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주석강해/대선지서

이사야 제 2장

은바리라이프 2008. 7. 20. 23:18
이사야 제 2장

http://www.kidok.info/BIBLE/B_RHV/cgi/bibleftxt.php?VR=0&CI=5890&CV=99&FR=H

 

 

장차 올 왕국에 대한 약속

 

2:1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받은바 유다예루살렘에 관한 말씀이라

아사야가 받은 바...말씀이라 - 문자적으로는 '이사야가 본(* , 하자) 말씀(* , 하다바르)이라'이다. 이런 표현은 매우 드물다. 보다 더 일반적인 표현은 '주의 말씀이 ...에게'이다(렘 14:1;겔 13:1;호 1:1;욜 1:1;욘 1:1;미 1:1;습 1:1 등). 아모스만이 이와 비슷한 표현법을 쓰고 있다(암 1:1). '다바르'는 '말씀'이란 뜻 이외에도 '사건', '사물'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이것은 역사를 하나님의 말씀의 실현으로 파악하고 있는 히브리인들에게는 자연스러운 의미이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곧 사건이며, 사건은 곧 그의 말씀인 것이다.

2:2 말일여호와의 전이 모든 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 들 것이라

말일에 - 문자적으로는 '날들의 끝에'(* , 베아하리트 하야밈)이다. 이 말은 본서에서 단 한번 나온다. 그것은 창 49:1;민 24:14;신 4:30;31:29 등에서 종말론적 의미로 사용되었다. 70인역(LXX)은 이 말을 '이 모든 날 마지막에' (* , 에프 에스카톤 톤 헤메론, 히 1:2)로 번역하였다. 율법 학자들은 그날을 메시야의 날로, 라이트푸트(Lightfoot)는 옛 세대 의 끝으로 보았으며, 오늘날 많은 주경 학자들은 이를 그리스도의 초림에서 재림까지에 이르는 신약 시대로 이해한다.

 

여호와의 전의 산이...뛰어나리니 - '여호와의 전의 산'은 '시온'을 가리킨다(시 2:6;3:4;24:3;렘 31:23;욜 2:1;3:17 등). 고래(古來)로 산들은 그 높이와 위엄에서 사람들의 찬탄을 받아왔으며 신들이 거주하는 거룩한 공간으로 숭배되어 왔다(예컨대, 희랍의 올림푸스 산 등). 그러나 실제로 시온은 전혀 높지 않은 자그마한 언덕에 불과하였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바산의 산들이 이 낮고 하찮은 하나님의 산을 내려다본다고 말하였던 것이다(시 68:16). 그러나 종말에는 모든 것이 극적으로 변화된다. 그날에 시온은 가장 높아질 것이요, 그 영광 앞에서 다른 모든 산들은 평지나 다름 없어질 것이다(슥 14:10).

 

만방이 그리로 모여들 것이라 - '모여든다'(* , 나하루)는 말은 문자적으로는 '흐른다'(stream)는 뜻이다. 그 옛날 범죄의 절정을 상징하였던 바벧탑에서 각처로 분산되었던 인류는(창 11:1-9) 이제 하나님의 구원의 날에 다시 시온 산으로 물밀듯이 몰려들 것이다. 인류의 범죄와 구원의 역사는 '바벧탑에서 시온 산으로'(from the Babel to the Zion)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다. 시온 산이 '하나님이 세운 구원의 높이'를 상징한다면, 바벧탑은 '인간이 세운 죄악의 높이'를 상징한다.

 

2:3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 도로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나올 것임이니라 - 백성들이 그처럼 시온에 오고자 한 것은 거기에만 율법, 즉 여호와의 말씀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율법은 '참된 종교' (Alexander) 혹은 '시내 산의 토라와 대조적인 의미에서 시온의 토라라 할 수 있는 복

음'(Delitzsch)으로 해석할 수 있다. 본문의 강조점은 '시온에서부터'에 놓는다. 이는 구원의 길이 시온밖에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요 4:22).


2:4 그가 열방 사이에 판단하시며 많은 백성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 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지 아니하리라

그가 열방 사이에 판단하시며...판결하시리니 - 앞에서 율법의 수여자 혹은 인생의 행할 길을 가르쳐 주시는 참된 교사로 그려졌던 여호와가 본문에서는 민족들 간의 분쟁을 조정하며 판단하시는 재판관으로 묘사되었다. 이러한 판결과 중재가 가능한 것은

열방들이 율법의 말씀으로써 삶의 지침을 삼고 그 뜻에 기꺼이 복종하려 하기 때문이다. '판단하다'(* , 솨파트)는 '다스리다', '왕노릇하다'(Calvin)나 '징벌하다' (Cocceius)는 뜻보다는 '중재하다'(Alexander)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만들 것이며 -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될 때 전쟁도 더 이상 필요없게 된다. 그날에 사람들은 무장을 해제하고 파괴적인 목적을 위해 제작하였던 칼과 창을 생산적인 농기구로 바꾸게 될 것이다(슥 9:10). '보습들' (* , 이팀)은 당을 갈아서 흙덩이를 일으키는 도구이며, '낫들'(* , 마즈메로트)은 쓸데없는 가지를 잘라내는 전지용(剪枝用) 가위이다.

 

주의 날에 있을 교만한 자의 심판

 

2:5 야곱 족속아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에 행하자

야곱 족속아 오라 - 문자적으로는 '야곱의 집이여, 오라'이다. '야곱의 집'은 하나님의 선택된 가족으로서의 이스라엘을 지칭하는 말이다(8:17;10:20;14:1;29:22 등). 앞절에 비추어 볼 때 본문에는 교묘한 대조가 숨어 있다. 즉 율법에 무지한 이방인들조차도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오는데, 하나님의 백성된 이스라엘은 오히려 뒤로만 물러간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이바인을 들어 이스라엘에게 고상한 시기심을 불러일으키려는 선교적 동기가 내포되어 있는 듯하다(롬 11:14).

 

우리가 여호와의 빛에 행하자 - '여호와의 빛'은 '여호와를 아는 지식'(Delitzsch) 혹은 '여호와께서 계시해주신 진리의 말씀인 성경'(Alexander)을 가리킨다. 이스라엘은 타민족이 갖지 못한 이 빛을 특권적으로 소유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달리

빛을 찾아 헤맬 필요도 없으며 단지 그 가운데 행하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암흑 가운데서 방황하였던 것이다. 때문에 선지자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버리지 않을 수 없었다는 슬픈 소식을 전해야만 되었다.

 

2:6 주께서 주의 백성 야곱 족속을 버리셨음은 그들에게 동방 풍속이 가득하며 그들이 블레셋 사람 같이 술객이 되며 이방인으로 더불어 손을 잡아 언약하였음이라

동방 풍속이 가득하며 - 원문대로 읽으면 '가득 채워졌다(* , 말레우), 동방으로부터(* , 미케뎀)'이다. 여기서 '동방'은 지리적으로 팔레스틴 동쪽 특히 앗수르, 아람, 바벧론 등을 가리킨다. 고대 근동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던 이들 나라로부터 수입되어 온 이방 풍속들로 온 이스라엘이 가득 채워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방인으로 더불어...언약하였음이라 - 본문은 여러 가지로 해석된다. (1) '이방인의 자녀들에게서 만족을 취하였다'(Luzzatto). (2) '이방인들과 결혼함으로 인해 연합되었다'(LXX, Targum). (3) '이방인들과 상업적 계약을 체결하였다'(Cheyne). 심지어

제롬(Jerom)은 여기서 남색(男色)과 같은 성적(性的)범죄를 발견하기도 한다. 문맥과 관련하여 이 말을 포괄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즉 정치적, 상업적, 문화적, 종교적 측면에서 이스라엘과 이방들과의 교류가 확대되어 결과적으로 성별된 여호와의 백성과 거룩하지 못한 태생의 이방인들 간의 구별이 폐지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본문은 앞절과 관련하여 대조적이다. 즉 말일에 시온으로부터 여오화의 빛이 이방으로 퍼져나갈 것임에 반해, 오히려 이방의 악한 풍습들이 이스라엘로 몰려들어온 것이다.


