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 분별/성령과 악령

예수, 귀신들과 죽은 자

은바리라이프 2008. 5. 24. 15:18
예수, 귀신들과 죽은 자  

예수, 귀신들과 죽은 자  

 피터 G. 볼트 (Peter G. Bolt)




번역 : 김윤아, 김은혜(베뢰아센터 객원연구원)


Ⅰ. 도 입

비록 오늘날은 예수가 쫓아낸 귀신들과 아직 살아 있는 자에게 영향을 끼치는 죽은 인간의 영들을 동일하게 보는 사람이 드물지만, 복음서의 많은 옛 독자들은 귀신과 죽은 자의 영혼을 동일시 하는 것에 대해 당연하게 생각해 왔다. 본 논문의 제Ⅱ부는 헬라-로마 세계의 많은 사람이 죽은 자의 영들과 귀신들(daimons) 사이의 관련성을 쉽게 유추했음을 말해준다. 제Ⅲ부는 귀신이 죽은 자의 사후의 영임을 잘 보여주는 마가복음의 축사 장면을 다룰 것이다.


Ⅱ. 헬라-로마 세계에서 귀신들과 죽은 자

1. 헬라-로마에서의 자료들

귀신들(daimons)이 죽은 자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증명하기 위해 본 단락은 다이몬()과 다이모니온() 어군의 어휘 연구로 구성된다. 이러한 접근이 약간의 결점이 있을지라도 결론에 도달하는 데는 어느 것보다도 충분할 것이다. 용어의 의미를 용례의 토론에서 제외시키기 위해서, 훨씬 더 형이상학적으로 치우친 ‘디몬스’(demons) 보다는 음역한 ‘다이몬스’(daimons)를 사용한 어군을 간략하게 언급할 것이다. 다이몬스(daimons)와 죽은 자 사이의 연관성은 문학적인 자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특징이다.

1) 문학

다이모닉(daimonic)을 둘러싸고 있는 형이상학적인 혼동은 오늘날의 세계뿐만이 아니라 고대 세계의 문학에서도 또한 존재해 왔다.

‘다이몬’이라는 단어는 점점 작은 영들과 사람과 신들 사이를 중재하는 영을 의미해 왔다. 그러나 그들이 단지 죽은 자의 영인지 혹은 사람이 육체를 가지려고 하는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따라서 귀신들(daimons)의 존재, 기능, 기원과 마찬가지로 엄청난 혼란이 일어났다

물론, 이하에서 논하는 것과 같이 중간 상태의 영들이 죽은 사람으로부터 기인될 수 있기 때문에 반드시 엄격히 양자택일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여기서 발견되는 ‘혼동’의 일부는 죽은 자들의 영혼과 관련되어 있는 ‘귀신’ 때문이다.
호머(주전 700년 이전)에게 있어서는 이런 연관성에 대한 암시가 없다. 그러나 그는 귀신이 교육받지 못한 하류 계층에 속하는 것에 관련되었다는 믿음과 교육받은 상류 계층은 의인화된 신들을 더 선호한다는 믿음에 대하여 제안하면서 귀신을 드물게 사용한다.
헤시오드(주전 700년 이전)는 황금시대의 사람이 죽었을 때는 ‘지구 위에 사는 순결한 다이몬()’이라고 불리는, 인간들의 감시자로 변한다고 주장하였다. 귀신들은 ‘지구 위의 어느 곳이든지 배회하며 안개로 옷을 걸치고 심판을 계속 지켜보며 거친 행동을 하며 부(富)를 주는 자’다. 헤시오드의 이런 글은 논쟁의 출발점이 되었다. 귀신을 ‘육체를 떠난 황금시대의 영혼’으로 볼 수 있기도 하지만 귀신이 분명히 죽은 자의 영인 중간 상태의 영이라는 것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마찬가지로 ‘귀신’이라는 용어의 등장은 다양한 신들의 이름에 적용되며 티케(tyche, 운명, 행운)와 관련되어 생각되었다. 그리고 알라스토레스(alastores) 또는 복수의 영과 같은 다이모네스(daimones)의 사상을 출현시켰으며 주전 5세기초의 헬라의 비극은 그들을 죽은 자의 영들로서 몇 차례 언급한다.
신 희극(New Comedy, 4세기 후반의 「빌레몬의 죽음을 위하여」라는 희극)에서 메난더(Menander)는 각 사람이 선하든지 악하든지 귀신에 의해 이끌린다는 개념을 갖고 있다. 그렇다면 이 개념은 논리적으로 죽은 자의 영으로서 귀신이라는 것에 선행하여 인식되어져야 한다. 예를 들면, 영웅-숭배의 필요 전제 조건인 귀신은 전에 죽어서 사람들에게 붙어서 여전히 활동하고 있는 자들이다.
플라톤(주전 429∼347)은 확실하게 신성과 운명의 귀신을 사용하였고 귀신을 중간 상태의 존재로 간주했다. 그는 특히 각 사람의 운명을 주관하는 개인적인 귀신의 개념을 진전시켰다. 중간 상태의 존재로서의 귀신에 대한 플라톤의 예리한 견해는 비록 초기의 힌트에 기초할지라도 여전히 타당하다. 인간의 사후 영과 그들의 개인적인 귀신 사이의 구분 이후로 그의 저작에서 많은 중요한 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전술한 두 용어는 플라톤에게 있어서 항상 동일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두 가지 관점은 결코 서로 상반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 개념은 논리적으로 죽은 자의 영으로서 귀신이 선행한다. 플라톤은 더욱 정교해진 그의 귀신론 편에서 헤시오드의 결론을 인용한 소크라테스의 견해를 받아들인다.

