원 건립을 추진하고 있으니 도와달라고 호소했습니다.
  그 때 강단에 있던 루터가 급하게 자신의 사무실로 달려갔습니다. 예배시간 도중이었으므로 교인들은 의아하게 생각했습니다. 루터는 사제관에 달려가 책상 서랍을 열었습니다. 그 곳에는 루터가 받은 금메달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독일인이 받는 최고상인 요아킴이라는 메달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루터가 그 메달에게 외쳤다고 합니다.
  "요아킴, 네가 지금 여기서 잠자고 있을 때가 아니야!"
  루터는 강단으로 돌아와 평생의 영예인 요아킴 메달을 전도사의 손에 들려주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루터는 자신의 명예가 높아질 수 있도록 받은 금메달도 지금보다 더 가치 있는 일에 과감하게 투자하는 선택을 하였던 것입니다.

  ‘지옥은 하나님께서 보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한, 방종에 의한 선택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옥은 인간의 선택에 의해서 찾아가지는 곳이 지옥이지, 하나님께서 일부러 끌어다 넣는 곳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현재 고통스러운 일들을 겪으면서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잠언 기자를 통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미련하므로 자기 길을 굽게 하고 마음으로 여호와를 원망하느니라”(잠 19:3)

  하나님께서는 선택에 대한 책임을 아담에게 다음과 같이 물으셨습니다.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창 3:17)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선택한 책임을 당사자에게 물으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누가 뭐라고 해서 이랬습니다.’라는 논리가 안 통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통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라 지혜에 장성한 사람이 되라”(고전 14:20)

  그리고 사무엘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

  여호와께서는 외모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선택 능력을 보신다는 것입니다.

  넷째, 그러면 우리는 과거의 잘못된 선택으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하게 될 때, 그 수치의 절정을 어떻게 하면 잘 극복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과거의 잘못된 선택들로 인한 결과들을 오늘 맞이하면서 고통스러운 터널을 통과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어떻게 하면 잘 극복할 수 있겠느냐? 잘 견딜 수 있겠느냐?’라는 것입니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과거의 잘못된 선택으로 인한 결과가 눈앞에 다가왔을 때 선택하는 것들 중 한 가지가 한강과 아파트에서 뛰어내리는 것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막을 수 있겠습니까?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과거 잘못된 선택으로 말미암아 고통스러움들이 다가오니까 그 심리적인 압박감, 수치감들을 너무너무 견디기가 어려우니까 한강에 가서 투신하고, 아파트에서 뛰어내리고 있단 말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한강에다가 전경 몇 명 세워둔다고 해 가지고 이 문제가 해결이 나겠습니까? 그래도 그 사이를 피해서 뛰어 내렸잖습니까? 그 사이를 피해 뛰어내린 여청년을 살린다고 한 남청년이 뛰어들어갔다가 그  청년까지 죽었잖습니까?
  이것이 지금 거기에 안전요원 배치시켜놓는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냔 말입니다. 정신적인 문제를 해결해 줘야 할 것 아니겠습니까? 성경은 이점에 대해서 무어라고 말씀하고 계시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과거의 잘못된 선택의 결과를 오늘 맞이하면서 이 극심한 고난의 터널을 잘 참고 견디고 통과할 수 있겠습니까?

  그 해결책은,

  ① 회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고 예수님께서 여호수아와 사도 요한을 통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수아가 또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스스로 성결케 하라 여호와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 기사를 행하시리라”(수 3:5)
  “너는 일어나서 백성을 성결케 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스스로 성결케 하여 내일을 기다리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아 너의 중에 바친 물건이 있나니 네가 그 바친 물건을 너의 중에서 제하기 전에는 너의 대적을 당치 못하리라”(수 7:13)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계 2:5)

  그러므로 우리는 ‘현재 내가 당면한 수치스러움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과거에 내가 어떤 잘못된 선택을 했기에 오늘 이 지점에 도착하게 되었는가?’를 면밀하게 검토해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장 피해서 꿩 머리 숨기듯이 물 속으로, 아파트 위로 도망만 하지말고, 차 가지고 물 속으로 들어가지만 말고, 아파트에서 뛰어내리지만 말고, 농약 먹고 죽지만 말고, 그러지 말고, 도대체 어디서부터 문제가 잘못된 것인가를 점검해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② 성령님의 강력한 위로를 얻어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부르짖는 자들에게 수치를 당치 않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를 수치에서 건져내시는 분이십니다.
  “저희가 주께 부르짖어 구원을 얻고 주께 의뢰하여 수치를 당치 아니하였나이다”(시 22:5)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습니다. 얼마나 수치스러웠겠습니까. 그래서 그는 옛날처럼 물고기를 잡으러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러한 그를 다시 찾아가서 불러주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을 알고도 물고기를 잡으러 갔습니다. 사람은 수치스러우면 도망갑니다. 그러나 그렇게 과거의 실수가 현실 앞으로 다가와서 너무너무 수치스러워서 도망갔던 베드로가 마가 다락방에서 간절하게 기도드린 후 성령으로 충만해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과거의 자신의 잘못된 선택에 대한 결과를 눈앞에 보면서도 그 길로 하나님께 전적인 투신을 해서 수치심을 극복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후로 삼천 명을 회개시키는데 쓰임을 받고, 죽은 도르가를 살리는 일에 쓰임 받고,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일에 쓰임을 받고, 평범한 어부로 끝날 수밖에 없었던 그 인생을 위대한 사도로 마치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과거의 잘못된 선택의 결과를 성령님의 도움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얼마든지 회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시편 기자를 통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주를 바라는 자는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려니와 ...”(시 25:3)
  “내 영혼을 지켜 나를 구원하소서 내가 주께 피하오니 수치를 당치 말게 하소서”(시 25:20)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로 영영히 수치를 당케 마소서”(시 71:1)
  “네가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나를 바라는 자는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라”(사 49:23)

  물론 우리가 수치스러울 때 하나님에게 나아가도 어느 정도 일정기간 동안 수치감이 드는 것은 각오를 해야 합니다.
  이런 질문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제가 죄를 지어 죄책감이 너무 심하게 들 때 죄책감의 고통으로부터 극복하려면, 벗어나려면 어떻게 됩니까?”
  그러면 제가 주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제가 해결책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일정기간 동안 죄책감의 고통을 당해야 합니다. ‘아니, 죄책감 안 느끼는 방법은 없습니까?’ 그러면 그것도 안 당하겠다는 것입니까? 죄를 짓고 죄책감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습니까? 사람은 일단 죄를 지으면 일정기간 동안 죄책감의 고통을 당해야 합니다. 그리고 둘째, 용서받았다고 하는 확신이 올 때까지 회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손을 다쳤습니다. 그러면 일정기간 동안 아픔의 고통을 겪어야 됩니다.
  우리가 과거의 잘못된 선택을 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가장 먼저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둘째로, 일정기간 동안 수치의 고통을 당하게 되나, 성령님의 도움을 받아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품안으로 들어가면 하나님께서 그 수치에서 반드시 건져내 주시겠다는 약속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계 3:18)

  하나님 앞에 나오면 수치의 고통이 일정기간 동안은 감수를 해야 하나,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그 수치에서 우리를 건지셔서 명예로운 회복을 시켜주십니다.

  ③ 너무 민감해 하지 않는 것입니다.

  다음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다 나를 지탄 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바쁩니다. 사람들은 다 자기 문제로 힘들어합니다. 사람들이 ‘저 사람은 왜 저렇게 살아가고 있나?’라는 생각을 가지고 나를 쳐다보고 비난하고 있을 것 같지만, 그 사람들 한 분 한 분 다 바쁜 분들입니다. 그 분들도 저마다 자신의 고민들 하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만 있고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임이니라"(갈 6:4-5)

  오늘은 내일보다 하루 빠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과거의 잘못된 선택으로 인하여 고통스러울 때 ‘다른 사람들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를 다 욕하고 비난할 것이다.’라고 생각하지 말고 그 시간에 새 출발을 하는 것이 좋습니다.

  사람들은 60억 인구 중에 관계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대략 200명밖에 안됩니다. 결혼식을 해보십시오. 한 사람이 아무리 많은 사람들을 초청해도 그 관계성이 200명 내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알고 있는 사람들이 나를 다 욕해도 200명 안 넘어갑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것도 60억 중에 말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나를 비판한다.’ 세상 사람들 다 바쁘단 말입니다. 여유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너무 민감해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새 출발이 가능합니다.

  ④ 완전히 낮아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조카 롯을 데리고 다니다가 조카 롯 보는 앞에서 아내를 두 번이나 누이라고 속였습니다. 체면이 완전히 구겨진 것 아닙니까? 그리고 나니까 조카 롯과 그 종들이 아브라함을 얼마나 만만하게 봤는지, 아브라함의 재산에서 다 롯에게 준 것인데, 아브라함의 목자들과 조카 롯의 목자들이 다투었습니다.
  그럴 수가 없는 것입니다. 롯의 목자들은  ‘아니, 주인 어르신 목자하고 우리하고 어떻게 다투느냐?’ 그렇게 조용히 물러섰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윤리적으로 두 건을 크게 사고를 내는 것을 보더니 완전 존경심이 땅바닥에 떨어졌단 말입니다.
  그 후 아브라함이 어떤 처세를 했겠습니까?
  ‘뭐야, 이것들이 정말 나를 무시하네? 아니, 세상에 내가 살다 이렇게 무시당해 보기는 처음이네. 너희들 가지고 있는 것 다 내 놔. 이것 누가 준거야!’ 그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다음과 같이 반응을 하였습니다.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창 13:9)

  완전히 자기 자신을 낮추고 더 이상 아무 기대도 안 했다는 것입니다.
  ‘내가 이 판국에 누구에게 무엇을 따지겠느냐? 그냥 조용히 살겠다.’라고 마음을 먹었던 것입니다.




바디매오가 문제해결을 받은 이유
( 설교본문 마가복음 10:46~52 )
  그리고는 자기 자신이 과거에 잘못 선택한 결과로 낮아진 실추된 명예를 인간적으로 회복하려고 하지 않고, 그냥 낮아진 김에 더 낮아졌단 말입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그 후로 다시 아브라함을 높여 주셨습니다.

  ⑤ 재건의 노력을 하는 것입니다.

  ‘눈은 멀고 손은 가깝다.’는 말이 있습니다.

  얼마 전에 대구지방경찰청 기동대 1중대에서는 아주 특별한 지

기독교인터넷 방송설교
( Christian Internet Sermon )





               http://www.c3tv.com/
             http://www.cts.tv/
             http://www.cbs.co.kr/
                  위 홈페이지에 접속하시면 언제든지
                   설교내용을 들으실 수가 있습니다.

         금 우리의 문제는 기도는 많이 드린다고 드렸는데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간절성과 정성이 부족한 것입니다. 그런데 소경 바디매오 같은 사람은 기도를 드린 시간은 짧았지만 그 간절성이 오랫동안 기도를 드린 사람보다 더 강했던 것입니다. 그랬을 때 하나님 입장에서는 소경 바디매오의 기도응답 해주는 것을 외면 할 수가 없으시다는 것입니다.


CTS 기독교 TV 방송설교
( 케이블 방송 : CTS 기독교 TV )
   방  송:  전국케이블방송
   채  널:  CTS 기독교TV
   본방송:  매주(토) 오후 1:30 - 2시

교회 홈페이지
인터넷: http://www.mulga.org/
교회 소식과 설교내용을 접할수 있습니다.

주일 묵상 칼럼
지혜(3)
저질인 사람들의 술수에 끌려 들어가지 않으려면

  첫째, 저질의 사람들이 제안하는 사안이나 공격 등에 대하여 일단 즉시 감정적으로 반응하지 않고 침착하게, 충분히 생각한 후에, 기도로 성령님께 지혜를 충분하게 구한 후에 대처하는 것입니다(약 1:5).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성을 중건 할 때, 저질의 사람들의 공격으로부터 무척 많은 어려움들을 겪었습니다(느 6:1-9).
  그리고 바울 역시 사역 중 여러 저질의 사람들로부터 동일한 많은 어려움들을 겪었습니다.
  바울은 그 때 일을 떠올리면 디모데에게 다음과 같이 권면한 바가 있습니다.
  “구리 장색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보였으매 주께서 그 행한대로 저에게 갚으시리니 / 너도 저를 주의하라 저가 우리 말을 심히 대적하였느니라”(딤후 4:14-15)

  둘째, 저질의 사람들에게는 주로 강력한 스토커(stalker) 기질이 있다는 것을 알고 지혜롭게 대처하는 것입니다(느 2장, 4장).
  그들은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사람들이 자신을 찾아주지 않기 때문에 비정상적인 방법들을 선택합니다. 그들은 상대에 대하여 조그마한 불리한 소문만 감지를 하게 되더라도 그것을 만 배로 활용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마치 자신의 말 한 마디면 안 좋은 소문이라도 나게 할 것 같이 암시를 해가며, 상대를 자신의 페이스로 끌어들여 대화를 계속 이어나갈 수 있는 구실로 삼는 것입니다.
  다음 주에 계속 ...

전역 식이 있었다고 합니다.
  "신고합니다. 수경 이XX은 2004년 6월 25일부로 전역을 명 받았기에 이에 신고합니다."
  2004년 6월 25일로 전역하게 된 이 사람은 1988년 전투경찰로 입대한 이모(37)수경입니다. 그는 입대 16년만인 25일 아주 특별한 전역식을 가졌습니다.
  이 수경이 대구지방경찰청 기동대 1중대(현 608전경대의 전신)에 입대한 것은 21세의 나이였던 지난 1988년 7 월 7일입니다. 그러나 부대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그 해 12월 31일 탈영을 감행했습니다. 그는 2년여의 도피생활을 하던 이 수경은 친지들의 권고로 자수, 다시 서울지방경찰 청 제2기동대로 편입됐으나 또다시 며칠만에 재차 탈영을 감행해 2002년까지 무려 12년 간을 숨어 지내 왔습니다. 그러나 음지에서 남모르는 고통 속에 생활하던 그는 결혼까지 해 아이까지 두게 되자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야 하는데 호적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수경은 2002년 다시 한 번 자수, 맨 처음 근무했던 608 전경대에 배치되어 취사대원으로 근무를 하다가 이번에 무사히 전역을 했다는 것입니다.

  과거의 잘못된 선택을 한 사람들은 현재 주로 그 결과만을 놓고 한 숨만 쉬다가 시간을 다 보내는 경향들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들은 벌써 너무 앞서 갔더라. 내 친구들은 너무너무 앞서 갔더라. 누구누구는 벌써 많은 것들을 성취했더라. 나는 할 일이라곤 한강으로 가는 길밖에 없을 것 같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냥 그렇게 자신을 한탄하는 것으로, 날마다 눈을 감으나 뜨나, 자기 자신을 ‘이 못난 인간아, 한심한 인간아’ 하며 비난하는 것으로 시간을 다 보내고 있단 말입니다.

  느헤미야가 말했습니다.
  "후에 저희에게 이르기를 우리의 당한 곤경은 너희도 목도하는 바라 예루살렘이 황무하고 성문이 소화되었으니 자,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여 다시 수치를 받지 말자 ..."(느 2:17)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보라 내가 오늘날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 곧 내가 오늘날 너를 명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얻을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 / 그러나 네가 만일 마음을 돌이켜 듣지 아니하고 유혹을 받아서 다른 신들에게 절하고 그를 섬기면 /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선언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망할 것이라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얻을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치 못할 것이니라 /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서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며 또 그에게 부종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시니 여호와께서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하리라"(신 30:15-20)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복만 두신 것이 아니고, 저주도 두셨고, 생명만 두신 것이 아니고, 사망에 해당되는 것도 두셨다는 가르침입니다.
  그러니 ‘알아서, 스스로 좋은 것들을 선택하라’고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 말씀은, ‘선택의 결과에 따라서 우리의 미래가 달라질 것이다.’라는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지금부터라도 다시 우리 인생이 재건되는 노력을 행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현재 과거의 잘못된 선택의 결과들을 능히 극복해 내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바라겠습니다.

 

 

낙심, 좌절, 의욕상실감 등을 극복하려면

{마가복음 5:21~43}

 

1968년 87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난 헬렌 켈러 여사가 남기고 간 말입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낙심은 금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좋은 응답을 하시기 직전에 마귀가 정말로 사람이 실망할 수밖에 없는 강력한 낙심을 준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밤이 깊을수록 새벽이 가까웠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현재 우리 마음 속에 아주 강력한 낙심이 자리를 잡고 있으면 그것은 반대로 곧 좋은 일들이 일어날 징조라고 생각 할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하겠습니다.

  사람은 그 마음이 언제 낙심과, 좌절과, 의욕상실감 등을 일으키게 되겠습니까?

  ① 예수님을 믿다가 낙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믿는 사람들 가운데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하다가 실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 예수님을 믿는데 안 좋은 일들이 생겨지느냐?’
  ‘왜 예수님을 믿는 다른 사람들 하는 일들은 잘 되는데 나는 못 되느냐?’
  ‘왜 하나님께서는 악한 자들을 그냥 내버려두고만 보시느냐?’

  그러나 이 부분에 대하여 시편 기자는 다음과 같이 깨닫고 그 마음에 자유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나는 거의 실족할 뻔하였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하였음이로다 / 저희는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건강하며 / 타인과 같은 고난이 없고 타인과 같은 재앙도 없나니 / 그러므로 교만이 저희 목걸이요 강포가 저희의 입는 옷이며 / 살찜으로 저희 눈이 솟아나며 저희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지나며 / 저희는 능욕하며 악하게 압제하여 말하며 거만히 말하며 / ... /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이라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 하도다 / 내가 내 마음을 정히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 나는 종일 재앙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책을 보았도다 / ... 내가 어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내게 심히 곤란하더니 /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저희 결국을 내가 깨달았나이다”(시 73:2-17)

  또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믿지 않으나 자신보다 물질이 풍요로운 사람들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행악자들에 대해서까지도, 시편 기자를 통해서 그들 때문에 어떤 일을 하고 안 하고 등의 영향을 받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하지 말지어다 / 저희는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볼 것이며 푸른 채소 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시 37:1-2)

  그리고 또 한 가지는, 다른 사람들, 자신이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일들, 그리고 요청하지 않은 충고, 자신이 맡은 일들도 다 못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일에 관여하는 것도 금물임을 다음의 말씀들을 통해 좋지 않게 여기신다는 것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길로 지나다가 자기에게 상관없는 다툼을 간섭하는 자는 개 귀를 잡는 자와 같으니라”(잠 26:17)
  “다른 사람의 죄에 간섭지 말고 네 자신을 지켜 정결케 하라”(딤전 5:22)
  “너희 중에 누구든지 ...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벧전 4:15)

  ② 기도응답 기다리다가 응답이 빨리 안 오므로 낙심하는 것입니다.

  다니엘 같은 분은 21일 동안 절식을 하면서 기도를 드리다가 비로소 21일만에 응답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만일 다니엘이 20일 동안만 기도를 드리고 그만 포기를 하였다면 기도 응답을 못 받았을 것입니다.

  다음의 내용을 읽어보면 그 때의 상황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 때에 나 다니엘이 세 이레 동안을 슬퍼하며 / 세 이레가 차기까지 좋은 떡을 먹지 아니하며 고기와 포도주를 입에 넣지 아니하며 또 기름을 바르지 아니하니라 / ... / 한 손이 있어 나를 어루만지기로 내가 떨더니 그가 내 무릎과 손바닥이 땅에 닿게 일으키고 / 내게 이르되 은총을 크게 받은 사람 다니엘아 내가 네게 이르는 말을 깨닫고 일어서라 내가 네게 보내심을 받았느니라 그가 내게 이 말을 한 후에 내가 떨며 일어서매 / 그가 내게 이르되 다니엘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깨달으려 하여 네 하나님 앞에 스스로 겸비케 하기로 결심하던 첫 날부터 네 말이 들으신 바 되었으므로 내가 네 말로 인하여 왔느니라 / 그런데 바사국 군이 이십 일 일 동안 나를 막았으므로 내가 거기 바사국 왕들과 함께 머물러 있더니 군장 중 하나 미가엘이 와서 나를 도와주므로 / 이제 내가 말일에 네 백성의 당할 일을 네게 깨닫게 하러 왔노라 ...”(단 10:2-14)

  그러니까 다니엘이 하나님께 기도 드린 첫 날부터 그 내용을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천사에게 그 응답을 출발시키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사국 군, 마귀가 그 기도응답을 가지고 전달하러 가는 천사의 길을 막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미가엘의 도움을 받으므로 말미암아 마침내 다니엘에게 응답을 전달 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 응답이 빨리 안 오면 하나님에 대해서 굉장히 섭섭하게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많이 낙심하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우리가 기도의 응답을 받는 것에 장애를 받는 것은 마귀의 역사가 큰 효력을 미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기도를 드리다가 응답이 빨리 못 받으므로 낙심하는 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저희에게 비유로 하여 / 가라사대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관이 있는데 /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나 /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 주께서 또 가라사대 불의한 재판관의 말한 것을 들으라 /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눅 18:1-8)

  예수님께서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그 때 우리가 받게 되는 느낌이 바로 위와 같다고 예로 드신 것입니다.
  내용을 보면, 힘없는 과부 대 불의한 재판관, 그러니까 불의한 재판관은 과부의 소원을 안 들어주려고 하고 과부는 자신의 요구를 꼭 상달시키려 한다는 것입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기도 응답을 원하는 시기에 못 받게 되면 꼭 위와 같은 느낌이 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믿음을 가지고 기도를 간절하게 드리면 결국은 원하는 응답을 받게 될 것인데, 응답이 결국은 도착하고 말 것인데 대부분의 믿음 없는 사람들은 그만 중간에 포기를 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베스의 기도’라는 책의 내용을 보면, “나중에 우리가 천국에 가 보면 우리에게 출발된 기도 응답들이 우리가 중간에 기도를 포기함으로 말미암아 반송된 소포처럼, 반송된 우편물처럼 되돌아 가 쌓여 있을 것입니다.”라고 저자가 말했는데 꼭 그럴지는 모르나 상당히 일리는 있는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기도 응답이 원하는 때, 제 때 안 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 때는 기도를 더 간절하게, 더 세게 해야 합니다.

  바디매오는 예수님께 자신의 문제를 해결 받기 위해 나아갔을 때, 주변 사람들의 반응이 다음과 같았습니다.
  “무리가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더욱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지라”(마 20:31)

  그러자 바디매오는 다음과 같이 반응하여 마침내 응답을 받았습니다.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심히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막 10:48)

  하나님께서 야고보와 바울을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지니라”(약 5:13)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롬 12:12)

  ③ 선을 행하다가 결과가 좋지 않아 보일 때 낙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다음과 같이 권면하였습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 6:9)

  예수님께서 하루는 시몬의 바리새인 집에 초청을 받아서 가셨습니다(눅 7:36-50). 그 바리새인 시몬은 예수님이 좋아서 초청을 한 것이 아니라, 당시는 동네에서 유지 정도 되는 사람은 1년에 한 번 정도 그 지역 사람들을 초청해서 식사를 대접하는 관례 때문에 자신의 체면 유지를 위해 초청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모시기는 모셨는데, 예수님을 얼마나 예우를 안 했는지 ... 그 때는 샌들을 신고 다니던 때였기 때문에 일단 손님이 오면 그 집의 종을 통해 발도 씻겨 방으로 들여보내고, 머리에 향유도 뿌려 들여보내는 것이 예우였습니다.
  그런데 시몬은 예수님께 일체 그러한 예우를 안 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참 기분이 나쁘셨지 않겠습니까. 그 정도 되면 그냥 돌아 나와야 하는데, 그러한 집에 조금도 더 머무실 이유가 없는데 예수님께서는 그냥 참고 계셨습니다. 그 천대를 받아 가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식사 말미에 그 동네에서 유명하게 소문난 죄 많은 여인이 에수님을 찾아 그 집으로 들어 온 것입니다. 그러더니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머리카락으로 씻기고, 머리에 향유를 부었습니다.
  그러면 결과적으로 상황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그 시몬에게 바리새인 천대를 받아 손해를 보셨을 것 같지만, 그 이기적인 바리새인 시몬에게 불청객처럼 여김을 받은 것 같지만 사실상 예수님께서는 손해보신 것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그 자리에서 죄 많은 여인의 죄 용서 선포를 해 주셨지요. 그 여인과 교제를 나누셨고, 그리고 그 여인에 대한 교육도 끝내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정말 손해는 누가 손해를 보았느냐 하면 사실은 그 자리에서 그 바리새인 시몬의 나쁜 인격만 드러난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선을 행하다가 결과가 좋지 않아 보일 때 ‘내가 괜히 왔다.’ ‘내가 괜히 이 일을 시작했다.’라고 낙심을 하지말고 침착하게 인내를 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에머슨의 말처럼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이 있고, 잃는 것이 있으면 얻는 것이 있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④ 기대했던 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므로 낙심하는 것입니다.

  들어도 들어도 은혜가 되는 예화 중 하나는 루터와 그 아내에게 있었던 일입니다.
  루터가 얼마나 믿음이 좋은 분입니까. 그런데 그 분도 하루는 낙심하는 날이 있었단 말입니다.
  그 광경을 루터의 부인이 옆에서 가만히 보더니 하얀 소복을 입고 나타난 것입니다.
  루터가 “왜, 왜, 왜 ... 그러는 거요? 누가 죽은 거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의 아내가 “네, 초상이 나서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루터가 “아니, 누가 죽은 거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의 아내가 “하나님께서 돌아가셨어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루터가 야단을 쳤습니다. “아니, 이 사람이! 하나님께서 돌아가시다니 그 무슨 망령된 말을 하는 거요?”
  그러자 루터의 아내가 다음과 같이 말하자 루터가 크게 깨닫고 그 다음부터 절대 낙심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니, 저는 당신이 근심하고 있는 것을 보니 하나님께서 돌아가신 것 같아서요 ...”

  하나님께서 잠언 기자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소망이 더디 이루게 되면 그것이 마음을 상하게 하나니 소원이 이루는 것은 곧 생명나무니라”(잠 13:12)

  이렇게 사람은 여러 형태로 낙심들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회당장 야이로라고 하는 사람은 어떤 일로 낙심하게 되었겠습니까?

  “예수께서 배를 타시고 다시 저편으로 건너가시매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이거늘 이에 바닷가에 계시더니”[막 5:21]

  마가복음 5장 1절부터 20절까지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거라사인 땅에 가셔서 무덤 사이에 거처하며 지내던 군대 귀신 들린 자를 고쳐주시고 다시 건너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어도 절대 불필요한 것을 선택한 일이 없으시지만, 장소도 불필요하게 선택하신 일이 없으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바다 위를 걸어다니지만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배를 타신 것처럼 첨단 장비를 잘 활용할수록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좀 더 효율적으로 잘 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발견된 진리, 곧 과학을 활용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도 과학, 발견된 진리를 잘 활용하는 것이 현명한 사람이지, ‘나는 신앙으로 살 거야’ 그러면서 아직도 타자기를 고수하면 그것은 시대에 뒤떨어 진 것입니다.
  발견된 진리를 잘 사용 할 줄 알아야 현명한 사람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닷가에 계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 뵈려면 어느 정도의 거리가, 간격이 지금 떨어져 있는가? 우리가 최선을 다해서 달려가면 언제나 만날 수 있는 거리에 예수님은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멀리 계시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너무 가까이 계시지만 도 않습니다.
  우리가 최선을 다해서 전심을 다 해서 찾고 찾으면 만나 뵐 수 있는 거리 만큼에 계십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편히 누워 가지고 ‘좀 가까이 오셔서 앉으세요.’ 그런 정도의 거리에도 계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달려가도 못 만나는 거리, 그런 거리에도 계시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정중하게 예의를 갖추어서 최선을 다해서 달려가면 언제나 만나주실 수 있는 거리에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냥 ‘터-억’ 편안하게, 꼭 종 부리듯이 만나려고 하는 그런 태도를 가지고 만나 뵈려 하다가는 항상 간격과 거리가 조금 못 미치는 경향이 있습니다.

  “회당장 중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 아래 엎드리어”[막 5:22]

  최근에 후세인이 법정에 섰습니다.
  그 장면을 보고, 미국의 유명한 바디랭귀지(body language) 심리학자 패티 우드(Patti Wood)가 후세인의 바디랭귀지에 대한 분석을 지면을 통해 내놓았습니다.
  그는, 후세인이 손가락으로 재판관을 가리켰는데 그것은 "네가 감히 한 나라의 대통령에게 그런 식으로 말하느냐? 나는 너를 죽이고 싶다."라는 뜻의 해석을 내 놓았습니다.

  그리고 후세인은 펜으로 하늘을 가리키는 행위를 했는데 그것은 “내가 아직도 이라크의 권력자다.”라는 주장을 하고 싶은 심리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뚫어지게 상대방을 바라보는 것은 상대방을 당황하게 하려는 고도의 훈련된 바디랭귀지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때때로 한 쪽 어깨를 낮추는 것은 자신이 패배자임을 인정하는 바디랭귀지라는 것이고, 가끔 다리를 꼬고 앉아서 그 위에 손을 얹은 모습은 현재 수감된 자신을 보호하고 싶다는 의미로 분석했습니다.

  지금 회당장 야이로 라고 하는 사람이 예수님 발 앞에 완전히 엎드렸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철저하게 자기 절망을 체험한 사람만이 취할 수 있는 태도입니다. 절망 안 한 사람은 이렇게 못 엎드립니다.
  어떤 사람은 의자에 앉아서 책상다리하고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하나님 앞에 건방지기보다는 아직도 절망해 본 경험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사람이 얼마나 어렵고 답답하면 당시 청년 예수 발 앞에 엎드리게 되었겠습니까?
  도대체 이 사람은 무슨 고통 때문에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렸겠습니까?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 발 앞에 와서 엎드리고 싶으면 어떻게 하면 되느냐? 가상대면현실을 하면 됩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내 앞에 계시다.’라고 생각하고 무릎 꿇고 앉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 앉아 계시고 우리가 1대 1로 대면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나 많은 분들이 기도를 하는데 집중력이 산만합니다. 아주 멀리 계신 예수님 같이 생각이 들기도 하고, 이 생각 저 생각하다가 그냥 한 마디씩 산발적으로 하기도 하고 그런단 말입니다.

  야고보의 권면입니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약 5:15)

  믿음의 기도는 1:1 대면기도를 믿음의 기도라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어딘가에 계시겠지?’라고 기도를 드리는 것은 믿음의 기도는 아닙니다.
  산에 가서 간절하게 ‘주여!’라고 부르짖는 것은 참 좋습니다. 내용만 있다면 말입니다. 그러나 ‘어딘가에 계시겠지?’ 그러면서 ‘주여’라고 부르짖는 것은 안 됩니다.
  우리가 꼭 아들을 군대에 보낼 때, 입영 기차 떠나면 ‘어디 있겠지’라고 생각하며 대충 짐작해서 손을 흔드는데, 그것 가지고는 안 된단 말입니다.
  정확하게 예수님을 바라보고 1:1로 바라보고 아이터치를 하고 그리고 나의 요구를 간절하게 아뢰는 것이 믿음의 기도라고 합니다.
  ‘예수님 발아래 와서 엎드려서...’
  얼마나 간절했으면 회당장 야이로도 체면이 있는 사람인데, 주변 사람들 아랑곳하지 않고 전혀 의식하지 않고 예수님의 발 앞에 와서 엎드릴 수가 있었습니까? 예수님은 목수 출신인데 말입니다 ...
  그러니까 이렇게 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함께 가자”고 하며 야이로와 동행을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야이로는 3일만에 응답 받은 것이 아닙니다. 당일 응답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를 시작하면 스스로 견적을 냅니다. ‘한 15일 걸리려나?’ ‘두 달은 족히 걸릴까?’ 아닙니다. 당일 날 응답 받는 방법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려면 이렇게 체면 안 가리고 예수님께 와서 철저하게 낮아져야 합니다.
  ‘응답 주시면 좋고, 안 주시면 어쩔 수 없고 ... ’ 그러면 시간이 좀 많이 걸립니다.
  우리는 현재 처리 받아야 할 문제들이 너무 많이 산적해 있습니다.
  원래 하나님은 오래 기다리게 하시는 분이시겠습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태도에 문제가 있기 때문에 간절성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지금 응답이 뒤로 밀려져 가고 보류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인정해야 합니다.
  ‘범사에 때와 기한이 있느니라’라고 생각하며, 자꾸 응답 받는 것을 뒤로 미뤄 나가는 것은 마치 38년 된 병자가 ‘언젠가는 낫겠지?’ 하며 응답 받는 것을 뒤로 넘기는 율법의식과 같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발 앞에 우리 자신을 낮추어서 너무너무 간절하게 아뢰면 응답 받는 것은 얼마든지 앞당겨질 수 있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많이 간구하여 가로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얻어 살게 하소서 하거늘”[막 5:23]

  많이 무엇이라고 간구 했겠습니까?
  “제 딸을 살려주세요 ... 살려주세요 ... ”라고 같은 말을 계속 반복했겠습니까?
  이 기도는 철저하게 회개를 했다고 이해를 해야 합니다.
  ‘내가 옛날에 교만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러한 상황을 맞이하고 보니까 내가 지금 그러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마귀는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해도 쓰다가 마지막으로 안 될 경우, 좌절이란 도구를 사용합니다.

  1980년 2월 어느 날 월스트리트 저널에 다음과 같은 광고가 실렸습니다.
  “만일 당신이 현재 좌절감에 사로잡혀 있다면 다음 내용 중에 해당되는 사나이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초등학교를 중퇴했습니다. 그는 시골에서 잡화점을 경영하다 파산했습니다. 그는 그 빚을 갚는 데만 15년이나 걸렸습니다. 그의 결혼생활은 매우 불행했습니다. 그는 하원의원 선거에서 두 번이나 낙선했습니다. 상원의원 선거에서도 두 번이나 낙선했습니다. 그는 A. 링컨이었습니다.”

  시편 기자가 고백했습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 50:15)

  하나님께서는 어떤 면이 가장 장점이시겠습니까?
  사람은 무엇이 있어야 동행을 해 줍니다. 내가 뭘 가져야 동행을 해 준단 말입니다. 뭐 좀 있는 사람이 전화를 해야 전화도 받아주지, 없는 사람이 전화를 하면 전화도 안 받아준단 말입니다. 뭐가 좀 있는 사람이 만나자고 해야 만나주지, 완전 부도난 사람이 만나자고 하면 피해 다닌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없는 사람이, 부도난 사람이, 어려움에 처한 사람이 만나달라고 하면 그렇게 잘 만나 주신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특징입니다.
  지금 딸 죽게 된 이 사람이 예수님께 와서 만나 뵙자고 하니까, ‘너 과거에 나 만날 만큼의 행동했어? 너의 인간성을 한 번 뒤돌아봤어?’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시고 ‘함께 가자’ 그러셨단 말입니다.
  과거를 묻지 않으시는 하나님, 현재의 자격을 묻지 않으시고, 현재 자신에게 어려움을 가지고 나왔다는 그 자체만을 가지고도 긍휼의 눈으로 바라보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시편 기자의 고백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환난 날에 피 할 수 있는 곳임을 알 수 있습니다.
  “주는 나의 산성이시며 나의 환난 날에 피난처심이니이다”(시 59:16)
  “나의 환난 날에 내가 주께 부르짖으리니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리이다”(시 86:7)
  “저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응답하리라 저희 환난 때에 내가 저와 함께하여 저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시 91:15)

  “이에 그와 함께 가실새 큰 무리가 따라가며 에워싸 밀더라”[막 5:24]

  만일 우리가 현재 좌절감을 심하게 겪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그 문제를 내 힘으로 해결하려고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 힘으로 안 되는 일은 도움을 요청해서 받는 것이 현명하고 지혜로운 선택입니다. 어차피 내 힘으로 안 되는 것 ... 내 힘으로 해결이 되는 일은 내가 하면 됩니다. 그러나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은 빨리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현명하다는 말입니다. 전문가에게 요청을 하든지, 하나님에게 도움을 요청하든지, 요청하는 것이 현명한 것이지, 내가 붙잡고 있는 것은 문제 해결에 전혀 도움이 안 된다는 말입니다.
  거기다가 내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내가 붙잡고 낙심하고 좌절까지 하면 이것은 더 미련한 일이라는 말입니다.
  그런 관점으로 볼 때 회당장 야이로는 매우 현명한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일과 자기가 할 수 없는 일을 구분을 지었습니다.
  그는 ‘아, 내 딸이 죽어 가는데 이것은 내 힘으로 해결할 수가 없구나!’라고 판단하고, 예수님 앞에 나와 무릎을 꿇고 사정을 아뢰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무슨 일이든지 하다가 보면 꼭 돌발적인 장애가 발생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한 여자가 있어 /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섞여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 함일러라 /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말씀하시되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시니 / 제자들이 여짜오되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 하되 / 예수께서 이 일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 보시니 / 여자가 제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짜온대 / 예수께서 가라사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막 5:25-34]

  지금 회당장 야이로는 예수님을 간신히 설득해서 당시 교통 수단도 좋지 않은데, 모시고 가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이 그 중간에 나타난 것입니다. 그 여인이 만일 40세부터 아팠다고 하면 지금 그녀는 52세입니다.
  각자의 입장을 고려하여 보면, 지금 회당장 야이로도 급하지만, 이 12년 동안 앓았던 이 여인도 매우 급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 때 그 장소에서 예수님을 놓치면 이 여인도 다시는 기회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녀는 그 무리, 군중들, 그 힘이 센 남정네들을 밀어 가면서 간신히 예수님의 뒤로 가서 예수님의 옷을 잡았는데, 그냥 옷을 잡은 것과의 차이는, 믿음으로 잡았다는 것입니다.
  그 순간 병이 낫아 버렸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당시 상황이 급하니까 회당장 야이로의 사정을 생각한다면 속으로만 ‘아, 여인이 나를 잡았구나! 그래서 병이 나았구나!’ 하시고 그냥 가시면 되는데, 멈추어 서셨습니다. 그리고는 그 여인을 찾으시는 것입니다.
  ‘누가 내 옷을 잡았느냐?’ 그러니까 제자들이 옆에 있다가 성격 급한 제자가 한 마디 합니다.
  ‘이렇게 사람이 많은데, 지금 누가 잡았느냐고 물어보시는 것입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단호하십니다. ‘아니다. 내 옷을 잡았느니라. 믿음으로 ...’ 그랬더니 이 여인이 나타났단 말입니다.
  그 때 선언을 해 주셨습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그 여인이야 경사가 났습니다. 문제는 옆에 있는 회당장 야이로입니다.
  아니, 지금 시속 120Km로 달려가도 딸이 죽을 판인데, 아, 이 여인 때문에 정체가 되어 가지고, 안 그래도 지금 자기 딸의 호흡이 가빠서 사경을 헤매는 것을 보고 왔는데, 여기서 또 거리에서 멈춰서니까 얼마나 답답했겠느냐 말입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회당장 야이로는 마침내 다음과 같은 통보를 받게 되고 말았습니다.

  “아직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가로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막 5:35]

  아직도 예수님의 말씀이 안 끝났습니다. 그런데 회당장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소식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이 말은 “빨리 오셔서 장례절차나 진행시켜 주세요.”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응답을 주시기 직전에 마귀는 항상 강력한 낙심을 줍니다. 그래서 ‘아, 기도 그만할까? 예수님 그만 믿을까? 선한 일을 하던 것 중단해 버릴까? 두려운데 이 일은 포기해 버릴까? 어디로 도망가 버릴까?’라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왜 자살을 하겠습니까?
  자살은 의도적으로 자신을 살해하는 것이란 말입니다. 죽고 싶은 본능과, 죽이고 싶은 본능과, 도망가고 싶은 본능, 세 가지를 다 충족시킬 수 있는 것이 자살이란 말입니다.
  거기다가 문제 해결, 사람이 절벽까지 도망을 가면 마지막에 뛰어내리기도 하는 것처럼 자살을 마지막 도피처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단 말입니다.
  지금 딸이 죽었다고 하니까, 회당장은 ‘올 것이 오고야 말았구나! 이제 끝났구나!’ 라고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아니, 그 사람들은 집에서 기다리면 되지, 뭘 쫓아와서까지 친절하게 알려주느냔 말입니다.
  ‘죽었다는 것’을 꼭 쫓아와서 알려주어야 할 일입니까? 어차피 회당장 야이로가 예수님을 모시고 가면 기다렸다가 얘기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
  우리가 정말로 조심해야 할 것은, 왜 다른 사람이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소식은 안 알려주고, 왜 다른 사람이 낙담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렇게 적극적으로 알려주는 것입니까?
  다른 사람이 들어서 낙심하고, 좌절하고, 의욕을 상실할 수밖에 없는 소식들은 왜 그렇게 적극적으로 알려줍니까? 그것은 누가 하는 짓입니까? 성령께서 시키시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 생각을 누가 주는 것이겠습니까? 들어봐서 마음의 낙심이 되는 것은 누가 보낸 이 메일이겠습니까?
  왜 그렇게 낙심되는 소식을 전달해 주는 사람들을 못 끊는 것입니까? 우리에게 낙심되는 소식을 계속 제공하는 사람들은 성령께 쓰임 받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단절해도 절대 손해보지 않습니다. 그 소식 못 들어도 하나도 불편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자신에게 나쁜 소식 전해주는 사람들에게 중독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속습니다. 마치 저 사람이 나에게 좋은 정보를 주는 것처럼, 나를 도와주는 것처럼 ... 아닙니다. 사실은 쓰레기를 부어주는 것입니다. 나 망하라고 말입니다. 사실은 나쁜 세균을 부어 주는 것입니다. 나 좌절하라고 ...
  뭘 와서 딸 죽은 것을 적극적으로 알려줍니까? 기다리고 있지...

  보아 전쟁(1899-1902) 중에 한 사람이 아주 특이한 죄명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죄명은 ‘동료 병사들을 낙담시킨 죄’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한 일은 군인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적이 얼마나 강한가’ ‘왜 우리는 적을 방어하기 어려운가’ 또 ‘이 도시는 필경 점령될 거라’며 여러 말들을 떠벌리고 다녔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동료 병사들을 낙담시키는 전문적인 사람으로 돌아다녔는데 나중에 전쟁 후에 그는 처벌을 받았습니다. 죄명은 ‘동료 병사들을 낙담시킨 죄’였습니다.

  절대로 우리가 생각과 입을 가지고 다른 사람 낙담과 좌절시키는데 사용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을 희망을 주고, 용기를 주고, 다시 일어설 수 있게 하는 일에 쓰임에게 받아야 합니다.
  그런 사람들 있습니다. “말할까? 에이, 안 해야지!” 그 말을 들은 사람 그 때부터 궁금해서 못 삽니다. 그러면 “말 해봐” 그럽니다. 그러면 “아이, 안 한다니까!”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면 처음부터 하지 말았어야지, 왜 운을 띄어놓고 ... 아주 몹쓸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그러십시오. “에이, 말하지 말까?” 그러면 우리는 “하지마! 하나도 안 궁금해!” 그러면 자기가 답답해서 합니다.

  “딸이 죽었습니다.”라는 말은, “사업이 부도났습니다.” “관계가 끝났습니다.”라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믿음과 응답과의 사이에는 언제나 ‘장애물’이라는 것이 존재합니다.
  그런데 야이로의 집에서 온 사람들의 말을 듣고 예수님의 반응은 어떠하셨습니까?
  “아이구, 내가 좀 늦었구나 ... ”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다음절에 보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막 5:36]

  이제 회당장 야이로는 둘 중에 하나를 선택을 해야 합니다.
  자기 종의 “딸이 죽었으니까. 모시고 오시지 마십시오.”라는 말을 선택하든지,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선택하든지 말입니다.
  회당장 야이로는 예수님 말씀을 선택했습니다.
  회당장 야이로가 무슨 두려움을 가졌겠습니까? 그는 직책 상실의 위기, 자신이 사랑하는 딸과 이별의 위기 등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그에게 들려진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는 말씀은 레마 메시지였습니다.
  백부장에게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라는 레마 메시지가 들렸습니다(마 8:13).
  베드로에게 “오라”는 레마 메시지가 들렸습니다(마 14:29).
  빌립에게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는 레마 메시지가 들렸습니다(마 14:16 ; 막 6:37 ; 눅 9:13).

