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주석강해/복음서

주님의 부르심 받은 마태오(마태 9,9-13)

은바리라이프 2008. 8. 1. 00:12
목록열기 전체목록 (6923)
[매일복음 07-09-21] - 주님의 부르심 받은 마태오(마태 9,9-13) 복음과 강론

2007/09/21 01:23

복사 http://blog.naver.com/nont9093/10022132452

 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2007-09-21) 

[07-09-21] I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묵상 I 마태 9,9-13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곳을 떠나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예수님께서 집에서 식탁에 앉게 되셨는데, 마침 많은 세리와 죄인도 와서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하였다. 그것을 본 바리사이들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 9,9-13)

 [오늘의 독서 및 복음 묵상주제] : 우리는 모두 죄인
    [독서 : 에페 4,1-7. 11-13 / 복음 : 마태 9,9-13]

“일이 힘든 것보다도 심부름하는 사람들이 미워서 도와주기가 싫다.” 이 말은 1980년대 말부터 북한을 방문하고, 지금도 평양과 사리원 등 몇 군데에 국수공장을 세워 북한을 열심히 도와주고 있는 어느 스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이해하기 쉽지 않지만 사실 대북 지원에 나선 실무자들의 공통된 심정이라고도 합니다. 우리가 어렵게 그들을 돕는데 당연히 북한에서 외부 지원을 담당하는 일꾼들이 이를 고맙다고 하고, 또 어떻게 하면 더 효율적으로 도움을 받을 수 있는지에 대해 고민하는 모습을 보여야 하는데 자기들 입장만 내세우는 등 어떤 때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비협조적이어서 “대체 우리가 왜 이 고생을 하는 거야?”라고 혼자 분을 삭일 때가 종종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점차 지나면서 그 이유를 조금씩 알게 되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보통사람이 군대와 같은 조직사회의 독특한 생리와 구조를 이해하기 힘든 것처럼 북한사회야말로 우리가 이해하기 힘든 조직구조와 특성을 지니고 있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와 달리 외부 세계와 접촉이 없었다는 점과 사회주의 체제에서는 서로 지원할 때 국가 간에 정책적으로 이루어지므로 실무자들이 서로 고맙다고 얘기할 만한 여지가 없었다는 사실도 알게 된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아는 것이 죄’이고, 그들은 ‘모르는 것’이 죄였던 셈입니다. 그래서 ‘어차피 우리는 모두 죄인이구나!’ 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그러하기에 우리에게 하느님의 은총이 필요하고,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라는 주님의 말씀이 더욱 은혜롭게 느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말씀봉사 : 변진흥(새천년복음화연구소 소장)]

 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 I 묵상기도방(사이버기도실)  

 시작기도 :

믿음과 신뢰의 하느님.

우리 순교성인들이 가졌던

굳센 믿음과 항구한 열정을

저희도 본받아

그 모범을 살아갈 수 있도록 힘을 주소서.

 오늘의 기도지향 : 쉬는 교우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사랑이신 주님, 당신과 늘 일치하며 살아갈 수 있는 충만한 은총을 주소서. 자신에게 닥치는 모든 상황들을 신앙의 눈으로 볼 수 있게 하시며, 당신만이 줄 수 있는 위로에 만족하게 하 시어 신앙생활을 은혜로이 받아들이게 하소서.

 오늘의 복음 : 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 마태 9,9-13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곳을 떠나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예수님께서 집에서 식탁에 앉게 되셨는데, 마침 많은 세리와 죄인도 와서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하였다. 그것을 본 바리사이들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 9,9-13)

 영적독서 : 김대건의 편지 1

조선 신자들로부터 박해가 멎은 다음 조선 교회는 비교적 평온하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박해의 폭풍우가 덜 몰아친다고 생각하는 남쪽 지방으로 피신한 신자들도 많고, 천주교에 입교한 가족들도 많다고 하였습니다. 신자들이 서양 선교사를 오랫동안 그들의 집에 모셔두기는 어려운 실정이지만 하느님의 인자하심에 의지하여 선교사를 영입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겠답니다. 선교사들을 조선으로 모셔들이는 데는 훈춘보다 변문이 덜 위험할 것이랍니다. 왜냐하면 훈춘을 경유하여 조선으로 들어오면 국경을 넘어오는 위험 외에도 조선(함경도) 전체를 통과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야기를 끝마치고 우리는 이별하려고 손을 마주잡았습니다. 그들이 흐느껴 울어서 굵은 눈물이 뺨을 타고 줄줄 흘러내렸습니다. 우리는 다시 읍내로 들어와 군중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습니다.........<정진석,「이 빈들에 당신의 영광이」중에서>

 마침성가 : 성 안드레아 김대건 신부 노래(가 287장)  

<EMBED style="FILTER: xray(); WIDTH: 600px; HEIGHT: 45px" src=http://user.chollian.net/~d00re/requiem/faure/requiem03.asx type=audio/mpeg autostart="0" loop="-1" volume="0">
 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2007-09-21) I 복음묵상방

 <요한과 함께하는 묵상> : † 변화의 시작 - “혹시, 저더러 따르라는 말씀입니까?” 
교회는 오늘 사도이자 복음사가였던 마태오 성인의 축일을 기념한다. 마태오의 죄인에서 성인에로의 길은 어느 날 자기 동네 어귀에서 한창 세관업무를 보던 중에 예수님의 부름을 받는데서 시작되었다. 마태오는 갈릴래아 지방 가파르나움 출신으로 12사도들 가운데 자신이 집필한 것으로 전해오는 마태오복음서 때문에 누구보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그의 전직(前職)인 세리는 당시 유대사회에서 죄인과 다름없는 직업이었다.

그가 오늘 예수님의 부름을 받고 제자로 따라 나선 것이다. 세리 마태오의 소명사화와 예수께서 마태오의 집에서 다른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나눈 이야기는 마르코와 루가복음에도 기록되어 있다.(마르 2,13-17; 루가 5,27-32) 마르코와 루가는 여기서 마태오를 ‘레위’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으며, 마르코는 그를 일컬어 ‘알패오의 아들’로 좀 더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12사도 명단에는 그냥 ‘마태오’로 적고 있다.(마르 3,18) 따라서 마태오복음의 원저자는 마르코복음의 두 부분을 참조하여 ‘레위’라는 이름을 자신을 지칭하는 마태오로 바꾸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전승에 의하면 마태오는 동방의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선교하다 42년경에 순교하였다고 한다.