많은 시인들이 말했던 것처럼 선한 사람이 죽었을 때 그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중요한 기업과 영예를 차지하고 귀신이 된다. … 그리고 모든 선한 사람은 살든지 죽든지 간에 다이모닉()이고 당연히 귀신으로 불린다는 것을 확신한다

여기에서 개인적인 귀신은 죽은 영웅들의 영혼인 귀신에 대한 더 오래된 이해로부터 기인하는 것처럼 보인다.
중간 상태의 존재로서의 귀신의 개념이 계속 이어지는 반면에, 제노크라테스(Xenocrates, 주전 339∼314 아카데미의 수장)와 큰 영향력이 있는 포시도니우스(주전 135∼51/50)는 죽은 자의 영을 다이모네스(), 즉 귀신이라고 불렀다.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귀신 사이에도 뛰어난 정도가 다르다. 열정과 관련해서도 소심하고 축 쳐져있는 귀신이 있는가 하면, 너무 과도하여 열정을 누그러뜨리기조차 어려운 귀신도 있다

일반적으로 스토아 학파에서는 ‘다임’(-)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지만 포시도니우스는 분명히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영혼이 영원하다면 소멸되지 않고 영원히 존재한다면 그 영혼이 귀신이 된다

게다가 스토아 학파이며 헤시오드에게 확실히 신뢰를 받은 디오게네스 레티우스(Diogenes Laertius)에 의하면

인간에 대하여 긍휼히 여기며 인간의 일들을 주시하는 귀신이 있다는 것에 주목하라. 그들은 더욱이 영웅을, 곧 그들의 몸을 가지고 존재해 온 의인의 영혼이라고 생각하였다

플루타아크(A. D. 50-120)의 이러한 주장은 신약시대를 거쳐 지금에 이르도록 철학적인 범주 안에서 지속되고 있음을 지적한다. 『잘못된 신탁으로부터』(De defectu oraculorum)에서 귀신론적인 관점의 확장된 논의가 이루어지는 동안 동일한 관계가 여전히 알려지고 논쟁이 되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헤시오드와 암모니우스는 적어도 귀신의 몇은 죽은 자의 영혼들이라고 확실히 믿었다. 람프리아스(Lamprias)는 사람이 죽어서 알아보지 못하게 되고 훨씬 더 능력이 감소되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죽기 전에 소유했던 것을 죽은 후에도 그 영혼이 소유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그후 클레옴브로터스(Cleombrotus)는 처음으로 ‘귀신들 계층은 신들과 인간 사이에 있는 자들’이라고 언급하였다. 이것은 아마도 조로아스터교인들이나 쓰라시언(Thracian트라키아인/ http://100.naver.com/100.nhn?docid=156335) 또는 이집트인이나 피리지언(Phrygian프리지아인 http://100.naver.com/100.nhn?docid=183741)들이 이 개념의 기원에 대한 다양한 가능성을 제시하기 이전인 것으로 보인다. 분명한 것은 귀신이 어떤 면에서는 ‘죽고 애도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는데 이는 죽은 자가 귀신이 된다는 확실한 증거다.
『잘못된 신탁으로부터』에서 그의 견해를 브렌크(Brenk)는 이렇게 요약한다.

