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소문으로만 들을때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2002-08-27 |
내가 아주 어렸을 때에 나는 꽤나 질문하기를 좋아하는 아이였다고 한다. 어쩌다가 나를 데리고 외출을 하게 되면 어머니는 쉴새 없이 쏟아져나오는 내 질문 때문에 몹시 시달리셨던 모양이었다. 『엄마, 전차는 어떻게 가는 거야?』 『전리고 가지』 『전기는 어디서 나는 거야?』 『발전소세서 보내주지』 『발전소는 뭐하는 데야?』 『전기를 만드는 데지』 『전기는 뭘로 만들어?』 이렇게 끝없이 질문이 계속되다보면 결국 어머니는 대답이 막히게 되고 속상해지는 것이다. 하도 이런 질문에 시달리다 보니까 어떤 때는 골목으로 끌고 들어가서 군밤을 쥐어박으며 그따위 질문을 해대면 다시는 데리고 나오지 않겠가고 염포를 놓으셨다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다음 번 외출 때에는 또 그런 어려운 질문들을 퍼부어서 어머니를 난처하게 만들곤 했다는 것이었다. 『엄마, 하늘은 왜 파래?』 『높으니까 파랗지』 『하늘은 왜 높아?』 『하나님은 하늘에서 왜 안떨어지셔?』 『······』 결국 어머니의 대답이 막히면 나는 골목에 끌려 들어가서 군밤을 먹어야 했다. 어머니가 내 질문들을 몹시 귀찮아 하기도 했지만 어머니의 지식이 나를 만족시킬만큼 충분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부터는 점점 어머니께 질문하는 것보다는 친구들에게서 얻어듣거나 혼자서 상상하는 버릇이 생기기 시작했다. 『야, 기차는 어떻게 여러개가 붙어서 가지?』 『야 그것도 몰라? 기차에는 지남철이 있어서 서로 철거덕 붙어서 다니는거야』 그럴 듯한 생각이었다. 그 후로 나는 한동안 기차에는 자석이 있어서 서로 붙어다니는 줄 알았던 것이다. 그렇게 주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한 의문을 푸는 데는 어머니의 지식에도 친구들의 지식에도 한계가 있었다. 신앙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어려서부터 교회에 다니기는 했지만 마음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많은 의문들에 대해서 소문으로만 그 해답을 듣고 다녔던 것이다. 그러나 소문으로만 얻었던 해답들은 또 그 해답끼리 서로 뒤엉키고 모순되어서 하난도 내게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었다. 마침내 나는 그 소문들 속에서 아무런 해결도 얻지 못하고 교회를 떠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 덜미를 잡혀서 다시 성경을 읽게 되면서부터 나는 문제가 생겼을 때에 하나님께 그것을 직접 질문하기로 작성하였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신다면 내가 하나님께 질문했을 때 답변을 해주실 것이었다. 만일 내게 어려운 문제가 생겨서 하나님께 질문했을 때 아무런 답변도 해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말로 우리를 지으신 분이라면 그 자녀의 질문에 답변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것이 난처한 질문에 답변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것이 난처한 질문일 때에 군밤 한대를 때리는 한이있더락도 뭔가 반응이 있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나의 수많은 질문들은 시작되었다. 나는 성경을 읽다가 이해할 수 없었던 문제, 믿기가 어려웠던 문제, 수긍할 수가 없었던 문제들에 대하여 쉴 새 없이 하나님께 질문을 했다. 그기고 답변해주지 않으시면 거기서 공부를 멈추겠다고 떼를 썼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하나님께서 내 모든 질문에 조금도 귀찮아하시지 않고 하나하나 일일이 다 답변을 해 주셨다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내가 가졌던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들은 모두가 다 내 소설의 소재가 되었다. 그 모든 답변들마다 아름다운 소설이 되어서 사람들 앞에 나타났던 것이다. 사복음서를 읽으면서 내가 질문했던 모든 의문들·····왜 공관복음에는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을 갈릴리 바닷가에서 처음 만난 것으로 되어있는데 요한복음서에서는 요단강가에서 처음 만난 것으로 되어 있을까? 왜 예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갔다는 구레네의 이야기가 요한복음에는 나오지 않는 것일까? 왜 나사로의 부활 사건은 공간복음서에는 나오지 않고 요한복음에만 기록되어 있는 것일까? 왜 예수께서는 그 어머니를 요한에게 부탁했던 것일까? 꼬리를 물고 이러나는 그 수많은 의문들을 나는 하나님께 직접 질문했고 하난님께서는 내 질문에 일일이 답변해주셨다. 결국 그 많은 의문들이 「사도 요한」이라는 한 야심적인 인물을 중심으로 얽혀 있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고 내가 알아내었던 사도 요한의 수상한 행적과 그 만년의 고뇌는 후에 소설<제국과 천국> 다른 소설들도 다 비슷한 과저을 거쳤다. 누가복음 3장에 나오는 예수의 족보에는 아르박삿과 셀라의 사이에 가이난이라는 이름이 나오는데 어째서 창세기11장에 나오는 아르박삿 가문의 족보에 가이난이 나오지 않은 것일까······? 그 의문을 추적해 들어가다가 고대의 셈 집안이 아라랏산에서 메소포타미아로 내려오면서 벌어졌던 갈드의 모습의 광맥이 결국<홍수 이후>라는 네권짜리의 대하소설로 엮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김일성님의 "성경대로 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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