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주석강해/대선지서

이사야 제 1장

은바리라이프 2008. 7. 19. 18:17

 

 

 이사야 제 1장

http://www.kidok.info/BIBLE/B_RHV/cgi/bibleftxt.php?VR=RHV&VL=23&CN=1&CV=99&FR=

 

  예언자 이사야와 그 시대(이사야 1:1)

Ⅰ. 이 예언자의 이름을 보자. 그는 이사야(Isaiah) 또는 예사햐후(Jesahiahu)(히브리 원전에는 그렇게 되어 있다)라 했고, 신약 성서에서는 에사야스(Esias)로 적혀 있다. 그 뜻은 "여호와의 구원" 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구원의 지식을 주시는" 도구로 쓰이는 예언자에게 적합한 이름이며, 이 예언자에게는 특히 그러하다. 왜냐하면 그는 구주 예수에 대해 그리고 구주에 의해 역사된 그 큰 구원에 대해서 매우 많은 것을 예언했기 때문이다.

그는 "아모스(Amoz)의 아들" 이라 일컬어지고 있는데, 그것은 예언자 아모스(Amos)가 아니라(히브리어에서 이 두 단어가 영어에서보다도 더욱 다르다) 유대인들의 견해대로, 유다왕 아마시아의 형제이거나 아들인 아모스(Amoz)를 가리키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예언자의 아버지 이름이 나와 있을 때는 그 아버지도 역시 예언자일 것이라는 유대인들의 규정처럼 애매 모호한 전승에 의한 것이다. 예언자들의 생도와 후계자들은 실상 흔히 그들의 "아들" 이라 불리우고 있으나, 우리는 예언자들의 친아들들이 그들의 계승자가 되었다는 사례를 거의 찾아볼 수 없다.

Ⅱ. 예언의 성격을 찾아보자. 그것은 이상(異象. Vision)가운데 그에 계시된 것이므로, 하나의 이상이다. 즉 그때 그는(발람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민 24:4) "눈을 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전능자의 이상을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아마도 6장에 나오는 것처럼 그것은 처음에는 그리 뚜렷한 이상(환상)은 아니었을 것이다. 예언자는 "선견자" (Seer) 곧 보는 사람이라 불리웠으므로 그들의 예언은 이상(Visions)이라 일컬어지기에 적합하다. 그것은, 그가 마음의 눈으로써 보고,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 육안으로 사물을 보듯이 선명히 예견하고 확신했으며, 충분히 알고 매우 감동받았던 그런 내용이다. 다음 사실을 기억하자.

1. 하나님의 예언자들은 그들이 말하는 내용을 보았고, 그들이 이야기하는 내용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 자신이 믿고 확신했던 것을 믿으라고 우리에게 요구한다(요 6:69; 요일 1:1).

2. 그들은 자기들이 본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 주위에 있는 모든 것이 거기에 관계하고 있다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행 4:20; 고후 4:13).

Ⅲ. 예언자의 주제를 보자. 그것은 "그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해," 곧 두 지파의 지역과 그들의 중심지인 그 성읍에 대해 "본" 것이었다. 여기에는 에브라임이나 열 지파(이스라엘)에 관한 것이 거의 없다. 그것에 관한 것은 호세아의 예언 안에 많이 언급되어 있다. 이사야서에는 바벨론, 애굽, 두로, 그리고 다른 이웃 족속에 대해 언급되어 있는 것이 몇 장(章) 있다. 그러나 그 주요 내용이 되고 있는 것에서부터 그 예언의 표제를 따와서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한" 것이라 했다. 다른 민족들에 대한 것은 유대 민족에 관련된 한에서만 언급된다.

1. 이사야는 특별한 방식으로 그들에게 교훈을 주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이 하나님의 신탁에 관여되어 있다는 사실이 유다와 예루살렘의 특권이기 때문이다.

2. 책망과 위협을 주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알려진 유다에서, 또 하나님의 이름이 크게 나타난 살렘에서 불의가 발견된다면, 그들은 다른 지역의 사람들보다도 더 빨리 문책당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3. 환란의 때에 위로와 격려를 주고 있다. 왜냐하면 시온의 자손들이 그들의 왕을 기뻐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Ⅳ. 예언의 시기를 보자. 이사야는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예언했다. 이 사실을 통해 다음을 알 수 있다.

1. 그가 오랫동안 예언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으며, 만일 그가(유대인들이 말하고 있듯이) 결국 므낫세에 의해 갈기갈기 찢겨 죽게 되는 잔인한 죽음을 당했다면 특히 그러하다. 혹자는 바울 사도가 히브리서에서 이러한 사실을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히 11:37) 추측하고 있다.

웃시야 왕이 죽은해(6:1)에서 히스기야 왕이 병들고 회복된 해까지는 47년이었다. 이사야가 그 전후로 해서 얼마동안 예언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어떤 사람은 60년으로, 또 어떤 사람은 도합 80년으로 계산하고 있다. 그가 그처럼 오랫동안 활동했다는 것은, 그에게 영광이며 그의 나라에는 행복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가 젊었을 때부터 예언하기 시작하여 노년까지 계속했다고 추정해야 한다. 왜냐하면 예언자들은 제사장들처럼 사역을 시작하고 끝내는 연령이 고정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2. 그가 여러 시대를 걸쳐서 예언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요담은 선한 왕이었고 히스기야는 그보다 더 선한 왕이었다. 따라서 이들이 이 예언자에게 격려를 주고 그로부터 충고를 받아들였으며, 그의 지지자가 되고, 그는 그들에게 자문원이 되었으리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 그리고 이사야가 한창이었던 때, 아하스 왕은 매우 불경하고 사악했다. 그 때에 이사야는 물론 왕궁에 대해 얼굴을 찌푸렸고, 도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 같다. 선한 사람과 선한 사역자들은 이 세상의 악한 세대를 예상하고 그것에 대비해야 한다.

그 당시의 종교는 여호와의 집 문들이 닫혀지고 우상의 제단이 예루살렘 각 곳에 세워질 정도로 타락했다. 그리고 모든 거룩한 웅변과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온 소식을 가지고 있던 이사야는 그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가장 훌륭한 사람들, 가장 훌륭한 사역자들이라도 이 세상에서 자기들이 하고자 하는 선을 다 행할 수는 없다.


이스라엘의 죄악됨(이사야 1:2-9)

우리는 이 책이 끝나기 전에 좀 더 밝고 즐거운 광경을 보기를 바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말 여기에 전개되는 서론에서는 모든 것이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해 매우 나쁘고 어둡게 보인다. 교회 곧 포도원이 이처럼 암담한 상황에 놓여 있다면, 광야같은 이 세상은 어떠하겠는가?

Ⅰ. 그 예언자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야기했으나, 그의 백성들이 들어주지 않았기 때문에, 하늘과 땅에게 말하면서 그들의 주목을 청하고 있다(2절).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이 이리석고 무감각한 백성들보다는 저 무생물이 더 빨리 들을 것이다. 그것들은 창조의 법을 지키고 있는 그 창조의 목적에 따르고 있다. 하늘의 빛들로 하여금 그 어두움을 부끄러워하게 하고 땅의 풍성함으로 하여금 그 불규칙적인 것을 부끄러워하게 하라. 모세도 여기서 예언자 이사야갸 한 그런 말로 시작했다(신 32:1). 모세가 예언했던(신 31:29)것이 이제 실현되게 되었다는 것을 시사한 것이다.

또한 그 귀절이 하늘과 땅에 대한, 천사들에 대한, 그리고 나서 위와 아래 세상의 거민들에 대한 호소일 수도 있다. 그들로 "하나님과 그의 포도원 사이를 판단" 하게 하라. 그들의 어느 편이 이처럼 배은망덕을 만들어 낼 수 있겠는가를 살피자. 하나님은 말씀하실 때는 그가 의롭다 함을 얻으실 것이며, 하늘과 땅도 그의 공의를 선포할 것이다(미 6:1, 2; 시 50:6).

Ⅱ. 그는 가장 악질적인 범죄 곧 야비한 배은망덕에 대해 그들을 책망하고 있다. 사람을 배은망덕한 자라고 부르는 것보다 더 나쁜 것은 없다. 하늘과 땅으로 하여금,

1. 하나님께서 이들처럼 하나님의 혐오와 격노를 자극시키는 백성에게도 은혜롭게 대하시는 것을 듣고 놀라게 하라. "내가 그들을 자녀처럼 양육하고 키워왔다. 그들은 잘 먹고 잘 배워왔도다" (신 32:6). "나는 그들을 존귀케 하고 높였다(어떤 자는 이렇게 본다)." "그들을 키웠을 뿐만 아니라 훌륭하게 만들었다. 그들을 부양했을 뿐만 아니라 영달을 주었다. 그들을 훈육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높이 일으켜 세웠다." 우리의 생명과 즐거움이 존속되고 우리가 발전하게 되는 것은 모두 하나님께서 아버지처럼 우리를 돌보시고 친절을 베푸시기 때문임을 잊지 말자.

2. 하늘과 땅으로 하여금, 그처럼 그들에게 온유하신 하나님에 대해 그들은 얼마나 사악하게 대하는가를 보고 놀라게 하라.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또는(일부의 해석대로) 그들이 내게서 반기를 들었도다. 그들은 나의 면류관과 권위에 대한 탈주자, 아니 반역자였도다." 우리의 본성과 교육을 담당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그 모든 은총이 우리가 패역하게도 하나님을 떠나며 그에게 무례히 행하는 일체의 행동으로 하여금 더욱 가중한 죄가 되게 한다는 점을 명심하자.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반역자가 되어 버렸다.

Ⅲ. 이것은 그들의 무지와 생각이 모자란 탓이라고 이사야는 말한다(3절). "소는 그 임자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도다." 다음 사실들을 관찰해 보자.

1. 소와 나귀의 영리함. 그들은 짐승 둥에서도 가장 무딘 종자이다. 그러나 소는 그 주인을 알고 섬기며 그 멍에에 복종하여 그 멍에를 멜 정도로 의무감을 가지고 있다. 나귀는 자기가 먹이를 먹고 머물던 장소인 그 주인의 구유나 여물통을 알 정도로 분별력을 가지고 있다. 나귀는 풀어놓아졌을 때에도, 자발적으로 그곳으로 돌아 갈 것이다. 아주 훌륭한 지위에 있던 어떤 사람도 지식과 총명에 있어서는 미련한 짐승들만 못해서 부끄러움을 당하게 되자, 그것은 그들에게서 그 짐승들에게로 보내어졌다. 배우기 위해서 뿐만이 아니라(잠 6:6, 7), "땅의 짐승보다 더 많이 배웠으나" (욥 35:1) 아는 바가 없으므로 그들의 본을 받기 위해서이다(렘 8:7).

2. 이스라엘의 망령됨과 어리석음, 하나님은 그들의 주인이며 소유자이시다. 그는 우리를 지으셨다. 그리고 우리의 가축이 우리의 것인 것 이상으로 우리는 그의 것이다. 그는 우리를 위해 좋은 것을 마련해 주셨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이라 불리우는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알지 못하며 생각해 보려 하지도 않은 채 이렇게 묻는다. "전능자가 무엇이관대 우리가 그를 섬기리요? 그는 우리의 주인이 아니다. 우리가 그에게 간구한들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에게는 우리를 양육할 구유가 없도다." 하나님은 그들의 고집스러운 의지를 원망했다(2절).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 여기에서 하나님은 그 원인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알지 못하며, 깊이 생각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거역하였도다." 총명이 어두워지므로 온 마음이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난다(엡 4:18). "이스라엘은, 비록 그들의 땅이 빛과 지식의 땅이지만, 알지 못하는도다. 유다에 하나님이 알려지셨지만, 그들은 그들이 아는 것을 따라 행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은 실상 그들이 모르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그것을 그들의 경우에 적용시키지 않고 있으며 또한 그것에 유념하지도 않는다." 다음을 기억하자.

(1)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임을 고백하는, 즉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유익을 얻고 그의 백성의 계약 관계 아래 놓여있는 자들 중에도, 자기 영혼의 문제에는 매우 부주의한 자들이 많이 있다.

(2)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잘 생각해 보지 않는 것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을 모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신앙의 큰 적이다.

(3) "그러므로" 사람들은 하나님께 반역하고 거역한다. 그들은 하나님께 대한 자기들의 의무를 모르고 있으며 생각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의무감도 감사한 마음도 유익을 분별하는 마음도 없다.

