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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와 돌이 되고자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

은바리라이프 2008. 2. 20. 18:03

 

모래와 돌이 되고자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

- 또 하나의 천년을 위하여 -

 

방성규 박사


 천년을 위하여

주후 248년은 로마제국의 창건 천년을 기념하는 해였다.1) 황제 필립은 지나간 천년의 영화를 오 늘에 새로이 하고자 기념 축제를 만들고 3일 동안 로마 시민 전체가 한잠도 안자고 먹고 놀고 기 쁨을 서로 나누어가졌다. 그리고 또 하나의 새로운 천년을 위하여 나라를 강건히 할 것을 다짐도 하였다. 그러나 이제 로마는 무한대로 뻗어나가고 있는 로마가 아니었다. 새로운 천년맞이는 미래 지향적이라기보다는 지나간 천년의 향수를 그리고 있었고, 이는 곧 현재의 불안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런 축제를 시작하는 필립 황제 자신도 자기 자리를 확실히 하기 위해서 무언가 보여 주어야 하는 강박관념에 시달려야 했다. 우선 외적으로 이민족의 침입으로 늘 염려를 해야했다. 2-3세기의 로마제국은 이민족을 방어하려고 군대를 동원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권력의 누수 현상이 생겨 정치적인 힘이 황제에서 군대로 이양되는 악순환을 보이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필립 황제를 불안케 하는 것은 나중에 필립 자신마저 희생양으로 몰고 간 황제 쟁탈전이었다. 황제는 이런 상황을 반전시키고자 로마 시민의 환심을 사면서 마음을 하나로 모을 정신적 지주가 필요하였다. 크게는 민족을 위한 일이지만 내심으로는 자기 자신을 위한 일이기도 했다. 이런 목적으로 필립 황제는 쥬피터 신전을 대규모로 수축하고 쥬피터 신의 화신인 황제를 숭배하도록 강요하기 시작하였다. 제의적인 일치에서 국민의 사기와 관심을 모으자는 생각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의 정상에 있는 사람들이 쓰던 상투적인 권력 유지 방법이었다.

새로운 천년을 맞이하는 국가의 축제에 기독교인들이 서야할 자리가 마땅치 않았다. 기독교인들에게는 국가의 번영에 참여하고자하는 다짐과 새로운 세상을 만들자는 기대와 아울러 황제숭배라 는 강요의 부담을 안게되었다. 기독교인들에게 한 가지 다행스러운 것은 황제 필립은 자신의 아내와 딸들이 기독교인이어서 (교회사가 유세비우스에 의하면 필립은 최초의 기독교 황제였다는 것이다2)) 기독교인들에게 정신적 강요 외에 다른 국가 차원의 형벌을 가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국가의 시책에 적극적으로 동참할 수 없는 아픔을 교인들은 짐으로 안게 되었다. 한편으로 는 곧 오실 주님을 고대하는 신앙이 먼 미래의 청사진을 펴는 국가시책에 꿈을 함께 모으기가 힘 들었고, 또 한편으로는 국가시책이 이방의 종교적 제의를 통한 방법이라 동참할 수 없었다. 역사는 기독교인들의 이런 갈등과 상관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로마 제국은 새로운 천년맞이의 기쁨이나 다짐을 국가적인 힘과 마음으로 모을 여유도 없이 이내 변방의 국경선이 위협을 받게 되었고, 이는 필립 황제를 정신 없이 몰아갔다. 축제를 지낸 후 3년이 지나지 않아 필립 황제는 변방의 Goths족의 침입을 가장 신뢰하던 부하 데키우스에게 군대를 주며 평정할 것을 명령한다. 데키우 스는 전투에 승리하고 회군하는 길에 부하들에 의해 황제로 추대되었다. 필립의 친위대와 데키우 스의 회군과의 싸움은 데키우스의 승리로 끝나고 필립은 자살을 한다. 새로운 천년을 꿈꾸던 사람 에게는 너무 짧은 기간이었다.


