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기억들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2002-09-19 |
거짓말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차단한 다음 그 사이에 거짓의 그물을 겹겹이 둘러쳐놓고 그 거짓의 성 안에 안전하게 주둔하려고 공작하는 것이 곧 '마귀의 일'이다. 그 모든 거짓의 그물을 벗겨내고 마귀의 음모를 분쇄하기 위해서는 오직 진실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 즉 성경만이 그 열쇠가 될 수 있다. 성경에는 우리에게 비밀의 문을 열어주고 우리를 진실의 지성소로 안내하는 능력이 있다. 그러나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적도 없고 그의 사랑과 은혜를 겪어보지도 못한 사람들이라면 성경의 기록은 또 어떻게 믿느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사람의 손으로 기록한 역사를 믿을 수 없다면 성경도 역시 사람이 기록했을 것인데 어떻게 믿을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런 경우를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성경의 말씀들을 해독하기 위한 암호를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입력해 놓으셨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모두의 가슴속에 남겨놓으신 '진실의 흔적'인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이제부터 '공통의 기억'이라고 부를 수 있게 된다.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공통의 기억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 모두가 인정하는 진실이라고 단정하지 않을 수 없다. 즉 성경에는 우리 모두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공통의 기억들이 기록되어 있어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부인할 수 없게 하는 것이다. 우리 인류가 공통으로 지니고 있는 기억들이 과연 있을까? 우리는 이제부터 서로 마음을 터놓고 그것들을 뒤져보아야 할 때가 되었다. 사람은 기억하는 능력이 있는 반면에 망각하는 기능도 가지고 있다. 그 망각의 바다에서 우리는 그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는 기억의 흔적들을 건져내야 하는 것이다. 모든 것을 잊어가며 살아가는 망각의 세월 속에서 어떤 것들이 우리의 기억 속에 가장 오래 남아 있는가? 사람들은 흔히 좋은 일들은 잘 잊어버리고 나쁜 일들은 오래 간직하는 습관이 있다. 그래서 곧잘 살던 부부도 일단 부부싸움을 시작하게 되면 좋았던 일들을 깡그리 잊어버리고 나쁜 기억들만 들추어내며 서로를 원망하게 된다. 이상하게 나쁜 기억들은 의식의 깊은 바닥에 가라않아서 오래오래 숨어 있다가 필요할 때에는 어김없이 머리를 들고 있어서는 것이다. 콩은 싫어하는 아이들이 있다. 콩밥을 주면 콩을 골라내고 송편을 베어물다가도 콩이 들어 있으면 도로 놓는다. 이런 아이들의 의식 속을 파고 들어가 보면 어렸을 때에 덜 익은 비린 콩을 씹었던 나쁜 기억이 의식의 밑바닥에 도사리고 있다. 그런 식으로 기억의 가장 깊은 바닥까지 찾아 들어가다 보면 어렸을 때에 덜 익은 비린 콩을 씹었던 나쁜 기억이 의식의 밑바닥에 도사리고 있다. 그런 식으로 기억의 가장 깊은 바닥까지 찾아 들어가다 보면 문득 우리는 아주 놀라운 것들을 발견하게 된다. 그 의식의 가장 깊은 곳에서 결코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들이, 두 번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은 일들이 일상의 껍질로 덮여 있다가 곰팜이처럼 피어오르는 것이다. 끔찍했던 일, 부끄러웠던 일, 무서웠던 일······. 우리는 지렁이처럼 꿈틀거리며 살아나오는 그 싫은 것들을 목도하고 싶지 않아서 얼른 고개를 돌린다. 그것들로부터 도망치려 하는 것이다. 그러나 도망치지 말아야 한다. 그 의식의 밑바닥에 도사리고 있는 그 무서운 기억이야말로 우리를 겹겹이 위장(僞裝)된 거짓의 세계로부터 빠져나오게 하는 추적의 실마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것은 참으로 지렁이처럼 징그러운 기억의 실마리로부터 시작된다. 실로 우리 모두에게는 아직도 남아 있는 징그러운 기억이 있다. 그것은 곧 '뱀'에 대한 기억인 것이다. 