  하나님께서 히브리서 기자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 10:38)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는 말은,
  “너, 나에게 네 딸 고쳐달라고 위임한 거 맞느냐?”라는 뜻입니다.
  “위임한 것이 맞으면 계속 위임하라”는 뜻과 같습니다.
  “계속 맡기라”는 뜻입니다.
  “너의 머리로 계산하지 말고, 환경을 초월하여 역사 하실 수 있는 나에게 문제를 맡기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저희가 아침에 지나갈 때에 무화과나무가 뿌리로부터 마른 것을 보고 / 베드로가 생각이 나서 여짜오되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 / 예수께서 대답하여 저희에게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 11:20-24)

  예수님께서 어려서부터 간질 걸리고 벙어리 되고 귀머거리 된 아들을 둔 아버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막 9:23)

  성경은 우리가 문제를 계속해서 하나님께 맡기고 믿을 것을 가르치고 계십니다.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시 37:5)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잠 16:3)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롬 12:19)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영히 허락지 아니하시리로다”(시 55:22)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벧전 5:7)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문제를 맡기면, 위임하면 정확하게 처리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문제를 붙들고 예수님과 씨름을 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놓아라’ ‘못 놓습니다’ ‘왜 못 놓느냐?’ ‘처리 안 해 주실까 봐요?’ ‘그러면 네가 알아서 처리해라.’ ‘그것은 곤란합니다’ ‘그러면 놓아라’ ‘못 놓습니다.’ ‘왜 못 놓느냐?’ ‘처리 안 해주실 까 봐요.’ ‘그러면 네가 알아서 처리해라’ ‘그것도 곤란합니다. 저는 실력이 없습니다.’ ‘그러면 너는 그렇게 살다가 죽어라’
  그러고는 예수님께서 우리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하신 단 말입니다.
  우리가 지금 그렇게 우리 문제를 쥐고 못 놓고 있단 말입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 외에 아무도 따라옴을 허치 아니하시고”[막 5:37]

  제자들이 왜 안 따라가면 안 되었느냐 하면, 그 때 안 따라갔으면 기록이 안 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베드로, 야고보, 요한 긍정적인 세 사람들만 데리고 가셨습니다.
  부정적인 사람들이 가서 한 마디씩 하면 그것 다 해명해야 하고 시간이 많이 걸리기 때문에 부정적인 사람들은 안 데리고 가셨습니다.

  “회당장의 집에 함께 가사 훤화함과 사람들의 울며 심히 통곡함을 보시고”[막 5:38]

  인간은 언제 기대를 포기를 하느냐 하면,
  인간으로 이해 할 수 있는 한계 범위를 넘으면 포기를 합니다.
  그러니까 ‘자신의 딸이 살아있다.’라는 판단이 들 때는 ‘예수님을 모시고 가면 치료가 될 것이다.’라고 믿었지만, ‘죽었다’라는 얘기를 들었을 때는 ‘이제는 예수님을 모시고 가 봤자 소용이 없을 것이다.’라는 판단이 들었을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인간의 믿음은 어디까지인가 하면, 인간적인 이해가 가능한 순간까지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의 믿음을 어느 정도로 요구하시느냐 하면 우리가 인간적인 계산으로 계산이 되는 한계이상까지를 믿기 원하신단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디까지 믿느냐 하면 내 계산으로 예측이 가능한 범위까지만 믿고 그 한계를 넘으면 안 믿으려고 합니다. 오히려 믿었던 것도 취소를 하려고 한단 말입니다. 믿었던 것도 낙심으로 인하여 좌절로 인하여 의욕을 상실한 그대로 반환을 하려 한단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상황에서 두려워 말고 계속 믿으라는 것입니다. 더 많은 믿음을 요구하셨습니다.

  가나안 혼인 잔치 집에서 포도주가 떨어졌을 때, 예수님 어머니가 하셨던 말씀입니다.
  “그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요 2:5)

  빈들에서 오병 이어의 기적이 일어날 때, 바다에서 바다 위를 걷던 베드로, 이것은 전부 인간의 이해의 한계를 뛰어넘은 것입니다.

  미국의 어떤 농부가 금을 캐겠다는 야망을 품고 모든 농토를 팔아 금광을 매입했습니다. 농부는 그 금광에 매달려 모든 물질과 노동과 시간과 지혜를 쏟아 부었지만 금맥을 찾지 못했습니다.
  마침내 파산할 지경에 이르자 그는 하는 수 없이 그 광산을 다른 사람에게 싸게 팔아 버렸습니다. 그런데 집에서 쉬고 있는데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그 광산을 인수한 사람이 그 후로 10m 를 더 파고 들어가다가 금광을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농부는 큰 충격을 받았으나 그 일을 교훈 삼아 다시 일어섰습니다.
  그는 그 후 세일즈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고객을 만날 때마다, 언제나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자신이 광산을 헐값으로 판 때를 떠올렸습니다. 그리고 그 때마다 ‘1m만 더 파고 들어가자’라는 마음으로 적극적으로  사람들에게 매어 달려 아주 훌륭한 세일즈맨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들어가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훤화하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 저희가 비웃더라 예수께서 저희를 다 내어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을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사”[막 5:39-40]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예측하는 방향으로는 가능하면 역사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차라리 우리는 아무 예측도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 ”(렘 33:3)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 ...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보이리라”(렘 33:3)

  하나님께서는 주로 우리가 예측 못한 쪽으로 응답을 하신다는 말입니다.

  중국에는 '모소'라는 대나무가 있다고 합니다.
  그 대나무는 산이나 밭에 심어놓아도 5년 동안은 땅 밖으로 전혀 솟아오르지 않고 땅속에서 뿌리만 사방으로 퍼져나갈 뿐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러다가 5년이 지난 다음 해부터는 하루에 한 자씩 무성하게 자라는데 불과 6주만에 15미터 이상 키가 자란다고 합니다.

  기도 응답이라는 것이 거의 흡사합니다.
  나사로가 무덤 안에 들어가 있을 때, 예수님께서 ‘그를 어디다가 두었느냐?’라고 하시니까,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됩니다. 썩어서 냄새가 납니다.’그랬더니, 예수님께서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그리고는 ‘나사로야 나오너라’ 하고 부르시니 나사로가 걸어 나왔단 말입니다.

  “그 중 어떤 이는 말하되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 /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통분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 예수께서 가라사대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가로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신대 /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요 11:37-44)

  “그 아이의 손을 잡고 가라사대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심이라 /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나이 열 두 살이라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막 5:41-42]

  잠시 전에 열두 해 동안 고통을 당하던 여성을 기억하십니까?
  그녀는 12년 동안을 고통 당했습니다(막 5:25-34).
  그런데 그 동안 회당장 야이로는 12년 동안 딸과 함께 행복하게 지냈었습니다.
  그러나 고난은 순번제입니다. 딸과 함께 12년 동안 행복했는데 그 딸이 이제 죽었다는 말입니다. 어제까지 다른 사람의 고난이 오늘 나의 고난이 된 것입니다.

  욥의 친구 엘리바스가 욥에게 한 권면입니다.
  “인생은 고난을 위하여 났나니 불티가 위로 날음 같으니라”(욥 5:7)

  그러나 열두 해 동안 고통 받던 여인은 어제까지의 고난이 오늘 행복으로 전환되었단 말입니다.
  오늘의 고난, 이 고난이 나에게 영원히 계속되지 않습니다.

  유태인의 지혜를 말해주는 <미드라쉬>라는 책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다윗 왕이 보석 세공인을 불러 명령을 내렸답니다.
  "짐을 위해 반지를 만들고 그 반지에 글귀를 하나 새겨 넣어라. 그 내용은, 내가 승리했을 때 기쁨에 취해 자만하지 않도록, 또한 동시에 절망에 빠지지 않도록, 또한 동시에 절망에 빠져 있을 때 수렁에서 건져줄 수 있는 그런 글귀여야 하느니라"
  그는 왕의 명령대로 아름다운 반지를 하나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적당한 글귀가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고민을 하다가 그는 지혜로 소문난 솔로몬 왕자를 찾아갔습니다.
  "왕의 황홀한 기쁨을 절제해 주고 동시에 그가 낙심했을 때 격려를 줄 수 있는 말이 무엇일까요?"
  솔로몬이 대답했답니다. "이렇게 쓰시면 됩니다. <이것 또한 곧 지나가리라> 왕께서 승리의 순간에 그 글을 보시면 자만심을 가라앉히게 될 것이고, 절망의 순간에 그것을 보신다면 곧 용기를 얻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저희를 많이 경계하시고 이에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라”[막 5:43]

  예수님께서 그 일을 왜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시기를 원하셨느냐 하면, 죽은 사람을 살렸다고 괜히 잘못 소문이 나면 죽은 사람들 살려달라고 다 쫓아올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그런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야! 나오너라’라고 이름을 호명하신 이유는 그냥 ‘나오라’고 하면 그 주변에 죽은 사람들이 ‘다 나올까봐’ 그러셨다는 것입니다.

  낙심과 좌절과 의욕상실감을 극복하려면,

  ① 감사하는 생각을 늘 유지해야 합니다.

  한 사람이 파선을 당하여 무인도에 도착하였습니다.
  간신히 원두막을 한 채 지어 놓은 후 먹을 것을 구해 가지고 가보니 원두막에 불이 났습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이 절망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나는 도무지 안 돼! 되는 일이 없어!”
  그런데 잠시 후에 그 불에 의한 연기를 보고 구조선이 왔더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좌절과 절망 속에서도 자꾸만 감사하는 생각을 안 하고 원망하면 안 됩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8)

  ② 삶의 분명한 목표가 있어야 합니다.

  다음과 같은 말이 있습니다.
  “한은 복수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소원을 이룸으로 풀 수 있는 것이다”

  유대인 강제 수용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빅터 프랭클에게 한 수형자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꿈에 어떤 사람이 나에게 2차 세계 대전은 1945년 3월 30일에 끝난다고 했어!”
  그러면서 그 사람이 3월 30일을 고대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날 아무 일도 안 일어났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3월 30일, 발진티푸스로 사망하였다고 합니다.
  사람은 희망이 사라지면 면역체계가 약해져서, 저항력이 약해져 의학적으로는 죽기 쉽다는 것입니다. 낙심, 좌절을 그대로 두면 명이 단축됩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분명한 목표, 분명한 희망을 가져야 합니다.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잠 29:18)

  ③ 사랑하는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은 사랑하는 대상을 머릿속으로 자꾸 떠올려야 조금이라도 더 오래 살지, 미운 대상을 자꾸 떠올리면 아드레날린 과다 방출로 빨리 죽습니다.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전 4:8)

  ④ 하나님의 말씀을 강하게 붙들고 믿어야 합니다.

  오늘 회당장 야이로가 어떻게 문제 해결을 받게 되었습니까?

  첫째, 예수님께 정면 돌파를 시도했습니다.
  그는 예수님 발 앞에 나아가 엎드렸습니다.

  둘째, 간절하게 부르짖었습니다.
  도대체 우리는 무슨 체면 차릴 것이 많아서 그렇게 간절하게 구하지 않느냐 말입니다.

  셋째, 장애물을 긍정적으로 해석했습니다.
  야이로는 ‘혈루병 여인이 낫는 것을 보니까 내 딸도 낫겠구나!’라고 해석을 했어야 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해석하면, ‘저 여인 때문에 내 딸이 죽었구나!’ 또는 ‘다른 사람들은 다 기도 응답을 받는데 나만 못 받는구나’라고 해석을 하면 안 됩니다. 그것은 부정적인 해석이기 때문입니다.
  절대 긍정적인 해석을 해야 합니다.

  넷째, 믿음을 포기하고 싶을 때 인내했습니다.
  끝에 가보면 회당장 야이로에게 예수님께서 칭찬 안 해 주셨습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라는 선언이 회당장 야이로에게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간신히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간신히 믿은 것도 믿음은 믿음입니다. 겨자씨 만한 믿음도 믿음은 믿음이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을 포기하고 싶은 그 순간에도 절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견디면 우리의 문제가 능히 해결되어질 줄 믿습니다.

 

실추되어진 명예하락을 극복하려면

{잠언 22:1}

 

이번 달 들어서 죽게 된 유명한 미국 배우 한 사람이 생전 인터뷰 중에 말한 내용입니다. 그는 자신이 축적한 부로 아들 하나는 마약 중독자가 되었고, 딸은 자살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자녀들이 부모로부터 진정한 명예로움을 물려받게 되면 오히려 고마워합니다.
  ‘부자 3대 가지 않는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특별히 정상적이지 못한 부, 여러 편법들로 만들어진 부, 그러한 것들을 자녀들에게 남겨주고 가면 자녀들이 잘 될 것 같지만, 사실은 나중에 오히려 부모를 더 원망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누구나 명예를 좋아합니다. 중요하게 여김 받는 것을 싫어하는 인간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지금보다 더 명예로워지려면 언젠가부터 명예로운 선택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어떤 사람도 태어나서 명예로운 선택만 계속 할 수 있는 사람도 없거니와, 그러한 선택만을 꾸준히 계속 해 온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 신앙의 위대한 선배들이 그렇게 많지만, 아브라함부터 그 누구도 언제나 명예로운 선택만 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그들은 ‘참 아쉽다.’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명예롭지 못한 선택들을 여러 번 했던 것들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범죄치 아니하는 사람이 없사오니 ...”(왕상 8:46 ; 대하 6:36)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명예롭지 못한 선택들을 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그들을 어쩔 수 없이 명예 하락을 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아붙이십니다.

  사람이 명예가 하락되어지는 이유는 많지만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이유들이 있습니다.

  ① 어려움이 다가올 것을 미리 예상치 못하고 준비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꼭 죄만을 지어서 명예롭게 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가올 위험들과 어려움들을 미리 예상하지 못하고 미리 준비하지 못했을 때, 명예롭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많은 사업가들이 중국과 우리의 상거래가 원활해 질 것들을 미리 예상하지 못하고 무리한 투자들을 했다가 망한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루아침에 집 팔고, 건물 팔고, 월세로 전전하면서 낮아진 분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은 잠언 27장 12절의 “슬기로운 자는 재앙을 보면 숨어 피하여도 ...”라는 말씀처럼 미리 준비를 잘 못한 것입니다.
  사람은 노아가 방주를 미리 예비한 것처럼 미리 피할 장소를 예비해 두고 안전하게 살아가야 하는데 그러하질 못했던 것입니다.

  그런 분들이 있습니다.
  “목사님 돈을 빌려줘야 합니까? 말아야 합니까?”
  “재산을 더 증식하기 위해서 투자를 해야 합니까? 말아야 합니까?”

  그러면 제가 그럽니다.
  “누군가에게 돈을 빌려 주고 싶을 때는 ‘이 돈은 안 받아도 나는 살 수 있다.’라고 생각이 드는 돈은 빌려주십시오.” 그러나 “돈을 빌려 주었다가 그 사람이 만일 제 때 약속을 안 지키면 우리는 망합니다.”라고 말 할 수밖에 없는 돈이라면 그러한 돈은 절대 빌려 주면 안 됩니다.
  현재 세상에는 여러 어려움들이 다가올 것을 예상하지 못하고 있다가 명예를 실추 당하는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② 교만했기 때문입니다.
  교만한 사람들 쳐놓고 결국은 낮아지지 않는 사람들은 없습니다.

  잠언 16장 18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사람이 교만한 길로 들어서면 반드시 패망이라고 하는 종착점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고래가 언제 작살을 맞느냐 하면, 물로 올라와서 등으로 물을 내뿜는 순간입니다.
  우리가 언제 낮아지겠습니까. 교만 할 때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바댜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너를 열국 중에 미약하게 하였으므로 네가 크게 멸시를 받느니라”(옵 1:2)

  하나님께서 ‘너는 좀 안 되겠다’라고 판단하셔서, 우리를 놓아 버리시면, 그것은 마치 모세가 지팡이를 던졌을 때 그 능력의 지팡이가 뱀이 되어버린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놓으시면 그 때는 우리는 낮아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잠언 기자와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교만하면 낮아지게 되겠고 마음이 겸손하면 영예를 얻으리라”(잠 29:23)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마 23:12)

  ③ 변화를 싫어할 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믿는 자들을 지금보다 더 높이시기 위해서 여러 형태의 지시들을 하십니다.
  예를 들자면, “너 이제 여기서 이 일 그만하고 이제 다른 일들을 하도록 해라”고 지시를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개 그러한 경우, 대부분 우리가 귀가 어두워 그 지시를 잘 못 듣습니다.
  또 들어도 현재 자신이 하고 있는 일 자체가 다른 사람들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인기적이기 때문에 아까워서 미련을 포기하지 못하고 붙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지금보다 더 나은 쪽으로 보내시려고 지시를 하신 것임에도 마치 현재 자신의 좋은 조건들을 하나님께서 빼앗으려고 하시는 줄 알고 순종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내가 지금 이 상황에서 지금까지 소유했던 것을 놓아 버리면 더 낮아지고 사람들이 나를 뭐라고 말하겠느냐? 망했다고 하지 않겠느냐?’라는 생각을 가지고 불가피한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을 때, 명예하락이 올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잠언 기자는 다음과 같이 경고하였습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잠 29:25)

  물론 사람이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를 몰라서 자세히 알아보기 위해 변화를 미루는 것은 괜찮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두려워해서, 변화를 두려워해서 게으르다가 보면 오히려 그것으로 인하여 올무에 걸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④ 하나님께 여쭈어보지 않고 무슨 일을 함부로 결정하고 처리하고 했기 때문입니다..
  이 외에도 등등 여러 가지 명예 하락이 오는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러한 것들은 그만 다루고 ‘우리에게 이미 다가온 명예 하락을 어떻게 극복 할 수 있겠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아무튼 어떤 이유에서든지 현재 우리에게는 좋지 못한 선택의 결과이든 아니든, 자의든, 타의든 이미 이루어진 명예 하락이 우리 앞에 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회복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성경에서는 우리에게 ‘명예 회복을 어떻게 할 수 있다.’고 가르치시겠습니까?
  그것을 우리가 잘 깨달아서 현재의 명예하락으로부터 빠져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밥을 못 먹어서 괴로운 것도 괴로운 것이고, 물질이 부족해서 괴로운 것도 괴로운 것이지만, 타인들로부터 멸시를 받아 당하게 되는, 존경을 못 받아 당하는 괴로움도 큰 고통 중 한 가지인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이미 실추되어진 명예를 회복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실추된 명예를 회복하려면,

  첫째,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해져야 합니다.

  우리가 부지런해지기는 해져야 하는데, 균형 있게 부지런해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통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살전 5:23)

  사람은 영과 혼과 육으로 되어 있는 존재입니다. 육으로만의 존재가 아닙니다.
  만일에 사람이 육으로만 만들어져 있다고 하면 잘 먹고 헬스클럽에 가서 운동만 하면 지금보다 더 명예로워 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육으로만 만들어져 있지 않습니다.

  사람은 ‘정신, 혼’이라는 것이 몸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통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고후 4:7)

  그래서 사람은 육만 위해 시간을 사용해서는 명예로워지지 못하고, 혼도 함께 발전을 시키는 노력을 겸비할 때 비로소 명예로워질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육과 혼으로만 되어 있으면 육과 혼만을 개발시키면 되겠는데, 우리 몸 안에는 영도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 사람이 지금보다 더 명예로워지기 위해서는 영과 혼과 육의 균형 있는 발전을 위해 노력을 해야 한단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치우친 것이,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영만을 너무 발전시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에 나가 열심히 일하는 분들은 보면 혼만을 너무 발전시키는 경향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또 어떤 분들은 육만 너무 발전을 시키는 경향도 있습니다.
  이것이 치우쳐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성장하실 때, 몸과 지혜가 균형 있게 발전하셨던 것처럼 우리 역시 균형 있는 발전이 이루어질 때 지금보다 더 명예로운 결과를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족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더라”(눅 2:40)
  “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눅 2:52)

  영적인 것은 ‘죄를 짓는 것을 선택하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혼적인 것은 ‘지식적 노력을 향상시키려는 노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육적인 것은 ‘건강해지려는 노력’을 말합니다.

  우리가 천하를 다 얻었어도 육이 병들어 주사 맞고 누워 7년씩 살아가면 어떻게 그것이 명예로운 삶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미국에서 박사 학위 취득하고 귀국하려다가 욕심이 생겨 영국으로 건너가, 박사 학위 한 개 더 취득하려고 노력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취득 5일 남았는데 너무너무 배가 아파서 병원에 갔더니 대장암 말기라는 것입니다. 그는 박사 학위수여식 3일 전날 죽었습니다.
  그것이 명예로운 선택입니까? 명예로워지기 위해서는 육도 돌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전도자를 통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산 자 중에 참예한 자가 소망이 있음은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나음이니라”(전 9:4)

  죽은 사자는 썩어 가는 중이고, 산 개는 활동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명예로워지기 위해서는 학위 취득만을 위해 위장병 앓아가면서 간신히 학위 취득하고 나서 나중에 위를 다 잘라내는 선택을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육과 영과 혼을 병행해서 균형 있게 성장시켜야 한다는 말입니다.
  성경에서는 육을 질그릇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질그릇은 언제 깨어질지 모릅니다. 잘못 하면 깨어집니다. 그런데 그 안에 보배인 영이 담겨져 있습니다.
  육은 한번 없어지면 더 이상 다시 가질 수가 없습니다. 일회용입니다. 그러므로 잘 관리해야 합니다. 그런데 왜 그러한 귀한 영혼을 담는 몸에 독한 술을 붓고, 담배 연기를 채워 넣고, 마약까지 넣고 그러 하느냐는 말입니다.

  자살은 단번에 하는 자살이 있고, 만성적 자살이 있습니다. 그리고 심리적 자살도 있습니다. 계속 자기 자신을 용서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학대하고, 괴롭히고, 그러면 사람은 서서히 죽어갑니다. 예를 들어 40년 살 사람도 마음으로 자기 자신을 계속 괴롭히면 20년 정도 수명을 단축시킬 수 있습니다. 사람이 먹지 말아야 할 것, 몸 안으로 들여보내지 말아야 할 것들을 계속 몸 속으로 축적을 시키면 50년 살 몸도 20년만 살다가 가는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마약 중독자들이 40세를 미처 못 넘기고 죽는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지금보다 더 명예로워지기 위해서는 균형 있게 부지런해져야 합니다.
  그래서 정신적으로도 돌보아야 명예가 얻어지지, 자신을 정신적으로 돌보지 않는데 명예가 다가와지지 않습니다.

  성경에는 게으른 자들에게 나타나는 특징들을 다음과 같이 열 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①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로 가서 그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잠 6:6)
  “게으른 자는 그 손을 그릇에 넣고도 입으로 올리기를 괴로워하느니라”(잠 19:24)
  “게으른 자는 가을에 밭 갈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거둘 때에는 구걸할지라도 얻지 못하리라”(잠 20:4)
  “게으른 자의 정욕이 그를 죽이나니 이는 그 손으로 일하기를 싫어함이니라”(잠 21:25)
  “게으른 자는 그 손을 그릇에 넣고도 입으로 올리기를 괴로워하느니라”(잠 25:15)

  게으른 자들은 필요는 느끼나 끝까지 하는 일들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랬다고 합니다.
  하루는 게으른 사람이 방에 있는데 도둑이 담을 넘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게으른 사람이, ‘이 놈 담을 넘기만 해 봐라.’ 그런데 그가 ‘꿍’ 하고 담을 넘어 물건을 가지러 마당으로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그 게으른 사람이 ‘방으로 들어오기만 해 봐라, 이 놈’이라고 했답니다. 그런데 도둑이 방에 들어와 물건을 뒤지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이 놈 물건만 가지고 나가 봐라’라고 했답니다. 그런데 도둑이 물건을 가지고 밖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게으른 사람이 ‘다음에 또 오기만 해 봐라, 이 놈’ 그러더라는 것입니다.
  게으른 사람은 그렇게 변명거리가 많다는 것입니다.

  ② 잠이 많다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시 127:2)
  “게으른 자여 네가 어느 때까지 눕겠느냐 네가 어느 때에 잠이 깨어 일어나겠느냐”(잠 6:9)
  “게으름이 사람으로 깊이 잠들게 하나니 해태한 사람은 주릴 것이니라”(잠 19:15)
  “네가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눕자 하니 네 빈궁이 강도같이 오며 / 네 곤핍이 군사같이 이르리라”(잠 24:32-34)

  사람이 잠은 생존의 필수 조건만큼의 양만 자면 됩니다. 그러니까 잠이라고 하는 것은 오면 자고, 안 오면 굳이 좇아가면서까지 잘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게으른 사람들은 잠을 좇아 다니면서 잡니다. 그리하여 충분히 자고도 안 오는 잠을 억지로 또 자 두려고 하는 것입니다.

  ③ 가난해진다는 것입니다.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시 128:2)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되느니라”(잠 10:4)
  “부지런한 자의 손은 사람을 다스리게 되어도 게으른 자는 부림을 받느니라”(잠 12:24)
  “게으른 자는 그 잡을 것도 사냥하지 아니하나니 사람의 부귀는 부지런한 것이니라”(잠 12:27)
  “게으른 자는 마음으로 원하여도 얻지 못하나 부지런한 자의 마음은 풍족함을 얻느니라”(잠 13:4)
  “해태한 사람은 주릴 것이니라”(잠 19:15)
  “너는 잠자기를 좋아하지 말라 네가 빈궁하게 될까 두려우니라 네 눈을 뜨라 그리하면 양식에 족하리라”(잠 20:13)
  “네가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눕자 하니 네 빈궁이 강도같이 오며 / 네 곤핍이 군사같이 이르리라”(잠 24:32-34)
  “게으른즉 석가래가 퇴락하고 손이 풀어진즉 집이 새느니라”(전 10:18)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 6:7)

  사람은 실패해서 가난해지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을 안 해서 가난해지는 것은 동정의 여지가 없다는 것입니다.

  ④ 관계성을 가진 자들을 피곤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게으른 자는 그 부리는 사람에게 마치 이에 초 같고 눈에 연기 같으니라”(잠 10:26)
  “너희는 삼가서 이 일에 게으르지 말라 어찌하여 화를 더하여 왕들에게 손해가 되게 하랴 하였더라”(스 4:22)

  ⑤ 핑계와 합리화와 부정적 추측이 많다는 것입니다.

  “게으른 자는 길에 사자가 있다 거리에 사자가 있다 하느니라 / 게으른 자는 선히 대답하는 사람 일곱보다 자기를 지혜롭게 여기느니라”(잠 26:13, 16)

  ⑥ 자기 중심적인 반복된 일상생활에서 못 빠져 나오는 것입니다.

  “문짝이 돌쩌귀를 따라서 도는 것같이 게으른 자는 침상에서 구으느니라”(잠 26:14)

  문짝이 돌쩍이를 따라 도는 것은, 반복된 일상적 행동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게으른 사람들은 관심을 침대 중심으로 두고 살아갑니다. 예를 들어, 침대에서 빨리 누우려고, 누워먹을 과자를 빠르게 움직여 구입하려고 행동을 합니다. 그러다가 그 순간 빠르게 행동하는 자신을 보고 스스로를 ‘부지런하게 여기며’ 감동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들은 일 중독자들에게도 동일하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취미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사람은 자신의 관심분야만을 위해 바쁘게 움직이는 것이 부지런한 것이 아니고 게으른 것이라는 것입니다.

  ⑦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일들 미루어 상황을 악화시킨다는 것입니다.

  “게으른 자의 길은 가시울타리 같으나 정직한 자의 길은 대로니라”(잠 15:19)

  게으름이 자신의 불필요한 취미에 적용이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게으름이라고 하는 것은 꼭 생산적인 일들에 스며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게으른 사람들은 개발 등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⑧ 의무 이행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내가 증왕에 게으른 자의 밭과 지혜 없는 자의 포도원을 지나며 본즉 / 가시덤불이 퍼졌으며 거친 풀이 지면에 덮였고 돌담이 무너졌기로 / 내가 보고 생각이 깊었고 내가 보고 훈계를 받았었노라 / 네가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눕자 하니 네 빈궁이 강도같이 오며 / 네 곤핍이 군사같이 이르리라”(잠 24:30-34)

  ⑨ 말이 많고 거짓말을 많이 한다는 것입니다.

  “게으른 자의 길은 가시울타리 같으나 정직한 자의 길은 대로니라”(잠 15:19)
  “또 저희가 게으름을 익혀 집집에 돌아다니고 게으를 뿐 아니라 망령된 폄론을 하며 일을 만들며 마땅히 아니할 말을 하나니”(딤전 5:13)
  “그레데인 중에 어떤 선지자가 말하되 그레데인들은 항상 거짓말장이며 악한 짐승이며 배만 위하는 게으름장이라 하니”(딛 1:12)

  ⑩ 게으름은 악한 성품에 의한 선택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 주인이 대답하여 가로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마 25:26)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롬 12:11)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벧후 1:8)

  그러면 게으른 것의 결과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게으른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선행을 하는 것도 미루고 게으릅니다.
  또 ‘나는 믿음이 없어서 기도를 안 합니다.’라고 하는데 아닙니다. 사실은 게을러서 안 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것도 부지런해야 합니다. 이것 절제하고, 저것 절제하고, 시간을 잘 아껴야 기도도 되는 것이지, 이것저것 할 것 다 하고, 특별히 잠 잘 것 다 자고, 먹을 것 다 먹어가며 기도가 되겠습니까?

  사람이 왜 지각하겠습니까?
  지각하는 사람들을 보면 항상 지각 안 할 수 있는 시간에 출발은 하려고 노력은 하는데 꼭 돌발적으로 무슨 일인가가 일어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되느냐, 예를 들어, 11시에 도착할 곳이라면 생각을 바꾸어 10시 30분에 도착해야 한다고 생각을 하고 일을 추진하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돌발 상황을 미리 미리 준비하면 얼마든지 게으르지 않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게으른 사람은 회개하는 것도 게으릅니다.
  우리가 왜 악습을 뿌리 못 뽑느냐?
  사람이 악습을 뿌리 뽑자면, 그만큼 악습을 뿌리 뽑기 위해서 회개도 열심히 하고 그만큼 기도도 열심히 해야 합니다. 사람은 ‘나의 악습이 뿌리 뽑혀지면 좋겠다.’라는 생각만으로는 악습이 뿌리 뽑히지 않습니다.

  저는 약학계와 의학계에 건의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왜 도대체 비듬을 완전히 없게 할 수 있는 약을 못 발견해 내느냐는 것입니다.
  제 머리에 비듬이 있습니다. 그런데 제 머리를 조사해 보시면 비듬이 안 나옵니다. 왜 그러느냐면 머리를 하루에 두 번 이상을 감기 때문입니다.
  왜 두 번을 감느냐? 비듬 약이 없습니다. 좋다는 비듬 약은 다 써 봤습니다. 그런데 치료가 안 됩니다. 그래서 연구해 낸 방법이 새벽기도 끝나고 운동하고 머리 감고 저녁에 운동하고 머리를 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 머리를 아무리 조사를 해 봐도 비듬이 없단 말입니다. 그런데 없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하루 두 번을 감아서 없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제가 약도 못 발견하는데다가 게으르기까지 하면 어깨에 비듬들을 다 떨어뜨려가며 다닐 것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얼마나 소름끼치는 일이겠습니까.
  사람들은 ‘와, 우리 목사님은 멀리서 봐야 깔끔하지 가까이 가면 와르르야 ... ’ 그러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사람은 게으르면 어떤 형태로든 표시가 난단 말입니다.

  저는 또 무좀도 있습니다. 그런데 무좀약도 바르다가 아무리 발라도 끝장이 안 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발을 하루에 두 번씩 씻었습니다. 그랬더니 지금은 무좀이 없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없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하루만 발을 청결하게 안 하면 무좀이 다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저는 무좀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지, 사실은 없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사람은 게으르면 어떤 형태로든지 그 후유증이 반드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도 죄짓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아이가 말을 했습니다. ‘죄는 즐거우나 나쁜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죄를 안 짓겠습니까?
  부지런히 회개하고, 정말 죄 안 지으려고 부지런히 기도하고, 악습을 끊어내려고 부지런히 기도를 드리고, 노력을 해야 죄가 안 지어지는 것이지, 잘 것 다 자고, 쉴 것 다 쉬고, 먹을 것 다 먹어 가면서는 절대로 죄가 끊어지지 않습니다.

  저는 제 체중이 처음에 몇Kg이 나가야 적당하게 보기 좋은 사람이 되는 줄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한 때 주는 대로 계속 먹었습니다. 어떤 날은 저녁을 세 번 먹었습니다. 그리고는 어느 날 체중을 달아보니까 86Kg으로 최고 체중이 나갔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계속 먹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때부터 들려지는 얘기들이 ‘목사님 얼굴이 고무풍선에 바람 빵빵하게 넣은 것 같다.’는 ‘둥, 뒤에서 보면 옷이 1mm도 여유가 없다.’는 둥 별의 별 소리가 다 들리는 것입니다. 제가 그 때 깨달은 것입니다.
  ‘아, 지금 내 체중은 내 키와 안 맞는가 보다! 그러면 얼마가 맞는 것인가?’ 그래서 제가 주변 분들에게 ‘저의 적당한 체중 견적을 내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분은 ‘85Kg,’ 어떤 분은 ‘82Kg’, 어떤 분은 ‘80Kg’, 그런데 어떤 분이 나한테 ‘75Kg’이라고 얘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86Kg에서 75Kg으로 내려간다는 것은 정말 당시로서는 있을 수가 없는 일처럼 생각이 되었습니다만, 결국 이루어졌습니다.
  제가 2003년 2월에 미국 나가서 양껏 먹다가 귀국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에 3월 1일부터 시작해서 10개월 동안 13Kg을 감량을 했습니다.
  그 때 저는  6개월 동안 라면이 먹고 싶어 죽다가 살아났습니다. 그것 참느라고 말입니다 ...
  자장면은 한 그릇 시켜서 가위로 4/1을 잘라서 귀퉁이 한쪽만 먹고 내 보냈습니다. 그리고 하루에 운동을 세시간씩 해 가며 최하 71Kg까지 내려가 봤습니다.
  그런데 ‘너무 말랐다.’는 평이 나와서 조금씩 다시 올리다가 요즘은 평균 75-76Kg을 유지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유지하는 것을 그냥 유지하느냐? 아닙니다.
  저는 새벽기도 끝나고 30분 뛰고, 저녁기도 끝나고 30분 뛰어서 하루에 한 시간 운동을 해서 현체중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루에 세끼를 다 먹으면 금방 체중이 또 늘어납니다.
  그래서 거의 하루에 두끼만 먹습니다.

  이와 같이 사람은 게을러 가지고는 하나도 되는 것이 없습니다.
  제가 하루에 시간을 아껴보려고 노력을 하다가 보니까, ‘어떻게 하면 시간을 아낄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해 보다가 새벽기도 직전에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아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벽 4시에도 일어나 보고, 3시에도 일어나 봤는데 ... 결론은 새벽 4시에 일어나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래서 3시에 일어나 봤던 것입니다.

  전도사 때 서울로 교회를 왔다 갔다 하는데 아침에 그 동네에서 새벽기도하고 올라오다가 보면 출근시간이라 두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래서 새벽에 일어나서 그냥 올라 와서 서울에서 새벽기도 드리고 그리고 학교 앞에 가서 차 세워놓고 차에서 잠깐 자고, 그리고 다시 학교 들어가서 공부하고... 그렇게 시간을 줄여봤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지금은 어떻게 사느냐?
  지금은 해야 할 일이 많아서 4시에 일어나서는 안됩니다. 3시에 일어나서도 안됩니다. 두시에 일어나는 것도 안 됩니다. 그래서 지금은 아예 1시 30분에 일어납니다.
  물론 그 시간이 초저녁이신 분이 많으시겠지만 말입니다.

  저는 1시30분에 일어나 움직이기 시작을 해도 하루 종일 일을 다 처리 못합니다. 그래서 지금 기상시간을 12시까지 당겨보려고 하는데 체력에 한계가 있어서 못 당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 1시 30분에 일어나 새벽까지 계속 일하고 새벽 기도 끝나고 가서 운동하고 그리고 2시간 30분에서 3시간 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어나서 계속 일을 하는데 그래도 업무량을 다 처리를 못합니다. 해야 할 일들은 많고, 다행히 건강이 뒷받침되기 때문에 잠을 많이 자봐야  4시간 정도 자고도 견디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게을러서 되는 일은 없다 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게으름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악의적 성품으로 돌리지 않고,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게으른 것을 ‘악하고 게으른 자’라고 말씀하셨는데 우리는 게으름을 나쁜 성품과 연관시키지 않고, ‘체력이 약해서 ... ’등으로 핑계를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게으른 것은 나쁜 것입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게으른 것은 명예 하락을 가지고 옵니다.

  악습이 어떻게 그냥 끊어집니까? 세상에 악습 없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사람은 악습을 끊기 위해서 부지런히 기도하고, 회개하고, 빌고, ‘하나님 도와달라’고 해야 악습이 끊어지는 것이지, 부지런해야 끊어지는 것이지 ... 그냥은 안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다음과 같이 권면하셨습니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롬 12:11)

  잠언 기자의 권고입니다.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로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잠 16:7)

  저는 이 말씀을 감정적인 교류로만 생각을 했었습니다.
  ‘아 하나님 보시기에 열심히 살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마음을 완전히 녹여주셔서 어느 날 에서와 야곱이 만나서 반가워 껴안고 울듯이 그렇게 원수를 화목 시켜 주시려고 하는가 보다!’

  그런데 그렇게 해석 안 해도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원수가 나의 마음에 나타났을 때 부지런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그 영혼을 용서합니다. 용서합니다. 용서합니다.’
  ‘하나님, 제가 그 영혼을 용서하기 위해서 이해의 용량을 넓혀주세요. 넓혀주세요.’
  ‘하나님, 그 영혼을 축복합니다. 축복합니다.’

  그렇게 부지런히, 게으르지 않고, 원수를 위해서 계속 기도하다가 보면, ‘이 산을 들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면 던져질 것이요’라는 예수님의 가르침도 있지만, 산을 한 삽씩 옮겨 없어지게 하는 방법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원수를 용서하기 위해서도 부지런히 게으르지 말고 기도해서 원수와 더불어 화목케 하는 방법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게으르면 아무것도 안 되는 것입니다.
  게으르면 용서도 못하는 것이고, 게으른 사람이 언제 기도하고, 언제 축복하고, 언제 회개해서, 언제 그 맘속에서 원수를 없애겠느냐 말입니다. 게으른데, 자야 하는데, 주무셔야 하는데 말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게으르면 아무것도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즉시 순종하지 않는 것도 불순종이다.’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순종도 부지런한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게으른 사람들의 특징이 또 무엇이겠습니까,
  ‘두루 다니며 한담한다’는 것입니다. 게으른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 혀가 바쁘다는 것입니다. 아무튼 혀는 게으른 사람일수록 얼마나 바쁜지 모릅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게으른 사람들은 핑계거리를 찾습니다.
  ‘나는 몸도 아프니까 좀 더 쉬어야 해’ ‘나는 무리하면 안 되니까 쉬어야 해’
  그리고 적합한 명분을 찾기 위해 병원에 한 번씩 다녀오면 의사 선생님들이 결정적인 위로의 말씀을 꼭 주십니다. ‘당분간 좀 쉬어야 겠습니다’
  그러면 그 말 자체가 그 때부터 그 사람에게는 성경입니다.
  또 그 말을 듣고 얘기하면 옆의 사람도 아무 말도 못합니다. 전문가가 쉬어야 한다는데 뭐라고 말하겠습니까?
  그러면 속으로는 별로 안 반가운 얘기지만, ‘그냥 쉬라’고 한단 말입니다.

  그러나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이 있고, 잃는 것이 있으면 얻는 것이 있습니다.

  게으르면 반드시 명예 하락을 동반하게 됩니다. 그 점은 각오하고 게으르자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실추된 명예하락을 극복하려면, 반드시 첫 번째 넘어야 할 산이 바로 게으름의 극복이라는 것입니다.
  ‘피아노를 하루 안 치면 본인이 알고, 이틀 안 치면 가족이 알고, 사흘 안 치면 옆의 집사람이 안다.’고 합니다.
  사람이 어느 정도로 부지런해야 하는가 하면 가장 먼저 옆에 있는 배우자에게 ‘당신 너무 부지런 한 것 아니야!’라고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벌써 옆에 있는 배우자가 볼 때 ‘참 내 남편이지만 ...’ ‘내가 말은 못하지만, 내 아내지만 ... ’ 하며, 말은 못하지만, 부부가 어떻게 하고 싶은 말은 다 하고 삽니까? 못하고 삽니다. 그렇지만 속으로 ‘진짜 게으르다.’라고 평가를 내리게 되면, 그것은 끝난 것입니다. 존경은 물 건너 간 것이고, 그리고 더 이상의 명예 상승도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다가 죽으면 짐승과 다름이 없는 삶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명예를, 특별히 하락된 명예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게으름부터 반드시 정복을 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한 때는 참 부지런했습니다. 그래서 뭔가 성취했습니다. 고시도 패스하고, 나름대로 밥 먹고  삽니다. 그런데 그때부터 게을러진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라는 것입니다.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명예하락은 교만과도 연관이 있다는 것입니다.
  교만도 누가 극복을 하는가?
  겸손해지려고 노력하고 부지런한 사람이 교만도 극복하는 것이지, 게을러서 ‘교만한 것을 알기는 알지만, 뭐 어쩌겠어요. 이렇게 살다가 죽는 것이지’ 그렇게 게으른 사람은 교만도 극복 못하고 결국은 명예하락이 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지금보다 더 명예로워지기 위해서 첫 번째로 반드시 짚고 넘어가고 없애야 할 것이 바로 게으름인 것입니다.
  이것은 반드시 정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딤전 4:15)

  둘째, 이웃의 명예를 해롭게 하는 일에 절대 쓰임 받지 않는 것입니다.

  현재 하나님의 명예를 훼손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십계명 중에 3계명을 안 지키는 것입니다.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는 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출 20:7)

  이것은 아주 큰 잘못입니다.

  그런데 9계명에 ‘이웃에 대한 명예를 하락시켜서도 안 된다.’는 계명이 있습니다.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출 20:16)

  우리가 이웃에 대해 비난하면 언젠가 그 비난은 반드시 그 사람의 귀에 들어갑니다. 그러면 그 사람도 반드시 나에 대해서 좋게 말 안 합니다. 비난합니다.
  그러므로 들어봐서 그 사람의 명예 향상에 도움이 안 되는 말은 전달하면 안 됩니다.

  잠언 기자의 경고입니다.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 마음이 신실한 자는 그런 것을 숨기느니라”(잠 11:13)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니 입술을 벌린 자를 사귀지 말지니라”(잠 20:19)

  그러니까 ‘아, 이 소식은 전달을 해 봐야 당사자의 명예 상승에 전혀 도움이 안 되는 것이겠구나.’라는 판단이 들면, 그러면 그 일을 내 입으로는 전달하지 않아야 합니다.

