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요한복음 20장1∼18절□
-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간 것을 보고
- 시몬 베드로와 예수의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되 사람이 주를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하니
-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무덤으로 갈쌔
- 둘이 같이 달음질하더니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아나서 먼저 무덤에 이르러
- 구푸려 세마포 놓인 것을 보았으나 들어가지는 아니하였더니
|
- 시몬 베드로도 따라 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개켜 있더라
- 그 때에야 무덤에 먼저 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
- (저희는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
- 이에 두 제자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
-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푸려 무덤 속을 들여다보니
-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
- 천사들이 가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가로되 사람이 내 주를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의 서신 것을 보나 예수신줄 알지 못하더라
-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로 알고 가로되 주여 당신이 옮겨 갔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
-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여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
-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신대
-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
우리가 살아가면서 누구를 만나느냐 하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흔히 하는 말로 "모든 운명은 만남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부모님을 만납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좋은 부모를 만나서 행복한 생을 살아가는가 하면, 어떤 이들은 부모를 잘못 만나서 불행한 삶을 살아갑니다. 장성해서는 남은 인생을 함께 살아갈 배우자를 만나는데, 남편이나 아내를 잘 만나서 행복하게 사는 부부가 있는가 하면, 잘못 만나서 불행한 생을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부모나 배우자만이 아닙니다. 어떤 친구를 만나느냐? 어떤 스승을 만나느냐? 이웃이 누가 되느냐? 하는 것도 우리가 행복하게 살아가는 데에 굉장히 중요한 요인이 됩니다. 심지어 옷깃을 스치며 지나가는 행인과의 만남까지도 우리의 삶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게 됩니다. 무인도에서 혼자 사는 사람이 아닌 이상, 우리는 눈만 뜨면 누군가를 만나야 하고, 그 만남이 내가 원하든 원치 않튼 간에 내 삶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치게 됩니다. 때로는 어떤 만남을 통해서 일생을 버리게 되기도 하고, 때론 어떤 좋은 만남 때문에 일생에 축복이 되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던 한 여인의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 여인의 이름은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원래 막달라 마리아는 평범한 여인이었지만 예수님을 만나 그의 인생이 변화된 여인입니다. 그녀는 누구보다도 제일 먼저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여인이 되기도 해서 신앙의 세계에서는 굉장히 부러움을 사고있는 여인이기도 합니다.
1. 무덤에 간 막달라 마리아
최근 줄곧 베스트셀러 자리를 지키고 있는 "다빈치 코드"에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과 결혼했다고 하여 물의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다빈치 코드의 저자 뿐 아니라 현대 자유신학자들 사이에서도 예수와 막달라 마리아 사이를 결혼을 했거나 동거한 것으로 추정하여 예수그리스도의 도덕성을 깎아내리려는 시도를 하고 있는데 이것은 정말 경계하여야 합니다. 성경이나 성경외적 근거 그 어느 것도 그들이 주장하는 예수님의 결혼설을 뒷받침할만한 손톱만큼의 증거도 없습니다. 동시에 전통적으로 이해되어 온 막달라 마리아가 창녀였다는 주장 역시 성경적인 근거가 없는 것이므로 주의해야 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막달라 마리아는 누구입니까? 막달라 마리아는 갈릴리 여인으로서 영락없는 보통 촌 아낙네였습니다(마태27:55). 그러나 그는 결코 평범한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아마 도시의 허영을 찾아 몸부림을 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막달라 마리아는 그야말로 막달라고 떼쓰는 인생을 살았었다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8장에 보면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귀신이 들었었다고 말하는데(1-2절), 일곱귀신이 들렸다는 말은 욕심과 죄 때문에 귀신이 들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자신의 욕망을 채우고 또 채워도 다 채워지지 않아 계속 더 달라고 정욕의 신을 쫓아가다 그만 귀신이 들고 만 것이었습니다. 이런 막달라 마리아의 모습은 오늘날 일곱가지 욕심의 우상을 섬기는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그런 그녀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귀신으로부터 놓임을 받고 그 이후로부터 예수님을 따르는 신실한 제자가 되었습니다. 막달라마리아는 예수님을 따르는 다른 여인들과 함께 자신들의 소유를 모두 내어놓고 예수님을 섬겼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눅8:3). 이로 미루어 보아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를 만나고 막주라 마리아가 되었음이 틀림없습니다.