Ⅳ. 이사야는 그들의 교회와 나라가 보편적으로 타락되고 부패된 것을 탄식하고 있다. 죄라는 병이 전염되었고, 모든 지위와 신분의 사람들에게 감염되었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4절) 이 예언자는 자기 자신들을 탄식하려 하지 않는 자들을 슬퍼하고 있다. "애석하도다. 그들에게 화 있을진저!" 그는 그들의 부패함에 대해 거룩한 분노를 품고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한 두려움을 품고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것을 알 수 있다.

1. 그는 그들의 죄가 얼마나 중한가를 알고 있으며, 그 죄악의 치명성을 보여 주고 있다(4절).

(1) 그 사악함은 전반적이었다. 그들은 사악한 민족이었다. 그 백성의 대다수가 부도덕했고 불경스러웠다. 그 민족의 수용 능력도 또한 사악했다. 대외적으로 공적인 약정을 다루는 일에 있어서나 대내적으로 공의를 처리하는 일에 있어서도 그들은 부패했다. 죄가 그 나라 전체에 퍼지면, 백성들에게도 해롭다.

(2) 그들의 죄악은 그 성질상 매우 중하고 극악했다. 그들은 "허물을 졌다." 즉 범죄와 그 범죄로 인한 저주가 그들 위에 매우 무겁게 놓여졌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드러난 것은 가혹한 책망이었고, 그들 자신으로서는 떨쳐버릴 수 없는 책망이었다. 그들의 사악함이 "납 조각" 처럼 그들에게 얹혀 있었다(슥 5:7, 8). 그들의 죄는 그들을 얽어매기 쉽고, 또 그들은 그 죄를 범하기 쉬웠다. 뿐만 아니라 그 죄는 그들에게 하나의 짐이었다(히 12:1).

(3) 그들은 나쁜 혈통의 출신으로서 "행악의 종자" 였다. 패역함이 그들의 피 속에 흐르고 있었다. 그들은 본성적으로 패역했고, 이 사실이 그들의 문제를 더욱 악화시켰고, 하나님을 더욱 분노케 했으며 구제책이 없도록 만들었다. 그들은 그들의 열조를 대신하여 일어나, 그 열조의 전철을 밟아 "죄악의 그릇(한도)을 가득 채웠다" (민 32:14). 그들은 반역자들의 혈통이요 가문이었다.

(4) 자기 자신을 더럽힌 자들은 다른 사람들을 더럽히려고 온갖 수단을 다했다. 그들은 "부패한 자손," 즉, 더럽혀진 채 태어난 자손 일뿐만 아니라 "행위가 부패한 자식" 으로서 악을 번식시켜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그 악에 물들게 했다. 그들은 죄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유혹자였다. 사탄에 의해 조정될 뿐만 아니라 그의 대리자가 되었다. "자녀들" 곧 "하나님의 자녀" 로 불리워지며 그의 가족에 속해 있는 자로 간주받는 자들이 악하고 부도덕해지면, 그들의 본보기는 가장 해로운 영향을 미친다.

(5) 그들의 죄는 그들이 패역스럽게 하나님을 떠났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충성에서 이탈한 자였다. "그들이 그들 자신을 연합시켰던 여호와를 버리고,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즉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되어 그와 분리되어 그에게서 돌아섰으며, 그들의 깃발을 버리고 해야할 봉사를 중단했다." 그들이 앞으로 나아가야 했을 때도, "완강한 암소처럼" "어린양처럼" 뒷걸음질 쳤다(호 4:16).

(6) 그들의 죄는 건방지고 대담하게 하나님을 무시했다는 것이다. "그들이" 고의적으로 그리고 의도적으로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만홀히 여겼다" 고 했다. 그들은 무엇이 하나님을 노하게 하는지 알고 있으면서 그것을 행했다. 신앙과 또 하나님과 저들의 관계를 고백한 자들이 뒷걸음질 치는 것은 하나님을 특별히 격노케 한다는 것을 잊지 말자.

2. 그는 문둥병이 온 몸에 퍼졌거나 또는 욥의 경우처럼 심한 종기가 퍼진 병든 몸을 비유로 들어 그들의 죄악상을 설명했다(5, 6절).

(1) 질병이 활력소를 포위했으므로, 치명적인 위협을 받고 있다. 머리와 마음의 병은 매우 위험하다. 이제 머리, 온 머리가 병들고, 마음, 온 마음이 피곤해졌다. 그들의 판단력이 부패했다. 문둥병이 그들 머리 속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온전히 부정결했다.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열정과 신앙은 식어 없어졌다. "그 남은 것도 죽게 되었다" (계 3:2).

(2) 병이 온 몸에 퍼져 극히 불결하게 되었다.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즉 가장 낮은 소작인에게 가장 큰 귀족까지 "성한 곳이" 즉 훌륭한 원칙이나 신앙이(왜냐하면 그것은 영혼의 건강이기 때문이다) "없이" 오직 "상한 것과 터진 것," 즉 범죄와 타락, 거룩한 하나님을 불쾌하게 하고 지각있는 사람을 고통스럽게 하는 아담의 타락으로 인한 슬픈 결과들뿐이었다. 다윗에게 있어서도 그가 "내 상처가 썩어 악취가 나오니, 나의 우매한 연고로소이다" (시 38:5) 하고 호소했을 때 그러했었다(시 32:3, 4 참조). 개혁을 위한 시도는 전혀 없었다. 그러한 시도가 있었다 할지라도 효과적인 것이 못되었음이 판명되었다. 그 상처는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유하게 함을 받지 못하였다" 고 했다. 죄가 회개되지 않고 남아 있는 한, 상처는 보살핌과 씻김을 받지 못하여, 그 속에 있는 교만한 살이 잘려나가지 못한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그 죄가 사함받지 못하는 한, 상처는 기름으로 유하게 되거나 싸매어지지 않으며, 그것을 치료하거나 그 치명적인 결과를 막기 위한 어떤 일도 행해지지 않는다.

Ⅴ. 그는 그들의 죄로 인해 그들 자신에게 임한 하나님의 심판과 그 심판 아래에서도 그들이 잘못을 바로잡지 않는 것을 슬프게 탄식하고 있다.

1. 그들의 나라는 거의 다 멸망했다(7절). 그들의 사정은 매우 비참했으므로, 그들의 마음과 땅도 황폐케 되었고, 그들이 너무 어리석었으므로 이런 것을 그들에게 들려주고 보여 줄 필요가 있었다. "그것이 어떠한가를 살펴보자. 너희 성읍들은 황무하였다. 밭은 주민의 부족으로 인해, 마을은 버려짐으로 인해 경작되지 않았다(삿 5:7). 그리고 이처럼 들과 포도원은 황야같이 그 위에 가시덤불이 퍼졌다(잠 24:31). 너희 성읍들은 너희를 침입한 대적들에 의해 불에 탔고(불과 칼은 보통 함께 한다) 너희 가족들의 양식이 되어야 할 너희 땅의 열매는 이방인에게 삼키웠다. 그리고 너희들을 더 분노케 하는 것은 그 참상이 너희 목전에 있으나 너희가 그것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이다. 너희의 생계가 되었어야 할 음식으로 너희 원수들이 포식하는 동안 너희는 굶주린다. 너희 땅의 멸망은 이방인의 멸망과 같다. 그 땅을 침입자들이 사용하고 있으니, 장차는 이방인들이 사용할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시온의 딸 같았던(시온에 세워진 성진은 예루살렘에게 어머니요 유모였다) 예루살렘 자체나 딸처럼 하나님께 귀중했던 거룩한 산 시온 자체는 이제 잃어 버려졌고 버림 당했으며, "포도원의 망대같이" 내버려졌다. 포도원의 수확이 끝났을 때, 그 망대에는 아무도 거하지 않거나 돌보지 않으며, "원두막의 상직막 같이" 또는 오두막 같이 그것은 천하고 보잘 것 없게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마다 마치 것이 "포위된 성읍" 인 것처럼(8절), 그 근처에 오기를 두려워하여, 거기에서 자기의 재산을 끌어내어 오기를 원한다.

어떤 사람은 병든 몸으로 표현된 것은 그 왕국의 비참한 상태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6절). 아마도 이 설교는 아하스 통치 시대에, 즉 유다가 아람과 이스라엘 왕들에 의해, 그리고 에돔 사람과 블레셋 사람들에 의해 침입당하던 때에 전파되었을 것이다. 그들은 많은 사람들을 죽였고, 많은 사람들을 사로잡아 갔던 것이다(대하 28:5, 17, 18). 나라의 불경과 부도덕은 국가적인 황폐함을 초래한다는 것을 기억하자. 온 땅의 영광인 가나안과 온 세상의 기쁨인 시온산은 모두 조롱거리가 되고 멸망되었다. 그들에게 이 큰 참화를 불러들인 것은 바로 죄이다.

2. 그러나 그들이 전혀 개심하지 않았으므로, 하나님은 그들에게 또 다른 과정을 취하시려고 경고하신다(5절). "너희가 반역을 계속하여 책망 받을 일을 계속 되는 때에,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랴? 그렇게 된들 너희에게 무슨 득이 있겠느냐? 지금까지 행한대로, 앞으로도 더욱 더욱 패역하려느냐?" 특히 아하스왕이 그러했다. 그는 "곤고할 때에 더욱 여호와께 범죄하였던" 자이다(대하 28:22). 이와 마찬가지로, 의사는 환자의 경우와 절망적임을 알 때, 더 이상 그를 약으로 괴롭히지 않는다. 그리고 아버지는 그의 자식이 조금도 굽히려 하지 않음을 발견하여 상속권을 박탈해 버리기로 결심하고 났을 때는, 더 이상 그를 훈계하려 하지 않는다. 다음 사실들을 명심하자.

(1)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더 훌륭하게 만들려고 택하셨지만 바로 그 방책에 의해 더 나쁘게 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매를 맞을수록 더욱 패역해진다. 환란을 당하면 그들의 타락성이 제거되기는 커녕 오히려 자극되고 악화되며, 그들의 마음도 완악해진다.

(2) 하나님은 때로 오랫동안 고쳐질 수 없었던 자들을 징계하는 길을 중단하신다. 이 자체그 하나의 의로운 심판법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들을 멸망시키기로 작정하시는 것이다. 내어버려진 은은 풀무 속이 아니라 쓰레기 속에 던져질 것이다(렘 6:29, 30; 겔 24:13; 호 4:14 참조). "부정한" 자는, "여전히 부정하도록 버려두라."

Ⅵ. 이사야는 이러한 전반적인 타락과 황폐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의 기념비가 될 남은 자가 있으리라는 생각으로써 자기 자신을 위로하고 있다(9절). 여기에서 다음을 보라.

1. 그들이 완전히 근절당하게 될 운명이 얼마나 가까이 와 있는가! 그들은 죄와 멸망이라는 면에 있어서는 거의 소돔과 고모라와도 같았다. 즉 그들은 "그들 중에 10인의 의인" 도 없을 정도로 점점 악한 상태에 빠져들어갔고, 마치 아무도 살아남지 못할 것처럼 그들은 비참했고 그들의 땅은 유황 못으로 바뀌었다. 하나님의 공의는 "그들을 아드마같이 놓고 스보임같이 두라" 고 말했으나, 긍휼은 "내가 어찌 그렇게 하겠느냐?" 고 말했다(호 11:8, 9).

2. 그들을 그것에서 구원한 것은 무엇이었는가? "만군의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조금 남겨 두셨다." 즉 그 소수의 남은 자들은 저 일반적인 배교 때에도 순결을 지켰고, 저 일반적인 참화 속에서도 무사히 살아 남은 자들이다. 이것은 바울 사도에 의해 인용되어 있다(롬 9:27). 즉 바울 시대에 백성의 무리가 기독교를 거부했을 때도, 그것을 받아들였던 유대 민족 중의 극소수에게와 그리고 열조에게 한 약속이 그들 속에서 이루어졌던 그 극소수의 사람들에게 이 말씀이 적용되어 있다. 다음 사실들을 명심하자.

(1) 최악의 시대에도, 대홍수에서의 노아와 그의 가족들처럼, 소돔의 멸망에서의 롯과 그의 가족들처럼, 불의로부터 지켜지고 긍휼을 위해 보존된 남은 자들이 있다. 하나님의 은혜는 주권적인 절대 행위에 의해서 그 빛을 떨친다.

(2) 이 남은 자는 거역하여 멸망당한 죄인들의 거대한 수효에 비해 극히 그 수가 매우 적다. 다수는 참 교회의 표적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과녁은 적은 무리이다.

