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역사/성경세계사

제목 : 또 나타난 '빛 의 아들'

은바리라이프 2008. 5. 26. 19:36
제목 : 또 나타난 '빛 의 아들'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2003-11-25
적그리스도의 모형이었던 알렉산더가 죽자 세계를 지배하던 광대한 헬라 제국의 영토는 알렉산더의 수하에 있었던 네명의 장군들이 그것을 4분하여 통치하게 되었다. 즉 카산더는 마게도니아를 지배했고 루시마쿠스는 소아시아를 그리고 셀류쿠스는 수리아를 차지했으며 프톨레미는 애굽을 맡아서 다스렸던 것이다. 외경의 마카비서에는 이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그 후 알렉산더는 앓아 눕게 되었는데 죽음이 임박한 것을 알고 어릴 적부터 자기와 함께 자라난 장교들 중에서 뛰어난 사람들을 불러 죽기전에 자기 왕국을 그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마카비 상1:~5~6)
이렇게 헬라 제국이 넷으로 나누어진 것은 이미 228년 전인 BC551에 다니엘이 예언했던 대로였다.
"수 염소가 스스로 심히 강대하여 가더니 강성할 때에 그 큰 뿔이 꺽이고 그 대신에 현저한 뿔 넷이 하늘 사방을 향하여 났더라"(단8:8)
이 후 이스라엘 지역은 BC 323년부터 BC 198년까지 약 125년간 프톨레미 가의 통치를 받았으나 안티오쿠스3세 때부터는 안티오쿠스가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본래 이 안티오쿠스가는 대대로 적그리스도적인 전통과 기질을 가지고 있는 가문이었다. 안티오쿠스라는 이름 자체가 영어의 'Anti'와 같이 '대적자'또는 '반대자'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셀류쿠스의 아들인 안티오쿠스 1세는 소아시아를 골 족의 침입으로부터 지켜내어 '소테르(구원자)'라는 칭호를 받았고 안티오쿠스2세는 밀레토스에 침입해 왔던 티마르쿠스를 축출하여 그곳의 사람들로부터 '데오스(하나님)'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또 안티오쿠스3세는 아르메니아와 파르디아와 박트리아를 점령하여 '대왕'의 칭호를 받았다.
안티오쿠스3세의 세째 아들이었던 안티오쿠스4세는 BC187년 그의 부왕이 반란군의 손에 죽고 그 뒤를 이었던 형 셀류쿠스 4세마저 BC175년에 피살되자 그 뒤를 이어서 왕이 되었다. 그가 곧 다니엘이 이미 예언했던 '비상한 파괴자'였던 것이다.
"그 중 한 뿔에서 또 작은 뿔 하나가 나서 남편과 동편과 또 영화로운 땅을 향하여 심히 커지더니 그것이 하늘 군대에 미칠만큼 거져서 그 군대와 별 중에 몇을 땅에 떨어뜨리고..."(단8:9~10)
뿐만 아니라 그가 장차 예루살렘을 어떻게 핍박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다니엘은 예고하였다.
"또 스스로 높아져서 군대의 주재를 대적하며 그에게 매일 드리는 제사를 제하여 버렸고 그의 성소를 헐었으며 범죄함을 인하여 백성과 매일 드리는 제사가 그것에게 붙인바 되었고 그것이 또 진리를 땅에 던지며 자의로 행하여 형통하였더라"(단8:11~12)
다니엘의 예언대로 남쪽의 애굽을 쳐서 제압하고 돌아오던 안티오쿠스 4세는 예루살렘에 이르러 승리를 자축하기 위해 그 군대로 하여금 약탈과 강간을 자행하게 했다. 이 때 그는 예루살렘이 여호와를 섬기고 헬레니즘을 대적하는 골치 아픈 존재라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BC167년의 대 박해는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는 칙령을 내려서 모든 유대인들은 헬라의 관습을 따를 것이며 성전에서의 번제를 폐지하고 안식일과 유다의 전통적인 절기를 지키지 말것이며 할례를 금지하고 성전에는 제우스의 신상을 세우고 그에게 돼지를 제물로 바치게 했다.
