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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信學] 바울과 동성애

은바리라이프 2008. 5. 1. 20:48
[信學] 바울과 동성애 
로마서에 나타난 동성애를 통해 본 바울의 윤리


들어가는 말

  • 왜 바울은 동성애와 같은 고강도 윤리를 다룰 때 조차도 율법처럼 좋은 툴을[1] 사용하지 않는 것일까? 흔히 오늘 날의 교회가 실천 윤리 항목을 다룰 때 율법을 성문법전적으로 비교적 적절하게 활용하는 것에 비하면 그의 자제는 다분히 의도적인 것으로 보인다. 법전다운 지침 대신에 난데없이 등장하는 이 바울의 ‘양심’은 단순하고 일반적인 도덕율적 용언 차원을 넘어서 사실상 율법의 실천적 직능과의 유비를 시도하는 대체-도구로서의 많은 여운을 흘리고 있음을 본다.

  • 본 논문의 주논구는 바울의 ‘양심’이 그의 실천 윤리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 지와 또 그것이 궁극적으로 본문 12장에 와서 어떻게 투영되어 작동하는 지에 대해서 알아볼 텐데 이 작업을 위해서는 우선 몇 가지에 걸친 배경적 이해, 즉 사회적 배경으로서 ‘동성애’를, 율법 대체 배경으로서 ‘양심’을, 성령 사역 배경으로서 ‘몸'에 관한 담론을 제시하고자 한다. 다만 연구 진행에 있어서 ‘동성애’라는 당대의 시대적 상황을 맞서고 있던 바울과 오늘 날 현대의 그것을 맞닥뜨리고 있는 우리의 시대적 상황에는 많은 유사점을 간과할 수 없기에 시대 상황적 레이어를 우리에게 겹쳐 봄으로써 과연 오늘 날의 교회는 어떤 윤리로써 시대를 대처해야 할 지에 대한 청구로써 귀결짓고자 한다.

1. 사회적 배경

  • 우리가 궁극적으로 탐지해야 할 곳은 로마의 상황이지만 로마의 모든 분야가 그러하듯이 그네들의 성풍속과 관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그리스의 그것을 우선 알아보는 것이 필연적일 수 밖에 없다.

  • (1) 고대 그리스의 동성애

    그리스 시대의 동성애는 사회 일반적으로 보편화되어 있었다. 그들이 동성애에 관한 보편성을 갖기까지는 신화적인[2] 관념 구조와 철학적[3] 사상 구조 측면에 의해서도 지원을 받았지만 무엇보다도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위는 그들의 사회적 구조가 그것을 그렇게 자연스럽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지위가 낮고 천했던 가사 여성은 한낱 생산의 도구였던 까닭에 그리스의 어머니들에게는 자기의 자식을 가르칠만한 지식이 없었다. 따라서 그리스 성인남성들은 폴리스의 유지를 위해서 어린 소년들을 훈련시켜야 하는 교육 과제를 안고 있었고, 이러한 관계 속에서 소년들은 필요한 그들의 지혜와 경험과 노하우를 성인남성들로부터 전수 받고 자신들이 장차 자라나 폴리스의 공직을 맡는 데에 지장이 없도록 보호 받는 대가로 자신들의 몸을 허락하던 것, 그것이 바로 그리스의 동성애였던 것이다.

  • (2) 로마의 동성애

    로마가 그리스의 지대한 영향을 받았지만 그들의 동성애를 그렇게 공식적으로 드러내 놓고 수용했던 것은 아닌 것 같다. 공화정 당시엔 노예와의 관계 안에서만 성행하였고 연장자가 소년을 성추행 하면 처벌을 받는 등 공식적으로는 다소 제한적이었다. 과도기까지 이어진 동성애는 제정 말기에 이르러 부부애가 강조됨에 따라 점차적으로 동성애가 위축 되었고 스토아주의(금욕주의)에 의한 성윤리의 확산된 이후로는 출산 목적의 성관계만 허용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많은 이교도들로 구성된 기독교 공동체에 있어서, 개종자들의 성 정체성은 복음 윤리와의 접목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이었다는 W. Neil의 말은 과장이 아니었을 것이다.[4] 이러한 본능적인 수준에 근거해서 죄의식이 없는 이들의 문란한 성 정체성은 천민 계급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계급에 퍼져 있었는데 W. Barclay는 초기 15대까지의 로마 황제 가운데 14명이 동성연애자들이었다고 전하고 있으며 동성애란 그리스와 로마만의 독점품이 아니라 셈족에게도 흔했었다고 C.EB. Cranfield 역시 전한다.[5]