사람들 가운데 뱀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뱀을 잡으러 다니는 땅꾼은 뱀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하고, 뱀을 목에 걸고서 춤을 추는 서커스의 무희도 있으며, 애완용으로 뱀을 기르는 사람도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이미 뱀에 대한 공포에 중독되어서 그 혐오감이 마비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마비되었던 것이 다시 풀리게 되면 뱀을 싫어하는 본능은 되살아나게 된다. 예를 들자면 한 일년쯤 뱀 잡기를 중단했던 땅꾼이 산길을 가다가 갑자기 길바닥에 뱀을 만나게 되면 놀라서 질겁을 하게 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왜 사람은 누구나 뱀을 싫어하고 징그러워하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사람이 뱀의 유혹을 받아서 하나님을 배반하고 에덴에서 추방되었던 그 무서운 일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담과 하와가 겪었던 그 사건은 그 피를 이어받은 우리 모두에게 기억되어서 유전되었다. 그 무섭고 부끄러웠던 기억이 우리들 의식 속의 깊은 밑바닥에 숨어 있었던 것이다. "거시서 너희의 길과 스스로 더럽힌 모든 행위를 기억하고 이미 행한 모든 악을 인하여 스스로 미워하리라"(겔 20:43) 이런 무서운 기억들을 우리는 좀더 찾아낼 수 있다. 사람들은 밤길을 혼자 걸을 때에 누군가가 뒤에서 쫓아오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뒤를 돌아보면 아무도 없는데 자꾸만 누군가가 쫓아오고 있는 것 같아서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을 빨리한다. 그러면 등뒤의 그 누군가도 역시 발걸음을 빨리하여 쫓아오는 것 같아서 이마에 식은 땀이 흐르게 된다. 그리고 사람들은 아예 어린아이 때로부터 그렇게 누구에겐가 쫓기는 무서운 꿈을 꾼 경험이 있음을 기억하게 된다. 도대체 사람은 무엇을 그렇게 잘못했기에 늘 쫓기는 환상에 사로잡혀서 시달리고 있는걸까? 그것은 바로 우리에게 남아 있는 살인의 기억이다. 가인이 아우를 시기하여 죽였던 그 살인의 기억이 지금까지 우리를 괴롭히고 있는 것이다. 살인자 가인은 끊임없이 쫓기고 있는 자신의 괴로움을 이렇게 호소했다.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면 유리(琉璃)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이겠나이다"(창 4:14) 사람들이 어렸을 때에 꾸는 또 한가지 공통의 꿈이 있다. 까마득하게 높은 곳에서 추락하는 꿈이 바로 그것이다. 아무런 잡을 것도 없이 절망적으로 떨어져 내리는 꿈인 것이다. 어른들은 모두 어렸을 때에 그런 꿈을 꾼 기역이 있기 때문에 아이들이 그런 꿈 이야기를 하면 그것은 키가 크느라고 그렇다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얼버무린다. 그런 식으로 높은 곳에서 떨어지던 그 무서운 기억을 마비시켜 버리려 하는 것이다.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구 무서운 기억은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던 것일까? 성경은 그 사연에 대해서도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도 역시 사람의 범죄와 관계가 있다. 홍수의 심판이 지나간 후 사람들은 다시 교만해져서 하나님께 대한 반역을 시작하였다. 그들은 벽돌과 역청을 사용하여 높은 탑을 쌓아 그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함으로써 이름을 내겠다고 하였다. 하나님께서 그들이 하는 일을 보시고 그 일을 중단시키기 위하여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다. 결국 하나님께 대한 도전은 중단되었지만 그로부터 사람들은 서로에게 진심을 전달할 수 없는 비극적인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것은 에덴에서의 추방보다도 더 무서운 형벌이었다. 그토록 끔찍한 징계를 받고 반역의 탑에서 떨어져내렸던 그 무서운 기억이 지금까지 인류의 기억에 남아서 높은 곳에 서면 떨리게 되고 밤마다 추락하는 꿈을 되풀이하여 꾸면서 살게 되었던 것이다. <김성일님의 "성경으로 여는 세계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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