“나를 따라 오라.”는 예수님의 한 말씀에 즉각 따라 나선 마태오다. 단 한 구절의 간략한 이 대목은 사실상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가파르나움 도읍의 나들목에 자리를 잡고 로마제국을 위해 각종 세금을 거둬들이는 세리 마태오는 이미 당대의 상업적 죄인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만약 내가 세리였다면 어떻게 했을까?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부르심이 설마 나를 향한 말씀이라는 생각은 아예 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왜? 본인 스스로가 죄인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복음의 이 대목을 기록한 마태오복음사가 스스로가 자신을 죄인의 부류에 넣고 있다.

그러나 “나를 따라 오라.”는 우렁찬 낯선 이의 목소리에 도대체 누구를 부르는 것인지 주위를 한번 둘러보았을 것이다. 아무도 반응을 보이지 않자, 마태오는 자신을 가리키며 “혹시, 저 말입니까?”하고 반문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마태오의 반신반의(半信半疑)가 믿음으로 기울었다. 이미 여러 제자들뿐 아니라 무리를 거느리고 다니시는 예수께서 분명히 자신을 지목한 것임을 알았던 것이다.
드디어 기회는 왔다. 언젠가는 그만 두어야겠다고 생각한 세리의 직업을 벗어 던지고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다. 그래서 마태오는 아무런 미련 없이 예수를 따라 나설 수 있었던 것이다.

마태오가 보인 예수추종의 두 번째 행동은 예수와 제자들, 그리고 다른 많은 세리와 죄인들을 식사에 초대한 것이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이를 두고 트집을 잡은 일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러나 그들의 불평과 트집을 통하여 예수께서는 당신의 제자가 되는 일에 ‘죄인’이라는 굴레가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음을 가르쳐 주신다. 더욱이 “나는 선한 사람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13절)는 말씀으로 예수 자신의 죄인을 위한 파견사명을 밝혀 주셨다.

뿐만 아니라 유대사회에서 약하고 소외되고 고통 받던 사람들에게 ‘율법의 굴레’를 씌워 죄인으로 취급하고, 자신들은 율법이 규정하는 제사를 드림으로써 거룩하다고 자처하던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내가 바라는 것은 동물을 잡아 나에게 바치는 제사가 아니라 이웃에게 베푸는 자선이다.”(호세 6,6)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선포하셨다.

하느님께서 예수와 함께 예수 안에서 말씀하시고 행동하신다. 하느님의 말씀과 행동의 핵심은 사회로부터 소외된 사람들과 스스로 죄인으로 여기는 사람들에게 대한 자비와 용서이다. 이로써 예수님 시대에 죄인으로 분류되었던 세관원이 제자의 반열에 들게 된 것이다. 이 땅에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어 오신 이래로 사랑과 자비를 베푸는 일이 율법의 규정을 지키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되었다. 걸어 다니시고 말씀하시며 행하시는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자연과 마귀와 죄 위에 군림하는 최고의 권위로써 사랑과 자비와 용서의 선물을 이 땅에 선사하시는 것이다.

남을 부정(不淨)하다고 하여 자신이 정(淨)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남을 죄인으로 규정한다고 자신이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다. 세리 마태오와 같이 오직 스스로를 죄인으로 여기며 ‘나를 따르라’는 거룩한 부르심을 추종하여 사랑과 자비와 용서를 스스로 실천할 때 하느님 앞에 거룩한 자로 변화되어 가는 것이다. “나 야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라.”(레위 19,2)...........◆


[말씀봉사 : 박상대 신부 / 편집 : 까따꿈바 묵상팀]


 <야곱과 함께하는 묵상> :  †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세리 마태오

오늘은 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로서 '죄인도 사랑하시는 주님'이라는 주제로 묵상하겠습니다. 그동안 놀라운 치유와 구마 기적 사화 등으로 인해 주님에 대한 소문이 널리 퍼지고, 공적 활동 무대가 점점 더 확장되어감에 따라 당시 기득권층인 유다 종교 지도자들과의 충돌을 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마르코와 루카 사가는 계속해서 갈릴래아에서 일어난 유다 종교 지도자와의 충돌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유다 종교 지도자들과의 충돌했던 문제는 주로 신성 모독적인 발언, 죄인들과 교제한 일, 그리고 단식 문제와 안식일 문제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묵상할 복음도 사람의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신 전능하신 분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반면에 바리사이들은 이런 모습을 비판하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I. 마태오를 부르기 전의 상황(죄를 용서하는 주님의 권한을 보여줌)

1.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진 예수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에 악한 생각을 품느냐?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마태 9,4-6ㄱ)

주님은 가다라인들의 지방에서 마귀를 구축하는 기적을 행하신 이후,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너 카파르나움으로 다시 오셨습니다. 그 때 사람들이 어떤 중풍 병자를 평상에 뉘어 그분께 데려왔습니다. 치유를 받게 하기 위해 이웃 사람들이 그 병자를 데리고 온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를 치유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문제의 주님의 말씀입니다.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에 빌미가 잡혀 또다시 율법학자 몇 사람이 속으로 ‘이자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주님은 율법학자들과 바라사이들이 마음 속으로 주님을 비난하고 또 단죄하고 있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신 전능하신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이렇게 그들을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에 악한 생각을 품느냐?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그들 중에 일부는 주님께서 병을 고칠 능력이 없으므로 주님께서 궁여지책으로 "네가 죄를 용서받았다."고 선언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죄를 용서 받은 것은 눈으로 결과를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주님이 적당하게 처신해서 위기를 넘기려고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에게 있어서 "죄의 용서를 선언하는 일"은 단순하게 "병을 고치는 일"보다 더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병을 낫게 하는 일은 말씀으로 선포해도 되지만, 우리 죄를 용서하려면 우리를 대신해서 수치를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어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모든 일을 기꺼이 행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 우리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주님은 죄인들을 위해 형벌을 받을 것이기 때문에 그들을 용서할 권한이 있었습니다. 주님은 사람들과 율법사, 그리고 바리사이들이 보는 앞에서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라고 말씀하신 대로 중풍병자를 통하여 그대로 보여 주셨습니다.