천년맞이가 남기게 된 아픔

새로운 천년맞이의 축제는 이를 시작했던 필립 자신에게 죽음을 가져다주었을 뿐 아니라 기독교 인들에게도 피와 죽음을 가져다주었다. 새로운 황제 데키우스는 필립이 시행하던 정책을 끝까지 펼쳐나가기로 하고 쥬피터 신전의 제의와 황제 숭배를 대대적으로 실시하도록 하였다. 이 제의에 예외를 허용하지 않았다. 제사증서(Libellus)를 만들어 제의에 참여한 사람에게 증인 두 사람을 세워 서명하도록 했다.3) 이 증서가 없는 사람은 체포, 구금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정책은 특별히 기독교인을 단속하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처음 당하는 박해는 아니라 나름대로 처신하는 법도 익혀왔던 교인들에게 이번의 박해는 더 어려운 박해가 되었다. 이전에는 이렇게 증명서까지 발급하면서 박해한 적이 없었다. 이번 박해는 로마 제국 전 지역에서 광범위하게 자행되었고 많은 순교자를 내게 되었다. 특별히 이번 박해로 인해서 교회 내에 큰 분열을 가져오게 되었다. 소위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는 "고백자들"과 "배교자들" 사이의 갈등이 심화되었다.4) 깜짝 놀랄만큼의 순교자의 수를 낸 것은 아니었지만 교회 지 도자들이 입은 타격은 그 어느 것보다 더 컸다. 일반 교인들이 많이 배교한 것에 반해 주로 지도 자들이 생명을 잃었다. 지도자들 가운데 북아프리카의 키프리안 감독은 교인들의 간청에 의해 사하라 사막으로 피신을 했다. 정부 관리의 영향력이 비교적 많이 못 미치는 사막으로 피신해서 은둔해 있었다. 로마 제국주의를 싫어하는 한 토착민인 콥트(토착 이집트인) 사람에 의해 위험을 면하기도 했다. 역사적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사막으로 피신해 들어왔는지 모르지만 들어온 사람들 가운데는 박해가 끝났는지도 모르고 그냥 남아서 살던 사람들도 있었다.5)

사막으로 도망가기

사막으로 도망간 이들이 죽지 않고 있었다. 사막은 평상시에는 인간에게 죽음의 땅이었지만 이들 피신자들에게는 생명의 땅이었다. 불모지에서 꽃을 피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의 땅이었다. 모든 창조물에 하나님의 섭리의 의지가 분명히 들어있었다면 사람들에게 버려진 이 땅조차 거대한 영적 자원을 간직하고 있었던 셈이다. 자발적인 선택의 삶이 아니었을지라도 모세가 바로의 칼을 피 해 광야에서 모래와 바람과 함께 살았고, 엘리야가 아합과 이사벨의 칼을 피해 심하게 지친 몸과 마음으로 사막으로 들어왔다. 형벌의 땅,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땅으로 하나님의 사역자들이 이런 저런 이유로 내팽겨쳐 던져지듯이 들어오게 되었지만 사막은 오히려 이들을 강하게 만들고 있었다. 모래와 바람이 이들을 살리고 있었다. 바람과 이야기하며 살던 엘리야가 세미한 음성을 듣지 않았던가? 바위와 수많은 씨름을 하던 모세가 그의 광야길을 가면서 또 얼마나 여러번 그 바위에서 물을 얻어냈던가? 바위는 모세에게 물을 베풀었다. 강력한 산악 게릴라 부대를 만들어 왕국 창출의 신화를 만들어낸 다윗 역시 광야의 사람 아니었던가? 평원에서나 소용되는 당시로는 최신식 무기인 전차를 불태우고 말들의 힘줄을 끊고 오직 광야에서 사는 방식을 택한 다윗이었다. 광야 (산)의 하나님 (전쟁의 하나님, 산의 하나님) 야훼에게 훈련받은 다윗이 평지의 신 바알에게 의지 하는 불레셋 사람들에게 이긴 이유는 광야는 생존하기 위해서 특별 훈련을 받아야하는 곳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정치적인 이유로 사막으로 들어와야 했던 초대교회 지도자들도 역시 버려진 곳에서 생명을 얻게되는 은혜를 받게 되었다. 키프리안이 사막에서 강해졌고 (결국 나중에 교회로 복귀하고 순교하게 된다), 그밖에도 이름을 알 수 없는 많은 교인들의 삶이 역시 훈련되고 있었다.