  • (3) 구체적인 사료들

    보다 밀도있는 바울 시대의 정황을 알아보기 위해 당대 非크리스천 문헌들의 자료를 통해서 살펴보면,

    ① Seneca(4B.C.-65A.D.)

    Nero황제[6] 의 가정 교사이자 49A.D엔 집정관을 지냈던 Seneca의 「Moral Epistles(도덕적 서한집)」에는 당시의 사치하고 방탕한 사람들의 노예 착취에 대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개탄스럽게 묘사하고 있다.
    • “…술 시중을 드는 노예는 여장을 해야 하고 나이가 든 남자도 소년처럼 행동해야 하는 괴로움이 있다…. 그는 마치 여자처럼 수염을 기르지 못하고 머리를 이쁘게 빗어 묶어야 한다. 그는 밤을 새워가면서 주인이 술이 취해 골아 떨어질 때가지 술시중을 들면서 그의 주인의 성욕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성의 놀이개가 되어야만 한다”[7]

  • ② Plutarch(46A.D.-120A.D.)

    아테네의 사정을 잘 알 뿐만 아니라 애굽 여행도 하였고 또 로마에서 강연도 하였다는 헬라 전기작가였던 Plutarch는 그의 「Dialogue on Love(사랑의 대화)」라는 저서에 등장하는 한 화자의 대사에서 다음과 같은 대목을 포함한다.
    • “…만일 남성들과의 연합이 애인의 부드러움을 파괴하지 않는다면 남녀간의 사랑은 정상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이므로 합리적인 것이고 또 사랑에서 우정이 발전할 수 있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남성들과의 결합은…(사랑과 생식을 관장하는 헬라의 여신인) 아프로디테의 총애를 잃고 미움을 받을 것이다…”[8]

  • ③ Dio Chrsostom(40A.D-112A.D)

    도미티안 황제 통치 초기에 로마로 추방 당했던 Dio는 그의 저서에서,
    • “…비록 여성들이 많지만 이 남성들은 음탕함과 불법을 통하여 남성들로부터 만들어진 여성들을 갖기 원하여 남성들을 거세하였다. 이렇게 만들어진 불행한 종(Breed)의 인간은 여성 보다도 더 연약하고 더 여성다웠다.” [9]
  • 라고 전하면서 다른 곳에서[10] 좀더 구체적이고 유명한 사례로써 67A.D.에 네로는 그의 두 번째 아내 Poppaea Sabina가 죽은 후에 그의 남자 애인 Sporus를 거세시켜서 그의 이름을 Sabina라고 고쳐서 그와 정식 결혼을 했다고 전한다.

2. 非 크리스천 도덕관 배경

  • (1) Seneca(4B.C.-65A.D.) 와 Plutarch(46A.D.-120A.D.)

    V.P. Furnish는 이상의 사료들을 인용하면서 Seneca는 동성애를 추악한 형태로써 하는 하나의 ‘착취’로 보았으며 Plutarch의 텍스트에서도 역시 “자연스럽지 않은 것”에 대한 전형적인 스토익적 반감이 반영되고 있음을 감지해내고 있다.[11]

  • (2) Dio Chrsostom

    V.P. Furnish의 연이은 분석에 나타난 Dio의 동성애에 대한 도덕관은 좀더 상세하고 투철한 편이다. 근본적으로 Dio는 Seneca처럼 동성애의 본질을 ‘착취’라고 동일하게 정의했으나 우리가 다소 관심 있게 봐야 할 성윤리적 관점에서는 “절대적으로 만족할 줄 모르는 정욕의 표현”으로 이해하면서 그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정의를 내놓는다.
    • “…그래서 이런 남성들은 좀 정복하기 어려운 남성들을 자기 성욕을 충족시킬 대상으로 삼고 싶어한다. 이런 남성들은 젊은 남자들과 좀처럼 접근하기 어려운 남성들과의 성적 유희를 즐기려고 한다….”[12]
  • 전자 두 사람이 하나의 ‘착취’로서, ‘성개념’에서는 다소 빗겨나간 포괄적 도덕 측면에서 다루고 있는 것에 반해, Dio의 정의는 동성애자들의 정신적이고 심리적 관점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만하다.