주님은 군중들이 보는 앞에서 중풍병자의 죄가 용서받았다고 선포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주님은 자신을 "사람의 아들"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 말은 다니엘서에서 "하느님 나라의 권한을 이양 받을 신적인 존재"를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다니 7,13-14). 당시에 유다인들은 다윗과 같은 정치적인 메시아를 고대했기 때문에, 주님은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 자신을 "사람의 아들"이라고 부르셨습니다(8,31 ; 9,12,31 ; 10,33 ; 14,21 등).

주님은 영적인 통찰력으로 중풍병자의 병이 죄로 인해 온 것임을 아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먼저 죄사함의 인총을 베풀어주셨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하심으로 당신 자신이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신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공개적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2. 군중들의 반응(마태 9,8, 마르 2,12(ㄴ), 루카 5,26)

이 일을 보고 군중은 두려워하며,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마태 9,8)

그 곳에 모인 사람들은 그 중풍병자의 상태가 인간적으로 볼 때에 전혀 희망이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께서 그 병자를 말씀 한마디로 고치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 일을 보고 심히 놀라 두려워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중풍병자를 고치시는 것을 보고 주님께 이러한 놀라운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들은 이 일을 보고 이 기적이 하느님께로부터 왔으며, 주님이 하느님과 특별한 관계를 가진 분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느님을 두려워하며 "우리가(전에는)이런 일을 전혀 보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이 오늘 목격한 일은 이전에는 본 일이 전혀 없는 기이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결국 그들은 이 일이 하느님에 의해 일어났다고 결론을 내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이 일로 인해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 함께 있던 율법학자들과 바라시아파 사람들은 이러한 명백한 증거를 보고도 주님의 신성을 믿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이 사건은 우리들에게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교훈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첫째로 이 사건은 주님이 세상에서 우리의 죄를 용서할 권한를 가진 하느님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님은 죄로 인해 걸린 중풍병자의 병을 고쳐 주심으로 주님이 사람들의 죄를 용서할 권한이 있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둘째로 이 사건은 복음이 우리의 육체뿐 아니라 영혼까지 온전하게 회복시켜 주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복음은 믿는 사람의 죄(영혼의 질병)를 용서받게 만들어 주며, 장차 그 육체도 부활하신 주님의 몸처럼 온전한 상태에 이르도록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셋째로 이 사건은 메시아 시대가 도래했으며, 주님이 바로 성경에 예언된 메시아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언자들은 이미 메시아께서 오시면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고 소경이 눈을 뜨며, 앉은뱅이와 절름발이가 뛰는 일이 일어난 것이라고 예고했습니다. 주님은 이러한 일을 친히 성취하심으로 메시아 시대가 도래했으며, 자신이 성경에 예언된 메시아라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상의 묵상은 오늘복음 이전에 기록된 성경내용입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성 마태오 사가 축일복음을 묵상하겠습니다.

우리는 앞에서 주님께서 중풍병자를 치유하신 사건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주님은 이 사건을 통해서 당신이 세상에서 사람들의 죄를 용서할 권한이 있는 전능하신 하느님임을 보여주셨습니다. 반면에 바리사이들은 주님이 신성모독적인 발언을 하고 있다고 주님을 단죄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묵상할 복음에는 주님께서 당시 죄인으로 간주되어 교제를 금한 세리(레위)를 제자로 부르신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교제를 금하고 있는 세리를 부르시고, 그들과 교제한 일은 당시 종교 지도자들에게 큰 저항과 비난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에게 의사가 환자와 함께 하듯이, 영적 의사인 당신 자신이 죄인과 함께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주장하셨습니다.

II. 죄인, 세리 마태오를 부르심

1. 세리 마태오를 부르심

예수님께서 그곳을 떠나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마태 9,9)

주님은 갈릴래아 호수로 가셔서 군중들에게 하느님 나라에 대해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이 가르침을 마친 후에 다시 카파르나움으로 돌아오셨습니다. 주님은 카파르나움을 지나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마태오복음은 이 사람의 이름을 마태오라고 소개하고 있는 반면, 마르코복음은 알패오의 아들 레위, 그리고 루카는 레위라 하는 세리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태오, 즉 레위가 소속하여 일하는 세관은 카파르나움에 있었습니다. 카파르나움은 헤로데스 필리피아가 통치하는 지역으로, 갈릴래아 북쪽에 있는 중요한 도시였습니다.

마태오(레위)는 성주(왕)인 헤로데 안타파스에게 소속된 세리였습니다. 그는 세관에 앉아서 카파르나움의 간선 도로(북쪽으로 지중해와 다마스쿠스 사이에 있는)를 통과하는 상품에 대해 헤로데를 대신해서 세금을 거두고 있었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세리들은 세금을 과도하게 징수했기 때문에 비교적 부유하게 살았습니다. 그들은 할 수 있는 한 많은 세금을 걷기 위해서 혹독하게 세금을 징수했습니다.

당시 유다인들은 헤로데의 고용인이 되어 많은 강제로 세금을 뜯어내는 세리들을 쓰레기같이 취급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당시 세리들은 백성들에게 크게 멸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유다인들은 가족 중에 누가 세리가 되면 그를 가정과 사회에서 추방해 버렸습니다. 또한 그들은 재판정에서 증인이 될 수도 없었고 회당에 나와 예배를 드릴 수도 없었습니다. 가족들은 여러가지 직업 중에서 세리를 가장 수치스럽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렇게 멸시받던 세리들 조차도 역시 사랑하셨습니다. 마태오의 부름은 당시 사회에서 가장 멸시받던 사람을 포용하신 중대한 사건이었습니다. 마태오는 카파르나움에서 주님이 행하시는 일들을 보면서 신뢰를 갖기 시작했습니다. 주님은 이제 그를 부를 때가 되었다는 것을 아시고, 그에게 "나를 따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마태오는 즉시 일어나 주님을 따랐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에는 강력한 권위가 있었으며, 마태오 또한 주님을 신뢰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자기 직업을 버리고 즉시 주님을 따를 수 있었습니다.