더 이상 사막으로 도망 안가도 되는 때에 생긴 일

더 이상 사막에 머물러야할 이유가 없어졌다. 세상이 바뀌었다. 더 이상 단지 기독교인이라는 이 유로 박해를 가해오는 사람들이 없어진 것이다. 더 이상 마실 물이 없어 고통 당하지 않아도 되었. 더 이상 모래 바람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었다. 갈렐리우스 황제가 '관용의 칙령'(Edict of Toleration)을 선포하였고, 콘스탄틴 대제는 313년 '밀라노 칙령'(Edict of Milan)을 선포해 기독교를 공식적으로 용인하였고 얼마 안 가서 국가의 종교로 선포하였다. 이제 콘스탄틴 대제는 몰수된 교인들의 시민으로서의 권리와 재산을 환원할 뿐만 아니라, 모든 교회 재산에 대해 면세권을 부여 하고, 교회 건축을 국가 재정으로 충당하고 노동력을 제공하였다. 물론 콘스탄틴에 의한 기독교 승리가 로마 제국 내의 모든 지역에서 동시적으로 기쁨을 누린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공식적으로 박해의 시대는 끝난 셈이었다. 역사적으로 아직 온전한 기독교 국가가 되었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역사적으로 단지 박해의 시대가 끝난 것을 의미한다고 조심스럽게 말하는 것은 학문적으로는 맞는 말이겠지만, 그 시절 기독교인이 가졌던 마음의 감격을 너무 모르는 말이다. 기독교의 승리의 의미를 너무 축소하는 것이다. 기독교의 승리는 많은 교인의 피를 통해서 허락하신 하나님의 승리인데 어찌 작은 일일 수가 있겠는가? 이로 인해 기독교가 얻었던 이득은 실로 헤아릴 수 없다. 일부 학자들이 콘스탄틴 대제의 기독교 개입이 이후 기독교가 순수 신앙에서 정치적 바람을 타게 만든 원흉이요, 이것은 결국 기독교의 타락이라고 혹평하는 이들도 있으나 너무 단순한 역사 읽기이다. 분명 기독교는 제국 내 종교 중 으뜸의 자리를 가지게 되었고 시간이 더 지나가면서 제국의 모든 이들이 기독교 안으로 들어와야만 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콘스탄틴 대제의 기독교 공인이 가져다 준 이득은 가장 먼저 감독들이 실감하게 되었다. 사막에 서 사경을 헤매던 감독들이 이제는 황실이 제공하는 저택에 머물 수 있었다. 마치 예수님 둘레에 제자들이 둘러앉아 식사하던 것처럼 감독들이 황제와 한 식탁에 앉게 되었다.6)콘스탄틴 황제가 스스로를 감독으로 부르는 바에 이전 국가의 죄인이었던 감독들이 이제는 황제와 동격인 감독이 (황제는 자기를 감독으로 불렀다) 아닌가? 감독들은 제국의 정치에서도 고문의 자격이 주어졌다. 콘스탄틴 황제가 교회의 신학적 분열을 막고자 황실이 있는 근처 니케아라는 도시로 교회 회의를 소집하고 황실의 경비로 소집되어 오는 모든 감독들에게 황실의 마차를 제공하였다. 제국의 마차를 피해 사막으로 도망 다니던 감독들이 이제는 황실의 마차에 앉아서 자기를 잡으러 다니던 사 람들의 호위로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속속 니케아에 모이게 되었다. 이 곳에서 황제의 주재 하에 아리우스측과 아타나시우스측이 서로 다른 기독론과 구원론을 바탕으로 한 다른 신조를 제출하였고 전체 교회는 회의를 통해서 이를 통일하고자 하였다. 여기서의 관심은 이런 신학적 논쟁이 아 니라 교회의 변화된 위상이다. 교회의 문제는 일개의 사적인 집단의 문제가 아니라 제국의 정치 가운데에서도 으뜸되는 문제가 된 것이다.