3. 바울的 배경

  • 이상이 바울 外的 배경이라면 우리는 보다 바울的인 상황을 인식하기 위해 다소 동성애 外的인 사안에 대해서 다룸이 불가피 하다. 우선 서론에서 밝힌 바와 같이 그가 대체-성문법전으로써 손에 쥔 ‘양심’에 대해서 그러하고, 또 그 양심과 본문인 12장과의 연결점 역할을 하는 그의 ‘몸’에 관한 관념적 배경에 대해 고찰함이 그러하다.

  • (1) 바울의 양심

    ‘양심’에 관한 다양한 견해들을[13] 볼 때 필경 양심은 바울의 윤리 적용에 있어서 중요한 가늠자로 등장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서론에 언급한 것과 같이 바울은 로마서 첫 장에서 자신이 정의한 죄들을[14] 향한 포문을 엶에 있어서 유대주의로 보나 복음 주의로 보나 생소하기만 한 이 ‘양심’이라는 가늠자를 우리 가슴에 겨누고 있는 것이다.[15] 더군다나 동성애와 같은 강도 높은 성윤리를 다룸에 있어서만 볼 때도, 보다 명백하고 파괴력이 강한 법전은 뒤로한 채 어쩌면 그 연관성마저 모호한, 양심이라는 포괄적 덕 적용으로써 귀결을 맺고 있음은 위에서 전술한 시대적 상황을 감안할 때 더더욱 의외성이 짙다. 법이 아닌 덕으로 모든 것을 더 잘 교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아니면, 장차 서술할 율법에 관한 이해의 공격적 교정 작업을 염두에 둔 까닭에 서술의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일부러 피해간 것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그가 말하는 양심이란 정말로 하나님의 법전을 능가한다는 제스쳐일까? 한마디로 말해서 그의 말에 의하면 동성애란, 하나님을 알만한 양심을 저버렸을 때에 하나님의 최종적인 처벌로써 내려지는 것이라고 한다.(롬 1:26-28) 물론 로마라는 특수성을 감안하여 이방인에게 있어서 율법의 효용 가치는 유대인과[16] 같은 감도로 와 닿지 않을 것을 감안한 사전 포석일 수도 있지만 정승우의 「Paul, Jesus and the Roman Christian Community」에서 소개되는 2가지의 상황 설정에서도 로마서가 유대인을 결코 배제하고 쓴 책이 아님을 볼 때 바울이 언급하는 양심의 작용은 이방인뿐만 아니라 유대인도 그 대상에 넣고 있음은 물론 상당한 적극성을 띤 진술이라 할 수 있다.[17]
    바울의 서술에 있어서 ‘양심’은 그만큼 중요한 지위를 획득하고 있지만 정작 양심이라는 단어는 히브리 어휘로의 번역이 불가능하다. 이 때문에 V.P Furnish는 바울이 말하는 양심은 전적으로 헬레니즘 세계 속에서 당시 일반적으로 통용되었던 개념의 의미를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지만[18] 그것은 바울의 인간학 곧, 몸에 대한 그의 인지 개념을 간과했기 때문에 안게 되는 오해로 보인다:
    희랍어의 양심(συνειδηιs)이란 단어가 히브리 어휘 가운데 없다고는 하지만 구약 성서에서 곧잘 인용되는 명시적 언급인 사무엘상 24:5의 ‘that David's heart smote him(Kjv, 마음을 친다)’와 시편 25:17 ‘The troubles of my heart(Kjv, 내 마음의 고통)’ 이라는 표현들 외에도 금번 연구에서 발견한 이들보다 훨씬 더 확실한 법전적 의미를 동반하는 예시로서 사르밧 과부의 진술 부분을 제시하는 바이다. 열왕기상 17:18에 나오는 이 “to call my sin to remembrance”라는 절을 통해서 우리는 그 자신의 내면 안에서 이미 법작용을 일으키고 있는(롬2:15) ‘양심’의 구약적 개념을 뚜렷하게 청취할 수 있다. 따라서 여기서 채택되고 있는 ‘양심’은 V.P Furnish의 주장처럼 헬라의 전유물이라고만 볼 수는 없는 것이며, 더구나 동성애와 같은 강도 높은 시대적 변이를 상대로 맞서야 하는 바울에게 있어서는 결코 소극적이지 않은, 대단히 적극적이면서도 의미심장한 도구(Tools)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V.P. Furnish가 그 어휘 안에서 그 증거를 찾을 수 없었던 까닭은 히브리 개념의 육체에 대한 이해를 간과했기 때문인 것으로 사료된다.

