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수심의 가이사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2003-11-28 |
로마는 대단한 나라였다. 고대 로마가 세계를 지배했듯이 지금도 로마의 제도와 정신은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현대 국가들이 채택하고 잇는 헌법은 로마법을 모체로 하고 있으며 군주제와 귀족제와 민주제의 세가지 통치 권력을 조화시킨 집정관, 원로원, 민회 등의 권력 구조는 오늘날에도 대통령, 상원, 하원 등의 형태로 남아 있다. 로마가 지금까지 미치고 있는 영향은 세계의 수도로 일컬어지는 위싱턴에 가보면 금방 알 수 있다. 대통령 관저에서부터 세계를 지배하는 모든 관청과 국회의사당 건물들이 다 로마의 건축 양식을 모방하였으며 링컨 기념관과 제퍼슨 기념관 등은 모두 로마 신전의 모습을 본따고 있다. 로마는 몰락했어도 로마의 정신은 아직 살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로마의 완벽한 권력 구조와 세련된 통치 제도 속에는 끊임없이 전쟁을 일으키고 속주를 수탈하는 야수성이 숨겨져 있다, '로마'라는 말 자치가 폭력을 의미하는 헬라어이다. 엄격한 합리성과 경건성 뒤에 숨겨져 있는 로마의 야수성은 이미 BC 603년에 다니엘이 예고한 바가 있었다. "네째 나라가 강하기는 철 같으리니 철은 모든 물건을 부숴뜨리고 이기는 것이라 철이 모든 것을 부수는 것 같이 그 나라가 뭇 나라를 부숴뜨리고 빻을 것이며..."(단2:40) 즉 로마의 면모를 좀 더 솔직하게 표현한다면 신사복을 입은 세련된 깡패였던 것이다. 위엄있는 모습을 하고 있는 로마의 야만성을 살펴보려면 그 생성 초기의 모습을 보면 된다. 로마가 생성된 년대나 그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가지로 조작되고 미화되어 있지만 어쨌든 그것은 로마를 건설했다는 로물루스의 전설로 집약되고 있다. 군신 마르스와 레아실비아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쌍둥이 형제 로물루스와 레무스는 티베리스 강가에 버려져서 늑대의 젖을 먹고 자라났다. 나중에 로물루스는 동생 레무스를 살해하고 로마를 건설했다고 한다. 그러나 팔라티누스 언덕에서 발견된 BC 750년경의 흔적은 오두막 몇채의 부락 뿐이었다. 로마의 시발은 그 본색 만큼이나 초라했던 것이다. 로마의 종교 역시 매우 원시적인 것이었다. 고대의 마술의식과 점복이 그 기본을 이루었는데 왕이 종교적 제관을 겸하였고 나중에는 대제관장 같은 종교적 책임자로 등장하엿다. 그러나 현란한 헬라의 신들이 들어오면서 제우스와 헤라를 모방한 쥬피터와 쥬노가 생겼고 그밖의 많은 신들을 본따서 만든 로마의 신들이 등장했던 것이다. 로마가 야만스러운 상태를 벋어나기 시작한 것은 라티움 족으로 추정되는 로물루스가 부하들의 신부감을 조달하기 위하여 사비니족의 여성들을 약탈해 오면서 부터였다. 그 후 이 두 종족은 연합하였고 나중에 헬라의 문화를 가져온 에트루리아 족이 이들을 지배하면서 로마가 형성되었다. 그러나 왕의 자리를 놓고 몇차례의 쿠데타가 계속되면서 왕들의 횡포가 심해지자 BC 509년 루키우스 부루투스는 민중을 선동하여 왕을 몰아내고 공화정을 수립하였다. 이 때부터 자유는 로마의 중요한 이념이 되었다. 나중에 로마의 독재적인 통치권 '임페리움'을 손에 넣은 율리우스 가이사와 그의 후계자인 아우구스투스까지도 자신을 '자유의 구세주(Libertatis Vindex)'라고 선전했을 정도였다. 예루살렘이 헬레니즘의 핍박 속에서 고난을 당하고 있을 때 로마는 세번의 포에니 전쟁을 겪으면서 카르타고를 제압하고 지중해의 왕자로서 그 못브을 드러내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로마는 살모사의 속성대로 자신을 가르쳐주고 길러준 헬라를 집어삼켰다. 일리리아와 에피루스 그리고 아가야와 함께 마게도니아 역시 BC 146엥 로마의 속주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세상의 권력은 언제나 그 전성기에서 몰락의 징조를 잉태하는 것이다. 