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역사/성경세계사

제목 : 스룹바벨의 꿈

은바리라이프 2008. 5. 26. 19:06
제목 : 스룹바벨의 꿈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2003-11-10
베벨론에 포로로 잡혀가서 암담한 시대를 보내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서는 두 가지의 꿈이 싹트고 있었다. 그 하나는 바로 메시야의 강림에 대한 소망이고 또 하나는 성전 재건에 대한 열망이었다. 그리고 그 성전 재건에 대한 열망은 누구보다도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할 때 소외 당하여 밀려났던 레갑 사람들에게서 시작되었다.
마태복음 1장에는 아브라함으로부터 마리아의 남편 요셉에 이르는 족보가 수록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서 이제 우리가 조명해 보아야 할 곳은 바로 유다 왕조가 멸망되던 당시의 부분이다. 거기에 마태복음 1장과 누가복음 3장에 누록된 두개의 족보를 연결시켜 주는 '스알디엘'과 '스룹바벨'이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히스기야는 므낫세를 낳고 므낫세는 아몬을 낳고 아몬은 요시야를 낳고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에 요시야는 여고냐와 그의 형제를 낳으니라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에 여고냐는 스알디엘을 낳고 스알디엘은 스룹바벨을 낳고 스룹바벨은 아비훗을 낳고..." (마1:10~13)
여기서 여고냐는 요시야의 손자인 여호야긴을 의미한다. 마태가 왜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을 빼고 여고냐로 뛰었는지 모르지만 다윗에서 여호야긴까지는 다윗의 아들 솔로몬을 통해서 이어지는 유다 왕들의 계보이다. 그러나 누가복음의 계보에서는 이 부분이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그 이상은 요아난이요 그 이상은 레사요 그 이상은 스룹바벨이요 그 이상은 스알디엘이요 그 이상은 네리요 그 이상은 멜기요 그 이상은 앗디요 그 이상은 고삼이요..."(눅3:27~28)
이 족보는 계속 거술러 올라가면 다윗의 아들이며 솔로몬의 형이었던 나단으로 이어진다. 즉 이 족보는 왕들의 계보가 아닌 것이다.
"예루살렘에서 낳은 아들들은 이러하니 시므아와 소밥과 나단과 솔로몬 네 사람은 다 암미엘의 딸 밧수아의 소생이요..."(대상3:5)
이왕에 역대기를 펼쳤으니 역대기에 나오는 스알디엘과 스룹바벨의 부분도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사로잡혀간 여고냐의 아들들은 그 아들 스알디엘과 말기람과 브다야와 세낫살과 여가먀와 호사마와 느다뱌요 브다야의 아들들은 스룹바벨과 시므이요 스룹바벨의 아들은 므술람과 하나냐와 그 매제 슬로밋과 또 하수바와 오헬과 베레갸와 하시댜와 유삽헤셋 다섯 사람이요..."(대상3:17~20)
이 족보에 기록된 것처럼 스룹바벨의 아들들은 셋과 다섯이 분리되어 있고 그 중 슬로밋은 또 므술람과 하나냐의 매제(sister)로 되어 있어 가족관계가 매우 복잡하다.여기다가 마태복음에 나오는 아비훗과 누가복음의 레사를 넣으면 더욱 복잡해 지는 것이다.
어쨌든 스룹바벨의 아들들은 별도로 생각하기로 하고 스룹바벨 자신만 보면 그는 스알디엘의 아들이 아니고 브다야의 아들이다. 결국 스룹바벨은 브다야의 아들로서 유다의 습관에 따라 스알디엘의 아들로 입양되었던 것이다. 스알디엘은 결혼을 하지 않았거나 아니면 결혼을 했어도 아들이 없었을 것으로 추측되는데 그것은 여호야긴에 대한 예레미야의 예언 때문이다.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는 이 사람이 무자하겠고 그 평생에 형통치 못할 자라 기록하라..."(렘22:30)
그러나 여호야긴에게는 역대기의 족보에 나오듯이 일곱명의 아들이 있었으므로 후계자가 없으리라는 예레미야의 예언은 그의 장자인 스알디엘에 관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여호야긴은 BC597년 바벨론 군대의 제2차 진입때에 바벨론으로 잡혀갔다. 이 때 그는 18세였는데 그 때 이미 스알디엘은 태어나 있었던 것 같다. 스룹바벨의 이름이 '바벨론에서 태어났다'는 뜻이므로 스알디엘은 그 이전에 태어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어쨋든 여호야긴의 아들이 일곱인 것을 보면 그는 바벨론에 잡혀 가서도 자식들을 낳았던 모양이다. 그러나 장자인 스알디엘에게는 자식이 없었고 그는 브다야의 아들 스룹바벨을 자신의 후계자로 삼았다. 그런데 스알디엘과 스룹바벨의 이름은 왜 솔로몬의 자손과 전혀 계통이 틀리는 누가복음의 족보에도 들어가 있게 된 것일까?