(3)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불결함 속에서 멸망하도록 버림을 당하나, 또 어떤 사람들은 성별시켜 구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역사이다. 그것은 만군의 여호와로서 그의 권능의 역사인 것이다. 그가 우리를 위해 조금 남겨 두시지 않았다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을 것이다. 행위가 부패한 자들은(4절) 모든 사람을 더럽히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고, 집어삼키는 자들은(7절) 그들을 멸하기 위해 온 수단을 다했다. 하나님께서 친히 개입하시어 당신을 위해 남은 자를 예비하시지 않으셨다면, 그들이 승리했을 것이다. 따라서 남은 자들은 그에게 모든 영광을 돌려야 한다.

(4) 철저한 멸망에서 구원받은 사람들은 뒤를 돌아보고 얼마나 아슬아슬하게도 자기들이 그 멸망 가까이에 있었던가를 깨닫는 것이 좋으며, 또 자기들은 그 멸망의 틈바구니 속에 서 있었던 소수의 선한 사람들에게 빚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으며, 그것은 이처럼 선한 사람들을 그들에게 남겨둔 선하신 하나님의 덕분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 좋다. "우리가 소멸되지 아니함은 오직 여호와의 자비하심 덕분이다."


형식만 남은 종교(이사야 1:10-15)

Ⅰ.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을 듣도록 하기 위해 그들을 부르고 있다(그러나 그 부름은 헛되었다 10절).

1. 하나님이 그들에게 붙인 호칭은 매우 이상하다. "소돔과 관원들(rluers)" 이라 했다. 또 "고모라의 백성" 이라고도 했다. 이것은, 그들이 스스로 죄에 대해서 소돔과 고모라처럼 되었으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소돔과 고모라처럼 멸망시키는 것이 얼마나 의로운 일이겠는가를 시사하고 있다. 소돔 사람은 "악하여 여호와 앞에 큰 죄인" 이었는데(창 13:13), 유다 사람들도 그러했다. 지도자들이 나쁠 때 백성들도 그러할 것은 당연하다. 악이 덕을 제압했다. 왜냐하면 악이 지도자들을 자기편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덕을 능가했는데, 그것은 그 악이 그 편에 백성 곧 다수의 사람을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추세가 이처럼 강했기 때문에 만군의 여호와의 능력이 아니고서는 남은 자를 안전케 할 수 없었다(9절).

지도자들은 여기에서 소돔의 지도자들처럼 예언자에게 강한 공격을 받고 있다. 왜냐하면 예언자는 아첨하는 칭호를 붙일 줄 모르기 때문이었다. 유대인의 전승에 의하면, 이사야는 이 때문에, 그 신들을 저주하고, "그의 백성의 관원들을 헐뜯었다" 하여 오랜 후까지도 비난을 당했고 마침내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2. 그들에 대한 그의 요구는 매우 합당했다.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그리고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해야 할 말씀에 주목하고 그의 말씀을 너희 법으로 삼을지어다." 그들의 제물을 싫어한다는 다음의 선포는 - 실상 그것이 옛법에 대한 해설에 불과할지라도 - 그들에게 일종의 새법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와 유사한 경우에 요구되어지듯이(시 50:7, 8) 특별한 배려가 여기에 따라야 한다. "이것을 듣고 떨지어다. 그것을 듣고 조심할지어다."

Ⅱ. 정당하게도 하나님은 그들의 기도를 듣는 것과 그들의 봉사와 제물과 번제를 받아들이기를 버구하셨다. 즉 그것들의 기름과 피(11절), 그들이 그의 전 뜰에 참예하는 것(12절), 그들의 봉헌, 분향 그리고 그들의 엄숙한 집회(13절), 그들의 월삭과 정해진 절기(14절), 그들의 가장 열렬한 말을 받으시기를 거절하고 계신다. 그들의 손에는 피가 가득했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이 거절당한 것이다.

이제 다음을 관찰해 보자.

1. 믿음의 권능에 대해서는 이방인, 아니 원수들이지만, 믿음의 외양과 그림자와 형식에는 매우 열심인 사람들이 많이 있다. 이 사악한 민족, 이 행악의 종자, 이 소돔의 관원들과 고모라의 백성들은 율법이 요구하는 것만큼 많은, 아니 그보다 더 많은 제물들을 거짓된 신들의 제단이 아니라(여기에서 그들은 이런 우상에 대한 책망을 받고 있지는 않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제단에 가져왔다. 즉 그들이 자기들의 몫을 얻게 되는 화목제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영예를 위해 모두 불태우는 번제도 가져왔다. 또한 그들은 찢어진 것이나, 절름거리는 것이나, 병든 것이 아닌 살찐 짐승과 그 기름등 가장 좋은 종류의 것으로 가져왔다. 그들은 자기들을 위해 제물을 바치도록 다른 사람들을 보내지 않고 자기들이 직접 가서 하나님 앞에 현신(現身)했다. 그들은 법으로 제정된 장소(산당이나 숲이 아닌 하나님의 전 뜰)와 제정된 때 즉 월삭과 안식일과 정해진 절기 등 그 어느 하나도 빼놓지 않고 모두 지켰다. 아니 그들은 특별한 집회를 소집하고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 이외에도 예배를 위해 성회를 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것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즉 그들은 의식 절차만이 아니라 헌신의 실행으로써 하나님께 전념했다. 그들은 많이 말하면 하나님께서 들으시리라고 생각하면서 기도했다. 자주 또 많이 기도했다. 아니 그들은 열렬하고 끈질기게 기도했고, 간절한 사람처럼 손을 쳐들었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것들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 자신들을 경건하고 신앙적인 백성이라고 생각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들은 실상 그렇지 못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1) 그들의 마음속에는 참 신앙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 "보이러," 즉(난외에 적혀있는 것처럼) 그 앞에 "보여지기 위해" 왔다. 그들은 그 의무의 한계 �에서 휴식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것을 원했고, 사람들이 보는 장소 이외에는 가려하지 않았다.

(2) 그들의 손은 피로 가득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율법과 공의라는 구실 아래 살인과 약탈과 압제를 자행했다. 백성들은 피를 흘렸고, 관원들은 그런 자들을 처벌하지 않았다. 관원들은 피를 흘렸다. 그런데 나봇의 피를 흘린 이 세벨에게 이스르엘의 장로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백성들은 그들을 돕고 선동했다. 마음으로 살인하는 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악한 것이다. 마음으로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실상 그 손에 피가 가득하기 때문이다.

2. 죄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면, 먼저 죄를 버리고 생활을 개혁하려 하기보다는 예배 행사에 참여하려고 달려간다. 그들의 땅은 이제 황무해졌고, 그들의 성읍은 불탔다(7절). 그러자 그들은 전능자 하나님께 뇌물을 드려, 그 형벌을 제거하고, 그로 하여금 자기들이 계속 범죄하게 내버려 두도록 반들려는 것처럼 예전보다도 더 꾸준히 하나님께 희생물과 제물을 바치게 되었다. "하나님이 저희를 죽이실 때, 그때에 저희가 그에게 구하였다" (시 78:34). "여호와여 백성이 환란 중에 주를 앙모하였나이다" (26:16). 제물을 쾌히 바치려는 자들도 죄에서 떠나는 것은 싫어하는 자들이 많다.

3. 마음과 생활의 철저한 개혁이 없이는, 사악한 백성들이 아무리 화려하고 값비싼 예배를 드리더라도 그것이 결코 하나님께 용납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그에게 실로 가증스러운 것이다. 그것은 "순종하는 것이 제물을 드림보다 낫다" 는 사실을 매우 다양하게 표현해 주는 것이다. 아니, 복종함이 없는 제물은 희롱, 즉 하나님을 모욕하고 격노케 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하나님이 의식적 행사를 대단히 무시하고 있음이 나타나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에 의해 의식적 행사가 결국에는 모두 제거되고 말리라는 것을 나타내는 무언의 암시이다. 지금 경시되는 것은 때가 이르면 소용이 없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 - 또 그것에 힘입어 드리는 기도 - 을 원치 않으시리로다. 보시옵소서 "여기 내가 왔나이다(히 10:5; 7)."

그들의 제물이 여기에서는 다음과 같은 것으로 표현되어 있다.

(1) 헛되고 무의미한 것이다.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11절). 그것은 "헛된 제물" 이다(13절). "그들이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마 15:9) 그들이 하나님의 법령에 관심을 기울인 것은 모두 헛된 수고였고, 어떤 훌륭한 의도에도 부합되지 못했다. 왜냐하면,

[1] 그것은 어떤 의무의 행위로나 하나님께 대한 복종으로 간주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12절) 하나님께서 당신의 법령을 부인하거나 그 명령대로 지키기를 거절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이 그런 일을 행할 때, 그것을 요구한 하나님을 주목하지 않았기 때문이요, 또한 하나님께서는 실상 그 손이 피로 가득하고 계속 회개하지 않는 자들의 것을 요구하지는 않으셨기 때문이다.

[2] 그것은 그들을 하나님의 은총에 부탁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그들의 제물의 피를 기뻐하시지 않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 제사를 통해 당신 자신이 영예롭게 되는 것으로 간주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3] 그것은 그들을 위해 어떤 위안도 얻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이 그 마음에 죄악을 품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기도할지라도 하나님은 듣지 않으실 것이다(시 66:18). 그는 그들을 구원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많은 기도를 할지라도 그 어느 기도도 순전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의 모든 종교적 예식은 그들에게 아무런 이득도 돌려주지 않았다.

(2) 나아가 추악하고 불쾌한 것이었다. 하나님은 그것들을 받지 않으셨을 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몹시 싫어하고 혐오하셨다. "그것들은 너희의 제물이지 내 것이 아니다. 나는 그런 것들이 풍부하며 물리기까지 했다." 하나님은 그것들이 필요치 않았고(시 50:10), 원하지도 않았으며, 그것들을 충분히 그리고 충분한 것 이상으로 지니고 계셨다. 그들이 그의 뜰로 오는 것을 "그의 마당만 밟는," 또는 마당만 짓밟는 것이라고 하나님은 부르고 있다. 그들이 하나님의 규례에 참예하는 바로 그 행위가 그 규례에 대한 경멸로 해석되어졌다. 그들의 분향은, 아무리 향기로울지라도, 그에게는 가증스러운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위선 속에서 그리고 악한 의도와 함께 태워졌기 때문이다. 그들의 엄숙한 집회도 하나님은 "견딜 수" 없었다. 즉 하나님은 인내심을 가지고 그것을 볼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그에게 준 모욕을 참을 수 없었다. "성회가 불의하였다" . 비록 성회가 그런 것은 아닐지라도, 그들의 성회를 열면 그 성회는 불의해진다.

이처럼 하나님의 규례가 악한 사람들에 의해서 악용될 뿐만 아니라 사악한 목적에 사용되는 것은, 하나님께는 "분한 일" (어떤 사람은 그렇게 읽고 있다), 격노케 하는 일이다. "내 마음이 그것을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 부담스러운 일이도다. 나는 그것에 완전히 넌더리가 나 있으며, 그것을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하나님은 정직한 자의 기도를 들으시기에는 결코 곤비함이 없으시나, 악인의 호화스러운 제물에는 곧 곤비함을 느끼신다. 하나님은 싫어하고 분노하는 기도에 대해서는 당신의 눈을 감추진다.

이 모든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1] 죄는 하나님이 매우 미워하시는 것이다. 그는 죄를 매우 미워하시므로 사람들의 기도와 그들의 경건한 봉사마저도 미워하신다.

[2] 그들의 가장된 경건은 이중적인 악이다. 종교적인 위선은 하늘의 하나님께 모든 것 중에서도 가장 가증스러운 것이다. 제롬(Jerome)은 이 귀절을 그리스도 시대의 유대인들에게 적용시키고 있다. 그들은 율법과 성전에 대해 매우 열심인 척 했으나, 그들의 손을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의 피로 채움으로써, 그들의 죄악의 그릇을 가득 채웠고, 따라서 그들 자신과 그들의 모든 봉사는 하나님께 가증스러운 것이 되었다는 것이다.


회개와 복종의 요청(이사야 1:16-20)

하나님은 그들의 죄를 고집하는 한은 예배가 그들의 죄를 속하기에 불충분한 것으로 여기시어 거절하셨다. 그러나 그는 그들을 절망적인 상태에도 거절하시지는 않으셨다. 즉 여기에서 그는 그들의 예배가 상달되는 것을 방해했던 그들의 죄를 버리라고 요청하고 계시다. 그렇게 되면 모든 것이 잘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트집을 잡으셨다고 말하지 않게 하라. 아니 하나님은 화해의 방법을 제안하신다. 여기에서 다음 사실들을 관찰토록 하자.