그녀는 안식일이 지나고 3일째 되는 날 아침 일찍이 해가 뜨기 전이라 주위에는 아직 어둠이 짙게 깔려 있던 때에 용기를 내서 주님이 묻혀있다는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손에는 예수님의 시체에 발라드릴 향품이 들려 있었습니다. 장사 지낼 때에 발라 드려야 했었는데, 그 때에는 무서워서 감히 나설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향품을 들고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간 것입니다. 아마 막달라 마리아는 지나간 밤에도 잠을 제대로 이룰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게도 자신을 사랑해 주셨는데, 그 주님의 마지막 길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걸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져 옵니다. 빨리 안식일이 지나가야 향품을 들고 가서, 지난 장례식 날에 해 드리지 못한 일 - 향품을 몸에 발라 드리는 일이라도 해 드릴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빨리 아침이 되기를 기다렸습니다. 그 기다림의 저녁에는 밤새도록 엎치락 뒤치락하며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는 아침 일찍 새벽 미명에 마리아는 무덤이 있는 동산에 올라갔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가던 마리아의 마음에는 두 가지 마음이 교차하고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예수님께 마지막으로 향품을 발라드림으로서 사랑을 표현하고 싶다는 강한 열망과 함께 다른 한쪽에서는 걱정이 이만 저만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무덤은 우리의 묘지와 달리 동굴로 되어 있는데, 그 무덤 입구를 커다란 돌로 막아놓았기 때문입니다. 무덤에 들어가서 예수님의 시체에 향품을 발라드리기 위해서는 무덤 입구를 가로막고 있는 돌을 옮겨야 합니다. 그런데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 그 무거운 돌을 옮길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걱정하는 마음으로 무덤 입구에 도착했는데, 도착해 보니까 무덤을 가리고 있어야 돌은 옆으로 굴러가 있는 것입니다. 깜짝 놀란 마리아는 그 길로 다시 뛰어 돌아가서 베드로와 요한에게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 '누군가가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간 것같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깜짝 놀란 베드로와 요한이 무덤에 달려와서 무덤 속에 들어가 보았습니다. 정말 무덤 속에 있어야 할 예수님의 시체가 온데 간데 없어졌습니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던 제자들은 다시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2. 무덤에서 울고 있는 막달라 마리아
그런데 마리아는 그냥 집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누군가가 사랑하는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가 버렸다면, 자신은 이제 더 이상 주님께 아무 것도 해 드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도저히 그냥 돌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의 시체를 찾을 수 있는 방법도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 밖에서 울고 있었습니다. '정말 더 이상 주님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아무 것도 없단 말인가'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하염없이 슬피 울고 있었습니다. 한참을 울다가 무덤 안을 들여다 보았더니, 캄캄해야 할 무덤에 찬란한 광채가 비취고 있었습니다.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천사가 무덤 안에 있었습니다. 천사들이 마리아에게 묻습니다. "여자여 어찌하여 울고 있느냐?" 깊은 슬픔에 잠겨 천사인줄 알지 못한 마리아가 울음 섞인 목소리로 대답합니다. "누군가가 내 주님의 시체를 가져가 버렸어요. 시체를 찾을 수 없어요."
성도 여러분!