2. 바리사이들의 비난

예수님께서 집에서 식탁에 앉게 되셨는데, 마침 많은 세리와 죄인도 와서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하였다. 그것을 본 바리사이들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마태 9,10-11)

그 후에 마태오는 기쁨으로 주님과 그의 제자들을 모시고 만찬을 베풀었습니다. 이 만찬은 송별 만찬이었습니다. 마태오는 자기 직장 동료들에게 주님을 소개하고 그들도 주님을 따르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동료들에게 자신이 세리 직업을 떠나 주님의 제자가 된 것을 알리기를 원했습니다.

복음서에서 종종 "세리와 죄인들"이란 말은 등장하고 있습니다. 복음서에서 이 말은 당시 백성들에게 가장 멸시를 받고 있던 계층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만찬이 열리고 있을 때에 그 자리에는 몇몇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참석했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초대받지는 않았지만 주님의 행동을 감시하게 위해 참석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모르는 세리들을 매우 경멸했습니다. 세리들은 정결법을 따라 식사하지도 않았고, 또 하느님께 십일조도 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바리사이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오래 전에 시리아 왕 안디오커스 에피파네스 4세가 유다 나라를 심히 박해한 적이 있습니다. 그 왕은 성전에 돼지를 제물로 드리고, 안식일과 율법을 지키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때에 유다 백성들 중에는 생명을 걸고 율법을 준수하기로 헌신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 사람들이 바리사이들의 기원이었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율법을 배우고 지키는 일에 헌신하였고, 자신의 삶을 율법으로 철저하게 통제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율법생활로 무장된 바리사이들은 율법을 준수하지 않는 세리와 죄인들을 멸시했습니다. 그들은 세리나 죄인들과 교제하는 일을 금했으며, 그들과 함께 교제하면 자신들도 부정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앉아 식사하는 것을 보고 분노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주님의 제자들에게 불만을 터뜨렸습니다.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3. 주님의 대답(병든 이에게 내가 필요하다)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 9,12-13)

주님은 바리사이들이 비난하는 말을 들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육신을 고치는 의사들이 병자를 고치려면 환자들과 함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기 위해서는 죄인들과 함께 있어야 합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율법을 철저하게 준수했기에 그들은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죄를 회개하고 주님을 믿을 필요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세리와 죄인들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백성들에게 멸시를 받았으며, 스스로도 자신들을 죄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주님께 나아와서 회개하고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세리들을 바리사이보다 더 의롭다고 선언하셨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주님의 행동은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당시 종교 지도자들을 주님에 대해 크게 분노했습니다. 주님은 이 일로 인해 다시 당시 종교 지도자들과 충돌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바리사이들이 율법에 충실한 것을 인정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정말로 하느님 앞에 의인이라고 인정한 것은 아닙니다. 주님은 단지 그들이 세리들에 비해서 율법을 준수하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점을 인정해 주셨을 뿐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의인"을 부르려고 세상에 오시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죄인을 불러 구원하기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의인보다 죄인들과 함께 교제해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주님은 영적 의사로서 죄인들에게 깊은 동정심과 관심을 보이셨습니다. 주님은 의사가 환자들을 돌아보듯이 죄인들의 영혼을 돌아보셨습니다. 주님은 의사가 환자와 함께 있는 것을 비난할 수 없듯이, 영적 의사가 영적 환자인 죄인들과 함께 있는 일도 비난할 수 없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바리사이들에게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고 하셨습니다. 이 내용에서 보듯이 하느님은 바리사이들이 형식적으로 제사를 드리는 일보다, 그들이 자비로운 마음으로 죄인들을 돌아보기를 더 원하셨습니다.

교회가 가진 숭고한 사명 중의 하나는 죄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그들을 하느님의 나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존경받는 사람들에게 강론이나 설교하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교회는 마땅히 주님과 같이 자비와 사랑의 마음으로 죄 중에 빠진 사람들과 교회밖에 있는 사람들을 찾아가서 복음을 전하는 일을 계속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선한 사람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면, 주님의 지체인 교회도 역시 이러한 사명에 충실해야 합니다. 교회는 바리사이들과 같이 스스로 의롭게 생각하고 안주하지 말고, 최선을 다해 죄인들을 구원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교는 죄인을 구원하기 위한 종교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그들과 함께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마태오는 오늘 죄인의 처지에서 하느님의 사람으로 부름을 받는 축복을 받았으며, 그는 그런 하느님의 사랑에 보응하는 '마태오 복음서'를 이 세상에 내 놓았습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선택은 틀림이 없으십니다. 오늘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다가와 부르십니다. "나를 따라라!!!".............◆

[말씀봉사 : 두올 / 편집 : 까따꿈바 묵상팀]



 

<보나와 함께하는 묵상> : † 주님께서 이 미천한 죄인을 불러주시다니요! 
오늘복음은 죄로 인한 중병을 앓고 있는 중풍병자를 사랑과 자비로서 용서하시고, 그 죄를 용서해 주시는 장면에 이어, 또 다른 유형의 죄인 세리를 용서하시고, 죄를 사함과 동시에 친교를 맺는 장면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모습을 보고 있던 당시의 율법사회는 허파가 뒤집어질 정도로 분통이 터질 지경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이 기다라던 메시아인가 아닌가....에 대해 긴가민가 하던 그들은 예수님의 이런 모습을 보고 미움이 더 깊게 자라났으며, 그들의 마음에는 예수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의 골이 더욱 깊게 파고들어갑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에 대해 함부로 대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애꿎은 제자들에게만 닥달을 합니다.

예수님이 당시 사회에서 죄인 취급을 하는 마태오라고 하는 세리의 집에서 음식을 들고 계실 때의 일입니다. 마태오는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 기쁨을 세관에 있는 많은 친구들과 친지들과 함께 나누기 위해 큰 잔치를 열고 주님과 그의 제자들을 초대한 것입니다.