2:7 그 땅에는 금이 가득하고 보화가 무한하며 그 땅에는 마필이 가득하고 병거가 무수하며

그 땅에는 은금이 가득하고...마필(馬匹)이 가득하고 - 이방과의 자유로운 교섭의 결과, 이스라엘 땅에 경제적 부(富)를 상징하는 은금과 군사적 힘을 상징하는 마필 역시 가득하게 되었다. 이런 것들은 일찍이 모세에 의해 강력하게 공고된 것들이었다(신

17:16, 17). 그러나 자기 의지의 수단으로서 경제적, 군사적 힘을 의지하기 시작한 것은 솔로몬 왕으로부터 비롯되었으며(왕상 10:26-11:8), 웃시야 왕 때에는 이러한 경향이 가속화되었다(대하 26:6-15). 여기에도 앞 구절(4절)과 비교해 볼 때 대조가 암시

되어 있다. 즉, 말일에 전쟁 무기가 평화의 도구로 바뀌어지는 것과 이와는 반대로 마필로 힘을 과시하는 이스라엘의 모습을 비교해보라.

 

2:8 그 땅에는 우상도 가득하므로 그들이 자기 손으로 짓고 자기 손가락으로 만든 것을 공경하여

우상도 가득하므로 - '가득하다'(* , 말라)는 동사가 계속해서 문두(文頭)에 나온다. 본서에서 우상과 관련한 구절들로는 40:18-20;41:6, 7, 29;44:9-20;45:16-20; 46:1, 2, 5-7 등이 있다. 종말의 풍경과 이스라엘의 현재 사이에 존재하는 대조가 여기까지 이어진다. 이방인들 사이에는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충만하지만 정작 여호와의 백성이라고 하는 이스라엘에는 우상만이 가득하다.

 

2:9 천한 자도 절하며 귀한 자도 굴복하오니 그들을 용서하지 마옵소서

천한 자도 절하며 귀한 자도 굴복하오니 - 이러한 우상 숭배는 천한 자와 귀한 자, 즉 사회 각 계층에 편만히 퍼져 있었다. '천한 자'로 번역된 '아담'(* )과 '귀한 자'로 번역된 '이쉬'(* )는 구약에서 인간에 대한 대표적 표현으로 자주 쓰인다.

전자는 주로 부정적인 의미에서, 후자는 주로 긍정적인 의미에서 사용된다(5:15).

 

2:10 너희는 바위 틈에 들어가며 진토에 숨어 여호와의 위엄과 그 광대하심의 영광을 피하라

너희는 바위 틈에 들어가며 진토에 숨어 - 이 후렴구의 변형이 19절과 21절에 나온다. 여호와의 진노의 날에 사람들은 바위 구멍 속에 몸을 피하거나(삿 6:2;삼상 13:6) 얼굴을 땅속에 묻으려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날에 임할 재앙이 너무도 크고 두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혹자는 이 구절이 동방에서 계절풍을 피하거나 사막을 통과하는 지독한 열풍을 피하는 관례적인 습관에서 착안된 표현이라고 추정한다(Leupold).


2:11 그날에 눈이 높은 자가 아지며 교만한 자가 굴복되고 여호와께서 홀로 높임을 받으시리라

눈이 높은 자가...굴복되고 - '눈이 높은'(* , 에네 가브후트)은 마음의 내적 교만이 나타내는 외적 몸짓을 가리키는 것이다(시 101:5, Calvin). 본문에서 '높음'을 나타내는 두 단어 ('가브후트'와 '룸')와 '낮음'을 나타내는 두 단어 ('솨펠'과 '솨흐')가 평행한다. 여기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은 극명하다. 우리가 여호와를 높이면 그가 우리를 높이시려니와, 우리가 여호와를 낮추면 그도 우리를 낮추신다 (57:15).

 

2:12 대저 만군의 여호와의 한 이 모든 교만자와 거만자와 자고한 자에게 임하여 그들로 아지게 하고

만군의 여호와의 한 날 - 문자적으로는 '만군의 여호와에게 있는 한 날'이다. 그날은 (1) 만군으 여호와의 날이다. 이 칭호는 그가 전우주적인 심판을 시행할 수 있는 무한한 능력을 가지신 분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Leupold). 또한 (2) 여호와의 생각

속에 영원한 비밀로 존재하다가 지정된 때가 이르렀을 때 역사의 과정을 통해 나타나게 되는 날이다(Delitzsch). (3) 반드시 하루일 필요는 없다. 주께는 천 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 년 같다(시 90:4;벧후 3:8, Lange). 마지막으로 (4) 두려운 심판의 날이다. 이것은 본절에서부터 16절까지 계속되는 전치사 '알'(* , against)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그날은 이미 많은 선지자들로부터 예고된 최후의 날이다(13:6;욜 1:15;2:1, 11, 31;암 5:18, 20;습 1:7, 14;슥 14:1 등).

 

모든 교만자와 거만자와 자고(自高)한 자에게 - 심판의 날에 이르러 파멸의 운명에 처해질 대상들이 먼저 열거되었다. 이를 '사람'(everyone)의 의미로만 한정시킬 필요는 없다. 오히려 보다 더 포괄적인 개념인 '모든 것'(everything)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낫다(Vitringa, Gesenius, Alexander). '높음'을 나타내는 세 개의 형용사-'교만한'(* , 게에), '거만한'(* , 람), '자고한'(* , 니사)-는 동의어이다. 어떤 이는 이것을 뒤에 나오는 자연들과 결부시켜 '장엄하고 인상적인 모든 것들에 대하여 그리고 높이 들린 모든 것들에 대하여'로 해석하기도 하고(Leupold), 하나님과 같아지려는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을 드러내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창 3:5, J. Watts).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을 대적하여 스스로 높아진 모든 것을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무난하다(Lange).


2:13-16 또 레바논의 높고높은 모든 백향목과 바산의 모든 상수리나무와 /모든 높은 산과 모든 솟아오른 작은 산과 /모든 높은 망대와 견고한 성벽과 /다시스의 모든 와 모든 아름다운 조각물에 임하리니

 

여호와의 심판은 땅에 있는 모든 것들을 일시에 넘어뜨리는, 지진을 동반한 무서운 폭풍으로 형상화된다. 그 폭풍은 북에서 발원하여 남쪽의 바다로 향한다(Kaiser, Leupold). 이 방향은 이스라엘의 적들이 침입해 들어오는 방향과 대체적으로 일치한다.

 

레바논의...백향목과 바산의...상수리나무 - 레바논은 '흰 산'이란 뜻인데, 그 산의 꼴개기가 1년 중 거의 절반이 눈으로 덮여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팔레스틴과 시리아 접경에 위치한다. 그곳의 자랑인 백향목은 성경에서 종종 위엄과 능력의 상

징으로 취해졌으며(삿 9:15;왕상 4:33;왕하 14:9;시 92:12;104:16), 세속적인 교만의 상징으로도 사용되었다(시 29:5, 6;렘 22:6;슥 11:1, 2). 바산은 요르단 동쪽에 자리하고 길르앗 북쪽에 위치하며 그 남쪽으로는 야르묵 강이 흐르는 고원 지대이다. 지금은 엔-누크라(en-Nuqra)라고 불리며 가축을 키우기 좋은 목축지가 있다. 황소와 상수리나무로 유명하다(시 22:12;겔 27:5, 6;39:18;암 4:1). 주석가들은 이것들이 유다의 높은 사람들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Jerome, Vitringa, Gesenius). 이 나무들은 앗수르가 이스라엘을 침략해 들어올 때 군사용 목적으로 벌목되어 완전히 황폐화되고 말았다(37:24).

 
2:17 에 자고한 자는 굴복되며 교만한 자는 아지고 여호와께서 홀로 높임을 받으실 것이요

그 날에 자고한 자는 굴복되며 - 약간 변형된 11절의 반복이다. '눈이 높은 사람' (* , 에네 가브후트 아담)이 '스스로 높은 사람'(* , 가브후트 하아담)으로 바뀌었을 뿐, 그 의미는 11절과 동일하다. 이런 반복은 이전의 상세한 시각적 묘사로부터 다시 선지자가 말하고자 하는 일반적인 진술로 환원하기 위한 것이거나 혹은 시의 운율을 맞추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2:18 우상들은 온전히 없어질 것이며

우상들은 온전히 없어질 것이며 - 선지자의 시선은 여호와께서 가장 혐오하시는 대상인 우상으로 옮긴다. 심판의 날에 우상들은 본래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 , 엘릴림)처럼, 완전한 무(naught)로 화할 것이다(슥 13:2). 랑게(Lange)는 13-16절이 7절에 관계되듯이, 본절 이하는 8절에 관계된다고 주장한다.


