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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사적 성경해석

은바리라이프 2008. 5. 19. 14:15

구속사적 성경해석


새백성교회 성호길 목사

 

들어가는 말


여러분이 신앙 생활하는 이유와 목적이 무엇입니까? 복 많이 받고 잘 살기 위해서? 아니면 여러분의 정체성을 바로 알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신앙인격에까지 자라서 하나님 나라와 의를 위해 동행하기 위해서?

생각과 사고-사고방식-가치관-행동-습관-운명을 결정합니다. 어떤 생각을 반복하고 사고하느냐에 따라서 운명이 달라진다는 가르침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진리의 말씀이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알고 성경에 기초하여 사고하고 가치관을 정립할 때, 우리의 신앙 인격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의 충만함에 이를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인 성경을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아주 중요합니다. 성경을 우리가 바르게 해석하고 사고하면, 바른 행동과 생활방식이 결정되고 우리의 운명은 영원한 생명에 이를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왜곡해서 해석한다면 우리의 전 삶은 왜곡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처럼 성경 해석이 매우 중요합니다. 사실 오늘날 우리의 교회의 현실이 복잡한 것은 성경해석의 관점이 복잡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성경을 해석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일관하는 중심 주제를 파악하고 그 원리를 따라서 성경을 해석하려 합니다. 이런 노력은 아주 좋은 현상입니다. 왜냐하면 어떤 원리를 가지지 않는 해석이야말로 가장 위험한 해석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중심주제를 보면, 은사, 전도, 기복, 성경의 신앙인물,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교훈, 교리적인 안목, 구원 등등입니다. 그러면서 자신들만이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고 있다고 주장하기를 서슴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떤 성경 해석이 가장 바른 해석이며, 교회의 운명과 삶을 결정지을 수 있는 해석입니까?

교회의 성경해석의 역사 개괄


우리의 교회사에 있어 성경해석이 어떻게 발전되어 왔는지 살펴보는 것인 유익할 것입니다.

역사상 나타난 성경해석의 유형을 보면 매우 복잡하고 다양하다. 그것을 일일이 다 설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역사상 나타난 제 학파를 개략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문자주의(자구주의) 해석학파입니다. 문자주의 해석은 성경을 쓰여진 그대로 읽고 해석하자는 법입니다. 유대교나 안디옥의 시리아 학파, 중세의 빅토리아 학파, 그리고 종교 개혁자들이 이 입장을 취했습니다.

또한 우화주의(알레고리) 해석학파입니다. 이들은 성경의 문자적 의미 이면에 그 구절의 진정한 의미가 따로 있다고 믿었습니다. 영적인 의미가 있다고 믿고 영적인 의미를 담아서 해석했습니다. 영해라고 불립니다. 희랍의 철학자들이나 중세 교부들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리고 유대주의 가운데서도 우화주의가 있었는데 그 대표적인 사람이 필로(B. C. 20-A. D. 54)입니다. 중세 교부들로는 클레멘트, 오리겐, 제롬을 비롯하여 어거스틴도 실제 해석에 있어 우화주의적 해석을 취했습니다.

종교개혁 이후에는 신조주의적 해석이 유행했습니다. 여러 신앙고백서들이 작성되면서 성경을 교리적으로 접근하게 되었습니다. 여러 이단과의 신학적 논쟁들을 거치면서 성경해석이 성경의 본래 의미를 드러내는 데로 나가지 못하고 교리를 옹호하기 위한 시녀로 전락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대해 반기를 들고 나온 사람들이 경건주의 자들입니다. 대표적인 사람들이 스페너와 프랭크입니다. 그들은 무미건조한 신조주의적 해석을 거부하고 개인 묵상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감동에 의존하여 성경을 이해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문법적, 역사적 해석을 버리고 주관적인 묵상에 근거해 성경을 해석하므로 저자의 의도와는 상관없는 엉뚱한 해석을 하게 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합리주의 기초한 자유주의 해석학파가 등장하게 됩니다. 그들은 기존의 성경 영감을 부인하고 합리적 이성을 따라 성경을 재해석하고자 하였습니다. 결국 그들은 급진적 성경 비평주의로 나아가게 되었고 성경의 권위를 크게 훼손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자연주의적 내재신학에 반대하여 나온 것이 신정통주의 해석학파입니다. 그들은 성경이 인간의 철저한 종교적 산물이라고 하는 자유주의의 견해를 배격하며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보수주의자들이 갖는 계시에 대한 견해에도 동조하지 않고 나름대로의 계시관에 기초하여 성경을 해석하였습니다.