  오늘 날 신문들이 만일 기사를 긍정적인 내용으로만 쓰게 되면 신문사가 6개월 안에 망한다고 합니다.
  신문은, 원래 언론은 부정적인 것들을 다루어야만 판매 부수가 많이 나간다는 말입니다.
  연예 잡지, 연예 신문에 어떤 내용의 기사를 다루고 있습니까? 한 번 검색해 보시겠습니까? 긍정과 부정적인 것들 중 어떤 것들이겠습니까?
  사람도 그 입을 통해서 나오는 말들이 뭔가 부정적인 정보라야 들을 만하고, 짭잘하고, 긍정적인 것들만 말하면, 마치 공자님 말씀하시는 것 같고, 꼭 음식에 소금 안 넣은 것 같아 재미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웃을 명예롭지 못하게 사용되어지는 혀, 그것은 반드시 언젠가는 당사자도 명예롭지 못하게 됩니다.

  사람은 무엇을 심든지 심은 대로 거두게 되어 있습니다(갈 6:7).
  이웃을 명예롭게 하는 일에 우리가 쓰임을 받아야 지금보다 명예로워질 수 있습니다. 설령 나를 미워하던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언젠가 돌아 돌아 소문을 들어보니까 ‘내가 그 사람한테 한 것이 얼마나 심한데, 그 사람은 나에 대해서 그렇게 배려를 했단 말이야’라고 양심의 가책이라도 받습니다.
  그런데 ‘어, 당신 나한테 그런 말을 했지? 두고 보자’ 그래서 계속해서 그 사람에 대해서 명예를 실추시키는 말을 하고, 깎아 내리고 그러다가 보면 결국은 나의 명예 하락의 지름길이 되지, 도움이 안 된다는 말입니다.

  물론 사람이 너무너무 분하고 억울하면, 처음에 몇 마디 안 할 수는 없습니다.
  제가 존경하면서 모시던 목사님이 계신데, 정말 인격적으로 흠이 없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제가 전도사 때, 하루는 저를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같이 밥을 먹다가 갑자기 어떤 사람 비난을 막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얼마나 당황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세상에 내가 존경하는 목사님도 다른 사람을 비난하시다니 ...’ 그래서 제가 충격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런데 며칠 있다가 보니까 그 비난하는 그 분을 당시 연세가 80세가 넘으신 목사님께서 그 비난하던 사람은 자식 벌 밖에 안 되는데 얼마나 정중하게 예우를 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제가 느낀 것이 그것입니다.
  ‘아, 사람이 너무너무 분하면 그 순간에는 몇 마디 할 수 있다. 누구나 다 그럴 수 있구나.’
  그러나 후속적으로 계속 그렇게 하는 것은 악의적인 것입니다.
  우리에게 너무너무 억울하게 한 사람들에게 대해서 분함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며칠 하다가 말아야지, 끝까지 계속해서 고소장 내고, 변호사 사고, 이사가면 좇아가고, 도시락 싸들고 좇아 다니면서 괴롭게 하는 것은 자신의 명예에도 전혀 도움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에게 지금 명예하락이 온 것은 다 이웃의 명예를 상승시키지 않고 하락시켜 보려다가 우리도 같이 끌려내려 간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우리가 남은 생애동안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아무튼 다른 사람은 나의 명예를 하락시키더라도 나는 절대로 그 사람의 명예를 하락시키지 않는다’ 이것을 명심하고 실천하고 살아가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셋째, 우리의 성품을 지금보다 좋게 계발하는 것입니다.

  목사들이 가장 심하게 겪는 어려움이 그것입니다. 너무 억울한 일들을 많이 당하니까 밖에서는 천사처럼 행동하다가도 집에 들어가서는 있는 대로 화를 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모님은 그랬다고 합니다. 하루는 보따리를 싸더라고 합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짐은 왜 싸느냐?”고 하니까 “강대상으로 이사가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목사에게 “당신은 강대상에서는 천사 같은데, 집에만 오면 짜증을 내고 신경질을 내느냐?”고 그랬다고 합니다.
  그것이 마음에 쌓인 것이 많아서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목사가 스트레스를 받으면 누가 피해를 보느냐? 목사 부인과 자녀들이 손해를 많이 봅니다.
  목사 부인과 자녀들은 밖에 나가서 말을 못하잖습니까? “우리 목사님 집에만 오면 신경질 냅니다.”라고 말 할 수 없잖아요.
  그런데 성도들은 그것도 모르고 “‘사모님은 참 좋으시겠어요? 목사님이 그렇게 천사 같아서요.” 그러면 사모는 “으-음! 네 감사합니다.”라고 대답은 하지만 속으로는 감동 안 받게 됩니다.
  다만 속병 나기 직전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것을 고쳐야 합니다.

  로버트 슐러 목사님이 교회에서 너무 자신을 괴롭히는 평신도가 한 명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마침내, 그 날은 가만 안 있으려고 작정을 하고 넥타이를 힘껏 매면서 ‘오늘은 혼내주리라’고 결심을 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사모님이 그러더라 는 것입니다.
  “여보 당신이 그렇게 억울해 하는 것은 내가 잘 알겠습니다. 제가 옆에서 보니까 당신이 얼마나 억울한지 잘 알겠습니다. 그런데 당신이 봐서 그 분이 문제가 있다면 다른 분들이 봐도 그 분이 문제가 있을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당신은 목사님이니까, 목사님이 얼굴에 혈기를 올려 가지고 그 분을 대항하는 것보다는 다른 피해자로 하여금, 다른 긍정적인 평신도로 하여금 그 분을 대항하게 하고 당신은 사회나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래서 그 위기를 넘어갈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번째는, 그 날도 로버트 슐러 목사님이 아주 화가 많이 났다고 합니다. 그런데 슐러 목사님 사모 님이 목사님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더니 그랬다고 합니다.
  “당신은 웃을 때가 멋있어요. 당신은 인상쓰면 아주 가위표예요.” 그래서 충격을 받고 화를 안 내기로 결정했다는 겁니다.
  자기가 화가 났을 때 거울을 미처 못 보셔서 그러는데, 한 번씩 보세요. 눈은 가재미 눈에다 ... 가룟 유다의 사진을 따로 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잠언 기자의 권면입니다.
  “사람은 그 인자함으로 남에게 사모함을 받느니라 가난한 자는 거짓말하는 자보다 나으니라”(잠 19:22)

  우리가 분명히 화를 내야 합니다. 분명히 상대가 잘못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분명히 나에게 공격적인 발언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순간에 내가 인자함을 나타내면 그 인자함이라고 하는 펀치를 나에게 맞은 사람은 평생 빚을 진 사람이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알기는 이렇게 잘 아는데 이것이 막상 닥치면 갑자기 정신이 이상해져 가지고 그냥 헐크처럼 변해서 그냥 벌처럼 쏘는 사람이 되어 버린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평소에 나의 성품과 명예 상승과는 직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도, 아무리 사회적으로 세상에서 많은 성공을 거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자신에게 짜증낸 사람을 존경하는 법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50년 동안 많은 것을 성취해 놓았다고 할지라도 어느 날 누군가에게 화 한번 내버리면 그것은 물거품입니다.
  더 이상 그 사람에게는 인정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성품의 위력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감기가 걸려 약국을 가면 약을 한 알만 딱 줍니까? 이 약도 주고, 저 약도 주고 하지 않습니까? 그것을 다 섞어 먹어야 감기가 낫는 것처럼 우리가 지금보다 명예가 하락된 명예를 상승시키기 위해서 더 이상 노력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어느 한 가지만 노력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게으름 극복하고, 이웃을 명예롭게 하는 일에 쓰임 받고, 성품을 고쳐야 합니다.

  넷째, 절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고전 9:25)

  말 백 마리를 우리에 가두고 물을 굶기기 시작했습니다. 강 아래 물이 보이는 개천이 있는데 우리를 만들어 가두어 두었단 말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말들이 더 이상 물을 못 먹어서 쓰러지기 직전에 울타리를 열었습니다. 그러자 말들이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그 말을 정지시키는 종을 울렸습니다. 그랬더니 96마리는 무시하고 개울로 뛰어갔고, 4마리만 그 자리에 섰더라는 것입니다. 그 네 마리를 끌어다가 왕실의 종마로 삼았다고 합니다.

  우리는 죄짓고 싶어합니다.
  누구도 죄를 안 짓고 싶어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절제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누구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수많은 명예를 얻었던 사람이, 왕도 전쟁터에 나가서 아들 세 명과 죽었습니다. 사울입니다.
  수많은 사람이 명예를 초반에 얻었으나, 후반에 잃었습니다. 죄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명예를 하락 당한 이유는 죄 때문입니다. 이것을 극복해 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명예 하락으로부터 빠져나오려면 남은 생애동안 죄를 절제하는 길 외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다섯째,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 22:12)
  “내가 네게 큰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창 22:17)

  아브라함의 종의 고백입니다.
  “여호와께서 나의 주인에게 크게 복을 주어 창성케 하시되 우양과 은금과 노비와 약대와 나귀를 그에게 주셨고”(창 24:35)

  모세의 가르침입니다.
  “여호와께서 너의 칭찬과 명예와 영광으로 그 지으신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그 말씀하신 대로 너로 네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 되게 하시리라”(신 26:19)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부터 시작하여 너를 온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크게 하여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같이 너와 함께 있는 것을 그들로 알게 하리라”(수 3:7)
  “그 날에 여호와께서 모든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여호수아를 크게 하시매 그의 생존한 날 동안에 백성이 두려워하기를 모세를 두려워하던 것같이 하였더라”(수 4:14)

  한나의 고백입니다.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핍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드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위를 차지하게 하시는도다 땅의 기둥들은 여호와의 것이라 여호와께서 세계를 그 위에 세우셨도다”(삼상 2:6-8)

  시편 기자의 가르침입니다.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시 34:9)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34:10)

  잠언 기자가 말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견고한 의뢰가 있나니 그 자녀들에게 피난처가 있으리라”(잠 14:26)
  “여호와를 경외하면 장수하느니라 그러나 악인의 연세는 짧아지느니라”(잠 10:27)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응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잠 22:4)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잠 31:30)

  우리는 다음의 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메리카, 영국은 아시아에서 자신의 위신을 잃어버리는 데 백년이라는 세월이 걸렸지만 아메리카는 겨우 십 년 사이에 자신의 명성을 상실해 버렸다.

  그리고 다음 같은 질문을 생각해 볼 필요도 있습니다.
  “자신의 명예를 위해 다른 이들을 희생시킨다면 그 명예는 무슨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인가?”

  마크 트웨인이 한 말입니다.
  “명예는 법보다 더 지키기 어려운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죽어가면서 이런 말을 한마디 남기고 죽었다고 합니다.
ꡒ내가 두 가지 아쉬운 것이 있었다. 하나는 내가 옳았을 때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은 것이고 옳지 않았을 때 아무도 잊어주지 않았던 것이다ꡓ

  독일의 정치가 비스마르크가 아들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고 합니다.
  “내가 오늘 한 일에 대하여 내일 다른 사람들의 여론을 들어보면 태반이 잘못되었다. 그러니 남의 칭찬을 받는다고 하여 기뻐하지 말고 남의 비난을 받았다고 하여 실망하지도 말아라. 본디 인간은 이러나저러나 간에 잘할 수 없게 되어 있다.
  또 후세에 이름을 남기겠다는 사람도 있으나 지극히 어리석은 생각이다. 지금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도 내 마음을 알아주기 어려운데 어찌 백 년이나 천 년 후의 사람들이 내 마음을 알아줄 것인가.
  그러므로, 나는 다만 하나님만이 내 마음을 알아줄 것이라고 믿고 남들이 나를 칭찬하거나 욕을 하거나 그런 것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한다. 지금의 내가 독일 총리대신이라는 어려운 일을 맡아보고 있는데, 만일 하나님이 없다고 하면 나는 이 괴롭고 어려운 일에 단 사흘도 견디지 못할 것이다.
  너무 세상의 칭찬에 관심을 두지 말아라.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여 하나님으로부터만 칭찬을 받고 만족하도록 힘써라.“

  여섯째, 문제 해결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를 간절하게 열심히 드리는 것입니다.

  야베스의 경우입니다.
  “야베스는 그 형제보다 존귀한 자라 그 어미가 이름하여 야베스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 함이었더라 /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가로되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대상 4:9-10)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 그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자가 이같이 이르노라 /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2-3)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마 7:7-9)

  야고보가 권면하여 말했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 1:5)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약 4:2)

  일곱째,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이 명예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잠언 기자를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재물보다 명예를 택할 것이요 은이나 금보다 은총을 더욱 택할 것이니라”(잠 22:1)

 

결단에 대하여

{빌립보서 3:12~14}

 

토마스 카알라일이 프랑스 대혁명에 대한 그의 방대한 원고 작업을 끝냈을 때였습니다.
  그는 그 원고를 친구에게 한번 읽고 수정 할 곳은 없는 지 검토하여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원고를 가지고 간 친구가 창백한 얼굴로 카알라일의 집에 찾아온 것입니다. 내용인 즉 들어보니 친구의 하녀가 원고를 버려야 할 쓰레기인 줄 알고 그만 불쏘시개로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그 때부터 카알라일은 참으로 고통스러운 며칠을 보냈습니다. 지난 몇 년 동안의 수고가 수포로 돌아간 것입니다. 그는 그 원고를 다시 써야겠다는 용기를 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 방대한 원고를 다시 쓴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소름끼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후로부터 어느 날, 카알라일은 거리를 걷다가 석공이 길고 높은 벽을 쌓아나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잠시 그 자리에 서서 작업광경을 지켜보다가 순간적으로 번뜩이는 생각에 사로잡혔습니다.
  석공은 한번에 한 장씩 돌을 쌓아 갔던 것입니다. 그는 그때 결심했습니다.
  “그렇다. 하루에 한 페이지씩 다시 써 나가자. 내일은 다음 페이지를, 그리고 모레는 그 다음 페이지를, 좋다! 그렇게 하자.”
  그는 원고 집필하는 것을 다시 쓰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그는 그 원고 집필을 끝마칠 수가 있었습니다.
  결과로 완성된 원고는, 첫 번째 것보다 더 훌륭한 내용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인생에 있어서 어찌 그렇게 큰 결단을 잘 내렸겠습니까. 그는 어떻게 그렇게 훌륭한 인생을 살다 갈 수 있었겠느냐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은 아주 훌륭한 결단을 하고 그 인생을 훌륭하게 마감 지은 분인데 그는 결단 직전에 세 가지 준비 과정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그 내용들을 자세히 다루고 있습니다.

1.   첫째, 망각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결단하기 직전에 행한 것은 가장 먼저 지나간 일들에 대하여 깨끗이 잊어버렸다는 것입니다. 망각했다는 것입니다.

  다음의 고백을 들어 볼 때 그렇습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빌 3:12)

  그러니까 바울은 과거에 잘 한 것들도 잊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과거에 대해 애착적 여러 기억들을 가지고 있기가 쉽습니다.
  ‘그 때 그것만 내가 가지고 있었더라면...’
  ‘그 사람이 지금 내게 있었더라면...’
  ‘그 돈이 내게 있었더라면...’
  이제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는 현실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과거와 결별을 못하고, 과거에 대한 잘못된 애착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과거에 대하여 잊어버려야 되는 것들을 의지적으로라도 잊어야 하는데, 그러면 무엇을 잊어버려야 하겠습니까?

  ① 잘 했던 것들

  물론 성공 경험을 무조건 기억에서 지워버리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작은 성취는 오히려 실패만도 못할 때가 많다는 겁니다.
  공연히 작은 성취 하나해 놓고 혼자 거기에 도취되어 가지고 ‘그래도 내가 뭔데...’라는 생각 때문에 이런 일도 못하고 저런 일도 못하고 잘못 발목을 붙잡혀서 살아나가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그런 경우 작은 성취는 오히려 마이너스로 작용이 된다는 것입니다.

  ② 이미 철저하게 회개하여 깨끗하게 용서받은 죄들

  물론 사람은 죄책은 잊어버려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죄에 대한 기억은 평생 갑니다.

  다윗이 고백했습니다.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시 51:3)

  우리는 한번 지은 죄를 잊어버릴 수는 없습니다. 그 기억은 평생 갑니다. 그러나 죄책은 잊어버리자는 것입니다.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시 103:12)
  “보옵소서 내게 큰 고통을 더하신 것은 내게 평안을 주려 하심이라 주께서 나의 영혼을 사랑하사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지셨고 나의 모든 죄는 주의 등 뒤에 던지셨나이다”(사 38:17)

  하나님께서 우리가 회개한 죄들에 대해서는 더 이상 기억하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잊어버려야 마땅합니다.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사 43:25)

  그래서 하나님께서 잊어버리셨다고 하면 우리도 기꺼이 잊어버려 드리는 것이 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잊어버리셨다는 것을 ‘내가 기억력이 얼마나 좋은 줄 아세요.’ 그러면서 버티고 안 잊어버리는 것은 결코 자신에게도, 이웃에게도, 하나님에게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③ 과거 실패에 대한 기억

  주식투자에 실패해 7억 원의 빚을 졌던 김동조(49․마이웨이스탁 대표)씨는‘실패학’이라는 책을 저술했습니다. 그는 실패하여 12년 동안 총 7억의 빚을 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남산을 올라가다가 깨달았다고 합니다.
  ‘아, 내가 왜 실패를 했는가? 내가 이 높은 산을 엘리베이터 타고 올라가려는 것은 아닌가? 걸어서 올라가야 마땅한 것인데, 내가 잘못된 사고를 가지고 있구나! 고쳐야 되겠구나.’
  그래서 12년 동안 못 갚던 7억의 빚을 4년의 노력으로 깨끗이 갚고 다시 새 출발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분이 얻은 더 귀한 자산은 자신은 이제 ‘실패가 겁이 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제 실패를 자산으로 여기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과거의 실패했던 기억도 잊어버려야 합니다. 너무 과거의 실패에 발목을 붙잡혀 ‘나는 실패자다. 그러므로 나는 또 어떤 일을 해도 실패할 것이고, 또 이런 일을 해도 실패할 것이다.’라는 생각은 참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한 생각들은 오히려 잊어버리는 것보다 훨씬 더 못하다는 것입니다.

  ④ 다른 사람들의 허물과 죄들

  우리는 다음의 말씀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분 외의 말을 하는 것도 미련한 자에게 합당치 아니하거든 하물며 거짓말을 하는 것이 존귀한 자에게 합당하겠느냐”(잠 17:7)
  “길로 지나다가 자기에게 상관없는 다툼을 간섭하는 자는 개 귀를 잡는 자와 같으니라”(잠 26:17)
  “다른 사람의 죄에 간섭지 말고 네 자신을 지켜 정결케 하라”(딤전 5:22)
  “너희 중에 누구든지 ...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벧전 4:15)

  우리는 우리 자신의 과거 허물과 죄도 잊어버려야 되겠습니다만, 그러나 다른 사람들의 죄와 허물도 잊어버려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죽으면서 그랬다고 합니다.
  “도대체 사람들은 어쩌면 내가 잘 한 일은 철저하게 칭찬을 안 할 수가 있어요? 그리고 사람들은 어쩌면 그렇게 내가 잘못한 일들은 절대 안 잊어버릴 수가 있어요?”

  우리가 꼭 명심해야 할 것은 보통 부부간이나 대인관계를 가지면서도 자꾸 상대방에 대해 어떤 요구가 있을 때 불평을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불평으로는 절대 상대방을 변화시키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십니까.
  그렇습니다. 절대 변화 시키지 못합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불평을 하거나, 남편이 아내에게 불평을 하면 그리고 대인관계에서 상대에게 불평을 하거나, 소속 단체에서 불평을 하면 오히려 역반응이 일어납니다.
  ‘아, 저 사람에게는 잘 해줘봤자 결국은 또 다른 불평거리를 찾고야 말겠지.’라는 낙심이 생깁니다.
  ‘저 사람은 좋은 것은 지적을 안 하고, 계속 문제점만 지적을 하는 것을 보니까 지금 이 순간에도 나의 문제점에 대해서 연구하고 있겠지?’
  ‘아, 저 사람은 입만 열었다고 하면 감사보다는 불평을 말하는 것을 보니까 앞으로도 저렇게 살다가 죽겠지’
  그래서 그 사람에 대해서 절대 포기를 하고 싶거나, 도망을 하고 싶어하지,
  ‘아, 저 사람의 요구를 빨리 들어줘서 저 사람과 더 가까이 지내야지‘ 그렇게는 생각이 안 든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가르치신 내용대로 하는 것이 좋습니다.
  ‘감사하는 자가 되라. 감사하는 말을 하라.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하는 사람이 되라.’
  그래서 사람은 상대에게 없는 것들은 안 보는 것입니다. 있는 것들만 보는 것입니다.
  누가 자신의 사랑스런 자녀를 품에 안고, ‘눈이 틀렸어. 눈이 가자미 눈 같아. 이빨 봐. 상어 이빨 같잖아. 귀 봐 당나귀 귀 같아.’ 누가 그럽니까! 있는 모습 그대로, 감사함으로 받아들이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절대로 다른 사람들의 허물과 죄, 단체의 허물과 부족 이런 것들은 지적하는 것도 아니고 불평하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들을 만나면 다음과 같이 묻는 분들이 있습니다.
  “제가 뭐 고칠 것이 없을까요?”
  절대 믿지 마십시오. 그 말은 오히려 칭찬해 달라는 말입니다.
  “제게 뭐 권면하실 것 좀 없으세요?”
  절대 믿지 마십시오. 그 말도 오히려 칭찬해 달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칭찬해 줄 것이 없거든, “없습니다.”라고 말하십시오.





  그런데 상대가 “뭐, 권면할 것 없으세요?”라고 물으면 “왜 없겠어요. 있지요. 적으세요. 내가 21가지 정도 적어뒀어요.”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나마 조금 있던 정도 마저 떨어져 가지고 절대로 안 보고 싶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누가 우리에게 무슨 충고를 요청하거든, “아, 왜 그러세요. 나보다 훨씬 더 지혜로우신 분이 오히려 반대로 저한테 충고를 하셔야지, 제가 뭘 안다고 그러세요. 저는 지금 상태로 진짜 만족해요.” 그렇게 말을 해놓고 그렇게 믿으면 진짜 만족해집니다.

  그런데 ‘아유, 말도 마세요. 문제점이 뭐 한 두 가지여야지 ...’라고 생각하거나 반응을 보이면 ... 다른 사람을  가르칠 때 세 손가락은 자신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알잖습니까.
  우리가 절대로 다른 사람들의 허물, 약점, 단체의 허물 등은 안 보는 것입니다.
  세상의 어느 나라가 문제 없겠습니까? 어느 교회가 문제 없겠습니까? 저는 우리 교회 문제점을 저보고 얘기하라고 하면 당장 10가지는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저 개인의 문제점에 대해서 지적하라고 하면 당장 21가지는 적어낼 수 있습니다.
  몰라서 말 안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 압니다. 그러나 알면서도 당장 수습이 안 되는 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런데 당장 해결 안 되는 부분들을 지적만 해 내면 사람들이 압박감을 느껴 도망가고, 방어하고 싶지, ‘아휴, 드디어 은인을 만났어’ 그러면서 쫓아다니면서 받아 적어 고치려는 사람은 없다는 말입니다.

  어떤 남편이 아내의 부엌살림까지 일일이 다 지적을 했습니다. 아내가 어떤 반응을 보였겠습니까? ‘감사한 남편 ... ’ 그랬겠습니까? 그 부인이 유서를 써 놓고 죽었습니다. ‘나보다 더 좋은 여자 만나서 잘 사세요.’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제발 다른 사람들의 허물과 현재의 약점들, 그리고 부족한 것들, 그런 것들은 안 보는 것입니다.
  사람은 위로 받는 힘으로 삽니다.
  저는 우리 성가대만큼 은혜로운 성가대를 본 적이 없습니다. 물론 다 여기 앞에 들 있으니까 하는 말입니다만 ...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과거와 허물, 그들의 약점들을 다 잊어버리는 것이 좋습니다.

  ⑤ 과거의 가슴 아팠던 기억들

  우리는 다음의 구절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인생은 고난을 위하여 났나니 불티가 위로 날음 같으니라”(욥 5:7)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시 119:67)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 119:71)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적 일을 생각하지 말라”(사 43:18)

  과거의 슬펐던 것들, 다른 사람의 허물들, 나의 실패에 대한 기억들, 내가 옛날에 잘 했던 것들, 이미 회개한 죄들, 그것들은 기억해서 유익이 없습니다.

  우리가 왜 새로운 결단을 못하고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느냐 하면, 과거의 쓸데없는 기억들에 너무 강하게 붙잡혀 있어서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이 분명한 결단을 하고 정말 남은 인생을 정말 멋지게 살아간 사람 중에 한 사람인데 그 비결이 이전 것은 잊어버리고 깨끗이 잊어버렸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고백입니다.
  “형제들아 ...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빌 3:13)

2.   둘째, 분명한 목표를 설정하는 것입니다.

  결단을 방해하는 것은, 분명한 목표가 없다는 것이 그 이유가 됩니다. 목표 부재가 결단을 방해한다는 것입니다.
  목표가 분명히 있어야 결단도 하는 것이지, 목표도 없는 사람들이 무슨 결단을 하겠습니까?

  결단이 분명했던 바울은 다음과 같이 목표 의식이 분명하였습니다.
  “...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 / ...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 푯대를 향하여 ...”(빌 3:12-14)

  사도 바울의 분명한 목표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같이 아니하여”(고전 9:26)

  위의 말씀의 의미는 바울 자신은 ‘이리 뛰었다 저리 뛰었다.’ 안 한다는 것입니다.
  분명한 목표를 향해서 자신은 달음질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결단하는 사람이 되려면 과거의 망각, 깨끗이 잊어버리고, 두 번째는 분명한 목표가 있어야 분명한 결단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결단하는데는 타이밍이 아주 중요합니다. 그리고 방향도 중요합니다.
  스티븐 코비 박사의 말대로 잘못된 방향으로 260Km를 달리면 뭐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올바른 방향으로 빠르게 달릴 때 효력이 있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결단은 올바른 방향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적절한 타이밍이 필요합니다.
  이 타이밍이 안 맞으면 성공보다는 오히려 실패를 한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역대 대통령들에 대한 분석이 이루어진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는 ‘카터 대통령이 왜 당선되었는가?’라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시 미 국민들은 정치인들이라고 하면 머리를 다 흔들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군인 출신이 한 명 나왔는데 그렇게 신선하게 보이더랍니다. 그 타이밍에 ... 그래서 당선이 되었다고 합니다. 카터였습니다.
  그러면 카터가 그 다음에는 왜 떨어졌느냐? 백성들이 ‘그 사람도 별 수 없더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다시 나타났기 때문에 떨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타이밍의 법칙이라고 합니다.
  결단은 타이밍이 중요하기 때문에 늘 ‘이 메일이 도착했나 안 했나, 문자 도착했나 안 했나, 메시지 도착했나 안 했나?’를 자주 휴대폰과 컴퓨터를 통해 확인하는 것처럼 성령께서 내 마음에 무슨 소원을 보내신 것이 있나 없나 우리 마음을 자주 살펴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3)

  오프라 윈프리에 대해서 쓴 책을 보니까, 그녀는 어떠한 조건을 보더라도 정말 실패할 수밖에 없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는 흑인이었지요, 뚱뚱했지요, 낙태했지요, 마약 중독자였지요, 어릴 때 남자에게 버림받았지요, 사생아였지요, 불친절한 엄마를 두었지요.
  한 번은 그녀가 아주 무명한 방송국 앵커 시절에 염색약을 잘못 써 가지고 머리카락이 다 빠졌다는 것입니다. 정말 절망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상황에서도 그녀가 선택한 태도는 ‘좋다. 여기서부터 다시 시작한다’라는 것입니다.

  오프라 윈프리에 대해 쓴 책의 어떤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니까 ... 그녀가 어떻게 하나님께 축복을 많이 받을 수 있었는가를 자세히 봤더니 ... 그녀는 늘 마음에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마음의 어떤 소원을 보내시는가를 아주 예의주시하면서 살았더란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녀의 마음에 소원을 보내셨을 때, 그녀는 그것을 아주 움켜잡는 데, 타이밍을 붙잡는데 아주 적극성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분명한 목표를 설정할 때, 무조건 그냥 무식한 방법으로 아무 때나 타이밍도 맞추지 않고  설정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소원을 잘 살펴서 성령께서 후원하시는가, 안 하시는가, 하나님의 뜻인가, 아닌가 잘 보면서 설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베드로더러 이르시되 검을 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요 18:11)

  이 말씀은 다음과 같은 의미입니다.
  ‘베드로야,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변경시킬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목표를 세우자는 것이지, 하나님의 뜻에 맞지도 않는 목표를 내 마음대로 세워서 밀고 나가자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이 과거에 있었던 것 깨끗이 잊어버리고 다시 시작하는 것이고, 두 번째가 분명한 목표를 설정하고 새롭게 전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목표를 설정할 때 중요한 점은, 내 마음의 소원을 근거로 목표를 정하면, 급변하는 국제정세에 적응하지 못하여 실패할 확률이 큼으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마음의 소원을 근거로 목표를 설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목표는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라는 근거로 설정해야 합니다.

  바울의 고백입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사도 바울은 ‘예수님께서 내가 가는 길을 올바르게 여기신다’라는 확신을 근거로 ‘나는 이 사명을 목숨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겠다’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요 17:4)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 그것을 근거로 목표를 설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대부분 우리의 은사와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딤후 1:6)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벧전 4:10)

  사람이 분명한 결단을 하기 위해서는 첫번째로 과거에 대해 깨끗하게 잊어버리고, 두번째는 분명한 목표를 설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3.   셋째, 상급을 바라는 것입니다.

  보상 목록을 분명히 바라보는 사람이 결단도 잘 할 줄 안다는 것입니다.
  보상 목록이 불분명하면, 일도 덜하게 됩니다.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특징이 무엇이겠습니까?
  사람은 자신이 열심히 일을 해서 ‘이것이 나에게 득이구나 ... ’라는 것을 믿고 깨닫게 될 때 열심히 일을 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것을 해 봤자 표시도 안 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일을 열심히 안 한다는 말입니다.
  역시 결단도 상급을 분명히 바라볼 때 하게 되는 것이지, 자신이 받을 상급이 무엇인지도 모르고는 결단, 안 하게 됩니다.
  ‘내가 왜 결단을 안 하는가?’
  ‘게을러서 안 하는가?’ 맞습니다. 그러나 내가 결단을 안 하는 근본적 원인이 아주 명확한 원인이 세 가지인데, 과거에 붙잡혀 있어서 못하는 경우가 있고, 분명한 목표가 없어서 못 하는 경우가 있고, 상급을 바라보지 않기 때문에, 상급에 대해서 무식하기 때문에 결단을 안 하는 수가 있단 말입니다.
  상급은 천국 상급도 있지만, 열심히 노력하면 세상에서 얻게 되는, 10년 후에 얻게 되는 상급들도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앞에 놓여진 현실들은 10년 전에 우리가 살았던 성적표와 같습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10년 후에 우리가 또 받을 성적표가 지금 오늘 살아가는 방식의 결과일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상급에 대해서도 아주 예민해야 합니다.

  바울의 고백입니다.
  “...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빌 3:14)

  사도 바울은 분명히 상을 바라보고 결단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전도자의 권면입니다.
  “그러므로 내 소견에는 사람이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나니 이는 그의 분복이라 그 신후사를 보게 하려고 저를 도로 데리고 올 자가 누구이랴”(전 3:22)

  이 말씀은, 사람은 자기 일에 열심을 내고,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나은 행복이 없다고 전도자가 권면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이 언제 가장 행복할 수 있느냐?

  칼 힐티 같은 분은 그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이 자신의 사명을 발견한 날, 그 날이 가장 행복한 날이다’

  사명은, ‘아 내가 남은 생애를 이 일 하다가 죽어야 되겠구나!’라고 깨닫고, 그것을 발견한 날부터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명 발견이란, ‘아, 내가 이제부터 이 일을 하다가 죽으면 세상에서도 보람된 상급이 있겠지만, 천국에서도 상급이 있겠구나!‘라고 믿어지기 시작한 시점인 것입니다.

  사명은, 일반 사명과 특수 사명이 있습니다.
  일반사명은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하게 주어진, 우리 기독교에서 말하는 전도의 사명입니다. 그리고 특별사명은 우리가 가진 개인 고유에게 허락하신 사명들입니다.
  예를 들면, 모든 소방대원은 불을 끄는 사명이 있는데, 불이 안 났을 때는 소방서 안에서 각자 맡은 일을 열심히 하는 사명도 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사람이 과거에 대해서 깨끗하게 잊어버리고, 분명한 목표를 설정하고, 그리고 분명한 상급을 기대하게 될 때 비로소 네번째로 분명한 결단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4.   넷째, 결단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고백입니다.
  “... 좇아가노라 / ... 좇아가노라”(빌 3:12, 14)

  이 말씀은, ‘결단했다.’는 말입니다.

  비가 올 것 같은 날,
  두 자녀가 학교 가기 전에 문 앞에서 말다툼을 하고 있었습니다.
  한 자녀는 우산을 가지고 가자고, 그러나 또 한 자녀는 비가 안 오면 귀찮으니까 가지고 가지 말자는 것입니다. 그 아버지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합니다.
  ‘귀찮지만, 안전한 쪽을 선택할래, 불편하지만 좀 불안전한 선택을 할래’

  결단을 우리가 하고 살아가면 안 하고 살아가는 것보다 훨씬 더 안전합니다.

  결단을 다른 표현으로 선택이라고 합니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했습니다.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열조가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이든지 혹 너희의 거하는 땅 아모리 사람의 신이든지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수 24:15)

  실패를 경험해 본 사람들 2,500여명에게 “당신의 실패 원인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한 참을 생각한 후에 설문에 응했는데, “결단 부족, 우유 부단이었다고 생각을 합니다.”라고 대답하더라는 것입니다.
  잘 몰라서 우유부단하지 않았느냐, 그런 우유부단 말고, 분명히 잘못 된 것을 알면서도 결단을 안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 일이 분명히 옳다.’라는 것을 알면서도 결단을 안 했다는 것입니다.

  링컨은 노예 해방에 대해서 생명의 위협을 받으면서도 그 일이 ‘옳다’라고 믿었기 때문에 결단했고, 그 결단은 흑인들을 살렸습니다.

  2차 세계대전 때 유대인 6천여 명의 목숨을 구한 스기하라 지우네(衫原千畝.1900-86.사진)가 탄생 1백주년 만에 '복권'이 됐습니다.
  일본 정부는 '훈령위반' 이란 명목으로 외교관 자리에서 쫓겨난 지 53년 만에 복권을 시킨 것입니다.
  스기하라는 전쟁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40년 리투아니아 쿠아나스의 일본 영사관 영사대리로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역사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든 것은 인접국 폴란드의 유대인들이 독일군의 탄압을 피해 리투아니아로 몰려와 일본 영사관에 비자를 신청하면서부터 였습니다.
  스기하라는 몇차례 본국 정부에 비자 발급 허가를 요청하는 전보를 쳤지만 매번 거절을 당했습니다.
  유대인에 대한 입국허가는 동맹국 독일과의 대립을 자초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고민하던 스기하라는 일본 정부의 훈령을 무시하는 길을 택했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에게 '통과 비자'를 내주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그가 당시 부인과 함께 밤을 새워가며 손으로 직접 써 발급한 비자는 모두 2천 1백 39건이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겐 그야말로 '생명의 사증(査證)' 이었습니다.
  스기하라는 리투아니아 영사관이 폐쇄돼 철수하는 열차 속에서도 마지막 순간까지 차창 밖으로 손을 뻗어 비자를 건네 줬다고 생존자들은 증언했습니다.
  뒷날 그의 행적이 알려지자 이스라엘 정부는 기념우표를 발행하고 예루살렘 '자유의 언덕' 에 그의 흉상을 세웠습니다. 미국과 유럽 각국에선 그를 기리는 전시회가 잇따랐습니다.
  하지만 정작 그의 조국 일본은 인색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 일본으로 귀국한 그를 기다린 것은 훈령위반에 따른 면직이었습니다.
  최근까지 스기하라의 행적은 일본 국민들 사이에선 거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일본 정부는 스기하라가 본국의 훈령을 위반한 외교관이란 종래의 입장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명예회복을 바라는 유족들의 요청도 번번이 좌절됐습니다.
  그러나 스기하라는 당시 본국의 지시를 받고도 생각을 해 보았던 것입니다.
  ‘이것은 올바른 지시가 아니다.’
  그래서 그는 당시 유대인들에게 통과 비자를 발급하기로 결단하고 행동으로 옮겼던 것인데 그 열매가 이제야 나타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옳은 결단, 그것은 옳은 선택입니다.

  계속해서 사람이 결단을 잘 못하는 이유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① 실패에 대한 두려움 / ② 하나님의 뜻에 대한 판단력 부족 / ③ 집중력 부족 / ④ 자신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모름 등입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결단을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작심삼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단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결단한 결심을 지속시키게 하는 힘, 그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담배에 들어있는 600가지 첨가물이 포함되어 있는데, 독가스실에서 사용하는 시안화수소, 로켓연료인 메타놀, 세정제로 쓰이는 암모니아, 부탄, 좀약, 자동차의 배기가스에서 배출되는 물질 등 각종 독극물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그런데 왜 담배를 못 끊는 것입니까? 결단을 안 해서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담배를 끊겠다는 목표를 세워 본적도 없고, 담배를 피움으로 말미암아 어떤 벌을 받게 된다는 것도 모르고 그러니까 과거로부터 중독되어 왔다는 것만 기억해서 이것이 끊으려고 하면 얼마나 금단이 일어나는가? 그것만 생각하면서 과거에 붙잡혀서 그 나쁜 담배를 계속 피우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담배, 피워도 92살까지 잘만 살더라 ...’
  그런 통계는 어디서 들어 가지고 ...
  확률상, 로또 복권 1등에 당첨되려면 1년 사이에 교통사고가 다섯 번 날 확률이 되는 사람이 로또에 1등도 당선이 된다는 것입니다.
  또 로또에 당선이 되려면, 1년 사이에 벼락을 두 번 맞아야 할 정도로 아주 억세게 확률이 높은 사람들이 로또에 당선도 된다는 것입니다.
  담배를 80년을 피워 가지고 90살 넘게 살려면 1년 사이에 벼락 5-6번 맞을 확률이 되어야 그렇게 담배를 피우면서도 오래 사는 것이지, 아무나 담배 피운다고 오래 사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주일씨가 죽기 전에 ‘담배는 가정도 망치고 개인도 망칩니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것이 맞는 말입니다.
  ‘담배를 피워도 80세 이상 산다.’ 그런 희박한 통계, 어쩌다 한 명 ... 그냥 담배 회사 잘 되게 하려고 특별한 사명을 받고 살아가는 몇 사람들 ... 샘플로 간신히 살아남은 ... 그런 희박한 확률에 목숨을 걸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새해 결심을 비웃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결심을 새해에만 잠시 하다 마는 경향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신발 끈은 계속 풀어지면 다시 묶는 것이 좋습니다. 좋은 결심은 비록 못 이룰지라도 계속 다시 하는 것이 좋습니다.

  구세군의 창시자 윌리엄 뿌드는 20살 때, 다음과 같이 결단했습니다.
  1. 매일 아침 일어나자 마자 기도부터 드린다. / 2. 매일 성경을 네 장 이상을 읽는다. / 3. 마음의 깨끗함을 항상 유지한다. / 4. 이 결심서를 매일 두 번 되풀이해서 읽는다.

  어제 맨 끈은 오늘 허술해지기 쉽고, 내일은 풀어지기 쉽습니다.

  이스라엘 열 두 정탐꾼이 분명히 가나안 땅에 갔다와서, 왜 열 명은 가나안 땅에 대해서 공격하는 일이 불가능하다고 불평을 했겠습니까?
  그 열 명은 가나안 땅에 공격해 들어가지 않기로 이미 결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두 명은 왜 불평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들은 가나안 땅으로 공격해 들어가기로 결단했기 때문입니다.

  왜 이스라엘 정탐꾼 중 두 명만 언어가 달랐겠습니까?
  그들은 가나안 땅으로 공격해 들어가기로 결심을 했기 때문에, 선택했기 때문에 그들의 말은 긍정적 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나중에 하나님께서 불평한 열 명은 어떻게 처리하셨겠습니까?

  다음과 같았습니다.
  “모세의 보냄을 받고 땅을 탐지하고 돌아와서 그 땅을 악평하여 온 회중으로 모세를 원망케 한 사람 곧 그 땅에 대하여 악평한 자들은 여호와 앞에서 재앙으로 죽었고 그 땅을 탐지하러 갔던 사람들 중에 오직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은 생존하니라”(민 14:36-38)

  그러면 하나님께서 좀 더 참아주시지 않고 왜 그 열 명을 포기하셨겠습니까?
  그들은 이미 하나님께서 충분한 근거를 제시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결단을 미루고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그들을 오래 살려두어 봤자 또 이 문제 저 문제 계속 문제를 삼을 것이지 때문에 아예 데려가 버리신 것입니다.

  나오미에게 오르바가 정확하게 자기를 따라오려고 하는 결단적 선택이 없었기 때문에 안 데려 간 것입니다. 결단적 선택이 없는 사람을 데리고 가 봤자, 계속해서 문제만 지적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오미가 또 가로되 보라 네 동서는 그 백성과 그 신에게로 돌아가나니 너도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 / 룻이 가로되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 나오미가 룻의 자기와 함께 가기로 굳게 결심함을 보고 그에게 말하기를 그치니라”(룻 1:15-18)

  이 말은,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따라가는 것이 진리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 경우는 룻이 시어머니를 따라 간 것이 아니라, 아들 둘을 잃고 남편을 잃은 한 연약한 노인을 자기가 함께 살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그냥 한 외롭고 연약한 노인을 혼자 된 여인이 ‘나는 어머니와 함께 살고 싶습니다’라고 강한 결단을 나타내 보이더니, 하나님께 복을 받더라는 것입니다.

  결단 잘 하는 사람이 결단 안 하는 사람보다 훨씬 성공도 많이 하고 하나님께 복도 많이 받습니다.
  옳은 결단을 미루는 사람들은 결국은 실패하고 하나님께 버림받습니다.

  에스더가 그 어린 나이에, 예쁜 여인이 얼마나 아쉬운 것이 많겠습니까? 그런데 모르드개에게 말을 들어보더니 상황인식을 제대로 한 것입니다.
  ‘아, 내가 만약에 여기서 나 혼자 빠져나가서 더 산다고 해도 불명예이겠구나!’
  그리고는 다음과 같은 결단을 하였던 것입니다.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로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에 4:16)

  우리는 언제 죽어도 한 번 죽습니다.

  하나님께서 히브리서 기자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 10:38)

  마귀는 우리를 언제 유혹하겠습니까?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절대 따서 먹지 않기로 결단했다면 마귀가 유혹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결단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을 보고 유혹한 것입니다.
  마귀는 우리가 결단이 제대로 서 있으면 유혹 안 합니다. 해 보고도 그냥 갑니다. 그런데 우리가 결단이 안 서 있으면 죽는 날까지 반복해서 유혹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시니라”(눅 9:62)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세상에 합당치 않다’는 말이 아닙니다. 세상은 그런 사람을 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내게 합당치 않다.’ 말 한 것입니다.

  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마 10:37-38)

  예수님께서는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그들 부모에게, 자녀들에게 쓸데없는 자다.’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말씀은 ‘내게 합당치 않다.’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자기 전문 분야에서는 훌륭하게 인정을 받을지 모르나 내게 합당치 않다.’는 것입니다.

  ‘결단 안 하는 것도 결단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결단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결단하였습니다.
  “... 좇아가노라 / ... 좇아가노라”(빌 3:12, 14)

  10년 후에 명예로운 삶을 선택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러면 결단해야 합니다. 그냥 현재처럼 살다가 죽기를 원하십니까? 그러면 결단 안 해도 됩니다.
  사람하고 생선은 사흘만 내버려두면 변해버린다고 합니다. 5년 후에 더 나은 삶을 살기를 원치 않으면 결단하지 마십시오. 그냥 이렇게 살다가 죽으면 됩니다.

