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증거/성경의 증거

22. 시내산은 어디인가

은바리라이프 2008. 5. 20. 20:26

22. 시내산은 어디인가


1967년 6월5일 아침 8시를 기해 이스라엘 군대는 시나이 반도로 진격해 들어갔다. 전투를 시작한지 단 4일만에 수에즈운하를 점령함으로써 이스라엘은 자기네 영토의 무려 4배에 달하는 거대한 시나이 반도를 차지한다. 이때부터 이집트와의 평화조약이 체결되어 되돌려 줄 때까지 이스라엘 고고학자들은 15년간 시나이 반도를 샅샅이 탐사하고 연구했다. 그들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두말할 나위 없이 이곳에서 진행됐던 출애굽 사건의 고고학적인 흔적을 찾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결과는 의외로 실망스러웠다. 서기전 3000년대와 2000년대의 주거흔적을 발견했지만 대부분의 성서학자들이 생각하는 출애굽의 연대인 서기전 13세기의 흔적이 전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의 고센땅에서 람세스 도시를 건설했기 때문에(출 1:11) 이 도시의 건설자인 람세스 2세 시대,즉 서기전 13세기가 출애굽 사건의 시대적 배경이 된다. 광야 40년의 유랑생활 중 대부분을 지냈다는 가데스 바네아도 발굴 결과 서기전 10세기 솔로몬 왕이 건설한 군사적 요새인 것으로 확인됐다. 시내산으로 알려진 제벨 무사에서도 비잔틴 시대 이전의 흔적은 찾을 수가 없었다. 따라서 어떤 고고학자들은 이스라엘 민족이 유목민이었기 때문에 천막을 치고 이동하는 그들의 습성상 정착민적인 주거흔적은 남기지 않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 때부터 시내산을 시나이 반도 남부에 위치한 제벨 무사 이외의 지역에서 찾으려는 시도가 몇몇 아마추어 고고학자들에 의해 진행되기 시작한다.

암각화의 보고 카르콤 산.

가장 먼저 시내산의 새로운 후보지를 발표한 사람은 이탈리아 출신의 유대인 고고학자 임마누엘 아나티(E. Anati)였다. 이미 1955년에 이스라엘 남부 네게브 광야의 산지를 탐사했던 그는 해발 850m 높이의 카르콤 산에서 고대인들이 새겨 놓은 몇 개의 암각화를 발견했다. 1980년부터 3년에 걸친 본격적인 탐사와 고고학적인 발굴을 통해서 그는 모두 860군데에서 구석기 시대와 동석기 시대,그리고 초기 청동기 시대의 주거 흔적과 바위에 새겨진 수 백점의 암각화,그리고 제의용 돌기둥 등을 발견했다.

필자도 참석했던 1987년의 이스라엘 연례고고학 세미나에서 아나티가 이 사실을 발표하자마자 즉각 고고학자들의 비판이 뒤따랐다.왜냐하면 이 곳에는 구석기 시대부터 중세 아랍 시대까지 주거 흔적이 나타나지만 서기전 1800년부터 그리스 시대까지의 주거 흔적이 전혀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아나티는 급기야 출애굽의 연대를 서기전 2000년께로 무려 700년이나 앞당겨 버렸다. 사실 카르콤 산에서 발견된 암각화나 집터 등은 네게브 광야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현상이다. 단지 카르콤 산이 독특하게 생긴 곳이고 제의 흔적들이 집중돼 있다는 점이 다를 뿐이었다.

사우디 아라비아의 알-라우즈 산.

두번째 시도는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엉뚱한 모험에서부터 비롯됐다. 하버드 대학의 저명한 고대근동 언어학자인 크로스(F.M.Cross) 교수는 일찍이 독일 학자들의 영향으로 이스라엘 민족의 지리적 고향을 미디안 지역,즉 오늘날의 요르단 남쪽의 사우디 아라비아 영토라고 주장한 바 있다. 미디안 민족이 나중에 이스라엘과 원수지간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출애굽기에 모세가 미디안에 의해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기록된 점으로 미루어 어느 정도 역사적 신빙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학설을 절대적으로 신봉했던 두 명의 미국인 와잇트(R. Wyatt)와 페이솔드(D. Fasold)는 출애굽의 황금보물(출 12:35∼36)을 찾기 위해 1986년 금속탐지기를 갖고서 사우디 아라비아에 밀입국했다. 그들은 미디안 지역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인 해발 2540m의 알-라우즈 산을 시내산으로 여기고 탐사를 시작했다. 하지만 하루만에 발각되어 추방당하고 만다. 알-라우즈에는 대규모 군사시설이 있어서 민간인 출입금지 구역인데다 그들은 밀입국자였기 때문이었다.

미국으로 돌아간 두 사람은 평소 시내산 보물에 관심을 갖고 있다고 알려진 뉴욕의 백만장자 윌리엄스(L.Williams)에게 그들의 모험담을 들려줬다. 심지어 이 산 근처에서 금속탐지기로 황금이 묻힌 지역을 알아냈다고 주장했다. 윌리엄스는 경찰관 출신의 코뉵(B. Cornuke)과 함께 1988년 여름 사우디 아라비아에 밀입국해서 알-라우즈 산을 집중적으로 조사했다. 조사 결과 산 꼭대기에는 불에 탄 흔적이 있어서 야훼가 나타나실 때 시내산의 모습을 연상시키며(출 19:18),열 두 지파를 상징하는 열 두 개의 돌기둥(출 24:4),모세가 들어가 있었다는 바위 틈(출 33:22),그리고 금송아지를 상징하는 암각화도 발견했다는 것이다.

모세와 미디안.

미디안 광야에서 양떼를 치던 모세는 그 곳의 호렙산에서 처음으로 야훼 하나님을 만난 이후(3:1) 40년을 지내면서 이 민족과 매우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그는 미디안 여인과 결혼했으며(2:21),미디안 제사장인 모세의 장인 이드로는 모세에게 구체적인 통치방법을 가르치기도 했다(18:13-27).

아라비아의 미디안-마디안.

서기 4세기 오늘날의 제벨 무사가 시내산으로 확정되기 이전까지 시내산의 지리적 위치는 미디안,즉 아라비아 지방에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서기전 2세기에 번역된 그리스어 구약성서는 출애굽기의 미디안을 ‘마디안 도시(폴리스)’로 표기했다. 비슷한 시기에 기록된 구약 외경 요벨서(8:19)에도 시내산이 아라비아에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서기 1세기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철학자 필로는 모세의 부인 십보라를 아라비아에 살고 있었던 아랍 여인으로 묘사했다. 아라비아에 선교 차 들른 적이 있는 바울도 시내산이 이 곳에 있음을 언급하고 있다(갈 4:25).나아가 서기 100년께 이스라엘 민족의 고대사를 기록했던 요세푸스는 이스라엘 민족이 시내산에 도착하기 직전에 머물렀던 르비딤 광야가 나바티아 민족의 수도인 페트라라고 언급하면서 시내산은 마디아네(마디안) 지방의 가장 높은 봉우리라고 기록했다. 이러한 유대인 기록에 영향을 받아서 오리게네스와 유세비우스,제롬 등의 초대 기독교 교부들도 시내산을 아라비아 광야의 마디안 도시 근처로 여겼다. 비록 이러한 기독교 전승은 서기 7세기 이 지역이 무슬림들에 의해 정복되면서 사라졌지만,서기 9세기부터 아랍인들은 마디안을 모세의 장인 이드로의 고향으로 여기기 시작했다.

/김 성 교수 협성대·성서고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