"145년(BC167) 기슬레월 15일에 안티오쿠스 왕은 번제 제단 위에 가증스러운 파멸의 우상을 세웠다."(마카비 상1:54~57)
그는 이 제우스의 신상을 만들 때 자신의 얼굴을 닮게 만들도록 했다. 그는 스스로를 '데오스 에피파네스'라 부르도록 했는데 '에피파네스'는 '뛰어난 빛' 이라는 뜻이었다. 또 아이들의 할례를 금지시킨 그는 할례를 받은 아이들과 그 모친과 그리고 그것을 시행한 제사장까지도 모두 다 살해하도록 명령했다.
"자기 아이들에게 할례를 받게 한 여자들을 법령에 따라서 사형에 처하고 그 젖먹이들을 목 매달아 죽였다. 그 뿐 아니라 그들의 가족과 그 아이들에게 할례를 베푼 사람까지 모두 죽였다"(마카비상 1:60~61)
이 때 예루살렘의 대제사장 오니아스의 동생 야손은 안티오쿠스 4세에게 거액의 뇌물을 바치고 유다 사람의 헬라화 정책을 전심전력으로 추진할 것을 서약하여 대제사장의 자리에 올랐다. 여기서부터 외세에 굴복하는 사두개인의 정통이 비롯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안티오쿠스4세의 핍박에도 굴복하지 않고 저항한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
"그러나 이에 꺾이지 않고 부정한 것을 먹지 않기로 굳게 결심한 이스라엘 사람들도 많았다. 그들은 부정한 음식을 먹어서 몸을 더럽히거나 거룩한 계약을 모독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달게 받기로 결심하였고 사실 그들은 그렇게 죽어갔다"(마카비 상 1:62~63)
이렇게 저항한 사람들로부터 바로 목숨을 걸고 율법을 지키려했던 바리새인의 전통이 세워졌던 것이다. 어쨌든 이렇게 박해가 심해지자 유대의 애국자들은 앉아서 죽느니 차라리 저항 하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그것이 바로 모데인의 맛다디아와 그 아들들이 주도하여 일어난 반란 사건이었다.
"그리고 맛다디아는 거리에 나서서 율법에 대한 열성이 있고 우리 조상들이 맺은 계약을 지키려고 하는 사람은 나를 따라 나서시오 하고 큰 소리로 외쳤다. 그리고 나서 그는 모든 재산을 그 도시에 버려둔 채 자기 아들들을 데리고 산으로 피해 갔다"(마카비 상 2:27)
맛다디아가 죽은 후 마카비라고 불리우는 그의 아들 유다가 그 아버지를이어 반란군을 지휘하였다. 안티오쿠스는 아르메니아의 내란과 납세 거부 때문에 사태가 심각하여 루시아로 하여금 반란을 진압하게 했다. 그러나 유다는 루시아의 부대를 쳐부수고 큰 승리를 거두었다.
BC 164년 루시아는 다시 대군을 이끌고 예루살렘을 공격했으나 유다의 반란군에게 패전했다. 거의 유대 전역을 수복한 유다는 성전이 더럽혀진지 꼭 3년만인 기슬레월 25일에 성전을 손질하여 재봉헌하고 번제를 복원시켰다. 이 날이 바로 유대인의 '하누카' 즉 요한복음 10:22에 나오는 수전절이 었던 것이다.
안티오쿠스4세는 유다가 승리한 소식을 듣고 화가 나서 날뛰다가 BC 163년의 봄에 페르샤의 타베에서 정신 이상으로 죽었다. 그러나 이렇게 헬라의 알렉산더에 이어 안티오쿠스 에페파네스라는 사탄의 아들이 날뛰다가 죽어가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더 무서운 파괴자를 준비하고 계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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