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역사/성경세계사

제목 :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은바리라이프 2008. 5. 26. 18:36
제목 :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2003-10-30
바알의 일당을 다 진멸했던 예후의 충성 때문에 하난님께서는 그가 금송아지를 없애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4대의 왕위를 이어주셨다.
"네가 나 보기에 정직한 일을 행하되 잘 행하여 내 마음에 있는대로 아합 집에 대 행하였은 즉 네 자손이 이스라엘 왕위를 이어 4대를 지나리라"(왕하 10:30)
예후는 28년간 왕의 자리에 있었고 그의 아들 여호아하스는 17년을 있었으며 손자 요아스는 16년 그리고 3대째의 여로보암 2세는 41년을 치리하였는데 4대째의 스가랴가 왕이 된지 6개월만에 드디어 그 스가랴는 살룸의 모반으로 목숨을 잃었다. 그 후로 다시 이스라엘의 역사는 모반으로 이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살룸은 왕이 된지 겨우 한달만에 므나헴에서 죽었고 므나헴은 10년 동안 왕 노릇을 하다가 죽어서 아들 브가히야가 뒤를 이었다. 그러나 브가히야는 2년만에 또 베가의 쿠데타로 죽었고 베가는 20년동안 여로보암의 길로 걷다가 호세아의 모반으로 죽었다. 그리고 호세아 9년, 즉 BC722년에 드디어 이스라엘은 앗수르 왕 살만에셀의 침입을 받아 멸망당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로보암의 행한 모든 죄를 따라 행하여 떠나지 아니하므로 여호와께서 그 종 모든 선지자로 하신 말씀대로 심지어 이스라엘을 그 앞에서 제사신지라..."(왕하 17:22~23)
이스라엘을 없애버리시는 하나님의 조치는 매우 철저한 것이었다. 이스라엘에 대한 몽둥이로 사용된 앗수르 왕 살만에셀은 이스라엘의 선민 의식을 말살하기 위하여 사마리아에 혼혈 정책을 시행했던 것이다.
"앗수르 왕이 바벨론과 구다와 아와와 하맛과 스발와임에서 사람을 옮겨다가 이스라엘 자손을 대신하여 사마리아 여러 성읍에 두매 저희가 사마리아를 차지하여 그 여러 성읍에 거하니라"(왕하17:24)
이렇게 해서 북 왕국 이스라엘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사마리아는 오욕과 수치의 대명사가 되었다. 그러면 솔로몬의 자손들이 다스리던 남 왕국 유다는 어떻게 되었던가? 솔로몬으로부터 4대째의 왕 여호사밧은 하나님을 잘 섬겼으나 북 왕국 이스라엘과 동맹을 맺어서 화근을 남겼다.
정치적으로는 잘 된 협상이었는지 몰라도 여호사밧은 남북의 우의를 상징하는 조치로 가나안 여자 이세벨이 낳은 딸을 그의 며느리로 맞아들여서 바로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합당하지 못한 일이 되었던 것이다. 성경은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했다.
"저가 이스라엘 왕들의 길로 행하여 아합의 집과 같이 하였으니 이는 아합의 딸이 그 아내가 되었음이라"(왕하8:18)
여호람이 8년을 치리하고 죽자 그의 아들 아하시야가 왕이 되었는데 그는 왕이 된지 1년만에 외삼촌인 이스라엘 왕을 문병하러 갔다가 혁명을 일으킨 예후의 손에 죽었다. 왕이 죽자 그의 모친이며 이세벨의 딸인 아달랴는 자신의 손자들을 다 죽여버리고 스스로 정권을 잡았다.
그러나 이 때 아달랴의 딸 여호세바가 왕자 중의 하나인 요아스를 숨겨서 살려내었다. 6년이 지나자 제사장 여호야다가 숨어 있던 요아스를 옹립하여 왕으로 삼았고 아달랴는 도망하다가 죽임을 당했다. 요아스 이후의 왕들은 비교적 하나님께 충성을 했으나 하나님께서는 이들이 솔로몬의 때로부터 내려오는 산당을 없애지 않은 일로 문제를 삼으셨다.
