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국>의 순교자.... 사실과 진실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하죠. 아래는 퍼온 글들입니다. ^^ ------------------------------------------------
김은국의 순교자라는 책을 읽으면 성역이 무너진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로 세워졌고, 사도들의 피로 지켜졌다. 전세계 각지역에 복음이 전파되는데는 선교사들의 피가 있었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교회는 피위에서만 순수성과 거룩성이 지켜지고 유지된다. 어떤 상황에서도 세상과 교회는 융합될 수 없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세상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고, 사도들과 선교사들을 죽였다. 죽고 죽일 수 밖에 없는 관계가 바로 교회와 세상과의 관계이다. 교회는 예수의 죽음과 사도들의 죽음과 선교사들의 죽음위에 세워지고 지켜져 왔고, 오늘 나의 죽음을 통하여 내가 교회의 일원 즉 지체가 된다. 죽음을 통하여 부활로 나온 새 사람이 바로 교회이며 하나님의 나라이다. 세상은 죽이면 끝이라고 생각하고 죽이지만 죽음을 뚫고 나오는 생명의 역사가 바로 교회의 역사인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원칙적이고 진정한 교회의 모습이고, 현실 세계에서 보게되고 보여지는 교회는 살고자 하는 자들의 연극이다. 죽어서 사는 자들이 아니라 살기위해서 죽는척하는 연기의 결과로 교회가 존재하고 유지되는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다.
그 만큼 오늘날 보여지는 교회는 내용을 잃어버렸고 형식만 붙잡고 있다. 세상에서 핍박받는 모습의 교회가 아니라 세상과 타협하고, 세속화되어버린 교회의 모습으로 변한것이다. 국가와 민족이라는 큰 그늘아래서 교회가 존재하려 하고 자본주의 그늘 아래서 성장하려는 지도자들의 욕망때문에 피를 찾아볼 수 없다.
김은국의 순교자라는 소설은 이중적이고 가면을 쓴 교회의 모습을 정확하게 고발하고 있다. 6.25때 일어난 사건을 배경으로 한다. 공산주의자들은 기독교를 가장 싫어한다. 기독교 뿐만 아니라 다른 종교도 싫어한다. 종교는 민줄의 아편이라 할정도이다. 특히 기독교를 싫어하는 이유는 그들의 유물사상과 대치되기 때문이다.
공산주의자들에게 목사들이 다 잡혀가서 순교를 당하게 되는데 주인공 목사는 살아 돌아오게 된다. 남아있는 교인들의 신앙심이 중요한가 아니면 진실이 중요한가라는 두 가치앞에서 살아서 돌아온 목사는 사건의 진실보다는 살아남은 자들의 신앙생활이 더 중요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죽어간 목사들을 순교자로 만들게된다는 스토리이다.
그래서 순교자라는 표현을 만들어진 순교자라는 의미로 표시한다. 실제로 순교한 것이 아니라 후에 순교자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교회를 위함이었다. 그래서 살아남아 돌아온 신목사라는 주인공은 배도자로서 부끄러움을 고백하고 회개하지만 죽은 목사들은 신앙을 지키다가 목숨을 버린 순교자로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반대였다. 죽은 자들은 공산주의자들에게 목숨을 살려달라고 애걸하다고 개같이 죽어갔지만 신목사는 끝까지 신앙을 지켰던 것이다.
세상에서 진실을 밝힌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살아남은 자들의 유익이 무엇이냐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퍼옴> http://blog.naver.com/kkkk1262?Redirect=Log&logNo=1400423774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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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군이 북한의 도시 평양을 점령하기 바로 직전 그 도시의 목사들 14명이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체포되었다. 정보국에 따르면 그 중 12명은 처형되었으나 2명은 살아남았다. 공산주의자들이 왜 그들을 제외시켰는지, 왜 동정을 베풀었는지, 그리고 왜 단지 그 둘뿐이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바로 그 문제가 정치 정보국장인 장 대령이 알고자 했던 점이었고, 이 대위가 조사하도록 명령받은 임무였다.
이 임무를 수행하면서 이 대위는 자기도 모르게 군 정보의 영역에서 벗어난 어떤 미스터리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것은 현세에서 인간이 놓여진 상황, 인간과 신, 그리고 인간과 인간 사이에 얽힌 종교적 미스터리였다. 기독교인이 아닌 장 대령 입장에서는 처형된 12명은 순교자였으며 공식적으로 그렇게 밝혀져야만 했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모두 순교자로서 죽지 않았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만약 제3의 목격자가 증언한 것처럼 그 중 몇몇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다른 목사들을 배반하고 “개처럼 죽어갔다”면 어찌될 것인가? 이 이야기의 중심은 불가사의한 신 목사에게 있다. 처음에는 처형 현장에 있었다는 사실을 부인하다가 후에 그 사실을 시인함으로써 많은 의혹과 분노를 사게 된다.
