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 분별/성령과 악령

부자와 나사로 - 몸, 귀신, 사후 세계를 중심으로 -

은바리라이프 2008. 5. 24. 18:05
부자와 나사로 - 몸, 귀신, 사후 세계를 중심으로 -  
부자와 나사로 - 몸, 귀신, 사후 세계를 중심으로 -  

 김 정 태



김정태/ 1962년생·베뢰아대학원대학교 교수(신약학)·베뢰아아카데미 12기 수료

Ⅰ. 들어가는 글

귀신과 관련해서 믿지 않은 조상이 왜 귀신이 되며, 또 죽은 조상이 어떻게 후손에게 질병 등의 해악을 끼치느냐고 반발하는 경우가 있다. 기독교의 믿음이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까지 영향을 끼칠 수 있느냐고 따지는 것이다. 구원은 상대적인 것이지 절대적인 것은 아니라는 주장이다. 또한 죽은 조상이 후손을 해롭게 한다는 것에 대해서도, 조상 중에 후손이 잘못되기를 바라는 자가 어디 있느냐고 항의한다. 이런 것을 망자(亡者)에 대한 명예훼손으로 여기는 것이다.
귀신의 정체에 대해 베뢰아에서 말하는 ‘불신자의 사후설’과 ‘귀신에 의한 질병 유발설’을, 어떤 자는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예로 들어가며 위의 견해에 동조하기도 한다. 부자는 불꽃 가운데서 고통을 당하면서도 자신의 형제를 구원해달라고 했는데, 부자가 귀신이라면 어떻게 전도를 요청했겠느냐는 것이다. 그 비유에 의하면 부자가 자신의 형제들에게 해악을 끼치기는 커녕 오히려 전도를 해달라고 한 것은 지옥에서 당하는 형벌의 고통때문일 뿐이기에, 부자가 귀신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불신자의 삶의 여정을 오해한 연고다.

Ⅱ. 불신자의 삶

불신자의 삶은 네 단계를 거친다. 육체 안에서의 삶, 귀신으로의 삶, 무저갱에서의 삶, 지옥에서의 삶이다.

1. 육체 안에서의 삶

불신자는 영적인 것을 모르기에 육체만을 위해 산다. 단지 몸을 중심으로 판단하고 행동한다. 그래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하며, 자기 몸을 편하게 하고 오래 살기 위해 노력한다. 마귀는 사람들이 가진 이런 육체에 대한 애착을 이용하고, 또 “죽기를 무서워하는” 것을 이용하여(히 2:14), 그들을 굴복시켜 하나님을 믿지 못하게 한다. 예수는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 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지만,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런 호의와 공로와 은혜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래서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따르며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생활한다.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엡 2:3). 불신자는 불행의 영적 원인을 모르고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살아 있는 동안 어떻게 해서든 몸을 만족케 하고 편하게 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불신앙은 영혼과 육체에 문제를 일으킨다. 불신앙은 영혼의 죄와 육체의 저주를 해결할 수 없게 한다. 육체에 임한 저주가 질병과 가난과 불행으로 나타난다. 만일 그 저주가 귀먹은 것이라면 귀먹은 영이 되고, 벙어리 된 것이라면 벙어리 된 영이 된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살았을 때 죄를 범함으로써 육과 혼, 곧 인격이 저주를 받았기 때문이다.

2. 귀신으로의 삶

육체 안에서의 삶이 끝나면 귀신으로의 삶이 시작된다. 몸을 벗어나는 순간 그의 영은 죄와 저주를 함께 가지고 있게 된다. 사람의 영혼은 장막 속에 있어야 편안하기에(고후 5:1∼4) 불신자의 영혼은 육신의 장막을 떠나는 것을 대단히 괴로워한다.1) 그러나 육체의 장막은 무너질 수밖에 없으므로 육체를 떠나지 않을 수 없다.
귀신이 되어 거처를 잃은 불신자의 영혼은 남의 육체에라도 들어가서 자기 장막으로 삼고자 한다. 심지어 ‘돼지 떼’ 속에라도 들어가고자 한다. 이처럼 귀신은 ‘물 없는 곳’ 즉, 쉴 만한 곳을 찾아다닌다(마 12:43). 자기를 환영해 줄 만한 사람 속에서 남은 기간을 지내고자 한다.2)
귀신은 타인의 육체에 머물면서 그가 육체로 살았을 때의 모습을 그 육체 속에 투영시키려고 한다. 그가 가지고 있는 저주를 다른 사람의 육체에 나타내어, 다른 사람의 불행을 자신의 ‘기쁨’과 ‘위로’로 삼으려고 한다. 그래서 생전의 삶이 악했던 사람은 귀신이 되어서도 그 악한 성품을 나타내고, 살았을 때 병들었던 사람은 그 병을 일으키고, 가난했던 자는 가난을, 사고를 당한 자는 사고를 유발한다.3)
조상이라도 후손에게 악하게 하는 이유는 육체를 벗은 후에는 마귀에 의해 지배받는 인격이 됨으로 말미암아 마귀적인 특성을 드러내야 하기 때문이다. 불신자는 생전과는 달리 사후에는 마귀를 거역하거나 대항할 수 없는 인격이 된다. 따라서 부모와 자식 등의 관계로서가 아니라, 마귀의 종이 된 입장에서 사람들을 대한다. 생전에 악한 자라도 자식에게 좋은 것을 줄줄 알던 때와는 달리, 자식의 육체 속에서도 자신의 저주를 그대로 나타내려 한다.
그래서 귀신은 모든 병의 원인이 되며(마 8:16, 행 10:38), 사고와 범죄(딤전 4:1), 알콜 중독, 담배 중독, 마약 중독 그리고 자살의 원인이 된다.4) 성경에서 귀신을 지칭할 때마다 ‘더러운 귀신’이라 하여 ‘더럽다’는 것을 강조한 것은 귀신의 특성이 배설물 같은 존재, 곧 똥같이 더러운 존재라는 의미다. 이는 세상에 사는 동안 영혼을 거룩하게 하지 않고, 영혼을 위해 수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3. 무저갱에서의 삶