이같은 광경을 밖에서 바라보고 있었던 바리사이들은 주님의 제자들에게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라고 항의하는 장면입니다. 이런 그들의 말을 들은 주님은 참으로 놀라운 말씀을 들려 주셨습니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주님이 세상에 오신 뜻을 한마디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1. 죄인의 의사로 오신 예수님(마태 9,9-13)

1. 죄인, 세리 마태오를 부르신 예수님

오늘복음 내용에 보면 주님은 세관을 지나가실 때 그 곳에서 일하고 있는 마태오라고 하는 세리를 부르셨습니다. 인간이 하느님으로부터 받는 소명은 사람의 뜻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느님의 뜻에 있음을 우리는 오늘복음에서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언젠가 어느 율법학자가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고 말한 어느 율법학자의 제의를 거절하신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율법학자와 같이 신분과 경력과 지식이 좋은 그런 사람은 마다하고, 아무 말도 없이 세관에서 일하는 마태오를 향하여 "나를 따르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느님의 결정은 이렇게 우리 인간이 생각하는 기준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마태오가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위하여 일할 모든 일을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마태오가 주님의 제자로써 충성스럽게 사명을 이룰 것을 이미 다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마태오를 만나기 전에 이미 마태오가 세관에서 일하고 있음을 알고 계셨으며, 이 마태오가 장차 주님의 제자로써 위대한 일을 할 인물임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마태오도 역시 주님께서 보시는 재목임에 틀림이 없었습니다. 마태오는 세상의 부귀를 모두 버리고 주님의 "나를 따르라"는 단 한마디 말씀에 그 자리에서 일어나 주님을 따랐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즉, 마태오는 그의 심령의 깊은 곳에서 신적 소명을 느낀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 자리에서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는 주님의 제자가 된 것입니다.

2. 병든 자에게 필요한 의사

유다인들은 세리들과 동석하는 일조차 수치스럽게 여겼으며 더욱이 그들과 음식을 함께 나누는 일은 동의할 수 없는 일로 여겼습니다. 바리사이들이 세리들을 죄인이라고 단죄하고 있는 이상, 그들은 세리와의 교제를 기피해 온 것입니다. 이들의 이 같은 행동은 시편 1편에 나오는 "행복하여라! 악인들의 뜻에 따라 걷지 않고 죄인들의 길에 들지 않으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이라는 는 말씀과 잠언 23,6절에서 "눈길 사나운 자의 빵을 먹지 말고 그의 진수성찬을 탐내지 마라."는 말씀에 따른 올바른 행동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왜 너희 스승은 죄인들과 함께 먹느냐고 핀잔을 주게 된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들으신 예수님은 그들을 향하여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대답해 주셨습니다. 주님은 이 말씀에서 튼튼한 사람을 의인에 비유하시고 병든 자를 죄인에 비유하셨습니다. 그리고 의원은 바로 주님 자신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인간은 그의 영혼이 죽게 되었습니다. "보아라, 모든 목숨은 나의 것이다. 아버지의 목숨도 자식의 목숨도 나의 것이다. 죄지은 자만 죽는다."고 하셨습니다(에제 18,4)... 즉, 죄지은 자는 반드시 죽는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과 같이 죄를 지은 우리들은 전부 죽을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영혼이 죽을병에 걸려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의 이 병을 고쳐 주실 분은 예수님 뿐이십니다. 그래서 그 분은 의사로 이 세상에 오셔야 하셨습니다.

3.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

주님은 죄인을 부르러 오셨습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죄인이라고 한 대상은 누구를 지칭한 것입니까?

(1) 죄로 인하여 슬퍼하는 자들입니다. 자기 죄를 바라볼 때 그 죄로 인하여 마음에 슬퍼하는 자를 가리켜 죄인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죄를 알고나서 슬퍼했습니다(시편 38,17-18).

(2) 율법에서 자신의 죄를 발견하고 자기의 고통으로 탄식하는 자들입니다. 하느님께서 율법을 주신 이유는 의로움을 주시려는데 있지 않고 죄인임을 깨달아 하느님 앞에 회개하게 하며,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믿게 하시려는데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오로는 율법이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감시자(후견인)이라고 표현했습니다.(참조 : 갈라 3,25)

(3) 선(의로움)를 행할 수 없는 자신의 부족을 깨닫고 가슴을 치는 자가 죄인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그런 일을 하는 것은 더 이상 내가 아니라, 내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죄입니다. 사실 내 안에, 곧 내 육 안에 선이 자리 잡고 있지 않음을 나는 압니다. 나에게 원의가 있기는 하지만 그 좋은 것을 하지는 못합니다."(로마 7,17-18)

우리는 이상의 내용에서 우리들에게 안에 자리잡고 있는 죄라고 하는 영혼의 무서운 병을 발견해야 합니다. 이것을 발견하지 못하는 인생은 죄 속에서 살다가 죄로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생들에게 이 죄를 알려 주시는 하느님의 방법은 한가지밖에 없습니다. 그 한가지는 바로 성경입니다. 성경만이 우리의 죄를 가르쳐 주며 그 치료하시는 의사가 누구인가에 대하여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주님은 세관에 앉아 있었던 마태오를 부르시듯 지금도 우리와 같은 죄인들을 부르십니다. 우리는 과연 이같은 부르심을 듣고 주님을 따르는 생애를 살아가고 있는가 이 시간에 한번 깊이 생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II. 자비와 제사(마태 9,13)

하느님의 성품을 한마디로 잘 표현한 곳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우리는 알게 되었고 또 믿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는 성구입니다(1요한 4,16). 이 말씀에서 "하느님은 사랑이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이 아니시라면 하느님은 그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실 이유도 없으시며 예수님께서도 그토록 고난을 당하실 필요도 없으셨을 것입니다. 사랑은 율법을 초월하며 사랑은 외아들을 이 땅에 보내시기까지 하셨으며 사랑은 능히 주님으로 하여금 십자가를 지시게 까지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그 사랑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고 말씀했습니다(1요한 4,10). 이처럼 하느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온갖 사랑을 쏟으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이 또한 사랑이십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라고 하신 말씀의 뜻이 여기 있는 것입니다.