Ⅰ. 회개와 개심을 요구했다. "만일 너희 제물이 열납되고, 너희 기도가 응답 받게 되기를 원한다면, 너희는 올바른 목적으로 일을 시작해야 하느니라. 나의 법도로 전향하라(갈대아 역은 이 권유를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율법판 제2면에 기록되어 있는 너희의 의무를 유념하라.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너희 믿음의 행위가 상달되리라고는 기대하지 말라." 공의와 자선이 결코 무신앙와 불경스러움을 속죄해 주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기도와 제물이 결코 사기와 압제를 속죄해 주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에 대한 의논,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보편적인 의의 한 가지인 것과 마찬가지로, 순결한 믿음의 한 가지이기 때문이다.

1. 그들은 "악행을 그쳐야" 한다. 더 이상 잘못을 행하지 말고 더 이상 무죄한 피를 흘려서는 안 된다. 이것은 스스로 자신들을 씻으며 "스스로를 깨끗케 하라" 는 것을 의미한다(16절). 그것은 그들이 범한 죄를 슬퍼할 뿐 장차 그 행실을 끊어버리고, 그것으로 기울어지는 모든 부도덕한 감정과 취향을 없애는 것이다. 죄는 영혼을 더럽힌다. 그러므로 우리의 과업은 죄를 회개하고 떠나 하나님께로 돌아섬으로써 우리 자신을 씻는 일이다. 우리의 악행 - 이것은 세상 사람의 눈에 나타난다 - 을 버려야 할 뿐만 아니라 죄의 온갖 더러운 행실 - 이것은 하나님의 눈 앞에 드러나는 것이다 - 곧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죄의 뿌리와 습관도 버려야 한다. 이러한 악행이나 죄악들이 모두 없어져야 한다.

2. 그들은 "선행을 배워야" 한다. 이것은 그들의 회개를 완성하는 데 필요했다. 악행을 그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으며, 선행을 배워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자.

(1) 우리는 실행해야 한다. 악행을 그칠 때 또 다시 게을러지기 때문이다.

(2) 우리는 선을, 주 우리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그리고 유익을 가져올 선을 행해야 한다.

(3) 우리는 그것을 잘 행해야 한다. 올바른 태도로 올바른 목적을 위해 선을 행해야 한다.

(4) 그리고 우리는 선행을 배워야 한다. 우리는 우리 의무에 관한 지식을 얻고 그것에 관해 조사하고, 그것을 돌보는 수고를 기울여야 하며, 우리 자신을 그것에 익숙하게 해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가 그 일에 쉽게 다가서게 되고 선을 행하는 이 거룩한 일의 숙련공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그들이 지금까지 실패해 왔던 것, 곧 율법판 제 2 면의 의무를 잘 이행할 것을 특별히 강권하고 있다. "공의(심판)을 구하라. 옳은 것을 조사하여, 그것을 행하도록 하라. 너희 의무의 길을 지키고, 부주의하게 행하지 않도록 노력하라. 선행할 기회를 찾으라. 학대 받는 자를 도와 주라. 바로 너희 자신들이 학대했던 그들을 도와 주라. 그들의 짐을 덜어 주라(58:6). 너희 손에는 권력이 있으니, 그것으로 다른 사람들이 학대하는 자들을 돕는 데 사용하라. 왜냐하면, 그것이 너희 과업이기 때문이다. 특히 고아와 과부에게 관심을 기울이면서, 해를 당한 자들의 원통함을 갚아 주라. 고아와 과부는 약하고 무력하기 때문에, 교만한 자들은 그들을 짓밟고 학대한다. 법정에서 재판석에서, 기회있을 때마다 그들을 위해 옹호하라. 자기 자신을 위해 어떻게 말해야 할지, 그리고 너희의 친절에 대해 어떻게 사례해야 할지 모르는 자들을 위해 말해 주라." 우리는 이 세상에서 선을 행하는 것이, 진실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임을 기억하자. 그리고 정의와 자선의 행위는 모든 번제와 제물들보다도 더욱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

Ⅱ. 올바로 이치를 따지는 법정에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공의롭게 대하셨다는 것에 대한 논증을 펴신다.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18절). 너희 손에 피가 가득한 한, 비록 너희가 무수한 제물을 가져올지라도, 나는 너희와 상대하지 않겠다. 그러나 너희가 자신들을 씻고 깨끗이 한다면, 너희가 내게 가까이 오는 것을 환영하겠다. 오라, 우리가 그 문제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죄와의 맹약을 끊어버리는 자들, 그리고 그러한 자들만이 하나님과의 언약과 교제 안에 들어오도록 환영받을 것이다.

하나님은 이전에는 그들이 당신의 전에 오는 것을 금하였으나, 여기에서는 "오라" 하고 말씀하고 있다(약 4:8 참조). 아니 오히려 이러했다. 즉 그들 가운데에는 "우리가 금식하되 주께서 보지 아니하심은 어찜이니이까?" 하고 말하는 자들처럼(58:3), 하나님께서 그 숫한 제물들을 경홀히 여기심으로써 자기들이 모욕을 당한 것으로 간주한 자들도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을 냉혹한 주인으로서, 즉 즐겁게 해드리기에는 불가능한 자로서 진술했다. "오라"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우리가 그 문제를 공정하게 토론하자. 나는 내 길은 공평하나 너희 길이 공평치 않다는 것이(겔 18:25) 밝혀지리라는 것만큼은 의심치 않는다." 신앙은 이성(理性)을 자기편으로 삼고 있다. 이 세상에는 우리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행해야 할 모든 이유가 있다. 하늘의 하나님은, 당신을 반박하며 당신의 처사가 잘못 되었다고 생각하는 자들과 이치를 따질 만큼 스스로를 낮추신다. 왜냐하면,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는, 의로우시기" 때문이다(시 51:4). 그 송사는 단지(여기에서 처럼 매우 공정하게) 진술되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그 결과는 스스로 결정될 것이다.

하나님은 여기에서, 그들이 하나님과 어떤 조건에 놓여 있는지에 대해서(에스겔서에서와 같이. 겔 18:21-24; 33:18, 19) 보이시고 나서, 그들로 하여금 그러한 조건이 올바른지 합당치 않은지를 스스로 판단하도록 하신다.

1. 변론해보더라도 그들은 자기들이 회개하고 개심한다면 이전의 범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총을 되찾을 수 있다는 것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것을 너희는 기대해도 좋다" 고 하나님은 말씀하시니, 그것은 매우 친절한 일이다. 그 누가 다른 어떤 조건에서 그것을 바랄 얼굴을 가질 수 있겠는가?

(1) 요구 조건은 지극히 작은 것이다. 즉 "단지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일부의 해석대로) 너희가 순종하기로 동의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너희가 너희 뜻을 하나님의 뜻에 종속시키고 그것에 순응하며, 모든 일에 있어서 너희 자신을 무한히 지혜롭고 선하신 분에 의해 다스림을 받도록 맡기기만 하면 된다." 여기에는 이전의 완강함에 대한 형벌이 없으며, 멍에가 더 무거워지거나 그들 목의 속박이 더 가해지는 일이 없다. 단지 "여지껏 너희가 사악하고 순종치 않았고, 또 너희 자신에게 유익한 것에 따르려 하지 않았으나, 이제는 순종하면서 다스림을 받으라."

하나님은 "만일 너희가 완전히 복종하면" 이라 말씀하시지 않고, "만일 너희가 즐겨 그리하면" 이라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즐거이 하려는 마음이 있다면, 그것은 용납되기 때문이다.

(2) 이에 대해 약속되어 있는 것은 매우 크다.

[1] 그들의 모든 죄는 용서될 것이며 더 이상 언급되지 않을 것이다. "비록 그것이 주홍과 진홍처럼 붉을지라도, 비록 너희가 피의 범죄 아래 놓여 있을지라도, 너희가 회개하면 그것마저도 용서될 것이며, 너희는 하나님 보시기에 눈같이 희게 될 것이다" 라고 했다. 아무리 중한 죄인들도, 만일 진실로 회개하면, 그 죄를 사함받을 것이며, 따라서 그들의 양심도 평정을 얻고 정결케 될 것이다. 우리의 죄는 주홍빛과 진홍빛, 짙게 물들고 2 중으로 물든 물감과 같았다. 즉 처음에는 원죄라는 것이 직물에 물이 들었고, 나중에는 실행죄가 옷에 물이 든 것이다. 또 비록 우리가 여러 번 뒷걸음질 쳐서 죄로 빠져들어갔을지라도, 그리고 옷감을 주홍빛으로 염색하듯이 그 속에 오래 젖어 있었을지라도, 용서의 긍휼은 완전히 그 얼룩을 없앨 것이며, "우슬초로" 정케하는 것처럼 자비에 의해 정결케 되기 때문에 "우리가 정케 될 것이다" (시 51:7). 우리가 회개와 개심으로써 우리 자신을 깨끗케 한다면(16절) 하나님은 완전한 사면으로써 우리를 희개 만들 것이다.

[2] 그들은 그들이 바랄 수 있는 모든 행복과 위로를 얻게 될 것이다. "오직 즐겨 순종하기만 하라. 그러면 너희가 약속의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다. 너희는 새 언약의 천국인 가나안의 모든 축복을, 그 땅의 모든 유익을 얻을 것이다. 계속 죄를 범하는 자들은, 비록 훌륭한 땅에 거할지라도 위로와 함께 그 소산을 먹을 수 없다. 범죄는 모든 것을 쓰라리게 한다. 그러나 죄가 사해진다면, 피조물이 주는 위로도 참된 위로가 될 것이다.

2. 변론을 해 보더라도 계속 고집을 부려 불복종한다면, 멸망하도록 버림당하고 율법 판결이 그들을 처형하리라는 것 이외에는 다른 것을 기대할 수 없었다. 무엇이 이 보다 더욱 공정하겠는가?(20절) "너희가 거절하여 배반하면, 너희가 하나님의 통치를 계속 배반하고 하나님의 은혜의 제안들을 거절한다면, 너희가 칼에, 너희를 멸하도록 명령받은 너희 원수들의 칼에 - 너희에 대적할 하나님의 공의, 진노, 복수의 칼에 삼키우리라. 왜냐하면, 이것은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며 그가 그 자신의 영예를 보전하기 위해 이행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주권의 다스림을 받지 않으려는 자들은 분명히 그리고 마땅히 그의 칼에 삼키울 것이다.

" 그리고 이제 생명과 죽음, 선과 악이 이처럼 너희 앞에 놓여 있다.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가 이 공의를 반대하거나 하나님의 조건에 순종하지 않을 이유는 무엇이겠는가?"


타락된 예루살렘(이사야 1:21-31)

Ⅰ. 유다와 예루살렘의 무서운 타락이 슬프게 탄식되고 있다. 다음을 살펴보자.

1. 그 궁성은 하나님께와 그리고 사람들 중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의 유익에 얼마나 신실된 성읍이었으며, 그 민족과 그 공적 유익에 얼마나 신실되엇었는가? "공평이 거기에 충만하였다." 즉 공의가 거기에 놓여진 재판의 보좌 곧 "다윗 집의 보좌" 위에서(시 122:5) 잘 집행되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그 행실에 있어서 정직했고, 불의한 일을 행하기를 싫어했다. "의리가 그 가운데 거하였었다." 항상 그들의 궁과, 그들의 모든 거처에 임하였었다. 즉 이따금씩 소용있을 때에만 의가 불리운게 아니라 항상 거기에 자리잡고 있었다. 거룩한 성이나 궁성들, 신앙이 고백된 장소나 정치가 행해지는 장소도 신앙이 그 안에 거하지 않는다면, 그 의무에 신실하지 못한다.

2. 그런 성읍이 지금은 어떻게 되었는가? 그 아름답고 정숙한 신부가 이제 파락하여 창기가 되었다. 의(리)가 더 이상 예루살렘에 거하지 않았다. 살인자들은 처벌되지 않은 채,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살았다. 아니 방백들 자신도 매우 잔인하고, 포악했으므로, 살인자보다 낫지 않았다. 무죄한 사람들은 이러한 재판장의 법정의 피해보다는 산적이나 강도의 무리가 주는 피해를 보다 쉽게 막아 낼 수 있었다. 조상들 때에는 덕과 결백으로 유명했던 어떤 가문이나 백성이, 사악해지면 그들의 죄악은 그만큼 더 가중한 것이 된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그러한 자들이 타락하면 모든 사람들 중 가장 악한 자들이 되고 만다. "원래는 가장 선했던 자가 타락했을 때에는 가장 악하게 된다" (눅 11:26; 전 3:16; 렘 22:15-17 참조).