왜 마리아가 울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시체가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시체가 무덤 속에 있었다면 마리아는 울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예수님의 시체가 무덤 속에 있어야 맞습니까? 없어야 맞습니까? 사실 예수님의 시체가 거기 있었다면, 마리아는 울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생명의 종교인 우리 기독교는 탄생하지 않았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시체가 없어졌다고 울었지만, 그 울음은 생명의 종교가 탄생한 울음과도 같은 것입니다. 마치 어머니의 뱃속에 있던 아이가 세상에 나오자마자 생명의 울음을 터뜨린 것같이, 마리아의 울음은 세상에 새로운 생명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리는 선언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울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기워 희롱을 받고 능욕을 받고 침 뱉음을 받겠으며 저희는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니 저는 삼일만에 살아나리라"(눅18:33)
예수님은 당신이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셔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또한 죽으신 후에는 삼일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내가 죽어야 하고 죽은 후에는 3일만에 살아나리라'고 분명히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진 사실에 당황하며 침통한 표정으로 무덤에서 나왔을 때 마리아는 자기 앞에 선 한 사람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은 마리아에게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고 물었습니다. 마리아는 순간 그가 동산을 지키는 사람임을 직감했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매달렸습니다.
"주여 당신이 옮겨 갔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마리아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보고서도 그를 동산지기로 착각했습니다. 예수의 시체를 어디로 옮겼는지 물었습니다. 마리아는 자기가 그렇게도 무덤 속에서 찾던 사랑하는 주님이 앞에 게셨건만 그 분이 자기가 찾던 바로 그 주님이심을 알지 못했습니다. 동산지기인줄 알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뵙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기와 이야기하고 있는 분이 부활하신 주님이라는 사실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 마리아는 '예수의 시체가 보이지 않는다'고 하는 슬픔의 발작이 그의 영혼을 꽉 메우고 있습니다. 주님의 시체가 사라진 그 일념에만 몰두하고 있기에, 그는 모든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고 말았습니다.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고 나니까 주님도 주님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이것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 아닐까요? 부활하신 주님을 앞에 두고서도, 여전히 시체만 찾겠다고 마음을 닫아버린 모습은 흡사 우리들의 모습과도 같지 않습니까?
우리는 너무 자주 헛된 것에 마음을 빼앗겨버립니다. 살아 계신 주님 앞에서도 시체 타령을 하고 있는 마리아처럼, 생명을 소유한 사람이라고 하면서도 생명보다는 세상적인 욕심과 쾌락에 마음 빼앗겨 생명 없는 사람들처럼 살아가고 있습니다.
정욕의 눈, 슬픔의 함정, 고통의 벽과 같은 현실적이고 인간적인 감정과 생각들이 주님을 보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있습니다.
죽음을 이기시고 무덤에서 부활하신 우리 주님은 오늘도 우리 앞에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이렇게 물으십니다. "어찌하여 울면서 누구를 찾고 있느냐?" 예수님은 살아나셨는데, 여전히 죽음을 향하여 울고 있는 우리네 인생을 찾아오셔서 "어찌하여 울고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성도 여러분!
세상살이가 힘드십니까?
아무리 둘러보아도 희망이 없고 가슴 답답한 일들이 첩첩산중처럼 쌓여 있습니까?
가정의 문제 때문에, 사업의 문제 때문에, 자식의 문제 때문에, 웬지 자꾸만 울고 싶습니까?
우리가 울고 싶은 때는 주님께서 그 자리에 찾아 오시는 때입니다. 우리가 마음에 상처를 받을 때, 심한 고통 중에 일그러진 얼굴로 주저 앉고 있을 때, 바로 그때는 우리 주님이 찾아오시는 때입니다.