  미켈란젤로가 다윗 상을 조각하기로 결심하고,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다윗이 언제 거인이 되었던가를 자세히 예의주시해서 성경을 봤더니 그가 골리앗을 물맷돌 다섯 개를 던져서 이겼을 때,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윗이 ‘나는 골리앗과 싸우다가 죽어도 좋다.’라고 결단했을 그 시점이 다윗이 거인이 되는 순간이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꾸만 결단이라고 하면, 무엇인가 이루어냈을 때를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마음으로 결단했을 때입니다.

  ‘가족의 대화를 방해하는 장애물이 TV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많은 가족들이 T.V 화면만 쳐다보며 하루하루를 보내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누가 지었는지 모르지만 T.V에 지나치게 몰입하는 자녀와 가족들을 위해 개조한 시편23편을 소개하겠습니다.

  “TV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TV가 나를 푹신한 소파에 눕게 하시며 멸망의 길로 인도하는도다. 내 영혼을 파멸시키고 폭력과 죄악의 길로 인도하는도다. 내가 수없이 결단을 할지라도 언제나 허물어지는 것은 TV가 항상 나와 함께 함이라. TV의 리모컨과 채널이 항상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TV가 내 가족의 목전에서 내게 파멸의 상을 베푸시고 인본주의의 기름을 바르셨으니 내 영혼이 부패하나이다. 나의 평생에 나태와 방탕이 나를 따르리니 내가 TV가 있는 곳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지금 우리의 결단을 누가 방해하고 있습니까? 마귀는 우리의 결단을 방해하는 대상자로 가족 중에 많이 선별합니다. 아니면 교회 내에서 많이 선별하고, 교회에서 없으면 외부에서 영입하도록 만듭니다. 그리고도 없으면 찾아다니게 만듭니다.
  우리의 결단을 지금 누가 방해하고 있습니까?
  결단을 방해하는 대상자들을 과감하게 물리치고, 10년 후, 20년 후, 30년 후 지금보다 더 명예로워지기 위해서 결단하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 바라겠습니다.

 

 자신 용서에 대하여

{누가복음 7:36~50}

 

자신의 현재 비열지수를 알아 볼 수 있는 심리 테스트가 있습니다.
  ‘현재 내가 얼마나 비열하다고 스스로 생각하는가?’
  그 조사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영화 한 편 관람을 끝냈습니다. 지금 일어서려고 하는데 그 직전에 제일 뒤에 사람들이 얼마나 서 있을 것 같은가? 그 수를 예측해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영화 한 편을 봤단 말입니다. 이제 영화 종료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그래서 일어서려고 하는데, 영화를 보는 동안도 좋고, 내가 일어서려는 직전도 좋고, 아무튼 주변에 자리가 비워져 있든, 채워져 있든 상관없이 제일 뒤에 사람들이 얼마나 서 있을 것 같은가? 그것을 짐작해 보는 것입니다.
  마음의 피아노 건반을 눌러보듯이, 다섯 명이 편하면 다섯 명, 열 명이 편하면 열 명, 30명이 편하면 30명, 백 명이 편하면 백 명, 예측해 보는 것입니다.
  ‘몇 명이 편한가?’
  내가 영화를 보는데 극장 제일 뒤 자리 너머에 서 있는 사람들이 많은 것으로 추정되면, 그만큼 그 사람은 자기 자신을 비열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심리적인 테스트 결과이니까 진리는 아닙니다.

  우리는 현재 ‘자기 정죄감’, ‘자기 자신에 대한 용서가 안 됨’ 등의 감정적 고통을 받으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견디다 견디다 못 견디면 “저는 도저히 저 자신이 용서가 잘 안 됩니다.”라고 주변 사람들에게 고백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그것은 어떤 마음에 의해서 그렇게 고백을 하게 되겠습니까?
  사람이 웬만큼 견디기 어려워서는 ‘나는 내가 용서가 잘 안 됩니다.’라고 고백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그러한 고백을 하게 되겠습니까? 위로가 받고 싶어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말로 자기 자신이 용서가 안 되어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 ‘당신 괜찮은 사람인데 왜 그럽니까?’라는 위로를 받고 싶어서 그런 발언을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비열함을 느낌과 동시에 정말로 회개해야 함을 알면서도 동시에 회개도 안하고, 자기 자신에 대한 정죄는 계속 쌓여만 가게하고 그리고 우리 자신에 대한 용서도 못 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지금보다 더 향상시키려면 여러 형태의 노력들을 취하여야 함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죄의식, 죄책이 우선적으로 감소되어져야만 우리가 재기를 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아무리 격려를 해 주고, 아무리 우리에게 새롭게 일어서라고, 노력을 해 보라고, 이야기를 해 줘도 우리가 우리 마음속에 강력한 정죄 의식과 죄의식 등이 내재되어 있으면 그 의식들이 자꾸만 우리를 현실적인 상황들에서 붙잡아 내린다는 말입니다.
  그 죄의식과 용서받지 못했다고 하는 그 정죄의식이 계속해서 우리에게 ‘너는 해 봤자 안 돼. 네 주제에 무슨 일을 해서 뭔 열매를 맺겠니?’ 그러면서 계속 주저앉힌다는 말입니다.

  사람은 죄 용서받았다고 하는 확신이 없으면 확신이 없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죄 용서받은 확신이 없는 사람은 확신이 없는 대로 그냥 무시하고 무슨 일인가를 열심히 하기만 하면 의지의 한국인처럼 열심히 하기만 하면 일이 잘 진행될 것 같습니다만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죄를 끊어내는 능력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죄를 끊어내려고 하면 용기가 있어야 하는데 이 용기를 가지려고 하면 반드시 맞닥뜨려야 하는 것은 바로 두려움이라는 것입니다.
  언제나 용기와 두려움은 마주보고 있다는 말입니다.
  용기를 내려고 하면 두려움 때문에 겁이 나고, 두려움을 극복하려면 용기를 가져야 하고 ... 그렇습니다.

  사람은 현재의 상황들, 현재의 끊어야 하는 것들, 이러한 것들을 끊었을 때 ‘내가 과연 견뎌낼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들이 앞을 가로막아서 결국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맙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이 여인은 대단히 용기 있는 여인입니다.
  여인은 당시 그 동네에서 소문난 여인이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시몬 바리새인은 동네 유지로서, 1년에 한 번 정도 동네 사람들을 초청하여 회식을 베푸는 관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동네 유지로서 누구는 와라, 오지 말라고 말 할 수 없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차별 없이 부르기는 하지만 차별을 두기는 두는 것입니다.
  어떤 차별을 두느냐 하면, 심리적으로 멸시하는 사람들은 예우를 안 하고, 반가운 사람들은 예우를 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우를 비교적 받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예수님께서는 전혀 예우를 못 받으셨습니다.
  원래 당시의 사회가 샌들을 신고 다니기 때문에 먼지를 쓰고 가면 집 안에 들어가기 전에 가장 낮은 종이 발을 씻겨줍니다. 그리고 땀이 많이 흐르니까 감람유도 한 방울 머리에 떨어뜨려 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쩌다 이 집의 주인에게 밉게 보여 가지고 가기는 가셨는데 전혀 반갑다는 예우도 못 받고, 그래서 종이 발도 안 씻겨주고, 감람유도 머리에 떨어뜨려주지 않았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입장이 그런 입장이신데, 거기다가 또 그 동네에서 죄 많기로 소문나고, 지나가면 아이들이 돌까지 집어 던질 수도 있는 그런 여인이 이어 그 집에 찾아 들어온 것입니다.
  그리고는 예수님도 예우를 못 받고 앉아 있는데, 그 예수님 곁에 와서 발에 눈물을 떨어뜨리고, 자신의 머리로 발을 씻기고 옥합의 향유를 붓고 하였습니다.
  그 때 그 방에 있는 사람들이 보고 ‘참 구색 맞추어 잘도 어울린다.’라고 비아냥거렸을 분위기란 말입니다.
  그런 심리적 압박을 가질 수 있는 상황에서 여인이 들어와 예수님 발 앞에 무릎꿇고 그 발에 눈물 흘리고 이것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절대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열정은 여인에게서 예수님을 사랑하는 열정이 아니면 도저히 나올 수 없는 그런 행위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때 그 여인에게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 사함을 얻었느니라 하시니”(눅 7:48)

  그런데 우리가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알기로 죄란 분명히 예수님의 보혈 흘림을 믿는 대가로 받게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롬 5:1, 9)

  그런데 사람은 회개하는 대가로 용서를 받는 것인데, 예수님의 발에 눈물을 떨어뜨리고 향유 붓고 ... 행위로 어떻게 용서를 받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러면 이것은 심각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다면 ‘행위로도 죄를 용서받을 수 있구나!’라는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선한 행위를 많이 하면 많이 할수록 죄를 더 많이 용서 받을 수 있겠구나!’라는 해석도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면 더 나아가 ‘헌금을 많이 하면 죄 용서도 많이 받겠구나, 금식하면 용서 더 많이 받겠구나.’라는 해석도 가능합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죄 용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희생을 믿음으로만 받습니다.
  사람은 금식한다고 죄 용서 받는 것 아닙니다. 금식하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를 위해 피 흘려주셨다는 것을 믿으면 용서가 가능하지만 금식을 40일 아니라 400날을 하면서도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피흘렸다는 것을 못 믿으면 용서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피 흘려 돌아가신 것도 아니고 여인이 예수님을 찾아가 그 압박스러운 분위기 가운데서 눈물을 흘리고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씻기고 향유를 뿌렸다고 해서 어떻게 죄 사함의 선포까지 받을 수 있었겠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중풍병 걸렸던 사람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바가 있으셨습니다.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마 9:2)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막 2:5)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그 중풍병자가 마음 속으로 죄를 회개하는 것을 아셨고 선언해 주셨던 것입니다.
  역시 이 여인도 예수님을 찾아 나와서 자신이 잘못을 했다는 것을 인정하고 마음 속으로 얼마나 자기가 나쁜 사람이라는 것, 자신이 얼마나 비열하다는 것, 이것을 다 인정했기 때문에 ‘여인아 네 죄 사함을 받았다.’고 선언을 해 주셨다는 말입니다.
  문제는 왜 거기서 여인의 그러한 행위 끝에 죄를 용서받았다고 하는 것을 단적으로 선언해 주셨겠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 여인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확실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수모와 수치를 당하더라도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을 위해서는 기꺼이 참을 수 있습니다. 다른 것은 못 참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대상을 위해서는 과감하게 참을 수 있는 용기가 생긴다는 말입니다. 그것을 보고 사랑의 힘이라고 합니다.
  이 여인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다면 감히 그 압박스러운 분위기, 자신을 멸시하는 분위기를 절대 뚫고 못 들어옵니다.
  그런데 여인은 그 분위기를 ‘해 볼테면 해 보라고’ ‘멸시를 하려면 하라’고 그리고 과감하게 들어와서 누가 보거나 말거나 자신이 할 일을 다 했던 것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이는 불가능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의 바탕 위에 선언을 해 주신 것입니다.
  ‘네가 죄 용서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 여인에게 이런 선언이 아무 때나 효력이 발생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에게만 효력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정말로 죄 용서함을 받았다는 사실을 내가 나 자신이 비열함에도 불구하고, 나 자신이 정말로 모순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나 자신을 도저히 이해하고 싶지 않고 용서하고 싶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치료받을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으로부터 ‘내가 너의 죄를 사하였다. 너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느니라’라고 선언을 받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정죄감, 이것은 치료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치료받을 수 있는 길은 분명히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눅 18:8)

  이 말은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방법이 있기는 있는데 과연 그 방법을 선택하는 사람이 몇이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비열지수가 아무리 높아도 자기 자신에 대한 정죄감이 아무리 강할지라도 용서받는 방법이 있기는 있습니다.

  어떻게 용서를 받느냐면, 예수님께로부터 ‘내가 너의 죄를 용서하였느니라. 네 많은 죄가 사하여졌느니라’라는 선언만 받아내면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무리 선언을 받아도 이것이 믿어져야 말이지요. 아무리 선언을 해 주셔도 이것이 믿어져야 말이죠, 안 믿어지는데 어떡할 것입니까?
  그런데 어떠한 경우에 믿어지느냐?
  예수님을 사랑하면 믿어집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예수님께서 아무리 ‘내가 너의 죄를 용서하였노라. 너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노라’아무리 많이 억만 번을 말씀해 주셔도 안 믿어지고 안 받아들여진단 말입니다.
  안 믿어지고 안 받아들여지는데 어떻게 치료가 이루어지겠습니까?
  그래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고 도저히 자기 비열지수가 너무너무 높게 인식이 되고, ‘세상에 나처럼 비열한 인간이 어디 있나? 내가 바다 위를 안 걸어봤나? 내가 변화산에서 엘리야와 모세를 안 만나봤나? 예수님께서 세상에서 이루신 기적을 다 기록하면 세상에 있는 책 가지고 부족할 정도로 수많은 기적 베푸시는 것을 눈으로 목격을 안 했나? 세상에 그런 내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할 수 있었을까?’
  베드로는 자기 자신에 대한 비열지수에 대한 인식도가 너무너무 강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는 말입니다.
  베드로는 참, 어디 가서 죽어버리지도 못하고 아무리 자기 자신을 위로해도 위로가 안 되고, 도저히 용납하려고 해도 용납이 안 되고 그래서 선택한 방법이 옛날 직업인 고기 잡으러 간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선택한 방법이 옛날 직업으로 되돌아가는 방법이었는데,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람을 치료하는 방법으로 무슨 방법을 선택하셨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적어라. 첫째, 너 그러면 안 된다. 둘째, 너 지금 제정신이 아니다. 셋째, 정신 차려라. 넷째, 가자’ 그런 것이 아니었단 말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베드로를 다시 제정신으로 돌아오게 하셨겠습니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 또 두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 세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요 21:15-17)

  핵심적인 것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만큼 예수님께서 자기를 용서하셨다는 것이 믿어질 것이고, 베드로가 예수님을 사랑 안 하면 예수님께서 아무리 ‘내가 너를 용서했다’고 말을 해도 못 믿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스스로 용납이 안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는데 다시 세 번 긍정 고백을 시키시면서 ‘아, 내가 예수님을 사랑하기는 하는구나’라는 것을 재인식을 시키셨단 말입니다. 재충전을 시키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베드로도 자연스럽게 자신이 용서받았다는 것도 믿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인도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여인에게 없었다면 예수님께서 여인에게 ‘너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는 말을 억만 번 말을 해도 못 믿었을 것입니다. 못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오히려 붙잡아도 놓으면 도망가고, 붙잡으러 가면 도망가고, 자꾸 피해 다녔을 것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여인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강해지니까 그 압박스러운 분위기, 그 멸시스러운 분위기를 다 헤쳐서 오히려 적극적으로 나와서 다른 사람이 자기를 비난하는 사람들이 자기를 쳐다보든가 말든가 눈물을 흘리고,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씻기고 오히려 예수님의 품안으로 뛰어 들어왔단 말입니다.

  우리가 자신의 비열성, 정죄감을 어떻게 극복해야 되겠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길 외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고, 도저히 자기 자신이 용납이 안 되고 용서가 안 되자 ‘나 고기 잡으러 간다’고 도망을 갔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좇아가셔서 ‘너, 나를 사랑하느냐, 사랑하느냐,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셔서 다시 온전한 정신으로 만들어 예수님 승천하시는 것 본 다음에 그리고 베드로가 그 때 남아 있는 그 충전 분량으로, 충전 분량이 떨어지기 전에 기도를 시작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참 어리석은 생각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조금 더 죄를 짓고, 회개할 것 한 번에 모아서 하면 되니까 이번 주까지 쉬고 다음 주에 금식하지 ... ’
  그러나 사람이 그렇게 해 가지고 회개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기도는 뭔가 영적인 충전 분량이 남아있을 때, 그 힘을 가지고 재충전하고, 재충전하고 그래야 충만이 오지, ‘그냥 이 참에 떨어뜨리는 바람에 왕창 떨어뜨리고 새로운 충전을 받지 ... ’ 그러다가는 영영 세상으로 가 버리게 되는 수가 있습니다.
  다시 재기할 수 있는 힘이 생기지 못하게 되는 경향들이 있게 된단 말입니다.

  우리가 현재 나 자신을 있는 모습 그대로 용납하고 받아들이려고 별 방법을 다 동원해 보십시오. 되는가?
  오직 한 가지 방법이 있는데 예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 자신이 용서가 되고 비열지수가 극복이 되는 것이고,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고, 다른 방법으로 의지로 자기 자신을 용서해 보려고 하면 안 된단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잠언 기자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노하기를 더디하는 것이 사람의 슬기요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자기의 영광이니라”(잠 19:11)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용서에 대한 다섯 가지’의 표현들 입니다.

  ① ‘카파르’.

  이것은 ‘덮어준다.’는 뜻입니다. 매사를 시시콜콜 따지고, 들춰내고,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덮어주는 것’이것이 용서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3년 전의 죄, 5년 전의 죄, 10년 전의 죄, 20년 전의 죄를 계속 들춰내고 또 들춰내는 것을 아무리 안 하려고 해도 우리 죽는 날까지 반복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안 할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는데 그 들춰내는 에너지를 가지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들춰내는 에너지를 가지고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께서는 ‘너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라는 메시지가 믿어지게 되고 그것이 믿어지면 우리도 나 자신을 덮어주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안 믿어지면 자신이든 남의 죄든 지난 죄들을 들춰내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언제고 자꾸만 내가 나의 과거의 모든 죄들을 낱낱이 다 들춰내고 싶을 때이면 그 때는 다음과 같이 판단을 하면 됩니다.
  ‘아, 지금 내가 또 성령의 충만이 사라졌구나’
  ‘아, 지금 또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또 약해지기 시작했구나’
  ‘지금 또 주님이 나를 사랑한다는 것이 또 안 믿어지기 시작하는구나’
  ‘아, 내게 성령의 충만이 또 떨어졌구나!’
  사람이 어떤 병에 걸리면 한 가지 약을 죽는 날까지 계속 먹어야 하는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위와 같을 시에는 즉시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충만을 채워야만 다시 나의 과거를 다 덮을 수 있는 힘과 용기가 생기게 된다는 말입니다.

  ② ‘나샤’.

  이것은 ‘무거운 짐을 들어준다’, ‘등에 진 짐을 벗겨준다’는 뜻입니다.

  어느 때고 내가 과거에 지은 죄들 때문에 갑자기 힘에 겨워지고, 주저앉고 싶고, 다 포기하고 싶고, 어디로 도망가고 싶은 생각이 들거든, ‘아 나는 역시 죄가 많은 사람이야’라고 생각할 일이 아닙니다.
  ‘아, 죄는 인류 그 누구나 다 똑같이 많은데 내가 또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약해졌구나, 주님께서 나를 사랑한다는 것이 또 안 믿어지기 시작했구나, 또 성령 충만이 내게서 사라졌구나’라고 생각을 하고 즉시 재충전을 받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남성들이 사용하는 전기 면도기가 충전 받으면서 쉬면서 그럽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죽는 날까지 죄 용서함을 우리가 받았다는 것, 받고 있다는 것, 앞으로도 받을 수 있다는 것 이것을 믿으면서 충전 받으면서 쉬면서 그래야 합니다.

  ③ ‘살라크’.

  이것은 ‘물에 흘려 보낸다’ ‘지워 버린다’ ‘도말’이라는 뜻입니다.
  언제고 내가 과거에 지은 죄들에 대한 기억으로 인하여 ‘나는 도대체 왜 이렇게 비열할까?’라는 생각 때문에 괴로울 때는 ‘아, 내가 또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또 안 믿기 시작했어, 내가 또 주님을 사랑하지 않기 시작했어, 또 내가 성령 충만 받는 일에 게을러지기 시작했어’라고 판단을 하면 맞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할 때는 빨리 재충전을 받고 내게 생각으로 떠오른 과거의 죄들을 과감하게 물에 떠내려 보내버려야 합니다. 흘려보내야 한다는 말입니다. 지워버려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가지고 ‘맞아, 내가 은혜 받아 가지고 깜빡 잊고 살았는데, 그래 내가 이런 죄도 지었지, 맞아 나는 원체 나쁜 놈이야, 맞아 이런 죄도 지었지, 잊어버릴 뻔했네, 다시 안 잊어버리도록 수첩에 적어 놓아야지’라고 하며 낱낱이 우리 죄를 모아들이는 것은 양심적인 것이 아니라 성령의 충만이 사라진 사람들이 하는 행동입니다.

  ④ ‘아폴루오’.

  이것은 신약에서 나오는 헬라어인데 ‘탕감해 준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누군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못한다 라는 개념을 어떻게 이해하면 가장 쉽겠습니까?
  그것은 이렇게 이해하는 것이 쉽습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얼마간의 물질을 돌려 받을 것이 있다 라고 믿는 개념과 같습니다. 우리가 예를 들어서 누군가에게 돈을 빌려주었는데 그 사람에게 떼어 먹혔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안 돌려준단 말입니다.  얼마나 분합니까? 그 감정과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할 때 느껴지는 감정이 꼭 같지는 않지만 개념상 거의 같단 말입니다. 그런데 언제 비로서 우리가 마음이 편해지느냐 하면, ‘안 받고 말아, 포기, 탕감’ 이렇게 선언을 해 주고 정말 마음 속으로 믿으면 그제서 야 우리 마음에 자유함이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눈감기 전에는 절대로 안 받을 수 없어, 받아야 해, 갖은 수단을 다 동원해서 반드시 받아야 해, 난 못 받으면 눈 못 감아’
  이런 생각을 가진다면 역시 용서 못하는 개념과도 같은 개념이라는 말입니다.

  그랬을 때 예수님께서는 왕의 비유에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주인이 저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마 18:32)

  탕감.
  이것을 용서라고 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 1:9)

  우리가 언제든지 ‘내가 또 다시 옛날에 지은 죄들이 막 생각이 나는 것을 보니까 수면 위로 떠오르는 것을 보니까 나는 역시 나쁜 놈이야’이렇게 해석하는 것은 잘못 된 해석 방식이라는 겁니다.
  ‘아, 내가 또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약해졌구나!’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는 마음이 약해졌구나!’
  ‘내가 성령 충만이 약해졌구나!’라고 생각을 한 후에 ‘그러면 빨리 재충만함을 받아야지’라고 생각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 수백 번 더 고백한 것인데 또 믿어지지 않는 상태에서 고백해야지’ 그러면 헛수고라는 것입니다. 믿어지지도 않는데 또 고백하고 있으면 충전된 배터리도 없는 것을 가지고 계속 파워를 넣으려고 하는 시도와 같단 말입니다.

  그렇게 하지 말고 충전을 시켜서 한 번에 파워를 넣으면 바로 전기기가 작동이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옛날에 받았던 은혜를 되살려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죄를 지었다고 해서 옛날에 받았던 은혜까지 무시하면 안 됩니다. 우리가 지금 새롭게 죄를 지었다고 해서 옛날에 용서받았던 것까지 ‘무효’그런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가 무슨 권한으로 옛날에 용서받았던 것을 무효화하느냐 말입니다. 우리가 무슨 권한으로 옛날에 사면 받았던 것을 다시 복권시키느냐 말입니다. 그럴 수 없단 말입니다. 우리는 그럴 권리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용서받았다고 하는 것은 탕감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새롭게 지은 죄만 다시 계속을 하면 되는 것이지, ‘아, 나는 새롭게 또 죄를 지었으니까 나는 나쁜 인간이야. 그러므로 옛날에 탕감 받았던 것, 다시 회복시켜야 해. 그럼 내 죄는 내가 잘 알지, 이것도 탕감 받았고, 저것도 탕감 받았고 ...’ 그러다가는 우리에게 심리적 옥졸들이 붙여진다는 말이 그 말입니다.

  ⑤ ‘카리조마이’.

  이것은 ‘은혜를 베푼다’는 뜻입니다. 순 공짜로 은혜를 베푼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전혀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 받는 것을 은혜라고 합니다.

  나폴레옹 때의 일입니다.
  한 병사가 잘못을 해서 사형 당할 위기에 처해져 있었습니다. 그랬을 때 황제는 사형을 선고하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할 말을 물었을 때, 그는 ‘용서해 달라’고 빌었습니다. 그러니까 나폴레옹이 ‘자네는 용서받을 자격이 없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 병사의 어머니가 황제에게 ‘은혜를 베풀어달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황제는  ‘자네는 은혜 베풂을 받을 자격도 없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병사의 어머니가 말했습니다.
  ‘황제여, 은혜란 원래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 받는 것을 은혜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황제를 설득해서 사형 선고의 면함을 받습니다.

  그렇습니다.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 받는 것, 그것을 은혜라고 합니다.
  그런데 언제고 우리가 옛날의 죄가 생각이 나서 ‘아, 나는 도저히 이제는 안 되겠다. 더 이상 용서 못 받는 것으로 끝내야지, 내가 이 상황에서 또 용서를 요구한다는 것은 이것은 말이 안 돼’라고 생각하고 포기하고 싶을 그 때 우리는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주님, 제게 은혜를 베풀어주세요.’ 그래야지, ‘내가 양심이 있는 인간이라면 더 이상 또 여기서 용서를 요구할 수는 없지, 그냥 죽어버려야지’ 이렇게 생각하는 것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러할 때는, ‘주님 제게 은혜를 베풀어주세요.’라고 하며 끝까지 주님 품에서 떨어져서는 안 됩니다.

  한 아들이 밖에 나가서 온 몸에 흙탕물을 뒤집어쓰고 들어 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어머니에게 와서 하는 말이 자기 친구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을 하더랍니다. ‘나쁜 녀석! 나를 진흙탕에 처넣고 내 책까지 진흙으로 던져버리고 정말 너무너무 억울해 ... ’
  그래서 엄마가 물어봤습니다.
  ‘그래서 너는 어떻게 했니?’ ‘가만 안 두었지요!’ ‘어떻게 가만 안 두었니?’ ‘그냥 용서해 버렸지요.’ 그러더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현재 우리 자신들을 뒤돌아볼 때 도저히 가만 둘 수 없는 상황입니다.
  더 이상 용서하고 싶지 않은 상황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비열지수가 너무 높아서 그렇습니다. 그런데 어떡하겠습니까? 가만 두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자신들을 용서해 버리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길 바라겠습니다.  

 

행함에 대하여

{야고보서 2:14~26}

 

고위공직자 1,000여명이 모인 자리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그 강단 앞에는 1M정도 되는 깡통 탑이 쌓여 있었습니다. 연사가 나와서 청중인 고위 공직자 1,000여명에게 다음과 같은 주문을 했습니다.
“지금부터 이 빈깡통 탑을 향하여 시선을 집중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강력한 시선 에너지를 이 깡통에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여기 대략 1,000여명의 청중이 모여있기 때문에 강력한 시선 에너지를 보내면 추측컨대 5분 안에 이 깡통 탑은 무너지게 될 것입니다.”
  연사의 설득에 응한 사람들은 빈깡통 탑을 향하여 자신의 모든 시선적 에너지를 동원해서 노려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4분이 지났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5분이 되었을 때 결과는 아무 일도 안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연사가 그 깡통 탑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치자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1,000여명 강력한 시선적 에너지를 모아 그 빈깡통 탑을 아무리 노려보고 있어도 그 탑에는 전혀 조금도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연사의 손으로 가볍게 친 행동에 의해 그 깡통 탑이 무너져 내리고 말았습니다.

  영적인 행동을 하면 영적인 결과가 나타납니다.
  정신적인 행동을 하게 되면 정신적 결과가 나타납니다.
  육적인 행동을 하게 되면 육적 결과가 나타납니다.
  그러나 영적이든, 혼적이든, 육적이든 아무 행동도 하지 않으면 아무 결과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사람이 하루 세 시간씩을 꾸준히 걸으면 7년이면 지구 한 바퀴 거리를 돌 수 있다고 합니다.
  사람이 하루 15분씩 한 나라의 회화를 공부하면서 암기를 하면 3년이면 한 나라의 기본 회화를 모두 익힐 수 있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회가 오면 행동하겠다.”고 벼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행동하면 기회가 찾아오지만, 기회가 찾아오면 행동하겠다고 벼르다가는 아무 일도 일어 나지 않을 경향이 높다는 것입니다.

  1878년 미국의 로더퍼드 헤이스가 1표 차이로 대통령에 당선된 일이 있습니다.
  1923년 히틀러 역시 한 표 차이로 나치스 당수로 취임하게 되었습니다.
  세계 공용어가 영어와 독일어 중 한 표 차이로 영어로 결정이 났습니다.
  이 말은 누군가 한 표의 행동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행동하면 결과가 나타나고 행동하지 않으면 그에 따라 아무 결과도 나타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사람은 별을 향해 나아가다 보면 천장이라도 닫게 되는 법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좋은 기회가 찾아오면 그때 행동할 것”이라고 말을 하고 벼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상점에서 바겐세일을 할 때까지 기다리는 사람들이나, 회사에서 중요 임원들이 유고 당하거나, 보직해임 당하면 자신이 그 자리를 올라가 보겠다고 막연하게 기다리는 사람들과 같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행동을 해야 기회가 만들어집니다. 그리고 그 기회를 붙잡고 계속 행동해야 더 나은 기회가 온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기회가 다가오면 그제야 행동을 하겠다고 너무너무 게으르게 앉아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통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롬 12:11)

  그러니까 이 말씀은 “행동하라”는 얘기인 것입니다.

  1980년 카터 대통령은 재선에서 실패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부채를 계산해 보니 100만 달러였다고 합니다. 결국 그는 여러 가지로 이 100만 달러를 어떻게 갚을 수 있을 것인가를 연구하다가 결론을 내렸습니다. ‘행동 외에는 100만 달러를 갚을 수 있는 방법이 없다.’문제는 어떤 행동이냐 라는 것입니다. 그는 그 때부터 자서전을 쓰고, 강연을 다니고, 적극적으로 또 돈을 벌 수 있는 길을 모색하고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카터는 100만 달러를 다 갚았고, 노벨상을 받았고, 지금은 집 없는 사람들 집 지어 주러 다니고 있습니다.

  미국의 어느 개미학자의 조사 결과입니다.
  개미에 대해서 연구해 보라고 하는 다음과 같은 성경 말씀의 권면을 받아들였습니다.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로 가서 그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잠 6:6)

  그는 “왜 잠언 기자는 이렇게 말씀하셨을까?”하고 개미에 대해서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조사 결과 개미 100마리 중 15%는 생산적으로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반면, 나머지 85%는 게으르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다음에는 15%의 개미를 따로 분리시켰더니 역시 15% 중에서 또 15%의 개미들만 열심히 일들을 하고 나머지 85%의 개미는 다시 게으르게 움직이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85%의 개미들을 따로 분리시켰더니 역시 85%의 개미들 중 15%만 열심히 일을 하고 나머지 85%는 게으르게 움직이더라는 것입니다.

  결국 ‘개미에게로 가서 그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는 것은 “세상의 85% 게으른 자들을 따라 하지말고 부지런한 15%의 사람들이 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행동하지 않으면 결과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래니 /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마 7:26-29)

  그런데 이번에는 행동을 하기는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행동하느냐 하면, 부실스럽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한 말을 듣고 그대로 행동하지 않고 편법적으로 행동한 사람에게는 어떤 결과가 나타나겠는가?’ 그것은 ‘모래 위에다가 집을 짓는 결과와 같은 결과가 나타날 것이다’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모래 위에 집을 지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부실공사는 공사를 안 하는 것이 아니라 하기는 하는데, 여러 가지를 부실하게 처리하는 것입니다.
  그 부실공사의 결론은 성수대교 끊어져서 여러 사람이 죽는다든지, 부실공사는 삼풍백화점이 무너져서 여러 사람 여러 가족에게 피해를 입힌다든지 하는 그런 경향입니다.
  그래서 행동은 전혀 안 하는 행동이 있고, 행동을 해 봤자 전혀 좋지 못한 결과를 맞이하는 그런 행동이 있을 수 있단 말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행동을 이끌어내시기 위해서 어떻게 명령하셨는가, 가르치셨는가를 볼 수 있습니다.
“뭇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막 1:22)

  한 번은 사람들이 그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르치시는 것이 서기관과 같지 않고, 권세 있는 자들과 같다 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무리가 그렇게 기록했단 말입니다. 특별히 마가가 그렇게 기록을 했습니다. ‘가르치시는 것이 서기관과 같지 않고 ... ’ 서기관들은 정말 공부를 많이 한 사람들입니다. 당시의 출판 계통에서 나와 있는 책을 모조리 읽은 사람들이 서기관들입니다. 한 권이라도 빼 놓고 읽으면 권위가 사라질 정도였습니다. 아주 큰 수치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가르치는 것이 서기관들과 같지 않고 예수님께서는 권세가 있으셨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예수님의 가르침은 서기관들과 같이 가르치는 것은 많이 가르치는데 행동하지 못하게 하시는 가르침이 아니고, 결국 예수님의 가르침은 행동하게 하는 가르침 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도대체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가르치셨기에 사람들이 결국은 행동을 하게 하셨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듣고, 이리 해석하고 저리 해석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주시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가르침이 명쾌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교육 방식은,
  명령 하셨습니다. “가서 끌고 와라”, “가서 전도해라”, “깨어 기도해라” 그래서 변명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에디슨이 말했습니다.
  ① 원하는 목표를 세우라
  ② 목표를 이루기 위한 계획을 세우라
  ③ 마감일을 정하라
  ④ 그 목표를 입으로 시인하고 행동해라

  느헤미야에 기록된 내용입니다.
“성 역사가 오십 이일만에 엘룰월 이십 오일에 끝나매”(느 6:15)

  느헤미야는 당시 무너진 성을 재건하는 일을 52일만에 완성시켰습니다.

  그러니까 야고보가 말 한대로 행함, 행동이라고 하는 것은 성취로 나타나든지, 기도하는 일로 나타나든지, 전도하는 일로 나타나든지, 봉사로 나타나든지 어떠한 형태로든지 나타나지 아무 형태도 취하지 않는 행함의 결과라는 것은 없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행동이라고 하는 결과로 나타나게 되어 있다 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아무 행동도 안 하게 되면 그 사람은 믿음이 없는 것이란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 좀 다니는 사람들에게 믿음 없다고 하면 기분 나빠합니다. 그러면서도 행동은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왜 행동하지 않느냐?’고 물으면, “제가 믿음이 없어서 행동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하지 않고 여러 잡다한 이유들을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우리 교회 내에 이런 문제가 있어서, 주변 성도에게 이런 문제가 있어서, 우리 집에 이런 문제가 있어서...’

  그런데 야고보는 제발 그러지들 말아 달라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행동하지 않는 절대적인 이유는 믿음 없음이다.’라는 말씀으로 오늘 본문 말씀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병자들에게 기적적으로 죽은 나사로를 살려내듯이 기적을 나타내주시지 않고 계속해서 무엇인가 요구를 하셨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네 침상을 들고 걸어가라’고 하셨습니다.

  중풍병자가 어떻게 침상을 들고 걸어갑니까?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마 9:2)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해 앉은뱅이를 치료시키신 일이 있으셨습니다.
“루스드라에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이 있어 앉았는데 나면서 앉은뱅이 되어 걸어 본 적이 없는 자라 / 바울의 말하는 것을 듣거늘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 큰 소리로 가로되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하니 그 사람이 뛰어 걷는지라 / 루스드라에 발을 쓰지 못하는 앉은뱅이에게 바울이 말을 했습니다.”(행 14:8-10)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 발로 일어서라’
  앉은뱅이가 어떻게 일어섭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자꾸만 병자들에게 무엇인가 요구를 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도 믿음으로 인한 행동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하시니라”(막 16:20)

  그러니까 제자들이 행동할 때 그것을 믿음으로 간주하고, 믿음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행동한다 라고 계속해서 성경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요 14:12)

  이 말씀은, ‘믿음이 있는 사람은 행동하고, 믿음이 없는 사람은 행동하지 않는다.’라고 규정을 짓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예수님께서는 행동들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이에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손을 내밀라 하시니 저가 내밀매 다른 손과 같이 회복되어 성하더라”(마 12:13)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마 9:6)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요 9:7)
  계속해서 행동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마 17:20)

  이 말은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도 없다는 것이 아니라, 너희들에게 있는 믿음 중에서 그 믿음을 한 겨자씨만큼만 사용하면 산도 옮겨질 것이다 라고 가르치셨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대로 하면 믿음이 있는 사람은 행동하고, 행동하는 사람은 믿음이 있다는 말입니다.

  야고보가 한 말도 똑같습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행동하고 믿음이 없는 사람은 행동하지 않을 것이다.”

  오늘 우리가 주일을 맞이해서 예배당에 나오는 행동의 대가를 치렀습니까? 잘하셨습니다. 그것은 믿음의 대가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없으면 절대로 나와지지 않습니다. 이렇게 사람은 믿음만큼 행동하게 되어진다 라는 말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나님께서 들어주실 것이라는 생각은 믿음이 아닙니다.
  자기의 신념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 중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부분들을 하나님께서는 들어주실 수 있다’이것이 믿음입니다.

  이렇게 믿음은 잘 생각해 보면 그 본질이 믿음인 것과 아닌 것과 구분이 됩니다.

  미국의 대통령 후보 예비선거가 한창일 때 일이었습니다.
  민주당 대통령후보와 공화당 대통령 후보 사이에 연설 대결이 관심사였습니다. 한 후보가 연설을 아주 잘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상대 후보가 한 마디로 핵심을 지적했습니다. ‘연설은 굉장히 잘하는데, 그 연설의 내용이 뭐냐?’ 핵심 내용이 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가만히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가만있어 봐. 저 사람 진짜 말을 잘 하는데 핵심 내용이 뭔가?’ 그리고 그 다음부터 핵심 내용을 살펴보기 시작하니까 핵심 내용이 없었단 말입니다.

  야고보가 우리 교회 안의 성도들에게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믿음, 믿음, 믿음, 믿음 하는데 믿음의 핵심이 뭐냐?’이렇게 묻는 것과 똑같습니다.
  믿음의 핵심은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당신 지금 행동하느냐?’
  그것을 오늘 야고보서 2장에서 아주 우리에게 적나라하게 지적한 것입니다.

  아주 머리 좋은 목사님이 있었다고 합니다.
  예배당 건축을 위해서 성도님들에게 광고를 했는데, 준비 위원들이 모였습니다.
  그랬더니 위원들 전부가 준비 기도를 먼저 하자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목사님께서 그랬다고 합니다.
  ‘먼저 헌금부터 하고 그리고 나중에 기도합시다. 한 번 바꾸어 봅시다.’
  ‘먼저 행동부터 하고 그리고 안 되는 부분들은 기도로 보충하고 다시 행동합시다’그런 말입니다.

  우리는 왜 기도하는가?
  행동하기 위해서 기도합니다.


  그런데 너무 오랜 시간 기도만 하고 행동은 안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기도의 자리로 행동하지 않는 사람들이 숨어있을 수 있는 시간이 많다는 것입니다.
‘뭐 하느냐?’ 물어서 ‘아무 것도 안 합니다’그러면 비판을 받으니까, ‘뭐 하느냐?’그러면 ‘준비기도하고 있습니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준비 기도가 너무 길다는 것입니다.
  10년 전부터 계속 준비기도만 하고 있으니까요, 20년 전부터 계속 준비기도만 하고 있으니까...
  도대체 예수님 오실 때까지 준비기도만 하다가 갈 것인지, 우리는 지금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친구 세 사람이 그들이 가지고 있던 돈을 은밀한 장소에 숨겼습니다.
  그런데 그 중 한 사람이 돈을 훔쳤습니다.
  며칠 후 세 친구는 솔로몬 왕을 찾아가 누가 범인인가를 판정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러자 솔로몬 왕은 문제를 낼 테니 답을 하라고 했습니다.
  한 부자 처녀가 어떤 청년에게 시집가기로 약속했는데 그 처녀는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졌다. 그래서 처녀는 약혼한 청년을 찾아가 위자료를 줄테니 파혼해 달라고 하자 청년은 위자료 따위는 필요 없다면서 파혼에 동의해 주었다.
  그 후 처녀는 어떤 노인에게 유괴되었다. 돈을 내놓으면 보내주겠다고 위협하는 노인에게 그녀는 '내가 약혼한 남자에게 파혼을 요구했을 때 그는 위자료도 받지 않고 나를 놓아주었는데, 당신도 똑같이 나를 놓아주어야 한다'고 요구를 했다.
  노인은 즉석에서 처녀를 보내주었다. 이 가운데 누가 제일 칭찬을 받아야 할 사람인가?
  첫 번째 사람은 청년이, 두 번째 사람은 처녀가 그리고 세 번째 사람은 “이 얘기는 뒤죽박죽이어서 나는 알 수가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솔로몬 왕은 세 번째 사람을 가리키며 “네가 범인이다. 너는 오로지 돈밖에 생각하지 않았다.” 다시 말하면, 그 사람의 마음 상태에 따라 그 사람의 행동과 말로 나타나게 됩니다.

  사람이 왜 행동하지 않게 되는가?
  행동할 수 있는 쪽으로 머리가 사용되는 것이 아니고 행동 안 하는 쪽으로만 머리가 계속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행동을 안 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사람이 왜 게으르겠습니까
  사람이 행동하는 쪽으로 머리가 사용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게으른 쪽으로만 계속해서 연구 개발 발전 노력 중이기 때문에 행동하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야고보가 말한 것의 핵심이 그것입니다.
‘왜 행동하지 않게 되는가? 내가 원인을 말해 주겠는데 믿음이 없어서 그렇다.’
  도대체 야고보는 믿음이 없어서 행동하지 않게 된다는 것을 계속해서 우리에게 요구하고 인정시켜서 뭘 어떻게 하겠다는 것이냐 말입니다.
  그냥 믿음 없으니까 행동하지 않게 된다 라고 인정만 받으려고 하는 것이냐, 그 고백만 받아내려고 하는 것이냐, 아니면 이 믿음이 없으므로 사람이 행동하지 않게 된다는 것을 인정받고 고백을 받아 가지고 그 다음에 뭘 어떻게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낙심이 오면 아무 행동도 안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행동을 꾸준히 하다가 조금만 마음이 낙심이 되고 실망이 되고 좌절되면 그냥 하던 것 다 관둬 버리고 아무 행동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토마스 버츠는 어둠 속의 호랑이들이라는 책에서 베일리 서커스단이 바르눔이라는 곳에서 공연하는 도중 전기가 나갔을 때의 상황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관객들과 곡마단은 그야말로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있었습니다. 그때 마침 조련사가 호랑이 우리 안에서 작업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매우 위험한 순간이었습니다. 불이 들어왔을 때 사람들은 모두 안도의 숨을 내쉬었습니다. 조련사가 살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TV 방송사와 신문사 리포터들이 인터뷰를 하면서 그에게 비결을 물었습니다.
‘호랑이는 나를 보고 있고 내가 정전이 되어 호랑이를 못보고 있지만, 호랑이는 내가 자기들을 못 보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 그러므로 나는 계속해서 행동했다.’ 호랑이를 지시했다는 것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 정전된 상황에서 호랑이에게 공격당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지킬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낙심이 조금만 오면 하던 일 다 관둬 버리고 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낙심 따로 행동 따로, 절망 따로 행동 따로, 좌절 따로 행동 따로. 좌절하시란 말입니다.
  그러나 행동도 계속해야 합니다.
  우리가 살다가 보면 낙심이 됩니다. 낙심해야 합니다. 그러나 행동도 계속해야 됩니다.
  조금만 낙심되면 기도하던 것도 관두고, 언제 나오느냐? 낙심이 끝나야 기도하러 나온다는데, 그 낙심이 너무 잦아서 도대체가 이 낙심은 방학도 없고, 도대체가 이 절망은 휴식도 없고, 도대체 언제 행동하느냐는 말입니다.
  낙심이 끝나서 행동해야 되면 그 다음에 좌절하고 있고, 좌절 끝나서 행동하려나 보면 또 절망하고 있고, 또 이제 절망이 끝났으니까 진짜 행동하겠다 싶으면 낙심 또 주우러 다니고 있고..
  이게 무슨 일이냐 말입니다.
  