(1) 예루살렘의 부패함은 비유로써 예증되어 있다. "네 은은 찌끼가 되었도다" (22절)고 했다. 조상들의 성품과는 반대되는 성품을 지니고 있는 치리자들의 이러한 타락은, 화폐 가치가 떨어지면 그 은이 찌꺼기 되듯이, 그 나라에 큰 수치와 피해를 준다. 의로운 방백과 의로운 성읍은 곳간에 있는 은과 같으나, 불의한 방백과 성읍은 쓰레기 더미에 있는 은과 같다. "어찌 그리 금이 빛을 잃었는고!" (애 4:1) "너의 포도주에는 물이 섞였도다." 그리하여 그것은 맛없고 시게 되었다.

어떤 사람은 이 모든 것을 문자적으로 해석한다. 즉 그들이 판 포도주에는 물이 섞여 반은 물이었다. 그들이 지불한 돈도 가짜였고, 따라서 그들은 거래하는 모든 사람을 속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상징적으로 해석되는 게 좋으리라. 즉 공의는 그들의 방백들에 의해 악용되었고, 믿음과 하나님의 말씀은 제사장들에 의해 궤변으로 속여졌고, 그들이 원하는 대로 이용되었다. 은찌끼는 은처럼 빛날 수도 있고, 물이 섞인 포도주는 포도주 빛깔을 보유할 수도 있으나, 그 어느 것도 가치는 없다. 이처럼 그들은 덕과 공의의 외양에 겉치례를 지녔지만 그 참된 지각은 어느 것도 갖고 있지 않았다.

(2) 몇 가지 사례로써 예증되어 있다(23절).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충성하도록 그리고 그의 율법에 복종하도록 지켜야 할 너의 방백들이 스스로 패역하여 하나님과 그의 율법을 무시하였도다. 도둑들을 규제해야 할 자들(교만하고 부유한 압제자들, 가장 나쁜 도적들, 그리고 그보다 더 낫지 않는, 채권자들을 고의적으로 사기하는 자들)이 스스로 도적과 짝하며, 그들을 묵인해 주고, 그들처럼 행한다. 그리고 그들은 방백이고 그 손에 권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더욱 안전하고 성공적으로 그런 일을 행한다. 그들은 그들이 보호해 준 도적들과 불법적으로 얻은 것을 나누어 가지며" (시 50:18), "그들과 함께 제비를 뽑는다" (잠 1:13, 14).

[1] 그들의 지위에서 얻는 이득이 그들이 목표하는 모든 것이며, 옳든 그르든 그들은 그 지위를 최대한으로 이용하려 한다. 그들은 선물을 좋아하며, 댓가를 바란다. 그들은 봉급 즉 그들의 정책상의 수입과 부수입에 마음을 두며, 그것을 탐내며, 결코 만족을 찾을 줄 모른다. 아니, 그들은 은밀한 사례가 생기는 일이면 아무리 율법과 공의를 거스리는 일이라 할지라도 할 것이다. 뇌물과 사례금은 언제고 그들의 눈을 멀게 할 것이고, 그들로 하여금 판단을 그르치게 할 것이다. 이러한 것들을 그들이 사랑하며 열심히 추구한다(호 4:18).

[2] 그들의 직책상의 의무는 그들의 관심사가 아니다. 그들은 해를 당한 자들을 보호하고 그들에게 온 고발된 사건은 조사해 보아야 했다. 그밖의 무슨 목적으로 그들이 등용되었겠는가? 그러나 "그들은 고아를 위하여 신원치 아니하며," 즉 고아를 보호하는 데 관심을 기울이지 아니하며, "과부의 송사를 수리치 아니한다." 왜냐하면, 가난한 과부들은 자기들을 위해 길을 마련해 주고 그 송사를 제기해 줄 뇌물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압제 당하는 자들의 후원자가 되어야 할 자들이 오히려 가장 큰 압제자가 될 때, 그들은 크게 책임을 추궁당할 것이다.

Ⅱ. 이러한 비탄거리들을 바로잡으려는 결의(24절)가 있다. "그러므로 주 만군의 여호와 전능자 - 말한 것을 이룰 능력을 지닌, 그리고 그의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만군을 지휘하며, 그의 이스라엘을 위해 그 능력을 사용하는 - 그가 말씀하시되, 슬프다. 내가 장차 내 대적에게 보응하여 내 마음을 편케 하리라." 다음을 관찰하자.

1. 사악한 백성, 특히 잔인하고 포악한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원수요, 그의 대적이며, 또 그렇게 간주되고 있으며 앞으로 그렇게 다루어질 것이다. 거룩한 자손들이 타락한다면, 자기 집안의 원수가 된다.

2. 그들은 하늘의 아버지께 하나의 짐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마음을 편케 하시겠다는 내용 속에 암시되어 있다. 어떤 일도 견딜 수 있는, 아니 모든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이스라엘의 전능자께서 사람들의 죄악으로 괴롭힘" 을 당하는 것을 괴로워하신다(43:24; 암 2:13).

3. 하나님은 이처럼 더 이상 인내해 줄 수 없는 자들에게 복수함으로써, 그 짐을 덜 방법과 시기를 찾아 내실 것이다. 하나님은 여기에서 그렇게 될 것을 예상하시고 개가를 부르는 자와 같이 말하고 계신다. "슬프다. 내가 내 마음을 편케 하리라." 하나님은 무거워서 "신음하고 있는" 이 세상을 편케 할 것이다(롬 8:21, 22). 그 이름에 붙어있는 비난으로부터 그 이름을 편케 할 것이다. 그는 "그의 원수에게 복수하심" 으로써, 그의 대적에게서 편케 될 것이다. 그는 그들을 "그의 입에서 토하여 내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에게서 편케 될 것이다(계 3:16). 그는 그의 "원수갚는 날이 그의 마음에" 있다는 사실을 즐겁게 말씀하고 있다(63:4). 만일 하나님을 고백하는 백성이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답게(4절) 그의 형상을 따르지 않는다면, 그들은 이스라엘의 전능자로서의 그의 손의 무거움(심판)을 맛보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 그들을 위해 일하곤 했던 하나님의 능력이 그들을 대적하기 위해 무장될 것이다. 하나님은 다음 두 가지 방법으로 이러한 슬픔에서 그 자신을 편케 할 것이다.

(1) 하나님의 교회를 개혁하고, 그 타락한 재판관들 대신에 선한 재판관들을 일으킴으로써 하시리라. 교회에는 아무리 많은 찌기가 있을지라도, 버림을 당하지 않고 다시 깨끗게 될 것이다(25절). "내가 너의 찌끼를 온전히 청결하여 버릴 것이라. 내가 잘못된 것을 고치리라. 악습과 불경스러움이 억압당하고 수치를 당케 될 것이며, 압제자들은 해임되어 악을 행하는 그 권세를 박탈당할 것이다." 사태가 아무리 나쁠지라도, 하나님은 그것을 바로잡고 완전한 개혁을 일으키실 수 있다. 하나님은 그가 시작하신 것을 마치실 것이다. 혼잡물을 다 제하여 버릴 것이다.

다음을 주목하라.

[1] 사람의 개혁은 하나님 자신이 하시는 역사이다. 그러므로 언제고 사람의 개혁이 행해진다면, 그것을 이루어 내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내가 나의 손을 네게 돌리리라. 나는 내가 처음에 심었던 신앙을 회복시키기 위해, 그렇게 행하리라." 하나님은 그의 손을 돌리심으로써, 그것을 쉽게 행하실 수 있다. 그는 그것을 충분히 행하신다. 드러난 여호와의 팔 앞에서 어떤 도전이 설 수 있겠는가?

[2] 하나님은 선한 치리자들과 사역자들을 세워 주시는 축복을 통해 하실 것이다(26절). "내가 너의 사사들을, 행악자들에게 대하여는 법을 수행하도록 하기 위해 처음과 같이 회복할 것이며, 공공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너의 모사들을 본래와 같이 회복할 것이라." 새로 세워질 그들은 쫓겨났던 바로 그 사람들이거나, 그들과 같은 성품을 지닌 다른 사람일 것이다.

[3] 그는 사람들 가운데 공평과 의를 회복시킴으로써(27절), 또 사람들의 마음속에 공공의 원칙을 심어 주고, 그 원칙에 의해 그들이 생명을 다스림으로써, 그것을 행하신다. 사람들은 외적인 제재에 의해 많은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심판하는 영" 으로서의 "그의 영" 의 감화력을 통해서 그것을 효과적으로 수행하신다(4:4; 28:6; 시 85:10, 11 참조).

[4] 한 백성의 개혁은 그들의 구원과 개종이 될 것이다. 죄는 가장 나쁜 포로, 가장 나쁜 노예이다. 그리고 위대하고 영원한 구원은 "이스라엘의 모든 죄악에서 구속되는 것" 이며(시 130:8), 그 복된 구속자는 야곱에게서 경건치 않은 것을 돌이키시며(롬 11:26),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는" (마 1:21) 자이시다. 여호와의 구속함을 받은 모든 자들은 개종자들이 될 것이며, 그들의 개종은 곧 그들의 구원이다. "그 귀정한 자는 또는(난외에 있는 대로) 돌아오는 자는 의롭게 구원되리라." 하나님은 공평과 의로 구원을 위해 우리를 준비시키심으로써 우리를 위해 구원을 역사하신다.

[5] 한 백성들의 덕행이 소생되는 것은 그들의 영예가 회복되는 것이다. "그러한 후에야 네가 의의 성읍이라. 신실한 고을이라 칭함이 되리라." 즉

첫째, "네가 그렇게 될 것이다." 장관들의 개심은 그 성읍과 나라의 개혁으로 향하는 좋은 한 걸음이 된다.

둘째, 너는 그러하다는 칭찬을 받게 될 것이다. 어떤 도시에게 있어서 의의 성읍이라는 칭함을 받으며 신실하던 성읍이 창기가 되었을때(21절), 잃어버린 옛날의 영예를 회복한다는 것보다 더 큰 칭송은 있을 수 없다.

(2) 개심하기를 싫어하는 자들은, 그 신실한 성읍에 함정이나 치욕으로써 남아있지 않게 하기 위해 잘라버림으로써 하나님 자신이 평안을 얻으리라.

[1] 여기에서 경고되는 있는 것은 완전 멸망이다. 그들은 멸망하고 패망할 것이다. 단지 벌을 받고 징계당하기만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의 근절이 시온의 구속에 필요할 것이다.

[2] 그것은 전반적인 멸망으로서, 거기에는 패역한 자와 죄인이 포함될 것이다. 즉 일체의 신앙을 완전히 던져버린 공공연한 침략자들, 그리고 신앙 고백이라는 구실 아래 사악한 생활을 살아가는 위선자들 - 그들이 모두 함께 패망할 것이다. 왜냐하면, 신앙을 반박하는 자들이나 신앙을 가식으로 내세우는 자들 모두 하나님께 똑같이 가증한 자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자기들이 여호와께 연합해 있었으나, 이제는 "여호와를 버린 자도," 도관 속에 있는 물은 그 수원에서 끊어질 때 곧 없어지는 것처럼, "멸망할 것이다."

[3] 그것은 불가피한 멸망이다. 피할 길이 없다.

첫째, 그들의 우상, 즉 "그들이 기뻐하던 상수리나무와 그들이 택한 동산은" 그들을 도울 수 없을 것이다. 그 신상들과 쓰레기 신들은 그들을 도울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숲과 나무 아래서 그 신들을 숭배했고, 그것들을 좋아하여 집착했으며, 그것들을 위해 참되신 하나님을 버렸고, 우상 숭배가 공적으로 지지되지 않았던 때에도 자기 자신들의 동산에서 비밀히 그것을 숭배했다. "이것이 패역한 자와 죄인들의 행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제 회개하는 모습이 아니라 실망하는 모습으로 그것을 부끄러워하게 될 것이다" (29절). 그들은 그들의 우상으로 인하여 수치를 당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지금까지 그 우상에게 온갖 아첨을 다했지만, 결국에는 이득이 없음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상들 자신도 잡혀갈 것이다(46:1, 2). 피조물을 의뢰하는 자들은 스스로 수치르 마련해 놓는 것에 불과하다. "너희는 상수리나무와 동산을 좋아했다. 그러나 너희 자신은"

1. "시들고 말라버려, 그 아름다운 모습을 모두 잃어버린 잎사귀 없는 상수리나무같이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저주한 무화과나무처럼, 열매없는 나무는 당연해 잎사귀도 없게 된다.