플루타아크의 대변인들은 귀신이 실제로 죽은 자의 영혼이라고 주장한다. 이로 보건대 독립적인 영들로서의 귀신과 죽은 자의 영혼으로서의 귀신 이 두 가지 사실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와 같이 ‘다이모네스’(귀신)의 경우에서도 확실한 것은 죽음과 불멸 사이에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죽은 자의 영혼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플루타아크의 다른 저작 ― 비록 더 세밀한 플라톤의 귀신론에 비해 다소 주변적이긴 하지만 ― 에서도 이런 관계를 예증해 준다. 그는 원래 귀신으로서 지하의 영(chthonic spirit)이면서 집의 수호자였던 아가토스 귀신(Agathos Daimon)에 대한 희생 제사 관습에 대해 언급한다. 이외에도 그는 유티노위스(Euthynous)가 죽은 자들을 마법으로 불러내는 장소를 방문했다고 보고했는데, 거기서 ‘나는 당신 아들의 귀신이다’고 말한 청년이 나타났다고 했다.
영혼들과 귀신 사이의 상호작용은 상당히 세부적인 귀신론(daimonology)을 포함하고 있는 논문에서도 나타난다.
브루터스(Brutus)와 디온(Dion)은 공통적으로 귀신에 관련된 환상을 보았다고 한다. 브루터스에게 나타난 귀신이라고도 불리는 ‘파스마’라는 유령은 사람이 죽으면 귀신이 된다는 징표였다. 그것은 소음에 의해 예고되었다. 그리고 브루터스(Brutus)가 램프쪽을 향해 보았을 때 램프가 꺼졌는데, ‘그는 괴이한 크기에 거친 외모를 지닌 사람에 대한 두려운 환상을 보았다. 그 유령은 브루터스에게 자신을 그의 ‘악한 귀신’이라고 말했다.
나는 알지 못하지만 우리는 가장 오래된 시대의 가장 뛰어난 이론들을 수용해야만 한다. 선한 사람을 시기하며 그들의 행위에 적대적인 악한 귀신은 그들을 혼동하게 하고 두려워하게 하며, 그들의 선행을 흔들리게 하고 방해하는 일을 한다

귀신이 죽을 사람들과 유사하고 또 죽을 사람들이 귀신과 같이 될 것이라는 가정 하에서, 플루타아크는 귀신이 죽은 자의 영이며 죽은 자의 영이 귀신이라는 것을 확실하고 분명하게 암시한다. 죽은 자의 영혼들은 살아 있는 사람들의 선행을 타락하게 하여 이들이 죽은 후의 운명이 지금 자신들의 영들의 운명보다 더 나빠지도록 한다.
플루타아크(Plutarch)의 귀신의 정체에 대한 견해는 고대 귀신론적인 관점에 대한 근거로 상당히 중요하게 취급되고 있다. 오늘날의 연구가 그의 견해를 넘어서서 진행되지 않고 있을 정도로 귀신론 연구에서 그의 견해는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그러므로 중간상태 존재로서 귀신의 현존과 함께 또한 그의 저작들은 귀신과 죽은 자 사이의 관계를 예증해 주는 데 중요하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요약하자면, 철학적 문학에 있어 죽은 자와 귀신 사이의 관계는 계속 논쟁이 되어 왔다. 귀신이 죽은 자와 연관성이 있다는 대중적인 견해들은 불변했고 강했다. 특히 이 견해는 주술 행위에서 분명한데, 지옥의 귀신의 도움을 얻기 위해 행하는 주술 행위는 분명히 죽은 자의 힘을 이용하기 위한 시도다.

2) 마술(魔術)

모튼 스미스(Morton Smith)는 이상한 상상을 통해서 다음과 같은 것을 지적해 냈다.