  야고보는 2:14-26까지 핵심적으로 다음의 내용으로 그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 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 것인줄 알고자 하느냐 /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 이에 경에 이른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 2:14-26)

  우리가 지금 앉아 있는 자리에서 영혼이 떠나버리면 앉은 채로 죽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 보고..
  그런데 우리가 살아 있는 이유는 영혼 때문에 살아있는 것으로 인정을 받고 있단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믿음도 행동이 있으면 믿음이 있는 것이고, 행동이 없으면 믿음이 없는 것이다 라고 규정을 지으라는 것입니다. 인정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야고보는 우리를 이렇게 믿음이 없다라는 얘기를 아주 가혹하게 아주 잔인하게 끝까지 인정받고 고백 받아서 뭘 어쩌겠다 라는 것입니까?
  무슨 대안을 내 세우려고 하는 것입니까?
  맞습니다.
  그래서 야고보가 믿음 없는 사람들에게 제시한 대안이 4장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는 결론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야고보가 제시한 대안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성령께서 죄 짖는 것을 싫어하시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 / 너희가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뇨”(약 4:4-5)

‘간음하는 여자들이여’는 야고보서가 기록될 때 양반 분들이 많이 계실 때 기록이 되었습니다. 그래 가지고 그 때에 만약에 ‘간음하는 남자들이여’라고 했다면 그 동네에서 선교사들 다 쫓겨납니다.
  그러니까 만만한 ‘간음하는 여자들이여’라고 기록해 놓은 것인데, 이것은 이렇게 해석해야 합니다.
‘간음하는 모든 사람들이여’
  야고보가 말하기를 믿음이 없는 사람들아 잘 들어라. 죄 짓는 것은 성령님이 싫어하신다는 것입니다.
  믿음 없는 사람들은 죄를 지을 수밖에 없고 행동할 수 없고, 그러면 성령께서 싫어하신다는 것입니다.  

  둘째,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약 4:6)

‘아, 내가 왜 세상에서 연약해서 쓰러질 수밖에 없느냐?’
‘내가 나쁜 사람이다’ 그것도 맞는데, 믿음이 부족해서 그렇다는 것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셋째, 마귀를 대적하라는 것입니다.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약 4:7)

  믿음이 연약한 사람은 자꾸만 ‘내가 다음에는 안 그럴꺼야. 이 번만 참고, 다음에는 안 그러겠지.’자꾸 이렇게 합리화시키면서 정작 올바로 행동하고 싶으면 믿음을 가중시키면 되는 것인데, 믿음은 가중시키지 않고 자꾸 자기 행위적 결실만 좋아질 것이다, 오늘은 좋아질 것이다. 내일 좋아질 것이다....
   10년 전부터 그랬는데 좋아졌느냐 말입니다.
  오히려 그것은 합리화다 그럽니다.
  오히려 그것은 또 다른 잘못 살아가기 위해서 지능적으로 자기 자신을 합리화시키기 위한 것이다 라는 말입니다.
  차라리 ‘맞다. 나는 믿음이 없어서 내가 이렇게 형편없이 살고 있다’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믿음을 성숙시키고, 믿음을 향상시키면, 행동은 자연히 좋아져 버릴 것인데, 자꾸만 믿음 탓하지 않고 자신의 순간적인 실수, 본의 아니게, 사실은 그렇지 않으나, 이렇게 합리화를 시켜나가기 때문에 오히려 우리의 행함이 더 변화되지 못하고 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차라리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평판이 낮아지는 것은 아주 싫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부족한 부분은 숨기고, 그러면서 더 이상 향상 발전을 위해 노력하지 않고 있고...
‘내가 마치 지식이 부족해서 그런 것 같아, 결심이 약해서 그런 것 같아, 아무래도 내가 세상 경험이 부족해서 그런 것 같아.’
  자꾸만 이렇게 저렇게 합리화시켜 나가면서 연구하는데만 20년씩 걸리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언제 끝나느냐?
  죽기 전날도 안 끝난단 말입니다.
  그런데 차라리 다 무시하고, ‘맞다. 내가 무식해서 그런 것도 아니고, 돈이 없어서 그런 것도 아니고, 결심이 약해서 그런 것도 아니고, 원래 인간은 그런 존재인데, 차라리 내가 행함이 없는 이유가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솔직하게 인정을 해 버리면 우리에겐 회생 기회가 오히려 빨라진단 말입니다.
‘아니, 20년씩 믿었는데 어떻게 내가 믿음이 없을 수 있어?’그런 것에 속지 말고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사실대로 인정하면, 공손하게 겸손하게 인정을 하면,
  첫 번째로, ‘성령께서 죄 짓는 것을 싫어하시는 구나! 내가 나의 생활이 낮아질까 봐 죄를 안 지어야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시기하기까지 싫어하심으로 내가 이 말씀을 믿고 죄를 짓지 말아야 되겠구나, 덜 지어야 되겠구나!’라고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세 번째, 마귀를 대적하라는 것입니다.
  마귀가 나를 끊임없이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여건으로 끌고 간다는 사실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넷째,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 /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 /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약 4:8-10)

  야고보가 제시한 대안입니다.
  믿음이 없어서 믿음의 삶을 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자꾸 이 말하면 저 말하고, 저 말하면 이 말하고 합리화시키지 말고 우리 자신을 믿음이 없는 사람으로 규정짓고 그 믿음 없는 상황에서 빠져 나올 수 있는 대안으로 성령께서 죄 짓는 것을 싫어하신다,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마귀를 대적하라, 회개하라 그리고 끝으로 약5:13-18까지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다섯째, 기도하라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지니라 /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찌니라 /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찌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년 육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오고 / 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약 5:13-18)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마 26:41)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막 14:38)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롬 8:3)

  그러니까 기도하면 이 육신의 연약함이 결국은 극복되어진다 라는 것입니다.

  결론의 결론으로 믿음은 어떻게 하면 강해지는가?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라고 롬10장 17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최고의 메시지를 들으면 믿음이 강해집니다.
  일점일획도 변함이 없으신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 들으면 믿음이 강해집니다.
  그 믿음이 강해지면 그 강해진 믿음으로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우리가 죄 짓는 것을 싫어하신다는 것을 믿고, 내 한계가 있다는 것을 믿고, 마귀를 대적하면 물러간다는 것을 믿고, 회개하면 새 힘이 난다는 것을 믿고, 기도하면 현재의 어려운 상황에서 빠져 나올 수 있다는 것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믿으면 행동하게 되고, 행동하게 되었다는 것은 믿음이 강해졌다 라는 얘기입니다.

  결국 우리는 지금까지 행동하지 못한 이유가 믿음이 부족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자존심이 상해도 인정해야 합니다.
  ‘내가 어디에 문제가 있었는가를 면밀히 검토해 본 결과, 맞다 내가 믿음에 문제가 있었구나!’
  그렇다면 성경은 어떻게 하면 믿음이 강해질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가?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
  나쁜 말을 들으면 나쁜 믿음이 생기는 것이고, 좋은 말을 들으면 좋은 믿음이 생겨진다 라는 것입니다.
  아무튼 믿음을 강하게 만들어서 야고보가 현재 행함 없음에서 빠져 나올 수 있게 제시한 대안 다섯 가지, 성령님 인정하고, 한계 인정하고, 마귀 대적하고, 회개하고, 기도해서 현재의 모든 어려운 상황에서 빠져 나오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바라겠습니다.

 

언어 사용에 대하여

{베드로전서 3:8~11}

 

세계적인 첼리스트 파블로 카잘스가 아흔 다섯 살이었을 때 한 기자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첼리스트로 손꼽히는 분입니다. 그런 선생님께서 아직도 날마다 하루에 6시간씩 연습을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카잘스가 다음과 같이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사람은 한 번에 다 모든 일에 완벽해 질 수가 없고, 날마다 조금씩 발전해 나가는 존재라고 생각을 하오. 그래서 나는 지금도 내 안에 이전보다 더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는 그 가능성을 믿고, 연습으로 그 가능성을 성장시켜나가고 있는 중입니다.”

  사람은 나이 스물에 언어 사용, 말하는 법을 완벽하게 익히지 못합니다. 나이 서른이라고 해서 언어 사용, 말하는 법을 완벽하게 다 익힐 수도 없습니다. 또한 사람은 사십을 넘어 팝십이 되었다 할지라도 그 누구도 언어, 곧 말을 늘 조심해서 하지 않는 한 당연히 실수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언어 사용을 점점 더 잘 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다듬어 나갈 때 이전보다 더 나은 언어를 사용할 줄 알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언어 사용에 대해서 생각을 해 보려고 합니다.

  첫째, 사람은 언어 곧 말을 참으로 조심해서 해야 하지 함부로 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잠언 기자가 한 말입니다.
  “혹은 칼로 찌름같이 함부로 말하거니와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 같으니라”(잠 12:18)

  사람들 가운데는 말을 칼로 찌르는 것처럼 함부로 말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칼을 함부로 사용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만일 있다면 그 사람은 강도나 살인을 행하는 사람들입니다. 그 외에는 모두 조심해서 다룹니다.
  말을 조심해서 다루는 것은 사람들을 말로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말로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함입니다. 사람들은 평범할 때 말로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잘 입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로 언제 상처를 입히느냐 하면 화가 많이 났을 때입니다. 사람이 혈기가 극도로 충천해 있을 때, 앞 뒤 보이는 것이 없을 때, 그럴 때 함부로 말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40년 간 새벽기도 등을 열심히 훈련 받아온 신앙인도 어느 날 갑자기 화가 나면 그 때는 앞 뒤 보이는 것이 없어 단 한 번에 언어 표현을 잘 못하고 남은 평생을 후회하며 살아가게 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① 말이란, 영향력을 미칠 수 있으면 하고 그렇지 않으면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나이 사십에 그의 동족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 ... 네가 어찌하여 동포를 치느냐”(출 2:13)
  그랬더니 그 말을 들은 사람이 모세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누가 너로 우리의 주재와 법관을 삼았느냐 네가 애굽 사람을 죽임같이 나도 죽이려느냐”(출 2:14)

  위의 대화로 보건대 모세가 했던 말은 전혀 그의 동족, 당시 싸우는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못 미쳤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말이란 내가 한다고 해서 무조건 다 상대에게 영향력이 미쳐지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적어도 내 말이 상대방 누군가에게 영향력을 미치게 하려면 그 사람에 대해서 영향력이 미쳐질 수 있도록 미리 준비를 잘 해서 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이란 ‘그 때 그 사람에게 그렇게 말했으니까, 이 사람에게도 그렇게 말하면 되겠지 ...’라고 생각하면 그것은 큰 오산입니다. ‘이 사람에게 이렇게 말했으니까, 저 사람에게도 될 거야!’ 안 된단 말입니다.
  그래서 말이란 미리 준비를 잘 해서 사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② 우리가 말을 할 때 조심해야 할 것은, 그 자리에 맞게, 경우에 맞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주 손님이 많은 식당에 좌석이 부족해서 합석을 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공교롭게도 스님이 앉아 계신 자리에 신부님이 동석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먼저 온 스님은 산채비빔밥을 시키셨습니다. 그런데 신부님은 불고기 백반이 드시고 싶은 것입니다. 종업원에게 ‘불고기 1인분’을 시켰습니다. 그런데 종업원 말이 1인 분은 안 된다고 해서 할 수 없이 먹고는 싶고 하여 2인분을 시켰습니다. 신부님의 의지가 엿보이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생각하면 할수록 2인분은 양이 너무 많단 말입니다. 그래서 마침내 신부님이 스님에게 말했다고 합니다.
  “스님, 산에서 계시면서 드시는 것도 부실하셨을 텐데 오랜만에 세상에 나오셨으니까 고기 좀 드시지요.”
  그랬더니 스님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합니다.
  “아, 감사합니다. 신부님께서 장가가실 때 초청하시면 제가 그 날은 고기를 먹겠습니다.”

  이 말은, 아무리 좋은 배려라 할지라도 스님에게 고기를 먹으라고 권한 그 자체가 실례라는 것입니다.

  잠언 기자의 말입니다.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쟁반에 금사과니라”(잠 25:11)

  이와 같이 말이란 상황에 맞는 말이 있고, 상황에 안 맞는 말이 있다는 것입니다.

  ③ 우리가 또 말 할 때 조심 할 것은, 자랑하는 말도 절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잠언 기자의 권면입니다.
  “타인으로 너를 칭찬하게 하고 네 입으로는 말며 외인으로 너를 칭찬하게 하고 네 입술로는 말지니라”(잠 27:2)

  우리가 왜 다른 사람들에게 자랑을 하지 말아야 하겠습니까?
  사람이 자랑을 하다가 보면 꼭 내용이 상황보다 플러스가 됩니다. 그래서 말이란 하다보면 꼭 거짓말이 좀  들어가게 되는데, 그것은 자신의 문제라 괜찮다고 하자는  말입니다. 그러나 자랑을 듣는 사람들 가운데는 다음과 같이 절망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저 사람의 얘기를 들어보니까 나는 더 이상 살 가치가 없다, 한강 가서 뛰어내려야 딱 맞다. 세상에 저 사람 저렇게 무엇인가를 이루는 동안 나는 뭐 했냐?’
  이와 같이 자랑이란 단순히 자랑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듣는 사람들을 좌절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나에 대해 칭찬해 주는 말이야 어쩔 수 없이 들어야 하겠습니다만, 내가 나를 자랑해서 다른 사람들을 절망시키거나, 실망시키는 일은 안 하는 것이 좋다는 것입니다.

  ④ 또 우리가 말을 할 때 조심해야 할 것은 이웃의 말이나 사람을 평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사람들이 어떠한 일이 있었다고 말을 하면 그냥 ‘아, 그런 일이 있으셨느냐?’고 하며 재미있게 들으면 됩니다.
  그러나 사람들 가운데는 상대의 말이 다 끝나고 나면, 마치 ‘자, 받아 적으세요. 그것은 내가 볼 때, 첫째 ... , 둘째 ... ’라고 가르치듯이 꼭 평가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상대는 평가를 받으려고 말 한 것이 아닌데, 그냥 자연스럽게 한 것인데, 누가 자기를 평가 위원으로 모신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누가 내 앞에서 열심히 열변을 토해서 말을 하면, 그것이 재미있는 얘기이면 그냥 재미있게 들어주고, 슬픈 얘기면 같이 울어주고, 그리고 상대가 ‘이 부분에 대해서 평가를 좀 해주시겠습니까?’라고 요청을 하면 그 때는 마지못해 평가를 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상대가 평가해 달라는 말도 안 하고, 충고해 달라는 말도 안 하면 그냥 듣는 것으로 끝낼 줄 알아야 합니다.
  안 그래도 우리는 평소에 말을 많이 해서 실수를 많이 하는데, 평가까지 해 달라고 요청하지도 않은 말들에 대해 일일이 다 해버릇 하면 지금보다 말 수가 얼마나 더 많아지겠으며, 말을 실수 할  확률 또한 얼마나 더 높아지겠느냐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도 다음과 같이 권면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롬 2:1)

  ⑤ 또 우리가 말을 할 때 생각할 것은 말이란 반드시 책임이 따르게 된다는 것을 기억하고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야고보가 말했습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 받을 줄을 알고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약 3:1)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 5:21-22)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마 12:36)

  말이란, 어떤 말도 반드시 책임이 따르게 됩니다.
  만일에 내가 한 말에 대하여 아무 책임도 안 지겠다는 말은, ‘나는 성냥불 한 개 던진 책임밖에 없어. 그것이 어떻게 우연히 불이 붙어 건물에까지 옮겨 붙어 불에 탄 것 뿐이야, 그러므로 나는 아무 책임도 질 수 없어.’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말이란 함부로 입 밖으로 내서는 안 됩니다. 확인하고 또 하고 확인하고 또 하고, 확인하고 또 한 후에 조심스럽게 말을 입밖에 내야 합니다. 내 말이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심각하게 다치게 할 수 있다든지, 억울하게 할 수 있다든지, 그런 가능성이 있을 때 그 말들은 함부로 개봉하지 말아야 합니다.

  둘째, 언어 곧 말은 어떻게 해야 잘 하는 것이겠습니까?

  ‘말을 잘 하고 싶다.’는 생각 때문에 학원에 다니는 사람들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면 말은 어떻게 하는 것이 잘 하는 것이겠습니까?

  ① 말이란 진실하게 하는 것이 말을 가장 잘 하는 것입니다.
  말을 가장 잘 하는 것은 진실하게 하는 것입니다.
  말이란 더듬더듬하며 해도 진실하게만 하면 그 말은 잘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가 막힌 웅변과 어휘력과  순발력이 갖추어졌다고 할지라도 그 말에 거짓말이 많으면 그것은 말을 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계속 실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의 권면입니다.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엡 4:25)

  ② 말이란 상대가 들어봐서 기분 나쁘지 않게 하면 잘 하는 것입니다.
  내가 말 만 했다고 하면, 그리고 그 말을 듣고 기분 나빠하는 사람들이 많으면 그것은 말을 별로 잘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이란 내가 해서 다른 사람들이 기분이 좋아지고, 분위기가 좋아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설령 아무리 옳은 말을 했다 할지라도. 무엇을 했느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떻게 말하느냐 인 것 입니다.
  그런 분들이 있습니다. “아, 나는 당연히 할 말을 했을 뿐이야!”
  그러나 말이란 ‘무엇을 하느냐?’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말했느냐?’도 중요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권면입니다.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르게 함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골 4:6)

  이 말은, 말을 할 때 양념에 잘 절여진 것처럼 하라는 말입니다.

  예수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 너를 송사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송사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주고 재판관이 관예에게 내어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마 5:23-26)

  내가 한 말 때문에, 내가 한 행동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마음 아파 할 때는 무슨 일보다 그 일을 더 먼저 처리하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이십니다.

  ③ 말이란 침묵보다 더 가치 있는 말을 해야 잘 하는 것입니다.
  피타고라스라는 사람이 한 말입니다.
  “말을 하려면 침묵보다 더 나은 말을 하십시오. 그렇지 않고 생각해 봐서 침묵보다 못한 말이라고 판단이 들면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시편 기자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여 내 입 앞에 파숫군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시 141:3)

  ④ 말이란 타인을 칭찬하는 말을 할 때 그것이 잘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누군가를 칭찬할 때 절대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정당한 칭찬이어야 하며, 성경에 위배됨이 없는 올바른 언행에 대한 칭찬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잠언 기자가 권면하였습니다.
  “율법을 버린 자는 악인을 칭찬하나 율법을 지키는 자는 악인을 대적하느니라”(잠 28:4)


  우리가 칭찬을 한다고 해서 그것이 다 옳은 칭찬은 아닙니다.
  어떤 지혜 없는 사람은, 현재 자기 앞에 있는 사람하고 적대 관계에 있는 사람을 칭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자신 앞에 있는 사람의 인상은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합니다. 물론 그 말이 무조건 틀렸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 분위기에서는 안 맞는 말이라는 말입니다.

  ⑤ 말이란 누군가에게 감사를 표현하는 말일 때 그 말이 잘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 감사해야 할 것들을 쉽게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누군가에게 감사할 것들을 잘 적어둘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할 것들, 이웃에게 감사할 것들에 대해서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을 통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돌이켜 감사하는 말을 하라”(엡 5:4)

  ⑥ 말이란, 상대에게 믿음을 줄 수 있는 말일 때 그 말이 잘 한 것입니다.
  어떤 주제가 가장 효율적으로 좋은 말이겠습니까?
  그것은 믿음을 심어 줄 수 있는 주제가 좋습니다.
  세상에 오랜만에 전화가 와 가지고 받아 봤더니, 낙담스러운 말, 믿음을 무너뜨리는 말, 신뢰를 깨뜨리는 말 등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의 권면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우리는 절대 긍정적인 언어, 가능성적인 언어를 사용해야 합니다.
  로버트 슐러 목사님은 그 문 앞에 다음과 같은 의미의 문구를 써 붙여 두었다고 합니다.
  ‘이 집에 들어와서 부정적으로 말하려거든 들어오지 마십시오.’

  사람에게는 지금보다 믿음을 더 향상시킬 수 있는 언어가 필요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납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부정적이고 절망적인 말을 계속 들으면 그렇게 변화되게 되어 있는 것이므로 주의해야 합니다.

  ⑦ 말이란 상대가 들어봐서 감동을 느끼게 하면 그것은  잘한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 7:12)

  ‘내가 이 문제로 상대에게 어떻게 말을 해야 할까?’
  그 때는 입장을 뒤집어 ‘내가 현재의 입장이라면 상대로부터 어떤 말을 듣고 싶어하는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많이 잘못했음에도 내가 말을 하는 입장이 아니라, 내가 말을 듣는 입장이라면 이러이러하게 들었으면 참 좋겠다.’를 생각하여 상대방 입장을 잘 배려해서 말을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한 때 사도 바울은 마음의 문을 꽉 닫고 안 열어주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습니다.
  “고린도인들이여 너희를 향하여 우리의 입이 열리고 우리의 마음이 넓었으니 / 너희가 우리 안에서 좁아진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심정에서 좁아진 것이니라 / 내가 자녀에게 말하듯 하노니 보답하는 양으로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고후 6:11-13)

  그리고 사도 바울은 많이 연로하셨을 때 아주 젊은 빌레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 / 저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 네게 저를 돌려 보내노니 저는 내 심복이라 / 저를 내게 머물러 두어 내 복음을 위하여 갇힌 중에서 네 대신 나를 섬기게 하고자 하나 / 다만 네 승낙이 없이는 내가 아무것도 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너의 선한 일이 억지같이 되지 아니하고 자의로 되게 하려 함이로라”(몬 1:10-14)

  이 말씀은 다음과 같은 의미입니다.
  “빌레몬아, 네가 전에 데리고 있던 종 중에 너로부터 도망 나온 종이 한 명 있잖니. 내가 그 친구를 이 곳에서 만났는데 그 친구가 전에는 너에게 무익했잖니, 그런데 그가 많이 변했다. 이제는 너에게 아주 유익하게 변했다. 내가 이제 그 친구를 너에게 돌려보내려고 해. 그런데 이 친구가 그 동안 내 심복이 되었다. 그 친구를 내게 계속 머물러 두어 나를 돕게 만들고 싶은데 내가 너의 승낙이 없이는 아무 것도 하기를 원치 않아. 왜냐하면 너의 선한 일이 억지같이 되는 것을 내가 원치 않기 때문이야. 그래서 일단 이 친구를(오네시모) 네게 보내려고 해. 그러니까 그 친구를 만난 후 다시 나에게 보내 줘. 물론 그렇게 하는 것이 너무 번거롭게 보일 수도 있지. 그러나 나는 그것이 올바른 순서라고 생각해.”

  우리는 과거 무수히 많은 말들로부터 상처들을 받으며 지금까지 살아 왔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칼로 다친 상처는 아물 때가 있지만 말로 다친 상처는 치료를 제대로 받지 않으면 점점 더 썩어 들어가게 된다는 표현이 적합할 경우가 있습니다.
  물론 치유 방법은 있습니다.
  그것은 상처받은 기억 위에 위로의 긍정적인 말들을 100마디쯤 반복해서 듣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권면입니다.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벧전 4:11)

  미국 아리조나의 뜨거운 여름에 한 여 청년은 늘 두껍고 긴 까만색 드레스만을 입고 다녔습니다.
  그녀는 매혹적이고도 예쁜 얼굴을 가졌으나 외모와는 달리 마음에 엄청난 상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알콜 중독자이고 공포영화를 매우 즐기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귀신’으로 그리고 자신의 딸을 애칭으로 '귀신의 딸‘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말은 딸의 마음 속에 각인되었고 그녀는 마치 자신을 늘 귀신처럼 생각하고 생활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어느 날인가부터 교회를 다니기 시작하면서부터 '당신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생산적인 언어를 듣고 그 마음의 치료를 받았습니다.



  우리가 말로 상처를 받습니다.
  그러나 상처받은 말의 거의 70배 이상의 반복적인 언어, 부정적인 말 한 마디를 들었을 때 70 마디의 긍정적인 말을 다시 들으면 치료가 가능해집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어떤 큰마음의 상처를 받았다고 할지라도 그 부분으로 다시 조명해서 100여 마디 이상의 긍정적인 고백을 다시 들으면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말이란 부정적 언어가 있고, 긍정적 언어가 있는데, 절대로 긍정적 언어로 주제를 삼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셋째, 언어 곧 말을 할 때 가장 주의해야 할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① 말을 하기 전에 미리 잘 준비하여, 다듬어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무슨 일을 하든지 정성을 들여 해버릇 해야 합니다. 사람은 파 한 단, 양파 껍질 한 개를 벗기더라도, 사물함 정리 한 번을 하더라도 그것이 곧 그 사람의 인격이요, 그 사람의 정성이요, 그 사람의 노력의 예표와 같기 때문에 잘 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은 말 한 마디도 정성을 들여 해 버릇해야 합니다. 사람에게 말하는 기능은 아주 중요한 기능입니다. 사람이 손으로 그 어떤 물건 한 개를 만드는 것도 귀하지만, 에머슨의 말대로 ‘한 마디의 말로 곧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는 것이다.’라는 말처럼 말이란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절대로 말이란, 생각나는 대로 주먹구구식으로, 입으로 나오는 대로 해버려서는 안 됩니다. 말은 미리 준비를 잘 해서 해야 합니다.

  잠언 기자가 말했습니다.
  “네가 언어에 조급한 사람을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바랄 것이 있느니라”(잠 29:20)

  언어에 조급하다는 것은 준비 없이 말을 한다는 것입니다. 말은 미리 준비를 잘 해서 해 버릇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잠언 기자가 한 말입니다.
  “의인의 마음은 대답할 말을 깊이 생각하여도 악인의 입은 악을 쏟느니라”(잠 15:28)

  그리고 베드로 사도의 권면입니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벧전 3:15)

  사람들 가운데는 말 할 기회를 주어도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은 말을 못하는 것이 아니라 준비를 안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을 만나서 무슨 말을 할 것인가, 친구들을 만나서는 무슨 말을 할 것인가를 항상 미리 준비해 버릇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 가운데는 도대체 말 할 거리가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불필요한 말들은 많이 하고 말입니다.
  말은 하기 전에 미리 잘 다듬어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잠언 기자는 다음과 같이 권면하였습니다.
  “네 입의 말로 네가 얽혔으며 네 입의 말로 인하여 잡히게 되었느니라”(잠 6:2)

  미가 선지자의 권면입니다.
  “너희는 이웃을 믿지 말며 친구를 의지하지 말며 네 품에 누운 여인에게라도 네 입의 문을 지킬지어다”(미 7:5)

  우리 남자 분들은 제발 집에 가서 아내들에게 할 말, 안 할 말 가려가면서 해야 합니다.
  우리 남자들은 아내들에게 정보를 너무나 적나라하게 주는 경우가 있는데, 세상 못 믿을 것이 아내가 아니고 아내의 입입니다. 아내는 믿으십시오. 그러나 아내의 입은 믿지 말아야 합니다.

  ② 우리가 말을 할 때 주의해야 하는 것은 비판하는 내용의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느 날 가위와 톱과 혀가 서로 자기 자랑을 했다고 합니다.
  먼저 가위가 입을 열었습니다.
  “나는 어떤 천이라도 내 이빨로 끊어 낼 수 있어. 조금도 흠을 내지 않고서 말야!”
  이번에는 톱이 말했습니다.
  “내 이빨은 어떤 장작도, 나무토막도 깨끗하게 잘라낼 수 있어.’
  그러자 혀가 빈정거리듯 말했다고 합니다.
  “너희들이 아무리 그래봐도 나하고는 비길 수 없을 걸. 나에게는 남의 명예나 평판을 단번에 반으로 가를 수 있는 능력이 있다구 ...”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마 7:1-5)

  이 말씀은, 형제를 비판으로 억울하게 만드는 사람은 반드시 대가를 치를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누군가를 비판하고 판단하는 것은, 심리적으로 자신을 판단하고, 비판하고 싶은데 그럴 수는 없기 때문에 대신 다른 사람들을 도마 위로 끌어 올려 판단하고 대리 만족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주로 사람들은 만나면 정치 얘기한다고 하다가 정치인 비난하고, 교회 얘기한다고 하다가 목사님 비난하고, 물론 우리 교회는 절대로 목사님 비난 안 합니다만 그리고 친구 얘기한다고 하다가 친구 비난하고, 주제가 항상 그런 식으로 넘어간단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도대체 왜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는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상대를 설득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반대로 비난하는 쪽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설득은 가능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마 18:15-17)

  ③ 상대의 중요감을 해치지 않기 위해 절대 긴장을 풀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권면입니다.
  “이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저를 영접하고 또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빌 2:29)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했던 말입니다.
  그것은 “내가 너희들에게 사람을 보낼텐데 그들을 ‘존귀하게’ 여기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데살로니가 전서 4장 4절은 우리 남성들이 꼭 기억해야 할 말입니다.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 취할 줄을 알고”(살전 4:4)

  우리 남성들이 아내를 어떻게 대하여야 하느냐?
  그것은 존귀하게 대하라는 것입니다. 막 함부로 종 부리듯이 다루지 말고, 존귀하게 예우하라는 것입니다.

  ④ 상대가 나의 말을 듣고 위로가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며칠 전 다른 나라의 한 청년이 교회를 찾아왔습니다.
  ‘양말 세 켤레에 10,000원이니 사 달라’고 했습니다. 우리나라 원가로 따지면 한 500원 정도 할 법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사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친구가 우리나라 말 중에, 그 많은 말 중에 “행복하세요.”라는 인사말을 하고 나가는 것입니다.
  그 친구는 제게 “다음에 또 올게요.”라고 말하지 않고 “행복하세요.”라는 말을 남기고 갔습니다.
  그래서 제가 생각했습니다.
  ‘됐다. 그만하면. 만원이 아깝지 않다.’

  우리가 많은 말들 중에 선택하는 것은 우리의 언어적 선택 능력입니다.

  요셉은 아버지 야곱이 죽자 두려워하던 형들에게 다음과 같은 위로의 말을 하였습니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 당신들은 두려워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창 50:19-21)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권면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살전 4:18)

  ⑤ 상대가 나의 말을 듣고 화가 나지 않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음과 같은 일이 있었습니다.
  소매치기가 어느 여인의 지갑을 훔쳐 갔는데 거기에 가짜 다이아 목걸이가 들어 있었습니다.
  ‘이게 웬 횡재냐’고 나가서 팔려고 보니까 가짜였던 것입니다.
  그 소매치기가 너무너무 화가 나니까 지갑을 뒤져 가지고 전화번호를 찾아 가짜 다이어 목걸이 주인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리고 “당신 말이야, 진짜인 줄 알고 팔러 나갔더니 가짜라고 그러더라. 왜 진짜 같은 가짜를 넣어 다니다가  바쁜 사람을 헛갈리게 만드느냐?”고 따졌더랍니다.
  그러면 그 여인은 “죄송합니다. 다음부터는 꼭 진짜를 넣어 가지고 다니겠습니다.”라고 말을 해야 될 것 아닙니까? 그런데 맞받아 쳤다고 합니다. “뭐 어쩌고 어쩨. 이 소매치기 주제에 ... ” 그랬더니 그 소매치기가 “너 두고 보자”라고 말하고 끊더랍니다. 그리고는 전화를 끊고 그 전화번호로 주소를 추적해서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자기 전화를 함부로 받은 여인의 두 자녀를 또 붙잡아 가서 피해를 입힌 후에 돌려보낸 일이 있었단 말입니다.

  어떻게 했어야 했겠습니까? 유순하게 대답을 했어야 했습니다.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합니다.

  잠언 기자의 권면입니다.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잠 15:1)

  그 여성은 소매치기가 화가 나서 전화를 했을 때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 내가 그 날 정말 정신이 없어서 진짜를 넣고 간다는 것이 가짜를 넣고 갔는데 다음부터 절대 조심하겠습니다.”라고 공손하게 답을 했어야 합니다.

  잠언 기자의 권면입니다.
  “사람은 그 인자함으로 남에게 사모함을 받느니라”(잠 19:22)

  나에게 말로 소리 지르고 상처를 입히고, 그런 사람은 언젠가는 잊어버립니다.
  그러나 나에게 몹시 억울함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상처를 많이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나로 인하여 손해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유순한 대답을 한 사람은 평생 못 잊어버리게 되는 특징이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얼마든지 조용하게 공손하게 대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꼭 소리질러야만 되는 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얻어지는 것이 없습니다.

  베드로의 권면입니다.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체휼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하심이라 /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궤휼을 말하지 말고”(벧전 3:8-11)

  우리의 혀는 얼마든지 통제가 가능합니다.
  우리는 이미 지식적으로 나쁜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100% 잘 알고 있습니다.
  의지로 이것을 잘 통제하지 못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의지로 얼마든지 혀에 대한 통제가 가능합니다.
  문제는 감정인데, 감정은 따라와 주면 좋고, 안 따라와 주면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감정과 상관없이 아무리 나쁜 말을 하고 싶은 그 때라도 의지를 가지고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창조적이고 좋은 이야기 덕담을 나누어 가다가 보면 감정은 결국 의지 앞에 굴복하고 서서히 따라오게 됩니다.
  남은 생애 동안 철저하게 은혜를 끼칠 수 있는 언어, 좋은 언어, 정말 기억하고 싶은 언어를 사용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바라겠습니다.

설득에 대하여

{베드로전서 3:15}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많은 사람들을 설득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을 설득하는 일이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우선 다른 사람들 설득하는 일은 그렇다고 치고 내가나를 설득하는 것도 결코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토록 위대한 생애를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으로부터 강력한 설득을 당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베드로가 평범하게 어부로 끝낼 수밖에 없는 분이 위대한 인생을 마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으로부터 결과적으로 강력한 설득을 당했고, 응했기 때문에 그렇게 위대하게 삶을 마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모세 역시 위대한 삶을 마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나이 팔십에 하나님으로부터 강력한 설득의 권고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 인생이 그렇게 훌륭하게 마감될 수가 있었습니다.

  사람은 다 ‘거기서 거기’입니다. 얼마나 올바른 설득을 당하느냐, 얼마나 강력한 설득을 당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지 그 사람이 의지가 강해서 타고난 죄성이 없어서 훌륭한 인생을 살다가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야고보서 5장 17절에 보면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창세 이래로 그 누구도 우리와 같지 않은 사람들이 없습니다.
  다만 얼마나 강력한 설득을 당했느냐, 얼마나 자기 자신이 설득 당하려고 노력을 했느냐 그것으로 그 인생의 질과 향방이 결정 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에게 설득을 당해야 하겠습니까?
  허브코헨(Herb Cohen)이라는 분은 ‘협상의 법칙’이라는 책을 한 권 저술했는데 한 때 뉴욕 타임즈의 베스트셀러 목록에 9개월 동안 1위를 차지했었습니다.
  이 분은 지미 카터, 레이건 전 대통령 재임시에 대 테러리스트 상대 협상자문을 맡았던 세계적인 협상가였는데 그 경험을 토대로 ‘협상의 법칙’이라는 책을 썼던 것입니다.

  이 분은 그 책에서 세 가지를 지적을 했습니다.
  “누군가가 한 사람을 완벽하게 설득해 내려고 하면 반드시 세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첫째는 힘이 있어야 하고, 둘째는 정보가 있어야 하고, 셋째는 시간을 낼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 세 가지를 완벽하게 구비하고 계신 분이 계십니다.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우선 하나님은 전능하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전능하신 힘이 있으시기 때문에 우리를 우리가 원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우리의 요구 충족을 이루어 주시면서 우리를 설득할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전지하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정보와 지식을 주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과거의 정보도 주실 수 있지만,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정보도 우리에게 주실 수 있고, 현 상황에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는 그런 정보도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충분히 설득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시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 허브 코헨이 지적한 것은 시간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설득하려면 정확한 시간에, 설득이 될 때까지 시간을 함께 보내 줄 수 있어야 하는데 사람은 한 사람대 한 사람으로 묶여버리면 아무 일도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전 세계 어떤 사람에게도 원하시기만 하면 처음부터 끝까지 그 인생 시작부터 그 인생 끝날 때까지 함께 해 주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힘과 정보와 시간을 능히 주실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 사람을 설득하실 수 있습니다.

  반대로 말하면, 우리가 하나님께 설득을 당하고자 결심만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얼마든지 설득을 당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토록 하나님께서 설득하실 능력이 있으심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나님에게 설득을 당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6)

  우리는 하나님께 설득 당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계속해서 설득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설득에 빨리 굴복하기만 하면 우리는 지금보다 훨씬 더 행복한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안정된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나님에게 설득 당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본능적 죄성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선 우리 마음대로 살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면 마치 그것에 행복이 있는 줄 알고 그렇게 행동하고 있단 말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지식으로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감정이 따라가지 않고, 감정이 따라가지 않으니까 우리의 의지도 따라가 주지 않고 있습니다.
  지식적으로는 하나님을 따라 나서기만 하면 우리는 반드시 잘된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는데 사람은 지식대로 살아가지 않고 감정대로 살아갑니다.
  그것을 중간에서 절충안을 내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의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의지가 강한 사람들이 지식적으로 살아보려고 노력을 하기도 하고, 감정적으로 살아보려고 노력을 하다가 중간에 어정쩡한 인생을 살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남은 인생을 살아가야 되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설득을 당해야만 합니다.
  우리가 세상의 어느 철학자에게 가서 ‘나 좀 설득시켜 주십시오.’라고 말했을 때, 그 철학자가 우리를 완벽하게 설득해 내지도 못할뿐더러 우리가 그 철학 앞에 굴복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만 우리를 설득시키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도 설득을 못 시키신 사람이 있으시니 그 사람이 바로 가룟유다입니다. 계속해서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리고 사두개인들입니다. 그리고 서기관들입니다.

  데마 같은 사람은 세상으로 나갔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를 설득하지 못했습니다. 주의 영이 그를 설득시키지도 못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그리고 지금도 살아서 역사 하시는 성령님께 강력하게 설득 당하기만 하면 우리의 남은 인생은 볼 것도 없습니다.
  위대해집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 위대한 설득에 응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우리가 우리 자신을 강력한 설득을 당할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으로 몰아넣어서 설득 당할 수밖에 없느냐 라는 것입니다.

  우선 설득은 하는 분도 중요하지만, 당해야 하는 사람이 안 당하면 재간이 없습니다.
  우리가 최면을 거는 사람도 있지만, 문제는 최면을 당하는 사람이 최면을 당해져야 최면도 걸리는 것입니다.    아무리 최면술사가 최면을 걸려고 해도 안 당하면 어쩔 수가 없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아무리 우리를 설득하려고 해도 창세 이래로 귀한 정보 자료와 이 세상 끝 날에 대한 정보 자료를 다 준비해 놓으시고 보고 계십니다(욥 23:10).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그 인격적 설득 앞에 동의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그러면 어떻게 하면 우리는 지금보다 더 강력하게 설득을 당할 수 있겠느냐 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제대로 올바로 설득만 당하면 꽤 괜찮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설득을 안 당하고 이대로 살면 참 골치 아픈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하나님께 강력하게 설득을 당할 수 있겠습니까?

  첫째, 위협설득을 당하는 것입니다.

  실험을 해 봤습니다.
  어린 아이들이 모여서 놀고 있는데, 장난감을 다섯 종류를 주고 그 중에서 아이들에게 가장 선호하는 장난감 로봇 장난감 하나를 지적하면서 ‘절대로 가지고 놀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놀면 반드시 징계하겠다.’고 그렇게 위협을 했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을 몰래 지켜본 결과 아이들이 선생님으로부터 지적을 받은 그 로봇, 만지면 징계를 받는다는 그 로봇을 만지지 않고 한 쪽으로 밀어놓고 다른 장난감을 가지고 놀기 시작했습니다.
  지켜봤습니다. 그랬더니 그 효력이 6주(42일) 동안 가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6주가 지난 후부터는 어떻게 되는가 보니까 서서히 선생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주의 받은 물질을 다시 만지기 시작하더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위협설득이라는 것이 좋고 효력은 있으나 평생 가지는 않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징계하시는 방식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범죄하면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치시겠다.”(삼하 7:14)고 그러셨습니다.
  그리고 성경에 나오는 징계를 대략 살펴봐도 10여가지가 넘습니다.
  얼른 생각해도 10여가지가 넘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범죄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결국은 명예를 낮아지게 만드신단 말입니다. 천물이 되게 하신단 말입니다.
  인간에게 배신당하게 하시고, 물질적으로 손실 당하게 하신 단 말입니다.
  자녀를 데려 가기도 하시고, 사랑의 관계성을 깨뜨려 버리십니다. 사랑의 관계성자들을 데려가 버리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침몰이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욥과 같은 경우, 롯과 같은 경우는 아내가 가출되거나 소금 기둥으로 변화되기도 했습니다.
  질병으로 치시기도 하십니다.
  사고를 당하게도 하십니다. 교통사고, 화재, 강도를 만나는 것 등 하는 일마다 열매가 맺혀지지 않게도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시편 기자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숫군의 경성함이 허사로다”(시 127:1)

  하나님께서 포기한 사람은 여러 중독에서 못 빠져나오게도 하십니다.
  “내버려두사 ... ”
  뿔뿔이 흩어지게도 하십니다.
  “핍박을 당하게 하사” 전쟁이 일어나게도 하신단 말입니다.
  그리고 기회를 안 주기도 하십니다.
  다윗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중년에 불려갈까 봐 이렇게 기도한 적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여, 저를 중년에 데려가지 마옵소서”

  지금 미국이 이라크와 전쟁을 벌여놓고 우리에게 파병 요청을 하는데 파병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6.25를 경험하고 고생을 많이 한 분들 가운데서는 그것이 철없는 짓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어려울 때 미국이 얼마나 도와줬는데 미국이 지금 같이 도와 달라는데 안 도와주느냐?’ 이렇게 말을 합니다만, 사실은 그것은 자존심상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본뜻은 뭐냐하면, 그 등쌀에 안 도와주고는, 협조 안하고는 우리가 못 살아남습니다. 미국에 협조 안 하고 우리가 살아 남을 것 같습니까?
  ‘아, 그것은 자국이 결정할 일이다. 그것은 한국 스스로 결정할 일이다.’ 그렇게 점잖게 말을 하고 있지만 파병을 안 하면 우리는 못 살아남습니다.
  그 덩치에 가만 둘 것 같습니까?
  그것을 자존심상 표현을 못하니까 ‘옛날에는 미국이 도와줬는데 우리라고 안 도와주면 어떻게 하냐?’이렇게 말하는 것뿐이지 사실은 위협하고 있는 것이란 말입니다.
  미국에 협조 안 하면 약소국가들은 못 살아남습니다. 언제 대가를 치러도 치른단 말입니다. 경제 제재 조치, 정치 제재 조치, 힘에 의한 제재 조치는 당해낼 재간이 없는 것입니다. 장사도 부족한 재정 앞에는 견딜 장사가 없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위협설득이라고 하는 것, 이것은 힘이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협적으로 설득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굴복하지 않으면 결국은 나는 못 살아남는다.’ 이것을 인정을 해야 우리가 설득이 됩니다.

  나오미가 ‘베들레헴’(떡집)을 떠났을 때, 하나님께서 그의 남편을 데려 가셨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말 안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큰아들 또 데려 가셨습니다. 말 안 들었습니다. 둘째 아들도 데려 가셨습니다.
  결국은 그녀는 다시 베들레헴으로 돌아왔단 말입니다. 힘으로 하는 위협은 못 당해 내는 겁니다. 힘 앞에서는 못 당해 내는 것입니다.

