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에 대한 어거스틴의 성찰
이규철
육군 군목(소령),
계명대 Ph.D,
『어둠에서 빛으로: 하나님을 향한 어거스틴의 회심』의 저자
6월은 대지를 달구는 뜨거운 태양만큼이나 나라 사랑의 마음과 평화에 대한 열망을 품고 뜨겁게 기도하는 달이다. 특히나 북한의 침략으로 유발된 6.25 전쟁을 맨 몸으로 막는 과정에서 순국선열의 무수한 피와 함성으로 이 땅은 젖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때로부터 시간이 흘렀다는 이유만으로 서울과 대전에 위치한 국립묘지에 말없이 누워 계신 ‘님’들의 충정이 아득히 잊혀져가는 세월의 시류 속에서도, 여전히 평화와 자유에 대한 갈망으로 우리의 가슴은 불타오른다.
평화에 관한 논의에 있어서 대비되는 세계적인 두 지평은 히브리적 사유와 그리스-로마적 관념의 세계다. 먼저, 평화를 뜻하는 히브리어의 샬롬(Shalom)은 안녕(well-being)과 번영(prosperity), 안전(security)의 개념 등이 녹아 있는 것으로서, 폭력과 갈등의 단순한 부재(不在)를 넘어 완전성과 영원성을 지향하는 개념이다. 반면 헬라어의 ‘에이레네’(eirene)는 질서나 부분들의 통합이라는 뜻이 함유되어 있고, 로마인들이 사용한 팍스(PAX) 또한 협약과 합의라는 의미를 지닌다.
1600년 전, 이러한 히브리적 의미의 평화와 그리스-로마적 평화 이해를 공히 수용하고 종합한 어거스틴의 마음 또한 평화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충만하였다. 이는 평화를 일컫는 ‘팍스’라는 단어가 그의 저서 중에 2,500번 이상 나타난다는 점에서 명백하다. 특히 어거스틴은 “우리 마음이 당신 안에서 쉴 때까지는 편안하지 않습니다”라는 고백으로 그의 평화론의 신적 근거를 드러낸다. 다시 말해 어거스틴이 완전한 평화의 근거를 하나님에게서 구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히브리적이다. 그러면서도 지상 평화의 불완전성을 현실적으로 받아들이고 이의 유지를 위한 자연법의 순응과 힘의 논리를 인정한다는 점에서, 어거스틴은 그리스-로마적 평화 유산을 물려받고 있다.
어거스틴에 따르면, 모든 인간 행동을 움직이게 하는 힘은 행복에 대한 욕구이지만 어느 누구도 평화 없이는 행복할 수 없다. 이런 면에서 모든 인간의 목표는 평화를 찾는 것이다. 일반적 의미에 있어서 평화는 불일치나 분쟁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의미의 평화는 ‘하나’(one)만 있고 ‘다수’(many)란 없는 절대 통일의 세계에서나 실현될 수 있다. 사실상 다양성이 존재하는 이 세상에서의 평화는 동질성과 비동질성이 각각의 고유함이라는 자리를 지키는 질서의 고요함(the tranquility of order) 속에 자리한다.
어거스틴의 평화론은 질서 체제 안에서의 평화라 할 수 있다. 질서란 곧 관계의 정상화를 뜻하기도 한다. 어거스틴은 자신의 평화관의 요체를 이렇게 밝힌다. “신체의 평화는 그 구성 부분들을 그 합당한 질서에 따라 배치했을 때 이루어지며, ‘비이성적 영혼’(irrational soul)의 평화는 그들 욕구(appetites)들의 질서에 따른 충족에 있으며, ‘이성적 영혼’(rational soul)의 평화는 인지(cognition)와 행동이 질서 있게 일치할 때 이루어진다. 육체와 영혼의 평화는 살아 있는 피조물의 질서 있는 삶과 건강에 의존한다.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평화는 믿음 속에서의 질서 잡힌 복종, 영원한 법에의 예속으로 이루어진다. 인간들 사이의 평화는 마음과 마음이 일치할 때 얻어진다. 가정의 평화는 함께 사는 사람들간에, 즉 주관하는 자와 따르는 사람들 간의 호응 여부에 달려 있다. ‘천상도성’(Heavenly City)의 평화는 완벽한 질서와 조화 안에서 하나님을 즐기는 공동의 협력이다. 전 우주의 평화는 질서의 평정함에 있다. 그리고 질서란 동등한 것과 동등하지 않은 것들을 그 받은바 몫에 따라 그 각각의 자리에 배치하는 것이다.”