필자는 이미 누가복음의 계보가 혈통의 계보가 아니며 레갑의 기술자 집단을 이끈 지도자들의 계보일 것이라고 추측했던 바가 있다.('다윗의 족속과 나단의 족속' 참조) 왕의 아들로서 적국에 붙잡혀가 망국의 후예가 된 스알디엘을 애국자의 집단인 레갑 당에 입문하여 성전 재건의 꿈을 불태�으며 스룹바벨은 그 꿈의 후계자로 삼았던 것이 아닐까?
스룹바벨은 나중에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여 무너진 성전을 재건한 건축 기술자였다. 바벨론 군대를 피하여 예루살렘에 집결해 있던 레갑의 애국자들은 여호야김 왕이 친애굽 정책을 택하여 바벨론에 저항할 때에(왕하24:1) 예루살렘 방어에 참여했을 것이다. 그들은 결국 BC 597년 여호야긴이 바벨론으로 끌려갈 때에 함께 잡혀갔다(왕하 24:14).
그들은 바벨론에서 무엇을 하였을까? 말할 것도 없이 그들은 바벨론 궁전의 증축과 그발의 운하 공사와 각종 신전들의 건축 그리고 유명한 느부갓네살의 공중 정원 건축에도 동원되었을 것이다. 또 왕이 두라 평지에 세웠던 60규빗 (약 27미터)높이의 거대한 신상 (단3:1)도 레갑 사람들의 기술이 아니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바벨론 왕궁의 총리로 있었던 다니엘의 보호 정책과 바벨론의 각종 건축 공사에 동원되었던 레갑 기술자들의 활약 때문에 포로로 잡혀가 있던 유다의 포로들은 70년 동안 죽지 않고 살아남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BC 538년 메대와 바사(Persia)의 연합군을 이끌고 바벨론을 점령한 바사 왕 고레스는 유대인들이 고향으로 돌아가도 좋다는 귀환령을 내렸다.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비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스1:1)
건축 기술자 스룹바벨과 제사장 예수아(여호수아) 가 42,360�의 유대인을 이끌고 1차 귀환을 한 것은 BC 536년이었다. 바벨론이 제1차 예루살렘에 들어와 다니엘을 비롯한 왕족들을 잡아간지 꼭 70년 만의 일이었는데 그것은 이미 예레미야의 입을 통해서 예고된 것이었다.
"바벨론에서 70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권고하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실행하여 너희를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렘 29:10)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포로들은 즉시 성전 재건에 착수하였으나 사람은 적었고 비용은 부족하였으며 특히 외세의 방해 때문에 그 공사는 20년이나 걸렸다. 그러나 우리가 특히 여기서 바로 알아야 할 것은 스룹바벨이 외세의 개입을 일체 거절하고 '정결한 성전'을 건축하였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니므롯의 후예임을 자처하는 루시퍼의 세력들은 스룹바벨도 두로의 히람처럼 자기 조직의 기술자였다는 억지 주장을 하고 있다. 그러나 스룹바벨은 그 인력과 자금이 턱 없이 부족했는데도 불구하고 지난날 사탄의 세력들이 솔로몬에게 햇던 것과 마찬가지로 합작을 제의해 오자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는 사실이 성경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유다와 베냐민의 대적이 사로잡혔던 자의 자손이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전을 건축한다 함을 듣고 스룹바벨과 족장들에게 나아와 이르되 우리도 너희와 함께 건축하게 하라 우리도 너희같이 너희 하나님을 구하노라"(스4:1)
사탄의 세력은 다시 귀환한 유대인들의 성전 건축에 참여하여 또 그 성전을 오염시키려는 악랄한 공작을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미 레갑의 훈련을 받은 스룹바벨이 그들의 유혹에 넘어갈 리가 없었다.
"스룹바벨과 예수아와 기타 이스라엘 족장들이 이르되 우리 하나님의 전을 건축하는데 너희는 우리와 상관이 없느니라 바사 왕 고레스가 우리에게 명하신대로 우리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홀로 건축하리라..."(스4:3)
이렇게 해서 새 예루살렘 성전은 비록 솔로몬 시대의 것만큼 웅장하지는 못했으나 주상(柱像)도 세우지 않고 소와 사자의 형상도 없는 정결한 모습으로 건축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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