정치 영역에서의 승리가 곧 개인의 삶에서의 승리는 아니었다. 기독교의 정치적 승리가 자랑스런 일이었지만 동시에 정체성에 혼돈을 준 것도 또한 사실이다. 감독은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받는 지도자보다는 정치적으로 출세한 사람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교회는 토지를 엄청나게 소유하게 되었다. 이런 이득을 노리고 기독교로 들어오는 사람들이 많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신앙 외적인 일로 교회는 몸살을 앓아야 되었다. 콘스탄틴은 감독들에게 명령을 하고 있었고 큰 교구의 감독들을 자 신이 임명하였다. 물론 기독교의 정치적 승리가 교인들 개개인들에게 정체성 혼돈을 가져왔다는 사실에 대한 역사적 입증을 보이기는 사실 힘이 드는 일이다. 왜냐하면 역사적 기록에는 교인들의 정체성 혼돈보다는 승리에 대한 기쁨과 자랑이 거의 모든 부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록 시간적으로 조금은 뒤이지만 어거스틴 시대의 세상 사람들이 느끼는 기독교인들의 모습은 달라져 있었다. 교회사의 입장에서 고대 로마사를 다시 돌아다보는 피터 브라운에 의하면 어거스틴이 젊은 시절 마니교에 빠진 이유는 더 앞선 시대에 사람들이 박해받고 있던 기독교에 들어갔던 이유와 같다고 한다.7) 마니교가 성실하게 살아 보려는 사람들에게 도덕적 대안이었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하면 기독교인들은 다른 사람들 눈에 더 이상 도덕적 성실함으로 보이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런 주장이 너무 지나친다고 하면, 하여간 기독교인이 된다는 말이 이전에 가지고 있었던 날카로움과 순수함이 무뎌져가고 있었다고는 말할 수 있다.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

이전에 기독교인이란 무엇을 의미했었는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와 함께 사는 것'이었다. 콘스탄틴 황제 이후도 이 것은 변하지 않았다. 변한 것은 이 말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였는가에 있었다. 이전에는 그리스도에 대한 공개적인 고백이 육체적 형벌과 죽음을 의미했기에 교인이란 모름지기 결사(決死)의 마음으로 사는 삶을 뜻했는데, 이제는 공개적인 고백을 안 하는 것이 형법 상 죄인이 되어 가고 있었다. 이전에는 말 그대로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이었다. 그럼으로 순교 자가 곧 기독교인이었다. 순교자가 아니더라도 최소한 고백자는 되어야 했다. 로마서에 나오는 구 절은-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로마서 10:9-10) - 이런 순교의 정황에 대입해서 이해해야 한다. 기독교인들에 게 죽음은 곧 육적인 죽음을 먼저 의미했다. 초대교회 교부들이 영지주의자들과 논쟁을 하면서 서로 싸우게 된 여러 문제 가운데 순교의 문제가 가장 감정적으로 예민한 문제였다. 이레니우스는 왜 영지주의자들 가운에 순교자가 없냐고 묻는 반면, 영지주의자들은 단순한 육체적 죽음이 어떤 영적인 유익이 있느냐고 되묻고 있다. 이레니우스의 글과 영지주의자들의 글을 비교해 보면 십자가의 죽음이란 구절이 어떻게 서로 다르게 이해되고 있었는지를 알게 된다.