이처럼 평화를 질서의 측면에서 깊은 이해를 도모한 어거스틴은 이의 유지를 위해 필요하다면 강제적 힘(coercion)의 사용까지도 용인했다. 그리하여 탐욕을 제어하며, 부당하고 억울한 피해에 대해 응징하고, 도덕적 질서의 파괴에 대한 문책을 가하는 정당한 전쟁(Just War)은 적극적 평화 구현에 유익하다고 이해했다. 나아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 주인과 종의 기본 관계를 질서가 구축된 상하종속의 관계성에서 논한 후, 국가의 평화는 통치자에 대한 피치자(被治者)의 복종을 요구한다는 어거스틴의 주장은 치자(治者)의 절대권을 강화시켜 준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그렇지만 어거스틴이 강조하는 ‘질서’와 ‘합의’로서의 평화의 관점은 피치자에게만 요구되는 일방적인 강제사항만이 아니라 도리어 그 치자로 하여금 그의 위치에 합당한 절제와 온전한 도리를 다해야 함을 강력히 요구한다.
어거스틴은 이런 점을 기초로 하여 평화는 인간의 업적이 아니라 진정한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결론 내린다. 만약 인간이 이 선물을 전적으로 받아들인다면, 이 선물(평화)은 현재 삶의 곤경에 있는 그들을 위로하고 강하게 하며, 더 나아가 죽음 이후 그들의 삶이 겪게 되는 모든 분쟁으로부터 자유하게 될 것을 보증한다고 확신한다. 더불어서 평화가 이생에 있어서 인간 사랑의 일차적 목적일 때 탐욕은 정복되고 시기는 사라진다고 역설했다. 어거스틴에 따르면, 이는 평화가 자신의 몫을 감소시키지 않고 많은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는 한 선(善)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이런 점에서 한 사람의 내적 평화는 살아 있는 전체 속에서의 건강한 육체와 온전한 영혼의 좋은 질서에 의존한다. 그리고 인간 사이의 평화는 질서 있는 우호관계, 혹은 ‘마음의 하나 됨’(oneness of heart, concordia)에서 기인한다. 그리하여 함께 사는 사람 사이에서 권위와 복종의 조화로운 정열로 그런 우호관계가 반영될 때, 가족간의 평화도 누리게 된다. 정치사회에 사는 시민 사이에서도 평화는 통치자와 통치 받는 삶 사이의 조화에 달려 있다. 더 나아가, 마침내 가장 잘 정돈되고 조화로운 하나님 나라의 평화는 인간과 천사가 하나님 안에서 서로 기뻐할 마지막 때에 실현될 것임을 어거스틴은 확신한다.
그렇다면 어거스틴의 이 같은 평화론이 오늘 우리의 시대에 던지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첫째, 천상적인 평화와 지상적인 평화로 대별되지만 개별성의 ‘내적 평화’나 복수성의 ‘사회적 평화’가 공히 진정한 평화 상태에 이르기 위해서는 천상 평화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고 믿는 어거스틴의 평화론은, 평화 실현의 기본 단위가 먼저 개인이며, 이 개인들의 가슴속에 이루어진 평화가 사회적 평화 실현의 기초가 된다고 역설한 점에서 아주 현실적이다.
둘째, 천상의 ‘완전한 평화’를 위한 지상 평화의 대비는 지상 평화의 유용성과 동시에 그 한계성의 범주 안에서 평화 실현의 자율적 측면과 타율적 측면을 인지케 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함께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인간임을 자각시켜 준다. 바로 이 점에서, 그 근본상 종말적인 천상에 있음에도 논의의 전개상 현실적 평화의 문제를 외면하지 않았던 어거스틴의 평화관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요 1:14) 역사의 지평 가운데로 들어오신 성육신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되는 신학적인 문제이면서도, 그 논의의 지평을 세속적 제(諸) 학문 연구가들에게도 개방하는 그라운드를 제공한다.
결론적으로 말해, 어거스틴이 지향하는 평화는 현세(saeceilum)가 궁극적으로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이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도달하고자 하는 목적지는 자유가 아니라 평화이다”라고 말한 ‘피기스’(J. Figgis)의 통찰은 어거스틴의 평화론의 본질을 밝혀 준다. 평화는 그때나 지금이나 희생과 사랑 그리고 믿음의 열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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