그 이외에도 역사상 제학파로 분류할 수 있는 학파가 구속사적 해석학파입니다. 이 학파의 대표적 인물로는 호프만과 오토 파이퍼를 꼽고 있습니다. 그들은 역사를 단순한 연대기 상의 수다한 사건으로 보지 않고 절대자의 현현, 또는 계시적 사건으로 보았습니다. 또한 그리스도를 역사의 중심점으로 보고 계시를 역사 속의 하나님의 행위로 파악하였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역사적 사건과 영감된 해석의 산물로 보았습니다. 이들은 스스로 자처하기를 자신들은 신정통주의자도 아니며, 그렇다고 자유주의자도 아니며, 근본주의자는 더더욱 아니라고 말하였습니다.

이외에 현 신학계를 주도하고 있는 학파로는 불트만과 신해석학파입니다. 그들은 여러 비평적 도구를 활용하여 성경을 해석하며 그들의 토대는 하이덱거의 실존철학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 교회에 영향을 미친 성경해석
한국 교회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성경해석은 물론 정통주의 해석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정통주의란 16,17세기에 거세게 일었던 신앙고백주의와 신조주의를 말하는 것입니다(우리에게는 보수주의로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 거기에 청교도적 삶과 칼빈적 개혁주의가 가미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신앙고백서에 기초한 조직신학적 해석이 한국 교회 성경해석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영향을 받은 것이 기복주의적 성경해석입니다(사실 성경해석이라고도 할 수 없겠지만). 이들의 해석적인 틀은 샤머니즘적 기복신앙입니다. 이 틀에 맞춰 모든 본문을 꿰 맞추는 것입니다. 그들의 해석 가운데 나타나는 사상은 저급한 배금주의와 물질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영향을 끼친 것이 경건주의적 해석입니다. 70년대 이후 여러 선교단체들을 통하여 한국 교회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들의 해석적 틀은 자기 묵상에 기초한 내면의 빛 또는 깨달음을 강조합니다. 주관적 감흥과 경건한 명상에 기초하여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문법적, 역사적 해석에서 이탈하게 되어 문맥과 상관없는 또는 저자의 의도와는 상관없는 해석을 낳게 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리고 대부분 이러한 경건주의는 도덕주의로 나가게 되는데, 결과적으로 성경을 불변하는 도덕 훈화집으로 탈바꿈시키고 맙니다.

그 외에 영향을 끼친 것은 합리주의에 기초한 실존주의적 해석이다. 물론 경건주의적 해석 또한 실존적 필요에 기초해 있다고 하는 점에 있어 다분히 실존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실존주의는 사회복음주의자들이 말하는 실존적 상황을 말합니다. 인간의 실존적 필요에서 출발하여 성경에서 해답을 찾는 것입니다. 대표적 예로는 토착화신학, 민중신학, 해방신학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이 모든 해석들이 갖는 문제점은 이러한 해석들이 철저히 탈역사, 탈문맥, 탈기독론적이라는 것입니다. 실존적, 주관주의적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의 저자들을 통하여 주시고자 하시는 계시적 메시지에서 이탈한 해석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을 어떻게 하면 바르게 해석할 수 있습니까? 그래서 교회가 정상적이고 건강한 교회로 자라갈 수 있습니까? 이에 대한 질문에 앞서 우리는 성경이 무엇인가 하는 점을 먼저 정의해야 합니다. 이후에 바른 성경해석의 원리를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이란 무엇입니까?-예수 그리스도의 책
여러분은 성경에 대해서 어떻게 정의할 수 있습니까?

구약성경을 정경으로 사용하는 종교가 세 종교입니다.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입니다. 그러면 기독교가 이런 종교와 차이가 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유대교나 이슬람교를 우리는 고등한 우상종교로 평가하는 것입니까?
근본적인 차이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구원의 역사를 완성하신 일을 믿지 않고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성경의 주제에 대해서 무엇이라 하는지 들어봅시다.
예수님은 성경의 주제를 어떻게 정의합니까?
요한복음 5장 39절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네(예수님)게 대해서 증거하는 것이니라"
누가복음 24장 44절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와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예수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사도바울은 어떻게 말합니까?
로마서1장 2절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예수님)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여기서 말하는 성경은 구약성경을 일차적으로 말합니다. 왜냐하면 아직 신약 성경이 완결되기 이전이기 때문입니다. 율법과 선지자와 시편하는 것은 구약을 칭하는 이름들입니다. 다시 말해서 구약성경이 예수님에 대해서 증거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주제와 내용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내용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구약성경이 예수님에 대해서 증거한다는 말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구약 성경의 어떤 부분을 찔러도 예수님의 피가 나온다는 말입니까? 구약 자체가 모두 예수님에 대해서 어떤 방식으로든 직접적으로 말씀하신다는 것입니까?