  모세 당시 바로 왕이 얼마나 강한 사람이냐면, 당시 세계 최강국의 대통령이었습니다.
  그러한 왕에게 80세 먹은 노인 둘이서 지팡이 하나 짚고 찾아왔는데, 처음에는 만만히 봤습니다.
  그러나 열 가지 재앙이 한 가지씩 한 가지씩 내려지기 시작하는데 ,한 가지 내려지고 숨 돌릴 만 하면 다시 마음 돌리고 한 가지 재앙이 내려지고 다시 숨 돌릴 만 하면 다시 약속을 어겼습니다.
  마지막 열 번째, 애굽의 전 장자를 다 쳤습니다. 못 당해내는 것입니다. 힘 앞에는 못 당해내는 겁니다.
  그래서 가장 강력한 설득은 위협설득인 것입니다.
  겉으로는 좋게 말하지요.
  ‘아, 괜찮다. 의견을 존중한다. 인격적으로 한다. 아 그것은 스스로 결정할 일이다.’
  좋게 말하는 배후에는 말 안 들으면 가만 안 두겠다는 것입니다.
  못 당해내는 것입니다. 현실 앞에서는 못 당해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말 안 들으면 가만히 안 두십니다.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질투 안 해요.’라고 말하는 분들이 있는데, 그 말은 질투를 안 한다는 말이 아니라 신경을 끊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택한 우리를 절대로 그냥 내버려두시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신경 끄시지 않습니다. 아주 쉬운 말로 어디 하나 부러뜨려서라도 반드시 원하시는 데로 끌고 가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나를 설득시킬 때, 첫 번째로 위협 설득하는 것이 효력이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말을 안 들으면 못 살아남는다.’
  그런데 도대체가 자기 자신을 위협 설득을 안 하려고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시고, 오래 참으시고, 그토록 사랑이 많으시다면 왜 지옥을 만드셔야 되며...’
  아주 뭐라고 표현을 해야 좋을지 모르겠지만, 까불까불 하는 것이 훨씬 더 적나라한 표현을 사용했으면 좋겠는데 제가 강대상이라 이만큼 하는 것입니다.
  겁이 없어 가지고, 까불까불 하는데 아직 된맛을 못 봐서 그렇습니다.
  꼭 매를 다 맞아 봐야 정신을 차리겠다는 것인데, 맷집이 좋아 가지고 아직 견딜만하니까 그런 말을 하는 것인데, 문제가 발생되고 나서 수습하는 것보다 문제가 발생되기 전에 수습하는 것이 훨씬 더 쉽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번 결정 내리시면 돌이키시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오래 참으시지만 영원히 참으시지 않습니다.
  조심해야 됩니다. 많은 대가를 치르고 나서 그러지 말 것을 그랬다는 둥, 조금 더 일찍 정신을 차릴 것을 그랬다는 둥,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그러십니다. ‘차려, 차려. 잃은 그대로 차려. 다음에 더 잃지 말아’그러지, 빼앗아 갔던 것을 다시 원상복구 시켜 주시지 않습니다.

  세상에 소중한 것들은 다 하나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태양이 두 개 있는 것 봤습니까? 친 아버지가 두 명 있는 것 봤습니까? 내 아들이 동일한 두 명이 있는 것 봤습니까?
  나 자신이 정신을 차리게 하려면 위협 설득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 잘못하다가는 기회를 잃는 수가 있겠구나!’
  ‘아, 잘못하다가는 못 살아남는 수가 있겠구나!’
  ‘잘못하다가는 소중한 것을 잃는 수가 있구나!’
  ‘기회가 다시 안 올 수 있구나!’

  우리는 정말 정신 차려야 합니다. 우리는 이번 주일 예배가 마지막 예배가 될 수 있습니다. ‘다음 주에 봐!’
  다음 주에 보면 좋겠다는 것이지, 볼 수 있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이번 기도 자리가 마지막일 수 있고, 오늘 새벽기도가 나의 마지막 새벽기도일 수 있습니다. 올해가 나의 마지막 해가 될 수 있단 말입니다. 우리에게 그렇게 여유가 많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고 네게 미칠 것이니 / 네가 성읍에서도 저주를 받으며 들에서도 저주를 받을 것이요 / 또 네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저주를 받을 것이요 /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우양의 새끼가 저주를 받을 것이며 / 네가 들어와도 저주를 받고 나가도 저주를 받으리라”(신 28:15-19)

  둘째, 이득 설득을 당하는 것입니다.

  스스로에게 이득을 제시하는 겁니다.
  우리는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이득을 제시하면 그것을 치사한 것으로 생각을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만, 그렇지 않습니다. 마귀도 언제나 우리에게 이득을 제시합니다(요일 2:16-17).
  지금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은 우리 육신의 욕심을 자극하고, 눈으로 보는 것의 욕심을 자극하고, 명예스럽게 여길 수밖에 없도록, 도저히 포기가 어렵도록 우리를 강력하게 유혹합니다.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마귀가 제시하는 그 강력한 유혹보다 우리는 더 강력한 설득을 당하지 않으면 못 빠져나옵니다.
  우리는 그냥 마귀가 유혹하는 것을 의지의 한국인처럼 그냥 끊고 나가려고 하는데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마귀가 어떤 유혹을 하면 하나님께 가지고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 이 친구들이 고수로 나옵니다. 나에게 이렇게 강력한 제안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제게 어떤 제안을 하시겠습니까?’
  이것이 치사할 것 같습니까? 하나도 안 치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십니다.
  ‘이제 네가 나를 좀 알아보는구나! 네가 내 실력을 이제 좀 알아보는구나! 그래 좋다. 마귀가 너에게 어떤 제안을 하더냐?’
  ‘이러이러한 제안을 했습니다.’
  ‘그러냐. 네가 보기에는 그것이 좋아 보이더냐?’묻습니다.

  마귀가 우리를 유혹하면 그 유혹하는 것을 가지고 하나님에게 가지고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도저히 포기가 불가능합니다.’ 빅딜을 제의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저를 설득을 시켜 주십시오. 마귀가 자기에게 굴복하면 주겠다는 것보다 더 좋은 제안을 해 주십시오.’
  제가 아는 선배 목사님은 이 분은 영어도 안되고, 불어도 안 되고, 한국어는 되는 분입니다.
  이 분이 프랑스 파리를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방법이 없잖아요.
  그래서 중요한 용어를 도화지에 적었습니다. 그래서 목에다 걸었습니다. 다섯 판 인가를 걸었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내용을 전달하고자 할 때마다 안내자에게 도화지를 보여 준 것입니다.
  그래서 터미널 3로 갈 때도 운전 기사에게 우리말로 ‘나 이 차 타도되겠습니까?’라면서 도화지를 보여주니까, 기사가 읽어보고 타라고 그러고, 앉으라고 그러고, 내리라고 하고 ... 그렇게 도화지만 가지면 해결이 나는 것입니다. 이 분에게는 말입니다.
  우리도 중요한 내용을 도화지에 적어서, 기도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기도가 안 되면 앞에 놓고 앉아 있으면 됩니다.
  그리고 제일 위에다가 이렇게 쓰십시오.
  ‘하나님 저 좀 설득시켜 주세요.’
  그리고 앉아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졸다가 일어나서 한 번 읽어보고 ‘저 좀 설득시켜주세요’

  우리가 마귀에게 유혹을 제안을 받으면 정직하게 가지고 나가십시오.
  ‘하나님, 제게 더 큰 이득을 제시해 주십시오. 저는 도저히 포기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품을 떠나지 않고 계속해서 ‘저 좀 설득 시켜주세요. 저 좀 설득시켜주세요’그러면 마침내 설득이 되고야 맙니다. 반드시 설득이 되고야 맙니다.
  왜냐면,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시고, 전지하시고, 시간을 우리와 영원토록 함께 해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이 세상에 있는 그 어떤 사람도 우리와 영원히 시간을 같이 해 주지 못합니다.
  아무리 아내를 사랑하는 남편이라도 아내와 항상 함께 있어주지 못합니다.
  시간 되면 출근해야 되고, 시간 되면 퇴근했다가 또 다시 출근해야 하고, 그래서 늘 남편을 끼고 살고 싶어하는 아내에게 남편이 물었다고 합니다.
  ‘도대체 당신은 어떻게 해 줘야 돼?’
  ‘시간을 이만큼 있어 줘야 되고, 어디를 같이 가 줘야 되고...’
  남편이 결론을 내린 것입니다.
  ‘백수면 딱 되겠구만! 그러면 당신이 요구하는 것 다 들어줄 수 있겠어’
  불가능하다는 말입니다. 누구도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해 줄 수 없단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가능하단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아무리 일찍 일어나도 먼저 깨어 계시고, 주무시지도 않으시지만, 우리가 아무리 늦게 자도 나 재워 놓고 눈동자처럼 지켜 주시는 분이십니다.
  나의 시작과 끝을 동시에 보시는 분이십니다.
  전능하신 분입니다.
  마귀를 직접 가두시지도 않고 천사시켜서 가두시는 분이십니다. 무저갱에...
  그런 분께서 우리를 왜 설득을 못 시켜 주시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아서 설득을 못시켜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저 좀 설득시켜 주세요. 저 좀 제발 설득 좀 시켜주세요. 제가요. 정말 사람답게 살고 싶은데 안 됩니다. 그러니까 저 좀 설득시켜주세요.’
  이득을 제시받는 설득, 이것은 굉장히 효력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셨습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신 28:1-2)

  셋째, 질문방식의 설득을 당하는 것입니다.

  질문도 설득의 일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질문하셨습니다.
  질문의 수준이 높으면 해답도 수준이 높습니다.
  그래서 훌륭한 사람이 되려면 질문이 많아야 합니다.
  질문 방식의 설득 방식은 아주 유용합니다.

  우리가 컴퓨터에서 무엇인가를 불러내려면 명령어를 쳐야 합니다.
  우리 안에서 좋은 대답을 이끌어내려면 역시 질문 방식을 사용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너무 바보 같은 질문을 합니다.
  이런 질문을 한단 말입니다.  ‘너는 왜 이렇게 못났냐?’
  그러면 안 해도 되는 대답이 나옵니다. ‘바보니까 못났지! 그것을 네가 모르냐?’
  그러나 질문의 수준을 높이면 달라집니다. ‘너는 왜 이렇게 괜찮은 사람이냐?’
  그러면 해답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니까 괜찮지!’
  좋은 대답이 나온단 말입니다.



  꼭 질문을 해도 망할 질문만 스스로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너 언제 죽을래?’, ‘곧 죽게 될걸 아마’
  질문을 바꾸는 것입니다.  ‘너 왜 87세까지 살려고 그러니?’,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질문의 수준을 바꾸면 해답이 달라집니다.  ‘너 왜 일등하려고 그러니?’, ‘기분이 좋으니까’
  ‘너 왜 꼴등하려고 그러니?’, ‘어차피 공부 못하니까’
  질문의 질이 낮아지면 낮아질수록 계속해서 우리는 저질적 질문을 하게 되고, 저질적 답변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질문으로 설득을 대신하신 적도 있습니다.
  좋은 질문은 좋은 대화의 비결이 되기도 하지만, 좋은 설득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 가로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 16:13-17)

  넷째, 불평 불만을 잠재우게 할 수 있는 설득을 당하는 것입니다.

  불만 불평을 가득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설득하는 방식이 있습니다.
  불만 불평을 가진 사람들의 핵심은 자신이 무시당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백화점에서 불평 불만이 심한 고객이 있다면 그 사람은 그 백화점으로부터 무시당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을 어떻게 설득을 할 수 있겠습니까?
  세 가지 방식이 있단 말입니다.
  지금 불평 불만을 호소하는 이 고객은 지금 앞에 있는 담당자가 맘에 안 들어서 불평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되겠느냐 말입니다.
  담당자를 그 사람보다 좀더 높은 고위층으로 바꾸어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불평 불만하는 사람은 자신이 서 있는 자리도 마음에 안 듭니다. 그러니까 좀 더 고급스러운 자리로 바꿔주는 것입니다. 이 쪽으로 앉으시라고...
  그리고 지금 불평 불만하는 사람은 자기가 지금 처해 있는 시간도 마음에 안 들어 합니다. 빨리 빨리 움직이고 싶단 말입니다.
  그리고 좀 더 중요한 여김을 받을 수 있도록 시간도 분위기를 조성시켜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설득이 됩니다.
  지금 우리가 생각을 해봐서 ‘나는 도대체 왜 이렇게 사는 것이 힘들고, 왜 이렇게 견디기가 힘들고, 나는 왜 이렇게 만족하지를 못하느냐?’
  하나님과 독대의 시간을 따로 가져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 그 자리 앉은자리에서 그 자리 선 자리에서 그 자리에서 불편하게 선 자리에서 설득이 안 됩니다.
  그러므로 정말로 하나님께 설득 당하고 싶으면 따로 시간을 내십시오.
  좀 더 고급스러운 자리로.
  담당자를 목사도 좋고, 전도사도 좋고, 교구장도 좋고, 주변 성도도 좋지만, 담당자를 성령님으로 교체를 해 보십시오.
  그리고 앉아 가지고, 고급스럽게 앉아서 시간을 좀 많이 내 보십시오.
  그냥 백화점에 가서 담당 직원에게 1-2분에 필요한 얘기도 못하는 그런 여김을 받지 말고 시간을 좀 많이 내 보십시오.
  그러면 내가 가지고 있는 불만 불평이 반드시 해소가 됩니다. 설득이 된단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인격적으로 예우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시편 기자의 고백입니다.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 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케 하셨도다”(시 40:1-2)

  다섯째, 불안 심리를 조성할수 있는 설득을 당하는 것입니다.

  미국의 한 광고 회사에 한 렌트카 업체가 광고를 요청했습니다.
  내용은 그 광고 업체는 DBB라는 광고 회사인데, ‘우리가 주는 문구를 그대로 사용을 하겠느냐? 우리가 당신들에게 제시하는 이 캠페인에 동의를 하겠느냐?’라고 말을 했을 때, 그 AVIS라고 하는 렌트 카 회사에서 동의를 했습니다.
  내용은 이런 것입니다.
  ‘우리는 2등입니다. 그래서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이 캠페인에 동의를 했습니다.
  광고가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13년 동안 적자를 낸 회사인데, 첫 해에 120만 달러의 흑자를 냈습니다.
  그 광고를 계속 활용할 때, 두 번째 해에 260만 달러의 흑자를 냈습니다.
  3년 차에 500만 달러의 흑자를 냈습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느냐면, ‘우리는 2등입니다’라는 은유적 표현인 광고문구가 전 직원들에게 경각심을 준 것입니다.
  ‘잘못하다가는 3등으로 떨어지는 수가 있겠구나! 그리고 우리는 1등이 아니구나! 우리가 지금 뭐 하고 있는가? 행동해야 되지 않겠는가?’
  누가 말하지도 않았는데 이 광고문구가 나가고 난 다음부터 전 직원이 긴장을 한 결과인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의 권면입니다.
  “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고 /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 하라 /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저가 그후에 축복을 기업으로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히 12:15-17)

  여섯째, 공평의 원칙을 준수할수 있는 설득을 당하는 것입니다.

  두 아들과 함께 영화를 보러 간 아빠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아들이 잠에 들었습니다. 그러자 아빠가 취한 행동에 대해 또 한 아들이 시험에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무슨 방법이 있겠습니까? 그것은 형으로 하여금 동생을 돌보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스티븐 코비 박사는 두 아들과 영화를 보러 간 내용을 ‘감정의 법칙’이라는 그의 저서에 다루었습니다.
  무슨 내용이냐면, 두 아들을 데리고 영화를 보러 갔는데 막내가 잠이 든 것입니다. 겨울이었습니다. 그래서 영화가 끝나고 이 아들을 안고 자동차 뒤에 뉘이고, 코트를 벗어서 덮어주고, 그리고 허그를 해 주고, 뽀뽀를 해 주고 그리고 집에 데리고 와서 또 다시 껴안아서 그 방에 뉘어주고 나왔는데, 그제야 정신이 나서 막내 위의 아들에게 물었습니다.
  ‘오늘 영화가 어땠니?’ 그런데 큰아들이 대답을 안 하는 것입니다. ‘영화가 별로였니?’ ‘뭐 그냥 그렇죠’라고 시무룩하게 대답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분위기가 이상해서 물었다고 합니다. ‘왜 그러느냐?’ 이 아들이 눈물을 글썽글썽 하면서 그러더라는 것입니다. ‘아빠, 제가 영화를 보다가 잠이 들었어도 제 동생처럼 그렇게 해 주실 것이였나요?’ 그렇게 묻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티븐 코비 박사가 그 때 깨달은 것입니다. ‘아, 형제는 부모 자녀가 아니구나!’ 부모는 한 자녀에게 열과 성을 다해 정성을 쏟으면 나머지 형제는 자연히 ‘나에게도 저렇게 하시겠구나’라고 전달이 될 줄 알지만 형제들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눈을 이상하게 뜨고, 가자미 눈을 뜨고, 그것이 형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티븐 코비 박사가 깨달은 것이 그것입니다.
  ‘공평의 원칙’
  공평의 원칙, 그 관점에서 성경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들을 사랑한 것같이 너희가 서로 사랑하며”라고 했습니다.
  스티븐 코비 박사가 어떻게 하면 문제가 없었느냐, 그 형으로 하여금 동생을 돌보게 했으면 아무 문제가 없는 것입니다.
  ‘네 동생이 잠들었잖아. 그러니까 네가 네 동생을 아빠 코트로 껴안아다가 차에 뉘어주고 방에 데려다 줘’
  그래서 형이 동생을 돌보도록 했으면 ‘아빠가 불공평해’라는 말이 안 나온단 말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고 하느냐면, 서로 사랑을 안 해도 하나님은 우리를 바로 사랑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문제가 많단 말입니다.
  ‘왜 누구는 사랑하고, 누구는 사랑 안 하냐?’이렇게 된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공평성의 원칙을 합법적으로 지켜내시면서 우리를 동일하게 사랑하실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서로서로 사랑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것도 하나의 설득 방식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지도자들이 겪는 어려움이 한 사람에게 조금만 관심을 주다가 보면 그것이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공평성이 깨져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설득이 안 된단 말입니다.
  그래서 지도자들이 겪는 어려움이 한 사람 설득해 놓고 나면 한 사람 삐져 있고, 한 아들 달래놓고 나면 둘째 아들 삐져 있고, 내부적으로 그것 뒷수습하다가 다 끝납니다.

  그래서 설득의 원칙 가운데는 공평의 원칙을 잘 준수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사랑하신다. 하나님께서 특정인만 사랑하시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가장 사랑하신다.’이렇게 믿어 드리는 것도 내가 설득 당할 수 있는 방식 중에 한 가지라는 것입니다.
  ‘나 하나님 말 안 듣다가는 어려움을 당할 수 있다’위협 당하는 것, 내가 어려움에 빠져 있을 때라도 하나님께 ‘더 이득을 제시해 주십시오’라고 말씀드리면 하나님은 얼마든지 그런 상황에 동의해 주신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나를 사랑해 주시기 때문에 반드시 내가 신뢰해도 될 대상이다’ 라고 믿어 드리는 것, 공평하신 분이시다, 그리고 ‘아직도 내가 행동하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는 내가 아직도 주님께 설득해 달라고 나아가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믿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설득할 수 있는 이 네 가지 방식을 가지고 강력하게 하나님으로부터 설득 당해서 남은 생애를 훌륭하게 마감 짓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바라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음 말씀을 볼 때 참으로 공평을 중시하시는 분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너는 허망한 풍설을 전파하지 말며 악인과 연합하여 무함하는 증인이 되지 말며 / 다수를 따라 악을 행하지 말며 송사에 다수를 따라 부정당한 증거를 하지 말며 / 가난한 자의 송사라고 편벽되이 두호하지 말지니라 / 네가 만일 네 원수의 길 잃은 소나 나귀를 만나거든 반드시 그 사람에게로 돌릴지며 / 네가 만일 너를 미워하는 자의 나귀가 짐을 싣고 엎드러짐을 보거든 삼가 버려두지 말고 그를 도와 그 짐을 부리울지니라 / 너는 가난한 자의 송사라고 공평치 않게 하지 말며 / 거짓 일을 멀리하며 무죄한 자와 의로운 자를 죽이지 말라 나는 악인을 의롭다 하지 아니하겠노라 / 너는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밝은 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로운 자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출 23:1-8)
  “공평한 저울과 공평한 추와 공평한 에바와 공평한 힌을 사용하라 나는 너희를 인도하여 애굽 땅에서 나오게 한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레 19:36)
  “속이는 저울은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공평한 추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잠 11:1)
  “의와 공평을 행하는 것은 제사 드리는 것보다 여호와께서 기쁘게 여기시느니라”(잠 21:3)

  일곱째, 압력설득방식에 의한 설득을 당하는 것입니다.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참여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생각하게 됩니다.
  “저렇게 많은 사람이 동참을 했는데 나는 뭐했는가 ... ”

  초대 교회 때의 일입니다.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앉은뱅이가 나으니”(행 8:7)

  여덟째, 본능적 모방심리를 자극 당할 수 있는 설득을 당하는 것입니다.

  아니, 아인슈타인과 우유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런데도 우유박스에 아인슈타인 사진이 인쇄되어 있으면 우유가 더 잘 팔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메치니 코프와 유산균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런데 메치니코프가 그려진 야쿠르트가 잘 팔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누군가 훌륭한 사람을 모방하고 싶어 한다는 것입니다.

  사무엘 시대 때의 일입니다.
  “백성이 사무엘의 말 듣기를 거절하여 가로되 아니로소이다 우리도 우리 왕이 있어야 하리니 / 우리도 열방과 같이 되어 우리 왕이 우리를 다스리며 우리 앞에 나가서 우리의 싸움을 싸워야 할 것이니이다 / 사무엘이 백성의 모든 말을 듣고 여호와께 고하매 /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들의 말을 들어 왕을 세우라 하시니 사무엘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기 성읍으로 돌아가라 하니라”(삼상 8:19-22)

  아홉째, 약속을 잘 지킬수 있게하는 신뢰에 의한 설득을 당하는 것입니다.

  야구를 전혀 좋아하지 않는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들이 그렇게 야구를 좋아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야구 시즌을 맞이하여 아들과 6주 동안 야구를 관람하러 다녔습니다.
  아들은 야구를 보며 좋아했고, 아버지는 아들과 인간관계가 밀접하게 되는 것을 보며 좋아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뢰를 얻는 것이 사랑을 얻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다.”는 말이 있습니다.

  약속은 기대를 발생시킵니다.
  그러나 반대로 약속을 안 지키면 실망을 발생시킵니다.
  꾸준한 일관성 있는 행동이 강력한 설득을 낳는 것입니다.
  감정의 기복이 심하게 상대를 대하게 되면 신뢰수준의 잔고가 바닥이 납니다.
  응급처치란 신기루 같은 것입니다.

  바울이 권면하였습니다.
  “이렇게 경영할 때에 어찌 경홀히 하였으리요 혹 경영하기를 육체를 좇아 경영하여 예, 예 하고 아니, 아니라 하는 일이 내게 있었겠느냐 / 하나님은 미쁘시니라 우리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예 하고 아니라 함이 없노라 /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였으니 저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고후 1:17-19)

  열번째, 정확하고도 감동적인 목표 설정에 의한 설득을 당하는 것입니다.

  왜 목표를 안 세우겠습니까?
  그것은 목표를 설정해봐야 안 이루어진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현실로 이루어진다는 보장만 있다면 누가 안 세우겠습니까? 자신에 대해 실망할까 하여 안 세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목표를 못 이루는 사람들은 중간에 목표를 포기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두뇌는 자신이 중요하다고 믿는 것에 집중하게 되어 있습니다. 브레인 스토밍을 해보면 자신이 현재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는 지를 알 수 있게 됩니다. 자신이 감동을 느끼는 것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하면 됩니다.  목표를 달성해야 하는 이유들을 계속 적어나가는 것이 좋습니다.

  바울이 권면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같이 아니하여”(고전 9:26)

마귀 대적에 대하여

{야고보서 4:7}

 

한 남자아이가 아버지와 함께 동물원에 갔습니다. 부자가 사자 우리를 지나 갈 때였습니다. 어린 아들은 포효를 하며 어슬렁거리는 사자에 놀라서 울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가 물었습니다. “얘야, 왜 그러는데?” 새파랗게 질린 아들이 대답했습니다. "아빠, 저 사자의 사나운 이빨 좀 보세요" 그러자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아들아, 사자의 이빨만 보지 말고 안전한 철장도 함께 보아라. 사자는 무섭고 힘이 센 것은 사실이지만 안전한 철창 때문에 우리에게 쉽게 공격을 할 수가 없단다.”

  현재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사자나, 호랑이 보다 몇 백 배 더 강한 마귀와 그의 졸개들인 귀신들의 틈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천국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 세상은 마귀와 그의 졸개들인 귀신들이 우글거리는 곳입니다. 이런 가운데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조금만 방심하게 되면 마귀와 그의 졸개들인 귀신들에게 순식간에 끌려가 참혹한 공격에 의해 극심한 부상을 입기 쉽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마귀와 싸워서 이길 것이며, 어떻게 대항을 할 것이겠습니까?

  첫째, 마귀의 공격 유형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우리는 바람이 눈에 안 보이지만, 바람에 의해 흔들리는 물체를 통해서 바람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리고  공기가 눈에 안 보이지만, 공기에 의한 결과를 통해서 우리는 세상에 공기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방송국에서 방송하는 사람들이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전파를 통해서 실제 방송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마귀와 그의 졸개들인 귀신들, 그리고 천사들이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 현상들을 통해서 우리는 그들의 존재와 활동 여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마귀의 공격 유형 세 가지는 무엇이겠습니까?
  마귀가 그의 졸개들인 귀신들의 역사는 이 땅에서 아무리 많은 역사를 나타내더라도 크게 세 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① 마귀와 그의 졸개들인 귀신들은 환경적인 재해를 통해서 역사 합니다.
  욥의 가정은 여러 어려움들을 당했으나 사실은 하나님께서 사단에게 욥의 생명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다 알아서 피해를 주도록 허락하신 후에 일어난 일들입니다(욥 1장, 2장).
  그러니까 우리 사람의 눈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자연적인 그리고 환경적인 재해, 배후에는 반드시 마귀의 공격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갈 때의 일이었습니다. 바람과 광풍에 의해 풍랑이 일어났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는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바람과 바다가 무슨 말을 알아들을 수 있어서 꾸짖으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람과 바다의 배후에 있는 악한 영들을 꾸짖으셨던 것입니다(막 4:35-41).
  그러므로 우리는 살아가면서 환경적으로 자연재해가 일어나면 ‘아 올해도 또 작년처럼 정해진 수순에 의해서 여러 일들이 일어나는구나!’라고 생각하지 말고 ‘아, 마귀가 역사하고 있구나’라고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17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진행할 때였습니다. 아말렉 군사들이 뒤에 와서 공격을 했습니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모세가 손을 들고 기도를 하면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이 아말렉 군사들을 이기고, 손을 내리고 기도를 안 하면 아말렉 군사에게 이스라엘 백성이 패했던 것입니다.
  왜 그러 하느냔 말입니다. 아니 싸움이라는 것이 가시적인 전투력에 의한 결과여야지, 왜 손을 들고 기도하면 이기고, 내리면 지느냐는 말입니다.
  그것은 배후에 마귀가 역사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② 마귀와 그의 졸개들인 귀신들은 신체적인 공격을 통해서도 역사 합니다.
  베드로가 그의 장모 집에 예수님을 모시고 갔을 때였습니다. 마침 그 장모는 열병을 앓고 누워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병을 꾸짖으셨습니다. 그러자 그 열병은  즉시 떠나갔고 베드로의 장모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 예수님의 수종을 들게 되었습니다(눅 4:39).

  특별히 누가복음 13장에는 열여덟 해 동안을 귀신이 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있는 것, 귀신이 들려서 통증, 앓으며 가시적으로 꼬부라져 있는 사람을 예수께서 안수 하시사 즉시 펴시며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마귀는 오늘날 신체적인 질병을 통해서 역사 합니다. 마귀와 귀신들은 눈에는 안 보입니다만 신체적 질병을 통해 역사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병원은 왜 가야 하겠습니까?
  그것은 이미 발생된 신체적 질병을 치료 및 수습하는 과정을 위하여 병원을 가거나 약을 먹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병은 마귀가 만들어내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미 발생된 병은 현대 과학을 통해서 치유를 하고, 발생되기 전 단계에서는 악한 영들의 공격을  막아서 발병을 막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병은 이미 발생된 부분을 치료함과 동시에 근본 발생 전 원인 두 가지를 다 치료해야 합니다.

  ③ 생각을 통해서 역사 합니다.
  분명히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라고 말한 후 예수님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야 할 것”(마 16:21)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마 16:22)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마 16:2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마귀는 사람의 생각을 통해서 역사 합니다.
  예수님 바로 옆에 있던 베드로를 통해서도 역사 했던 것입니다.
  금방 은혜스러운 말을 했는데 그 입으로 다시 예수님 하시는 일을 가로막는 발언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내 입으로 금방 은혜스러운 말을 했다고 해서 그 다음 나오는 말도 은혜스러운 말일 것이다.’라고 믿어서는 안됩니다.
  이렇게 사단은 심리적으로 역사를 합니다.
  마귀는 우리의 생각이 부정적으로 흘러가게 하고 열등감, 좌절감, 한강에 가서 뛰어내리고 싶은 마음, 파괴적인 마음, 공격적인 마음 등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심리가 계속되어지면 ‘아, 마귀가 심리적으로 나를 공격하는구나! 눈에 보이지 않는 마귀고 눈에 보이지 않는 사단의 졸개들인 귀신들이지만 나를 지금 심리적으로 공격하고 있구나!’라고 인정하고 믿고 방어 태세를 취하고 역 공격을 가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귀는 예수님을 팔려고 하는 마음을 가룟 유다의 마음에 넣어주기도 하였습니다.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요 13:2)

  이렇게 마귀는 크게 세 가지를 공격합니다.
  자연 곧 환경 재해, 신체적 질병, 우리의 생각 등을 통해 공격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엡 6:12)

  이 말씀은, ‘우리의 씨름은’ 곧 ‘우리가 당하고 있는 모든 일들은 사실은 배후에서 마귀가 역사 하는 것이다.’라는 의미로 사도 바울은 지적했던 것입니다.

  빅토르 위고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인간은 세 가지 곧 자연, 인간, 자신에 의해 평생 고난을 당하며 살아가게 된다.”

  위고가 왜 이런 말을 했는지 모르지만, 이것이 성경적으로 맞아떨어지는 얘기입니다.
  우리가 매일 겪는 어려움들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심리적으로 압박하는 어려움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체적 질병 등을 통해서 어려움을 당한단 말입니다. 그리고 자연적인 것들을 통해서 우리가 어려움을 당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마귀를 대적하기 위해서는 철저한 사전 준비 기도가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모스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화 있을찐저 시온에서 안일한 자와 ...”(암 6:1)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를 지러 가시기 전에 미리 준비 기도를 하셨습니다.
  ‘오늘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사실을 부인했습니다. 그리고는 쿨쿨 잤단 말입니다. 그리고 체포하러 온 사람들과 맞닥뜨리자 예수님 제자들은 다 도망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미리 충분한 기도를 하셨기 때문에 그 상황과 맞닥뜨려진 상황에서 도망가지 않으시고 자기발로 걸어가시고 체포되시고 결국은 그 모든 어려움들을 이겨내셨습니다.

  마귀를 대적하기 위해서는 철저한 준비 기도가 필요합니다. 기도의 현장에서 ‘아, 이 일은 이제 됐다’라고 확신이 오면 이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하는 곳에서 ’내가 이길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앞서면 그것은 대개 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귀를 대적하기 위해서 ‘이제는 내가 이 마귀를, 이겼다.’라는 확신이 올 때까지 기도하면 이기는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남편이 자꾸 문제를 일으킵니다. 그러면 우리 아내들이 많은 시간을 생각으로 남편들을 쫓아다닙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지칩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동시에 두 곳에 있을 수가 없기 때문에 아침부터 저녁까지 도시락 싸들고 남편만을 쫓아다닐 수 없기 때문에 한계가 있단 말입니다. 그러면 생각으로 쫓아다니다가 어디선가 놓칩니다. 그러면 그 때부터 아무것도 못합니다. ‘이 사람이 어디 갔을까?’ 그런데 그 때 어떻게 하는 방법이 있느냐 하면, 그렇게 쫓아다니지 말고 기도의 자리로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24시간을 언제나 내 남편과 함께 하는 하나님께 의뢰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처음에는 마치 10M도 더 되는 벽을 두드리는 것과 같습니다. 아무 반응도 없고 큰 절벽을 하나 만난 것 같고, 산을 만난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그러할지라도 계속해서 “하나님, 제 남편 문제를 해결해 주세요. 제 남편 문제를 해결해 주세요.”라고 밤낮 부르짖으면 결국은 하나님께서 문제를 해결하여 주십니다.

  또는 “하나님 제 아이가 속을 썩입니다.”라고 계속 기도를 드리면 그 때도 처음에는 마치 큰 산 하나를 만난 것 같습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기도하면 마침내 어느 순간에 ‘아 됐다.’라고 확신이 온단 말입니다.

  마귀를 대적해서 이기기 위해서는 먼저 기도 자리에서 이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 자리에서 이기지 못하고는 아무리 환경적으로 쫓아다녀도 이길 수 없습니다. 기도 자리에서 이기지 못하고는 아무리 결심을 해도 이길 수가 없습니다. 수없이 결심을 하고 장담을 해도 이길 수 없습니다.
  베드로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이라고 목숨을 걸고 장담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 다음 날도 아니고 그 날 저녁에 아무 소용도 없는 헛 공약이 되고 말았단 말입니다.
  마귀 앞에서는 안됩니다. 마귀에게는 먼저 기도 자리에서 이기면 이겨지는 것이고, 기도 자리에서 지면 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내 문제이든, 자녀 문제이든, 남편 문제든, 아내 문제든, 사업 문제든 그 어떤 문제라도 기도 자리에서 ‘아, 됐다.’라는 확신이 오면 이긴 것이고 기도의 자리에서 확신을 못 얻으면 아무리 환경적으로 쫓아다녀도 못 이기는 것입니다.

  셋째, 마귀를 대적하기 위해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무엇을 하는 사람이냐?’라는 정체성을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마귀를 대적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고보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약 4:7)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느냐면, 많은 기름 부음 받은 자들을 대적하고 있습니다. 마귀를 대적하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사명인데, 그리스도인들이 하고 있는 일들이 뭐냐 하면 기름 부음을 받은 자들을 대적하고 있단 말입니다.

  시편 기자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르시기를 나의 기름 부은 자를 만지지 말며 나의 선지자를 상하지 말라 하셨도다”(시 105:15)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마귀를 대적하는 사명을 받았는데 또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대적하는 사명을 받은 것처럼 행동하고 있단 말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마귀를 대적해야만 하는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인데, 왕을 대적하고, 위로부터 권세에 굴복하지 않고, 대적하는 질서를 파괴하는 그런 일들을 하고 있단 말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를 공격하는 마귀와 싸워서 이겨야 하는 사람들인데 그것은 안 하고 다른 사람들의 허물과 죄와 모순에 간섭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단 말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마귀와 대적해서 싸워서 이겨야 하는 사람들인데, 그 시간에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고 흉보고 의심하고 그런 일로 다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마귀를 대적해서 싸워서 이겨야 되는 사람들인데, 계속해서 헛 시간을 사용하는 쪽으로 우리가 살아가고 있단 말입니다.

  민수기 12장에 보면 미리암은 하나님께서 세운 모세를 하나님께서 처리하시도록 맡겨 놓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제가 해결하지요.’ 하고 나섰다가 문둥병에 걸렸습니다.
  우리는 내가 해야 할 일이 있고, 하나님께 맡겨 드려야 할 일이 있습니다. 사람은 내가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일은 내가 나서서 충고하거나 비난하는 것 아닙니다.

  사울 왕은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살지 못했지만 다윗은 깨끗하게 그것을 하나님께 맡겨 드렸습니다. 다윗은 이해가 안 되었습니다. 3,000명씩 데리고 사위인 자신을 죽이려고 쫓아다니는 그 사울 왕이 이해가 안 됐단 말입니다. 그런데 지나고 나서 생각해 보니까 하나님께서는 사울 왕에게 충분한 시간을 주셨던 것입니다. 더 이상 어떻게 시간을 줄 수 없을 정도로 회개할 기회를 주셨으나 사울은 회개하지 않았고 전쟁터에서 아들 셋과 함께 죽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마귀를 대적하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가족들을 공격하는 마귀를 대적해서 싸워서 이겨야 합니다.
  마귀하고 싸워서 이기는 사람만이 자기 남편을 세상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습니다.
  마귀하고 싸워서 이기는 가장만 가족들을 이 세상에서 보호할 수 있습니다.
  마귀하고 싸워서 이기는 부모들만 자녀들을 이 세상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단 말입니다.
  마귀하고 싸워서 지는 사람들은 아무리 교육을 많이 시키고, 자녀들에게 아무리 좋은 옷을 많이 사 주고, 아무리 좋은 약을 사주고, 아무리 근심을 많이 한다고 해도 못 지켜냅니다.
  마귀하고 싸워서 이겨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마귀하고 대적해서 싸워서 이겨주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딤후 2:3)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군사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왜 교회가 필요하고, 왜 소그룹이 필요하냐면, 우리 교인들 중에 누군가가 마귀에게 공격을 당하고 있다 라는 정보를 입수하면 즉시 같이 싸워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교인들은 마치 동물의 왕국을 보는 한 편의 드라마와 같은 일이 일어나고 맙니다. 일 톤이 넘는 물소가 무리 지어 떼지어 갈 때는 사자들이 공격을 못합니다. 그런데 사자들이 십여 마리가 따라 붙어서 예의 주시합니다. 그러다가 정확하게 병든 소, 그리고 무리와 분리된, ‘무리와 분리되는 자는 자기 욕심을 따르는 자니라’라는 잠언 말씀처럼 무리와 분리된 소가 없나? 예의 주시하다가 어느 순간에 공격을 해서 무리로부터 일 톤이 넘는 물소를 격리시킵니다. 그리고는 그 십여 마리가 서서히 몰아가서, 나중에는 그 무리 중에 물소 다섯 마리가 실제로 와서 그 한 마리를 데리러 오는 것을 보고 제가 놀란 적이 있습니다.
  ‘아니 저 물소도 소그룹이 적용되는구나!’
  그 많은 물소들 가운데 한 마리가 격리되어서 사자 십여 마리에게 공격을 당하니까 특별 팀 다섯 마리가 다시 오는 것입니다. 그러더니 사자들을 공격해 가면서 그 한 마리가 빠져나올 수 있도록 충분히 시간을 주고 기회를 주더란 말입니다. 그런데 그 물소가 그 구덩이에서 안 나오더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그 다섯 마리가 그 한 마리를 포기하고 가더란 말입니다. 그렇게 그 다섯 마리가 돌아가더니 잠시 후에 사자 열 마리 중에 한 마리가 붕 날아서 그 물소의 목덜미를 잡고, 공격을 하기 시작하니까, 뒷다리를 물고, 꼬리 물고, 옆으로 자빠지니까 나머지 일곱 마리가 달려들어 포식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그 물소 한 마리가 아주 무참하게 죽어가더란 말입니다. 바로 마귀가 우리를 그런 식으로 공격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수많은 기회를 주셨는데 지금 마귀에 의해서 무너져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혼자 싸워서 마귀의 졸개들인 귀신들을 대적해서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군사들임으로 힘을 합해서 싸워서 이겨야 합니다.

  넷째, 마귀를 어떻게 대적하겠습니까?

  마태복음 8장 16절 말씀입니다.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를 다 고치시니”(마 8:16)

  예수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다 쫓아내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이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요 6:63)
  말씀은 ‘영’이라는 것입니다.
  귀신은 악령이고, 말씀은 성령이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물리쳤다 라는 얘기는 성령으로 악령을 물리쳤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귀신들을 어떻게 쫓아내셨는가 보면 마태복음 8장 26절에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신대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꾸짖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귀를 어떻게 쫓아야 되냐면, “좀 나가 주시겠어요. 죄송합니다만 ... ” 그렇게 해서는 안 나갑니다.
  권위를 가지고 꾸짖어야 된단 말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는 어떻게 꾸짖어야 하겠습니까?
  예수님의 이름을 내세워서 꾸짖어야 합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막 16:17)

  한 사람이 지혜로운 방법을 생각해 냈습니다.
  이 사람은 자신이 정신적으로 마귀에게 공격당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신체적으로도 공격을 하고, 자연적으로도 공격을 하지만, 이 사람은 자꾸만 부정적인 생각이 자기를 괴롭힌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어느 날 마귀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받는 자, 마귀에게 ...
  “너 자꾸 나보고 약하다고 그러는데 나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너 자꾸만 나에게 아무리 노력해도 나는 아무 변화도 될 수 없다 라고 말을 하는데, 아니다. 그리스도안에서 있으면 나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너 계속해서 나를 비난하고 시험하고 절망에 빠뜨리려고 애를 쓰는데 나는 하나님께로부터 할 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느니라 고 약속을 받은 사람이다.’
  보내는 사람, 그리스도인 누구라고 자기 사인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때부터 기도를 하는데 힘이 나더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에게 편지를 써도 힘을 얻지만, 마귀가 자꾸 우리를 괴롭히면 마귀한테 편지를 쓰십시오.
  “사단, 너 읽거라. 너 자꾸만 나를 괴롭히는데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어. 너 자꾸만 까불지 마. 혼나는 수가 있어.”라고 편지를 보낼 필요가 있단 말입니다.
  자꾸만 마귀가 내 남편과 자녀들을 괴롭히면 다음과 같이 편지를 쓰십시오.

  “너 내 남편에게서 손 떼. 예수 이름으로 명령하노니 손을 떼라!”
  “너 내 자녀에게서 손 떼. 내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경고한다. 손 떼라!”
  그리고 그 내용을 읽고 믿으면 효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귀신을 쫓았다’라는 말은 ‘말씀에 위배되지 않는 권위 있는 명령으로 쫓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귀신을 꾸짖으셨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꾸짖으시니 귀신이 나가고 아이가 그 때부터 나으니라”(마 17:18)
  “예수께서 꾸짖어 가라사대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막 1:25)

  그러면 어떻게 꾸짖어야 되겠습니까?
  예수께서 더러운 귀신을 꾸짖으셨다고 그랬는데, 우리가 우리 몸에 더러운 검불이 붙거나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얼른 떼어버리지 않습니까! ‘검불님, 붙으셨는가 천천히 떼어내야지 ... ’ 누가 그럽니까?
  얼른 떼어버립니다. 단호하게. 마찬가지로 그런 단호한 마음을 가지고, 꾸짖듯이 권위를 가지고, 타협의 여지가 없단 말입니다. 그것을 성경에서 ‘꾸짖는다.’고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귀신을 꾸짖을 수 있는 자격이 있겠습니까?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제자들에게는 성령의 의해서 귀신을 쫓는 것이 아니라 그냥 예수님께서 주신 권위, 감동에 의해서 쫓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그렇지 않단 말입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으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권위를 가지고 쫓아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 집 앞에 우리 집과 도움이 안 되는 불필요한 사람이 있을 때에는 아무리 어린 자녀라도 나가서 ‘우리 할아버지가 그러시는데 좀 비켜 달래요.’ 그렇게만 말을 해도 상당한 권위가 있단 말입니다.
  그것처럼 예수님의 이름으로 ‘예수님께서 너희들 우리 집에서 우리 자녀들에게서 내 마음에서 떠나가 달라’라고 단호하게 명령하는 것, 그것을 꾸짖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마귀는 언제 사단이고, 언제 마귀고, 언제 귀신이 되는 것이겠습니까?
  상황을 살펴봐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이면 “마귀야, 사단아 물러가라!” 그렇게 명령하면 됩니다.
  그리고 이것이 신체적인 질병이나 심리적인 것이나 자연적인 일부 개념이면 “귀신아!” 그러면 됩니다.
  꼭 친구들끼리 말다툼을 해도 못 된 친구들은 ‘니네 아버지 어머니’를 들먹이면서 나오는 친구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봐서 ‘이것이 하나님을 대항하는 일’이라는 판단이 서면, ‘마귀야! 사단아! 물러가라!’고 하면 됩니다.
  어떻게 구분을 짓느냐면, 하나님 일을 방해하는 것이면, ‘사단아, 마귀야’그러면 됩니다.
  사람을 괴롭히는 일이라면 ‘귀신아 물러가라’그러면 됩니다.
  그리고 마귀와 사단과 동격어입니다.
  구약적 언어는 사단이고, 신약적 언어는 마귀이기 때문입니다.
  같은 뜻으로 사단, 곧 마귀는 디아블로스, 훼방자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앞에 왔을 때 그 사람에게 분명히 하는 짓은 그 사람 속에 있는 귀신이 하는 짓이 맞습니다. 그런데도 그 사람이 앉아 있을 때 그 사람을 보고 ‘귀신아’ 그러면 기분이 되게 나쁩니다. 그러니까 그냥 ‘이 사람을 괴롭히는 악한 것들이 다 정리되게 해 주시옵소서’ 라고 점잖게 해야 합니다.