  • (2) 바울의 몸

    히브리적 인격의 관념은 ' Incarnated Soul(몸으로 변한 혼)'이 아니라 ' Animated Body(산몸)'이었다. 즉, 사람이 몸을 가진 것이 아니고, 사람이 곧 몸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함께 있다’, ‘함께 본다’는 말로서 자기 곁에 증인으로 하나님이나 어떤 초월한 존재가 함께 있다는 ‘양심’이라는 어휘의 히브리적 이해는 헬라적 개념과는 달리, 그 ‘함께 아는 자’에 대해 결코 내 몸과 분리하여 생각하지 않았을 개연성이 크다. 해부학과 자연과학에 근거를 둔 헬라적 개념과는 달리 히브리인들은 인체나 심리학 견지에서는 자아를 그렇게 분리해서 생각하지 않았다.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었던(빌 3:5) 바울의 몸에 관한 개념은 이와 같은 히브리적 관념들이 곳곳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바울의 양심은 헬라 사고를 반영한 범신론적 관념이 아니라 히브리적 관념에 입각한 것이었기에 능히 율법과도 유비될만한 실천 윤리 가늠자로서 그렇게 들고 나올 수 있였던 것이다.
  • (3) 바울의 동성애

    V.P. Furnish가 바울의 동성애관을 결국 당대 문헌, 철학가들의 그것과[19] 대동소이한 헬라적 도덕관 정도로 주장하는 것은,[20] 곧 바울이 동성애를 단지 그들처럼 “착취”, “자연스럽지 않은 것” 등의 지극히 자연학적 관점에서 다루고 있다는 것인데 과연 그러한가? 그것은 심각한 오판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바울은 거듭되는 촉구를 통해(롬 2:14-5) 양심에 대한 이해를 어디까지나 율법의 유비 기능으로써 분출하고 있지, 결코 자연법에 입각한 창조주와의 도덕 관계 따위의 소극적 기능으로 소개하고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바울, 그의 성(性)에 관한 견해는 매우 독특하다.
    고린도전서 6:18는 성적인 범죄에 대한 타락은 ‘몸’과 직결되어 있다는 그의 관념을 엿볼 수 있는 아주 좋은 대목인데, 그가 말한 “몸 밖에 있는 죄”와 “몸 안에 있는 죄”의 차이점이 과연 무엇일까? 이것은 죄의 경중에 대한 언급이 아니라 죄의 성질에 대한, 대단히 밀도 높은 고찰이자 교훈이다. 다시 말하면, 바울은 이 구절을 통해서 죄에 관한 ‘몸’의 감각 곧, ‘몸’의 반응에 대한 것을 설명하고자 하는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서 바울은 윤리적 가르침을 전할 때에 자연학적인 추론으로 다가간 것이 아니라 구약의 모든 율법의 성문법전들이 담아내고 있는 현시적인 죄의 감각을, 자신 만의 보다 근원적인 대체-법전 도구인 바로 ‘양심’에 이처럼 고스란히 재구성하고 있다는 얘기이다.
    V.P. Furnish는 또한 로마서의 용도가 이방인 수신 전용이 아닌 “모든 사람”이라는 상황 전개를 들어서[21] 바울의 동성애 관련 구절들을 명시적인 동성애 교도 목적구가 아닌 우상숭배에 관한 포괄적 목적구 곧, “동성애는 우상 숭배로 이끄는 악들 속에 포함된 성적 부도덕의 하나”쯤으로 논구를 흐려 놓고 있다는 점이다. New Perspective적 관점에서의 로마서 수신자가 분명 “모든 사람”이 될 수는 있다는 점에는 동의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유대와 이방”이라는 1차적 교착지를 결코 초월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바울이 로마서를 통해서 말하는 “모든 사람”이란 자연법에 입각한 “모든 사람”이 아니라 율법을 믿음으로 투쟁해서 완성해내는 “모든 사람”이기 때문이다.
    롬 1장에서 밝히고 있는 바울의 교도를 다시금 새겨 보면 “핑계치 못할” 그것을 인하여 더러움과(26) 부끄러움과(26) 상실한 마음대로(28) “내어 버려 둠(방치)”을 당하게 되고 그 내어 버려 둠의 결국에 맞이하게 되는 것이 바로 순리를 역리로 바꿔 쓰는 여성 동성애(26)와 남성 동성애(27)라는 최종 귀결이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이해하고 있는 동성애이다.
    결코 자연학에 근거를 두었다거나 헬레니스틱 도덕관에[22] 입각한 윤리가 아니라 전통적인 율법관에 입각한 매우 강도 높은 바울 만의 독특한 교도 방법이었던 것이다.