2:19 사람들이 암혈토굴로 들어가서 여호와께서 일어나사 땅을 진동시키시는 그의 위엄과 그 광대하심의 영광을 피할 것이라

사람들이 암혈(巖穴)과 토굴로 들어가서 - 10절의 경고가 여기서 직접적인 예언으로 바뀐다. 심판의 날에 우상들은 그 숭배자들을 지켜주지 못한다. 따라서 우상들이 무로 화하듯이, 그 숭배자들은 여호와의 진노를 피해 암혈과 토굴에 몸을 숨기지 않으

면 안 되는 것이다.

 

2:20 사람이 숭배하려고 만들었던 그 우상과 우상을 그 두더쥐와 박쥐에게 던지고

두더지와 박쥐에게 던지고 - 70인역(LXX)은 이 구절에 착안하여 그들이 동물 숭배에 빠졌다는 의미로 이해하였다(Luzzatto, Malbim). 그러나 두더지와 박쥐는 우상 숭배자들이 몸을 피할 '암혈'과 '토굴'과 연관하여 취해진 것이다. 즉, 그들은 두더지와

박쥐들이 서식하고 있던 어둡고 음습한 동굴에 금과 은의 형상들을 던지는 것이다. 아마 이러한 행동은 '역겨움에서'(Leupold), 혹은 '심판자의 눈을 피하기 위하여' (Delitzsch) 취해질 것이다.

 

2:21 암혈과 험악한 바위틈에 들어가서 여호와께서 일어나사 땅을 진동시키시는 그의 위엄과 그 광대하심의 영광을 피하리라

본문은 우상에 대하여 언급할 때마다 뒤따라 나오는 후렴구이다(10, 19절). 이것은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에게 임할 수치와 파멸이 어느 정도로 극심할 것인가를 강조하기 위하여 후렴구로 반복되는 것 같다.

 

2:22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

이 구절은 많은 사람들에 의해 후기의 삽입으로 간주되었으며(Diestel, Cheyne), 어떤 곳에서는 아예 빠져 있다(LXX). 그러나 바르게 이해한다면 본절은 앞에서 논의된 (5절 이하) 내용의 결론이며, 동시에 3;1 이하에서 새로 이어질 내용의 도입부로 작용

한다.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 인생의 유한함이 창 2:7을 연상시키는 표현으로 기술되었다. 인간의 생명은 호흡이 붙어 있을 때만 가능하다. 시편 기자는 그 허망함을 이렇게 노래했다: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圖謀)가 소멸하리로다"(시 146:4). 이와 관련된 구절들로는 욥 7:7;34:14, 15;시 78:39;90:36-6;104:29 등이 있다.

 

 

타락된 예루살렘(이사야 1:21-31)

Ⅰ. 유다와 예루살렘의 무서운 타락이 슬프게 탄식되고 있다. 다음을 살펴보자.

1. 그 궁성은 하나님께와 그리고 사람들 중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의 유익에 얼마나 신실된 성읍이었으며, 그 민족과 그 공적 유익에 얼마나 신실되엇었는가? "공평이 거기에 충만하였다." 즉 공의가 거기에 놓여진 재판의 보좌 곧 "다윗 집의 보좌" 위에서(시 122:5) 잘 집행되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그 행실에 있어서 정직했고, 불의한 일을 행하기를 싫어했다. "의리가 그 가운데 거하였었다." 항상 그들의 궁과, 그들의 모든 거처에 임하였었다. 즉 이따금씩 소용있을 때에만 의가 불리운게 아니라 항상 거기에 자리잡고 있었다. 거룩한 성이나 궁성들, 신앙이 고백된 장소나 정치가 행해지는 장소도 신앙이 그 안에 거하지 않는다면, 그 의무에 신실하지 못한다.

2. 그런 성읍이 지금은 어떻게 되었는가? 그 아름답고 정숙한 신부가 이제 파락하여 창기가 되었다. 의(리)가 더 이상 예루살렘에 거하지 않았다. 살인자들은 처벌되지 않은 채,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살았다. 아니 방백들 자신도 매우 잔인하고, 포악했으므로, 살인자보다 낫지 않았다. 무죄한 사람들은 이러한 재판장의 법정의 피해보다는 산적이나 강도의 무리가 주는 피해를 보다 쉽게 막아 낼 수 있었다. 조상들 때에는 덕과 결백으로 유명했던 어떤 가문이나 백성이, 사악해지면 그들의 죄악은 그만큼 더 가중한 것이 된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그러한 자들이 타락하면 모든 사람들 중 가장 악한 자들이 되고 만다. "원래는 가장 선했던 자가 타락했을 때에는 가장 악하게 된다" (눅 11:26; 전 3:16; 렘 22:15-17 참조).

(1) 예루살렘의 부패함은 비유로써 예증되어 있다. "네 은은 찌끼가 되었도다" (22절)고 했다. 조상들의 성품과는 반대되는 성품을 지니고 있는 치리자들의 이러한 타락은, 화폐 가치가 떨어지면 그 은이 찌꺼기 되듯이, 그 나라에 큰 수치와 피해를 준다. 의로운 방백과 의로운 성읍은 곳간에 있는 은과 같으나, 불의한 방백과 성읍은 쓰레기 더미에 있는 은과 같다. "어찌 그리 금이 빛을 잃었는고!" (애 4:1) "너의 포도주에는 물이 섞였도다." 그리하여 그것은 맛없고 시게 되었다.

어떤 사람은 이 모든 것을 문자적으로 해석한다. 즉 그들이 판 포도주에는 물이 섞여 반은 물이었다. 그들이 지불한 돈도 가짜였고, 따라서 그들은 거래하는 모든 사람을 속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상징적으로 해석되는 게 좋으리라. 즉 공의는 그들의 방백들에 의해 악용되었고, 믿음과 하나님의 말씀은 제사장들에 의해 궤변으로 속여졌고, 그들이 원하는 대로 이용되었다. 은찌끼는 은처럼 빛날 수도 있고, 물이 섞인 포도주는 포도주 빛깔을 보유할 수도 있으나, 그 어느 것도 가치는 없다. 이처럼 그들은 덕과 공의의 외양에 겉치례를 지녔지만 그 참된 지각은 어느 것도 갖고 있지 않았다.

(2) 몇 가지 사례로써 예증되어 있다(23절).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충성하도록 그리고 그의 율법에 복종하도록 지켜야 할 너의 방백들이 스스로 패역하여 하나님과 그의 율법을 무시하였도다. 도둑들을 규제해야 할 자들(교만하고 부유한 압제자들, 가장 나쁜 도적들, 그리고 그보다 더 낫지 않는, 채권자들을 고의적으로 사기하는 자들)이 스스로 도적과 짝하며, 그들을 묵인해 주고, 그들처럼 행한다. 그리고 그들은 방백이고 그 손에 권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더욱 안전하고 성공적으로 그런 일을 행한다. 그들은 그들이 보호해 준 도적들과 불법적으로 얻은 것을 나누어 가지며" (시 50:18), "그들과 함께 제비를 뽑는다" (잠 1:13, 14).

[1] 그들의 지위에서 얻는 이득이 그들이 목표하는 모든 것이며, 옳든 그르든 그들은 그 지위를 최대한으로 이용하려 한다. 그들은 선물을 좋아하며, 댓가를 바란다. 그들은 봉급 즉 그들의 정책상의 수입과 부수입에 마음을 두며, 그것을 탐내며, 결코 만족을 찾을 줄 모른다. 아니, 그들은 은밀한 사례가 생기는 일이면 아무리 율법과 공의를 거스리는 일이라 할지라도 할 것이다. 뇌물과 사례금은 언제고 그들의 눈을 멀게 할 것이고, 그들로 하여금 판단을 그르치게 할 것이다. 이러한 것들을 그들이 사랑하며 열심히 추구한다(호 4:18).