교회는 하나님을 향해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사랑 때문에, 어디에 있는 교회든지 항상 많 은 순교자들을 아버지에게로 보낸다. 반면에 다른 집단들은 [역자:영지주의자들] 그들 가운데 이와 비슷한 사람으로 지적할 만한 이도 없을 뿐만 아니라 증인(순교자)을 낳는 것이 전혀 필요하지 않 다고 주장하기까지 한다. 우리의 순교자들과 함께 그 이름이 비난받는 것을 참은 사람이... 그들 가운데 기껏해야 하나나 둘 정도 예외적으로 있을 뿐이다.... 정의를 위해서 박해받고 모든 종류의 처벌을 참아내며 하나님을 향해 품고 있는 사랑과 그의 아들을 믿는다는 고백 때문에 죽음에 처 해지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비난을 오직 교회만이 순수함으로 견디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레 니우스의 [이단논박]에서)

반면에 영지주의의 문서는 기독교인의 죽음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보인다.

그들이[역자:기독교인] 어디로 가고 있는지, 또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모르면서 그들 자신을 무지와 인간의 죽음에 맡겨 버리고 [실제로는] 잘못 생각하고 있는데도 그들이 살 것이라고 생각하여 힘도 없이 말로만 '우리는 기독교인이오'라고 고백하면 된다고 마음 속에 생각하는 것은 크 나큰 어리석음이며, 이것이 오히려 황제의 지위와 권위를 강화시킨다.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의 무지 때문에 그들의 손아귀에 빠져 버린다.... 만약 하나님이 한 인간 희생물을 원하신다면, 하나님을 헛된 영광을 구하는 것일 것이다.... 오직 자신들만에 대한 증인이기 때문에 [속이 빈] 순교자들이다.... 그들이 죽음으로 완전하게 될 때 그들은 우리가 그 이름을 위하여 죽으므로 우리는 구원될 것이다 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문제들은 이 방법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그들은 생명을 주는 말씀을 갖고 있지 않다.8)

그러나 콘스탄틴 황제 이후는 이 고백과 순교는 현실적인 의미보다는 영적인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순교자로의 기독교인의 정체성은 한껏 고조되어 응집되어 있었는데 이제 그 응집이 서서히 풀어지고 있었다. 이 전에는 죽음을 앞에 두고 불안하고 걱정도 되었지만 이 극도의 불안 뒤에는 더 큰 크기의 자랑도 있었다. 버나드 맥귄이라는 학자는 기독교인들이 순교에서 그리스도인의 완성을 보았다고 설명한다.9) 초대교회의 또 다른 이의 글을 통해 육적인 죽음이 기독교인됨의 정체성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었는지 살펴보자:

당신들이 방해만 하지 않는다면, 나는 하나님을 위하여 기꺼이 죽어가고 있다고 모든 교회 들에 편지를 쓰고 또 모든 이들에게 알립니다. 나에게 '적합하지 않는 친절'을 베풀지 말아 달라고 당신에게 간청합니다. 내가 짐승들에게 먹히도록 그냥 두십시오. 짐승들에게 먹힘으로써 나는 하나님에게 도달할 수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밀알이고 사나운 짐승들의 이빨로 가루가 되어 그 리스도의 순수한 빵이 될지도 모릅니다.... 내가 불에 타고, 십자가에 못 박혀 사나운 짐승들에게 물리고 갈기갈기 찢겨져서, 뼈들이 조각나고 사지가 토막토막 나서 몸 전체가 부서지도록 그냥 두 십시오.... 바라건대 다만 예수 그리스도에게 가까이 가게 되기를!10)

또 "서머나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그나티우스는 순교가 곧 하나님에게 온전히 다가가는 길임을 재확인하고 있다.