2. "물없는 동산 같으리라. 즉 그 위에 비가 내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발로 물대기도(신 11:10) 하지 않았으며, 샘이 없는(아 4:15) 동산이니, 결과적으로 메마르며, 그 동산의 모든 과실은 썩었도다." 우상을 의지하거나 "혈육으로 그 권력을 삼는" (렘 17:5, 6) 자들은 이렇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들은 결코 하나님이 광야나 물없는 땅 같지는 않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렘 2:31).

둘째, 그들은 그들 자신을 도울 수 없게 될 것이다(31절). "강한자가 곧 부러져 산산조각이 날 뿐만 아니라 쉽게 불붙는 삼오라기 같을 것이다." 그리고 견고케 되어 그 자신을 안전케 해 주기를 바라던 그의 공적(난외에는 이렇게 풀이하고 있다)은 그 자신의 삼오라기에 대한 불티 같아서, 그에게 불을 놓을 것이며 그와 그의 공적이 함께 불탈 것이다. 그 자신의 계획이 그의 멸망의 원인이 될 것이다. 그 자신의 죄는 하나님의 진노에 불을 붙여, 지옥 밑바닥까지 태울 것이며, 그것을 끌 사람이 없을 것이다." 죄인이 그 자신을 삼오라기와 나무 그루터기같이 만들고 하나님은 그에게 친히 사르는 불같이 되실 때, 무엇이 그 죄인의 완전 멸망을 막을 수 있겠는가? 이제 이 모든 것은

1. 아하스의 통치로 인한 가증스러운 타락 후, 히스기야 시대에 이루어졌던 복된 개혁 사업에 적용될 수 있다. 그때에는 선한 사람들이 발탁되었고, 악인의 얼굴이 수치로 가득 찼었다.

2. 그들이 바벨론의 포로에서 돌아온 사건에 적용될 수 있다. 그 사건은 그들을 우상 숭배에서 완전히 치료했던 것이다.

3. 복음의 교회와 성령 강림에 적용될 수 있다. 이것에 의해 신약 교회는 새 예루살렘 곧 의의 성읍이 될 수 있었다.

4. 그리스도의 재림에 적용될 수 있다. 그 때에 그리스도는 그의 타작마당 곧 그들 전답을 정하게 하사. 알곡을 모아 곡간에 들이고, 죽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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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의 배은망덕

 

1:1 유다웃시야요담아하스히스기야 시대에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유다예루살렘에 대하여 본 이상이라

 

유다 왕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 - 이사야의 예언 활동은 웃시야 왕의 치세 말기에서 히스기야 왕에 이르기까지 약 60년간(B.C. 740-680년경) 계속된다. 이 기간은 평화와 전쟁이 교차하는 정치적 격변기이다. 웃기야와 요담 치하에서 남왕국 유다는 번영의 세월을 구가한다. 그러나 평화와 번영은 종교적 외식과 도덕적 부패를 낳고 그것은 다시 전쟁을 낳았다. 아하스는 수리아-에브라임 연합군과 싸우지 않으면 아니되었고(왕하 16:5), 히스기야는 앗수르 왕 산헤립의 침략을 방어해야만 하였다(왕하 18:13). 이 모든 것은 선지자에 의해 '백성들의 죄악에 따른 여호와의 심판'으로 정식화된다.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 - '아모스'는 히브리어로 '아모츠'(* )라고 발음되며, 선지자 아모스(* )와는 다른 사람이다. 델리취(Delitzsch)는 선지자의 아버지의 이름이 표기된 것은 그 역시 선지자였음을 나타내는 한 증거라고 말한다.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하여 - 선지자의 예언은 주로 남왕국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한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사마리아를 비롯한 앗수르와 바벧론 등의 주변 열국들까지도 예언의 범위에 포함시키고 있다(13-27장, 34장). 이런 사실로 미루어 어떤 주석가들은 본절의 표제가 기껏해야 1-12장에만 적용될 수 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바르게 이해한다면, 이들 열방들은 유다와 예루살렘과의 연관 속에서 다루어지고 있으며(Alexander), 주제에 있어서 이차적 중요성밖에 갖고 있지 않음(Calvin)을 알 수 있다.

 

이상(異像)이라 - '이상'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하존'은 본래 엑스터시한 상태에서의 시각적 경험을 뜻하는 말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 의미가 확대되어 후에는 예언 일반의 의미로 쓰이게 되었다. 구약 예언서 가운데 본서외에 오바댜와 나훔에서 이와 동일한 명칭을 붙이고 있다(옵 1:1;나 1:1, '묵시').

 
1:2,3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주인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막(표제)이 오르면 독자의 시선은 말할 수 없이 장중하고 엄숙한 대자연의 법정으로 인도된다. 대재판관(여호와)이 있고 피고(이스라엘)가 있다. 그리고 증인들(하늘과 땅)이 있다. 이 재판은 통상적인 절차를 따르지 않는다. 먼저 증인이 호출된다:

'하늘이여...땅이여...'(2a절). 이어서 대재판관이 피고에 대한 기소장을 읽는다(2b, 3절).

그 죄명은 반역죄이다. 선지자는 이 광경을 사람들이 잊을 수 없도록 아름답고도 슬픈 4행시로 노래지었다.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 여호와께서 말씀하실 때, 세계는 그 앞에서 조용히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서 선지자는 특별히 하늘과 땅을 지목해서 부른다. 그 까닭은 하늘과 당이 모든 시대, 모든 장소에 걸쳐 이스라엘 역사와 함께하면서 그 백성에 대한 여호와의 부성적(父性的)인 사랑과 보살핌을 목격하였을 뿐 아니라 더욱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율법을 주셨을 때 그 증인으로 참여한 바 있기 때문이다(신 4:26, 36;30:19;31:28;시 50:4, 5).

 

내가 지식을 양육하였거늘 - 이스라엘과 여호와의 관계가 부자(父子) 관계에 비유된다. 처음부터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자식이었고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아버지셨다(출 4:22;호 11:1). 이러한 관계성은 약속의 씨앗이라는 형태로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말씀에서 암시되었다(창 15:4). 그 씨앗은 자라서 출애굽의 감격과 더불어 한 국가로서의 이스라엘의 탄생이라는 탐스러운 결실로 이어진다. 여호와는 갓태어난 이스라엘을 '자기 눈동자같이' 보호하고 인도했으며 온갖 향기로운 것들로 먹게 하셨다(신 32:8-14).

그 결과, 이스라엘은 장성한 성년이 되어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난'(신 26:19;28:1) 이름을 얻기에 이르렀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이에 가장 잘 부합되는 시대를 찾는다면 다윗과 솔로몬 시대, 그리고 웃시야와 요담의 시대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그 자식인 이스라엘에 대한 여호와의 지극한 돌보심이 개역 성경에는 '양육하였다'는 한 단어로 되어 있으나 히브리어 원문에는 '키우고'(* , 깃달티)와 '향상시켰다'(* , 로마므티)는 두 단어로 되어 있다. '깃델'과 '로멤'은 종종 동의어로 사용된다 (23:4;겔 31:4).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 '거역하다'로 번역된 '파솨'(* )는 본래 '도망치다', '달아나다'는 뜻을 갖고 있는데, 본문에서는 외적인 행위와 내적인 의지에서 여호와와의 모든 관계를 단절하고 등을 돌린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 이스라엘은 지각이나 통찰력을 완전히 상실해 버렸다. 이스라엘이라는 주어에 종속된 '알다'(* , 야다)라는 동사에는 목적어가 없다. 그러므로써 그 표현은 더욱 강력한 것이 되었다. 70인역(LXX)은 그 뒤에 여호와를 가리키는 '나를'(* , 메)이라는 목적어를 삽입하였다. 반면에 혹자는 주인을 가리키는 '그를'(him)이라는 목적어를 보충하였다(Gesenius, De Wette). 그러나 본문 그대로가 그 기소를 더욱 통렬한 것이 되게 한다(Leupold). '알다'와 '깨닫다'의 두 동사는 모두 경험에서 직접 취해진 말이다. 여호와에 대한 이스라엘의 지식은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출애굽과 같은 역사적 경험으로부터 주어졌다. 언약 관계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시는 여호와를 통하여 이스라엘은 많은 지식을 소유할 수 있었다(출 6:7). 그러나 그 지식이 삶으로 연결되지 못하였다는 데 이스라엘의 문제가 있다.

 

1:4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슬프다 - 여호와의 기소가 너무나 충격적이었던 것만큼 이를 반향(反響)이라고 하듯 그 뒤를 따르는 화답은 '슬프다'는 감탄사로 시작된다. '슬프다'로 번역된 '호'(* )는 장례식의 애도를 표시하는 비탄의 감탄사(렘 22:18)로서 탄식이나 저주의 표현에 자주 쓰인다(G.E. Wright). 이 말은 다른 곳에서 '화로다' 혹은 '화있을진저' 등으로도 번역되었다(5:8;6:5;10:5;28:1 등등).

 

범죄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 - 이스라엘은 정치적, 민족적 공동체로서 자신을 여호와의 나라(백성)라고 이해할 뿐 아니라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초자연적 약속에 근거하여 자기를 여호와의 자녀(종자)라고 이해하였다. 자기 정체성(identity)에 대한 이러한 두 가지 이해는 이스라엘의 삶을 실제적으로 가능케 한 원동력으로서 항상 작용하였다. 여호와의 나라로서 이스라엘은 당연히 '거룩한 나라'(* , 고이 카도쉬, 출 19:6)가 되도록 기대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범죄한 나라' (* , 고이 호테)로 전락하였다. '호테'는 '과녁을 빗나가다'(miss the mark)는 뜻을 가진 동사 '하타'(* )의 능동 분사형으로, 이스라엘이 습관적으로 계속해서 죄를 짓고 있음을 보여준다. 여호와의 백성으로서 이스라엘은 '거룩한 백성' (* , 암 카도쉬, 신 7:6)이 되도록 기대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허물 진 백성'(* , 암 케베드 아온)으로 전락하였다. '케베드 아온'은 무거운 죄짐을 지고 허덕이는 백성의 모습을 묘사하는 말이다.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 - 여호와의 자녀로서 이스라엘은 '거룩한 씨' (* , 제라 코데쉬, 6:13)가 되도록 기대되었으나, 이런 기대와는 정반대로 '행악의 종자'(* , 제라 메레임)로 변질되고 말았다. 이 말을 속격으로 받아들여 '행악자의 자손'이라고 번역하기보다는 오히려 동격의 의미에서 '행악자들로 구성된 자손'이라고 애해하는 것이 더 낫다(Gesenius' Hebrew Grammar, ed. E. Kautzsch). 여호와께서 양육한 '자식'(* , 바님)은 어찌되었는가 ? 그는 '행위가 부패한 자식'(* , 바님 마쉬히팀)이 되었다. '마쉬히팀'은 '타락한'(Gesenius, Henderson), '남들을 부패시키는'(Leupold), '파괴적으로 행동하는'(Lange), '변질된'(Calvin) 등으로 번역된다. 시적 평행법으로 구성된 이러한 묘사들은 이스라엘이 상습적이고도 계속적인 범죄 행위로 인하여 스스로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악해졌을 뿐 아니라 외적으로도 파괴적인 결과만을 산출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물러갔도다 - 먼저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버렸다. 나아가그들은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경멸하고 업신여겼다. 병행하는 두 구절에서 각기 '버리다'와 '경멸하다'로 번역된 '아자브'(* )와 '나아츠'(* )는 동이가어로서, 두 단어 모두 언약과 관련하여 여호와를 배반하고 이방 신들에게 전향하는 행위를 나타낸다(민 14:11;신 31:16, 20;32:19;삿 2:12 등). 랑게(Lange)는 '버렸다'를 소극적 죄악으로, '경멸하였다'를 적극적 죄악으로 분류하였다.


 

1:5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더욱 더욱 패역하느냐 온 머리는 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너희가 어찌하여...패역하느냐 - 주께서는 이스라엘을 회개케 할 목적으로 가능한 모든 조치들을 취하셨다. 그러나 그가 새로운 조치들을 취할 때마다 그 결과는 더욱더 악화되었다:'더욱더 패역하느냐.' 실로 극한점에 이른 저들의 죄악 때문에 주의 징계로써도 돌이키게 할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패역하다'(* , 사라)는 '진실에서 이탈하다'는 뜻이며, 여기서는 여호와를 배신하고 등을 돌린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70인역(LXX)은 이 말을 '불법을 더하다'로 번역하였다.