4. 동성애자들의 성서 이해 배경

V.P. Furnish의 이러한 경향은 그가 의도했든 아니했든 현대 동성애자들 및 친동성애자들에게 큰 지지대로 작용하고 있다.
대부분의 크리스천들은 동성애를 금하는 가장 손쉬운 성경구절로서 강력한 형벌 내용을 담고 있는 레위기 18:22이나 20:13를 떠올리지만 레위기에 나타나는 금지법은 그것을 하나의 성결법이라는 큰 테두리로 이끌어냄으로써 ‘동성애’에 집중된 시계를 흐뜨러 놓는다. 그런가 하면 소돔에서의 에피소드는(창 19) 그들이 “남자”를 끌어내라고 한 것이 아니라 “천사”에 대한 음욕이었다는 식의 호도를, 사사기의 그것(삿 19) 역시 특별히 동성애를 겨냥한 심판이 아니라 기브아인들의 비열함, 잔임함, 학대에 대한 모던한 심판이었다는 해석으로 무력화 시키고 있다. 다만, 몇 가지 실사적인 근거로 인해, 의외로 친동성애자들의 입장에서 가장 부담을 느끼는 구절이 바로 전장에서 살폈던 로마서 1:18-32임이[23] 확실하지만 이 역시 V.P. Furnish가 제공한 자연법에 입각한 프리즘을 통해서 “동성애”라는 타겟을 비켜 나가고 만다.

5. 바울의 교훈

  • (1) 위치를 통해 알아본 롬 12장의 의미

    로마서 12장 이하의 실천 도덕론은 1장18절 이하의 죄의 문제와 대조하여 읽어야 한다는 야나이하라 다다오의 주장[24] 보다 훨씬 구체적인 대조를 펼쳐 보이는 V.P. Furnish는 로마서 1장28절의 “상실한 마음(αδoκιμοs νουs)”과 2장1절의 “마음의 갱신(η ανακαινωσιs τον νοοs)”을 비교해 보임으로써 전장들과의 인과관계를 비교적 명확히 발전시킨다.[25] 또한 일본의 개화 사고적 특색이 적극 반영되고 있는 우찌무라 간조(1861-1930)의 분석에서도 8장을 로마서 전체의 클라이막스에 위치 시킴으로써 이와 같은 윤리적 연관성을 나타내고 있지만, 이들 모두가 한결같이 6장의 윤리적 교훈에 이어 왜 12장에 가서 또 반복되는 지와 (의도적 분리라면) 이 두 탭 간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에 대한 명확한 언급이 없다.
    통상 그 이전 절구들의 의미가 차순 장 접속사에 과도하리만치 무게감이 실리는 바울의 상습적인 서술 방식으로 미루었을 때, 6장을 가이드하고 있는 ουν(then, 그런즉)이 죄로부터 떨어져 나온 교리적 의지 장(章)임을 받고 있다고 보는 바이며, 12장의 ουν(then, 그러므로)에 대해서도 “1장17절 이후부터 시작되는 교리 전체 부분을 받는”[26] 접속사라는 H.A.W. Meyer와 우찌무라 간조의 추상적인 배치 보다는로마서 최고 절정고조인 8장 성령의 구체적 사역과 연결된, 보다 명확한 구간이라고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다시 말하면 6장은 죄를 뚫고 지나온 그리스도인의 자세를, 12장은 죄를 뚫고 지나온 그리스도인이 성령과의 교착 과정을 거쳐서 도달해야 하는 보다 성숙된 자세에 관한 소개를 담고 있는 것이다.