지식인들, 문학과 과학 서적의 저자와 독자들, 즉 소그룹의 상류층들은 연기로 채워진 비눗방울의 얇고 빛나는 막과 같다. 이러한 비눗방울의 표면은 로마제국의 집정관, 군대들, 속국의 왕들, 도시들, 신전들과 극장들의 찬란한 장면들을 반영해 준다. 이러한 반영들을 통해 우리는 그것들 뒤에 감추어진 어두운 부분들을 어렴풋이 짐작해 낼 수 있다

그가 언급하고 있는 어두운 부분은 신비한 세계에 관한 것이다. 비록 그 신비세계가 널리 퍼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대학이나 지성적인 모임들에서는 별로 인기가 없다. 이 영역에서는 두 가지 형태, 즉 영적인 마술과 자연적인 마술로 구분할 수 있다.

‘자연적인 마술’은 영혼, 유령, 악귀, 귀신과의 어떤 명확한 관계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영적인 마술’의 경우에는 죽은 자의 영혼이 신의 계시를 주거나 감춰진 보물을 발견하기 위해서 무당들에 의해 불러 올리워졌다. 그것들은 사람의 육체 속에 들어가기 위해 파송을 받고, 질병으로 육체를 괴롭히거나 그들을 치료하기도 한다. 또 그것들은 많은 다른 방법에서 마술사의 의지에 의해 역사한다. 마술사의 주문과 주술은 그러한 영들의 의지를 조절하기에 충분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공식적인 수준에서는 의심스럽게 여겨졌지만 그러한 마술은 고대 세계에서는 대다수의 개인들이나 또는 사회의 밑바탕에 널리 퍼져 있었다.

① 마술의 근거
마술의 근거는 심령술적인 마술 중에 찾아 볼 수 있다. 마술에 관한 문서들은 주로 신약시대보다 후에 등장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목적들을 위해 사용되었다. 저주의 서판은 마술 문서 안에 있는 몇몇의 행위들이 그 문서 자체보다 더 오래 전부터 있었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다. 나는 연대의 문제는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문서와 저주의 서판들의 증거는 귀신과 죽은 자와의 관련성이 신약시대의 다른 일면에서 수세기를 가로질러 형성된 것을 공통적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죽은 자와의 관련성은 흔히 관습의 정황에 의해서 보충 설명된다. 수많은 사본의 주문(呪文)들은 무덤과 시체와 연관되어 사용되기도 하고 몇몇은 무덤 안에서 발견되기도 한다. 심지어는 미이라의 입 속에서도 출토되었다. 대부분의 저주 서판들도 무덤에서 출토되었는데, 어떤 것은 지하신전과 우물, 샘물과 같은 지하세계의 다른 장소에서도 나왔다. 이것은 그리 쉬운 것은 아닌데 이는 그러한 장소가 지하세계의 신들에게는 편리하게 ‘개방’되었기 때문이다. 시체는 원통형의 상자같은 것에 두었으나 이런 주문(呪文)들이 ‘문자’인 것으로 인해 많은 것들이 시체에 매겨졌다. 또한 이것은 지하 신들의 능력을 얻으려는 시도였고, 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나의 견해로는 귀신에게 도움을 얻기 위해 구하는 시도였다.