이에 대해서 해답을 찾고자 노력하는데, 한 부류는 구약성경 말씀 중에서 예수님의 기독론적인 것, 그리스도 사건과 비슷한 내용이나 사건들만이 예수님을 예표적으로 증거한다고 해석합니다. 여인의 후손, 아브라함의 씨, 다윗의 후손, 메시야 시편...등등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그림자적으로 예표적으로 믿음으로 구약 백성은 구원에 참여했다고 가르칩니다. 왜냐하면 오고가는 모든 세대 중에서 오직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되기 때문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기독론적인 내용이 아닌 일반적인 내용에서는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을 잘 찾지를 못하고 난감해하며 회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또 한 부류는 구약 성경이 예수님에 대해서 증거한다는 것은 역사의 완성의 입장에서 해석된 말씀임을 고려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본문이 직접적으로 예수님을 증거한다는 말씀이 아니라 역사의 완성지점인 부활의 빛 신약의 빛에 비추어 보니까 구약의 말씀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증거했구나 하는 사실을 알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어떤 기록론적인 부분만이 예수님에 대해서 증거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약의 모든 말씀이 그리스도를 증거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곧 바로 구약이 예수님에 대해서 예언한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일차적으로는 구약의 문맥에서의 예언과 성취가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완성된 역사에서 해석할 때 이전의 역사가 바로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그리스도안에서 완성되었다고 해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구원의 역사가 완성되었기 때문에 드디어 구약의 의미가 드러난 것이며, 해석이 가능한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은 오실 예수님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셔서 구원역사를 완성하시고 다시 오실 예수님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성경의 전 역사를 개괄해봅시다.
먼저 히브리서 1장 1-2절을 찾아봅시다.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말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여러 시대에 여러 방식으로 계시하신 계시의 역사를 요약하는 말씀입니다.

성경의 기록시점과 역사적인 정황은 어떠합니까?
변화산상에서 세 인물이 나타나 있는데 즉 모세, 엘리야, 예수님입니다. 이 세 인물이 하나님의 계시와 구원의 역사에서 새로운 기원을 이루는 인물들입니다. 이시기에 계시의 말씀인 성경이 집중적으로 기록되었습니다. 또 하나의 시기를 끼워 넣는다면 다윗과 솔로몬 시대입니다. 이 네 시대가 성경이 집중적으로 기록된 중요한 시대입니다.

이 시대에 하나님께서 이전의 역사를 해석하여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그런 의미로 성경은 해석된 구원역사입니다.

모세-모세오경 : 이스라엘 백성의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언약이 성취되는 때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통해서 시작하신 언약이 구체적으로 성취되어 이스라엘 나라가 설립되는 시점입니다. 애굽에서 구원하신 백성을 시내산으로 부르셔서 모세를 통해서 모세 언약, 시내산 언약을 체결하심으로 이스라엘을 하나님 나라로 조직하십니다. 그리고 모압 평지에서 출애굽 제2세대와 시내산 언약을 갱신하는 신명기 언약을 체결하십니다. 이처럼 모세 언약은 시내산 언약과 신명기 언약을 말합니다. 이 언약의 빛에 비추어 이전의 과거의 역사를 해석하여 기록한 것이 창세기입니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하나님 나라 삼으신 그 하나님이 바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며, 조상들을 부르셔서 언약을 시작하신 하나님이시며, 그 언약을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완성되게 하신 하나님이심을 해석하여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언약에 신실하셔서 불러낸 이스라엘과 시내산에서 나라로 조직하며 언약을 체결하는 말씀이 출애굽기이며, 언약백성이 어떻게 하나님과 언약적인 친교를 누릴 것인가 하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 레위기입니다. 그리고 광야에서 여호와의 군대로 부름받은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하나님의 은혜베푸심의 일이 민수기입니다. 그리고 출애굽 제2세대와 가나안 진군을 눈 앞에 두고 죽음을 앞둔 모세가 고별 메지를 증거하며 언약을 새롭게 갱신하며 확증하는 말씀이 신명기입니다.