그가 왜 그렇게 행동했는가가 이 미스터리의 핵심이다. 전쟁이라는 참혹하고 절망적인 상황에서 신의 은혜와 사랑, 구원에 대한 희망마저 없다면 그 고통은 참기 힘들 것이다. 따라서 신 목사는 자신이 믿지도 않는 신과 내세를 설파하면서 자신의 신앙을 버리고 목숨을 구걸했던 12명의 목사를 순교자로 만들고, 자신은 ‘배신자’의 낙인을 감수했던 것이다. 신 목사는 화자(話者)인 이 대위와 헤어지며 이런 말을 남긴다.
“인간을 사랑하시오, 대위. 그들을 사랑해 주시오! 용기를 갖고 십자가를 지시오. 절망과 싸우고 인간을 사랑하고 이 유한한 인간을 동정해 줄 용기말입니다.”
.........인터파크 책 소개글중...
꼭 종교인이 아니어도 한번즘 읽어볼만 한 책.
뉴욕타임스로부터
“도스토예프스키와 알베르 카뮈의 문학 세계가 보여준 위대한 도덕적 및 심리적 전통을 이어받은 훌륭한 작품” 이라는 찬사를 받았다고 한다.
<퍼옴> http://blog.naver.com/jeonsh2580?Redirect=Log&logNo=500146864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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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국의 순교자 >
인구 많은 성중에서 사람들이 신음하며 상한 자가 부르짖으나 하나님이 그 불의를 보지 아니하시느니라. (욥기 24:12)
금년도에 고은 시인의 시가 노벨문학상 수상대상에 올랐었다. 그런데 이미 4~50년 전에 노벨문학상 수상후보로 입에 오르내리던 한국인 소설가가 있었다. 그가 바로 김은국이며, 그 대상작은 <순교자>라는 한 편의 소설이었다.
김은국은 1932년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난 후 어린 시절과 학창시절에 일제 강점기, 남북의 분단 그리고 참혹한 6. 25 한국전쟁 등의 역사적 사건들을 겪게 된다. 서울대 상대를 다니다 한국전쟁을 맞았고, 군에 입대하여 미군의 통역장교로 근무하게 되는데 이 인연으로 제대 후에는 도미하여 수학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미국에서 경제적 사정이 여의치 않자 학사학위도 통과되지 않은 상황에서 창작기금을 노리고 응모한 작품이 바로 이 <순교자>였다고 한다. 이 소설이 선풍적인 호평을 받게 되자, 이 작품을 통하여 석사학위가 주어지게 된다. 그리고 그 창작 경험을 바탕으로 이후 미국의 여러 대학에서 영문학을 강의하게 된다. 그가 귀국을 포기한 것은 5.16 혁명 이후 실시된 군부독재 때문이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20여년이 지난 후에야 81년부터 83년까지 서울대 영문학과에 교환교수로 있었는데 이 당시 커피 광고의 모델로 출연하기도 한다.
<순교자>의 줄거리는 6.25 한국전쟁 당시의 실화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전해진다. 물론 허구로서의 소설이기 때문에 꼭 그대로 진행되었던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모델로 삼은 실제 주인공이 있었을 뿐 아니라, 흡사한 사건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이 소설의 배경은 개성의 이남에 있던 기독교회들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전쟁발발 이후 인민군이 진주하여 이 지역에서 열 네 명의 목사들을 체포한 후 지독한 고문을 동반한 개종강요가 있었는데 결국 12명은 죽임을 당하고, 2명만이 살아남게 된다.
국군이 다시 진주하여 사로잡은 인민군 장교를 신문하게 되었는데,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이 대위는 그들로부터 이 학살 사건의 전말을 듣게 된다. 그건 참 기이한 일이었다. 그동안 일반 신자들은 당연히 그렇게 생각했었다. 두 명의 목사는 예수를 부인하고 배교했기 때문에 살아남게 되었을 것이며, 그 나머지 12명의 목사는 끝까지 배교하지 않고 신조를 지켰기 때문에 결국 순교하게 되었을 거라고 말이다.