② 고대 주문서
고대 주문서에 나온 많은 주문들은 마술사에 의해 조종되는 귀신들은 죽은 자들의 영혼과 관련이 있음을 우리에게 분명히 보여준다.
어둠 속에서, 또는 땅 밑에 있는 귀신을 불러내는 주문은 빛으로부터 떠난 죽은 자들이라는 개념과 비교될 수 있다. 이와 같은 ‘한 번 빛을 보았던 인간들의 귀신’은 ‘시체들의 영역 속에 거처하는 자들’이다.
주문들은 바로 이 영역으로부터 행위자(참석자) 혹은 조수를 편입시키려고 애쓰는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위한 검증된 주문’(a tasted spell for invisibility)이란 자료에 따르면 ‘원숭이 또는 변사체의 눈알을 꺼낸 후’ 그 행위자는 ‘일어나라, 악독한 귀신 … ’이라고 말해야 한다고 한다. 잔혹하게 살해 당한 자의 시체를 사용하는 것은 마술사가 이 죽은 사람의 혼, 즉 땅 밑의 귀신에게 마술을 부리고 있음을 확증한다.
시체의 혼을 청원하는 것은 주술의 절차에서 표준화된 모습이며 이 관습은 적절한 때에 특별한 어휘를 발생시켰다. 최근의 많은 주문들은 ‘네쿠귀신’의 청원을 받는다. 이와 같은 주문에서 독특한 점은 다른 주문의 상습적인 것은 밑줄을 긋는다는 것이다. 주술 본문은 죽은 자의 영혼을 청원하고 있다.
이와 같이 저주 서판은 B. C. 4세기 이래로 죽은 자의 영혼을 세력으로 불러 올리며, 그때 그들은 역시 귀신으로 부른다는 증거를 제공한다. 저주 서판과 고문서(파피리)는 죽은 자로서의 귀신이라는 신념이 결국 ‘네쿠귀신’이란 용어로 마법의 어휘 속에 남겨지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복음서 기자는 귀신들을 내쫓는 예수에 대해 언급했는데 이는 본글 가운데 나오며, 이는 앞서의 동일한 신념을 강화시킨다.
그러나 복음서 문서로 가기 전, 그들과 문화적으로 유사한 문서들에서 발견되는 동일한 관련성을 우선 고찰해 보는 것은 가치있는 일이다.

2. 헬레니즘 유대문서에 나오는 귀신과 죽은 자

귀신과 죽은 자 사이의 관련은 주술적 관습에 있어서 개척된 것과 마찬가지로 70인경, 필로(Philo)와 요세푸스(Josephus)에서도 뚜렷이 인식될 수 있다.

1) 70인경

70인경에서 ‘다임-’어군은 우상숭배를 귀신에 대한 경배와 결부시키고 있다. 이는 죽은 자와 주술이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산 자를 돕기 위해 죽은 자를 불러내는 것을 마술적인 관습으로 간주해 볼 때, 이사야 65장은 한 단락 안에 세 가지 존재를 모두 반영하고 있다.

2) 필로

필로는 헬라의 청중들을 고려하여 유대문학에 나타나는 천사같은 존재와 그리스 문학에 등장하는 중간 상태로서의 귀신을 동일시 했다. 그러나 귀신이 영혼의 연속선상에 놓여 있다는 사실은 그들을 명확히 동일시 할 수는 없다고 할지라도 그들이 서로 연관되어 있음을 가리킨다.
귀신과 죽은 자의 관련은 가이우스가 죽은 아내의 귀신에 대한 모든 생각을 잊은 후 그의 장인을 살해한 사실을 보고했을 때 매우 명백하게 판명된다. 이같은 부수적인 참고자료는 귀신과 죽은 자의 관련성이 A.D. 39∼40년 경 로마에서도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3) 요세푸스

요세푸스의 저작 가운데 귀신들과 죽은 자의 관련성을 유추할 수 있는 곳이 있다. 여기서 귀신은 인간을 파멸시키려고 결심한 사악한 자의 영혼이란 용어로 정의된다.
정리하자면 어느 곳에서든 모든 사람들이 자동적으로 귀신을 죽은 자와 관련시킨다고 주장하기에는 약간 무리가 있을 수 있다. 철학적 범주 안에서 더 정교한 귀신론이 등장했는데, 여기서 귀신의 영들은 중간 상태로서 나타난다. 그러나 보다 대중적 수준에서는 주술세계에서 표현하듯이 귀신은 끊임없이 영혼과 동일시되었고, 이러한 현상들은 그리스-로마시대와 그리스 유대주의 문학 자료에서도 공통적으로 드러난다. Ⅲ 단원에서는 귀신과 죽은 자를 동일시 하는 것이 마가복음의 4가지 축사에 대하여 들을 때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하여 묻고 있다.