다윗과 솔로몬 시대-전선지서, 지혜서, 시가서 : 두 번째로 성경이 집중적으로 기록된 시기가 다윗과 솔로몬 왕조 때입니다. 이 시기는 모세에게서 시작한 이스라엘의 나라가 다윗을 통해서 완성된 때입니다.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가나안 땅의 왕국이 실현된 나라입니다. 다윗 왕조에서 구약적인 의미로 하나님 나라가 완성된 때라 말할 수 있습니다. 이때 기록되어진 성경이 전 선지서들입니다. 여호수아, 사사기, 룻기, 사무엘서, 지혜서, 시가서들입니다. 이 성경들은 다윗에게서 완성된 하나님 나라라 어떤 성격의 나라인가를 설명하는 방식으로 기록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다윗에게서 성취되고 완성된 시점에서 이전의 역사를 해석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현재 다윗과 솔로몬에게서 새롭게 시작된 나라의 성격이 어떤 나라인지를 밝히기 위해서 기록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서는 왕적인 권세로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기업을 분배하여 안식을 주는 여호수아의 행적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 안에서 주어진 승리와 기업과 안식은 미완성의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주지 못한 것을 다윗이 주었고 다윗 안에서 온전하게 성취되었음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사사기는 왕이 없음으로 자신들의 소견에 좋은 대로 행했다는 말을 반복함으로 불완전한 사사들이 아닌 참 왕의 필요성을 드러내며, 드디어 참 왕인 다윗 안에서 성취되었음을 해석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룻기는 어떤 효부 룻의 효에 대한 모범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몰락한 왕가를 믿음으로 참여하는 이방 여인과 믿음으로 참여하는 보아스의 헌신 아래서 유지되고 다윗 왕의 가문을 어떻게 세웠는지를 해석하는 말씀입니다. 다윗의 증조부를 낳은 이야기입니다. 사무엘서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사람의 뜻으로 세워진 사울 왕의 실패와 하나님께서 지명하여 세운 다윗 왕조의 설립과 전개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 나라의 백성들이 역사안에서 체험하고 느끼고 알고 있는 하나님의 어떠하심과 그분의 일하심에 대해서 신앙고백을 담아 부르는 노래가 시가서 즉 시편입니다. 그리고 완성된 하나님 나라의 보좌에 앉은 지혜의 왕이 가르치는 언약 백성의 지혜와 그 백성이 누리는 평안과 기쁨의 삶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 지혜서 즉 잠언, 전도서, 아가서입니다. 욥기는 내용상으로는 족장시대를 배경으로 하지만, 사용되는 언어가 잠언서와 흡사합니다. 그래서 이 시기에 기록된 것으로 봅니다. 주제는 의인의 고난 즉 환난 중에도 신실하게 하나님을 의지하는 의인에 대한 말씀입니다.