귀신으로의 삶을 마치면 무저갱5)에서의 삶이 시작된다. 불신자의 사후 영은 귀신으로서의 활동이 끝나면 무저갱에서 고통을 당하게 된다. ‘물 없는 곳’인 불신자 속에서 쉬기를 구하였으나, 쉴 곳을 얻지 못했던 귀신은 이 음부와는 다른 무저갱에서 또다시 고통을 당하게 된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 나오는 부자는 그곳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자기 형제들이 그곳에 오지 않도록 나사로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거라사 지방 무덤 사이에 있던 자 속에 들어있던 귀신이 예수의 출현을 두려워했던 것은 무저갱으로 쫓겨나 고통을 당하는 것 때문이었다. 그들은 정해진 시간이 되기 전에 그 곳에 보낼까 하여 ‘우리가 당신을 방해하지도 않았는데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오셨습니까?’(마 8:29)라고 발악하였다. ‘왜 우리가 살기 좋은 이 지방에서 나가라고 합니까’(막 5:10) “…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컨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 하니”(막 5:7)라고 하며, 무저갱으로 쫓겨가는 것을 두려워하며, 그곳에 처해지지 않기를 간구했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 “음부에서 고통 중에”라는 구절의 “고통”(, 바사노이스)이 바로 이곳이다. ‘부자가 있는 곳은 음부 안의 무저갱이다.’6) 그곳은 ‘음부’(, 하데스)와 동일한 곳이 아니지만 상당히 밀접하여 분리할 수 없는 곳이다. 그곳에서 당하는 고통은 형벌적 고통과 사망에 가까운 죽음의 고통이다. 특히 계시록에서는 심판과 관련된 고통을 가할 때 이 단어가 사용되었다:

“죽이지는 못하게 하시고 다섯 달 동안 괴롭게만 하게 하시는데”(계 9:5),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계 14:10),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우니…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계 20:10, 참고 14:11; 18:7, 10, 15). 뿐만 아니라 “의로운 심령을 상하니라”(벧후 2:8), “제자들의 괴로이 노 젓는 것을 보시고”(막 6:48, 마 14:24), “해산하게 되매 애써 부르짖더라”(계 12:2),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와하나이다”(마 8:6)에 언급되며, 특히 귀신이 예수 때문에 괴로워한다는 데에 등장하기도 한다.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하더니”(마 8:29, 막 5:7, 눅 8:28) 등의 성구에서 나타난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 이런 “고통 받는 곳”(눅 16:28)과 관련된 단어로는 ‘불못’과 유사한 ‘불꽃’을 비롯하여 ‘고민하나이다’, ‘고민을 받느니라’ 등이 있다
4. 지옥에서의 삶

성경에서 예수는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 10:28)고 이르셨다. 여기에서 지옥으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게헨나’7)다. 이 단어는 신약에 열두 번 나온다.8) 그 중 열한 번은 예수가 직접 언급하였고, 계시록에서는 그곳이 ‘불못’9)이라고 하였다.
예수가 ‘게헨나’에 대해 언급하였을 때 그곳은 죄인들의 최후 거주지라고 하셨고, 열한 번 중 일곱 번은 죽은 자의 몸이 거기에 있게 된다고 하였다. 불신자가 심판의 부활을 맞이한 후에는 주의 보좌 앞에 있는 생명책에 기록된 이름이 없으므로 낙엽처럼 불못으로 떨어져 내려간다.
곧 영혼이 영원히 하나님과 분리되어 세세토록 괴로움을 당하는 사망을 맛보게 된다. 불과 유황으로 타는 이 못은 그 연기가 세세 무궁토록 하늘로 올라가는 곳이다. 예수는 이 불못을 가리켜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사람마다 불로서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막 9:48, 49)고 하였다. 사망과 음부도 이 불못에 던져진다(계 20:14).



