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역사/성경세계사

제목 : 양을 잡는 사람들

은바리라이프 2008. 5. 7. 13:49
제목 : 양을 잡는 사람들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2002-01-07
성경책을 들고 교회에 「다니는」사람들이 그 성경의 가르침대로 살지 못하는 이유가 여러 가지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믿음이 아직 연약한 상태에 있는 이들을 올바로 이끌어주지 못하는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우선 그 책임이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의 직분을 맡고 있는 이들의 모범이 중요하고 교회의 규범과 살림을 운영해 나가는 지도자들의 안내가 더욱 더 중요한 것이다.
그런 중에서도 많은 교회의 지도자들이 습관적 오류를 범하고 있는 부분이 바로 「예배」와 「제사」의 혼동이라고 생각된다.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 아래에서 하나님의 지시를 받을 때 그 지시에는 여러 가지의 제사의식이 포함되어 있었다. 화록제(和록제) 속죄제(속죄제) 위임제(위임제)등 여러 가지 번제(번제)와 소제(소제)의 율례에 따라 제사장들은 백성들이 가져오는 소와 양과 비둘기를 잡아서 그 피를 뿌리고 내장과 기름을 불사르고 그 몸을 찢어서 제단에 드렸던 것이다.
성경을 읽기 시작하면서 이미 창세기의 4장과 8장에서 시작되는 양의 번제는 출애굽기 12장에서 유월절 양의 피로 재현되고 마침내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산 아래에 이르면서 그 복잡한 번제의 율례는 광야의 제단을 피로 물들이게 된다.
하나님께서 그토록 엄청난 피 뿌림의 제사의식을 보여주신 것은 장차 그분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백성들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피를 흘리고 그 몸이 찢기게 될 것을 예고하신 것이다. 신학적인 해석뿐만이 아니라 성경자체가 그것을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또 다시 양을 잡아서 제사를 드리지 않는다. 우리는 예수께서 그렇게 하신 것과 같이 「자시 십자가를 지고」(마16:24)그분을 따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고난을 기념하기 위해(눅22:19)성만찬의 예식을 행하며 모두 자기를 찢어서 주께 드리는 「왕같은 제사장」(벧전2:9)들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예수께서 가르쳐주신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가 된다. 제사를 완성하신 예수께서 그 제사를 예배로 바꿔 놓으셨던 것이다.
그래서 초대교회에는 제사가 없었다. 거기엔 떡과 포도주의 나눔이 있었고 부활의 증거가 있었고 기도와 구제가 있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갑자기 위기가 닥쳤다. 그것은 핍박의 칼날도 아니고 비난의 화살도 아니었다. 그 무서운 위기는 바로 안에서부터 번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것은 바로 안디옥교회의 「할례」사건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신앙의 선배들인 유대출신의 그리스도인들이 이방인 형제들도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항하여 불같이 노하여 일어선 것이 바로 바울이었던 것이다.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 2:16)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갈 2:21)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갈 2:18)
이렇게 유대출신 형제들의 논의에 강력하게 반발하고 나선 바울은 마침내 어정쩡한 태도를 취하던 베드로에게까지 호통을 쳐서 예루살렘 총회가 열리게 하였고 그리스도의 죽음을 무효화하는 「할레논의」를 봉쇄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율법에의 회귀」는 교회가 안일한 상태에 있을 때마다 끈질기게 고개를 들었다. 로마의 실권을 장악한 카톨릭의 교부들은 근엄한 제복과 높은 관을 쓰고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자리를 가로채였고 종교개혁 이후 사라졌던 권위주의는 다시 개신교에서까지 「신령과 진정」이 사라진 자사의식으로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 교회들일수록 예배당 안에 구약시대의 지성소와 같은 「구획」이 있음을 본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성소의 휘장을 찢으신 이후로 (마27:51)성도들은 하나님께 직접 모든 것을 고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어떤 교회들은 예배당 안에다가 또 다시 구별된 자리를 만든다. 대개의 경우 그것은 근엄하신 목사님께서 말씀을 「내리시는」강단에 마련된다.
어떤 교회들은 그 강단에 여러 가지 장식을 한다. 말하자면 「제단」을 꾸미는 것이다. 성도들의 헌금을 그 제단 위에 올려놓고 봉헌기도를 드리는 교회도 있다.
또 어떤 교회는 그 강단에 거룩한 곳이라 하여 함부로 아이들이 올라가서 합창을 하거나 성탄연극이며 무용등을 하지 못하게 하는가 하며 어떤 교회는 아예 목사 외에 그 단위에 올라가지 못하게 하는 교회도 있다.
그런 교회들일수록 목사들은 대제사자의 제례복과 같은 거창한 가운을 입는다. 그리고 성도들에게 제단에 드릴 「제물」을 가져오라고 요구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는지도 모른다.
『그것을 꼭 제사의식의 부활이라고 꼬집을 필요가 있는가? 예배도 역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니 경건해야 하지 않겠는가?』문제는 그 경건에 대한 오해다.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딤전 4:7)
이 경우 「경건」은 킹 제임스 번역판에 「Godliness」로 나와 있다.
경건이란 곧 하나님을 사모하여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것이다.
어째든 사람의 개성이 모두 다르듯이 그렇게 근엄하고 딱딱한 신앙도 있는가 보다고 넘겨버릴 수도 있을는지 모르지만 문제는 이러한 제사의식적인 예배를 따라서 배우고 답습하는 교인들이 있기 때문에 문제인 것이다.
강단이 아닌 「구별된 자리」에선 제사장들이 「제물」을 바치라고 할때마다 교인들은 제물을 바친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제물을 갖다 바친 교인들이 그 옛날에 양을 갖다 바치고 속죄 받은 유대인들처럼 다 속죄 받은 줄 알고, 이제 돈을 냈으니 당연히 복을 받을 것으로 알게 되기 때문에 문제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제사적 예배」의 함정이다.
바울의 말처럼 그리스도의 죽음이 헛것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무효화 하는 것에 대해서 바울은 크게 분노했다.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 1:9)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도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행위에 대해서 경고 하셨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마 10:33)
그러므로 예배에 대하여 오해하고 있는 분들은 이 문제를 바로 알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던 갈릴리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 특별한 가운을 입지도 않으셨고 목을 세운 셔츠를 입으시지도 않았다. 그분은 그저 갈릴리의 가난한 사람들과 똑같이 입으셨고 그들과 함께 앉으셨고 그들 가운데 계셨다.
갈릴리 뿐만 아니라 초대교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초대교회의 사도들이 특별한 옷을 입거나 제사를 드렸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이런 것들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우리 주변의 교회들을 바라보기가 두렵다. 오늘날에도 예수께서는 교회에서 쫓겨나 지붕꼭대기에 달아 놓은 십자가에 달려서 떨며 신음하고 계시는 것이 아닌지 무서운 마음이 앞선다.
이제 주께서 오시는 「그날」이 가까워오고 있다. 틀린 것은 과감하게 고치는 것이 좋다. 아직도 때는 늦지 않았다. 우리들의 교회가 갈릴리의 들판이 되게 하자, 초대교회의 공동체가 되게 하자.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고 하나님과 만나는 곳이다. 누구나 그 안에 들어와서 하나님의 사랑과 만나고 감격하고 울고 위로 받는 곳이 되어야 할 것이다.
<자료출처 : 김성일님의 「성경대로 살기」(신앙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