엘리야-기록 선지자 활동시기, 후선지서 : 구약의 질서에서 마지막으로 성경이 집중적으로 기록된 때가 엘리야 선지자와 이 이후의 기록 선지자들의 활동 시기입니다. 이 시기는 하나님 나라인 이스라엘이 바알의 왕국으로 전락한 때입니다. 북 이스라엘 왕 아합이 시돈 왕 옛 바알의 딸 이세벨을 아내로 맞아들이고 그 수도인 사마리아에 바알의 전을 세움으로 북 왕국이 바알의 왕국이 되었습니다. 뿐만아니라 남쪽 유다도 이런 아합의 집과 혼인언약으로 연합하여 온 이스라엘이 바알에게 속하였습니다. 이때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는 남은 자를 남기시고 그들을 위해서 이루시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구원에 대해 계시하시는 말씀들입니다. 이스라엘의 멸망과 남은 자의 구원과 회복에 대한 말씀들입니다.
이사야서로부터 해서 말라기서까지가 바로 이때 기록되어졌습니다. 이스라엘의 멸망과 포로기 이전에 기록된 책이 이사야서로부터 스바냐서까지의 선지서입니다(이사야, 예레미야, 예레미야애가, 에스겔, 호세아, 요엘, 아모스, 오바댜, 요나, 미가, 나훔, 하박국, 스바냐). 여기에서 선지자들은 불순종하는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을 경고하고 언약에로 돌이키도록 촉구합니다. 또한 심판과 멸망을 말하는 동시에 남은 자를 위한 새롭고 영원한 구원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멸망(B. C. 586)이후 포로기, 그리고 그 직후에 기록된 책이 다니엘서와 열왕기서입니다. 다니엘서는 신실한 남은 자기 백성을 통한 바벨론에서의 하나님의 자기 영광의 증거와 장차 되어질 일에 대한 이상 그리고 최후의 승리를 예언하고 있습니다. 열왕기서는 회고의 관점에서 왕국의 범죄와 하나님의 심판, 회복에 대한 기대와 소망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곧 이스라엘이 왜 멸망하게 되었는가를 말하는데 그 왕국의 범죄와 하나님의 심판의 진행, 그리고 회복에 대한 여운으로 마쳐지고 있습니다. 곧 유다 왕 여호야긴이 사로잡힌지 삼십 칠 년에 감옥에서 풀려난 이야기로 끝맺고 있습니다.
그리고 약속된 구원의 선취로서 포로 귀환이후로 기록된 책으로는 선지서로 학개서와 스가랴서 그리고 말라기서가 있습니다. 이 선지서들은 성전재건을 독려하고 장차 나타날 영광을 약속하며 언약의 삶의 회복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메시야 나라와 이를 통한 하나님나라의 완전한 실현, 엘리야에 대한 약속들이 주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역사서로 역대기,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서가 있습니다. 포로 귀환은 49,897명이 B.C. 537-515년에 스룹바벨에 의해 일차적으로 이루어지고, 2차 귀환으로 1,754명이 B.C. 457년에 에스라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B.C. 444-425년에 42,360명의 유대인이 느헤미야에 의해 각각 귀환하게 됩니다. 역대기서는 왕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약속의 땅에서 이루어 가는 성공과 실패의 역사를 담고 있다. 왜 그 왕국이 실패할 수 밖에 없었는가,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어떤 회복의 소망을 주셨는가, 이제 이스라엘은 어떻게 그 왕국을 재건해야 하는 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에스라서는 포로 이후 성전재건과 예배의 부활, 율법에 기초한 개혁의 감행을 말하고 있습니다. 느헤미야서는 예루살렘 성벽 재건과 에스라를 중심한 총체적인 개혁운동이 어떻게 전개되었는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에스더서는 포로기 동안 페르시야에서 있었던 일을 기록한 것인데 유대인들을 학살하려는 음모와 왕비가 된 유대인 에스더의 용기있는 행동, 그리고 그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신약의 계시 : 신약 성경이 기록된 때는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때입니다. 이 시기는 모든 언약이 성취되는 시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인격안에서 성취되어진 구원의 일과 말씀들이 성령에 의해서 사도들에게서 해석되어지고 기록되어졌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기록된 것이 아니라 부활과 성령강림 이후에 사도들을 통해서 이전의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해석하여 기록한 것이 복음서입니다. 각각의 복음서들은 단순하게 예수님의 생애의 역사를 보고하는 것이 아니라 저자의 신학적인 의도와 복음서 전체의 주제에 따라서 조절하고 해석해서 기록한 것입니다. 마태복음은 예수님을 다윗의 후손으로 오셔서 하나님 나라를 설립하신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묘사합니다. 마가복음은 예수님을 권세있는 하나님의 아들로 묘사합니다. 누가복음은 구원역사의 흐름에 맞추어 역사발전에 강조를 둡니다. 이방인이 구원에 참여하는 것을 강조하며, 기도와 성령에 대해 강조되고 있습니다. 고난받는 의인의 소망을 이루시는 분에 초점이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성육신하여 친히 자기 백성을 성소 삼으셔서 함께하시는 아들로 묘사합니다.
그리고 사도행전인데, 누가복음의 속편으로 볼 수도 있고, 독특한 양식을 갖는 한 부류로 취급할 수도 있습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을 통해 교회가 어떻게 설립되었으며, 이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땅 끝까지 전파되어 나가는가 하는 것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서선서들입니다. 서신서들은 사도들을 통해서 설립된 교회가 이런 저런 문제를 일으키게 되었고 교회가 정상적인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이에 대해서 사도들을 통해서 그 구체적인 문제를 새 시대의 복음의 원리를 따라서 해결하고 치료하기 위해서 쓰여진 편지들입니다. 