"칼에 가까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 가까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야수들과 함께 있다"는 것은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가 그와 함께 고난받도록 오직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있게 하십시오.11)

순교자로서의 기독교인의 정체성 해체 문제는 세례에서도 나타나고 있었다. 세례는 기독인의 삶 의 먼 순례의 길에서 이 땅에서 받는 구원의 증표였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는다는 결단 을 모든 이에게 공포하는 것이고, 순교의 공동체는 자신들과 함께 죽고자 결심하는 이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함께 죽는 것이 가져다 줄 구원을 선포해 주었다. 세례를 위한 문답(catechesis)은 헬라어에서 '메아리'(echo)라는 뜻을 지닌 단어에서 파생한 말이다.12) 즉 교회의 가르침이 피문답 자의 마음에 남아 메아리 치게 해서 삶의 모든 분야가 이 메아리의 반영이 되도록 했다는 것이다. 세례는 새로운 삶의 시작 이전에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죽음의 시작이었다. Disciplina Arcani라는 규율로 성만찬에 세례 받은 사람들만 참석케 한 것도 세례를 받을 때 죽음을 각오했기 때문이었 다. 성만찬은 이제 우리에게 '상징'이거나 '기념'이지만, 초대 교회 사람들에게는 그런 상징적 의 미보다는 실제적인 피에로의 부름이었다. 기독교 역사가 항상 순교의 상황이 벌어졌던 것은 아니라고 증언해주고 있듯이 초대교회 사람들이 늘 죽음을 대면했던 것은 아니다. 때로 성만찬의 참여 는 육체적인 순교의 피보다는 도덕적 삶으로의 참여를 의미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성만찬과 세례 가 갖고 있었던 일차적 의미는 문자 그대로 십자가의 피에서 죽고 사는 것이었다.

기독교인의 정체성 해체는 예배 의식에서도 일어나고 있었다. 예배 의식 중 참회기도(Penance)가 들어오게 되었다. 인간의 연약함 때문에 모든 시대를 초월해 인간이 죄에 노출되어 있으며, 그러기에 죄에 대한 회개는 예배 시에 당연히 들어갈 순서이지만, 이 참회기도가 예배 의식에 들어오게 된 것은 일반적인 인간의 연약함 외에도 특별한 역사적 상황도 있었다. 초대 교회는 오늘 우리 시대와는 달리 세례 받고 난 후에 지은 죄는 용서받을 수 없다는 생각들이 있었다. 설사 교회가 유아세례에 대해 부정을 하지 않았다 해도 세례는 성년이 되어 순교의 각오가 되어 있을 때 받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죄를 짓게되는 것이 두려워, 특히 순교의 도상에서 배교하게 되는 상황이 두려워 세례를 뒤로 미루기도 하였다. 히브리서 6:4-6에서 -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 초대교회가 배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를 보게 된다. 물론 이 구절에는 '세례 받은 후'라는 표현이 나와있지 않지만 순교 등의 고난에서 성경의 가르침대 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지 못하고 배교한 사람들을 교회가 어떻게 대했는지를 볼 수 있다. 문제는 이렇게 배교한 사람들이 다시 교회로 들어왔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교회 정치와 신학은 어거스틴을 내세워 면죄부를 주지만, 예배 의식에서는 바로 이 참회기도를 통해 면죄부를 주게 되었다는 것이다. 인간의 연약함을 체휼한 예수님이 인간의 사정을 아시고 교회에 허락한 예식이라 할지라도 세례 받은 사람들이 죽음과 죄에 대해 싸웠던 그 열정이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콘스탄틴의 시대는 기독교에 결정적 정치적 승리와 함께 기독교인의 정체성의 부분적 해체를 주고 있었다. 교회 일각에서 승리의 감격이 서서히 희미해져 가고, 그리스도와 함 께 죽고 산다는 기독교인의 삶의 의미가 해체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교회의 또 다른 일각에서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다는 결사의 마음을 아직도 지니고 있었고, 이 결사의 응집의 해체를 거부하 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 가운데는 육체적 순교에서 얻었던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살아있는 순교에서 얻고자 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다시 들어간 사막에서 만들어진 새로운 천년

