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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새로운 시도: 토마스 아퀴나스의 구속사 신학

은바리라이프 2008. 6. 3. 19:05

한 새로운 시도: 토마스 아퀴나스의 구속사 신학
 - 카톨릭교회의 성결론?
 우리의 성결론은 얼마나 신학적인가?

 

황덕형
 서울신학대학교 교수(조직신학)

 

성결한 삶이 행복과 연관된다면 그것은 누구 때문인가? 우리는 무엇 때문에 행복한가? 그리스도가 고난당하신 것을 역사로 만들 것인가? 아니면 공허한 말의 잔치로 끝나는 허탄한 신화로 만들 것인가? 이것은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 앞에서 답해야 할 문제이다.

토마스와 더불어 드디어 우리는 신학의 항구에 들어서게 되었다. 이제 성결론을 신학적으로 논의할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된 것이다. 즉 기독교 신앙의 해명의 역사를 통하여 성결론이 어떤 위치에서 어떻게 다루어지고 있는가를 비교해 볼 수 있는 첫 번째 관문에 서게 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제 더 정교한 사고를 해야 하고 더 철저한 반성 가운데 성결의 의미를 되물어야 할 것이다. 단순히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긴 역사 속에서 우리가 속한 전통의 특성을 찾는가 하면 이 전통이 어디에서 얼마만큼 다른 이들에게 빚지고 있는가를 구체적으로 살펴야 하는 것이다.

그 동안 우리들은 우리 성결교회의 성결론이 가져야 할 다양한 측면들을 살펴보기 위해서 먼저 고대 희랍의 철학자들과의 대화를 모색해 왔다. 그를 통하여 성결신학이 인류 공동의 자산으로 성장하기 위해서 꼭 지니고 있어야 할 지평들을 알아보고자 한 것이다.그 과정에서 우리는 그 철학들의 기본 전제는 종교적 깊이를 갖고 있으며 그 지평에서만 온전하게 이해될 수 있음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거꾸로 그 철학들은 자신들의 고유한 방식을 통하여 우리 성결신학이 보편적인 진리가 되기 위해서 갖추어야 할 철학적 조건들을 보여주었다.

먼저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철학적 삶을 통하여 성결론이란 실천적인 진리를 표방한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성결이 참된 삶의 이상과 연관이 있음을 강조할 수 있었다. 성결의 신학은 참된 삶의 이상이 무엇인지 밝혀야 하는 것이다. 두번째로 그의 제자인 플라톤은 본격적으로 참된 삶에 대한 질문은 초월적인 존재인 선의 이데아로부터 비롯되었으며 도덕적 삶의 이상을 통하여 세계 내적 가치로 표현 된다고 주장한다. 이에 반하여 성결신학은 참된 삶의 모범이 단순히 초월적 세계나 이상 가운데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책임을 지는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그리스도의 은총 안에서 찾아진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덕론을 통하여 행복의 이념 속에서 하늘과 땅을 서로 연결해 주는 도덕적 가치를 적극적으로 주장하였다. 거기에 대하여 성결론은 행복론을 통한 신과 인간 사이의 연속성보다는 오히려 불연속적 차이 속에서만 사유되는 하나님을 바라보도록 요청한다. 마지막으로 서구 신비주의자 플로틴은 진정한 신비주의, 진정한 탈-자아적 사유가 어디에 있을 수 있는가를 되묻게 하였다. 우리 가운데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참된 신비주의가 있다면 그것은 성결신학의 중대한 과제가 될 것이다.