"요아스가 제사장 여호야다의 교훈을 받을 동안에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되 오직 산당을 제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이 오히려 산당에서 제사하며 분향하였더라"(왕하12:2~3)
산당이란 본래 가나안 사람들이 그들의 신에게 제사를 드리던 곳이었다. 가나안 땅을 점령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성전이 지어지기 전에 그 산당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도 했으나 성전을 완공한 다음에도 산당은 없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결국 산당은 다시 우상에게 절하고 제사하는 장소로 슬그머니 바뀌기 시작했던 것이다.
나중에 히스기야 왕이 등장하여 이 산당(山堂)모두 없애버렸으나 그의 아들 므낫세는 그의 부친이 헐어버린 산당들을 다시 세웠으며 바알을 위하여 제단을 쌓고 아세라 목상을 세웠다. 뿐만 아니라 그는 자신의 아들을 불태워 우상의 제물로 바쳤고 점술과 사술에 빠져버렸으며 이를 질책하는 이사야 선지자를 톱으로 썰어서 죽였다. 마침내 하나님께서는 므나셋의 일로 인하여 유다도 버리시기로 작정하셨던 것이다.
"유다 왕 므낫세가 예루살렘에 행한 바를 인하여 내가 그들을 세계 열방 중에 흩으리라"(렘 15:4)
그러나 이렇게 유다를 버리시기로 작정하신 후에 이변이 일어났다. 므낫세의 손자인 요시야가 히스기야 못지 않은 정직한 왕이 된 것이다. 이는 바로 그 모친 여디다의 훌륭한 교육 때문이었다.
"그 모친의 이름은 여디다라 보스갓 아다야의 딸이더라"(왕하 22:1)
성전을 수리하도록 명한 요시야는 성전에서 찾아낸 율법서를 읽고 일대 개혁을 시작하였다. 그는 바알과 아세라의 모든 우상을 깨뜨리고 그들을 위하여 만든 기명을 불사르고 모든 산당을 다 없앴을 뿐만 아니라 그곳에서 분향하던 제사장들을 파면하였다. 그는 솔로몬이 세운 아스다롯의 산당을 없애고 그곳을 해골로 채�으며 여로보암이 벧엘에 세웠던 산당을 헐고 모든 백성이 율법서에 잇는 대로 유월절을 지키게 하였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이미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버리시기로 작정한 후의 일이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의로운 왕 요시야에게 멸망의 참혹한 모습을 보지않고 '일찍 죽을 수 있는 은혜"를 베푸셨다. 대제사장 힐기야가 여선지 훌다에게 나아갔을 때 훌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렇게 전했다.
"그러므로 내가 너로 너의 열조에게 돌아가서 평안히 묘실로 들어가게 하리니 내가 이곳에 내리는 모든 재앙을 네가 눈으로 보지 못하리라"(왕하 22:20)
그 모든 의로운 일들을 시행했던 요시야 왕은 BC609년 애굽 왕이 앗수르를 공격하기 위하여 북상할 때에 그의 진로를 막기 위하여 므깃도로 올라갔다가 전사했다. 그는 이스라엘과는 관계도 없는 일에 나섰다가 변을 당했던 것이다. 의로운 왕이 죽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뜻이었다.
이 때에 온 유다는 공포에 떨었고 예레미야 선지자는 눈물을 흐리며 슬픈 노래를 지어 요시야 왕의 죽음을 애도했다. 요시야 왕이 죽고 예루살렘에서는 요시야의 아들 여호아하스가 왕이 되었다. 그러나 요시야의 아들들이 번갈아 가며 왕이 되는 사이에 예루살렘은 점점 타락해 갔고 결국 BC 597년에 또 예루살렘을 짓밟았고 예루살렘의 많은 백성과 관리들과 군인들과 그리고 레갑의 기술자들을 바벨론으로 잡아갔다. 그리고 드디어 BC 586년 예루살렘은 바벨론의 세번째 침입을 받아 멸망하였다. 하나님의 나라가 지상에서 사라진 것이다. 그것은 다윗이 왕위에 오른지 겨우 425년 만이었고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진입하여 820년되는 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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