Ⅲ. 귀신과 죽은 자를 동일시하는 관점에서 본 예수의 축사 사건

축사에 영혼이 관련되어 있다는 것은 고대 이집트, 고대 바빌론, 앗수르 그리고 2세기 희랍의 작가인 루시안(Lucian)과 필로트라투스(Philostratus)에 의해 입증된다. 후대의 독자들은 교부들의 이견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관점에서 분명히 복음서의 축사 사건을 읽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마가의 초기 독자들 대부분도 그것을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1. 가버나움(막 1:21~28)

만일 우리가 가버나움 회당에서 사람을 조종하는 그 존재의 본성에 대하여 조사한다면 그 이야기 속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다. 그들이 예수에게 자신들을 멸하러 왔는지를 물은 것으로 볼 때 (24절), 그들은 분명히 예수와의 싸움을 깨달았음에 틀림없다. 비록 그 기사 자체로는 ‘더러운 영’이 귀신(ghosts)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 명확하지는 않다. 그러나 이름을 부르는 것, 속박하는 것, 폭력성과 나갈 때의 소란 등 주술세계와 관련된 몇 가지가 있다 (24, 25절). 이 관련성을 가정해 볼 때, 주술에 익숙한 독자들은 예수가 주술적 충돌의 방식을 취한 후에 죽은 자의 영과 교전하고 있음을 인지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귀신에 대한 예수의 권세를 확고하게 세움으로써 끝을 맺는다 (27절).
이 이야기의 청취자가 무의식적으로 그 관련성을 만들었다면 어떤 차이가 있을까? 마가복음 이야기의 중요성은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하고 묻는 그 영적 존재들의 질문에 있다(24절). 만일 예수가 귀신들을 멸하신다면 어떤 결과가 생길까? 귀신들이 어떤 마술사(혹은 의뢰인)에 의한 희생물로 상정되든 상정되지 않든 간에, 인간에 대한 귀신들의 적개심은 일상생활에 다양한 불쾌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귀신들의 질문은 예수가 이러한 존재들을 멸하러 오셨다는 가능성을 제기시킨다. 만일 그렇다면 그는 마술사에 의한 그들의 조작과 초래된 악영향들을 종식시킬 것이다. 그래서 대중의 큰 부분을 붙잡고 있던 그와 같은 영향과 결과에 대한 두려움을 깨뜨려 종식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 질문은 예수는 산 사람들에 대한 죽은 자들의 억압을 풀어주려고 했다는 흥미로운 가능성을 불러일으킨다.

2. 거라사(막 5:1∼20)

거라사의 귀신은 마가복음에 있는 모든 축사의 축사 행위를 구성하고 있다. 여기서 이 사람에게 있는 귀신들과 죽은 자 사이에는 구체적인 관련이 있다.
이 사람은 귀신들이 출몰하는 장소로 널리 알려진 무덤 사이에 거했는데, 이것은 그리 놀랄 만한 논란거리가 되지 않는다. 죽은 자와의 관련성은 이사야서 65장과의 연관으로 강화된다. 여기에는 마술적인 목적과 사람의 대단한 힘에 의해 무덤 사이에 앉아 있는 사람이 등장한다. 어떤 주석가가 거라사의 그 사람을 붙들고 있는 귀신들이 죽은 자의 영이라는 것을 인정했다는 사실로 인해 나는 위로를 얻는다.
왜 귀신들은 예수께 자기들을 ‘이 지방에서 내어 보내지 말라’고 요청했을까? 그들이 단순히 거라사 지역 또는 더 나아가 무덤지역 밖으로 쫓겨나는 것을 두려워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그들은 지하세계로 쫓아내지 말라고 요청했던 것이다. 귀신들과 죽은 자의 영혼을 연관시키는 독자들에게 있어서 무덤가에 있는 이 사람은 죽은 군대 귀신으로 가득 차 있다. 예수와 귀신들의 충돌은 예수가 집단으로 거주하는 군대 귀신들을 제어할 뿐만 아니라 그들을 쫓아내셨고, 심지어 그들이 영향력을 발휘하는 지상의 지역에서 추방하였음을 보여준다. 이 군대 귀신들은 멸망 당했다. 군대 귀신들보다 더 우월하신 예수는 그들을 그들의 적절한 거주지로 돌려보냈고 또한 그들을 멸망시키셨다.
마가가 이에 앞서 서술한 작은 사건에서 몇몇의 질문이 제기되었으나 답이 나오지 않았는데 이는 뒤이어 계속되는 내용의 안내 역할을 한다. 제자들은 “우리가 죽게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막 4:38) “저가 뉘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는고?”(막 4:41)라고 물었다. 이 질문의 해답은 거라사에서 그 해답을 찾기 시작하며, 예수는 그가 악한 자와 죽은 자들의 파괴적인 영향 아래서 고통받고 있는 인간들을 죽은 자들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는 분이심을 증명하였다. 이 이야기는 예수와 사망권세의 충돌을 보여준다. 그 사람은 무덤을 떠났고 다시 일상 생활로 돌아갔다. 죽음이 생명으로 다시 변하게 된 것이다.

