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Matthew) 표적을 구하는 사람들(마12:38-50)
구약 성경을 상고해 보면 하나님이 보낸 선지자들은 그 증거로 표적을 수반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모세가 완악 했던 바로왕 앞에 나아가 내백성을 떠나게 해 달라고 요구했을 때 그는 많은 기적을 행함으로써 그가 하나님이 보낸 사람임이 입증되었다(출7:8-24).엘리야가 아합왕 앞에 설 때에도 참선지자의 표로서 3년6개월간 그 땅에 비가 내리지 않게 했던 일이 있다(왕상17:1).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표적을 보이셔서 자신이 메시아이심을 증명해 보이시지 않았을까?
여기서 바리새인들이 요구했던 표적은 무엇이었는가? 바리새인들은 지금까지 예수님이 행하셨던 많은 이적에 대하여 듣기도 했고 또한 보기도 했을 것이다. 불구자를 낫게도 하셨고 문둥병자를 고치기도 하셨고 바다의 광풍을 잔잔케도 하셨고 또한 오병이어로 5천명을 먹이시고 남는 기적을 베풀지 않았던가.
예수님의 이같은 다양한 표적으로도 만족하질 못하였다면 그 어떤 표적이 이들을 만족시킬 수 있겠는가? 이에 대하여 렌스키란 학자는 "천체가 움직이며 지상에 일대 변화가 나타나는 그런 표적"을 요구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주의 자연법칙마저 변화시키면서까지 강팍하게 저들에게 표적을 보여주시기를 원하지 않고 표적이 있다면 오직 "요나의 표적" 그것만을 보여 주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요나를 토해내는 물고기 : 얀 브뤼겔이 그린 요나의 모습으로 뮌헨 국립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거대한 이 물고기는 하나님의 섭리의 도구라고 생각되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사흘간 갇혀 죽은 줄 알았으나 기적적으로 구원받은 후 니느웨성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예언하였고 저들이 마침내 구원받지 않았던가. 요나의 물고기 뱃속에서의 기적적인 구원은 그가 하나님에게서 보냄을 받았다는 증거였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무덤 속에서 3일 만에 부활하심으로써 그가 약속된 메시아로서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분이심을 증거 하게 됐다. 이 표적이 앞으로 있을 것이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내신 구세주로서 믿고도 남을 만큼 충분한 진리와 표적을 주셨다.니느웨성은 요나와 그의 설교로 회개하였으나 예수님의 동시대 사람들은 그의 부활(눅16:31)이나 그의 설교(눅11:32)를 듣고도 회개하지 않았다. 이 사건은 불신하는 바리새인들에게는 오직 심판이 있을 것임을 교훈 한다. 그리고 참신앙은 기적이나 표적이 아닌 말씀에 근거해야 함을 교훈하고 있다. 기적을 보지 않고도 믿는 믿음은 보고 믿는 것보다 훨씬 더 귀하고 값진 것이다(요20:29). 기적과 이사를 따라 이리저리 방황하는 우리 세대의 크리스천들에게도 귀한 교훈을 주시고 있다.
신학용어 이적/표적
이적 [히] 모페트 [라] prodigium [영] miracle [독] Wunder신약성서에는 "기이한 일"(powerful deeds), "기적"(wonders), "표적 "(signs)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말들이 제시하는 것처럼 이적은 예수 안에서 역사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의 표현으로 간주된다. 예수 이후 1 세기에 기독교인의 마음에 들어와 있던 희랍의 자연법 개념은 이 세 용어를 이적이라는 하나의 개념으로 통합되어 자연법에 역행하여 역사 하시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초자연적 행위로 전의 되었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이적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성서의 권위를 증명하는 것이 되었다.
17, 18 세기에 자연 과학이 발달하고 불변법(immutable laws)에 따라 작동하는 개가 계처럼 자연의 모습을 보기 때문에 이적의 개념은 교회의 외부로부터 신랄한 공격을 받았다. 그러나 정통적인 신학자들은 이적을 진정한 기독교 신앙의 일부분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기독교 세계 안에서의 커다란 변혁은 자유주의 개신교의 발생과 성서비평의 인정과 함께 발생했다. 왜냐하면 자유주의 개신교는 신앙이 기적적인 증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이적이 많이 수록되어 있는 고대문서와 다른 경전들을 성공적으로 연구하고 있는 비평의 기준에서 성서를 제외한 것은 정직하지 못한 역사 였다고 믿었다. 여기에서 끌어낼 수 있는 유일한 결론은 고대 사람들이 보통이 아닌 사람들이나 사건들을 모두 이적 적인 것으로 생각했고, 신약성서의 저자들도 예외는 아니라는 것이다. 이 결론은 정통파에게 혼란을 주었고 세계 2 차 대전 이전 수십년 동안 이적과 성서비평에 대하여 열띤 논쟁이 벌어졌다. 신개혁주의 신학자들은 많은 자유주의 신학적 개념을 부인했지만 성서비평과 그 전제조건들을 인정했다.
신약성서의 이적 이야기들은 예수의 중요성을 신앙으로 표현하는 원시적인 방법으로 해석되었다. 현대의 어떤 기독교 호교론 자들은 과학의 새로운 발달이 이적의 불가능성의 개념을 설명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사실인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이 어떠한 신학적 중요성을 가지는지 의 심스럽다. 왜냐하면 역사가들이 대답해야할 질문은 "이적이 불가능한가?"가 아니고 "이 특별한 경우에 무엇이 초자연적 개입을 증명할 수 있는가?"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과학은 다른 종교들의 이적이 초자연적이 아닐 때 진정으로 초자연적인 종교의 이적을 결정하는 것은 더욱 어렵게 된다.
43절 물 없는 곳으로 사막이나 광야를 가리키는데, 이곳은 귀신이 사는 곳으로 믿어졌다. 아사셀 염소를 광야로 내보내는 것이나(레16:10), 예수께서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은 것(마4:1-11)도 관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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