[2] 그들의 직책상의 의무는 그들의 관심사가 아니다. 그들은 해를 당한 자들을 보호하고 그들에게 온 고발된 사건은 조사해 보아야 했다. 그밖의 무슨 목적으로 그들이 등용되었겠는가? 그러나 "그들은 고아를 위하여 신원치 아니하며," 즉 고아를 보호하는 데 관심을 기울이지 아니하며, "과부의 송사를 수리치 아니한다." 왜냐하면, 가난한 과부들은 자기들을 위해 길을 마련해 주고 그 송사를 제기해 줄 뇌물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압제 당하는 자들의 후원자가 되어야 할 자들이 오히려 가장 큰 압제자가 될 때, 그들은 크게 책임을 추궁당할 것이다.

Ⅱ. 이러한 비탄거리들을 바로잡으려는 결의(24절)가 있다. "그러므로 주 만군의 여호와 전능자 - 말한 것을 이룰 능력을 지닌, 그리고 그의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만군을 지휘하며, 그의 이스라엘을 위해 그 능력을 사용하는 - 그가 말씀하시되, 슬프다. 내가 장차 내 대적에게 보응하여 내 마음을 편케 하리라." 다음을 관찰하자.

1. 사악한 백성, 특히 잔인하고 포악한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원수요, 그의 대적이며, 또 그렇게 간주되고 있으며 앞으로 그렇게 다루어질 것이다. 거룩한 자손들이 타락한다면, 자기 집안의 원수가 된다.

2. 그들은 하늘의 아버지께 하나의 짐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마음을 편케 하시겠다는 내용 속에 암시되어 있다. 어떤 일도 견딜 수 있는, 아니 모든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이스라엘의 전능자께서 사람들의 죄악으로 괴롭힘" 을 당하는 것을 괴로워하신다(43:24; 암 2:13).

3. 하나님은 이처럼 더 이상 인내해 줄 수 없는 자들에게 복수함으로써, 그 짐을 덜 방법과 시기를 찾아 내실 것이다. 하나님은 여기에서 그렇게 될 것을 예상하시고 개가를 부르는 자와 같이 말하고 계신다. "슬프다. 내가 내 마음을 편케 하리라." 하나님은 무거워서 "신음하고 있는" 이 세상을 편케 할 것이다(롬 8:21, 22). 그 이름에 붙어있는 비난으로부터 그 이름을 편케 할 것이다. 그는 "그의 원수에게 복수하심" 으로써, 그의 대적에게서 편케 될 것이다. 그는 그들을 "그의 입에서 토하여 내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에게서 편케 될 것이다(계 3:16). 그는 그의 "원수갚는 날이 그의 마음에" 있다는 사실을 즐겁게 말씀하고 있다(63:4). 만일 하나님을 고백하는 백성이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답게(4절) 그의 형상을 따르지 않는다면, 그들은 이스라엘의 전능자로서의 그의 손의 무거움(심판)을 맛보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 그들을 위해 일하곤 했던 하나님의 능력이 그들을 대적하기 위해 무장될 것이다. 하나님은 다음 두 가지 방법으로 이러한 슬픔에서 그 자신을 편케 할 것이다.

(1) 하나님의 교회를 개혁하고, 그 타락한 재판관들 대신에 선한 재판관들을 일으킴으로써 하시리라. 교회에는 아무리 많은 찌기가 있을지라도, 버림을 당하지 않고 다시 깨끗게 될 것이다(25절). "내가 너의 찌끼를 온전히 청결하여 버릴 것이라. 내가 잘못된 것을 고치리라. 악습과 불경스러움이 억압당하고 수치를 당케 될 것이며, 압제자들은 해임되어 악을 행하는 그 권세를 박탈당할 것이다." 사태가 아무리 나쁠지라도, 하나님은 그것을 바로잡고 완전한 개혁을 일으키실 수 있다. 하나님은 그가 시작하신 것을 마치실 것이다. 혼잡물을 다 제하여 버릴 것이다.

다음을 주목하라.

[1] 사람의 개혁은 하나님 자신이 하시는 역사이다. 그러므로 언제고 사람의 개혁이 행해진다면, 그것을 이루어 내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내가 나의 손을 네게 돌리리라. 나는 내가 처음에 심었던 신앙을 회복시키기 위해, 그렇게 행하리라." 하나님은 그의 손을 돌리심으로써, 그것을 쉽게 행하실 수 있다. 그는 그것을 충분히 행하신다. 드러난 여호와의 팔 앞에서 어떤 도전이 설 수 있겠는가?

[2] 하나님은 선한 치리자들과 사역자들을 세워 주시는 축복을 통해 하실 것이다(26절). "내가 너의 사사들을, 행악자들에게 대하여는 법을 수행하도록 하기 위해 처음과 같이 회복할 것이며, 공공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너의 모사들을 본래와 같이 회복할 것이라." 새로 세워질 그들은 쫓겨났던 바로 그 사람들이거나, 그들과 같은 성품을 지닌 다른 사람일 것이다.

[3] 그는 사람들 가운데 공평과 의를 회복시킴으로써(27절), 또 사람들의 마음속에 공공의 원칙을 심어 주고, 그 원칙에 의해 그들이 생명을 다스림으로써, 그것을 행하신다. 사람들은 외적인 제재에 의해 많은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심판하는 영" 으로서의 "그의 영" 의 감화력을 통해서 그것을 효과적으로 수행하신다(4:4; 28:6; 시 85:10, 11 참조).

[4] 한 백성의 개혁은 그들의 구원과 개종이 될 것이다. 죄는 가장 나쁜 포로, 가장 나쁜 노예이다. 그리고 위대하고 영원한 구원은 "이스라엘의 모든 죄악에서 구속되는 것" 이며(시 130:8), 그 복된 구속자는 야곱에게서 경건치 않은 것을 돌이키시며(롬 11:26),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는" (마 1:21) 자이시다. 여호와의 구속함을 받은 모든 자들은 개종자들이 될 것이며, 그들의 개종은 곧 그들의 구원이다. "그 귀정한 자는 또는(난외에 있는 대로) 돌아오는 자는 의롭게 구원되리라." 하나님은 공평과 의로 구원을 위해 우리를 준비시키심으로써 우리를 위해 구원을 역사하신다.

[5] 한 백성들의 덕행이 소생되는 것은 그들의 영예가 회복되는 것이다. "그러한 후에야 네가 의의 성읍이라. 신실한 고을이라 칭함이 되리라." 즉

첫째, "네가 그렇게 될 것이다." 장관들의 개심은 그 성읍과 나라의 개혁으로 향하는 좋은 한 걸음이 된다.

둘째, 너는 그러하다는 칭찬을 받게 될 것이다. 어떤 도시에게 있어서 의의 성읍이라는 칭함을 받으며 신실하던 성읍이 창기가 되었을때(21절), 잃어버린 옛날의 영예를 회복한다는 것보다 더 큰 칭송은 있을 수 없다.

(2) 개심하기를 싫어하는 자들은, 그 신실한 성읍에 함정이나 치욕으로써 남아있지 않게 하기 위해 잘라버림으로써 하나님 자신이 평안을 얻으리라.

[1] 여기에서 경고되는 있는 것은 완전 멸망이다. 그들은 멸망하고 패망할 것이다. 단지 벌을 받고 징계당하기만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의 근절이 시온의 구속에 필요할 것이다.

[2] 그것은 전반적인 멸망으로서, 거기에는 패역한 자와 죄인이 포함될 것이다. 즉 일체의 신앙을 완전히 던져버린 공공연한 침략자들, 그리고 신앙 고백이라는 구실 아래 사악한 생활을 살아가는 위선자들 - 그들이 모두 함께 패망할 것이다. 왜냐하면, 신앙을 반박하는 자들이나 신앙을 가식으로 내세우는 자들 모두 하나님께 똑같이 가증한 자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자기들이 여호와께 연합해 있었으나, 이제는 "여호와를 버린 자도," 도관 속에 있는 물은 그 수원에서 끊어질 때 곧 없어지는 것처럼, "멸망할 것이다."

[3] 그것은 불가피한 멸망이다. 피할 길이 없다.