성결론의 해명을 위한 이 선결물음의 의미는 그들의 사유 속에 잠재된 신학적 함축성을 먼저 언어화하여 우리와 대화의 접촉점들을 찾고자 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서양의 고대를 지나 중세 이후부터는 상황이 반전된다. 비록 무신론자와 대화를 하더라도 그들의 사유의 전제로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기독교적 논점들을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이다. 신앙의 이성화가 진전되면서 이성의 신앙화도 함께 진전된 것이다. 보이지 않는 나무의 뿌리가 그 열매의 근원인 것처럼 모든 사유의 맥락은 이제 신학적 배경 속에서 더욱 분명해지고 풍성해진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이런 엄청난 변화가 가능해졌을까? 이는 다양한 역사적 변수들이 발전을 거듭하면서 가져온 종합적 결과라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그러나 소위 오늘날의 서구문화의 기초를 가능하게 만든 한 특정한 인물을 지칭할 수 있다면, 혹시 누구를 말할 수 있을까? 인문주의자들의 다소의 반항이 있을지 모르지만(그러나 그들의 학문적 근거는 바로 이 사람에 의하여 확립되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한 사람을 생각할 수 있다. 바로 토마스 아퀴나스(1224-1274)이다. 물론 안셀름, 보에티우스, 보나벤투라 등 많은 사람들을 거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토마스는 이 플라톤의 전통과는 다른 새로운 문화를 개척하며 그것을 신앙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만든 인물이다.  토마스의 이름을 여기 말하는 까닭은 사물의 진리에 대한 독특한 열정과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오늘날 서구문화의 요람이 된 대학의 학문 속에서 종합할 수 있었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토마스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카톨릭의 수사였던 그가 우리 성결교회에 어떤 의미가 있는가? 먼저 분명한 것은 이 사람은 성결의 신학을 세우기 위해서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대화 상대자라는 점이다. 그런데 여기에 그와 더불어 잊어서는 안될 중요한 전제가 있다. 만일 그가 믿었던 하나님이 우리가 지금 믿는 하나님과 동일한 바로 그분이라면, 그리고 그의 사역을 우리의 하나님이 받아들이고 사용하신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면 그와 우리 사이에 신앙의 본질적인 측면에 대해서는 그 어떤 갈등도 존재해서는 안된다. 만일 이 전제가 맞다면, 그래서 우리가 그를 우리의 대화 상대자로 인정한다면 물음의 방향이 역전되는 것을 경험한다. 곧 우리가 성결의 신학이 얼마나 신학적인지를 되물어야 하는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 성결신학의 정립이 갖는 의의를 되묻도록 강요받으리만큼 그의 신학과 우리의 신학은 가장 핵심적인 면에서 서로 구분하여 옳고 그름을 가늠하기 어려우며, 더 나아가 우리의 주체성을 억지로 세우기 위하여 우리는 그를 작위적으로 곡해해야 하는 치사함을 범하게 될지도 모르는 것이다.

왜 그렇게 생각하게 되는가? 그것은 바로 다음의 질문 때문이다. 웨슬리가 발견하고 성결교회가 지켜 온 성결의 도리를 과연 토마스가 몰랐다고 말해야 할 것인가? 혹시 토마스가 자신의 신학을 정립할 때 성결의 도리를 강조하지 않았다면, 그것이 성결을 모른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혹시 내용은 같지만 다른 패러다임 속에서 말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그리고 그것도 유한한 존재가 가질 수밖에 없는 역사적 상황 때문이라면 우리는 이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만일 성결의 신학이 실제로 성화된 사람을 만드는 것이 그 목적이라면 토마스는 그 범주에 들어가지 않겠는가?