 

온 머리는...온 마음은 - '머리'(* , 로쉬)와 '마음'(* , 레바브)이란 명사에 관사가 수반되지 않았으므로 '모든 머리와 모든 마음'(every head and every heart)으로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Hitzig, Lange). 그러나 관사의 생략은 시적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 자주 허용되었으며(9:12 참조), 또한 이 말이 인간의 신체에서 취해진 비유임을 고려할 때, '온 머리와 온 마음'(the whole head and the whole heart)으로 번역하는 것이 옳다(Alexander). 이것들은 일부 주석가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각각 다른 사회적 계층들(Hendewerk)이나 공동체의 내외적 상태(Umbreit)를 상징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사람의 신체 가운데 가장 중요하고도 치명적인 두 부분을 의미한다.


 

1:6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 뿐이어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유하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 머리와 마음이 병들고 지친 이스라엘의 내적인 황폐함은 그 정도가 얼마나 심한가를 좀더 인상적으로 보여주려는 선지자의 의도에 따라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는 처절한 모습으로 시각화되어 나타난다.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유하게 함 - 오래된 상처는 고름을 짜내야 하고 출혈을 막기 위해서는 붕대를 싸매야 한다. 그리고 상처 부위를 부드럽게 하고 치료를 촉진시키기 위해서는 기름을 발라주어야 한다(눅 10:34 참조). 그러나 이러한 통상적인 치료조차 받지 못했을 정도로 이스라엘의 피폐함은 심각했다.


 

1:7 너희 땅은 황무하였고 너희 성읍들은 에 탔고 너희 토지는 너희 목전에 이방인에게 삼키웠으며 이방인에게 파괴됨 같이 황무하였고

 

선지자의 시선은 병들고 상처입은 사람으로부터 이스라엘로 옮겨간다. 그는 고국 이스라엘의 황폐한 정경에서 율법의 저주를 본다. 여호와의 말씀을 무시한 자에 대해서 일찍이 율법은 경고하기를, '그 땅과 성읍이 황폐할 것'(레 26:33)이며, '알지 못하는 민족이 그 토지 소산을 먹을 것'(신 28:33)이라고 하였다. 이스라엘에 임한 일이 과연 그러하였다. 선지자에게 이 모든 일은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복을 받고 거역하면 저주를 받는다'는 무시간적이고 영원한 율법의 진리를 확증하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이방인에게 파괴됨 같이 황무하였고 - 이 말은 두 가지로 해석이 가능하다. (1) '이방인에 의해서 생기는 것과 같은 파괴'(Caspari, Lange, Knobel). 이것은 대부분의 주석가들에 의해서 채택되고 있으며 이방인을 파멸시키는 자로 명시하고 있는 앞 구절에서 강력한 근거를 얻고 있다. (2) '이방인에게 일어나는 것과 같은 파괴' (Delitzsch). 이것은 '파괴됨'(* , 마흐페카)이란 낱말이 옛적에 소돔 성에 임했던 무서운 파멸을 지칭하는 데 주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에 그 근거를 둔 것이다 (13:19;신 29:23;암 4:11). 이중 어느 해석을 취하더라도 이스라엘의 황폐된 모습에서 율법의 저주를 읽으려는 선지자의 시선에는 별다른 영향을 주지 않는다.


 

1:8 시온포도원의 망대 같이, 원두밭상직막 같이, 에워싸인 성읍 같이 겨우 남았도다

 

딸 시온 - '시온'은 성전의 고귀함 때문에 예루살렘에 붙여진 이름이다. 성경에서 '딸'(* , 바트)은 관용적으로 어떤 민족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다(47:1, '바벧론의 딸';시 45:12, '두로의 딸'). 시온과 이스라엘은 부분과 전체의 관계를 이룬다. 선지자는 '딸 시온'이란 말로써 사랑스럽고 정결한 이미지를 야기시킨 후 바로 뒤에서 정반대의 비유들을 대조시킴으로써 충격을 가중시킨다(Oswalt). 이 같은 기법은 3:17;4:4에서도 사용되었다.


 

1:9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조금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 같고 고모라 같았었으리로다

 

7절에서 암시된 '소돔과 고모라와의 유사성'에 의해서, 그리고 8절에서 처음 싹을 틔운 '남은 자' 개념에 의해서(4장 주제 강해, '남은 자(The Remmant)에 관한 역사적 이해' 참조) 본절은 이중적으로 결합된다. 한편으로, 이스라엘은 그 죄악의 격심함과 그에 따른 심판의 철저함에서 소돔과 고모라에 비견되었다. 이 비교는 여호와의 선민이라고 자부하는 이스라엘에게는 충격적이며 수치스러운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또 한편, 이스라엘에는 극소수의 남은 자들이 보존되어 있다는 점에서 소돔과 고모라와는 구별되었다. 이것은 이스라엘에게 매우 희망적인 것이었다. 부정과 긍정의 이런 이중적 의미는 사도 바울이 롬 9:29에서 본문을 인용할 때 전혀 손상됨이 없이 그대로 표출되었다. 즉 바울은 한편으로 아브라함의 혈통임을 자랑하고 유전만을 내세우는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여전히 유효함을 상기시키고, 다른 한편으로 혹독한 심판의 와중에서도 하나님은 교회를 위하여 소수의 참된 신자들을 남겨두신다고 위로하고 있는 것이다.

 

만군의 여호와(* , 야훼 체바오트). 이는 '하늘과 땅과 별들과 모든 거민들의 주님'(Alexander)이라는 뜻이다. 만군의 여호와는 그 전능하심으로써 이스라엘을 완전히 소멸시킬 수도, 남은 자를 보존하실 수도 있다. 만약 이스라엘이 그 악한 죄악에도 불구하고 살아 남을 수 있다면 그것은 여호와의 은혜 때문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형식적인 종교의 책망

 

1:10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찌어다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를 기울일찌어다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 2절과 같은 동사가 사용된다. 그러나 그 대상은 다르다. 죄악의 측면에서 볼 때 이스라엘의 죄는 소돔과 고모라의 죄와 거의 동일하다. 그 죄는 겔 16:49에서 '불의와 탐욕과 힘없는 자에 대한 착취'로 규정되고 있다. 그래서 선지자는 주저함이 없이 그들을 소돔의 관원과 고모라의 백성이라는 이름으로 부를 수 있었던 것이다. 시적 병행어로 기술된 '관원'과 '백성'은 나라 전체가 한결같이 부패하고 타락했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럼에도 그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알지 못한다. 따라서 심판의 전달자일 뿐 아니라 율법의 참된 해석가고 부름받은 선지자는 여호와의 율법(* , 토라)을 바르게 가르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것은 비난(11-15절)과 교훈(16, 17절)으로 진행되었다.

 

1:11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의 무수한 제물 - '제물'로 번역된 '제바힘'(* )은 '살해된 동물의 고기, 제물로 바쳐진 것'으로 피뿌리는 제물에 대한 포괄적인 명칭으로 언급되었다 (19:21;삼상 2:29;3:14). 이것은 13절에서 역시 '제물'로 번역된 '미느하트'(* )와 구별되는데, '미느하트'는 피 없는 제사 즉 식물로써 바치는 소제를 말한다. 제물의 종류와 횟수, 그리고 바쳐지는 경우에 대해서는 레위기 서론 7항을 참조하라.

 

 

1:12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 '너희에게'란 말은 문자적으로는 '너희의 손에서'이다. 에발트(Ewald)는 '너희에게'에 강조점을 두어 '그것을 누가 너 같은 사람에게 요구하였느뇨'로 해석한다. 반면에 알렉산더(Alexander)는 '그것을'에 강조점을 두어 '그따위 헛된 출석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로 해석한다.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 여기서 '마당'은 솔로몬 성전 주변의 경내를 가리킨다.

에스겔은 안뜰과 바깥뜰이 있다고 말한다(겔 8:16;10:5).


 

1:13,14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바요 월삭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 이 말은 첫째 여호와께서 백성들의 제사를 혐오하시는 까닭을 설명해준다. 그것은 그들이 제사와 더불어 악을 행하기 때문이다. 이 말은 둘째 여호아가께서 혐오하시는 대상이 무엇임을 밝히 보여준다. 그것은 제사 행위 자체가 아니라 제사의 근본 정신에서 이탈된 외식적인 행위이다. 본래 제사와 행악은 절대로 양립하지 못한다. 서로 배타적인 이 둘이 결합된 모양을 가리켜 성경은 '외식'이라 부른다. 가짜와 거짓을 싫어하시는 여호와는 이것을 견디지 못하신다. 진리이신 그분의 본성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위선적인 예배 행위에 대한 여호와의 태도는 14절에서 세 개의 동사로 보다 구체화된다:'싫다'-'귀찮다'-'지겹다'.

 

 

1:15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찌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가 가득함이니라

 

손을 펼 때에 - 문자적으로는 '손을 뻗칠 때'이다.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뻗는 것은 구약 시대에 가장 일반화된 기도 자세였다. 그것은 하나님께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접근하고자 하는 내적인 열망의 가시적 표현이라고 믿어졌다.

 

많이 기도할지라도 - 혹자는 이 말을 '중언 부언'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보다 직접적으로는 '큰소리로 오랫동안 기도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기도마저도 하나님께서는 불쾌할 뿐이다. 참되고 진실한 기도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뜻이 불의로 얼룩진 이 땅에서도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갈구하는 탄원이며, 그 일을 위해서 자신의 삶을 헌신하려는 거룩한 열망이다(주기도문 참조).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도는 헛된 몸짓과 공허한 울림 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도를 경멸하시는 이유가 명시되어 있다. 붉은 '피'(* , 다밈)는 '악을 행한다'(13절)의 시각적 표현이다. 즉, 이 '피'는 희생 제물의 피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문자적 혹은 상징적 의미에서의 악행을 의미하는 것이다(Calvin). 사해 사본의 이사야서는 이 말 뒤에 '너희 손가락은 불법으로 물들었다'는 구절을 첨가하였다.


 

1:16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업을 버리며 행을 그치고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여 - 그러나 하나님은 진노 중에라도 사랑을 기억하셔서 그들에게 당신이 진정으로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교훈하신다. 그것은 먼저 악에서 떠나라는 말로 제시된다. '스스로 씻으라'(* , 라하추)는 말은 원래 신체적, 의학적 의미에서 자신을 세척하라는 말이며, '스스로 깨끗케 하라'(* , 하자쿠)는 도덕적 의미에서 자신을 성결케 하라는 말이다. 이 두 말의 상관 관계에 대해 델리취(Delitzsch)는 앞의 씻음은 단번의 회개요, 뒤의 씻음은 날마다의 점진적인 성화라고 하였다.

 

1:17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선행을 배우며 - 악을 그치는 것만으로 하나님의 율법에 충분하다고 할 수 없다. 그 필요 충분 조건에 응하기 위해서는 선을 행해야 한다. 그러나 백성들은 영적으로 너무나 무지해서 선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은 초등 학문을 배우는 학생들처럼 이제라도 선행을 배워야 하는 것이다. 그들이 힘써 배워야 할 과목은 '공의'이며, 이 과목의 주된 학습 내용은 본절에서 세 가지 실천 사항으로 언급된다.


 

회개의 촉구

 

1:18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찌라도 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찌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양털같이 되리라 - 평행으로 이루어진 이 두 구절은 크게 두 가지로 해석된다. (1) '너희 죄가 주홍 같고 진홍 같다면, 그것이 어떻게 눈이나 양털처럼 희어질 수 있겠느냐 ?'(Kaiser, Marti, Michaelis 등). 이 해석에 따르면 하나님은 제사 행위를 통해서 그들의 죄를 중화시킬 수 있다는 환상과 착각에 빠져 있는 백성들을 조롱하고 계시다는 것이다. 그러나 히브리어 원문에는 이것을 의문문으로 해석해야 할 어떤 근거도 없다. 또 전후 문맥을 고려하더라도 이치에 맞지 않는다.

 

따라서 전통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다음 해석을 취한다. (2) '너희 죄가 주홍 같고 진홍 같을지라도, 눈이나 양털처럼 희어지리라'(Alexander, Delitzsch 등). 죄가 여기서 붉은색으로 표현된 것은 직접적으로는 피로 물든 손과의 연관성 때문이지만(15절),

종말론적인 표상과도 무관하지 않은 듯이 보인다. 일반적으로 흰색의 반대는 검은색이지만 종말론에서 희색의 반대는 붉은색이다. 흰색은 세마포를 입은 성도의 색이며 성결의 색으로 간주된다(전 9:8;단 7:9;마 17:2;계 1:14;3:4;7:9;19:8).