요한복음 4장에는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난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 사마리아 여인도 누구보다 마음에 큰 아픔과 상처를 지닌 채 살고 있는 여인이었습니다. 당시 사마리아지역은 이스라엘사람과 다른 이방민족들의 혼합결혼으로 피가 섞은 혼혈족이 사는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마리아사람들은 정통 이스라엘사람들에게는 멸시를 당하고 인격대우를 받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이 여인은 자랑스럽지 못한 혈통으로 태어났기도 했고, 또 기구한 인생을 살아 왔습니다. 결혼을 다섯 번 하고 다 실패한 후, 지금은 또 다른 남자와 사는 여자였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동안 자기를 거쳤던 다섯 남자들이 준 상처, 마음의 고통, 사람들이 자기를 창녀취급하는 행동들. 이 모든 것들과 사람들을 이 여인은 무척이나 증오했을 것입니다. 당연히 이 여인은 아무도 만나지 않고 혼자서 고독 가운데 살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물을 뜨러 야곱의 우물이라는 곳에 다닐 때, 정오에 왔습니다. 이 때는 아무도 오지 않는 때입니다. 동네에서 우물까지 약 2킬로 떨어져 있는데,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이곳을 왔다 갔다 하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햇빛이 강하게 내리쬐는 낮 시간에 그 지역은 굉장히 덥습니다. 그래서 낮 동안은 사람들이 밖에 잘 나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에게는 이 시간이 물을 긷는 황금시간입니다. 애ㅗ 그럴까요? 그것은 그 시간에 아무도 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사람을 피하면서 삽니다. 아마 이 여인은 속으로 "내가 계속 이렇게 살아야만 하는 건가?"라고 물으며 절망 가운데 살고 있었을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을 찾아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정오쯤에 야곱의 우물에 그 여인이 도착할 것을 알고 그 시간에 맞추어 이 우물에 도착하기 위해 적어도 이틀을 사용하셔야만 했습니다. 성경은 수가성에 도착하실 때 예수님은 지쳐있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몹시 시장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이처럼 세상에서 버림받고 상처받고 불쌍한 사람들을 가장 먼저 사랑하십니다.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의지할 데 없는 자들을 주님은 사랑하십니다. 주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상처받은 이들에게 먼저 찾아가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에게 기쁜 소식을 주시는 분이시고, 마음이 상한 자를 위로하시고 고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사단과 탐욕에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주시는 분이시고, 갇힌 자에게 놓임을 주시는 분이십니다(사61:1-2). 예수님은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위해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아흔 아홉 마리 양을 들에 놔두고 한 마리 양을 찾기 위해 온 산을 헤메시는 분이십니다. 여리고 성에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상처받은 한 난쟁이 삭개오를 찾아 가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30)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길잃은 한 영혼을 사랑하십니다.
시편51편에는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시51:17)고 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상처 입은 마음을 하나님은 귀중히 보십니다. 상처 받은 심령에 주님은 가까이 하십니다. 낙심한 심령을 찾아오십니다.
사는 것이 힘들고 어렵습니까. 기다리던 예수님은 오시지 않고 기대던 친구마저 등을 돌립니까. 그때는 예수님이 우리를 찾아오시는 때입니다. 인간의 희망이 다 없어진 것 같은 그때, '이제는 내가 할 일은 다했는데 더 이상 희망이 없구나!' 하며 그냥 모든 것을 포기하고, 쓰러져 울고 싶을 때 예수님은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3. 부활의 소식을 전하는 막달라 마리아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마리아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우리 인간의 정서로는 반갑게 끌어 안을 상황입니다. 정답게 이야기를 오고갈 상황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16절에 예수님이 "마리아야" 하고 불러서 "예, 선생님" 하고 대답하니까 다짜고짜로 "나를 만지지 말라" 하십니다. 이런 섭섭할 데가 어디 있습니까?
복음서의 다른 부분에는 예수님께서 다른 제자들에게 만져보라고 하시는 몇 장면이 나옵니다. 도마에게 나타나서는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요20:27)고 하십니다.
그런데 마리아게는 "만지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 말의 내용은 그냥 단순하게 "만지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나를 붙들지 말라"는 말입니다.
마태복음(28:13)에 보면 그 점이 분명해집니다. "예수께서 저희를 만나 가라사대 평안하뇨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그러니 여자들이 그 발을 붙잡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이것 놔라, 붙들지 말라" 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만져보라고 한 사람들을 보십시오. 대부분이 믿음이 부족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 막달라 마리아의 믿음을 보아서는 굳이 만져서 예수님인지 아닌지를 확인할 필요가 없겠다는 것이 예수님의 마음이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를 붙들지 말라'고 하신 데에는 과연 어떤 뜻이 있을까요? 예수님이 나를 붙들지 말라 하신 말속에는 '나를 붙들지 말고 바로 가서 나의 부활을 알려라'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나를 붙들지 말고 가서 내가 살아났다는 부활 사실을 알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다시 살아났다고 흥분하는 것보다는 이 사실을 알려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마리아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마리아는 변했습니다.
