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역사/성경세계사

제목 : 우리 시대의 나사로들

은바리라이프 2008. 5. 8. 20:58
제목 : 우리 시대의 나사로들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2002-04-01
천성을 향해 가는 성도들의 행진에 있어서 이러한 성취의 시기가 가장 위험한 관문이다. 고난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회개를 통해 은혜와 은사를 받아 열심히 기도하고 일할 때에는 그런대로 믿음의 용사였던 성도들이 미처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이 풍요의 덫에 걸리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25세에 유자왕이 되어 산당들을 없애고 우상들을 깨뜨리며 성전을 수리하고 유월절을 부활시키는 등 하나님 앞에 정직한 일을 하여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던 히스기야의 실수와도 같은 것이다.
그는 앗수르의 산헤립왕이 쳐들어와 예루살렘 성을 포위했을때 하나님께서 눈물의 기도를 드려서 적군을 전멸하게 했으며(와하 19:35) 그가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에 벽을 향하여 울며 기도하여 그 수명을 15년이나 더 연장받기도 했다(왕하 20:6).
그러나 히스기야는 이렇게 하나님께 인정받고 모든 길이 평탄하여 졌을 때에 그만 마음이 해이해져서 하나님께 은혜 갚는 것을 잊었던 것이다.
『히스기야가 마음이 교만하여 그 받은 은혜를 보답지 아니하므로 진노가 저와 유다와 예루살렘에 임하게 되었더니 히스기야가 마음의 교만함을 뉘우치고 예루살렘 거민들도 그와 같이 하였으머로 여화와의 노(怒)가 히스기야의 생전에는 저희에게 임하자 아니하니라』(대하 32:25-26)
한국이야말로 하나님께 엄청난 은혜를 받은 나라이다. 일본의 오랜 수탈 끝에 다시 6·25전쟁으로 온 나라가 하나님없는 붉은 군대에 먹히게 되었을 때에 하나님은 여러 나라의 군대를 동원하여 한국을 구원하였고 이 나라가 절망과 굶주림의 골짜기를 헤메고 있을 때 하나님은 또 미국의 교회들을 움직여서 식량을 보내주게 하셨다.
그 때에 미국 교회들이 보내준 밀가루와 우유를 먹고 자란 아이들이 지금이 나라의 40, 50, 60대가 되어 이제 제법 살만하게 된 이 나라를 이끌어가는 주역들이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만일 그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고 자신만을 위하여 살아간다면 하나님께서는 몹시 섭섭해 하실 것임에 틀림 없다.
하나님의 은혜를 갚으려면 무엇을 해야하는 것인가? 그 해답은 바로 마태복음 25장에 선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영광의 보좌에 앉은 임금이 모든 민족을 심판할 때에 그 오른편에 안내된 사람들이 칭찬을 받았다.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이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혀고 병들었을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마 25:34-36)
뜻밖에 칭찬을 받은 사람들이 의아하여 언제 우리가 그렇게 하였느냐고 임금에게 반문했을 때 임금이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40)
이것은 곧 예수께서 갑자기 임하게 될 그의 재림에 대하여 준비하라는 지시사항 중의 하나이다. 이제 온 세상이 말세가 가까웠다고 말하며 많은 교회들이 임박한 주의 재림을 거론하면서도 정작 그에 대비해야할 이 일들은 하지 않고 있는 것 같이 보인다. 사랑의 쌀 나누기운동이 시작되어 많은 사람과 교회들이 이에 참여히기는 했으나 이 나라 교회들 모두가 나선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신문에 실리는 교회의 명단들을 보면 이름난 큰 교회들보다 시골의 작은 교회들이 더 많았다.
이 운동에 호응하지 않고 있는 어느 교회의 관계자에게 그 이유를 물어보았더니 아직 총회에서 공문이 오지 않았다는 답변이었다. 공문이 안와서 호응하지 않고 있다는 답변도 이상했지만 다른 교단의 목사들이 주동하고 있으므로 협력하지 않는다는 것은 더욱 이 나라의 교파주의가 심각한 상태에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더군다나 그 교단은 유난히 현실참여를 강조하고 정치적인 쟁점만 나타나면 민중의 이름을 업고 나서서 목소리를 높이는 교단이었기에 나는 더 의아했던 것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도 말하고 있었다. 우리 나라에도 가난한 이웃들이 아직 많은데 방글데시 인도 아프리카 등을 돕느라고 떠들썩하는 것이 못마땅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6·25때 한국을 도와준 미국 교회들이 그들 주위에 가난한 사람들이 없어서 우리를 도와준 것은 결코 아니었다. 어느 사회에나 가난한 사람들이 있고 굶주리라는 사람도 있다. 다만 그들은 기회 있을 때마다 안과 밖을 가리지 않고 도왔을 뿐이다.
누가복음 16장에 이런 이야기가 나와있다. 늘 좋은 옷을 입고 연락(宴樂)하는 한 부자의 대문에 누워서 그의 도움을 바라던 나라로라는 이름의 거지가 있었다. 그런데 이 거지 나사로는 죽어서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갔고 부자는 음부에 내려가 불꽃 가운데서 고통을 받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왜 거지 나사로는 낙원에 들어갔고 부자는 고통을 받게 되었는지 성경은 그 이유를 기록하고 있지 않다. 다만 아브라함은 고통 당하는 부자에게 이렇게 설명했을 뿐이다.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나는 처음에 이것이 무슨 뜻인지를 몰랐다. 나사로는 생전에 새벽기도를 열심히 나간 적도 없었고 교회의 봉사를 많이 했다거나 전도를 많이 해서 상을 탄 적도 없었다. 그는 다만 부자의 문전에 「누워」 있었을 뿐인데도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세상에···누워서 천국 가는 수도 있는가?」
나사로가 한 일은 오직 「고난을 받았으니···」만으로 표현되고 있었다. 그것을 보고 있다가 나는 한가지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나사로는 부자에게 구원의 기회를 주기 위하여 한 평생 그의 문전에 누워 있었던 것이다!
전도자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죽을 수밖에 없는 자들에게 구원의 기회를 주는 것이요 결단은 당사자가 해야 한다. 부자가 배고픈 자에게 먹을 것이요 결단은 당사자가 해야 한다. 부자가 배고픈 자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은채 재산을 움켜쥐고는 결코 천국에 갈 수 없는 것이다. 나사로는 바로 부자에게 주어졌던 구원의 기회였다. 나사로는 부자의 구원을 위해서 평생토록 고난 속에 살았던 것이다.
우리의 가난한 이웃들, 그들은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의 기회이다.
방글라데시 인도 아프리카···. 그들은 모두 이 시대의 나사로들이다.
그들은 우리에게 은혜 갚을 기회를 주기 위해서 고난을 당하고 있다.
그 기회가 우리 앞에 아직도 주어져 있다. 사랑의 쌀 나누기 운동이 아직 계속되고 있고, 국민일보와 국제기아대책기구가 아프리카난민구호운동을 펼치고 있다. 이것이 아마도 우리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인지도 모른다. 나사로의 손을 잡고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갈 것인가. 아니면 음부에 내려가 불꽃 속에서 고민하는 부자의 신세가 될 것인가를 선택해야 하는 시간이다.
<김성일님의 "성경대로 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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