  제가 한 번은 몸이 너무너무 아파 가지고 우리 집사님들에게 기도 좀 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목사님에게서 귀신이 나가게 해 주시옵소서”라고 기도를 크게 하는데 그 다음부터는 제가 다시는 기도해 달라는 부탁을 안 합니다. 아무리 기도를 부탁해도 그렇게 적나라하게 할 수가 있습니까?

  귀신은 어떻게 꾸짖어야 하겠습니까?
  다음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꾸짖으신 장면입니다.
  “그 후에 열 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나타나사 저희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의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막 16:14)

  부활하신 예수님을 제자들이 하도 못 믿으니까 그 안 믿는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라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얼마나 믿어야 하는 것을 안 믿으니까, 답답하니까 꾸짖으셨다는 말입니다. 바로 이런 꾸짖는다는 개념으로 우리가 귀신을 꾸짖어야 한다 말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이름으로 명령하노니! 우리 가족들과 가정과 사업장과 여러 가지를 괴롭히는 원수 세력들아 물러갈지어다’ 이렇게 단호하게 내어쫓는 것, 이것을 보고 꾸짖는다고 합니다.

  우리는 오늘 마귀 대적에 대해서 생각을 해 봤습니다.
  마귀는,
  첫째, 자연적이고, 신체적이고, 심리적으로 공격을 하는 존재입니다.
  둘째, 마귀를 대적하여 이기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먼저 기도의 자리에서 ‘이겼다.’라는 확신을 얻어야만 합니다.
  셋째,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마귀와 대적해서 싸워서 이겨야 하는 사람들이다 그런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넷째,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말씀으로, 다른 어떤 무기가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대적해서 능히 승리를 거둘 수 있는 그런 존재들입니다.

  마귀하고 싸워서 반드시 이겨서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바라겠습니다.

 

 

기다림에 대하여

{시편 40:1~2}

 

 한 부인이 오페라 공연을 관람한 후에 아주 값비싼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그 공연장에서 잃어버리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다음날 그 사실을 깨달은 부인은 공연장 관계자들 중 한 명에게 전화를 걸어 그 결과를 확인하려 했습니다. 담당 직원이 그 내용을 알아 본 후 부인에게 그 사실을 말하려고 다시 수화기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기다리다가 ‘아무래도 그 공연장에서 목걸이를 잃어버리지 않은 것 같다.’고 판단한 부인은 자신의 연락처를 남기지 않은 채로 전화를 끊었습니다. 공연장 담당자는 결국 목걸이를 주인에게 돌려 줄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조금만 더 참고 기다리면 참 좋았을 것을 기다리는 인내가 부족해서 일을 그르친 경험들을 최소한 몇 건 이상씩 가지고 살아가고들 있습니다.

  미국에서 베스트 셀러가 된 "너무 빨리 자라는 아이들"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저자인 엘킨드 박사는 현대의 부모들이 자녀들을 마치 급행열차에 태운 것처럼 너무 빨리 몰아붙여 성장 시켜 가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하였습니다.
  결과로 그렇게 성장한 자녀들은 성장을 한 후 도무지 작은 일들에 대해서도 기다릴 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금만 어려움이 다가오면 끝내 못 견디고 자신의 삶을 파괴시키고, 자신의 삶을 내 던져버리고, 어디론가 도망을 치려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사람은 성취도 중요하지만, 인내하는 것은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주 좌절하는 이유는 우리가 원했던 일들이 우리가 원했던 바대로 빨리빨리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러할 때 우리가 취하여야 할 태도는 무엇이겠습니까? 무리한 성취이겠습니까? 아닙니다. 인내입니다. 견디는 것이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잘 해 보려 했으나 잘 안 되었을 때 급히 취할 수 있는 행동, 그것은 또 다른 성취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세상에 어떤 일이든지 단 번에 이루어지는 경우는 없을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에게 어려움이 찾아왔을 때 우리가 가장 먼저 취하여야 하는 태도는 인내 그 자체인 것입니다.

  다니엘 웹스터는 친구들과 함께 성경 말씀 중 어떤 말씀이 가장 문학적으로 아름다운가에 대해 선별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과 그는 하나님께서 하박국 선지자를 통해 하신 다음의 말씀을 가장 문학적으로 아름답다는 결정을 짓게 되었다고 합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합 3:17-19)

  위 말씀의 의미는 우리의 눈에 가시적으로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지라도, 그러할지라도 희망을 가지고 인내하면서 기다릴 줄 아는 능력이 인간에게는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현재 조금만 낙심과 어려움들이 다가오면 도무지 기다리는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기다릴 줄 알아야 하겠습니까?

  무엇을 기다려야 하는가?

  첫째,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들을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약속 없는 기다림은 성취된다는 아무 보장도 없습니다.
  누군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묻고 우리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고 생각해 보시겠습니까?
  “왜 기다렸습니까?”
  “그냥 기다렸습니다.”
  “아니, 내가 당신에게 무슨 약속을 해줬기에 기다렸습니까?”
  “그냥 기다리다가 보면 좋은 일이 있을 줄 알고 기다렸습니다.”

  이러한 것은 안 된다는 말입니다.
  사람은 기다릴 때 상대로부터 분명한 약속을 받아 가지고 기다려야지, 아무 약속도 없이 무작정, 혼자 일방정적으로 믿고 기다리는 약속은 보장이 없는 것입니다.
  짐승이 서로 약속하고 만나는 것 보신 적 있습니까? 약속이란 사람만이 할 줄 알고 지킬 줄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서로 약속하고 기다릴 때 가장 우리가 주의해야 될 점은 계약내용에 맞는 범위 내에서 기다릴 줄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머리 위에 직접 안수를 준 역사상 전무후무한 선지자였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세례 요한이 감옥에 갇혔을 때 자신의 제자를 예수님에게 보내 따져 물은 내용이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마 11:3)

  이 말씀은, ‘실망했다.’는 뜻입니다.
  자신은 적어도 헤롯왕의 온전치 못한 행동을 지적한 후 감옥 안에 억울하게 들어와 있는데 예수님께서 그 지역에 오셨을 때 최소한 면회 정도는 올 줄 알았단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세례 요한 감옥에 있을 때 면회를 단 한 번도 안 하셨습니다. 세례 요한은 너무너무 실망을 한 나머지 자신의 제자를 보내서 “오실 그이가 당신 맞습니까?” 곧 “당신 메시야 맞습니까?”라고 물어 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답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마 11:6)

  이 말씀은, “내가 너희들과 계약한 내용 범위 내에서 위배되지 않는 사실을 보고 실망하지 않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의 제자들에게 ‘가서 무엇을 듣고 보는 것’을 전하라고 하셨겠습니까?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마 11:4-5)

  이 말씀은 다음과 같은 의미입니다.
  “너희들은 메시야가 세상에 오면 무엇을 할 것이라고 기대를 했느냐! 세례 요한이 억울하게 감옥에 가면 그 억울한 감옥에서 건져준다고 이사야서에 기록되어 있더냐? 아니지 않느냐! 구약성경에 메시야가 와서 무슨 일을 한다고 기록되어 있느냐? 소경이 눈을 뜨고, 앉은뱅이를 일으켜 주고, 귀머거리의 귀를 열어주겠다고 분명히 계약되어 있지 않느냐! 그런데 내가 그 일들을 분명히 했느냐? 안 했느냐? 하지 않았느냐? 그러면 내가 무슨 잘못이 있느냐!”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는 말씀을 ‘메시야는 소경의 눈만 뜨게 해 주고, 귀머거리의 귀만 열어주고, 앉은뱅이만 일으켜 주신다.’는 의미로만 이해를 해서는 안 됩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하나님께서는 성경에는 아직 기록되지 않은 내용이지만 오늘도 레에마 등을 통해서 약속하신 것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이루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사람도 한 번 약속한 부분은 지키고, 자신과 아무 계약 조건에도 없는 일들은 약속을 지키지도 않거니와 지킬 필요성조차도 못 느끼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우리는 사람을 만나 제일 먼저 해야 될 일은 분명히 쌍방이 지켜야 할 계약을 하는 것입니다.

  결혼하는 청년들을 보면 주로 혼자 일방적으로 생각하고 분명한 계약을 안 하는 경향들이 있습니다.
  여청년들은 ‘결혼하면 남편이 이렇게도 잘 해 줄 것이고, 저렇게도 잘 해 줄 것이고 ...’라고 일방적으로 기대를 많이 합니다. 그런데 나중에 살아보면 아닙니다.
  그러면 그 때는 실망을 해 가지고 ‘인간이 그럴 수가 없다’는 등 일방적으로 실망을 한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러지 말고, 구체적인 계약을 미리 하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너무 일방적으로 다음과 같이 기다리는 경향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사정 다 아시니까 어련히 다 알아 응답하시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나의 현재 어려움들을 하나님께 충분히 말씀드리고 나에게 구체적으로 주시는 약속을 받아 가지고 계속 기도를 드리며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모세가 기록한 말씀입니다.
  “그들이 그를 가두고 여호와의 명령을 기다리더니”(레 24:12)

  예수님 명령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하시니라”(눅 24:49)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행 1:4)

  제자들이 물었습니다.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 하니”(행 1:7)

  예수님께서 답변 하셨습니다.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행 1:7)

  그러니까 우리는 무슨 일을 정할 때 그 때를 우리가 정하려고 하는데 그러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때는 하나님께서 정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권한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문제를 한 가지 가지고 하나님께 응답 받기를 원하면 먼저 그 문제를 가지고 나가 다음과 같이 여쭈어야 합니다.
  “하나님,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그러면 마음의 확신이 옵니다. 이것을 일차 응답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다음과 같이 깨달아집니다.
  “아, 이 문제를 가지고 좀 더 기도를 하면 응답이 오겠다.”
  그것이 바로 약속이고 명령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떤 문제를 응답 받기 위해서 아무리 가지고 나가서 기도를 드려도 전혀 마음의 확신이 안 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할 때는 ‘아, 내가 이 문제를 가지고 내가 과연 계속 기도를 더 드릴 필요가 있을까?’를 한 번 생각을 해 봐야 합니다.
  그래서 계속 기도를 드리다가 마음의 확신이 오면 ‘아, 이 문제를 가지고 기도를 하면 응답 받겠다.’ 그리고는 계속해서 기도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 문제나 내가 임의적으로 설정해 가지고 찾고, 두드리고, 열리라고 명령하며 밀고 나간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다려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내게 분명히 주신 약속 그것을 믿고 기다려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자녀들이 아침에 집에서 나갔는데 우리와 오후에 시장 어느 곳에서 만나기로 했다면 어느 지점 과 장소를 분명히 정해서 기다리지, 시장에서 보자고 하고서는 시간도 장소도 정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기다리지 않을 것 아니겠습니까?

  어떤 분이 아들을 위해 기도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제 아들을 축복해 주세요. 축복해 주세요.”
  그렇게 몇 년을 기도 드렸는데, 드디어 응답이 왔다고 합니다.
  “내가 네 아들을 50세가 넘으면 그 때부터 축복하리라”
  그 어머니는 그 응답을 받아 가지고 그 때부터 ‘아들이 50세가 넘으면 하나님께서 축복하시겠다.’고 믿는 그 믿음을 가지고 결사적으로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보니까 정말로 아들이 50세가 넘으니까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놀랍게 축복하시더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의 약속을 미리 받아서 기도를 드리는 것이 좋습니다.

  제가 아는 선배 목사님 한 분은 등이 굽은 곱사등이였습니다.
  그런데 기도 중에 자신이 곱사등이에서 등이 펴지는 그런 응답과 확신과 환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등이 그 즉시 펴 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환상 중에 자신의 곱사등이 등이 펴 진 것을 본 것입니다. 그는 그 때부터 열심히 기도를 드리기 시작하였습니다. 8년이 지났습니다. 마침내 그 등이 완전히 펴졌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기도응답을 무조건 하다 보면 어느 날 한 번에 받게 될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한 번에 받는 응답도 있지만, 하나님께서 먼저 약속해 주시고 ‘이 문제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명령을 해 주신대로 주로 순종하여 받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성실하게 회개하며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성실하게 회개하면서 기다리는 내일은 각종 좋은 축복이 우리에게 다가오게 되는 조건이 됩니다.

  독일에 전설처럼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바바리아(Bavaria)라는 성에 루드비히(Ludwig) 공작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을 함부로 대하고 괴롭히는 포악한 공작을 성안의 모든 사람들은 두려워했습니다. 어느 날 그 공작이 사냥을 나갔다가 숲 속에 한 작은 예배당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가 제단 앞에서 오랜만에 기도를 하는데 갑자기 예배당 벽에 무슨 글씨가 쓰이는 것입니다. 순식간에 보였다가 사라졌기에 앞부분만 기억났습니다. 삼일인지, 석 달인지, 삼 년인지 아무튼 그 안에(In Three ...) 무서운 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공작은 나름대로 해석하기를 ‘아무래도 내가 나쁜 일을 많이 했더니 삼일 안에 죽게 되는구나!’ 그리고는 집에 돌아와서 삼일 동안 아내와 부하들, 백성들에게도 잘 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삼일이 지났는데도 안 죽는 것입니다.
  다시 재해석을 했습니다. ‘아, 내가 석 달 있으면 죽는구나!’  석 달 동안 가족과 백성들에게 최선을 다했습니다. 하지만 세 달이 지나도 죽지 않는 것입니다. 공작은 이제야 확신을 가졌습니다. ‘삼 년이었구나.’ 3년 동안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러던 3년이 지난 어느 날 갑자기 나팔소리와 함께 독일 왕실에서 사절단이 왔습니다. 바로 루드비히 공작을 독일의 황제로 모시겠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했더니, 이 공작이 지난 3년 동안 너무너무 선행을 많이 하고, 성실하게 행하고, 소문이 좋게 난 결과 이 공작을 왕실에서 황제로 모셔야 되겠다는 결정이 났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비결이었느냐 하면, 이 공작은 삼일 있다가 죽을지, 석 달 있다가 죽을지, 삼 년 있다가 죽을지 몰라 그냥 최선을 다해 하루하루 열심히 살았던 것이었습니다. 결과로 이 사람에게 이렇게 좋은 일이 일어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삼일 있다가 절대 안 죽고, 석 달 있다가도 절대 못 죽고, 삼 년이 뭐예요. 앞으로 삼십 년을 더 살 수 있다고 믿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여유가 많기 때문에, 여유를 가지는 것까지는 좋으나 그 기간을 성실하게는 살아가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성실하게 살면 되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암환자만 시한부가 아니고, 모두 다 시한부 생명인데 그 마음 자세 여부에 따라 삶의 질의 결과가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나는 삼일밖에 못 산다.’
  이 사람은 삼일만큼 최선을 다해서 살 것 아니겠습니까?
  ‘나는 석 달밖에 못 산다.’
  이 사람은 석 달 동안 최선을 다해서 살 것 아니겠습니까?
  ‘나는 삼 년밖에 못 산다.’
  이 사람은 최소한 삼 년 동안은 최선을 다해서 살 것입니다.
  그런데, ‘무슨 소리냐? 나는 삼십 년은 더 살아야 되겠다.’라고 믿는 것은 좋으나 오래 사는 것 까지는 좋은데, 성실하게 안 사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무엇을 기다리며 어떠한 태도로 살아가야 하느냐 하면 성실하게 회개하면서 각종 좋은 일들이 일어날 것을 기대하면서 살아가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수아가 또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스스로 성결케 하라 여호와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 기사를 행하시리라”(수 3:5)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명령하셨습니다.
  “너는 일어나서 백성을 성결케 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스스로 성결케 하여 내일을 기다리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아 너의 중에 바친 물건이 있나니 네가 그 바친 물건을 너의 중에서 제하기 전에는 너의 대적을 당치 못하리라”(수 7:13)

  이 말씀은, 기다리되 회개하며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권면하였습니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벧후 3:9-11)

  이 말씀은, 기다리되,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을 갖추고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였으니”(마 3:2)

  이 말씀은, 기다리되 회개하면서 천국적 가치관을 계속 받아들이면서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회개한다.’는 것은,
  죄에 대한 견해를 바꾸라는 것입니다. 전에는 죄가 아닌 것으로 바라보았으나 이제부터는 ‘죄다.’라고 가치관을 바꾸어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에 대해서 죄가 미워질 때까지 회개하는 것을 회개라고 합니다.
  그리고 죄가 나에게 아무 의미도 없게 느껴질 때까지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다림은 회개하면서 성실하게 기다리는 기다림이 좋은 기다림이지, 우리는 주로 아무 행동도 안 하면서 기다리려고 한단 말입니다.
  무슨 일을 기다려 보셨습니까? 얼마나 기다리는 기다림이 사람을 지치게 하고 힘들게 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러 할 때 어차피 기다리는 것, 회개하면서 성실하게 기다리면 보다 좋은 일들이 많이 다가오게 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통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고전 2:9)

  셋째, 희망을 가지고 인내하며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사람은 불확실한 가운데 기다리는 것을 참으로 힘들어합니다.
  그러나 ‘걷기 이전에 일어서는 법부터 배우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미리 준비하며 기다릴 줄 알라는 것입니다.
  농부는 씨뿌림으로 추수를 기다리고, 산모는 잉태함으로 출산을 기다리고, 낚시꾼들은 미끼를 던짐으로 물고기를 기다리고, 코치는 훌륭한 선수를 기다립니다.

  결국 인생은 무엇인가를 기다리는 지구력과의 싸움입니다. 사람은 얼마나 열심히 성실하게 잘 기다리느냐에 그 성패가 달려있습니다.
  우리는 밤에는 아침을 기다리고 아침에 또 밤을 기다립니다. 약속시간을 기다리고, 전화오기를 기다리고, 보낸 편지 답장오기를 기다리고, 누군가 찾아오기를 기다리며, 또한 좋은 소식들을 기다립니다.
  부인들은 쌀 씻어 불에 밥 얹어 뜸들기를 기다리고, 외출한 자녀들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남편의 월급날을 기다립니다.
  결국 인생은 기다리는 것들의 연속입니다.

  아브라함은 자녀를 기다렸고, 모세는 민족구원을 위해 쓰임 받기를 기다리다가 지쳐 40년 만에 포기했다가 결국은 하나님께서 찾아 와주셔서 쓰임을 받았습니다.
  요셉은 감옥에서 풀려나가기를 기다렸고, 자신의 누명이 풀려지기를 기다렸고, 야곱은 자신이 장자로서 활동을 할 수 있는 날을 기다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기다림이라고 하는 용광로에다 던지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변화되기를 기다리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자신을 변화시키지는 않으면서 하나님의 축복만 임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피차간에 견해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변화되면 주시겠다.’고 하시고, 우리는 ‘주시면 변화되겠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주 여호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가 말씀하시되 너희가 돌이켜 안연히 처하여야 구원을 얻을 것이요 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을 것이어늘 너희가 원치 아니하고 / 이르기를 아니라 우리가 말 타고 도망하리라 한고로 너희가 도망할 것이요 또 이르기를 우리가 빠른 짐승을 타리라 한고로 너희를 쫓는 자가 빠르리니”(사 30:15-16)

  ‘말 타고 도망하리라 한고로’라는 의미는 ‘여기 갔다 저기 갔다, 안절부절 못한다.’는 표현입니다.
  무엇인가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현재 앉은자리에서 조용히 자기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면서 ‘내가 무엇을 변화시키면서 기다려야 될 것인가?’를 차분하게 생각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기다리지 않고 안절부절못하며 기다립니다.
  동에서 번쩍 서에서 번쩍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빠 번쩍 번쩍 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 기다려야 하는 동안 너무너무 안절부절하며 아무것도 자신을 생산적인 일에 투자하지 않으면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런 기다림은 잘못된 기다림이다 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기다려야 하겠습니까? 희망과 인내를 가지고 미래를 잘 준비하며 기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남아공 넬슨 만델라 전 대통령은 27년 동안 감옥에 있었습니다. 만델라 대통령이 감옥에 있을 때에 하루는 딸이 아이를 낳아 아버지에게 데리고 왔습니다. "아버지, 아이의 이름을 지어주세요."라는 딸의 요청에 따라 만델라는 아이의 이름을 'Hope' 곧, 희망이라고 지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딸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감옥에 있는 동안 한번도 희망을 버려 본 적이 없단다."
  결국 그 분은 27년 동안 감옥에 있다가 출소하여 대통령이 되고야 말았습니다.

  희망을 너무 일찍 포기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우리 인생에는 남은 생애동안 반드시 희망이 있습니다.
  누가 경기를 전반전만 하고 후반전은 해 보지도 않고 포기를 하느냐는 말입니다.
  안정환 선수가 월드컵 때 페널티 킥을 실축을 했을 때 히딩크가 그 안정환 선수에게 계속 기회를 주었습니다. 결과 그는 후반전에 골든 골을 터트렸지 않습니까.
  우리가 우리 인생을 전반전으로 규정하여 살펴보건대 많은 실수와 허물과 어려움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 인생을 여기서 이대로 끝내 버리면 안 됩니다. 우리는 희망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5-28)

  그런데 25절 말씀처럼 우리가 ‘참음으로 기다린다.’는 것이 너무 어렵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해결책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롬 8:26)라는 말씀처럼 성령님의 도움을 받아 가면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님의 도움을 받아 가면서 무엇인가를 기다리면 그냥 혼자 기다리는 것보다 훨씬 더 쉽게, 즐겁게 기다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고보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시니라”(약 5:11)

  우리가 어떻게 욥과 같은 고난의 상황을 지나가면서 인내 할 수 있겠습니까?
  역시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롬 8:26)라는 말씀처럼 성령님의 도움을 받아가며 인내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힘만으로는 참음으로 기다리지 못하는데, 아무리 희망을 가지고 아무리 인내를 하려고 해도 안 되는데 성령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주시면 우리가 참음으로 내일을 기다릴 수 있다는 말입니다.

  칼 매닝거라는 분은 "사람이 소유하고 있는 것 그 자체보다 삶의 자세 그 자체가 더 중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인간이 가지고 있는 뇌의 능력은 브리태니커 대영백과사전을 다 외우고도 40개 외국어를 유창하게 할 수 있으며 수십 개 대학의 필수 과정을 다 마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뇌는 그렇게 잘 세팅이 되어 있는데 우리는 우리의 우수한 뇌를 사용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님의 도움을 절대 의지하며 희망을 가지고 인내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넷째, 기도가 응답 될 때까지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기도를 하다가 너무 많이 중간에 포기하고 맙니다.
  우리는 기도를 시작은 잘 하는데 조금 하다가 응답도 오기 전에 곧 잘 포기를 해버린다는 말입니다.

  다음은 쌩떽쥐뻬리의 <어린왕자> 중에서 기록된 '행복한 기다림'이라고 하는 제목 글의 내용입니다.
  "만약 네가 오후 네 시에 온다면 난 세 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 거야. 시간이 흐를수록 난 점점 행복해지겠지. 네 시에는 흥분해서 안절부절 하지 못할 거야. 그래서 행복이 얼마나 값진 것인가 알게 되겠지!"

  우리는 잠시 후, 네 시에 좋은 일이 일어날 사람은 세시만 되면 너무너무 행복해 질 수 있다는 견해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정적인 사고 자들은 네시에 행복할 수 있는 사람에게 세시가 되면 ‘언제 한 시간을 기다리냐?’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단 말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네시에 온다면 나는 세시부터 행복해질거야!'라는 긍정적인 관점으로 기다림을 대하자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다림을 너무 소극적이고 너무 부정적으로만 생각을 하려는데, 얼마든지 기다림을 희망이라고 하는 것으로 전환시켜서 행복의 도구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아무것도 기다릴 것이 없는 사람은 아무것도 행복할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아니, 뭔가 기다릴 것이 있어야 기대가 되어 행복 할 것도 있는 것이지, 아무것도 기다리지 않는데 무슨 행복이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군가에게 다음과 같이 물어야 합니다.
  "행복하세요? 안 행복하세요?"
  그래서 "안 행복합니다."라고 대답을 하면 "기다리는 것이 없군요!"라고 결론지으면 됩니다.
  마음 속에 희망을 가지고 기다리는 것이 있는 사람은 행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앞으로는 ‘기도 응답도 무지하게 안 오네. 정말.’ 그렇게 생각하지 말고, ‘기도 응답이 곧 다가올 것임으로 나는 행복하다.’ 그렇게 믿자는 것입니다.

  다윗의 고백입니다.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케 하셨도다”(시 40:1-2)

  기다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 절대 기다릴만한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중간에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기다리면 됩니다.
  우리 신앙 선배들은 우리보다 학력이 좋아서 위대한 신앙인들이 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 신앙 선배들은 우리보다 건강이 좋아서 위대한 신앙인들이 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 신앙 선배들은 우리보다 인물이 좋아서 위대한 신앙인들이 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우리보다 잘하는 것이 있었는데 ‘하나님의 약속 기다리는 것'을 잘했습니다. 그리고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아무튼 나는 다른 것은 못해도 포기하지 않고, 기다리는 것 하나는 내 은사다.’ 그런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훨씬 더 많이 행복할 수 있으며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은 응답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존이라는 소년은 열 살 되던 해 크리스마스에 할머니로부터 우표 앨범을 보내주겠다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고 있지만 우표앨범은 할머니로부터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존의 친구들은 존이 받은 크리스마스 선물을 구경하길 원했습니다.
  존은 선물들을 하나씩 그의 책상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 그리고 이것은 할머니에게 받은 우표 앨범 ... 이 건 ..."
  그 내용을 옆에서 들은 존의 어머니가 존에게 물었습니다.
  “존, 아직 할머니에게서 우표 앨범이 오지 않았는데, 왜 친구들에게 미리 그런 말을 했니?"
  존은 이상한 얼굴로 어머니를 쳐다보았습니다.
  “할머니는 나에게 우표 앨범을 주신다고 하셨으니 받은 것과 같아요."
  존의 어머니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의 믿음을 방해하는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로부터 1개월이 지났으나 할머니에게서는 여전히 아무 연락이 없었습니다. 존의 어머니는 왜 할머니가 우표 앨범을 보내지 않는지 마음에 강한 의심을 가지고 아들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존! 할머니께서는 너에게 약속한 것을 잊으셨나보다."
  "엄마, 결코 그렇지 않아요. 할머니께서 잊어버리시다니요."
  존은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그러자 존의 어머니는 아들의 신뢰에 찬 얼굴을 사랑스럽게 바라보았습니다.
  “엄마, 할머니께 앨범 고맙다고 하는 편지를 보내면 어떨까요?"
  “그래, 그거 참 좋은 생각이구나. 자, 한번 써 볼까?"
  존의 어머니는 이렇게 용기를 주었습니다. 존은 순식간에 편지를 쓴 후 우체통에 넣었습니다.
  그 후 며칠 안되어 할머니에게서 답장이 왔습니다.
  “존에게... 존! 할머니는 너에게 우표 앨범을 사 준다고 한 약속을 잊은 게 아니란다. 너의 마음에 드는 앨범을 구하려고 찾아보았으나 좀처럼 없더구나. 그래서 나는 뉴욕에 주문편지를 보냈단다. 그런데 뉴욕에서 보내온 앨범은 크리스마스가 지나서 도착한 데다 너무 좋지가 않아서 다른 것을 보내달라고 했는데 아직 도착하지 않았구나. 그래서 여기 3달러를 보내니까 네가 마음에 드는 것을 그곳에서 사 가지렴. 할머니로부터."
  존은 얼마든지 할머니가 자신에게 우표 앨범을 사주겠다고 한 것을 의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전혀 의심하지 않는 쪽을 선택하고 할머니가 당연히 약속을 잘 지킬 것이라고 굳게 믿었던 것입니다.
  존은 할머니가 자신에게 우표 앨범을 안 보내 주는 쪽으로 믿고 있다가 응답을 받을 수도 있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 응답을 요구하면서 열심히 기도드리다가 의심하다가 받는 응답도 많습니다.
  ‘에이, 다 틀렸구나! 이제는 안 되겠구나!’
  그러나 그러다가 받게 되는 기도 응답도 많단 말입니다.

  제가 몇 년 전에 우리 전 예배당에서 쓰던 기구들을 다 모아 보니까 돈을 주고 산다면 한 2,000여 만원 정도의 값어치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가 감사한 것은 그런 비품이나 물건들을 다른 교회에 넘겨 줄 때 한 번도 돈을 받고 넘겨 준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인터넷을 들어가 봤더니 어느 시골교회에서 꼭 우리가 주고 싶어하는 그런 비품들을 원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교회로 전화를 해 봤더니 그 교회 목회자가 그런 얘기를 하더라는 것입니다. 제가 직접 들은 얘기는 아닌데, 그 분은 우리가 보내 줄 수 있는 만큼의 비품을 얻기 위해 많이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도저히 아무 연락도 없어서, 우리가 그 때 강대상도 좋은 것으로 보냈는데 ... 아무리 기다려도 아무 곳에서, 아무 연락도 안 와서, '차라리 강대상을 궤짝으로라도 짜서 만들어야겠다.'라고 망치와 못을 들고 집 밖으로 나가다가 우리 교회로부터 연락을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그 비품들을 그 곳으로 보내 주면서 차 운송비까지 다 우리가 부담하여 보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꼭 망치 들고 못 들고 나서야 그제서 야 필요한 것들이 도착되게 하여 주시는 분이신가?’ 그렇게 해석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만 우리가 조금만 더 믿음을 가지고 잘 기다리면 얼마든지 더 좋은 것들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다 많이 보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꼭 우리가 조금 기다리다가 경솔하게 말로 다 일을 그르쳐 버리고, ‘언제 하나님께서 응답 한 번 제대로 해 주신 적 있나?’라고 생각을 하면서 안색까지 변해 가면서, 중간에 자주 포기를 해 버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것들을 우리가 못 받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우리가 기다리는 태도를 바꾸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우리에게 인색하신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 자신들은 변화가 가능합니다.
  ‘아니야, 내가 나 자신을 한 20년 동안 꾸준히 지켜봤는데 나는 아무래도 이렇게 살다가 끝날 인생 같아’라고 생각하지 말고 희망을 가지고 인내하면서 우리 자신을 변화시켜 가면서 기다리자는 말입니다.
  기도하면서 기다리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 기다리자는 것입니다.
  회개하면서 기다리자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것만 제대로 잘 기다려도 우리의 남은 삶에 놀라운 역사가 있을 줄 믿습니다

 

 

왜 죄를 짓지 말아야 하겠습니까?

 {요한일서 3:8}

 

 한 회사에서 사장과 감정이 뒤틀린 간부 사원이 끝내 일을 저질렀습니다.
  회사의 큰 공금을 가지고 외국으로 도망을 간 것입니다. 사장은 그 일을 법으로 처리를 할 수도 있었겠습니다만 자신의 친구 중에 설득 능력이 있는 한 명을 선발해서 그 간부 사원을 추적하여 외국에 가서 직접 만나게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간부 사원이 그 사장 친구에게 다음과 같이 말을 하더라고 합니다.
  “나는 비록 회사 공금을 빼돌려 이리로 왔지만 사장이 나에게 그 동안 한 행동을 생각해 보면 별 죄책감을 안 가지고 있습니다.”
  사장 친구가 그 전 간부 사원에게 다음과 같은 예를 들어 설득했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이 한 배를 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 한 사람이 한창 항해 중인 배 밑창에 구멍을 뚫고 있었습니다. 그 구멍이 뚫어지면 많은 사람들이 함께 파선할 위기에 있기 때문에 이 사람 저 사람이 그 사람을 말렸습니다. 그런데 그 배 바닥에 구멍을 뚫는 사람은 초지일관 ‘내 자유요. 나는 이 배의 선장이 마음에 안 들어서 바닥에 구멍을 뚫고야 말 것이요.’라고 우겼습니다. 그 한 사람이 배 밑창에 자신의 자유 권한을 내세워서 구멍을 뚫으면 그 배에 함께 타고 있는 선장도 망하겠지만, 함께 타고 있던 다른 사람들도 많은 피해를 보게 될 것 아닙니까?“
  그 말을 듣고 공금횡령을 한 그 사람이 사장 친구에게 횡령한 전 금액을 다시 돌려주었다고 합니다.

  첫째, 사람이 왜 죄를 짓지 말아야 하겠습니까?

  ① 우리와 사랑의 관계성이 있는 자들에게 마음의 상처를 입히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내가 죄를 지으면 나 한 사람이 죄를 짓는 것으로만 일이 끝나지 않습니다.
  내가 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사랑의 관계성 자들이 마음에 깊은 상처를 받게 됩니다. 예를 들어 우리의 자녀들이 죄를 짓고 어려움에 빠지게 되면 부모가 가슴 아파합니다. 남편이 죄를 짓고 어려움에 빠지면 아내가 평생 마음의 고통을 가지고 살아가게 됩니다. 아내가 죄를 범하면 남편이 평생 그 사실에 대하여 고통스러워합니다. 친구가 죄를 지어 어려움에 빠지면 역시 친구들이 그리고 그 부모와 가족들이 고통스러워하게 됩니다.
  사랑의 관계성 자는 하나님도 포함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마음 아파하십니다. 그래서 “네가 어디 있느냐”(창 3:9)라고 물으십니다. 또 본인도 괴롭습니다. 그래서 “내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창 4:13)”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시 51:3)
“하나님이여 나의 우매함을 아시오니 내 죄가 주의 앞에서 숨김이 없나이다”(시 69:5)라고 고백 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리고 거짓말도 해야 합니다.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창 4;9)
  아우가 고통받아야 합니다. 부모가 고통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죄를 지으면 자신뿐 아니라 주변의 많은 사람들 그리고 하나님에게 깊은 마음의 상처를 남기게 되기 때문에 우리는 죄를 절제해야 하고 짓지 말아야 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우리와 사랑의 관계성에 처해져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마음의 상처를 안 입히기 위해서라도 죄를 덜 지으며, 절제하며, 안 지으며 평생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② 사람이 한 번 죄를 지으면 앞의 지은 죄를 은폐하기 위한 거짓을 해야 하기 때문에 불편한 여러 상황들을 맞이하지 않기 위함입니다.

  의학에서 무감각증 환자들이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세균 감염으로 인해 조직이 크게 손상됐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세균이 중추신경계를 마비시켜 마취주사를 맞은 것 같은 효력을 발생시킨다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이 죄를 한 번 지어 거짓말하고 그것을 은폐하기 위해 다시 거짓말시키고 또 거짓말시키고 또 거짓말시키고 또 거짓말을 시키면 이 거짓말이 결국은 우리의 영혼의 중추신경계를 마비시키게 됩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거짓말을 한 번 시킨 것이나 열 번 시킨 것이나 별로 부끄러움을 못 느끼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다음과 같이 물으시고 가인은 다음과 같이 하나님께 답변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가로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 가라사대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창 4:9-10)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상황을 모르고 물어보실 분이십니까?
  뻔히 다 알고 물어보시는데 가인은 하나님께 거짓말을 했습니다.
  거짓말 탐지기라는 것을 현대 과학은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수사상 분명히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믿어지는 사람들에게 그 진술이 거짓말임을 인정하게 하기 위해서 거짓말 탐지기를 사용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소용이 없는 것은 사람은 하나님에게도 거짓말을 하기 때문입니다.
  가인은 하나님께서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시는데 자신이 죽여 놓고 “모릅니다.”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거짓말 탐지기 앞에서만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도 거짓말을 하는 존재인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앞으로 거짓을 밝혀 낼 수 있는 첨단 장비가 또 만들어져도 인간은 또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사람이 거짓말을 한다는 사실 자체를 죄를 지은 결과에 의한 합리화를 시키기 위한 것으로 봐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거짓말을 시킬 수밖에 없는 불편한 상황들을 맞이하지 않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으로 죄를 처음부터 안 짓는 것이 좋다는 것입니다.

  ③ 늘 죄책감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므로 그리하지 않기 위함입니다.

  가인이 고백하였습니다.
  “가인이 여호와께 고하되 내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창 4:13)

  사람이 죄를 지으면 양심의 가책을 받습니다.
  그러면 그 때부터 몸에 나쁜 호르몬이 돌고, 매사에 깜짝깜짝 놀라고, 그리고 자신의 죄가 드러나지 않게 하기 위해 공격적이 됩니다. 그리고 그래도 서서히 자신의 지은 죄가 드러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면 자신의 보호를 위해서 더 많은 화를 내게 되고, 예민하게 반응해야 하고, 결국은 자신을 가인과 같은 태도로 만들어 버리게 됩니다.
  죄인의 예감은 어둡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는 일도 제대로 안 됩니다.
  작은 죄든 큰 죄든 사람이 죄를 반복해서 짓게 되면, 물에 작은 돌도 가라앉고 큰 돌도 가라앉는 것처럼 결국은 자신의 양심에 많은 죄들이 가라앉게 됩니다.
  그러면 결국은 자신의 양심에 죄의 돌맹이들이 가득 차 결국은 지쳐 쓰러지고 말게 됩니다.

  ④ 두려워하지 않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네가 어디 있느냐”(창 3:9)라고 물으셨을 때 아담은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 3:10)라고 대답했습니다.
  사람이 두려우면 숨고 싶고, 숨게 됩니다. 혼자 있고 싶게 됩니다.
  사람이 용기가 있을 때 많은 사람들 앞에 나서게 되지 두려우면 자꾸만 혼자 있고, 숨고, 꿩 머리 숨기듯이 사람들에게 자신을 노출시키고 싶어하지 않는 것입니다.

  가인이 자신의 동생 아벨을 죽인 후 하나님께 두려워 떨리는 자신의 심정을 고백한 말입니다.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이겠나이다”(창 4:14)

  우리는 사람을 많이 죽인 사람이 용기가 많은 것으로 알기 쉽지만, 그들은 늘 두려워 벌벌 떨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⑤ 사람이 죄를 한 번 짓게 되면 죄에 중독이 되어 또 다시 죄를 짓고 싶어지게 되므로 그러한 중독에 빠져들지 않기 위함입니다.

  중국 춘추전국 시대에 복부제라는 사람이 선부라는 고을의 원님으로 있을 때의 일입니다.
  이웃 제나라의 군사들이 쳐들어온다는 보고를 받게 되었습니다. 복부제는 즉시 ‘성문을 닫으라.’고 명령했습니다. 때마침 추수기여서 성문 밖에는 보리가 누렇게 익어 있었습니다.
  백성 대표들은 복부제를 찾아가서 “기껏 농사를 지어 적병들에게 곡식을 넘겨줄 바엔 적이 도착하기 전에 주민들로 하여금 아무 밭에서나 자기 힘대로 거두어들이게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복부제는 그들의 청을 뿌리치고 성문을 닫게 했습니다.
  복부제를 존경하던 백성들은 ‘원님이 융통성 없는 결정을 했다.’며 그를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게다가 곡식을 모두 수탈 당한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지자 적을 이롭게 했다는 죄목으로 복부제는 왕의 심문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복부제는 자신을 심문하는 왕 앞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일 년 동안 지은 곡식을 적병들에게 빼앗긴다는 것은 아깝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을 맞이한다고 해서 남의 곡식을 마구 베어다 먹는 버릇이 백성들에게 생겨지면 그것은 앞으로 10년이 지나도 고칠 수 없는 악습이 될 것입니다.”
  복부제의 말을 들은 왕은 그의 멀리 내다볼 줄 아는 그의 윤리적 식견에 탄복을 했다고 합니다.

  사람이 어떠한 죄든지 죄를 한 번만 짓고 끊을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참 훌륭한 사람이고 용감한 사람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를 짓기 전에 다음과 같은 상황을 미리 인식하고 결정해야 합니다.
  ‘내가 어떤 죄를 한 번 지으면 이것은 절대 단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이 죄는 어쩌면 수십 번, 수 백 번 반복하여 지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누가 마약 주사를 딱 한 번만 맞고 돌아설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하단 말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 25절에서는 ‘죄의 낙’이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표현입니다.
  “일락을 좋아하는 이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딤전 5:6)

  사람은 죄를 아침까지만 짓겠다고 결심하고 점심에 또 짓습니다. 그리고 ‘점심까지만 죄를 짓고 다시는 안 지어야지 ... ’라고 생각한 후에 저녁에 또 죄를 짓습니다. 그리고 ‘오늘 밤 12시까지만 죄를 짓고 다시는 안 지어야지 ... ’라고 생각하고, 결심해 놓고 또 짓습니다.
  사람은 죄를 그렇게 3년 짓고, 5년 짓고, 못 끊고 10년도 계속 지어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마귀는 사람의 생각을 활용해서 중독을 시킵니다.
  그래서 어떤 죄든지 마귀는 중독을 시켜서 못 빠져나오게 합니다. 중독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몸에 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뇌에 중독이 됩니다.
  마귀가 가룟 유다에게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가룟 유다의 뇌 속에 입력시켜 그것이 중독되어 못 빠져 나오게 했기 때문에 결국은 예수님을 파는 상황까지 갔던 것입니다(요 13:2).
  그러면 사람은 언제 그 중독이 풀리게 되겠습니까?
  그것은 더 이상 마귀가 자신에게 이용가치가 없다고 판단할 때입니다. 마귀는 자신에게 이용 가치가 없으면 그 사람에게 중독되어 있는 것을 그대로 내버려두어 망하게 하든지 아니면 그대로 붙어 있던 것을 떼어서 다른 사람에게 다시 붙여 주든지 합니다.

  어제 뉴스를 보니까 위치 추적 시스템이라고 하는 기계를 자신이 알고자 하는 차에 붙여두면 정확하게 그 현재 위치를 파악 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차에 대한 위치 추적이 끝나면 사용자들은 그것을 다시 떼어다가 다른 차에다 또 사용 할 것이란 말입니다.
  마귀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이용가치가 끝나면 그렇게 할 것이란 말입니다.
  마귀는 한 사람에게 나쁜 생각을 넣어줍니다. 그래서 그 사람을 철저하게 이용해 먹고 그 사람이 죽으면 그 사람에게 붙었던 생각을 뜯어다가 다른 사람에게 또 붙여줍니다. 아니면 그 사람이 살아 있어도 이용이 끝나면 그 사람에게 붙여 두었던 나쁜 생각을 뜯어다가 다른 사람에게 붙여준단 말입니다.
  그것을 중독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중독은 우리 뇌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우리 단순한 몸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중독에서 벗어나고 싶으면 자신의 뇌에 붙어 있는 생각을 뜯어내야지 단순히 기능적으로 몸만 절제하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흡연을 80년 동안 한 분과 흡연을 1년 동안 한 사람을 최면을 걸었습니다.
  그런데 그 흡연을 중단시키는데 80년 흡연한 사람도 흡연을 중단시키는데 1분이 걸렸고, 1년 흡연한 사람도 흡연을 중단시키는데 1분이 걸렸다고 합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하겠습니까. 그것은 생각에 의한 중독을 뜯어내는 것이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죄를 지으면 계속해서 중독이 되어진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중독은 단 한 번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아무리 ‘내가 죄를 한 번만 짓고 그만 지어야지 ... ’라고 생각할지라도 그것이 되어지질 않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귀가 사람을 죄에 중독되게 한다는 말씀의 근거를 다음 말씀들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기록된 말씀이 있습니다.
  “그들은 살찌고 두루 다니는 수말같이 각기 이웃의 아내를 따라 부르짖는도다”(렘 5:8)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 뿐이요 ...”(요 10:10)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 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요일 3:8)

  ⑥ 마귀로 훼방 할 근거 발판을 마련하여 주게 되므로 심판을 받지 않기 위함입니다.