로마서는 전반적인 하나님의 의의 경영의 역사를 말하면서 어떻게 하나님께서 불의한 인류에게 새로운 의를 나타내셨고 믿음으로 참여케 하셨는지, 이 의의 역사는 어떻게 완결되어질 것인지, 그리고 나타내신 이 의에 합당한 삶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역사의 경영을 이야기하되 통치의 권세에 강조를 두어 이전의 죄의 종으로서의 삶과 의의 종으로서의 삶을 말하고 이에 기초하여 의의 삶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후서는 고린도교회에 나타난 여러 가지 문제점들 곧 교회내의 분쟁과 무질서 문제점들을 바로 잡으면서 새언약 공동체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 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는 교회가 받은 복음이 무엇인가를 말하고 율법의 행위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을 대비시키면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우리의 새로운 신분이 무엇인가를 말하고 이에 기초하여 성령을 따라 사는 삶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을 통일시키시는 하나님의 경륜을 말하고 그 경륜의 한 가운데 서있는 교회의 위치를 말하면서 성도들이 교회적인 삶을 어떻게 이루어가야 하는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빌립보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복음에 참여하는 삶이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바울과 함께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므로 복음의 봉사를 이루어야 할 것인지, 어떻게 복음을 위한 싸움을 싸워가야 할 것인지, 어떻게 고난 중에도 기쁨을 잃지 않고 복음의 봉사를 이루어 내야 하는지 등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골로새서는 교회의 머리로서 주되신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높으신가를 강조하면서 그를 교회의 주로 주셨으니 교회가 어떻게 그 그리스도를 붙들고 흑암의 권세를 이겨야 하는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곧 만유의 주로서 그리스도의 통치 가운데 사는 우리가 어떻게 새로운 신분에 합당한 삶을 이루어야 하는가를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후서는 어린 데살로니가 교회가 환란 중에도 신앙을 지킨 것을 인하여 감사하고 그럼에도 그리스도의 재림과 성도의 부활에 관한 잘못된 이해 가운데 조금은 왜곡된 신앙의 모습을 보이고 있는 이들을 교훈하여 바로잡고 있습니다. 디모데전후서는 목회서신으로 믿음 안에서 아들된 디모데에게 바울이 어떻게 교회를 진리 안에서 규모 있게 세워야 할 것인지, 교회를 어떤 태도와 자세로 봉사해 내야 할 것인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디도서도 디모데서와 마찬가지로 바울이 디도에게 주는 교회봉사에 필요한 몇 가지 지침들을 담고 있습니다. 빌레몬서는 바울이 개인적으로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사랑으로 받도록 청하는 내용입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내야 할 참다운 형제애가 무엇인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히브리서는 옛 언약 역사에서의 계시와 유업, 옛 언약의 중보자로서 중보적 능력, 그리고 그 아래에서의 삶 등을 말하고 이와 대비하여 그리스도 안에서의 계시의 탁월함, 영원한 유업으로서 하늘 안식, 그의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온전한 중보적 능력 그리고 그 아래 주어지는 은혜 등이 강조되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면서 믿음의 인내 가운데 앞서 가신 그리스도를 좇도록 강력히 권면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는 주의 강림의 날 곧 종말의 날을 배경으로 주의 백성들이 이루어야 할 참된 경건과 행하는 믿음, 종말을 살아가는 성도의 모습 등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전후서는 장차 나타날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예할 자로서 어떻게 모든 고난 중에도 순복함으로 주를 따라야 할 것인지에 대하여 권면하고 있습니다.
요한일이삼서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의 교제가 무엇인지를 말하고 그 온전한 사랑의 교제를 우리가 진리 안에서 어떻게 이루어 가야 하는가를 권면하고 있습니다.
유다서는 교회 안에 가만히 들어 온 거짓 교사들을 대항하여 믿음의 도를 위해 어떻게 싸워야 하는 지를 권면하는 내용입니다.
요한계시록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궁극적인 승리를 말하는 책으로 이미 승리를 약속 받은 교회가 어떻게 이 세상의 권세와 죽음을 각오하고 싸워야 하는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장차 우리 앞에 나타난 영광스러움을 탁월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안에서 계시가 완결되었습니다. 이제 완결한 한 권의 책으로 성경이 교회에 기업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이제 교회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은 새로운 계시를 기대하고 바라는 것이 아니라, 기록된 계시와 함께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으로 함께하시며 역사하시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터 위에서 성령의 감동을 따라 해석된 말씀을 통해서 동행하는 시대입니다. 따라서 그만큼 성경을 해석하는 중요한 시대를 살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우리들은 흔히 성경을 해석할 때 여러 가지의 단계를 말합니다. 쉽게 말하면 관찰단계, 묵상단계, 적용단계가 그것입니다. 관찰단계는 본문을 읽는 것을 말합니다. 문학적인 해석, 문법적인 해석, 역사적인 해석 등이 여기에 포함되어야 합니다. 저자의 신학적인 의도와 전체의 주제와 문맥적인 흐름 등을 고려해야 하는 단계입니다. 그리고 묵상의 단계는 신학적인 해석을 말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적용은 본문이 나에게 주는 메시지 무엇인가 하면서 실천하기 위한 적용을 말합니다. 이런 내용과 단계를 거치는 해석이 바로 건전한 해석이며, 바른 해석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문법적, 문학적 문맥을 따라 해석을 해야 합니다.
성경의 어떤 본문을 선택하게 되면, 성경해석의 원리를 따라 해석해야 합니다. 그 첫 번째 단계가 바로 문법적인, 문학적인 해석입니다. 본문으로 택한 성경 전체의 주제와 구조와 흐름을 이루는 문맥을 중요시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 단어와 구절과 문장의 의지를 정의하고 해석하는 것을 말합니다.