 

반면에 붉은색은 바벨론의 색이며 지상 나라의 색이며 마귀의 고유한 색이다(계 12:3, 9;17:4). 본문은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로 더럽혀진 이스라엘 사이에 변론을 가능케 하는 근거를 제시한다. 그것은 '...에도 불구하고'로 집약되는 하나님의 자유이며 사랑이다. 공의대로만 보자면 이스라엘은 사형을 언도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응보적 상벌의 법칙에 얽매이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의 주권적 자유로써 이스라엘을 변화시키시며 그들에게 새로운 미래를 주려고 하신다. 이러한 가능성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에게 하나님의 자유는 진실로 새로운 삶으로 결실한다.


 

1:19,20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너희가 거절하여 배반하면 에 삼키우리라 여호와의 의 말씀이니라

 

순응과 거역에 따른 축복과 저주의 주제는 율법이 선언된 이래 불변의 주제로서 끊이지 않고 등장한다(레 26장 ;신 28장). 본문은 그 내용의 대조와 발음의 유사가 어우러져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19절의 '먹다'(* , 토켈루)와 20절의 '삼키우다'(* , 테우클루)는 언어 유희의 대표적인 예다. 19절과 20절은 두운법(頭韻法)으로 이루어졌다.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 아담이 범죄했을 때 그는 '땅이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리라'(창 3:18)는 저주의 말씀을 들어야 했다. 가인이 그 아우를 죽였을 때 그는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주지 아니할 것이라'(창 4:12)는 저주의 말씀을 들어야 했다. 이 모든 것은 땅의 소산을 먹는 것과 인간의 행사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음을 보여준다.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의 축복이 종종 물질적인 형태로 제시되었는데, 이는 참것의 그림자인 현재의 복락을 맛봄으로써 하늘의 영원한 행복을 찾도록 하시려는 의도에서이다.

 

심판 후의 구속

 

1:21 신실하던 성읍이 어찌하여 창기가 되었는고 공평이 거기 충만하였고 의리가 그 가운데 거하였었더니 이제는 살인자들 뿐이었도다

 

신실하던 성읍이...창기가 되었는고 - 원문대로 읽으면 '(어찌하여) 창기가 되었는가, 신실하던 성읍이'이다. 2절에서 부자 관계로 표현되었던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여기서 부부 관계로 표현되었다. 부부 관계의 기초는 '신실함'(* , 네에마나)이다. '네에마나'는 '받치다', '기초하다', '기대다'는 뜻을 가진 '아만'(* )이란 동사에서 파생된 명사이다(성도들이 기도 끝에 낭송하는 '아멘'이란 말도 이 말에서 비롯된 것임). 칼빈(Calvin)은 이 말을 '순결함'으로 이해하였다. 부부 관계에서 순결이 파괴될 때 간음이 되듯이, 이스라엘이 우상을 숭배하여 하나님을 배반할 때 그것은 영적 간음이 된다(출 34:15, 16;신 31:16;호 1:2 이하). 그리하여 한때 순결하

였던 신부 이스라엘은 창녀(* , 자나)가 되었다.

어찌하여(* , 예카). 이 말은 애가(elegy)에서 사용되는 전문 용어이다. 예레미야 애가는 이 말로 시작하고 이 말로 표제를 삼았다(애 1:1;2:1;4:2). 선지자의 탄식은, 이스라엘에게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절망의 확인이다.

 

이제는 살인자들 뿐이었도다 - 과거의 아름다움과 현재의 추함이 '이제는'(* , 아타)이란 말에서 극적으로 대비된다. '살인자들'(* , 메라츠힘)은 강도나 살인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공의를 가장하여 부정직한 방법으로 가난하고 무력한 사람들의 소유를 착취하는 자를 의미한다(엠 2:34;요일 3:15). 그 주범은 유다의 지도자라 자처하는 고관들과 방백들이다.


 

1:22 네 찌끼가 되었고 너의 포도주에는 이 섞였도다

 

네 은은...너의 포두주에는 - 비유적으로 표현된 '은'과 '포도주'는 그 고상함과 귀중함에서 볼 때 높은 계급의 관원을 가리킴이 분명하다. 그러나 은은 찌끼가 되고 포도주에는 물이 섞였다. 이 말은 이전 황금 시대에 고관들에 의해 나타났던 덕과 공의가 쇠퇴하고 지금은 그 찌꺼기와 그림자만 남았음을 뜻한다(Delitzsch). 비록 찌끼가 은을 대신하여 아직도 반짝이고 포도주가 불그레한 빛깔을 자랑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순수를 상실한 가짜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럴 듯한 가짜를 싫어 하신다(딤후 3:5).

 

 

1:23 네 방백들은 패역하여 도적과 짝하며 다 뇌물사랑하며 사례물을 구하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치 아니하며 과부의 송사를 수리치 아니하는도다

 

네 방백들은 패역하여 - '방백들'(* , 사림)과 '패역함'(* , 소레림)은 두운법에 맞춘 것이다. 선지자는 두운법을 사용함으로써 방백들과 그들의 패역함을 한층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즉 '방백들이야말로 글자 그대로 패역한 사람들이다'이다.

다 뇌물을 사랑하며 사례물을 구하며 - '사랑하며'(* , 오헤브)와 '구하며' (* , 로데프)는 모두 분사로 쓰여 그들의 행위가 계속 지속되며 습관적으로 자행되고 있음을 나타낸다. '구하다'는 동사는 원어상 '따라가다', '열심히 추구하다'는 뜻을 갖는다. 그들이 그처럼 열심히 추구하고 흠모해 마지 않았던 것은 무엇인가 ? 그것은 '뇌물'(* , 솰르모님)이었다. '뇌물'은 '평화'를 뜻하는 '솰롬'(*

)과 발음이 비슷하다. 유다의 지도자들이 구한 것은 '평화'가 아니라 자기들의 탐욕을 채워주는 '뇌물'이었다.


 

1:24 그러므로 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전능자가 말씀하시되 슬프다 내가 장차 내 대적에게 보응하여 내 마음을 편케 하겠고 내 원수에게 보수하겠으며

 

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전능자 - 하나님의 성호에 대한 다양한 표현을 이처럼 한데 모아 놓은 곳은 이곳 외에 없다. '주'(* , 하아돈)라는 명칭은 본서에서 '만군의 여호와'와 결합되어 위협과 징벌을 가하는 경우에 쓰인다(3:1;10:16, 33;19:4). '만군의 여호와'에 대하여는 9절 주석을 참조하라. '이스라엘의 전능자'라는 이름은 하나님의 권위있는 통치에 강조점을 둔 것으로 창 49:24;시 132:2, 5 등에서는 '야곱의 전능자'라고도 표현되었다(49:26;60:16). 70인역(LXX)에서는 이것 대신 '야곱의 전능자'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 선지자는 이 세 가지 이름을 한데 묶음으로써 여호와의 무한한 엄위와 전능하심을 최고로 나타내고 있다. 따라서 그 뒤에 이어질

말씀들이 매우 중요하며 반드시 이루어지고야 말 것임을 암시하는 것이다. 이것은 '말씀하시되'(* , 네움)라는 동사에서 한결 분명해진다.

 

말씀하시되 - '네움'은 비밀스럽고 중요한 사실을 말할 때 주로 사용되는 말이다

(창 22:16에서 처음 나오고 렘, 겔에서 자주 등장함).


 

1:25 내가 또 나의 을 네게 돌려 너의 찌끼를 온전히 청결하여 버리며 너의 혼잡물을 다 제하여 버리고

 

나의 손을 내게 돌려 - '손을 되돌린다'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특별히 개입, 간섭하실 것을 나타내는 말이다(렘 6:9;겔 38:12;암 1:8). 하나님의 간섭은 찌끼를 태우고 혼잡물을 제거하는 방식으로 표출된다. 몇몇 주석가들은 이것을 징벌의 차원에서만 바라본다. 그러나 '아쉬바'(* )라는 동일한 동사로 시작되는 26절과 비교해 볼 때 회복의 의미가 더 강한 듯하다.

 

너의 찌끼를 온전히 청결하여 버리며 - 문자적으로는 '잿물처럼 너의 찌끼를 녹이고'이다. 하나님은 마치 잿물을 가지고 은에서 납 성분을 녹이듯이, 예루살렘의 경건치 못한 자들을 쓸어버리시겠다는 것이다.


 

1:26 내가 너의 사사들을 처음과 같이, 너의 모사들을 본래와 같이 회복할 것이라 그리한 후에야 네가 성읍이라, 신실한 고을이라 칭함이 되리라 하셨나니

 

너의 사사들을 처음과 같이...본래와 같이 - '사사들'과 '모사들'은 권력을 쥐고 있는 관원들과 방백들을 의미하는 것이 분명하다. 하나님의 정화시키는 과정을 통해서 불순물이 제거된 뒤에 예루살렘은 21절 상반절에 기록된 대로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 갈 것이다. 다윗과 솔로몬의 시대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평화의 구현기요 메시아적 통치의 예표로서 상징된다. 그러면 이러한 예루살렘의 회복은 언제 이루어질 것인가 ? 가까운 미래에 있어서 어쩌면 그것은 유다 민족이 바벧론 포로에서 풀려나 팔레스틴에 귀환할 때 이들을 지도한 스룹바벧이나 에스라와 느헤미야 같은 지도자들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그것은 하나님의 다스림이 완전히 실현되는 미래에 이루어질 것이다(24:23).


 

1:27 시온은 공평으로 구속이 되고 그 귀정한 자는 로 구속이 되리라

 

귀정(歸正)한 자 - KJV는 이것을 범죄로부터 돌아선 자라는 뜻의 '개종자들(converts)로 번역하였다. 그리고 랑게(Lange)는 '포로에서 귀환하느 자들'에게 이것을 적용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가장 바람직한 것은 이것을 이중적 전망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즉 가까운 미래에서는 '포로에서 풀려난 자들', 그리고 먼 미래에서는 '죄로부터 구속된 성도들'로 이해하는 것이다.


 

1:28 그러나 패역한 자와 죄인은 함께 패망하고 여호와를 버린 자도 멸망할 것이라

 

그러나 패역한 자와...멸망할 것이라 - 25절과 관련하여 정련 과정의 반대 측면, 즉 찌끼와 혼잡물의 운명이 제시된다(Lange). 그들의 운명을 강조하는 듯이 '패망' (* , 쉐베르)이란 명사가 문장의 맨 앞에 나온다. 히브리어 원문대로 읽으면 다음과 같다:'파멸, 패역한 자들과 죄인들은 모두 함께. (그리고) 여호와를 버린 자들은 종말에 이르리라.'

 

1:29 너희가 너희의 기뻐하던 상수리나무로 인하여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요 너희가 너희의 택한 동산으로 인하여 수치를 당할 것이며

 

상수리나무...동산 - 선지자는 부분을 들어 전체를 나타내는 수법으로 '상수리나무'(* , 엘림)와 '동산'(* , 가노트)을 들어 당시에 편만해 있던 모든 유(類)의 거짓된 우상 숭배를 표현한다. 류폴드(Leupold)는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기를, 이것들은 두 가지 방식의 우상 숭배, 즉 나무 숭배 의식(tree-cult)과 동산 숭배 의식(garden-cult)을 언급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나무에 관하여는 57:5;왕하 16:4;렘 2:20;3:6;17:2;겔 6:13;호 4:13을, 동산에 관하여는 65:3;66:17을 참조하라.


 

1:30 너희는 잎사귀 마른 상수리나무 같을 것이요 없는 동산 같으리니

 

잎사귀 마른 상수리나무...물 없는 동산 - 늘 푸른 나무와 물기 어린 동산처럼 그렇게 번성하기를 꿈구면서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에게 달려간 그들은 허무한 우상의 결국만큼이나 자신들도 헛되이 비참함에 이르고야 말 것이다(Alexander). 그러나 생명의 원천이신 여호와를 택하고 그로 즐거워하는 자들의 운명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할'(시 1:3) 것이다. 선지자가 종말론적 구원의 표상과 관련하여 동산에서 물이 넘칠 것을 노래한 구절로는 35:6, 7;41:18;44:3;48:21;66:12 등이 있다.

 

1:31 강한 자는 삼오라기 같고 그의 행위는 티 같아서 함께 탈 것이나 끌 사람이 없으리라

강한 자는...그의 행위는 - '강한 자'(* , 헤하손)는 불법한 통치자(아마도 '우상 숭배를 조성한 지도자', Leupold)이며, '그의 행위'(* , 포알로)는 인간의 손으로 빚어진 우상(혹은 '안녕을 도모하는 그 수단과 고안물', Vitringa;'우상 숭배하는 행위', Lange)을 의미한다. 우상은 불티와 같아서 그것을 따라가는 자에게 재앙만을 야기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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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 2 다니엘의 믿음(단4-6장)  (0) 2008.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