첫째, 그들의 우상, 즉 "그들이 기뻐하던 상수리나무와 그들이 택한 동산은" 그들을 도울 수 없을 것이다. 그 신상들과 쓰레기 신들은 그들을 도울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숲과 나무 아래서 그 신들을 숭배했고, 그것들을 좋아하여 집착했으며, 그것들을 위해 참되신 하나님을 버렸고, 우상 숭배가 공적으로 지지되지 않았던 때에도 자기 자신들의 동산에서 비밀히 그것을 숭배했다. "이것이 패역한 자와 죄인들의 행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제 회개하는 모습이 아니라 실망하는 모습으로 그것을 부끄러워하게 될 것이다" (29절). 그들은 그들의 우상으로 인하여 수치를 당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지금까지 그 우상에게 온갖 아첨을 다했지만, 결국에는 이득이 없음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상들 자신도 잡혀갈 것이다(46:1, 2). 피조물을 의뢰하는 자들은 스스로 수치르 마련해 놓는 것에 불과하다. "너희는 상수리나무와 동산을 좋아했다. 그러나 너희 자신은"

1. "시들고 말라버려, 그 아름다운 모습을 모두 잃어버린 잎사귀 없는 상수리나무같이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저주한 무화과나무처럼, 열매없는 나무는 당연해 잎사귀도 없게 된다.

2. "물없는 동산 같으리라. 즉 그 위에 비가 내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발로 물대기도(신 11:10) 하지 않았으며, 샘이 없는(아 4:15) 동산이니, 결과적으로 메마르며, 그 동산의 모든 과실은 썩었도다." 우상을 의지하거나 "혈육으로 그 권력을 삼는" (렘 17:5, 6) 자들은 이렇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들은 결코 하나님이 광야나 물없는 땅 같지는 않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렘 2:31).

둘째, 그들은 그들 자신을 도울 수 없게 될 것이다(31절). "강한자가 곧 부러져 산산조각이 날 뿐만 아니라 쉽게 불붙는 삼오라기 같을 것이다." 그리고 견고케 되어 그 자신을 안전케 해 주기를 바라던 그의 공적(난외에는 이렇게 풀이하고 있다)은 그 자신의 삼오라기에 대한 불티 같아서, 그에게 불을 놓을 것이며 그와 그의 공적이 함께 불탈 것이다. 그 자신의 계획이 그의 멸망의 원인이 될 것이다. 그 자신의 죄는 하나님의 진노에 불을 붙여, 지옥 밑바닥까지 태울 것이며, 그것을 끌 사람이 없을 것이다." 죄인이 그 자신을 삼오라기와 나무 그루터기같이 만들고 하나님은 그에게 친히 사르는 불같이 되실 때, 무엇이 그 죄인의 완전 멸망을 막을 수 있겠는가? 이제 이 모든 것은

1. 아하스의 통치로 인한 가증스러운 타락 후, 히스기야 시대에 이루어졌던 복된 개혁 사업에 적용될 수 있다. 그때에는 선한 사람들이 발탁되었고, 악인의 얼굴이 수치로 가득 찼었다.

2. 그들이 바벨론의 포로에서 돌아온 사건에 적용될 수 있다. 그 사건은 그들을 우상 숭배에서 완전히 치료했던 것이다.

3. 복음의 교회와 성령 강림에 적용될 수 있다. 이것에 의해 신약 교회는 새 예루살렘 곧 의의 성읍이 될 수 있었다.

4. 그리스도의 재림에 적용될 수 있다. 그 때에 그리스도는 그의 타작마당 곧 그들 전답을 정하게 하사. 알곡을 모아 곡간에 들이고, 죽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이다.


이스라엘에 대한 책망(이사야 2:6-9)

이방인들이 부름받는 일은 유대인들의 거부를 동반했다. 그것은 유대인들의 몰락이요, "저희의 실패이니, 그것이 이방인의 부요함이 되었다." 그리고 "저희를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었다(롬 11:12-15). 이 로마서의 귀절들이 본문과 관련되어 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러한 사건 속에서도 하나님은 의로우시다는 것을 말하려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본문은 일차적으로는 이 예언자가 살고 있던 그 세대에게 회개와 각성을 주려는 의도에서 나온 말씀들이다. 예언자들의 말씀은 그 후에 올 사건들의 모형으로서 주어지기도 하지만 흔히는 그 내용이 자비이든 심판이든 간에 그 당시의 사건들을 말하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제시되어 있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Ⅰ. 이스라엘의 멸망이 나와 있다. 이것은 두 단어, 즉 본 문단의 처음과 마지막에 제시되어 있는 두 단어 속에 나타나 있다. 그것은 두 가지의 무서운 말로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1. 그들의 경우는 처참하다. 매우 처참하다. 그러므로 "주께서 주의 백성을 버리셨다" 고 했다(6절). 비참이란 하나님께서 버리신 백성의 상태를 말하며,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이었던 자들을 버리셨다면 그 진노는 매우 컸을 것임에 틀림없다. 유대 교회가 그리스도를 거부한 후에 형편이란 실로 이러했다. Migremus hinc - 즉 그리로 나아가자.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 (마 23:38). 어떤 쓰라린 재앙이든 이처럼 유대인들에게 극심하게 임했을 때는, 여호와께서 당신의 도움과 구조를 그들에게서 거두어 들이시사 그들을 버리셨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들이 원수들의 손에 떨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먼저 하나님을 떠나기 전에는 결코 그들을 떠나지 아니하신다.

2. 그들의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아주 철저히 절망적이었다. "그러하오니 그들을 용서하지 마옵소서" 라고 했다(9절). 이 예언적인 기도는 그들이 용서받지 못하리라는 것을 말해 주는 경고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은 그것을 이렇게 풀이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즉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을 용서치 않으리이다."

이 말씀은 특정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사함 받았다), 민족이라는 집합체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돌이킬 수 없는 파멸이 임했으므로, 전체적으로 패망되었고 그들의 교회가 완전히 철거되어야 했고, 다시는 이러한 집단으로 형성되거나 그들의 옛 특허장이 회복될 수가 없었던 것이다.

Ⅱ. 이러한 파멸을 당해야 하는 이스라엘의 공과와 그 근거가 되고 있는 이유가 나와 있다. 일반적으로 말하여, 그들에게 멸망을 초래하는 것은 바로 죄이다. 하나님을 격동시켜 그의 백성을 버리게 만드는 것은 이것 곧 죄이며 죄 외에는 없다.

이 예언자가 열거하고 있는 죄목들은 - 나중에 그리스도를 못박고 그의 추종자들을 박해하는 그들의 극한적인 죄악을 말해 주는 것이라기 보다는 - 그 당시에 그들 중에 만연되어 있던 죄악들을 말한다. 이사야는 이것을 그 때에 그가 가르치던 자들이 회개하도록 하기 위해 이것을 언급한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세대의 죄악들이 결국에는 무서운 결과를 쌓아 올리는 구실을 하기 때문이다. 또한 저들이 바벨론에 유배됨으로 인하여 저들은 부분적이고 잠정적인 거부를 당했다. 그 유배는 모형이었고, 이러한 것들이 바로 여기에 언급된 죄악들이 그들에게 초래한 결과이다. 그들의 죄악이란 바로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친절하고 은혜로운 모든 계획을 아주 직접적으로 거역한 것이었다.

1. 하나님은 그들을 당신 자신의 백성으로서 따로 세우셨다. 그들을 모든 다른 백성들과 구별하셨고, 그들보다 존귀케 하셨다(민 23:9). 그러나 그들은 "동방 풍속이 가득" 하였다. 그들은 외국인들을 "귀화시켰다." 그러나 "개종시키는지는" 않았다. 외국인들로 그들 가운데 정착하도록 격려했고, 그들과 섞여 살게 했다(호 7:8). 그들의 나라는 아랍인들과 갈대아인, 모압인들과 암몬인, 그리고 다른 동방 족속들이 거주했으며, 유대인들은 그들과 함께 그 열방들의 유행과 관습을 허용했고, 또 "이방인으로 더불어 손을 잡아 언약하여졌다." 즉 그들을 좋아했고, 자기들의 나라보다는 그들의 나라를 더 좋아했으며, 그들을 따를수록, 더 점잖고 세련된 사람이 된다고 생각했다. 이처럼 그들은 자기들의 면류관과 계약을 더럽혔다. 하나님께 낯선 자들을 좋아하는 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될 위험에 빠진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가 사귀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도를 곧 배우기 때문이다.