  • (2) 산 제물과 지체

    성령이라는 특정 위격을 가현 예수와 혼돈하는 R.E. Brown과[27] 같은 학자들의 관념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문제이겠지만, 바울의 인간학적 용어인 몸과 지체에 관한 사용은 대단히 일관성이 수반된다.
    V.P. Furnish는 12:1-2을 1:16-17에서 강조된 바 있는 주제를 다시 확인하는 것뿐이라고 주장하지만[28] 이는 단순한 교리적 재확인이라기 보다는 성령의 보다 현상적인 구체적 사역으로 접근하는 것이 맞다.
    바울의 전 서신에 걸친 표현 양식 중의 하나인 ‘몸’이라는 주제어는 단순한 도덕적 협동을 수식하는 용어가 아니라 8장에서 언급한 성령의 구체적 사역의 방식에 대한 현상학적인 설명인 것이다.
    바울에게 있어서 “동성애”는 그리스인들의 관념 처럼 선천적인 것도 아니고 사회학적인 병리 현상도 아니며 지극히 히브리적인 개념의 “몸”을 중심으로 발생하는 신각적인 병리 현상이다. 인간의 “몸”은 양면성이 있어서 그 “양심”이 상실됨에 따라 (동성애 같은) 최종적인 죄를 향한 적극적인 병기가 되기도 하지만, “몸”과 “성령”이 어떻게 구체적인 관계를 이루느냐에 따라서 “산 제사”를 겸한 “의의 병기”로 화할 수 있는 것이다.
    바울은 이러한 거듭난 “몸들”을 하나로 보았다. 지극히 히브리적인 개념에서다. 해부학이나 자연 과학에 팽배한 헬라 사상에서는 몸은 자기를 남과 구별하는 경계적 개념이고 도 그것은 자기를 다른 자아와 또 다른 물체와 구별하는 경계였지만 히브리적 사고의 바울에게 있어서 몸의 개념을 한 개체를 다른 개체와 구별한다는 것보다 서로의 사귐에서 보았다. 개체는 하나님께 대한 전체적인 책임에서 존재하고(렘 31:29; 겔 18장 등) 따라서 인격은 본질적으로 사회적이다. 그는 하나님께 대한 관계에서 다른 인격과 사귄다고 본 것이다.[29]
    따라서 바울이 궁극적으로 제시하는 12장의 윤리는 바로 우리 “몸”에 관한 이야기인 것이다.

나가는 말

  • 바울이 율법대신 양심을 들고 나간 이유는 당시 사회를 상대하기에는 그게 가장 최신 무기였기 때문이다. 양심도 깨우치지 못한 “자연스럽지 못한 자”들에게 레위기 같은 성문법전이 효력을 발휘할 리가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을 것이다. 바울은.
    오늘 날 교회는 어떤 견지에서 바울과 같은 위치에 서있음을 직시해야 한다. 바울은 철학과 사회학적 지지를 받는 “동성애” 앞에 서 있었지만 현대 교회는 인권과 과학의 지지를 받는 “동성애” 앞에 서 있다.
    바울이 토라 대신 양심을 과감하게 택했던 것이라면, 우리의 시대에는 무엇을 무기로 들어야 할까.