본문 18절을 보십시오.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막달라 마리아의 "내가 주를 보았다"는 고백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나의 구주라는 고백입니다. 마리아는 주님의 명령을 따라 자기 형제들에게 가서 부활의 소식을 전합니다. 마리아는 유대교 회당 지도층이 무서워 문을 걸어 잠그고 두려워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로 갑니다. 그리고 부활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그러자 그들 역시 부활의 힘을 얻게 됩니다. 부활의 소식을 접하게 되자 제자들은 담력을 얻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수난을 무릅쓰고 거리로 뛰쳐나갑니다.
"여러분은 그를 무법자들의 손을 빌어서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죽음의 고통에서 풀어서 살리셨습니다"(행2:23-24).
바로 이 부활 소식이 교회의 시작입니다. 교회는 이 부활 사건을 기점으로 출발하였습니다. 초대교회 공동체는 로마의 통치 밑에서 실존하였지만, 로마의 황제를 주로 섬기기를 거부하였습니다. 그들은 죽음의 권세 밑에 살았지만, 결코 죽음의 권세에 종속되지 아니하였습니다. 초대교회 공동체는 현실에서 피곤하게 살았지만 결코 거기에 안주하지 아니 하였습니다.
그들은 부활의 주요 생명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종속되어 있다는 자의식(自意識)을 가지고, 온갖 수난을 감내하면서 그리스도교 복음을 증언하였습니다. 이러한 그리스도교인이 있었기에 오늘날 여기까지 복음이 전해질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는 부활의 소식, 생명의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 부름 받은 공동체입니다. 스승을 잃고 눈물을 뿌리던 마리아, 그녀는 부활의 주님을 목격하고 살아계신 주님을 담대하게 증거했습니다. 마리아는 부활의 첫 번째 증언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도 부활하신 주님의 증인들입니다. 사도행전의 초대 교회는 바로 그 부활 신앙에 기초하여 세워졌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행4:33)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의 믿음도 헛것이며"
(14절)고 말하고 있습니다.
<로베레 장군>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무대는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에 있는 어느 형무소입니다. 형무소에 갇힌 레지스탕스들이 나치에 의해서 처형당합니다. 그들 가운데 저항 운동에 참여하지도 않았던 한 사람이 끼여있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은 저항운동에 가담하였다가 붙잡혔으니 처형당하는 것이 당연하나, 자기는 그들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는 교도관을 향하여 억울함을 항변합니다. "나는 유대인도 아닙니다. 저항운동에 가담하지도 않았고, 아무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내가 왜 억울하게 죽어야 합니까?" 이 때 그의 옆에서 이 소리를 듣고 있던 레지스탕스 한 사람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합한다. "당신이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것이 잘못입니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당신은 죽어야 마땅합니다. 전쟁은 5년이나 계속되었습니다. 수 백만 명의 사람이 아무 잘못도 없이 죽임을 당하였고, 감옥에 갔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왜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단 말입니까?" 사실 그는 아무 일도 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그는 피 흘리는 전쟁의 한 복판에서 혼자만의 안전을 꾀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자기 자신만의 이익을 위해서 살았습니다. 그는 고통 당하는 이웃을 위하여 마땅히 해야할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불의에 항거해야 할 자리에서 회피하였습니다. 자기 이익 외에 모든 것에 대하여 철저하게 무관심으로 일관했던 것입니다. 그는 마땅히 해야 할 자리에서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죄를 지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부활의 증인으로 선택되었습니다.
주님은 절망의 저 끝까지 도달했던 마리아에게 나타나셔서 위로해 주셨습니다.
마리아는 주님의 부활을 확실히 목격하고 나가서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고 용감하게 외쳤습니다.
이제 우리가 마리아처럼 나가서 증거해야 할 차례입니다.
그 분은 우리에게 부활을 증거하라고 하십니다.
나가서 마리아처럼 눈물을 훔치고 용기있게 부활을 전하라고 하십니다. -산돌-
2005.3.27. <여자여 여찌하여 우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