Ⅲ. 몸에 매인 불신자의 삶과 영혼을 위해 사는 신자의 삶

1. 불신자: 몸에 매인 삶

불신자 중에서 착하게 사는 자가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불신자가 착하게 살았다는 이유로 귀신이 된 후에 후손에게 해악을 끼치지 않는다는 논리를 수용할 수 있는가? 불신자는 마귀가 악하게 살도록 강요할 것 같은데 왜 마귀의 인도를 따르지 않는 것일까? 결론적으로 몸()10)이 힘들어서 그렇다. 인간은 이 땅에 사는 동안 몸을 초월할 수 없다.
불신자가 착하게 사는 것은 자신의 몸의 평안함과 자기가 몸으로 난 자식들에게 손해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그의 속성이 선한 것은 아니다. 몸의 자유가 훼손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일 뿐이다. 악하게 살면 그 사람 자체가 몸의 제한을 받게 되며, 그런 것들이 결국에는 후손들의 출세 등에 방해요소가 되기에 절제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귀신이 되면 착한 귀신이 없고 악한 것만 드러나는 이유는 무엇인가? 몸을 벗으니까 악한 것이 드러나는 것이다. 몸 때문에 드러나지 않았었는데 육체를 벗어나게 되면서 영적인 특성을 드러낸 것이다. 마귀는 영적 존재이기에 육체를 벗은 인간의 영은 마귀의 지시를 100% 따르고 순종할 수밖에 없다. 육체를 벗었을 때와 그렇지 않을 때의 차이가 있다. 그러기에 귀신들도 어느 면에서는 불쌍한 존재다. 후손을 생각한다면 후손을 도와주어야 하는데, 도울 수 없는 상태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귀신이 악해질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이는 반도체(半導體)와 도체(導體)의 관계와 같다.11) 사람이 살아 있을 때는 몸이 있어서 반도체와 같지만, 죽고 나면 도체가 되어 마귀의 일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영적 존재인 마귀의 요구를 ‘더러운 영’이 된 다음에는 거부할 수 없게 된다.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마 7:11) 하는 말씀이 있듯이, 사람 중에는 악한 자가 있으나, 사람의 보편적인 특징은 후손에게 잘해 주려 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좋은 일을 해줄 수 있는 것은 살아 있을 때나 가능하며, 귀신이 된 후에는 좋은 일을 해줄 수 없다.12) 왜 그런가? 귀신은 귀신과 마귀의 입장에서 잘해주는 것이지, 그에게 근본적으로 잘해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귀신의 근본은 죄요, 더러움이요, 악이다. 귀신이 잘해준다는 것은 미혹해서 마귀와 귀신을 더 섬기게 하려 하는 것이다.
물론 귀신 중에는 착하게 살았다는 것이 느껴지는 귀신도 있다. 그런 귀신은 ‘귀신 답지 않게’, ‘아무 일도 안 할 것이니, 그대로 내버려 줘’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런 귀신은 어려서 죽었거나 순박하게 살아온 사람의 경우다.13) 그러나 이런 귀신의 (영적) 본질이 착하다고 할 수는 없다. 귀신이 그 사람 속에서 활동할 만한 이유가 생기면 귀신은 그를 괴롭게 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귀신론에서는 혼백14)과 조상 신이 자손들에게 도움을 준다고 믿는다. 조상 신과 잡귀를 구분하고 있다.15) ‘일본에서 귀신이라고 하면 악신(惡神)을 의미하는 것이나 중국과 조선에서는 선신(善神)도 포함하고 있다.’16)
그러나 성경에서는 ‘착한 귀신’이란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한다. “우리가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점하는 귀신 들린 여종 하나를 만나니 점으로 그 주인들을 크게 이(利)하게 하는 자라”(행 16:16)에서와 같이 귀신의 활동을 통해 물질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자에게는 귀신이 ‘착하다’고 할 수 있으나, 진리의 빛에 비추어 볼 때 귀신의 모든 사역은 악할 수밖에 없다. 귀신의 활동을 통해 세상적인 유익을 얻는 경우는 이외에도 사마리아의 마술사 시몬이 있었다. “그 성에 시몬이라 하는 사람이 전부터 있어 마술을 행하여 사마리아 백성을 놀라게 하며 자칭 큰 자라 하니 낮은 사람부터 높은 사람까지 다 청종하여 가로되 이 사람은 크다 일컫는 하나님(세상적인 의미의 하나님)의 능력이라 하더라”(행 8:9, 10). 또한 에베소의 마술사와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귀신의 힘을 사용한 자들이다. “이에 돌아다니며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이 시험적으로(혹 망령되이, 난하주) 악귀 들린 자들에게 대하여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 말하되 …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이 일을 행하더니 악귀가 대답하여 가로되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 악귀 들린 사람이 그 두 사람에게 뛰어올라 억제하여 이기니 저희가 상하여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하는지라”(행 19:13∼16).17)
살아 있을 때는 몸이 있어 절제가 되는 것뿐이며, 귀신이 된 후에는 그가 살아 있을 때처럼 후손에게 온전히 대할 수가 없다. 그러나 베뢰아의 귀신론에서는 성경에서 말하는 것과 동일하게 잡귀로 불리든, 혼백으로 불리든 간에 그들은 복음과 진리에 대적하는 역할을 하는 존재이기에 궁극적으로는 해를 끼친다는 것이다.

