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자유에서 책임까지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2003-12-11 |
하나님이 처음으로 세상을 창조했을 때에는 모든 것이 아름답게 그리고 완전하게 창조되었다.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1:31) 그러나 완전하게 창조한 그 우주에는 하나의 변수가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 우주의 주인공인 사람에게 ‘자유의지’를 주었기 때문이었다.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받는’ 존재로 태어났기 때문에 처음부터 우주의 주인공이었다. 그런데 만약에 하나님이 그 사람을 자기 뜻대로 조종하는 인형처럼 만들었다면 그 인형과 진실한 사랑을 나눌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이 모든 것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도록 완전히 자유로운 존재로 창조하였다. 물론 그것은 아주 큰 ‘위험부담’ 을 안는 결정이었다. 사람이 잘못된 선택을 할 경우 그 책임은 하나님 자신에게 돌아오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과의 ‘진실한 사랑’ 위해서 그 위험부담을 감수하기로 한 것이다. 하나님이 미리 우려했던대로 사람은 금단의 실과를 먹음으로써 위험한 ‘모험의 길’을 선택하였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사랑의 드라마’ 가 시작되자마자 죽음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이 위험한 주인공을 죽음으로부터 구해내기 위해서 하나님은 처음부터 예견되었던 이 불상사에 대하여 책임을 지는 수밖에 없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사49:15) 인본주의자들은 사람이 ‘자유’ 를 누렸으면 그에 대한 ‘책임’도 역시 사람이 져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마치 사람을 미혹한 사단에게 네가 책임을 지라는 것처럼 어리석은 말이다. 사단은 반역자이기 때문에 절대로 책임을 지는 법이 없다. 가룟 유다가 양심의 가책을 받아서 목을 매었다고 해도 결코 그것으로 책임을 면할 수는 없는 것이다. 결국 사람으로 인하여 발생한 모든 문제에 대해서는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이 책임을 지는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본래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했기 때문에 사람으로 인하여 세상에 문제가 발생하자 그것을 해결하기 위하여 창조의 책임자인 ‘말씀’ 즉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낸 것이다. 그것은 곧 하나님 그분 자신이 책임을 지겠다는 뜻이었다. 아담과 하와가 뱀의 미혹을 받아 금단의 실과를 먹고 문제를 일으킨 후에 하나님은 그들에게 가인과 아벨의 두 아들을 주고 가인의 형제 주의 대표자 즉 ‘장자권자’로 삼았다. 하나님은 장자권자에게 두 가지 일을 맡겼는데 즉 아우들의 소원을 하나님께 아뢰는 ‘기도’의 책임과 하나님의 말씀을 그들에게 전하는 ‘축복’의 책임이었다. 즉 장자권자의 역할은 하나님을 대신해서 아우들을 보살피는 하나님의 ‘대리인’이었고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말씀을 전하는 ‘대변인’이었다. 그래서 한자에서도 ‘형(兄)즉 장자권자라는 글자를 ‘말하는 사람(口+人)의 의미로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늘 가인과만 대화했고 가인은 자신이 들은 것을 아벨에게 전했다. “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고(告)하니라”(창4:8) 그래서 장자권자는 집안의 모든 일을 책임지고 이끌어가는 존재였고 그것은 곧 ‘책임지는 하나님’의 모형이었다. 그래서 대개 장자들은 책임감이 강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이 책임이 너무 무겁게 때문에 때로는 아우들을 마구 부리고 힐책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하나님의 뜻이 아닌 자신의 뜻대로 아우들을 다그치는 장자권자의 횡포가 나타난다. 그래서 성경은 실패한 장자권자들의 이야기로 이어지고 있다. 가인이 그러했고 홍수 이후의 셈도 마찬가지였고 이삭의 장자인 에서도 그 이후 야곱에게 장자권을 빼앗겼고 야곱의 장자인 르우벤도 문제를 일으켜 밀려났다. 야곱은 요셉의 아들들에게 축복할 때에 손을 어긋맞겨 안수함으로써 아우 에브라임을 형보다 앞세웠고 사무엘이 이스라엘의 왕을 뽑을 때 하나님은 이새의 막내 아들 다윗에게 기름을 붓게 했다. 이러한 장자들의 실패 때문에 사단은 미혹의 큰 기회를 잡게 되었다. 특히 셈의 횡포에 반발한 함의 자손들은 장자권에 도전하여 셈의 집안을 뒤엎었다. 그들은 장자를 통한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고 사람의 능력과 권력으로 다스리는 인본주의의 시대를 열어 놓았다. 그들은 또 ‘신앙의 자유’라는 명분 아래 온갖 신들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사람이 만들어낸 ‘보이는 신’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땅의 모든 곳에서 밀어내기 시작했다. 또 하나님을 배반한 권력자들은 백성들을 위압하기 위해서 거대한 신전을 건축했다.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떠나 ‘자유’를 구가하던 사람들은 수많은 신전들을 건축하는데 잇달아 동원되어서 평생을 짐승처럼 살아가게 되었던 것이다. 무거운 돌을 나르며 돌무더기에 눌려 있는 사람들을 더 짓누르고 있는 것은 사람의 생각으로 만들어낸 권력 구조와 사회 제도였다. 사람들은 그들의 목을 누르고 있는 경쟁 사회의 위협 속에서 날마다 무거운 짐을 지고 노예처럼 허덕거리며 살아야 했던 것이다. 그럴 때에 유대 땅의 베들레헴이라는 한 작은 마을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한 것이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롬8:29) 예수 그리스도는 많은 형제들 가운데 ‘맏아들’이 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왔다. 즉 모든 형제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하고 형제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새로운 ‘장자권자’가 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온 것이다. 많은 장자권자들이 장자의 ‘책임’을 지는데 실패했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그것을 질 수 있었다.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12:2)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정결한 피로 그 형제된 모든 사람들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향해 올라갔다. 그는 사람으로 인하여 발생한 모든 사태에 책임을 지고 그의 몸을 화목제물로 드림으로써 지성소의 휘장을 찢어 놓기 위하여 자기의 ‘십자가’를 졌던 것이다. <김성일님의 성경으로 여는 세계사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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