2. 하나님은 그들에게 당신의 말씀을 주셨다. 그래서 그들은 성경과 선견자들에게 뿐만 아니라 판단을 내리는 제사장에게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물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것들을 무시했고, 블레셋 사람들처럼 술객이 되었으며, 점성술을 도입했다. 그리고 별이나 구름, 새의 비상이나 짐승의 내장 또는 다른 미술적인 미신에 의해 은밀한 것을 들추어 내거나 장차의 일을 예언하는 척하는 자들에게 귀를 기울였다. 블레셋 사람들은 복술로 유명했다(삼상 6:2). 참된 신성을 무시하는 자들이 거짓된 점술에 속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이처럼 거짓되고 허탄한 것을 위해 하나님과 자기들이 지니고 있는 긍휼을 버리는 자들은 분명히 하나님께 버림받게 될 것이다.

3. 하나님은 그들이 당신을 신뢰할 수 있도록 격려해 주셨고, 당신이 그들의 부와 힘이 되시겠다고 확신시켜 주셨다. 그러나 그들은 그의 능력과 약속을 불신했기 때문에, 금을 그들의 소망으로 만들었고, 마필과 병거를 가득히 두고 거기에다 자기들의 안전을 걸었다(7절). 하나님은 왕들에게까지도 자기들을 위해 말의 수효를 증가시키고 "은금을 크게 더하는" 것은 분명히 금하셨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들로 하여금 당신 자신만을 의지하도록 하려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처럼 은금을 가득 가지며 거대한 마필과 병거를 갖기 않는다면, 하나님이 주시는 그들의 권세는 그 이웃들에게 상대도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격노케 하는 것은 은과 금, 말과 병거를 갖는 것이 아니라,

(1) 그것을 탐욕스럽게 원하는 그 욕망이다. 따라서 그들의 욕망을 채우기에 흡족한 보화나 병거에는 그 한계나 제한이 없다. 이 세상의 것들을 충분히 가지고서도 그것을 모르는 자들은, 하나님(홀로 전능하신 분)에게서도 결코 만족을 못누리신다.

(2) 우리가 금은 마병이 없이는 안전하고 편하고 행복하게 될 수 없고, 오직 그런 것들이 있어야만 그렇게 될 수 있는 것처럼 그것을 의지하는 마음이 죄악이다.

4. 하나님 자신은 그들의 하나님, 그들의 숭배의 단독 대상이었고, 그가 친히 그들의 예배 의식을 제정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그와 그의 법령을 경시했다(8절). 그들의 땅은 우상이 가득했고 성읍마다 각각 신들을 가지고 있었다(렘 11:13). 그리고 그 땅이 아름다을수록, 거기에 맞게 그들은 자기들의 우상을 아름답게 만들었다(호 10:1). 하나의 하나님으로서는 너무 적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둘로서는 너무 많음을 발견할 것이나. 수 백 개의 하나님으로도 충족치 않을 것이다.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은 우상의 수효를 증가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이처럼 주책스러웠고, 이처럼 비참하게 흘려 있었으므로, 그들은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을 공경했다." 마치 하나의 피조물에 불과할 뿐만 아니라 "자기들이" 만든 피조물이요 자기들의 생각으로 고안해 내서 "자기들의 손가락으로 만든" 그런 것이라야 그들에게 신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은과 금을 풍성히 주셨는데, 그 은과 금으로 그들이 우상을 만들었다는 사실은 그들의 우상 숭배를 더욱 무거운 죄로 만들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은덕으로 "여수룬이 살지게 되더니" 마침내는 (하나님을) "발로 찼도다" (신 32:15; 호 2:8 참조).

5. 하나님은 그들을 번영시키셨고, 그들에게 영예를 부여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 자신을 스스로 비열하게 몰락시키고 업신여겼다(9절). "천한 자도 자기의 우상에게," 즉 조금이라도 이성(理性)의 흔적을 갖고 있는 가장 천한 것보다도 더 못한 것에게 "굴복했다" 고 했다. 죄는 아무리 초라한 사람들이나 낮은 지위의 사람들에게도 그들의 인격을 저하시키는 일이 된다. 비천한 자가 그의 윗사람에게 절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가 "나무 토막 앞에 굴복하는 것" 은 매우 합당치 못한 일이다(44:19). 무식하고 바보스런 사람들만이 이런 짓을 한 것이 아니었다 "귀한 자" 도 자신의 위엄을 잊고 스스로를 굴복시켜 우상을 숭배했고, 자기 자신보다도 낫지 못한 사람들을 신으로 섬겼으며, 그 자신보다 더 비천한 돌을 신성시했다. 우상 숭배자들은 "음부에 이르기까지 스스로 낮춘다" 고 했다(57:9). 고귀한 신분의 사람들도 참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자기들을 비천하게 만드는 일이라 생각하여 하나님께 굴복하려 하지 않으면서, 하찮은 우상에게는 절하기 위해 자신들을 굽히다니, 이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인가! 어떤 사람은, 이 구절은 하나님의 심판이 올 때 그 심판에 의해서 천한 자들도 낮아지고 고귀한 자들도 굴복되리라는 경고라고 보고 있다.


우상 숭배자의 파멸(이사야 2:10-22)

예언자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시면, 그들의 땅이 얼마나 황폐케 될 것인가를 여기에서 계속 보여 주고 있다. 이것은 구체적으로 말해서 처음에는 갈대아 사람들에 의해서, 그리고 후에는 로마 사람들에 의해서 그들의 멸망한 사실을 언급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또는 그것은, 비열하고 교만한 죄인들을 깨우치고 그들이 하나님보다 더욱 기뻐하고 의지한 착상을 제거해 버리기 위해 하나님께서 택하시는 방법을 말해 주는 일반적인 뜻으로 볼 수도 있다. 우리는 조만간에 하나님께서 어떤 방도를 모색하시리라는 것을 여기에서 들을 수 있다.

Ⅰ. 즉 그는 방심 상태에 있는 죄인들을 놀라게 하고 일깨우기 위해 방도를 모색하실 것이다. 그 죄인들은 스스로에게 화평을 약속하여 하나님과 그의 심판에 도전하는 자들이다(10절). "너희는 바위틈에 들어가라. 하나님이 매우 무서운 심판으로 너희를 칠 것이요, 그것을 알면 큰 놀라움을 당할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바위틈에 들어가며, 진토에 숨어 여호와의 위엄을 피해야 한다. 그 때에 너희는 온갖 용기를 잃고, 나뭇잎만 흔들려도 떨 것이다. 너희는 기절할 것이며(눅 21:26)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할 것이다(잠 28:1)." 이와 같은 요지가 19절에도 있다. "사람들이 암혈과 토굴" 로, 곧 가장 어둡고 가장 깊은 곳으로 "들어간 것이다" 고 했다. 그들은 "산더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할" 것이며, 자기들을 가리지 말라고 말하기보다는 차라리 자기들을 박멸시켜 달라고 할 것이다(호 10:8). 로마 사람들에 의해 예루살렘이 멸망될 때(눅 23:30), 그리고 성도들을 핍박하는 이교도의 권세가 멸망될 때(계 6:16)도 특히 그러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은 "여호와를 두려워하고 그의 존귀한 영광을 두려워하니라." 그때는 여호와께서 자기들에게 삼키는 분이 되시며, 자기들은 그 앞의 지프라기들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일어나서 땅을 진동시키시고, 그 땅에서 악인들을 뽑아버리시리라" (욥 38:13). 또한 그들이 의지하고 있던 세상적인 온갖 지주들과 함을 훼파하실 것이다. 다음 사실들을 명심하자.

1. "하나님께서는 두려운 위엄이 있느니라" (욥 37:22). 그리고 그 영광은 조만간에 우리 모두를 그 앞에서 도망하도록 만들 것이다.