ㄱ. 문학적인 구조와 장르를 고려해야 합니다.
시는 시로, 산문은 산문으로, 복음서는 복음서의 양식의 특징을 따라서, 서신서는 서신의 특징을 따라, 묵시문학은 묵시문학의 특징으로, 비유는 비유로 해석해야 합니다. 문학적인 장르를 무시하고 해석할 때 오류를 범하게 됩니다.

ㄴ. 병행되는 구절과 비교해서 그 차이점을 고려해야 합니다.
같은 내용과 사건을 보고하더라도 각 성경 전체의 주제와 저자의 신학적인 의도와 목적 때문에 조절되어 차이나게 기록됩니다. 사건 배열의 순서, 내용의 차이 등을 통해서 의도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점을 고려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모세의 오경에서 말하는 율법의 제도가 출애굽기와 레위기와 민수기와 신명기가 각각 다르게 보고합니다.
또 열왕기서와 역대기서를 보면 동일하게 이스라엘의 분열왕국의 열왕들의 행적에 대해서 기록하지만,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각 선지서의 전체적인 내용은 비슷하지만, 자세하게 보면 언어선택과 내용이 각 시대적인 상황에 따라서 조절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복음서가 예수님의 지상생애에 대해서 보고하지만, 사건의 배열 순서와 내용에서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서신서를 보면 같은 저자의 작품이어도 서신서에 따라서 다르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ㄷ. 성경의 언어는 언약 관계적인 언어라는 점을 고려해야 합니다.
아무리 문법적이고 문학적인 문맥을 고려해서 성경을 해석할지라도 잊어서는 안될 것이 있습니다. 성경의 언어는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 상식적인 언어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오히려 성경의 언어는 모세 언약적인 언어요 성소적인 언어입니다. 모든 성경의 언어는 모세 언약이 토대입니다. 시내산 언약이 모든 언어적인 기초입니다. 그리고 시내산 언약의 갱신이 신명기 언약입니다. 그런 의미로 시내산 언약과 신명기 언약이 모든 성경의 언어의 토대가 됩니다. 이 언약이 구원역사를 따라서 갱신되고 역사안에서 어떻게 완성되는지를 해석하여 기록한 것이 성경입니다. 따라서 성경에 나오는 단어와 문장의 의미를 정의할 때, 우리의 일반적인 상식적인 언어개념이나 사전적인 정의를 가지고 성경을 거꾸로 해석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어린 양이라 했을 때 생물학적인 의미로 양의 의미를 정의해서는 안되고 성경에서 양을 어떤 문맥과 의미로 쓰고 있는지를 고려해야 합니다.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라는 말씀도 같은 의미입니다.

ㄹ. 불명료한 부분은 명료한 부분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기존의 방식인 산문은 명료하고 묵시문학 등의 언어는 불명료하다는 전제는 잘못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산문의 형식으로 기록한 것은 산문이 그 내용을 담기에 가장 합당하기 때문이며, 묵시문학의 장르로 표현하는 것은 묵시문학이 그 내용을 담기에 가장 합당하기 때문입니다. 묵시적인 언어로 기록된 성경일지라도 불명료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완전한 작품이요 명료한 성경입니다. 산문은 명료하고 다른 장르는 불명료하다는 것은 그들의 잘못된 전제에서 출발한 것입니다.
오히려 명료와 불명료를 문학적인 장르에서 정의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구원 역사적인 흐름을 따라서 정의해야 합니다. 언약적인 관계를 따라서 정의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계시가 아직 진행 중에 나타난 구약계시가 그런 의미로 불명료한 부분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완성된 계시인 신약의 계시가 그런 의미로 명료한 계시라 말할 수 있습니다.

ㅁ. 그리고 또 하나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교리적인 안경을 따라서 명료와 불명료를 정의하는 것입니다. 이신칭의의 교리가 만고불변한 진리라는 전제 위에서 이신칭의의 교리에 합당한 부분은 명료한 부분이고 이와 잘 상응하지 않고 대립되는 부분은 불명료하다는 전제 또한 잘못된 것입니다. 사실 지금까지 로마서의 주제를 이신칭의로 정의하고, 이 로마서의 안경으로 모든 성경을 구원론적으로 해석했습니다. 이런 해석의 방식은 매우 큰 잘못을 범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신칭의가 아닌 행위로 말미암은 구원을 강조하는 야고보서를 종교개혁자 루터는 지푸라기 서신이라 부르는 오류를 범했던 것입니다.
모든 성경은 각각의 주제와 저자의 신학적인 의도와 목적이 있습니다. 어떤 하나의 성경의 관점 즉 로마서의 관점을 가지고 모든 66권의 성경을 해석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각 성경은 각각의 주제와 신학적인 의도와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각 책의 문맥을 따라서 해석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쓴 서신일지라도 로마서의 안경으로 읽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같은 저자인 바울의 글일지라도 문맥과 주제에 따라서 강조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주장되었듯이 로마서의 주제가 진정으로 이신칭의를 다루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로마서의 내용 중에서 이신칭의를 말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오고가는 모든 세대가 오직 예수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의미로의 이신칭의를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로마서의 주제는 이제 나타난 하나님의 새로운 의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이전에는 율법에 나타난 의를 통해서 세상을 경영하셨는데, 이제 아들안에서 구약의 의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셨다는 것을 강조하는 서신입니다.

이상의 여러 가지 원리를 따라서 문학적이고 문법적인 문맥의 흐름을 따라 성경을 해석해야 합니다.