※ 참고 자료

  • 이윤기. 「그리스 로마 신화」 서울: 웅진닷컴, 2000
  • 최세창. 「데살로니가전서」 서울: 글벗사, 1998
  • 야나이하라 다다오. 「로마서 강의」 최현 역, 서울: 기독교문화사, 1988
  • 최세창. 「로마서」 서울: 글벗사, 1998
  • 우찌무라 간조. 「로마서 연구 상권」 김유곤 역, 서울: 크리스챤서적, 2002
  • 우찌무라 간조. 「로마서 연구 하권」 김유곤 역, 서울: 크리스챤서적, 2002
  • 시오노 나나미. 「로마인 이야기 7」 김석희 역, 서울: 한길사, 1998
  • V.P. Furnish. 「바울의 네 가지 윤리적 교훈 : 결혼, 동성애, 교회와 여성, 정치」 서울: 종로서적, 1994
  • 서중석. 「바울서신해석」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8
  • V.P. Furnish. 「바울의 神學과 倫理」 김용옥 역, 서울: 大韓基督敎出版社 , 1982
  • R.E Brown, 「요한 공동체의 역사와 신학-사랑받는 제자 공동체」 최흥진 역, 서울: 성광문화사, 1994
  • 김복래. 「서양 생활 문화사」 서울: 대한교과서, 1999
  • 전경연, 문상희, 이상호, 박창환, 김철손. 「新約聖書神學」 서울: 기독교서회, 1963
  • Daniel A. Helminiak. 「성서가 말하는 동성애」 김강일 역, 서울: 해울, 2003
  • Eric Marcus. 「커밍아웃, 동성애자에게 누구나 묻게되는 300가지 질문과 대답」 컴투게더 역, 서울: 박영률출판사, 2000
  • 플라톤. 「향연, 사랑에 관하여」 박희영 역, 서울: 문학과지성사, 2003
  • 플라톤. 「향연, 사랑의 신 에로스에게 희곡(2막 4장) 」 강월도 역, 서울: 예니출판사, 1997
  • 정승우. 「Paul, Jesus and the Roman Christian Community」 서울: CHRISTIAN HERALD, 2005





[1] 바울은 자신의 저서들 안에서 가능한한 믿음과 대비된 율법의 직능적인 부분만을 강조할지언정 성문법전으로서는 거의 활용하지 않고 있다.

[2] 플라톤은 아프로디테를 천상과 지상에 각각 존재하는 둘로 규정하고 어머니 없이 우라노스에게서 나온 천상의 아프로디테는 오직 남성적 요소만 갖고 있는데 그것이 소년에 대한 사랑이며 지상의 아프로디테는 여성과 남성을 모두 가지고 있기 때문에 순수하지 못한 사랑으로 여겼다. Platon, 「향연, 사랑의 신 에로스에게 희곡(2막 4장)」박희영 역 (서울: 문학과지성사, 2003), 59-61, 이윤기, 「그리스 로마 신화」(서울: 웅진닷컴, 2000), 90-146

[3] 여자와의 사랑은 ‘아기를 낳는다'는 불순한 목적이 있는 사랑이지만, 소년애는 순수한 사랑, 그야말로 사랑을 위한 사랑(l'amour pour l'amour)이기 때문이라는 관조적 개념은 자웅양성으로 불리었던 혼합적 존재가 반으로 나뉘어 남자 혹은 여자가 되어 간통과 같은 천한 죄를 범하는 부류가 된다는 사상은 근거로 하고 있으며 (자웅양성의 혼합적 존재가 아닌) 순전한 성을 가진 사람들만이 동성애를 하게 되는 것인데 이러한 관점에서 소년애를 특별한 남성다움으로 제시한다. 결국 이러한 개념은 “여자들을 좋아하고 아기를 낳고 싶으면 아내에게로 가라. 여자와 자고 싶으면 노예나 창녀에게로 가라. 진정한 사랑을 하고 싶다면 미소년에게로 가라.”라는 철학적 멋스러움으로 작용했고 이것이 곧 그리스인들의 성관념이었던 것이다. Platon, 「향연, 사랑에 관하여」박희영 역 (서울: 문학과지성사, 2003), 87, Platon 「향연, 사랑의 신 에로스에게 희곡(2막 4장) 」강월도 역 (서울: 예니출판사, 1997)