피퍼에 따르면(J. Pieper, 『토마스 아퀴나스: 그는 누구인가』, 신창석 역, 서울: 분도출판사, 1995) 토마스는 가르치는 일을 일체의 정신활동 가운데 최상의 형태라고 말한 적이 있다. 가르치는 삶 속에서 사변적 삶(vita contemplativa)과 실천적인 삶(vita activa)이 하나로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는 토마스가 선생으로서의 자신의 삶을 헌신이라는 실천적 진리를 통하여 정의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는 여기에서 아퀴나스가 진리의 실천적 성격을 강조한 것은 단순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 때문만은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사실 그는 매우 익숙하게 아리스토텔레스를 자유롭게 변형하여 자신의 신학적 의도에 맞게 해석하는데 그 창조적 재해석은 바로 신앙의 지식 때문이었던 것이다. 사실 그는 삶의 일반적인 덕을 논의하고 있을 때조차 사실은 그리스도를 모범으로 생각하는 신학적 덕론을 추구하고 있다〔이를테면 행복에 대한 토마스의 견해: ST II-II, q.1-3(Summa Theologiae 제2부 2권, 문항 1에서 3번까지) 참된 행복은 신앙 안에서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 새롭게 정의되고 있다. 그런가 하면 토마스에 의하면 계시는 기존의 개념도 새롭게 변화시킨다. ST Ia, q.1〕. 실제로 토마스가 ST II-II, q.179에서 신앙 속에서 사변적인 삶과 실천적인 삶의 통일을 추구하고 있을 때 우리는 그가 자신의 신앙적 자세를 신학적으로 정립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전설처럼 전해지는 그의 황홀경의 신비체험(특별히 1273년 12월 6일의 경험)도 그가 가졌던 신앙적 삶의 진실성을 증거해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아퀴나스의 삶은 그가 성결론에 대한 나름대로의 신학적 의미를 파악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조그만 징후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중세기의 수사로서 성결한 삶을 산 것으로 보이는 토마스가 추구하는 신학적 주제는 과연 무엇일까? 성결을 지향하고 있는 듯한 그의 삶의 자세가 그의 신학 안에서는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가? 물론 토마스가 인류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신학자요 철학자 중의 하나로 남도록 만든 것은 신의 존재에 대한 이해에서 비롯된다. 토마스에 의하면 하나님은 존재 그 자체(ipsum esse)로서 순수 행동(actus purus)이시다(ST I-I, q.2-13). 하나님을 이렇게 정의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인간들에게는 정의될 수 없는 단순성 속에서 그야말로 무한한 하나님 자신이시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순수 행동으로서의 하나님은 모든 존재들을 근거이며 원천이며 말로 표현되지 않은 보증으로서 기존의 모든 존재-형이상학의 극단적 초월 가능성 그 자체인 것이다. 이는 존재로부터 하나님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존재를 이해하는 것이었다.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아퀴나스는 형이상학 속으로 하나님이 성육하시도록 만든 것이다. 사실 이러한 하나님 존재이해로부터 야기된 그의 사유의 결과는 실로 그 당시로서는 혁명과 같은 것이었다. 이러한 그의 하나님 이해는 초기 저작인 “존재와 본질에 대하여”(De ente et essentia)에서 나타난 것처럼 하나님을 모든 세계의 존재자들의 존재로서 이해하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한편 하나님의 존재이해로부터 파생되는 유비적 사유의 특성(이를테면 신존재 증명들. 비록 하나님이 그 어떤 특정한 규정으로 인식될 수 없지만 부동의 원동자가 필요하다는, 사물의 운동에 의한 인과율에 의한 규명은 하나님을 부동의 원동자로 인식하게 만드는 유비적 인식에 이르게 된다. ST I-I, q.2 a.2)과 이 신학 전체를 뒷받침하는 존재론은 토마스의 신학이 추상적인 형이상학으로 남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도록 만든다. 좀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을 모든 것의 존재근거로 보는 존재중심의 사유 구조와 그에 따라 하나님의 존재와 세계의 존재를 하나로 묶어줄 유비적 상상력은 세상 만물들의 창출(exitus)과 그의 종말적 회귀(reditus)를 하나의 원형적 존재구조가 갖고 있는 운명처럼 보이게 만드는 것이다. 만일 누군가가 그의 신학적 특성을 이런 존재론적 측면에서 찾는다면 신앙은 인간의 내재적 진리가 반영된 유명론적 허상으로 이해될 가능성을 갖고 있으며, 또한 신앙의 세계가 보여주는 계시적 진리들조차 사실은 초역사적인 가공물로서 치부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해를 살만한 이러한 토마스의 신학적 구조적 요인에도 불구하고, 그 내부를 잘 살펴보면 그의 신학은 살아서 숨쉬는 역동적 측면을 발견하게 된다. 비록 지금까지 우리 개신교회의 신학자들에게 있어 무시되었거나 간과되었던 그의 신학 속에서 성령의 맥박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의 주저인 �신학대전�을 그 내부 구성의 조직 원리를 통해 이해하면, 다소 논쟁적 요소가 있으나, 분명하게 �신학대전� 내부 안에 구속사적 특성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다. 크게 세 부분으로 짜여진 이 거대한 고딕양식의 신학적 성찰 속에는 그 단단한 구조에 함몰될 수 없는 특정한 요소들이 살아서 고함을 지르는 것이다. 신론(ST I-I)과 인간론(ST I-II) 그리고 덕론(ST II-II)과 그리스도론(ST III)의 순서로 짜여진 이 책은 비록 미완의 작품이지만 그 내면에서 성서의 영이 실현되는 구속사적 지평에서 이해될 수 있도록 만들어 졌다고 할 수 있다. 이 세계의 모든 존재들이 창조의 근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유래되었을 뿐 아니라 다시 미래의 목적으로 실존하시는 하나님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자신의 궁극적 목적으로 삼고 있다는 존재구조의 이해는, 단순히 존재철학의 초월이라는 범주에서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땅 위에서 자기의 목적을 성취하시는 계시적 하나님의 역사를 통해서야 그 의미가 올바르게 드러나는 것임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우리가 토마스를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 다시 한 번 명심할 사실이 있다. 토마스가 신학하는 방식은 그 당시로서는 완전히 새로운 방식이었던 것이다. 토마스의 인격이 전혀 새로운 이 언어표현방식 속에 있지만 그의 의도는 구속사를 드러낸 것이며 그것은 시대의 요청인 것이다.