2. 신자: 영혼을 위해 사는 삶

왜 예수를 믿는 자 중에서도 착하지 않은 사람이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가? 성령은 신자들에게 착하게 살도록 감동하실 텐데도 그 감동을 무시하고 안 따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렇게 사는 이유는 몸이 힘들기 때문이다. 부활의 소망보다는 육체의 평안함이 우선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몸으로 있을 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그것이 영이 된 후에는 위로가 되고 생명이 된다. 몸으로 산 결과가 영에게 축복과 상급으로 남는다.18)
그래서 우리 신자는 몸을 착한 일에 잘 사용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몸의 욕구보다는 말씀의 명령에 민감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착한 삶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며 그것은 천국에서 상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하고(눅 19:17)

그런데 착하다는 것의 근거는 무엇인가? 믿는 자의 착함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 행위를 말한다. 일반 윤리로 착하다고 하는 것은 상황적이어서 절대적인 판단기준이 될 수 없기에 성경에 따른 것이 ‘착함’의 근거가 된다. 다른 성경과는 달리 사도행전에서는 착함의 본질을 하나님의 능력 사역과 연관짓고 있다.

만일 병인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얻었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하면(행 4:9)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행 10:38)

착한 것은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것이며, 많은 이적을 행하는 것이며, 마귀에게 눌린 자를 고치는 것이며,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다. 착한 일이란 질병을 고치고 구원의 믿음을 얻게 하는 것이라는 것과 동일한 사상이다.
그래서 사도행전 11장 24절에서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 고 말하고 있듯이, 착한 것은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것이며, 큰 무리를 주께로 더하는 일을 해낸다는 것이 성경, 특히 사도행전의 가르침이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9장 8절에서는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고, 갈라디아서 6장 10절에서는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찌니라” 하였다. 빌립보서 1장 6절에서는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고 함으로 신앙은 하나님이 우리 속에서 착한 일을 시작한 것이며, 그것을 능히 이루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디모데전서 1장 19절에서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고 하였다.



Ⅳ. 부자의 호소와 나사로의 믿음

1. 부자와 무저갱

불신자 중에도 착한 자가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본질적인 이유는 착한 것으로 구원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하려 함이며, 불신자일지라도 조상은 살아 있을 때나 죽어서도 계속해서 후손이 잘되기를 바란다는 것은 귀신을 불신자의 사후로 보지 말라는 것이며, 섬겨야 할 죽은 조상을 귀신이라고 하여 추방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의 근거로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들어, 부자가 귀신이 되었다면 왜 자기 가족들을 해롭게 하지 않고, 걱정했겠느냐고 하는데, 그것은 무저갱에 대한 이해가 없기 때문이다.
부자는 “음부에서 고통 중에” 있었는데 그곳은 앞서 말했듯이 무저갱을 말한다. 그곳은 지옥에 가기 전에 있게 되는 장소다. 그곳은 음부와는 다소 다른 곳으로, 아직 마귀가 없는 장소다. 마귀도 언젠가 이곳에 오면 불신자와 함께 고통을 당할 곳으로, 음부에서 처럼 사람들을 지배하지 못한다. 마귀는 하늘과 세상과 무저갱 이 세 곳을 유전(流轉)하다가 지옥 불못에 던져지는데 현재는 마귀가 무저갱에 들어가 있지 않으며, 심판받은 세상 임금으로서 그곳을 지배하지 못하고 있다. 거기에 있는 불신자는 마귀의 영적 지배가 없는 상태로 고통을 당하게 되기에 그곳에 있는 자는 가장 ‘인간적’일 수 있다. 그의 인격과 영이 마귀의 지배에서 벗어난 상태이기에 가장 ‘본래적인 상태’로 있게 되는 것이다. 무저갱은 음부의 일원(一員)이지만 마귀의 권한이 미치지 않는 곳이다. 그래서 부자가 자기 형제들을 그곳에 오지 않게 해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귀신의 상태로 있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귀신의 시대를 마감하였기에 그런 말을 한 것이다.