3.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 축사 사건(막 7:24∼30)

예수가 행한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에 대한 축사 사역은 귀신이 형이상학적 존재가 아닌 실존임을 보여준다. 이 이야기는 예수가 그와 같은 귀신들을 다룰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해 준다. 여기서의 조묵할 만한 것은 예수가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인 그리스인에게도 축사를 한다는 것이다.

4. 산 밑에 귀신들린 아이(막 9:14∼20)

많은 소년들은 죽은 자의 영들과 접촉하기 위하여 주술적 점을 치는데 이용 당했다. 만약 그 귀신이 복수의 영이라면 괴롭히는 영이 파괴적인 본성을 지녔다는 것은 분명하다(22절). 예수는 그런 영들을 다루는 그의 능력에 대해서 확신했기 때문에 괴롭히는 영을 향하여 ‘나오라 그리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25절)고 명령했다.
예수의 축사는 매우 강력하여 그가 소년을 죽인 것처럼 보였다(26절). 대중은 예수가 귀신들을 파괴하기 위해서 왔다고 생각했는데 그의 사역 가운데 귀신에 의해 피해를 본 희생자까지도 죽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오해된 충격은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소년을 살리심으로 최상의 교훈을 강화시킨다. 왜냐하면 예수가 마치 소년을 죽음에서 일으키듯 그를 일으킬 때, 귀신을 죽은 자의 영으로 간주했던 사람들은 희생자를 소생시키는 것을 봄으로써 예수가 죽은 자들의 권세를 능히 제어할 수 있는 분임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Ⅳ. 함축적 결론

귀신들(dimons)을 죽은 자의 혼으로 보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예수의 축사 행위는 죽은 자들의 세계를 심지어는 죽음 그 자체를 습격하는 것으로 보여질 것이다.
후대의 자료들은 예수가 죽은 자들의 영혼을 조종하는 사람들과 같이 마술사(magician)로 오인된 것이 나타나 있다. 이것은 아마 예수가 살던 당대에 시작되었을 것이다. 고대 주문서(Magical Papyri)에 나온 일부 술사들이 한 것처럼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어떤 축사자는 예수의 이름을 사용했다(막 9:38).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향하여 귀신들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비난했다. 이것은 헤롯이 예수의 활동을 설명할 때, 예수가 죽은 요한의 영을 사용하여 이적을 행하셨다고 생각했던 것과 아주 흡사하다. 목 베인 사람이며 또한 잔혹하게 살해된 자인 요한은 매우 강력한 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마술사들과 달랐다. 마가복음의 이야기에서 다른 어떤 것들보다도 그는 우월한 영으로서 등장하며(막 5:1∼20), 죽은 자의 영을 다스리는 자로 소문났다(막 6:14).
귀신들은 예수가 그들을 멸망시키려고 온 것에 대해 겁을 먹었다. 그가 최후의 길을 가는 중 산 아래에서 어린 그리스 소녀와 소년을 해방시킨 것과 마찬가지로 거라사 지역의 군대 귀신을 멸망시킬 수 있었다. 이 모든 것들은 우리 독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의문을 갖게 한다.
예수는 다른 마술사들과 같이 단순히 죽은 자들의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것인가? 아니면 죽은 자들이 현존하는 사람들을 붙들고 있는 그 억압을 깨뜨리기 위하여 죽은 자들을 공격하기 시작한 것인가?
이야기의 끝에서 마가복음의 독자는 십자가에 달리신 한 사람의 빈 무덤을 응시하게 하고 그가 살아나셨다는 선포를 듣게 한다. 확실하게 외관상으로는 죽은 자들에 대한 예수의 공격은 완성되었으며 죽은 자들은 더 이상 생명을 지배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더 강한 영이 지금 그들의 세계에서 살아 계시기 때문이다. 마가의 이야기는 독자들이 새로운 눈으로 그들의 세계를 보고 두려움 없이 그것에 대처할 수 있도록 약속을 의지하게 한다. 왜냐하면 십자가에 달리신 분,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