2.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 그에게로 달아나지 않는 자들은, 그를 두려워하여 그에게서 떠나 거짓된 은신처로 달아나게 될 것이다.

3. 하나님의 진노에 쫓기우는 자들이 그것을 피하려고 생각하고 그것으로부터 그들 자신을 숨기거나 피하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4. 세상의 것들은 흔들릴 것들이다. 그것들은 격동을 당하여 사멸을 향해 급히 달려간다.

5. 땅이 진동한다는 일은 땅 위의 것들을 전적으로 애착하고 있던 자들에게는 두려운 일이며, 또 앞으로도 두려운 일이 될 것이다.

6. 땅 자체가 진동할 때면, 토굴 속으로 피하려는 생각은 헛된 것이 될 것이다. 그 때에는 하나님과 위에 있는 거룩한 것 이외에는 피난처가 될 만한 것이 없을 것이다.

Ⅱ. 하나님은 교만한 죄인들을 굴복시키고 낮추기 위해 방도를 모색하실 것이다. 그 죄인들은 남에게 크게 보이며, 스스로도 높게 생각하며 자기들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업신여기던 자들이다. "눈이 높은 자가 낮아지리라" 고 했다(11절). 높은 것을 노리는 눈, 마음의 교만이 나타나 있는 얼굴은 수치와 절망으로 떨구어질 것이다. 그리고 "교만한 자가 굴복되리니," 그들의 의기가 꺾여질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풀이 죽어서, 그들이 자랑하던 것들을 이제는 부끄러워할 것이다. 이것은 반복되어 있다(17절). "자고한 자는 굴복되리라." 교만은 어떠한 방법으로든 쓰러지고 말 것이다. 사람들의 교만은 어떻게 해서든 꺾일 것이다. 즉 그 교만의 화를 깨닫게 하고 교만한 자들을 겸손으로 옷입히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이든, 또는 그들이 자랑스럽게 여기며 스스로 굴복하던 그 모든 것들을 그들에게서 빼앗아 버리는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꺾여질 것이다. 우리 구주께서도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리라" 는 교훈을 종종 하셨다. 그런 자는 참된 회개를 통해서 스스로를 낮추게 되거나. 하나님께서 그를 낮추시고 그에게 경멸을 퍼붓게 될 것이다. 이제 여기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을 읽을 수 있다.

1. 이것은 왜 불가피한 사건인가? "여호와께서 홀로 높임을 받으셔야" 하기 때문이다. 여호와만 높임을 받을 것이기 때문에, 교만한 자들은 비천해져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자. 교만한 자를 낮추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의 영예를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은 그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증명하며 욥이 감히 하나님과 겨룰 수 있다고 하던 그 주장을 반증하신다(욥 40:11-14). "교만한 자를 발견하여 낮추라. 그리하면 내가 너를 인정하리라."

그것은 또한 하나님의 공의의 영예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 교만한 자는 하나님과 경쟁하나, 하나님은 그 자신의 영광을 지극히 위하시므로 사람들이 하나님께만 돌려야 할 영광을 스스로 취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돌리도록 내버려두시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또한 하나님께 대항한다. 그들이 그를 반대하므로 그도 그들을 반대하신다. 그러나 그는 "열방 중에서 높임을 받을 것이다" (시 46:10). 그리고 하나님이 홀로 높임을 받으실 그 날이 오고 있으며, 그 때에 그는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실" 것이다(고전 15:24).

2. 이 사건은 어떻게 행해질 것인가? 그들을 낮추시는 심판에 의해서 되리라. 즉 그 심판은 사람들에게 굴욕을 줄 것이며, 그들을 쓰러뜨릴 것이다(12절). "만군의 여호와의 날," 곧 그의 진노와 심판의 날이 "모든 교만자에게 임할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의 무례함을 비웃고 계신다. 왜냐하면 그는 그들이 깨닫기도 전에 그의 날이 그들에게 임할 것을 이미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시 37:13). 이 여호와의 날이 본문에는 레바논의 "높고 높은 모든 백향목에" 임한다고 했다. 제롬(Jerome)은 백향목을 하나님을 찬양하는(시 148:9), "여호와가 심으신" (사 41:19) "그의 나무" (시 104:16)라고 했다는 사실을 주목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하나님의 진노가 그 백향나무 위에 임하고 있다. 제롬에 의하면 이 사실은 각계각층 사람들 중 일부는 구원을 받을 것이며, 또 일부는 멸망하리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그것은 여호와의 소리의 힘이 "백향목을 꺾는" 일례노 나와있으며(시 29:5), 여기에서는 여호와의 날이 "백향목에," 가장 곧고 당당한 레바논의 백향목에 - 상수리나무에, 가장 강하고 탄탄한 바산의 상수리나무에 - 자연적인 고지와 요새에, 골짜기 위에 솟아올라 하늘을 찌를 것처럼 보이는 "모든 높은 산과 모든 솟아오른 작은 산" 에(14절) - 인공적인 요새, 곧 "모든 높은 망대와 견고한 성벽" 에(15절) 임한다고 일컬어지고 있다.

(1) 이러한 것은 그 교만한 백성들 자체를 표현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들은 백향목과 상수리나무처럼 견고히 뿌리박고 있어 어떤 폭풍우에도 흔들리지 않으리라 생각하며, 그들 주변에 있는 모든 자들을 관목으로 여기는 자들이다. 이러한 자들은 온 땅을 채울듯이 보이는, 높은 산이요 솟아오른 작은 산들이다. 그들은 모두에 의해 응시의 대상이 되며, 그들 자신은 요동치 않는다고 스스로 생각하나, 하나님의 벼락이 가장 증오하는 자들이다. Feruntque summos fulmina montes - 가장 높은 산이 벼락에 가장 위험하다.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의 능력 앞에서, 이 산들이 흩어지며 이 작은 산들은 엎드러지고, "초같이 녹아지리라" (합 3:6; 시 68:8). 이 허풍스러운 사람들은 시끄러운 종이 걸려있는 높은 망대와 같이 그들에게는 순식간에 사람을 죽이는 살인무기가 걸려 있다. 그래서 그것이 그들의 튼튼한 성벽이 되니, 그들은 그들의 천성적 강함(완고성)으로 무장하여 있고 요새화 되어 있다. 그러나 그들은 무너져 내릴 것이다.

(2) 또는 구체적으로 말해서, 그들이 자랑하던 즉 그들이 신뢰하며 뽑내는 것들을 말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들이 자기들의 힘과 방위가 된다고 신뢰한 바로 그것들 위에 여호와의 날이 임할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이 믿던 그 모든 병기를 앗아갈 것이니라." 레바논의 거민들이 자기들의 백향목을, 바산의 거민들이 자기들이 상수리나무를 자랑스럽게 여겼는가? 실로 그 점에서는 그들과 필적한 도시가 없도다. 그러나 여호와의 날은 그들의 백향목과 상수리나무와 또 그것으로 지은 집들을 훼파하리라. 예루살렘이 그 주위에 있는 산들을 난공불락의 요새라고 자랑하거나 그 성벽과 보루를 자랑했는가? 그 모든 것들은 여호와의 날이 되면 뒤엎어져 낮아질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힘과 안전으로 자랑하던 것들만이 아니라,

[1] 그들은 자기들의 대외적인 무역을 자랑했다. 그러나 여호와의 날은 "다시스의 모든 배에도 임할" 것이다. 다시스의 배들도 여호사밧의 배처럼 부서질 것이다. 그것들은 바닥에서 침몰하거나 항구에서 파선될 것이다. 스블론은 배의 정박지였으나, 그때에는 배가 출항하는 것을 더 이상 즐거워하지 못하게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어떤 백성 위에 멸망을 내리실 때면, 그는 그들의 온갖 출구를 막으실 수 있다.