2. 나사로와 낙원

나사로가 아브라함의 품에 이르게 된 것은 그의 행위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다. 그는 거지19)로서 남에게 어떤 선행을 베푸는 자가 아니라 오히려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남에게 은혜를 입어야 사는 자였지만, 그는 단지 은혜만 받은 것이 아니라 피해를 입혔다고 할 수 있다.
나사로는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을 하는 부잣집 대문에 누워 있으면서 들어가는 자와 그곳에 사는 자들에게 적지 않은 피해를 주었다. 잔치가 시작되면 잔칫상으로 자리를 옮겨 그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며 살았다. 이런 모습은 잔칫상에 있는 자들에게 매우 실례가 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그는 죽을 때까지 그런 생활을 하였다. 나사로가 혜택을 주었다면 그의 앓고 있는 헌데를 개들이 핥게 한 것뿐이다.
그런 그가 아브라함의 품에 이르게 된 것은 부자에게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가난한 자에 대한 무조건적인 구원이 아니다. 나사로의 구원은 기독교의 기본적인 가르침인 ‘믿음’을 나사로가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사로의 믿음은 첫째는 그의 이름에 나타난다. 나사로라는 이름의 히브리적인 근거는 ‘하나님이 도우신다’는 ‘엘리에셀’이다. 그의 이름을 통해 그는 분명 하나님을 도움으로 삼는 자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20)
둘째는 살았을 때 나사로는 고난(, 카코스)을 받았다는 것이다.21) 나사로가 받은 고난과 부자가 당하는 고난의 의미는 다르다. 부자의 고통은 형벌적인 것이지만, 나사로의 고난은 신앙적인 고난과 관련된 용어이다.
셋째는 부자가 나사로에게 전도자의 일을 해달라고 요청했다는 것이다.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아버지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눅 16:27, 28). 나사로는 증거(, 디아마르투오마이) 곧 전도할 수 있는 자요, 살아나서 부자의 형제에게 가면 회개하게 할 수 있는 자요, 부자의 고통을 말함으로 그 형제들을 권면(, 페이도)할 수 있는 자였다. 모세와 선지자의 역할을 대신하지는 않았지만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자였다는 사실이다.
‘디아마르투오마이’는 신약에 15회 등장하는데 모두가 복음과 관계된 문장에 사용되었다. 누가는 사도행전에서 이 단어를 9회나 사용했다.22) 또한 ‘페이도’는 ‘믿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부자가 나사로를 그의 집에 보내달라고 한 것은 단지 죽었다가 살아남으로 그런 이적을 통해 부자의 형제를 변화시켜 달라는 것이 아니다. 부자가 고통받는 사실을 분명히 고함으로 그곳에 오지 않게 전도를 해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따라서 나사로가 부잣집 대문과 상 밑에 있었던 것은 단지 그의 주린 배를 채우려 하는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전도인의 사명을 감당하려고, 대문이나 상 아래를 마다하지 않았다는 증거다. 세상 연락에 빠져 영적인 것과 신앙적인 것에 관심을 갖지 않는 부자와 그 친구들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나사로는 병든 몸을 이끌고 활동한 것이다.
나사로가 믿음으로 구원 받은 자라는 사실은 그가 낙원에 이르렀다는 것과 그곳에서 받는 위로 등을 통해 확신할 수 있다. 성경에 낙원이라는 말이 세 번 나오는데(눅 23:43, 고후 12:4, 계 2:7), 그곳에 이르는 모든 경우가 믿음을 전제로 한다는 것이다. 십자가에 달린 강도는 옆에 있는 예수에게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라고 부탁하였으며, 예수는 그에게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셨다. 그 강도는 그 말을 하기 전에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며 예수를 조롱하던 다른 강도에게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였다.
고린도후서에서 바울은 자신의 사도권을 변증하면서 셋째 하늘에 올라간 일을 기록하였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사 년 전에 그가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고후 12:3). 셋째 하늘에 올라간 자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 즉, 신자였다. 대화를 하였다는 것으로는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 나오는 것처럼 구원으로 이어지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대화를 나눈 자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라고 함으로 그가 구원 받은 자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다. 요한계시록 2장 7절에서도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함으로 낙원에 이르는 자는 복음을 들을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며, 교회에 속한 자이며, 이기는 자임을 밝히고 있다. 예수의 비유에서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는 말씀에서 들을 수 있는 자는 믿음으로 반응한 자였으며, 교회는 믿는 자로 이루어지며, 이기는 것은 믿음으로 승리를 한다는 것이다.
낙원에서 나사로의 상태는 세 단어로 요약된다. ‘아브라함의 품’으로 나와 있는 그곳은 천국과는 다른 곳이다. 천국과 유사하지만 천국은 아니다. 천국의 전(前) 단계다.23) 그곳에서 나사로는 ‘잔다’, ‘쉰다’, ‘위로 받는다’. 잔다는 것은 쉰다는 개념의 연장이며, 쉰다는 것은 위로받는다는 개념의 연장이다.24) 그러한 것이 이루어지는 곳은 바로 낙원이다.25)
낙원은 무위도식 하듯 잠만 자는 곳이 아니다. 그곳에서는 안식일처럼 하나님 안에서 위로를 받는다. 예수도 안식일에 일하였듯이 진정한 안식은 하나님의 위로가 전제되어야 한다. ‘무노동’의 상태가 낙원은 아니기 때문이다. 신자들이 주일날 예배하고 주의 일을 하며 위로를 받듯이, 낙원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가운데 위로를 받게 된다. 주일날 예배드리고 봉사하는 것은 곧 위로받는 것이다. 따라서 거지 나사로도 낙원에서 위로를 받는다고 한 것이다.
그래서 조병수는 낙원에 대해 이렇게 정리하였다. “먼저 예수와 강도의 대화(눅 23:43)를 살펴볼 때 낙원은 인간의 정신 활동이 가능한 공간으로서 예수의 나라로 이해된다. 낙원은 신자가 사후에 오랜 시간이 지나서 들어가는 곳이 아니라 사후에 즉시(오늘) 입장하는 곳이다. 특히 중요한 것은 낙원에서 예수와 함께 하면서 그의 통치를 받게 되기 때문에 그곳에서는 은혜와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26)