골수 공산당과 같은 일종의 <확신자>는 종교의 신앙인 가운데서도 자신들과 닮아 보이는 골수 성직자를 동정했던 것일까. 일반인들의 생각과는 다르게 예수를 부인하고 배교한 이들은 오히려 단호히 처형하고, 죽음이 두려워 정신이상자가 된 <한 목사>와 끝까지 배신하지 않고 지조를 지킨 <신 목사>는 살려둔 채 후퇴했던 것이다.
하지만 유일하게 지조를 지킨 이 신 목사는 이 대위에게 자신의 신앙이 투철하여 이렇게 지조를 지킨 것이 아니라고 고백한다. 그는 오히려 위에서 인용한 욥기서의 ‘신에 대한 회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다만 인간적인 입장에서 사람이 지닌 지조를 강제로 바꾸려하는 그들에게 분노하면서 지조를 지켰을 뿐이었다고 술회했던 것이다.
이후 이 대위는 과연 교회는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 들여다보게 된다. 그런데 신 목사는 자신이 배교했다고 신앙고백을 하고 있었다. 많은 신자들이 운집하여 순교당한 12명의 목사를 위해 뜨거운 기도를 하는데, 그들의 희망을 저버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신 목사는 스스로 배교자라는 악역을 담당한다.
자신은 배반했지만, 그 12명의 목사들은 끝까지 신앙을 지키고 서로 격려하며 절망을 이겨내었고, 결국 승리의 확신 속에서 순교했다고 간증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길을 과감히 가지 못한 자신은 정말 약한 사람이라며 탕자의 비유를 들어 용서해 줄 것을 눈물로 호소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사실과는 다른 거짓말에 바탕을 둔 것으로 어찌 보면 진정한 신앙을 지닌 성직자라면 차마 할 수 없는 역할이다. 하지만 신 목사는 길 잃은 양과 같은 일반 신자들의 그 뜨거운 신앙에 실망을 줄 수가 없었다.
평소 그렇게 강직하고 신실했던 성직자들이 살아남기 위하여 결국 신을 부인하고 서로 비난하며 추태를 보이며 죽어갔다는 그 사실적 상황을 차마 말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아마도 그 사실을 일반 신자들에게 낱낱이 알리는 것은 그들을 빠져나올 수 없는 절망의 나락에 빠뜨리는 것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은 어떤 비난을 받더라도 그 열 두 목사의 죽음을 통하여 신자들이 위로를 받고 희망을 가질 수 있도록 선의의 거짓말을 하는 그런 십자가를 지려 했던 것이다. 작가의 의도는 이야말로 진정한 순교자가 아니냐는 그런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결국 중공군의 개입으로 또 다시 이 지역은 인민군이 점령하게 된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남쪽으로 피난을 가지만 그는 양떼들 곁에 있겠다며 그 지역을 지키게 된다는 결말이다.
전쟁과 같은 종말적 상황은 반대편 생각을 지닌 이들에게 실존적 결단을 묻는 그런 처절한 입장에 서게 한다. 그런데 모든 세상사를 신에게만 의존하던 이들이 그 주변상황이 참혹하게 변하게 되었을 경우 신을 부인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곤 한다. 그리고 일상적인 신앙생활에 있어 가장 강한 모습을 보이던 이들이 종말의 상황에서는 오히려 표변하여 강한 부정자가 되곤 하는 것이다.
어찌 보면 보다 유연하게 가장 사람다운 모습을 간직하는 것이 예수님다운 것인지 모른다. 평소에 준엄한 표정을 지으며 강한 이들 쪽의 편에만 섰던 이들이 종말적 상황으로 변했을 때 쉽게 헤게모니를 쥔 쪽으로 돌아서버리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면 일상 상황에서 어렵게 살거나 마음약한 이들을 쉽게 정죄할 것은 아니다. 과연 종말적 상황에서 누가 더 인간다운 모습을 유지할 것인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실로 소설 순교자에서 우리는 결국 인간다움, 사람다움이 인간들을 지켜나간다는 그런 메시지를 되새겨보게 된다. 그리고 이런 메시지와 더불어 악의 화신이며 악의 축이라고 명명되는 북한의 골수 공산당에게도 인간다움이 존재하기도 한다는 그런 작은 믿음도 가져보게 한다.
세계적으로 호평을 받았던 이 소설은 한국, 특히 기독교계에서는 거의 금서목록에 들어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냉전 시대가 지나고 민족의 화해와 번영이 논의되고 있는 이 시점에서, 특히 기독교인들이야말로 한번 쯤 잔잔히 읽어보아야 할 그런 책은 아닐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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