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여로보암의 길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2003-10-20 |
이스라엘 열 두 지파 중 열 지파의 지지를 얻은 여로보암은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이 선무사(宣撫使)로 보낸 아도니람을 죽이고 세겜에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그 여로보암의 막후 세력은 가나안 출신의 노동자 15만3천6백여명이었고 그들을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는 것은 두로 왕이었다. 그러나 유다와 결별하고 이스라엘의 왕이 된 여로보암은 언제 이스라엘이 자기를 배반할지 몰라서 몹시 불안하였다. "만일 이 백성이 예루살렘에 있는 여호와의 전에 제사를 드리고자 하여 올라가면 이 백성의 마음이 유다 왕 된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서 나를 죽이고 유다 왕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리로다..."(왕상12:27) 그래서 여로보암은 두 금송아지를 만들어 벧엘과 단에 두고 그가 곧 너희 신이니 그에게 제사를 드리라고 명령했다. 또 산당들을 지어 레위 지파가 아닌 보통 백성으로 제사장을 삼는가 하면 8월15일을 절기로 정하고 벧엘의 단에서 분향하게 하여 이것이 여로보암의 죄가 되었던 것이다. 일찌기 그가 이스라엘 왕이 되리라고 예언했던 선지자 아히야는 그의 이러한 행동을 보고 경고했다. "여호와께서 여로보암의 죄로 인하여 이스라엘을 버리시리니 이는 저도 범죄하고 이스라엘로 범죄케 하였음이니라"(왕상14:16) 그 이후로 북 왕국의 모든 왕들에 대한 기록에는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여' 저주를 받았다는 꼬리표가 따라다니게 된다. 여로보암이 22년간 왕위에 있다가 죽고 그의 아들 나답은 왕이 된지 2년만에 모반한 바아사의 손에 죽게 된다. 성경은 나답에 대하여 이렇게 적었다. "그 아비의 길로 행하며 그가 이스라엘로 범하게 한 그 죄 중에 행한지라"(왕상 15:26) 모반자 바아사는 왕이 된지 24년만에 죽고 그 아들 엘라가 왕이 되었는데 또 성경은 이렇게 기록했다. "바아사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며..."(왕상15:34) 바아사의 아들 엘라가 왕이 된지 2년만에 시므리가 쿠데타를 일으켜 왕과 바아사의 모든 족속을 다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엘라에 대해서도 성경의 기록은 마찬가지였다. "저가 여로보암의 집을 본받아 여호와 보시기에 모든 악을 행하며..."(왕상16:7) 새로 왕이 된 시므리는 그부터 7일 후에 역시 군대 장관 오므리의 쿠데타로 죽었다. 성경은 그에 대해서도 같은 말로 기록하였다. "저가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며..."(왕상16:19) 이렇게 해서 금송아지에 대한 제사로 시작된 북 왕국 이스라엘은 여로보암으로부터 시작하여 50년 동안 세번의 쿠데타가 일어난 것이었다. 오므리가 정권탈취를 위하여 일어섰을 때 그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지지는 찬반이 서로 반반씩 엇갈리고 있었다. "그 때에 이스라엘 백성이 둘에 나뉘어 그 절반은 기낫의 아들 디브니를 좇아 저로 왕을 삼으려 하고 그 절반은 오므리를 좇았더니 오므리를 좇은 백성이 기낫의 아들 디브니를 좇은 백성을 이긴지라"(왕상16:21) 서로 절반씩 갈라져서 싸울 때에 오므리는 어떻게 하여 반대파를 제압할 수 있었던 것일까? 성경에는 오므리가 두로 왕의 지원을 받았으리라고 짐작하게 해 주는 기사가 나와 있다. 즉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두로 왕의 딸을 왕비로 삼았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다.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그 전의 모든 사람보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더욱 행하여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 행하는 것을 오히려 가볍게 여기며 시돈 사람의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로 아내를 삼고 가서 바알을 섬겨 숭배하고..."(왕상16:30~31) 시돈과 두로는 본래 하나였다. 두로는 시돈의 무역항이었고 시돈이 정치적 권력을 대표한다면 두로는 경제적 영향을 상징하는 성읍으로 두 성읍은 본래 하나로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사야는 두로에 대해서 경고할 때 두로가 시돈과 하나라는 것을 밝혔다. "바다에 왕래하는 시돈 상고로 말미암아 부요하게 된 너희 해변 거민들아 잠잠하라"(사 23:2) 이 '해변 거민들'은 곧 두로를 가리킨다. 또 이사야는 두로를 '시돈의 딸'이라고 불렀다. "너 학대 받은 처녀 딸 시돈아 네게 다시는 희락이 없으리니 일어나 깃딤으로 건너가라 거기서도 네가 평안을 얻지 못하리라"(사23:12) 또 역사가 요세푸스는 이세벨의 아버지 엣바알을 '두로와 시돈의 왕' 이라고 기록했다. 이 엣바알은 바로 다윗에게 왕궁을 지어주고 솔로몬의 성전 건축을 지원하고 그로 하여금 황금의 병에 걸리도록 만들었던 두로 왕 히람의 손자로 추정된다('Cambridge 고대사'Ⅰ~Ⅳ) 그렇다면 오므리는 왜 가나안 세력의 보스였던 두로 왕의 딸을 자신의 며느리로 삼았으며 아합은 그녀를 왕비로 맞아들였던 것일까? 당시로 보아 왕가에서 가나안 여자를 맞아들이는 일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이미 하나님께서 엄격하게 금하신 일이기 때문이었다. "또 그들과 혼인하지 말지니 네 딸을 그 아들에게 주지 말 것이요 그 딸로 네 며느리를 삼지 말것은 그가 네 아들을 유혹하여 그로 여호와를 떠나고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하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갑자기 너희를 멸하실 것임이니라"(신7:3) 그런데도 불구하고 오므리는 가나안 여자를 며느리를 삼았다. 평민도 아니고 왕가에서 이런 일이 생긴 것은 뭔가 불가피한 사유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오므리는 두로 왕 엣바알에게서 무엇인가 상당한 빚을 졌으며 그 때문에 압력을 받았을 것이다.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그가 집권하는 과정에서 생긴 경제적 군사적 지원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김성일님의 '성경으로 여는 세계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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