  타이타닉호는 1912년 영국에서 뉴욕으로 첫 출항을 하면서 침몰하여, 1,500여명이 익사하는 최악의 해난사고가 발생하였습니다. 그동안 가장 일반적으로 받아 들여졌던 침몰사고의 이유는 타이타닉호가 빙산에 부딪혀, 배 옆에 큰 구멍이 생겨 침몰하게 된 것으로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최근 잠수부들과 과학자들로 이루어진 국제적 조사팀이 음파조사를 통해 바다 밑 2.5마일 아래 진흙 속에 묻혀있는 이 유람선을 탐사한 결과, 배의 파손부분은 예상외로 작은 것이었습니다. 배 옆에 큰 구멍이 뚫린 것이 아니라, 비교적 작은 틈새 여섯 개 때문이었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평생을 성실하게 살아 온 사람들이 큰 죄 때문에 침몰되지 않습니다. 작은 한 가지의 일들 때문에 무너져서 결국은 마귀로 훼방을 받고 심판까지 받게 됩니다.
  우리가 죄를 짓게 되면 마귀로 우리를 훼방할 근거를 제시하게 됩니다. 우리가 죄를 짓게 되면 마귀는 하나님께 고발장을 접수하게 됩니다.
  그리하면 공의의 하나님께서는 어쩔 수 없이 마귀에게 합법적인 훼방을 허락하시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나단 선지자가 다윗에게 말했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여호와의 원수로 크게 훼방할 거리를 얻게 하였으니 당신의 낳은 아이가 정녕 죽으리이다 하고”(삼하 12:14)

  바울이 디모데에게 말했습니다.
  “대적에게 훼방할 기회를 조금도 주지 말기를 원하노라”(딤전 5:14)

  ⑦ 죄를 짓게 되면 판단력이 무디어지게 되므로 정상적인 판단력을 유지하기 위함입니다.

  사도 바울의 지적입니다.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엡 4:18)

  사람이 죄를 짓게 되면 집중력이 분산되고 판단력이 무디어져서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가 없게 됩니다.
  그래서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해야 할 일은 안 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술을 많이 마시게 되면 뇌가 마비가 됩니다. 그래서 뇌가 정상적으로 움직이지 않아서 해야 될 일은 안 하고 하지 말아야 될 일은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술을 많이 마신 사람들은 길을 가다가 길바닥이 따뜻하게 보여 누워서 자기도 하고 그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잠언 기자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 16:18)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잠 18:12)

  정상적인 판단력은 교만하기를 원치 않으나 사람이 죄를 짓게 되면 자꾸만 교만해 져서 판단력이 비정상적으로 되어서 결국은 교만을 선택하고 망할 길을 선택하고 잘못된 길을 선택해 나간단 말입니다.

  ⑧ 부끄러움을 당하게 되므로 좀 더 명예로운 삶을 살아가기 위함입니다.

  사도 바울의 지적입니다.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롬 6:21)

  사람이 죄는 지을 때는 그 죄가 상당히 매력이 있는 것 같고 ‘예술이네 문학이네 ... ’라고 말들을 하지만 나중에 제 정신이 나서 돌아보면 전부 부끄러운 것들뿐입니다.
  그러므로 조금이라도 덜 부끄러움을 당하기 위해서는, 뒤돌아봤을 때 인생이 덜 부끄럽기 위해서 우리가 죄를 끊고 짓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⑨ 마음속에서 성령님께서 근심하심으로 평강을 얻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자녀들이 죄를 짓고 밤늦게 들어오는데 어떤 부모가 집에서 근심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사랑의 관계성 자들이 분명히 죄를 짓는 것 같은데 가족들이 누가 기뻐하겠습니까?
  또 본인인들 어떻게 마음의 평강이 있겠습니까?
  죄를 짓는 사람들은 아무도 자신의 죄를 지적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천만 사람이 아무 간섭을 안 한다 할지라도 본인에게 평강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잠언 기자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잠 17:22)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사 48:22)
  “내 하나님의 말씀에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사 57:21)

  ‘간에 기별도 안 간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사람이 죄를 짓게 되면 여러 신체적 기능들이 분명히 죄책감으로 인한 나쁜 호르몬에 의해서 약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간에 기별도 안 간다.’는 것은 본인은 그 사실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⑩ 수치심이 생겨 자꾸만 현재 있는 곳으로부터 어디론가 도망하고 싶게 되기 때문에 떳떳하게 살아가기 위함입니다.

  죄를 지은 사람들은 현재 어쩔 수 없어 있는 곳에서 살아가는 것이지, 사실 사람은 여건만 되면 도망가고 싶어한단 말입니다.

  수치심을 느끼는 사람들은 이민 가고 싶어하고, 도망가고 싶어하고,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 사람이 죄를 지으면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하는구나!’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죄를 좀 지어도 괜찮은 줄로 압니다.
  그러나 신용 카드 쓰고 계산 안 한 적 있습니까? 외국에 나가 사용을 했건, 국내 어느 시골 골짜기에 가서 사용을 했건 아무튼 사용하기만 하고 나면 반드시 청구서가 오지 않았습니까?
  죄란 것도 반드시 청구서가 언젠가는 날아옵니다. 알고 사용했건, 모르고 사용했건, 일단 알고 먹었건 모르고 먹었건 약을 먹어두면 효용가치가 있는 것처럼 아무튼 죄는 지어두면 언젠가는 그 효력이 발생되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죄의 결과는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습니다. 3년 안에든지, 5년 안에든지, 죽기 전이든지, 내 자손에게 청구가 되든지, 아무튼 한 번 지어진 죄는 반드시 청구가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심는 대로 거두기 때문에 우리는 죄를 짓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사람이 죄를 짓게 되는 원인은 무엇이겠습니까?

  ① 경쟁 심리 곧 질투심 때문입니다.

  가인은 아벨이 하나님에게 자신보다 더 나은 여김을 받는 것을 보고 질투하여 죄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가인 콤플렉스’라고 말합니다.
  그는 동생이 자신보다 더 나은 여김 받는 것을 보고 너무너무 기분이 나빠 범죄 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다음과 같이 권면하였습니다.
  “가인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요일 3:12)

  바울의 권면입니다.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고전 15:33)

  사람이 나쁜 친구들을 옆에 두고 만나다보면 그 나쁜 친구들이 자신들이 짓는 죄를 자신만 짓지 않고 그 죄를 자랑을 합니다. 그러면 그 내용을 가만히 들어보면 그것이 부럽습니다. 그러면서 생각합니다. ‘저 정도는  나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인데?’ 사람이 욕하고 따라 한다고 ‘그러면 못써!’ 그래놓고는 돌아서서 ‘나도 한 번 해볼까?’ 그러고는 아주 은밀하게 자신은 조용하게 친구보다 더 정확하게 잘 해내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보니까 죄가 커진단 말입니다. 친구가 시행착오를 겪은 것까지 답습을 해 가지고 자신은 시행착오도 안 겪고 죄를 잘 지어 버립니다.

  사람은 경쟁심리 질투심리에 의해서 죄를 짓게 됨으로 우리 주변에 있는 나쁜 친구들을 끊어야 합니다. 부정적인 정보를 주는 자들, 마음 아프지만 내가 정확하게 교회로 끌고 나와서 변화를 시킬 수 있으면 변화를 시키고, 그 능력이 없으면 끊어야 합니다. 괜히 그들을 교회로 이끌고 나오지도 못 할 것이면서 끌려 들어가서 침체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② 마귀가 우리를 우는 사자와 같이 죽을 때까지 쫓아다니며 공격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5장 8절 이하 말씀에 보면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두루 찾나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절대로 이번 죄만 짓고 다시는 안 지을 것이다.’ 그것은 내 결심이고, 마귀는 계속해서 우는 사자와 같이 우리를 평생을 쫓아다니며 우리를 죄를 짓지 않고는 못 견디도록 끌어들입니다.
  그래서 마귀는 언제든지 우레에게 조금만 틈이 생기게 되면 바로 죄를 짓게 만든단 말입니다.
  범죄학을 연구한 심리학자들의 그 발표에 의하면 ‘범죄는 몇 시간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몇 일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단 몇 분 사이에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음으로 조심해야 된다.’라고 강력 권고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뚝섬유원지에서 하루는 5살 먹은 아이와 7살 먹은 남매를 데리고 아빠가 나갔단 말입니다.
  그런데 7살 먹은 아이가 저쪽 위로 걸어가고 있으니까, 위험하니까 아빠가 얼른 뛰어가서 안고 데려오려고 갔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에 5살 먹은 아이가 없어졌습니다. 그 몇 분 사이에 ... 나중에 조사를 해 봤더니 그 동네에 사는 연쇄 살인범이 아빠가 7살 먹은 아이를 데리러 간 사이에 5살 먹은 아이를 데리고 자기 방으로 들어가서 살인을 해서 냉장고에 분리 배치를 시켜놓았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몇 분 사이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렇게 범죄는 몇 분 사이에 평생에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일들이 일어나기 때문에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우리를 노려보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조금도 방심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옛날에 한 사냥꾼이 독수리를 잡으려고 화살을 겨누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독수리는 자기가 잠시 후에 화살을 맞게 될 줄도 모르고 뱀을 잡아먹으려고 노려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뱀은 자기가 잠시 후에 독수리에게 먹힐 줄도 모르고 쥐를 잡아먹으려고 쥐를 노려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쥐는 잠시 후에 자기가 뱀에게 잡혀 먹힐 줄도 모르고 자기보다 더 약한 것을 먹으려고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사냥꾼이 그것을 보고 깨달은 것입니다.
  ‘그러면 나를 보고 있는 것은 누구인가?’ 마귀란 말입니다. 마귀는 우리 인간을 표적으로 삼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일분일초도 쉬지 않고 마귀의 공격 대상으로 지목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죄짓는 것을 부러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알아서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들은 심은 대로 거둘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죄를 지어도 잘만 되지 않느냐?”
  꽃은 뿌리 없이 한 2-3일 정도는 아주 싱싱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3일이 지나고 4일이 지나면 완전히 시들어 결국은 쓰레기통에 버려지게 됩니다.
  지금 죄를 지어서 아무 이상도 없이 잘만 살아가고 있는 것 같은 사람들은 ‘잘만 살아가고 있는 것같이’ 보일 뿐이지 아무 이상도 없이 영원히 살아가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절대 아무리 나보다 화려한 죄를 짓고 살아가는 것 같은 그 사람이 부러울지라도, ‘아, 나도 한 번 저래 봤으면 ...’이라고 부러워하지 말잔 말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살다가 죽으라고 내버려두면 됩니다.
  그리고 마귀가 항상 나를 노려보고 있다는 것, 그래서 우리는 조금만 방심하게 되면 끌려가 죄를 짓게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③ 자신의 욕심 때문입니다.

  야고보의 지적입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

  처음에 마귀는 사람에게 죄를 가져 다 주는 것이 아닙니다. 욕심만 넘겨줍니다. 그러면 사람은 그 욕심이 점점 잉태되어져 언젠가는 그 죄가 출산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조심해야 되는 것은 우리가 현실적으로 짓고 있는 죄들이 어제 생각한 것이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가 지금 실행으로 옮기고 있는 죄들은 이미 10년 전, 20년 전에 우리 생각 속에 넣어 두었던 것들, 심지어는 40년 전에 입력시켜 두었던 것들이 지금 차곡차곡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이 무서운 것입니다.
  사람은 ‘죽기 전에 내가 꼭 이것 한 번 해 보고 죽는다.’고 결심하면 그 사람은 죽기 전에 꼭 그 죄를 한 번 짓고 죽게 된단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 어린 자녀들을 잘 보살펴야 하는 이유는 우리 자녀들이 지금 잘못 생각하는 것이 내일 죄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녀들이 현실적으로 20년 후에 30년 후에 그들의 생활 가운데 오늘 잘못 생각했던 것들이 현실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험한 세상 살면서 죄를 지어보니까 얼마나 수치스럽고 얼마나 힘들고 얼마나 고통스럽고 얼마나 죄책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데 우리 자녀들까지 그러한 죄의 환경에 노출을 시키겠느냐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계속해서 우리 자녀들에게 말씀을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말씀 외에는 우리의 생각 속의 죄를 없어지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외에는 우리 마음속에 죄를 없어지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다윗의 고백과 바울의 권면입니다.
  “내가 주께 범죄치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시 119:11)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 3:16-17)

  셋째, 그러면 우리가 죄를 짓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① 회개해야 합니다.

  사람이 죄를 덜 짓거나 안 지으려면 철저하게 회개를 해야 합니다.

  다음은 회개에 필요한 말씀들입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 4:7)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잠 28:13)
  “먼저 다메섹에와 또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과 유대 온 땅과 이방인에게까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행하라 선전하므로”(행 26:20)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계 2:21)

  ②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자동차는 그 연료를 어떤 것을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기계가 보존도가 높아지는 것처럼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는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연료를 공급받아야 하는데 그것은 성령 충만 입니다.
  세상 가치관, 철학적 가치관, 문학적 가치관 잡지 몇 장 읽으면 알 수 있는 그런 가치관을 가지고는 인간이 존귀하게 살아갈 수 없다는 말입니다.
  사람은 일점일획도 변함이 없는 영원히 변치 않는 예수님의 가치관, 최고의 연료를 받아들일 때만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데 그 핵심을 성령충만 이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의 권면입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엡 5:18)

  ③ 예수님의 이름으로 죄를 끊기 위해 문제를 향하여 명령해야 합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명령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령하노니 현재 내가 어쩔 수 없이 짓고 있는 이 죄는 끊어질지어다.”
  계속 반복해서 명령하는 것입니다.

  이번에 탁구로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취득한 유승민 선수는 중국 선수를 이기기 위해 하루에 서브를 3,000개씩 넣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문제 해결을 위해 하루에 3,000개의 서브가 아닌 3,000번의 명령을 하면 어떤 문제인들 정리가 안 되겠습니까.

  베드로의 고백입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행 3:6)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행 3:12)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행 3:16)

  우리가 죄를 끊기 위해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루에 3,000번씩 한 가지 문제를 향하여 명령하면 우리가 어떤 죄인들 못 빠져나오겠습니까?
  예수님의 이름을 사용해서, 명령해서 우리가 죄에서 빠져 나올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왜 죄를 짓지 말아야 하는가?’ ‘사람은 왜 죄를 짓게 되는가?’ ‘우리가 어떻게 하면 죄에서 지금보다 더 빨리 빠져 나올 수 있는가?’ 세 가지를 생각했습니다.
  앞으로 이 세 가지를 우리 삶에 적용시켜서 죄를 덜 짓거나, 끊거나, 아예 안 짓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바라겠습니다.

 

고난을 극복하려면

{마태복음 14:22~33}

 

한 포도원에 여우가 침입하려고 기회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들어갈 틈이 마땅찮은 것입니다. 그러다가 작은 틈을 발견했는데 정상적인 몸으로는 어렵고 며칠 동안을 굶으면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마침내 여우가 사흘을 굶은 후 포도원에 들어가 원 없이 먹었습니다. 그리고는 처음 들어간 틈으로 빠져나오려고 몸을 넣어 보니 몸이 살이 너무 쪄서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또 다시 굶고 살을 빼서 무사히 빠져 나왔다고 합니다.

  우리는 무엇인가 얻기 위해서 아무런 대가를 안 치러도 되는 줄 알고 너무 쉽게 무엇인가를 얻으려 하는 경향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를 들어 거짓말을 할 때도 무엇인가 이루어내기 위해서 무조건 앞 뒤 안 가리고 합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면 그것을 다시 회복시키기 위해 처음부터 다시 진실을 말해야만 그 상황에서 무사히 빠져나올 수가 있습니다.
  또 술을 마실 때도 그냥 술을 마시는 것으로 끝날 줄 알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일단 술을 마시면 나중에 술을 깨기 위해서는 북어 국도 먹어야 하고, 냉수 마셔야 하고, 숭늉도 마셔야 하고, 갖은 노력을 다해야 그 상황에서 다시 빠져나올 수 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아무 대가도 안 치러도 현재의 상황에서 내가 선택한 일들로 말미암아 척척 빠져나올 줄 아는데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한 가지의 행동을 하고 나면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심은 대로 거둔다는 원칙과 진리 아래 많은 대가를 치러야만 그 상황에서, 내가 선택한 상황에서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으면 그나마 다행입니다. 그러나 대부분 훨씬 더 많은 대가를 치러야만 그 상황에서 빠져나올 수 있게 됩니다.
  이런 내용을 세상 사람들 중에 절실하게 터득한 사람들이 하는 고백이 있습니다.
  “공짜는 없다.”
  우리가 현재 고난의 대가를 치르고 있는 것은 과거의 잘못된 선택 방식들에 의한 결과입니다. 어떻게 해야 현재의 이 고난으로부터 극복이 가능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고난이 다가왔을 때는

  첫째, 지난날들을 어떻게 살아 왔는지에 대해 점검을 해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지난날들에 대한 평가를 분명히 하고 넘어가버릇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 남자가 결혼을 했습니다. 부부는 아이 둘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첫 아이가 족제비에게 목이 물려 죽었습니다. 부부는 ‘왜 자신들의 인생에 이런 일이 다가왔는가?’를 의아스럽게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둘째 아이라도 잘 키우려고 셋째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런데 둘째 아이가 다시 우물가에 갔다가 빠져 죽었습니다.
  그들 부부는 ‘도대체 왜 우리 가정에 이런 일이 있는가?’ 하고 그 때부터 곰곰이 생각을 시작했습니다. 원인이 깨달아졌습니다. 남편이 결혼 전에 자신의 고향을 떠나기 전에 한 여성과 결혼을 하기로 약속을 했던 것이 기억났습니다. 그는 그 약속을 할 때 지나가던 족제비를 증인으로 세우고, 우물가에서 그 약속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이 남편이 고향을 떠나 성공해서 돌아오겠다고 꼭 기다리라고 해놓고, 다른 여성과 결혼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고향의 여성과의 약속은 깨끗이 잊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이 일을 남편은 아이가 족제비에 물려 죽고, 우물가에서 마저 한 명이 빠져 죽고 나서야 자신의 과거의 일이 깨달아졌던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한 일을 자신은 잊고 있어도 그 결과에 의해서 다시 기억나게 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모세의 지적입니다.
  “너희가 만일 그같이 아니하면 여호와께 범죄함이니 너희 죄가 정녕 너희를 찾아낼 줄 알라”(민 32:23)

  한 보트 수리공이 있었습니다. 보트 한 대 칠 할 것을 부탁 받았습니다. 페인트칠을 하다가 보니까 바닥에 조그마한 틈, 깨어진 틈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수리공은 페인트칠만 해 주면 되었지만 그는 그 보트를 누가 끌고 나가 사용할지도 모르고. 끌고 나갔을 경우는 위험하겠다는 생각에 부탁 받지 않은 일임에도 그것을 완전히 방수처리를 해서 잘 메워 칠을 했습니다.
  겨울이 지나 봄에 보트 주인이 보니 갑자기 배가 없어진 것입니다. 자신의 사랑하는 자녀 둘이 아빠 허락도 받지 않고 그 보트를 끌고 강으로 나간 것입니다. 갑자기 난감해 진 것이, 그 배 밑바닥에 구멍이 뚫려 있는데 ‘아이들이 그 보트를 끌고 나가다니 ... 이건 죽음이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에 보니 아이들이 강에서 무사히 돌아오는 것입니다.
  보트 주인이 배에 갈라진 틈부터 살펴봤더니 보트 밑창 깨진 부분을 누군가 방수처리를 해서 메워 놓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 역 추적을 해 봤더니 언젠가 페인트칠을 한 페인트공이 부탁도 받지 않았는데 그것을 메워 둔 것입니다. 보트 주인은 너무너무 그 일이 고마워 찾아가 물었습니다.
  “당신 어떻게 그런 일을 했습니까?”
  “제가 부탁은 안 받은 일이지만 그 일을 그냥 내버려두면 누군가가 위험을 맞이할 것 같아서 방수처리를 하고 메웠던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 일을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있었습니다.”
  보트 주인은 그 페인트 공에게 크게 보상을 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많은 일들을 과거에 내가 처리해 놓고 잊어버리지만 그것이 나쁜 일일 경우에 좋지 못한 결과로, 좋은 일일 경우에는 상급으로 돌아오게 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전도서 기자의 권고입니다.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전 7:14)

  우리에게 현재 어떤 어려움이 와 있고, 고난이 다가 왔을 때 그것을 마치 ‘잘못 배달된 우편물처럼 취급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무슨 원인이 있습니다. ‘아무 원인도 없이 다가오는 고난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시편 기자, 스바냐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교훈을 미워하고 내 말을 네 뒤로 던지며 / 도적을 본즉 연합하고 간음하는 자와 동류가 되며 / 네 입을 악에게 주고 네 혀로 궤사를 지으며 / 앉아서 네 형제를 공박하며 네 어미의 아들을 비방하는도다 / 네가 이 일을 행하여도 내가 잠잠하였더니 네가 나를 너와 같은 줄로 생각하였도다 그러나 내가 너를 책망하여 네 죄를 네 목전에 차례로 베풀리라 하시는도다 /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이제 이를 생각하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찢으리니 건질 자 없으리라”(시 50:17-22)
  “내가 사람들에게 고난을 내려 소경같이 행하게 하리니 이는 그들이 나 여호와께 범죄하였음이라 또 그들의 피는 흘리워서 티끌같이 되며 그들의 살은 분토같이 될지라”(습 1:17)

  교회 다니는 사람들 중에 ‘변화되지 않는 상태’를 지적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말을 하면, 다음과 같은 반응을 보이는 분들이 있습니다.
  “나 교회에 다녀요!”
  그러나 동물원에 10년 다녀보십시오. 동물 되는지.
  단순히 교회만 10년 다닌다고 바른 사람 안 됩니다. 누가 사자보러 10년 다녀보십시오. 사자처럼 변해서 ‘어흥!’ 하게 되는지.
  교회 30년을 다녀도 정확히 자기가 변화되려고 하는 의지, 그런 것들 없이는 변화되지 않습니다.

  “강자라고 하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권력을 휘두를 줄 아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시편 기자의 권면입니다.
  “그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여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를 존대하며 그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치 아니하며”(시 15:4)

  우리는 하나님께 너무 많은 약속을 합니다. 그리고 돌아서면 그 약속들을 잊어버리고, 돌아서면 또 잊어버리고 안 지키고 합니다.
  우리가 사람에게도 약속을 하고 잊어버리고, 안 지키고, 그러면 나중에는 완전히 신용이 하락되어 아무도 그 사람을 상대해 주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훨씬 더 인격적이신 분이시고 약속을 중시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아쉬울 때마다 약속만 하고 돌아서면 잊어버리고, 약속을 어기고 그러면 나중에는 우리가 도대체 무엇을 약속하고 무엇을 안 지키는지를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 고난적 상황을 맞이하게 하십니다.

  그런데도 계속해서 곤고한 날에 생각하는 일을 선택하지 아니하고, 아무 생각도 없는 사람들처럼 계속해서 살아가면, 결국은 고난에 또 고난, 고난 중에 더 깊은 고난을 당하게 하십니다.
  사사기를 잘 읽어보면 회개한 사람들은 고난적 상황에서 10년에도 빠져나가고, 20년에도 빠져나가는데, 전혀 자신의 문제점과 태도를 뒤돌아보지 않는 사람들은 60년, 70년, 80년을 계속 고난을 반복해서 겪으면서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슴을 치고 통탄할 것은 ‘왜 이렇게 나의 인생은 고난이 계속되는 것인가? 하나님께서도 너무 하시는 것 아닌가?’라고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서 너무 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생각이 없는 사람처럼 살아서 그렇습니다.
  반성할 줄도 모르고, 회개할 줄도 모르고, 결심할 줄도 모르고, 마치 개가 토한 것을 다시 먹듯이 계속 과거의 답습, 그렇게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고난이 우리에게서 끝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부터라도 고난을 극복하려면 생각을 많이 해야 합니다.
  ‘도대체 나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인가?’

  둘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난을 당하게 하시는 것은 본심이 아니시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현재 하나님과 관계를 섭섭하게 지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밥 먹을 때 기도도 잘 안 합니다. 기분 나빠서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와 잠언 기자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살아 있는 사람은 자기 죄로 벌을 받나니 어찌 원망하랴”(애 3:39)
  “사람이 미련하므로 자기 길을 굽게 하고 마음으로 여호와를 원망하느니라”(잠 19:3)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뭐 그렇게 별로 잘 한 것도 없으면서, 뭐가 그렇게 섭섭한 것이 많은지, 낯빛이 변해 가지고 지내고 있단 말입니다.
  우리 부모와 자녀가 한 집에서 살다가 자녀들이 인상쓰고 다니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후에 따져보면 주로 누가 잘못했습니까? 주로 자녀들이 잘못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자녀들은 뭘 그렇게 잘 한 것이 많은지 그저 툴툴거리고, 인형도 발로 차고, “왜 찼냐?”고 물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냥 찼다고 하고, “너 분명히 찼다.”고 하면 “그냥 발에 걸려 건드렸다.”고 하고, 아무튼 뭐가 그렇게 불만이 많은지 모른단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하나님께서 시편 기자와 예레미야를 통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주의 판단은 의로우시고 주께서 나를 괴롭게 하심은 성실하심으로 말미암음이니이다”(시 119:75)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렘 29:11)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고난 당하게 하시는 것이 취미가 아니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할 수만 있으시면 우리가 지금보다 더 행복하고, 평안하고, 기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도대체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는 짓은 골라 가면서 다 하고, 하라는 것은 안 하고 ...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어쩔 수 없이 각기 제 길로 나아가는 우리를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의중을 바로 알고, 만물보다 심히 부패한 것이 우리 사람 마음이므로(렘 17:9), 우리 마음을 새로운 마음으로 창조해 달라고 다윗처럼(시 51:10) ‘주님, 저는 무능력합니다. 제 마음을 제가 바꿀 수가 없습니다. 바꿔주세요.’라고 기도를 드리면서 원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 고난이 빨리 중단이 됩니다.

  셋째, 하나님께 거역하는 태도를 중단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거역하는 태도를 극복해야만 고난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에덴동산에서도 타락한 존재들입니다(창 3:1-19).

  어떤 사람이 버스를 탔습니다. 그랬더니 한 아주머니가 강아지 한 마리를 사람이 앉을 수 있는 자리에 앉혀놓았더라고 합니다. 너무 너무 피곤한 사람이 그 옆에 가서 “아주머니 강아지 좀 안고 탑시다. 그리고 제가 자리에 좀 앉읍시다. 제가 많이 피곤합니다.”라고 말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강아지 주인은 그 사람을 한 번 쳐다보더니 “우리 강아지 자리예요.” 하고는 그냥 앉아 있더랍니다.
  말한 사람이 너무너무 화가 나니까 창문을 열고 강아지를 문밖으로 던져 버렸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옆에 있던 사람이 강아지 던진 사람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합니다.
  “아니, 던지려면 잘못한 이 아주머니를 던져야지, 왜 아무 잘못도 없는 강아지를 던지시오?”

  우리는 탓을 돌리려면 잘못한 내 탓으로 돌려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탓을 환경 탓, 옆의 사람 탓, 하나님 탓, 이웃 탓 등으로 돌리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현재 우리에게 고난이 다가온 것은 다 우리가 하나님께 거역해서 다가 온 것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탓을 나 자신이 짊어지지 않고 이웃에게 돌리고 있는 중입니다.

  넷째, 인생들에게 다가오는 고난은 크게 세 가지 형태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에게는 아무리 고난이 많아도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집니다.

  ① 심리적 형태
  이것은 절망, 낙심, 좌절, 슬픔, 열등감, 명예 하락 등에 대한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다가오는 나쁜 생각들이 머리 속에 붙어 떠나가지 않는 것입니다.

  ② 질병적 형태
  이것은 육신이나 정신에 질병이 걸리는 것입니다.
  사람은 일단 병에 걸렸다고 하면 대개 한 10년 갑니다. 아무리 가벼운 질병도 일단 걸렸다고 하면 보통 십 년 갑니다. 그러면 시간 들어가지요, 돈 들어가지요, 병원 다녀야 되지요, 보통 불편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제아무리 좋은 병원과 제 아무리 좋은 명의를 아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병에 안 걸리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럽니다.
  ‘검찰의 누구를 알고, 법원에 누굴 알고 ...’ 그러나 제일 좋은 것은 검찰과 법원에 갈 일이 없는 것입니다. 몰라도 괜찮습니다.
  ‘우리 친척이 약국을 하고 ...’ 약국 갈 일이 없는 것이 좋은 것이지, 친척이 약국 하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러니까 안 아픈 것이 좋은 것입니다.

  ③ 환경적 형태
  이것은 성수대교나 삼풍백화점 등이 무너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환경적으로 자꾸 절망적인 상황들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 여쭈었다고 합니다.
  “하나님 어떻게 성수대교가 무너져서 사람들이 죽도록 내버려두실 수가 있습니까? 어떻게 삼풍을 무너뜨려서 사람들이 죽게 만드실 수가 있습니까?”
  응답이 왔다고 합니다.
  “성수대교나 삼풍백화점은 내가 안 지었다. 너희들이 지었지! 너희들이 만들어서 너희들이 무너뜨려 놓고 왜 나한테 탓을 돌리냐?”

  고난, 심리적인 것 다 내가 나쁜 생각을 끌어들여서 내가 지금 고난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질병, 내가 다 자연 질서 안 지켜서 고통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환경, 자꾸만 우리가 파괴 시켜서 사랑의 관계성 자들을 잃고, 고통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심리적인 것이든, 질병적인 것이든, 환경적인 것이든 우리가 문제가 일어나지 않도록 자발적 보존 노력이 필요합니다.

  다섯째, 고난을 불편한 것으로 생각하지 말고 기쁨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 시편 기자 그리고 욥을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너를 연단하였으나 은처럼 하지 아니하고 너를 고난의 풀무에서 택하였노라”(사 48:10)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시 119:67)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 119:71)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 23:10)

  사도 바울의 고백입니다.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 세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하지 않더냐 /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 주 예수의 아버지 영원히 찬송할 하나님이 나의 거짓말 아니하는 줄을 아시느니라 / 다메섹에서 아레다 왕의 방백이 나를 잡으려고 다메섹 성을 지킬새 / 내가 광주리를 타고 들창문으로 성벽을 내려가 그 손에서 벗어났노라”(고후 11:23-33)

  고난을 많이 당한 사람들의 특징은 그 마음이 쉽게 안 변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난을 많이 당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마음이 수시로 변합니다. 오늘 ‘이렇게 하겠다.’고 해 놓고, 내일 또 뒤집고, 내일 ‘이렇게 하겠다.’고 해 놓고 다음날 또 뒤집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많이 당한 사람들, 그래서 마음에 중심의 변화가 없는 사람들을 안정되게 여기십니다.
  왜 우리가 젊은 사람보다 나이 많으신 분들을 더 많이 인정해 줍니까? 마음이 덜 쉽게 변하기 때문입니다.
  젊은 사람들은 오늘 무슨 일을 하다가 기분 나쁘면 내일 다 그만 둬 버립니다.
  내일 무슨 일 하려다가 기분이 나쁘면, 천년만년 성실하게 할 것 같다가도 그냥 한번에 다 그만 둬 버린단 말입니다.
  그것은 고난을 많이 안 당해봐서 그렇습니다.

  계속해서 사도 바울의 간증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 12:10)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 우리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고후 1:8-9)

  한 악한 부인과 선한 남자가 만났다고 합니다. 결혼을 해서 함께 살았습니다.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가 보니 선한 남자가 악한 남자로 변했다고 합니다.
  또 반대로 한 악한 남자가 선한 여자하고 결혼을 했답니다. 결과가 어떻게 되는가 봤더니 악한 남자가 선한 남자로 변해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자들끼리 하는 말이 있습니다.
  “남자가 여자 못된 사람 만나면 절대로 그 남자 버린다.”
  계속해서 목회자들끼리 적나라하게 말하는 표현을 그대로 말해주겠습니다.
  “남자가 제아무리 못되었어도 여자만 착한 사람을 만나면 결국은 그 남자가 변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아무리 남자가 좋아도 여자 못되어먹은 사람 만나면 남자 안 변합니다.
  그러니까 여자가 변함없는 사람이 되려면 고난을 통과해 본 여자이기도 해야 하지만 우선 못되지를 말아야 합니다. 예쁜 것은 둘째치고 못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결혼 적령기에 있는 남자 친구들은 우선 예쁜 여자들만 찾는다는 특징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문제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말을 해 줘도 안 듣습니다.
  사람은 고난을 통과해서 악해지기도 하고, 선해지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고난을 통과해서 선한 양심을 가져야 되겠다.’라는 마음을 가지고 고난을 통과해야 합니다.
  고난 통과하는 것을 즐거워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고난이 지나가면 내가 그만큼 더 잘 다듬어지겠지’라고 믿고 희망을 가지며 견뎌내야 합니다.
  ‘이 고난이 지나가면 내가 그만큼 더 사특해지겠지’ 그러면 안 된단 말입니다.




  여섯째, 가장 많이 해야 할 일들은 기도를 드리는 일이어야 함을 알고 실천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고난이 다가왔다고 다 기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고난이 다가오면 많은 사람들이 마약 중독, 알콜 중독, 도박 중독으로 나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고난을 주셔 가지고도 끝내 정신을 못 차리면 그 사람을 버리시기도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마지막 방법으로 고난의 사다리를 주셔서, 그 고난의 사다리를 붙잡고 올라오면 살려주시고 건져주시지만, 고난의 사다리까지 보내주셨는데도 그것도 안 붙잡고 계속 그 자리에 머물러 있으면 마지막으로 포기하신 단 말입니다.
  막차는 어느 순간에 마지막 한 대지, 막차를 계속 보내줄 수는 없지 않습니까.
  현재의 마지막 고난이 우리에게 막차로 올 수도 있습니다. 마지막 고난을 당하면서도 정신을 못 차리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포기하는 경향이 있단 말입니다.

  야고보의 권면입니다.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지니라”(약 5:13)

  ‘저 사람 그렇게 고난을 당하면서도 기도를 안 하는데 참 왜 저럴까?’라는 생각이 드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러한 사람을 위험하게 보시면 됩니다.
  고난당하면서도 끝내 기도 안 하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몇 종류로 나누어집니다.
  첫째로 맷집이 좋은 사람들,  둘째로 아직도 고난을 덜 체험한 사람들, 셋째로 곧 버림받을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대개의 사람들은 고난을 당하면 결국 하나님 앞에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고난 중에도 끝까지 버티면서 안 나오는 사람들은 위험한 사람들입니다.

  다윗의 기도입니다.
  “나의 고난을 보시고 나를 건지소서”(시 119:153)

  인간은 행동하게 되는 동기가 몇 가지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기회, 본능, 강제, 습관, 이성, 정열, 희망에 의해서 행동하게 됩니다.
  행동을 전혀 안 하려고 하던 사람도 옆에서 자꾸 “기회야, 기회! 이번 기회가 마지막이야!”라고 말을 하면,  행동하게 된단 말입니다.
  그래서 ‘나쁜 사람들에게 기회를 주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 기회를 잘못 활용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기회라는 것을 맞이하면 행동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다음은 습관입니다.
  나쁜 습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좋은 기회를 주면 안 됩니다. 예를 들어서, 도박 습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내 돈 좀 가지고 있어.’라고 맡기면 안 된단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 습관이 그 돈과 연합해서 어디론가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격이 된단 말입니다.
  희망도 사람을 행동하게 합니다.
  그래서 비전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는 기회를 주어도 괜찮습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죄를 짓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죄를 지을 수 있는 환경으로 몰아넣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집밖으로 외출을 하면서 문에다가 자물쇠를 잠갔습니다. 그것을 본 그의 자녀가 물어 보았습니다.
  “아빠 문은 왜 잠그시는 것인가요? 도둑맞지 않으시려는 것이지요?”
  그 아버지가 그렇게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도둑도 예방하기 위함이지만, 정직한 사람들이 유혹을 당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잠그는 것이다.”
  그러니까 세상에 지혜 없는 사람들이 자녀들 보는 앞에 아무 곳에나 많은 돈을 놔두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자녀들이 고민합니다.
  ‘저것을 훔쳐? 말아?’
  그리고 세상 지혜 없는 부모들이 자녀에게 지갑 맡겨놓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녀들이 고민한단 말입니다.
  ‘이거 ... 한 장 빼도 표시가 날 것도 같고 안 날 것도 같고 ... ’
  “이거 정확하게 30,670원이야. 잘 가지고 있어.”라고 말 해야지 그것을 안 가르쳐 주고 맡기면 아이들이 고민한단 말입니다.
  왜냐면, 아이들은 나쁜 기회, 나쁜 습관에 의해 행동에 대한 도전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기회, 본능, 강제, 습관, 이성, 정열, 희망 이런 것에 의해서 행동하게 되기 때문에 고난이라고 하는 기회를 맞이했을 때 어떻게 행동하는가를 보면 그 사람의 됨됨이도 알 수 있단 말입니다.
  그래서 고난이라고 하는 기회를 맞이해 놓고도 그것을 기도하는 기회로 삼지 않는 사람들은 나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게으른 사람들입니다. 고난 때도 기도 안 한 사람들이 고난 사라지면 기도할 것 같습니까?
  ‘이번 고난만 지나고 나면 신앙생활 잘 하겠다.’
  아니, 고난 중에도 신앙생활 안 하면서 고난이 지나고 나면 신앙생활 잘 하겠다니 그것을 말이라고 하느냐는 말입니다.
  아니, 고난 때도 기도를 안 하면서 고난 지나고 나면 기도 많이 한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그러므로 고난이 다가왔을 때 가장 많이 해야 할 것, 그것은 기도드리는 것입니다.

  다윗의 간증입니다.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케 하셨도다”(시 40:1-2)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 50:15)
  “네가 고난 중에 부르짖으매 내가 너를 건졌고 ...”(시 81:7)

  우리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다음과 같은 평가를 받아내야 합니다.
  “저 사람, 매일 극심한 고난 중에 있더니 어떻게 빠져 나왔대?”
  “몰라. 매일 예배당 가 엎드려 기도한다고 그러더니 어떻게 해결이 됐나 봐!”

  하나님께서 시편 기자와 예레미야를 통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삼림의 짐승들과 천산의 생축이 다 내 것이며 / 산의 새들도 나의 아는 것이며 들의 짐승도 내 것임이로다 / 내가 가령 주려도 네게 이르지 않을 것은 세계와 거기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시 50:10-12)
  “저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응답하리라 저희 환난 때에 내가 저와 함께 하여 저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시 91:15)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 그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자가 이같이 이르노라 /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2-3)




  하나님께서는 부자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려울 때 세상 부자들을 찾아가려고 하지말고 전 세계에서 가장 부자이신 하나님께 나아가서 ‘어렵습니다. 도와주십시오.’라고 말씀드리면 반드시 응답 주실 줄 믿습니다.

  느헤미야의 간증입니다.
  “주께서 우리 열조가 애굽에서 고난 받는 것을 감찰하시며 홍해에서 부르짖음을 들으시고”(느 9:9)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뭘 그렇게 잘 했다고 그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건지시고, 그러시느냐 말입니다. 우리가 뭘 그렇게 잘 했다고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건지시고, 영화롭게 하시느냐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인생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시 103:2-3)
  “여호와는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 항상 경책지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 / 우리의 죄를 따라 처치하지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갚지 아니하셨으니 /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 /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 / 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시 103:8-14)

  우리 부모들은 자녀들이 어려움에 빠지면 그 자녀를 그 어려움에서 건지기부터 하지, ‘네가 나에게 괘씸하게 행동했으니까 너는 고생 좀 더 해야 해’ 그럽니까?
  오히려 옆에서 ‘좀 내버려두라고 고난 좀 더 당하게 해야 돼’ 그래도 또 건져내고 하지 않습니까.

  일곱째, 예수님을 일대일로 만나 뵙고, 분명한 도움을 요청하고, 해결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징계하시기로 결정하시면 그 사람의 지혜부터 빼앗아 버리신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 무엇인가를 생각하다보면, 해법이 잘 안 나옵니다.
  그런데 주님께 나아가 무릎을 꿇고 “도와주세요!”라고 말씀을 드리면 희한하게 해법이 나옵니다.

  야고보의 권면입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 1:5)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다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슬리므로 물결을 인하여 고난을 당하더라 /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 제자들이 그 바다 위로 걸어 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지르거늘 / 예수께서 즉시 일러 가라사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한대 /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마 14:22-33)

  우리가 고난당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두려워 말라”고 하십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환경을 계속 바라보면서 두려워합니다.
  베드로가 바다 위를 걸었습니다. 빠졌습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도 옆에 계시고, 바다 위를 걷는 기적을 잠시 전에 체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환경을 바라보다가 겁이 나서 두려워 바다에 빠집니다.
  베드로는 그 때 예수님께 건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 받아야 하겠습니까?
  손을 내밀어서 우리를 붙잡아 주시는 예수님에게 나의 모든 문제를 아뢰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해결하여 주신 문제의 사례들

  ① 물질 문제
  야곱은 삼촌 라반의 집에 가서 14년 동안 품삯을 하나도 못 받았습니다. 그런데 나머지 6년 동안 100억 이상의 갑부를 만들어주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아버지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곧 이삭의 경외하는 이가 나와 함께 계시지 아니하셨더면 외삼촌께서 이제 나를 공수로 돌려 보내셨으리이다마는 하나님이 나의 고난과 내 손의 수고를 감찰하시고 어제 밤에 외삼촌을 책망하셨나이다”(창 31:42)

  우리가 어떤 노력을 열심히 하고 있는데 현재 상황에서 그 수고의 대가가 안 치러진다고 해도 하나님께서는 넓은 의미에서 언젠가는 다 보상해 주십니다.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끝까지 충성하면 됩니다.

  ② 상처 문제
  요셉은 그 형제들로부터 마음의 많은 상처를 받았습니다.

  “요셉이 그 장자의 이름을 므낫세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나로 나의 모든 고난과 나의 아비의 온 집 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 함이요”(창 41:51)

  그러나 요셉이 당한 모든 마음의 상처를 하나님께서 치료하여 주셨습니다, 잊어버리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일대 일로 만나 뵈면 내 마음의 그 어떤 상처도 다 치료해 주십니다.

  ③ 건져 주심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건져주셨습니다.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시 34:19)

  결국 우리가 하나님에게 안 나아가서 그렇지, 일단 나아가서 “제가 상황을 나쁘게 만들었습니다. 엉망으로 만들었습니다. 저 좀 이 상황에서 건져주십시오.”라고 분명히 요청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건져주시는 분이십니다.

  고난은 극복되는 방법이 있습니다.
  예수님께 나아가서 일대 일로 만나 뵙고 현재의 모든 고난에서 신속하게 빠져 나오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바라겠습니다.

 

한성호 목사(물가 심기운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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