둘째로, 역사적인 해석입니다.
두 번째 단계가 역사적인 해석입니다. 성경이 기록된 역사적인 상황과 구원 역사적인 상황을 따라서 성경을 해석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교회가 처한 역사적인 상황에서 기록되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성경을 해석할 때 역사적인 문맥과 상황을 고려하는 것은 필수적인 일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소위 역사실증주의자들의 방식을 회피해야한다는 것입니다. 역사실증주의자들은 성경이 기록된 당시의 역사적인 배경을 연구합니다. 그리고 당시에 쓰이던 용례 등을 통해서 단어나 문장의 의미를 재구성합니다. 그리고 이 재구성된 의미를 가지고 거꾸로 성경을 해석해 들어옵니다. 이런 해석법은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세속화시키는 해석입니다.
역사적인 해석을 하라는 말씀은 역사적인 배경을 재구성해서 성경을 해석하는 잣대로 쓰라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본문이 처한 구원 역사적인 문맥이 무엇인지를 고려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역사적인 어떤 배경과 관련해서 그 성경이 기록되었더라도 그 문제에 대한 답을 할 때 성경의 저자들은 당시의 역사적인 배경의 언어의 의미로 답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언어를 가지고 답을 하고 있습니다. 모세 안에서 시작하신 하나님의 은혜의 일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완성되었는지를 따라서 해답을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고백서들이 바로 이런 역사 실증주의적인 방법을 따랐습니다. 성경의 언어는 모세 언어이며 언약적인 언어인데, 이것을 희랍철학적인 배경의 언어로 해석했습니다. 그래서 언약 관계적인 성경의 언어를 존재론적이며, 본체론적이며, 법정적인 개념으로 왜곡시킨 것입니다. 옛 시대와 시대를 대비하는 성경의 언약적인 언어를 현상의 세계와 영원의 세계를 구분하는 희랍의 이원론적인 사상으로 변질시켰습니다. 그 결과 교회의 삶이 이원화되었고 사변적인 모습으로 변질시킨 것입니다.

이상의 두 단계 문법적이고 문학적이고 역사적인 해석을 했다고 성경이 다 해석된 것이 아닙니다. 이 단계까지만 해석하고 곧 바로 우리에게 줄긋기 해서 적용하면, 새 언약의 백성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약의 교회를 구약의 교회와 동일시하는 오류를 범하는 것입니다. 이상의 두 단계로 해석하면 일차 독자에게 주는 메시지만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반드시 뒤따라야 할 해석이 바로 기독론적인 해석입니다.

셋째로, 신학적인 해석, 기독론적인 해석, 구속사적인 해석입니다.
신학적인 해석. 기독론적인 해석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구원 역사가 완성된 의미를 드러내는 해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나타난 부활의 빛으로, 새로운 시대적인 안목으로 성경의 모든 역사를 보고 해석하는 방법입니다. 이 방법이 바로 교회가 진리된 성경을 읽는 의미이며, 이 의미라 교회의 생명이요 빛입니다.
이 기독론적인 해석에서 강조해야 할 것이 바로 불연속입니다. 불연속에서 구약의 모든 성경의 의미로 바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전의 역사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의 일이 어떻게 아들 안에서 완성되었는지를 해석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완성된 빛과 무관한 모든 것은 우상 종교적인 가르침일 뿐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빛으로 조명되지 않는 진리는 거짓일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빛만이 모든 성경을 밝히는 능력이며 원동력입니다.

넷째로, 적용입니다.
앞에서 제시한 이런 해석의 단계를 거친 이후에 드디어 모든 성경을 신약의 교회에 적용이 가능한 것입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적용이 어떤 도덕적인 훈계나 삶의 아이디어를 주는 적용이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안에서는 어떤 시간표나 기준이 없습니다. 구약의 모세의 질서 안에서는 율법이 정해준 기준과 시간표를 따라서 행하는 시대입니다. 어리석은 어린아이적인 시대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장성한 아들의 시대입니다. 그리스도안에서 주신 생명의 빛을 따라서 삶을 사는 시대입니다. 복음의 원리를 따라서 역사를 해석하고 자신의 삶을 해석해서 능동적인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새 백성의 능력입니다. 참된 자유안에서 사랑의 종으로 수고하고 헌신하는 삶이 새 백성의 삶입니다. 여기에는 어떤 성과 속의 구분이 없습니다. 헌신된 영역과 헌신되지 않는 영역이 없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며 사는 자유하는 아들입니다. 이중마음을 품고 사는 것이 아니라 사나 죽으나 주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질서입니다. 따라서 일일일선과 같은 적용을 하는 모습은 장성한 아들이 아니라 종의 영으로 사는 어리석은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