이러한 그의 사유의 특성은 오늘 우리가 관심을 갖고 있는 성결론에 대하여 매우 많은 시사점과 배울 점을 던져주고 있다. 현대적인 관점에서 볼 때 토마스는 이미 윤리를 조직신학 안에서 다루고 있다. 그것도 그 신학구조상 전체 신학의 한가운데서 다루고 있는 셈이다. ST I-I과 I-II(부분적으로), 그리고 II-II의 부분을 통하여 분명해 지는 것처럼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인간은 하나님에게 다시 나아가야 할 것을 목적으로 삼고 있는 존재이다. 왜 이 인간학적 사안이 중심부에 위치하면서 그리스도론으로 싸여 있는가?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다름 아니라 인간의 구원은 신학의 중심문제일 뿐 아니라 그 구원이란 하나님에게로 나아가는 길에서 완성되는 것을 강조한 소치이다. 여기에는 이미 성결을 목적으로 하는 인간 구원의 길이 설파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더욱이 그 길을 토마스는 철저하게 성령의 역사로 가능한 은총의 현실화로 이해하고 있다. 물론 이 은총의 길은 우리 안에서 기질의 변화라는 매개체를 통하여 일어난다. 그러나 그 매개체를 통하여 일어나는 은총을 기술하였다고 손 치더라도 그것이 성령의 인격적 사역을 반대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토마스에 의하면 오히려 성령께서 우리를 정결케 하시고(gratia sanans, I-II, q.109) 다시 성령께서 역동적으로 우리와 인격적 관계 속에서 역사하신다고 주장한다(gratia operans, I-II, q.112 이하).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그렇게 설정된 덕의 구체적인 현실(habitus) 위에서 성령께서 다시 우리로 하여금 그분의 더할 수 없는 은총의 자비로서 종말론적 미래에까지 자라게 하신다고 주장하는 것이다(gratia cooperans). 이렇게 우리가 토마스를 구속사적 신학의 틀 속에서 새롭게 보기 시작할 때, 그는 성령의 음성에 순종하는 은총의 신학자로서 우리들의 성결을 진지하게 말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이제 우리의 성결론을 살펴보자. 성결론은 회개 이후에 주어진 또 하나의 은총으로서 죄 안 지을 수 있는 능력으로 표현된다. 그리고 또한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요 인간에 대한 사랑의 완전이라고 설파된다. 단지 문제는 그 은총이 어떻게 어디에서 성취되는가에 있다. 웨슬리를 포함하여 우리에게 알려진 성결의 지도자들은 거의 한결같이 산-신앙 안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그렇게 된다고 주장한다. 살아 있는 인격적 관계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주장한다. 이 말은 전적으로 옳은 말이고 전적으로 지켜야 할 말이다. 하지만 우리가 좀더 면밀히 살펴본다면 이것조차 성령의 사역을 직접적으로 지칭할 수 있는 말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령께서는 그 어떤 언어로도 직접적으로 진술되지 못한다. 그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성령의 역사를 표현하는 그 말은 다시 우리 가운데 다른 중간적 매개체를 통하여 나타나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우리의 성결신학을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서 토마스로부터 질문을 받는다고 가정하고 우리 자신에게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산-신앙에서 말씀하시는 성령은 직접적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분인가? 그리고 이 산-신앙의 언어가 하나님의 어떤 존재되심으로부터 이해될 수 있는 가능성은 전혀 교회 안에서의 언어로 한정되어 있는가? 아니면 그 언어적 한계가 교회 바깥에까지 비춰야 한다고 생각이 되는가? 성령은 자신의 피조물들 가운데 어떻게 역사하시며 우리는 이 성결하게 하시는 성령의 사역을 어떻게 저 교회 바깥 그리고 역사와 우주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영의 활동과 접목시킬 수 있는가? 우리의 성결론은 어떻게 해서 하나님이 우주의 창조주가 되셨다고 말할 수 있도록 할 것인가? 우리가 어떻게 세계에 대하여 성결케 하시는 성령으로부터 말할 수 있는가? 아퀴나스의 신학과 비교해 볼 때 성결신학은 더 성공적으로 성결을 신학적으로 말할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