살아있는 순교를 원했던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상을 실현시킬 여러 가지 방법이 있었을 것이다. 이웃에 대한 봉사로 자신을 죽이며 헌신하는 삶의 방식이 있을 수 있었고, 제도권 교회에서 가르치는 데로 교회에 봉사하는 삶의 방식도 있었을 것이다. 아마 이 당시에 오늘 우리 시대의 평신도 운동이 있었더라면 순교를 원했던 많은 사람들이 이런 운동에 가담했을 것이다. 이런 저런 삶의 방식 가운데 사막 삶의 방식을 선택한 사람들이 있었다. 필립 황제의 새로운 천년맞이 축제가 기독교인들에게 가져다준 순교의 피도 다 잊어질만한 때에 또 다른 새로운 천년맞이를 위해 사막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이었다. 물론 또 다른 "새로운 천년맞이를 위한다"는 말은 순전히 1700년 이상 이 지난 지금의 내 생각일 뿐이다. 다시 사막으로 들어간 사람들이 의도적으로 새로운 역사 창출 을 위해서 사막으로 들어갔다는 말은 맞지 않는 말이다. 이들은 애초에 이런 역사에 남길만한 일을 하려고 한 일이 아무 것도 없었다. 오히려 자기 이름이 알려졌다는 것 때문에 죄스러워한 사람 들이었다. 자기를 죽이러 사막으로 들어간 사람들이었다. 자기 이름이 알려지는 것이 두려워 일부러 미친 사람 행세를 하고 살기도 했고, 아니면 아예 사람 없는 곳으로 도망하기도 했다. 그 곳에서 바람과 모래와 함께 살았다. 바람과 함께 살다가 자신들의 기도 소리와 찬송 소리가 바람이 되고, 모래와 함께 살다가 자신들의 몸이 죽어 모래가 되어 버렸을 뿐이다.

그럼에도 이들에게 대단한 역사적 의미를 부여하는 이유는 결과적으로 이들은 역사에 새로운 천 년을 만들어 내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지금의 시점에서 다시금 이들을 현재의 우리 역사에, 현재의 우리 삶에 다시 불러내는 이유는 우리 시대에 또 하나의 천년을 맞이하면서 예수의 사람들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이들에게서 배우고 싶기 때문이다. 이들은 기독교인이면 누구나 다시 생각해야 하고 다시 돌아보아야 할 영의 원천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폭력과 시샘과 경쟁과 저주의 사람 소리만 가득한 세상에서 이들이 함께 살았고 그렇게 변화되었던 그 바람 소리 를 듣고 싶고, 이들의 몸이 변화되어 만들어진 모래를 우리 마음의 땅에 뿌리고 싶기 때문이다. 사막으로 들어간 사람들을 4-5 세기의 사막 밖의 기독교인들이 열광적으로 찾아 나선 똑같은 이 유로 우리는 이들을 찾고 싶은 것이다.

 

1) Edward Gibbon,

2) 유세비우스

3) J. 포스터, 새롭게 조명한 초대교회의 역사, 심창섭과 최은수 역 (웨스터민스터 출판부, 1998), 106-7.

4) confessor, traitors

5)

6) Michael Grant, Constantine the Great: The Man and His Times (New York: Charles Scribner's Sons, 1993), 160.

7) Peter Brown,

8) "The Testimony of Truth," in The Nag Hammadi Library, James M. Robinson, ed., (San Francisco: Harper and Row, Publishers, 1988), 450-1.

9) Bernard Mcginn, martyrs Polycab

10) "Epistle of St. Ignatius," in J. B. Lightfoot and J. R. Harmer, eds., The Apostolic Fathers (Grand Rapids: Baker Book House, 1984), 151.

11) J. B. 라이트푸트와 J. B. 하머 편, 속사도 교부들, 이은선 역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7년 재판), 153.

12) Thomas M. Finn, Early Christian Baptism and the Catechumenate: West and East Syria, Message of the Fathers of the Church 5 (Cellegeville: The Liturgical Press, 1992),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