Ⅴ. 요약적 결론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는 귀신의 정체가 불신자의 사후라는 사실을 부인하는 근거가 아니다. 오히려 불신자의 사후 세계에 대한 내용이 나와 있어 귀신이 불신자의 사후라는 베뢰아의 주장이 타당하다고 지지하고 있다. 나사로와 같은, 믿는 자는 죽으면 천사에게 받들려 낙원에 이르지만, 부자와 같은 불신자는 “음부에서 고통 중에” 있어서 지옥의 형벌과 유사한 고통을 당하게 된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부자가 자기 형제를 걱정하는 것은 귀신의 모습과는 다르지만 귀신으로 활동하던 기간이 끝난 후 무저갱에서 고통을 당하였기 때문이다. 이 비유는 공격적인 귀신과는 달리 그 이후의 세계가 매우 처참하다는 것을 제시한다. 살아 있을 때에는 사람들의 판단이 일반적으로 몸을 근거로 하지만 영의 상태로 된 다음에는 그 영의 지배자에 의해 전적으로 다스림을 받게 되기에, 살았을 때 ‘착한’ 사람이라도 귀신이 된 다음에는 악하게 되는 것이다.
불신자가 살아 있을 때에 착하게 행동하는 것은 영적인 상태 때문이 아니라 몸이 중심이 된 것이지만, 몸을 벗은 후에는 영의 상태가 더러우냐, 아니면 거룩하냐에 따라 그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그 후 무저갱에 이르게 되면 마귀의 지배에서 벗은 상태가 되어, 귀신의 때와는 달리 자기 형제를 생각하게 된다. 따라서 이 비유는 불신자가 죽은 후 귀신이 된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이후의 상태를 정확히 말해준다.



주)