1. 자비(자선)보다 제사에 앞선 이스라엘

주님은 바리사이들을 향하여 호세 6,6절("정녕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신의다. 번제물이 아니라 하느님을 아는 예지다")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라고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 하느님을 섬기는 자는 어떤 예배 의식보다는 사랑이 중요하며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아는 일이 제사를 드리는 일보다 중요하다는 뜻으로 들려주신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사이들이나 율법학자들은 율법 의식에 얽매어 참 사랑을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하느님께 대한 사랑없이 제단에 제물을 드린 것입니다. 창세기 카인의 모습을 보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자기 죄에 대한 회개없이 제물을 드렸습니다. 또한 이웃에 대한 사랑없이 율법으로 단죄하고 판단했습니다.

하느님은 이같은 이스라엘의 제사를 원치 아니하시고 예언자들을 통하여 그들이 사랑을 가지고 행하고 하느님을 경외하는 지식을 가지라고 경종하셨던 것입니다. 하느님은 이런 그들의 행위에 대해 "나의 영은 너희의 초하룻날 행사들과 너희의 축제들을 싫어한다. 그것들은 나에게 짐이 되어 짊어지기에 나는 지쳤다.(이사 1,14)"고 탄식하셨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에 대해 하느님께서 이사야 1,14 같이 탄식하신 이유를 알아보겠습니다.

(1) 이스라엘은 하느님께 보이러 성전을 찾았습니다. "너희가 나의 얼굴을 보러 올 때 내 뜰을 짓밟으라고 누가 너희에게 시키더냐?"(이사 1,12)라는 말씀에서 보듯이, 그들은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 아니라, 다만 하느님께 드릴 제물을 가지고 하느님께 보이러 찾아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복음에서 보듯이 하느님은 이런 제물을 원치 아니하십니다. 하느님은 비록 수많은 제물을 하느님께 드린다 해도 사랑이 없는 제물은 받지 아니하시는 것입니다.

(2) 이스라엘은 제사를 드리면서도 악한 짓을 행했습니다. "더 이상 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마라. 분향 연기도 나에게는 역겹다. 초하룻날과 안식일과 축제 소집 불의에 찬 축제 모임을 나는 견딜 수가 없다."(이사 1,13)...는 말씀에서 보듯이, 아무리 좋은 것으로 분향해도, 초하루와 안식일과 축제의 마감날에 모여서 아무리 열심히 제사를 지내도, 사랑이 없으면 그 분향 연기가 구역질 나는 것이 되고, 하느님이 견디시지 못할 무거운 짐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3) 하느님은 예나 지금이나 자비와 사랑이 없는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드리는 미사는 구약 제사의 연장으로 볼 수 있습니다. 제사란 죄를 용서 받으려는 예배 행위인 것입니다. 자신의 죄를 용서 받으려는 제사를 하느님께 드리려면 자기도 이웃에게 자비와 사랑을 먼저 베풀어 그들의 죄를 용서해 주는 사랑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2. 하느님께서 보여주신 죄인에 대한 자비와 사랑

하느님은 죄인들에 대한 자비와 사랑으로 당신의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으로 확실한 증거로 보여 주신 것입니다.

(1) 하느님은 죄인들이 그 죄로 인하여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십니다. 오히려 죄에서 회개하여 원래로 돌아오는 삶을 기뻐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에제 18,23).

(2) 주님은 세상에 오신 목적에 대하여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으로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요한 3,17). 우리는 하느님께 드리는 제사(미사)가 우리의 영적인 생활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미사)란 사랑이 기초가 되고 사랑이 열매가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미사)에 대하여 "선행과 나눔을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이러한 것들이 하느님 마음에 드는 제물입니다."고 하셨습니다(히브 13,16).

그리고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는 영적으로 참되게 하느님께 예배 드려야 한다고 하셨습니다(요한 4,24). 여기서 영적이란 말은 율법적인 의식이 아니라, 하느님을 거룩하게 모시는 참다운 마음으로 받으실 예배를 말합니다. 그리고 '참되게'란 그 마음의 중심에서 나오는 진실한 경배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몸으로 드리는 산 제사가 있습니다. 우리의 몸을 하느님께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는 것입니다. 이 제사는 우리가 이 세대를 본 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하느님의 뜻을 분별하는 생활을 의미합니다(로마 12,1-2).

이상의 내용에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의 진실을 원하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진실은 사랑에서만이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의 예배가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예배가 되려면 하느님을 사랑하는 뜨거운 마음의 영과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우리의 변화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복음의 묵상 마무리를 하겠습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죄인들아) 나를 따라 오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 앞에서 죄인이지 않는가? 누가 감히 ‘나는 죄 없다’라고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나는 용서받을 수 없는 존재라고 스스로 자포자기 한다면 더 큰 죄인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모두 하느님 앞에서 죄인이요, 동시에 하느님 자비를 믿고 바라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무한하신 자비를 통해서 다시 태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를 따라라!’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듣고 응답하는 것은 참으로 크신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그것은 곧 나의 회개를 의미하며, 새로운 삶에로의 전환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아가 그것은 지금까지 삶의 형태와는 전혀 다른 나의 안전과 나의 보장된 미래를 위한 삶이 아니라, 너를 위한 희생의 길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듣고 따른다는 것은 단절된 자기세계를 넘어서서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는 행위요, 너의 존재를 향한 나의 개방인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세리와 죄인들을 내치시지 않으시고 당신의 세계로 불러주시고 함께 해 주신 예수님께 감사하며, 죄인인 우리 자신도 희망과 용기를 가지고 하느님의 부르심에 기꺼이 응답하여 다시 태어나는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아멘)...........◆

[말씀편집 : 까따꿈바 묵상팀]


<미가와 함께하는 묵상> : † 예수님은 당신을 부르십니다. 
오늘 성 마태오 복음사가 축일을 묵상하면서 떠오르는 질문이 '참된 자유자는 누구인가?'입니다.