[4] 최세창, 「데살로니가전서」(서울: 글벗사, 1998), 124-5

[5] 최세창, 「로마서」(서울: 글벗사, 1998), 106

[6] Nero황제는 동성애뿐만 아니라 生母 소 아그리피나와의 불륜의혹에 이어 결국 그녀를 참살하고 처 옥타비아와 이혼하고 포파이아와 결혼하기 위해 옥타비아를 간통죄로 살해하는 등 성적으로 가정 부도덕한 황제였다. 김복래, 「서양 생활 문화사」(서울: 대한교과서, 1999), 134

[7] Seneca, Moral Epistles XLVII “On Master and Slave” 7

[8] V.P. Furnish, 「바울의 네 가지 윤리적 교훈 : 결혼, 동성애, 교회와 여성, 정치」(서울: 종로서적, 1994), 83

[9] Dio Chrsostom, Discourse LXXVII/LXXVIII. 36

[10] Dio Chrsostom, Discourse XXI. 6-10

[11] V.P. Furnish, 「바울의 네 가지 윤리적 교훈」, 83-4

[12] Dio Chrsostom, Discourse VII. 151-2

[13] J.S. Stewart “모세의 율법보다 완전하지 못한 덜 구속적인 명령”, R. Bultmann “구약성경에서는 낯선 것”, G. Bornkanm “양심의 결정은 하나님의 판단과 일치하지 않는다” 최세창, 「로마서」, 135

[14] V.P Furnish는 바울의 죄목록을 즉흥적인 것으로 이해하지만, 우찌무라 간조는 바울의 죄목록을 보다 구조적으로 잘 분해 해놓고 있다. V.P. Furnish, 「바울의 네 가지 윤리적 교훈 : 결혼, 동성애, 교회와 여성, 정치」, 101, 우찌무라 간조, 「로마서 연구 상권」김유곤 역 (서울: 크리스챤서적, 2002), 133

[15] 몇몇 학자들은 이와 관련하여 범신론의 차용으로까지 언급을 한다.

[16] 2장17절에서는 유대인 크리스천들을 대상으로 훈계하고 있고, 11장13절에서는 이방인 크리스천들을 대상으로 지침을 전할고 있다. 서중석, 「바울서신해석」(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8), 287

[17] 로마서의 전반적 수신자가 적어도 非유대인 군 전용이 아님을 감안하면 굳이 이방인에 대한 포석용으로써의 대체 율법이 아닐 텐데 그는 가능한한 토라로서의 인용을 자제한다

[18] V.P. Furnish, 「바울의 神學과 倫理」김용옥 역 (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68), 251

[19] Seneca, Plutarch, Dio Chrsostom과 같은 非크리스천들이 동성애를 대하는 관점은 the law of nature(자연법)에 입각한 것이었는데 V.P. Furnish는 바울의 윤리관도 이러한 경향 중의 하나로 보는 것이다. V.P. Furnish, 「바울의 네 가지 윤리적 교훈」, 89

[20] V.P. Furnish, 「바울의 네 가지 윤리적 교훈」, 100-1

[21] V.P. Furnish, 「바울의 네 가지 윤리적 교훈」, 103

[22] V.P. Furnish, 「바울의 네 가지 윤리적 교훈」, 104

[23] Daniel A. Helminiak.,「성서가 말하는 동성애」김강일 역 (서울: 해울, 2003), 95

[24] 야나이하라 다다오, 「로마서 강의」최현 역 (서울: 기독교문화사, 1988), 229

[25] V.P. Furnish, 「바울의 神學과 倫理」, 201

[26] 우찌무라 간조, 「로마서 연구 하권」김유곤 역 (서울: 크리스챤서적, 2002), 164-5

[27] R.E Brown, 「요한 공동체의 역사와 신학: 사랑받는 제자 공동체」최흥진 역 (서울: 성광문화사, 1994), 165

[28] V.P. Furnish, 「바울의 神學과 倫理」, 105

[29] 전경연, 문상희, 이상호, 박창환, 김철손, 「新約聖書神學」(서울: 기독교서회, 1963), 198

| 기독논문 | 2007/05/01 10:43 P | 스크랩 | 이 글에 대한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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