1) 귀신이 되는 것이 반드시 고통스러운 것은 아니다. 육체가 죽는다는 것이 곧바로 영의 고통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는 자기 집에 있다가 다른 집으로 옮겨가는 것과 같은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육체를 벗어나므로 불편한 일이 일어나지만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다. 그를 환영해 주는 후손이 있다든가 하면 그 영은 그곳에서 쉬게 된다(마 12:44). 사람이 죽을 때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몸을 중심으로 했던 인격이 끝나니까, 즉 그 인격의 파탄이 오니까 죽기를 무서워하고 고통스러워하는 것이지, 죽는 것 자체가 고통스러운 것은 아니다.
2) “귀신은 본래 장막, 곧 육체를 가졌던 자라 항상 몸으로 들어오려고 한다.” 김기동, 『마귀론』 (서울: 도서출판베뢰아, 1988), p. 186.
3) 마가복음 9장 25절의 “더러운 귀신을 꾸짖어 가라사대 벙어리 되고 귀먹은 귀신아”라는 말씀이 이 문제를 해결해준다. 김기동, 『마귀론』 (서울: 도서출판베뢰아, 1988), p. 233.
4) 김기동, 『마귀론』, pp. 223-226.
5) 무저갱(無底坑)은 한자어로 하면 ‘바닥(底)이 없는 깊은 구렁텅이(坑)’이며, 헬라어로는 (아뷔소스)인데 (‘아니다’는 뜻의 ‘아’)와 (‘깊다’는 뜻의 ‘뷔토스’)가 합쳐져, 문자적으로는 ‘깊지 않은 곳’이나, 그 의미는 ‘깊이를 알 수 없는 곳’이며, 영어로는 abyss(어비스)이다. 히브리어로는 (스올)이며, ‘어두움’, ‘무덤’ 등을 의미한다. 요한계시록 20장 7절에서는 무저갱을 ‘옥’이라고 하였다. 지옥( , 게헨나)과는 비슷한 면을 가지고 있지만, 다소 차이가 있다. 중요한 차이는 무저갱은 임시적인 형벌의 장소이지만 지옥은 영원한 형벌의 장소라는 점이고, 무저갱도 마지막 심판 때에는 지옥 불못에 던져진다는 것이다. 그곳은 지옥과 유사한 고통과 괴로움의 장소이다. 불신자가 가는 곳이고 마귀도 갇히는 곳(계 9:1, 2, 11; 11:7; 17:8; 20:1, 3)이라는 점은 공통적이나, 천년왕국 후에 무저갱은 불못에 던져진다(‘사망과 음부’, 계 20:14).
6) 김기동, 『마귀론』, p. 185.
7) ‘게헨나’는 ‘결코 꺼지지 않고 타는 불의 장소’를 의미한다. ‘게헨나’는 히브리 단어에서 파생되었으며, ‘힌놈 골짜기’를 말한다. 힌놈 골짜기는 예루살렘성의 쓰레기를 버리는 곳이었다. 그 불타는 힌놈 골짜기에는 쓰레기, 죽은 동물들, 범죄자들과 낙오자들의 시체 등이 내버려져 있었다. 그 쓰레기장의 불은 결코 꺼지지 않았다. 구더기들이 쓰레기 더미 위에서 우굴거리는 동안, 불은 끊임없이 매일 매일 세세토록 타올랐다. 힌놈 골짜기는 오랫동안 히브리인들에게 모욕적인 장소로 간주되어 왔다(왕하 23:10, 렘 7:30, 31).
8) 마 5:22, 29, 30; 10:28; 18:9; 23:15, 33, 막 9:43, 45, 47, 눅 12:5, 약 3:6.
9) 계 19:20; 20:10, 14, 15; 21:8.
10) 여기서 몸이라고 함은 육체를 포함하여, 인격과 마음과 뜻 등 영을 제외한 모든 것을 말한다.
11) 절연도체(絶緣導體)는 전기나 전자의 상태를 전혀 전달하지 못하는 반면, 반도체는 절반은 되고 도체는 완전히 통하는 것을 말한다.
12) 꿈에 조상을 본 후에 산삼을 캤다든가 복권이 당첨되었다든가 하는 ‘좋은 일’이 일어날 수 있으나, 그것은 결국 불신앙으로 고착시켜 그의 영혼을 멸망하게 하는 것이다.
13) 귀신 중에도 악한 자가 있다는 근거로는 마 12:45과 눅 11:26의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 행 19:12, 13의 “악귀” 등이다.
14) “주자(朱子)는 ‘신(神)이란 신(伸-펼친다는 뜻: 필자 주)을 말하며 귀(鬼)는 굴(屈)을 말한다. … 그리고 사람에게 있어서는 백(魄)이란 귀가 변한 것을 말하며, 혼(魂)이란 신이 번창한 것을 말하는 것이다. … 귀와 신은 필시 동일한 것으로 다만 음양의 굴신(屈伸)에 의해 이름을 달리했을 뿐’이라고 설명했다.” 村山智順, 『朝鮮의 鬼神』, 노성환 역 (서울: 민음사, 1990), p. 182.
15) 귀신(鬼神)이란 용어는 두 가지 면을 갖고 있다. ‘귀’는 부정적인 측면이고 ‘신’은 긍정적이다. ‘신(神)에 대한 개념은 귀(鬼)와 상반된 성질의 소유자로 본다. 즉 귀(鬼)가 음이므로 음(陰)에 속한 것을 좋아하는 것에 비해 신(神)은 양(陽)이므로 양에 속하는 것을 좋아한다.’ 村山智順, 『朝鮮의 鬼神』, p. 111. 그래서 악귀(惡鬼), 마귀(魔鬼), 사귀(邪鬼), 원귀(寃鬼), 병귀(病鬼) 등 대체로 부정적인 것에는 ‘귀’가 사용되었으나, ‘신’은 지신(地神), 천신(天神), 제신(祭神), 신학(神學), 성신(聖神), 천지신명(天地神明) 등 섬김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과 관련된 긍정적인 것에 사용되었다. 구약에 사울에게 임한 것을 “하나님의 부리신 악신”(삼상 16:16, 22)이라고 한 것은 첫째로 그 존재는 귀신이 아니었기 때문이며, 둘째로는 ‘하나님이 부리시는’ 자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귀신이라는 용어가 두 가지 측면을 갖고 있기에 베뢰아에 대한 반응도 긍정과 부정이라는 두 가지 극단이 나타나는 것이다. 귀신의 정체와 질병 유발설에 대해 찬반의견이 분명한 것은 귀신이라는 용어가 두 가지 면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귀신에 대한 두 견해가 있는 것은 헬라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TDNT) . 성경이 말하는 귀신과 일반 세계에서 말하는 귀신론의 차이점은 귀신을 온전히 부정적으로 보느냐, 아니면 긍정과 부정의 양면으로 보느냐 하는 점이다.
16) 村山智順, 『朝鮮의 鬼神』, p. 182.
