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세상으로 내려간 사람들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2003-01-13 |
도시로 내려가 점성술을 배워 하나님께 죄를 범한 가이난의 이름은 마침내 창세기와 역대기에서 삭제되었다. 가이난을 축출한 아르박삿 문중은 그의 이름을 영원히 하나님의 책에서 삭제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가이난의 범죄는 곧 여자들의 주장에 이끌려 도시로 내려가 아우들의땅을 빼앗았던 셈 집안의 실패를 대표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또 홍수의 무서운 심판을 당하기 이전 '셋'의 후손들이 가인 족속의 미혹을 받아 탐욕과 타락에 빠져서 마침내 세상 신을 섬기고 점성술을 믿었던 것과 맥락을 같이 하는 것이었고, 더 거슬러 올라가면 뱀의 유혹에 넘어다 금단의 열매를 먹었던 하와의 권고를 따라 그것을 함께 먹었던 아담의 반역으로까지 연결되는 것이었다. 아르박삿 가문의 후예인 히브리 백성들은 그들의 기록에 어떤 악인의 이름도 결코 삭제하지 않고 남겨 놓았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지구상에 남아 있는 유일한 '진실의 기록'으로서 살아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아르박삿의 후예들도 가이난의 이름만은 도저히 그들 가문의 족보에 남겨둘 수가 없었다. 결국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가이난을 파문한 것이었다. 이 끔찍한 파문의 사건은 비록 하나님의 책에서 그의 이름이 삭제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문중의 후예들을 경고하는 강력한 전승으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가이난이 빠졌던 그 점성술에서 비롯된 것이 헬라문화였다. 그러므로 그 헬라문화에 공포감을 느끼고있던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들에게는 가이난의 파문사건이 더욱 의미심장한 것으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히브리어가 하나의 고어(古語)로 전락하여 가고 있는 시대에 신앙적 위기를 느끼고 있던 알렉산드리아 사람들 사이에서는 마침내 가이난의 무서운 실패를 그들의 후손들이 잊지 않고 기억하도록 하기 위하여 그의 이름을 다시 창세기에 넣어두어야 한다는 논의가 일어나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드디어 LXX에는 가이난의 이름이 삽입되었고, 누군가가 다시 가이난의 이름이 삽입된 경위를 설명하기 위하여 요벨서를 기록하였다. 그리고 그 요벨서는 참회와 경건의 생활을 추구하던 엣세네파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을 것이다. 어쨌든 우리는 이제 가이난의 사건으로부터 산지에 살고 있던 셈집안의 장자들이 메소포타미아 평지로 내려오게 되었던 경위를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산 아래로 내려온 사람들에게 어떤 문제가 있었는가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물론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 그들을 꼭 산지에서만 살도록 하셨던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홍수가 끝난후에 오히려 노아와 그 가족들에게 땅에 퍼져 살라고 말씀하셨다. "너희는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편만(遍滿)하여 그 중에서 번성하라"(창9:7) 그러나 셈의 아들들이 산지에서 평지로 내려왔던 그 과정에서 문제가 있었다. 그들은 함의 자손들이 먼저 평지로 내려가서 잘 살고 있는 그 모습을 '보고' 마음에 탐심을 일으켰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요한 1서 2장 16절에 나오는 '안목의 정욕'인 것이며 하와가 금단의 열매를 먹게 된 원인 이기도 했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창3:6) 사람은 본래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도록 태어났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지 않고 세상의 것을 바라볼 때 사탄은 바로 그 순간 노리는 것이다. 그래서 처음부터 사탄은 사람의 이러한 '안목(眼目)의 정욕'을 이용하여 공격하는 것을 그의 고전적 무기로 사용해 왔다. 하나님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던 다윗은 지붕 위에서 거닐다가 목욕하는 여인의 알몸을 '보고' 무서운 죄를 범하게 되었으며(삼상 11:2), 아름다운 연인 드릴라에게 미혹되었던 삼손은 오히려 그 눈을 뽑힌 다음에야 하나님을 바라보는 영안이 열리게 되었던 것이다.(삿16:21). 눈에서부터 시작하는 사탄의 미혹은 결국 사람의 시선을 하나님으로부터 돌려놓으려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 하나님으로부터 시선을 돌리면 곧 그 곳에는 사탄이 준비해 놓은 '보이는 신' 즉 우상(偶像)이 서 있고 우상의신전에는 사람의 탐욕을 이끌어내는 사탄의 미끼가 금단의 열매처럼 주렁주렁 걸려 있었다. 그리고 그 미끼가 사람을 꿰어 범죄의 함정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그 함정은 바로 사람을 죽음으로 인도하는 지름길이 된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약1:15) 그래서 함 집안의 아우들이 잘사는 모습을 '보고' 산 아래로 내려 가자며 졸라대는 여인들의 손에 이끌리어 메소포타미아로 내려온 셈 집안의 장자들은 마침내 죄를 범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아우들을 밀어내고 그 터에 거대한 성읍을 선설하였으며, 마침내 주변의 아우들을 압제하고 박해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아우들을 보살피고 사랑하며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라는 장자권자의 직분을 내던진 채 오히려 자신들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 가인의 길을 따라 아우들의 피를 요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마침내 셈의 장자들은 사망의 길로 굴러떨어지기 시작하였다. 엘람도 앗수르도 그리고 그들을 따라 내려갔던 아르박삿 가문의 아들 가이난도 마침내 그 길로 내려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지금도 사탄은 이 '안목의 정욕'을 공격 목표로 하여 하나님의 자녀들을 미혹하고 있다. 마지막 때가 가까울수록 필사적으로 사람의 시선을 빼앗으려는 사탄의 무기도 점점 고성능화되어 가고있는 것이다. 온갖 화려한 것들이 사람들의 시선을 빼앗고 있다. 새벽부터 잠들 때까지 에녹처럼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 눈을 뜨면서부터 TV의 리모트 컨트롤러를 더듬어 찾는다. 하루종일 컴퓨터를 들여다 보고 증권시세의 모니터를 들여다보다가는 또 온갖 현란한 광고의 난무에 시선을 빼앗기며 살아가는 것이다. 사탄이 만들어낸 온갖 볼거리가 사람의 시야에서 하나님을 밀어내고 있는 것이다. 볼거리에 이끌리어 세상으로 내려간 가이난의 이름을 그 족보에서 삭자해 버릴 정도로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데 열심이었던 아르박삿 가문은 결국 하나님께 인정을 받았다. 모든 인류가 다 안목의 정욕에 미혹되어 하나님을 떠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장차 그의 나라를 재건하는 기둥이 될 아브라함을 바로 그 아르박삿 가문에서 불러내셨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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