톨스토이의 "돌과 두 여자"란 작품에 이러한 애기가 있습니다. 두 여인이 한 노파를 찼아왔습니다. 그중 한 여인은 죄가 많다고 눈물을 흘리는가 하면 다른 여인은 아무런 죄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노파는 이들에게 다음과 같은 일을 시켰습니다. 죄가 많다는 여인에게는 "크고 무거운 돌을 하나 가져오라"고 했으며, 죄가 없다는 여인에게는 "작은 돌을 한 움큼 주워 오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돌을 가져왔을 때 노파는 "이제 다시 그 돌을 제자리에 갔다 놓으라"고 했습니다. 큰 돌을 가져온 여인은 정확하게 돌을 제 자리에 갖다 놓고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작은 돌을 주워온 여인은 그 돌을 어디서 주었는지 알 수가 없어서 서성거리다가 되돌아 왔습니다. 그때 노파는 말씀하기를 "죄가 있다고 한 자는 자기 양심의 위치를 알고 있으니 자유로운 자"라고 했습니다.

루카복음 18,9-14입니다. : 예수님께서는 또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자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 한 사람은 바리사이였고 다른 사람은 세리였다. 바리사이는 꼿꼿이 서서 혼잣말로 이렇게 기도하였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그러나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였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이 말씀에서 보듯이, 세리의 기도가 바리사이의 기도보다 낫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은 사람을 외모나 신분으로 판단하지 않습니다(1사무 16,7). 주님은 우리의 마음 속에 의인(義=예수)을 향하는 중심을 보십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그들 마음 속에는 시기와 질투로 가득차 있으면서 겉은 선행과 금식과 십일조로 위장한 외식적 행동을 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오늘복음 말씀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예수님 제자들에게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라고 질책성 발언을 합니다. 이 말을 들으신 예수님은 그들에게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우리가 묵상할 주제는 '죄인을 부르러 오신 주님"입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오늘 축일 복음을 함께 묵상하겠습니다.

첫째 : 인생은 다 죄인입니다.

모든 인생은 죄로 인해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있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국가의 법으로 부터 인신적 구속을 받지 않으면 죄인이 아닌 것으로 생각합니다. 혹은 도덕이나 윤리적으로 살면 선한 사람(의인)인줄로 착각을 합니다. 이런 생각들은 솔로이즘 또는 이기주의적 발상에서 나오는 결과물입니다. 그렇습니다. 무인도에서 혼자 살고 있으면 앞의 말도 맞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사회적 관계의 동물입니다. 환경적 동물입니다. 즉 공동체적 삶, 이웃과의 관계론으로 죄를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마태 5,22)고 했으며, 탐심이 악의 뿌리(1티모 6,10)라고 했으며,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와 간음한 것(마태 5,28)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바오로는 "의로운 이가 없다. 하나도 없다."(로마 3,10)라고 했으며, 다윗은 "저의 죄악을 제가 알고 있으며 저의 잘못이 늘 제 앞에 있습니다"(시편 51,5)고 했으며, 요한은 "만일 우리가 죄 없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자신을 속이는 것이고 우리 안에 진리가 없는 것입니다...만일 우리가 죄를 짓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그분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이고 우리 안에 그분의 말씀이 없는 것입니다."(1요한 1,8-10)고 했습니다.

죄의 결과로 죽음(사망)이 왔습니다. 하느님은 첫사람 아담과 계약을 맺었습니다(창세 2,16-17) 그러나 아담은 그 계약을 파괴하고 말았습니다.(창세 3,6-7) 그래서 결국에는 하느님의 진노와 저주가 내려졌습니다(창세 3,16-19) 죄를 지은 인간에게 나타난 결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① 땅이 저주를 받았습니다.
하느님은 인간을 만물의 영장으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 사명을 망각하고 포기해 버렸습니다. 인간의 범죄로 인하여 모든 피조세계가 저주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고생하지 않고는 땅이 소출을 내지 못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즉, 에덴의 축복된 생활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②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돋아 났습니다.
에덴에서 버림받은 인간은 돋아난 가시덤불과 엉겅퀴에 찔리고 피흘림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고통의 인생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가시는 인생을 찌르고, 엉겅퀴는 우리를 얽어매어 세상 근심으로 하느님을 등지게 하여 에덴을 바라보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③ 땀흘리는 고통을 당해야 합니다.
이마에 땀이 흐리지 않고는 식물을 먹을 수 없게 했습니다. 학생은 땀흘려 공부해야 하고, 사업하는 자는 땀흘려 수고해야 하며, 정치인은 땀흘려 경쟁해야 만이 살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상과 같이 아담이 죄를 지은 순간 즉시 죽지 않고 죽음에 이르는 병이 들어 고통 중에서 하느님을 멀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결국은 다음과 같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주 하느님께서는 그를 에덴 동산에서 내치시어, 그가 생겨 나온 흙을 일구게 하셨다. 이렇게 사람을 내쫓으신 다음, 에덴 동산 동쪽에 커룹들과 번쩍이는 불 칼을 세워, 생명 나무에 이르는 길을 지키게 하셨다"(창세 3,23-24)

만약 죄를 지은 아담이 에덴에 계속 거처하면서 생명나무의 과일을 먹는다 완전한 멸망의 고통은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아담을 에덴에서 좇아내는 배려(다시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를 하신 것입니다. 에덴동산의 축출은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자비심인 것입니다. 그리고는 (세상적) 마지막으로 그 에덴을 천사들로 하여금 커룹들과 불 칼로 지키게 하셨습니다.

따라서 죄를 지은 아담이 에덴으로 복귀하는데는 칼에 찔리는 피흘림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 누구의 속량의 죽음이 없이는 에덴 진입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 대속의 죽음을 주님은 갈바리아에서 이루신 것입니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르 10,45), "예수님께서는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을 거두셨다. 그때에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갈래로 찢어졌다."(마르 15,37-38), "그분께서는 그 휘장을 관통하는 새롭고도 살아 있는 길을 우리에게 열어 주셨습니다. 곧 당신의 몸을 통하여 그리해 주셨습니다."(히브 10,20), "죄가 주는 품삯은 죽음이지만, 하느님의 은사는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받는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입니다."(로마 6,23)고 했습니다.