로마의 힘은 전세계의 생산품을 로마로 가져왔고 그 가격은 로마에서 생산되는 물건들과는 비교도 안되게 싼 것이었다. 이것이 로마의 산업의 몰락을 가져오게 되었던 것이다. 농사를 포기하고 토지를 처분한 사람들이 도시로 몰려들면서 로마에는 날품팔이로 연명하는 빈민층이 급속히 불어나게 되었다. 반면에 쏟아져 나오는 토지를 헐값으로 사들인 대지주는 더 늘어나고 있었다. 사회구조가 3차 산업중심으로 이행하며서 로마는 관리 능력을 필요로 하는 엘리트 중심의 사회로 되어가기 시작했다. 엘리트 사회의 경쟁에서 살아남게 하려면 엄청난 자녀 교육비가 들어가게 마련이다. 교육비를 감당하기 어려워서 산아제한이 시작되었고 그러다보니 이번에는 또 성도덕의 문란이 심각해졌다. 뿐만 아니라 경쟁에서 탈락하는 소외 계층은 더욱 불어나게 되었다. 본래 로마를 강력하게 유지시켜온 기본 정신은 '개인을 끊임없이 국가라는 집단에 예속시켜가는 것'이었다. 국가라는 조직과 시스템의 노예가 되는 것이 소의 로마의 자유 정신이고 시민 정신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탐욕의 결과로 빚어진 소외 계층의 등장은 로마에 큰 부담이 되었다. 국가라는 조직이 그들을 책임져야 했기 때문이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5) 이 문제의 개선을 위한 노력들은 다 수포로 돌아갔다. 크락수스의 토지개혁안은 원로원의 반대로 무산되었고 귀족들의 부패 때문에 아시아의 속주에서는 불온한 공기가 감돌고 있었다. 이러한 위기를 효과적으로 관리하기 위하여 집정관 루키우스 술라의 독재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술라의 통치권은 다시 마르쿠스 레피두스에게 넘어갔는데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가 이를 전복하고 집정관이 되었다. C 73년 스파르타쿠스가 주도한 노예반란 진압의 공을 놓고 서로 다투면서 크라수스와 폼페이우스가 서로 대립하고 있을 때 드디어 야망에찬 정치적 신인 '율리우스 가아시'가 등장하는 것이다. BC 100년에 자신과 같은 이름의 법무관 유릴우스 가이사와 모친 아우렐리나의 아들로 태어난 가이우스 율리우스 가아시는 아버지의 혈통을 부인하소 스스로 '신의 아들'임을 주장하였다. 뛰어난 웅변술과 세련된 인품으로 사람들을 매려시켰던 그에 대하여 키케로는 이렇게 평하였다. "그의 상냥한 미소 뒤에는 무서운 야심이 숨어 있고 그의 모든 계획 뒤에는 폭군적인 음모가 들어 있다."(Plutark '영웅전') AD 63년에 37세가 된 그의 행정관고 거치지 않은채로 '대제관장(Pontifex Maximus)'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됨으로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였다. 그는 스페인 총독의 임무를 훌륭하게 수행한 후 귀국하여 폼페이우스, 크라수스와 더불어 집정관이 되었다. 그리고 BC53년 크라수스 파르티아 원정에서 전사하고 BC 48년 폼피이우스가 애굽에서 암살 당하자 그는 마침내 유일한 집정관으로 임페리움을 거머쥐었던 것이다. 그러나 비상한 재능을 가진 가이사도 전성기 속에서 무너져가고 있는 로마의 운명을 헤쳐나가는데는 무력했다. 그는 수많은 문제들을 움기웅변의 수법으로 타결해 나갔으나 결국 민중의 불만을 어쩌지 못하여BC44년3월15일 그 반대자들의 칼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러나 그가 죽은 후에도 그의 후계자가 된 아우구스투스에서 하드리아누스에 이르기까지 열 다섯 명의 황제가 그들의 이름 뒤에 가이사의 이름을 붙여서 사용하였고 가아사는 적그리스도의 대명사가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그 아우구스투스 가이사 시대에 태어났으며 티베리우스 가아시 때의 유대 총독인 빌라도에게 사형 판결을 받고 십자가에 달렸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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