[2] 그들은 대내적인 온갖 장식물을 자랑했다. 그러나 여호와의 날은 "모든 아름다운 조각물에," 즉(어떤 사람들의 해석대로) 그들의 배에 있는 그림이나 그들이 다른 나라에서, 아마도 그리이스에서 배로 실어온 그림의 진본에도 임할 것이다. 그리이스는 후대에 가서 화가로서 유명했던 곳이다. "보기에 아름다운 모든 그림들(개역:조각물)에" 여호와의 날이 임할 것이다(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그렇게 해석하고 있다). 아마도 그 그림들은 그들의 친척들의 그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림들이 아름답기 때문이거나 그 친척들이 섬기는 신들을 그린 그림들이었기 때문에, 그 우상 숭배자는 그것들을 매우 좋아했을 것이다. 혹은 그 색조나 기교가 훌륭했기 때문에 그들은 그것을 찬양했을 것이다. 우리가 제 2 계명이나 제 7 계명을 범하지 않는다면, 그림을 만들거나 그림으로 우리 방을 장식한다고 해서 나쁠 것은 조금도 없다. 그러나 그림으로 즐거움을 삼고 그것을 좋아하고 자랑하며, 자비를 베푸는 일에 쓰여져야 할 돈을 거기에다 사용하며 거기에 우리 마음을 두는 것은, 즐길 것이 너무 많은 자들이 나쁜 영향에 빠지게 되듯이, 하나님을 격노케 하여 우리에게서 그 모든 헛된 장식물들을 빼앗아가게 한다.

Ⅲ. 또 하나님은 우상 숭배자들로 하여금 그네들의 우상과 그 우상에 대한 그네들의 온갖 열성과 경의를 부끄러워하도록 만드는 방도를 모색하실 것이다. "우상들은 온전히 없어질 것이다" 라고 했다(18절). 여호와께서 홀로 높임을 받으셔야 하므로(17절), 하나님은 바로처럼 하나님께 대적하여 자기 자신들을 높이는 교만한 자들 위에 경멸을 쏟으실 뿐만 아니라, 신적 영예를 가로채려는 모든 거짓된 신들 위에 더욱더 경멸을 퍼부으실 것이다. 그들은 마침내 없어질 것이다. 온전히 없어질 것이다. 그들의 친구들이 그들을 버릴 것이다. 그러므로, 어떠한 방법으로든, 그들은 완전히 쫓겨날 것이다. 여기에서 다음을 살펴보자.

1. 거짓된 신들의 허탄함을 보자. 그들은 자기 자신을 안전케 할 수 없고 더욱이 그 숭배자들을 안전케 할 능력이 없다.

2. 그들에 대한 참되신 하나님의 승리를 보자. "진리는 위대하니, 반드시 이기리라" 는 사실 때문이다. 다곤은 하나님의 궤 앞에 쓰러졌고, 바알도 엘리야의 여호와 하나님 앞에 쓰러졌다. 이 방의 모든 신들은 쇠진케 될 것이며(습 2:11), 점차로 망할 것이다(렘 10:11). 의로우신 절대주께서 그 모든 사칭하는 신들을 이기실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상을 없애실 뿐만 아니라, 그 숭배자들도 그것의 허탄함과 거짓됨을 은혜롭게도 깨달아 알게 되며, (에브라임도 그것을 깨닫고는 "내가 더 이상 우상들과 무슨 상관이랴" 라고) 최근에 자기들이 겪은 슬픈 경험, 즉 우상이 자기들을 도울 수 없다는 그 무서운 절망 때문에 그들은 우상을 버리게 될 것이다(20절). 사람들이 하나님의 심판에 놀라 암혈과 토굴로 들어가나, 그들의 안전함을 위해 이처럼 피하는 것이 헛되다는 것을 발견하면, 그들은 자기들이 신으로 만들어 놓고서 곤궁한 때에 친구로 삼기를 원했던 그 우상들을 두더쥐와 박쥐에게,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다 던져 버릴 것이다. 그들은 그 우상의 짐에서 벗어날 때, "암혈에 들어가 여호와의 위엄을 피하게" 되리라(21절). 다음 사실들을 기억하자.

(1) 자기가 범한 죄에 대한 권고를 들으려 하지 않는 자들은 조만간에 그것으로 인해 소스라치게 놀라게 될 것이다.

(2) 하나님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이 매우 좋아했던 우상들을 심지어 가장 귀한 금은 우상을 아주 싫어하도록 만드실 수 있다. 탐심에 차있는 자들은 은과 금을 그들의 우상으로, 돈을 그들의 신으로 만든다. 그러나 그들이 그것을 신뢰하였으나 그것이 그들에게 부담스러운 존재라는 것을 느끼게 되고 그것에 의해 보호받기를 기대했었으나 오히려 그것에 의해 위험을 당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 때가 올 것이다. 곧 그것이 그들의 원수들을 이끌어들이고, 그들의 배를 침몰시키거나 그들의 도망을 방해하는 그런 때가 올지도 모른다. 사공들이 물건을 버리며, 심지어는 "밀을 바다에" 버리고(욘 1:5; 행 27:38). "아랍 사람이 급히 의복을 버린" (왕하 7:15) 때가 있었다. 그 사람들은 자기들이 그처럼 상한 갈대에게서 교육을 받은 사실에 화가 나서 그것을 던져 버릴 것이다(겔 7:19 참조). 우상 숭배자들은 그 우상을, 또 자기들이 그것을 의지했던 그 사실의 어리석음을 부끄러워하기 때문에, 또는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면 그들이 그것을 가지고 있는 것이 발각될까 두려워하여 그들은 우상을 던져 버린다. 그것은 도적이 수색을 당하거나 추적을 당할 때는, 그가 훔친 물건들을 버리는 것과도 같다.

(3) 두더지와 박쥐가 거하는 가장 어두운 굴은 눈을 가지고 있으나 보지 못하는 우상들에게 가장 적합한 장소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 자신의 우상을 스스로 거기에 던지도록 만드실 수 있다(30:22). 그때에 그들은 "그들의 기뻐하던 상수리나무로 인하여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다(1:29). "이스라엘 집이 벧엘을 의뢰하므로 수치를 당한 것 같이 모압이 그모스로 인하여 수치를 당하리로다" (렘 48:13).

(4) 사람이 죄를 싫어하며 떠나지만, 진실한 회개를 하지는 않을 수도 있다. 즉 죄에 물렸기 때문에 싫어하고, 죄를 범할 기회가 없기 때문에 떠나나, 하나님께 대한 어떤 사랑으로 인해 회개하지 않고 단지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비굴한 두려움 때문에 억지로 하는 수도 있다.

Ⅳ. 하나님은 육신의 팔(인생들)을 의지하는 자들로 하여금 그 신뢰를 부끄러워하도록 하는 방도를 모색하실 것이다(22절).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너희에 관한 하나님의 섭리는 이것을 너희에게 큰 소리로 말할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미리 경계하여 불안과 실망으로 인한 수치를 막을 수 있도록 하라. 그리고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깊이 생각하라."

1. "즉 사람은 얼마나 연약한가? 그의 호흡은 코에 있어, 매 순간마다 내어 보내져 조만간 영원히 사라진다." 인간은 죽어가는 피조물이며 곧 죽을지도 모른다. 우리의 호흡이 들어있는 코는 신체의 외부에 속해 있다. 거기에 있는 것은 문에 서있는 자처럼 떠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아니, 콧구멍은 항상 열려 있어 그 속에 있는 호흡은 순식간에, 우리가 알기도 전에 빠져나간다. 그렇다면 사람이란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슬프게도 인생에게는 중요하게 여길 만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인생이란 겉으로 보기와 다르며, 그 스스로 가장하는 바와도 다르며, 우리가 환상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바와도 다르기 때문이다. 사람은 허탄한 것과도 같다. 아니 그는 허망한 것, 아주 허망한 것이다. 나아가 성소의 저울에 달아 볼때, 그는 허망한 것보다 더 못하며 더 가볍다.

2. "따라서 인생을 의지하지 않는 자들이 얼마나 지혜로운가!"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며 우리의 이득이다.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아무리 지위높고 강한 사람들이라도 의뢰하지 말라. 그렇게 하지 말라. 너희는 사람의 능력을 마음에 두지 말라. 왜냐하면, 그 능력은 유한하고 제한되어 있으며, 파생된 부차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너희 심판은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너희 두려움이 되거나 너희 소망이 되게 하지 말라.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보라. 그에게 모든 인간의 능력이 속해있고, 거기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의 진노를 두려워하고 그의 은혜를 믿고, 너의 도움을 위해 그를 택하라. 그리고 너희 소망을 여호와 너희 하나님께 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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