둘째 : 죄인이 주님을 만나면 그분의 마음을 배웁니다.

주님의 마음은 온유합니다. 여기 온유(파라우스)란 말은

① 환자의 열이 내려진 상태입니다.
환자가 열이 나서 정신을 잃고 있을 때 환자에게 해열제를 써서 정상 체온을 유지하게 할 때가 파라우스한 상태입니다. 마치 세속의 감정으로 천방지축으로 날뛰던 자들이 말씀으로 세속적인 열기가 바로 잡혀졌을 때 온유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② 이마에 흐르는 땀이 식혀 졌을 때입니다.
농부가 뜨거운 뙤약볕 아래서 구슬 같은 땀을 흘리다가 갑자기 불어오는 구름이 태양을 가리워 흐르는 땀이 식고 바람으로 열기가 잡혀졌을 때가 온유한 상태입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구름 기둥 아래서 안식을 찾음과 같습니다.

③ 교육과 훈련으로 길들여진 상태입니다.
조련사에 의해 야생 짐승이 훈련을 받아 길이 들어져 주인의 뜻을 헤아릴 줄 아는 것을 말합니다. 집에 기르는 가축은 주인의 뜻을 잘 아나 야생 짐승이 주인의 뜻을 알리가 없습니다. 사탄의 세력 아래서 야수와 같은 죄인이 하느님의 말씀으로 길이 잘 드려져 말씀에 순종하는 모습이 온유한 상태입니다.

주님의 마음은 겸손합니다.

① 주님의 탄생을 봅시다. 하늘의 옥좌에서 가장 작은 나라 유다에, 가장 작은 동네 베들레헴에, 가장 추한 마구간에 오셨던 것입니다(마태 2,1 ; 루카 2,7).
② 주님의 행적을 봅시다. 주님은 스승이시면서도 그 제자들에게 친히 수건을 허리에 두르시고 발을 씻기시면서 섬기는 본보기를 보여 주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왕으로서 천하가 주님의 것이나 여우도 굴이 있고 나는 새도 둥지가 있으나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 없이 일하셨던 것입니다(루카 9,58).
③ 주님의 죽음을 봅시다. 최후에 죽으실 때는 좌우편 강도 사이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대속의 죽음을 죽으셨으며, 자신이 누울 굴(무덤)도 없어서 남의 무덤에 누우셨던 것입니다(마태 27,38 ; 마르 15,46)

순종하는 마음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입니다. 온유와 겸손을 하나로 묶은 단어가 순종입니다. 바오로는 주님에 대하여 이렇게 증거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필리 2,5-8)고 했습니다.

셋째 : 죄인이 주님을 만나면 쉼과 참 안식을 얻습니다.

먼저 죄인인 우리가 벗어야 할 짐과 져야할 멍에가 있습니다.
① 율법의 짐을 벗어야 합니다.
예수를 알기 이전에 졌던 율법의 짐을 벗어버리기 전에는 우리에게 참 자유가 없습니다. 율법이 우리에게 안겨 준 것들은 들으면 들을수록 부담이 되고, 알면 알수록 무거운 짐이 되었으며, 행하면 행할 수록 힘든 고통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당시 지식충인 율법주의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와 같은 제자들에게 나타내 보이셨던 것입니다(마태 11,25)

② 복음의 멍에를 매어야 합니다.
복음이 우리에게 안겨준 멍에는 사랑의 멍에입니다. 이 멍에는 가벼운 것이며, 질수록 기쁨이 넘치며, 맬수록 평안과 안식이 넘치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이루신 것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나를 부르시고(성소), 일을 맡기시고(사명) 뜻을 이루신 것입니다(성취). 우리는 주님의 도구로서 순종할 따름입니다. 이것이 사명자가 걸어가는 십자가의 길입니다.

이와같이 멍에를 매고 예수를 만나면 인생이 변합니다. "멸망할 자들에게는 십자가에 관한 말씀이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을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힘입니다."(1코린 1,18) 십자가의 원리란 복음을 위하여 죽으면 살고, 잃으면 얻고, 나누어 주면은 풍성히 누리게 하십니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루카 9,24)고 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증거하는 그 예를 성경에서 찾아보면(오늘축일 복음인 마태 9,9-는 제외, 위 참조),
① 사마리아 여인을 봅시다. "그 여자는 물동이를 버려두고 고을로 가서 사람들에게 말하였다"(요한 4,28)라고 했습니다. 예수를 만나면 세속적인 가치관이 완전히 변합니다.
② 세관장 자캐오를 봅시다.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루카 9,8)고 했습니다. 탐욕의 종이 되어 가난한 부자였던 그가 마음의 풍요함을 누리는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③ 바오로의 변화를 봅시다. "그러나 나에게 이롭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 있으려는 것입니다. 율법에서 오는 나의 의로움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로움, 곧 믿음을 바탕으로 하느님에게서 오는 의로움을 지니고 있으려는 것입니다."(필리 3,7-9)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
오늘 성 마태오 사도 축일에 예수님은 마태오를 부르셨듯이, 지금 당신을 부르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지고 있는 고생하고 무거운 짐들, 즉 자녀의 문제, 아내와 남편의 문제, 생활고의 문제, 사업의 문제로 오는 모든 짐을 예수님께 맡기고 그냥 따르기만을 원하십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면 당신의 이전에 강퍅한 모습이 온유와 겸손함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죄인에서 참 자유인이 될 것입니다. 아멘............◆


[말씀편집 : 까따꿈바 묵상팀]

이 포스트를..

덧글 쓰기 엮인글 쓰기

키친에서 등록한 글입니다.
키친에서 수정해주세요.
키친에서 등록한 글 보기

확인 취소
닫기

이 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
키친에서 등록한 글은 키친에서 삭제해주세요.
키친에서 등록한 글 보기

확인 취소
닫기

이 포스트를 삭제하시겠습니까?
작성하신 글은 아래의 서비스로 보내신 글입니다.
삭제시 보낸 곳에서도 자동 삭제됩니다.

글 보내기 정보

    확인 취소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