17) 사도행전 19장 11∼20절에는 세 가지 축사 유형-바울의 축사, 유대인 마술사의 축사, 스게와의 일곱 아들의 축사-등이 제시되고 있다. 셋 모두 예수의 이름을 사용했으나 각자의 영적인 상태는 달랐기에 반응도 달랐다. 첫째는 바울의 신앙적인 축사다. 이것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고 그 힘을 의지하는 것이기에 ‘희한한 능(能)’이 나타났다.
이에 반해 유대인 마술사의 축사는 무당과 박수 등의 축사와 같은 것으로, 그들에게 역사하는 영들의 힘이 ‘악귀들린 자들’에게 역사하는 영보다 힘이 더 크기에 임시적으로 제어한 경우이다. 귀신을 추방한 것이 아니라 달래거나 잠잠케 한 것이다. 그러기에 그들은 그 후에 스게와의 아들에게 일어난 일로 인해 마술하는 책을 불사르며 더 이상 그런 일을 하지 않게 되었다. 스게와의 아들의 경우는 유대인 마술사와 같이 본래적인 불신자가 예수의 이름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마술사에게서 보여지는 ‘어떤 현상’에 주목하여 예수의 이름을 사용한 것이다. 유대인 마술사는 본래부터 마귀에게 사용되는 자이었으나, 스게와의 아들들은 에베소라는 이방세계에서 제사장의 아들이라는 신분을 망각하고 세상적으로 타락한 예이다.
18) 이에 대하여는 김기동, 『영혼과 육체』 (서울: 도서출판베뢰아, 1992)를 보라. 거기에서는 ‘죄는 육체가 지어도 죄값은 영혼이 진다’, ‘육체에 속한 세상 영광과 영혼에 속한 하늘 영광’, ‘육체가 순종하면 영혼이 보상받는다’등의 제목으로 논증하고 있다.
19) 한글 개역성경에서 ‘거지’로 번역된 자는 (프토코스)로, ‘가난한 자’라는 의미가 더 타당하다. 이 단어는 동사와 명사를 포함하여 10회 등장하는데 모두가 복음에 긍정적인 대상과 입장에서 사용되었다. 예컨대,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눅 4:18) “…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눅 6:20) “…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고 하라”(눅 7:22) ‘잔치를 배설하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저는 자들과 소경들을 청하라”(눅 14:13)
20) 요한복음 11장의 나사로를 “사랑하시는 자”라고 한 것을 근거로, 누가복음의 나사로와 요한복음의 나사로를 동일한 사람으로 볼 때 그는 믿음 있는 자이다. 필자는 동일인이라고 생각된다.
21) ‘카코스’는 일반적으로 ‘악하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부자의 좋은 것( , 아가도스)에 대비되는 것이어서 나사로가 악행을 저질렀다는 의미는 아니다. 부자가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한’과 대조되는 삶으로, 나사로는 그런 삶을 당해야만 했다(, 아포람바노). 이 단어에서 유래된 (카코-스)는 질병과 관련이 있다.
22) 행 2:40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가로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20:21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게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한 것이라”, 23:11 “그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과 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
이외에도 8:25, 18:5, 20:24, 28:23 등이 있으며, 기타 성경에는 살전 4:6, 딤전 5:21, 딤후 2:14, 4:1, 히 2:6 등이 있다.
23) Vgl. Jeremias, 파라데이소스(), 768: “Sas Pasadies ist hier die St tte, die selen der verstorbenen Gerechten nach dem Tode aufnimmt” 또한 홍창표, 『요한계시록 해설』 1, p. 426: ‘지금 감추어진 파라다이스는, 중간상태(the intermediate state)에 해당되는 표현으로, 파라다이스가 죽음과 부활 사이에 놓인 중간상태의 기간 중 구원 받은 자의 영혼이 거하는 곳을 의미한다.’ 조병수, “향연의 낙원”, 『신약신학저널』 제6호(2001년. 제3호), p. 330에서 재인용.
24) 무저갱에서는 낙원과 반대되는 일이 벌어진다. 위로가 아닌, 고통이 주어진다. 귀신은 이곳에서 쉬기를 구하려 한다.
즉 위로받으려고 한다. 귀신이 얻어먹었다는 것은 위로받았다는 것이다. 제사를 해준다 하는 것은 귀신에게 쉬는 시간이요, 푸닥거리하는 것은 귀신에게 위로의 시간이다. 성경에 ‘귀신이 쉬기를 구하되’라고 하며 찾은 곳은 사람 몸 안이다. 몸 안에서는 쉴 수 있으나, 무저갱에 있으면 고통을 당한다. 따라서 몸 속에 들어오려는 것은 귀신이 쉬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25) ‘쉼’을 뜻하는 (아나파우시스)는 계시록에서 낙원에서의 모습을 묘사하는 데에 사용되기도 하였다. “각각 저희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쉬되 저희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받아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계 6:11),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기록하라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계 14:13)
26) 조병수, “향연의 낙원”, p. 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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