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주석강해/바울서신

연구 2 성도의 기쁨(골2장)

은바리라이프 2008. 4. 26. 21:02
연구 2 성도의 기쁨(골2장)
연구 2 성도의 기쁨(골2장)

본문은 이방 교회들의 복지와 안전을 위한 바울의 염려와 기도를 기록하고 있다. 그러면 바울이 염려한 거짓 교훈들은 어떤 것인가? 그리고 그것들에 대해 교회가 자유함을 얻게 하기 위한 바울의 변증들은 무엇인가? 우리는 이번 장에서 이런 문제들의 해결을 통해 현대교회 속에 존재하는 거짓 교훈은 무엇이며, 그것들에 대항하기 위한 우리의 신앙적 자세는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1. 분투하는 바울의 기도(골2:1-7)

 

바울이 이 글을 쓴 목적은 공교한 속임으로부터 이방 교회를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먼저 바울이 자신이 이방 교회를 위해 분투하고 있음을(골2:1) 알리는 이유는 무엇인가? 1절의 '힘쓰는 것'이란 어떤 물질을 보내 주는 것이 아니요, 마음을 다해 하나님께 드리는 간절한 기도를 의미한다(골4:12). 그리고 바울은 이런 자신의 분투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알아주기 원했던 것이다. 그래야만 자신이 전한 메시지도 그들이 진실되게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바울이 그들을 위해 기도한 것은 어떤 것이었는가? 그리고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요함'을 깨닫기 위해 기도했다. 왜 바울은 그리스도를 부요한 분으로 묘사했는가?

 

1) 바울의 기도

바울은 먼저 그들이 마음에 위안을 받도록(골2:2) 기도했다. '위안을 받다'는 헬라어로 paraklhsio"(파라클레시오스)로써 보혜사인 성령의 사역과 깊은 관계를 갖고 있다. 그래서 이 위안은 성령께서 우리를 지탱해 주시고 우리에게 능력을 공급해 주심으로 위로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와 현실 속에 필요한 모든 사랑, 용서, 능력이 그분에게서 나오기 때문이며, 모든 거짓 교훈을 제거할 지혜와 지식을 제공해 주는 보화 상자 같은 분이기 때문이다.

 

2) 신앙의 격려와 기도

우리는 바울이 골로새 성도들을 칭찬하고 격려하는 메시지와 기도로 그들을 강한 그리스도인으로 성장시키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 현대의 목회자 역시 한 사람을 강하고 담대한 그리스도인으로 성장시키기 위해서 격려하고 감싸주는 태도와 기도를 쉬지 말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감옥에서 자신의 성도를 사랑한 바울의 삶을 통해 성도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점검해 보아야 한다.

 

2. 공허와 실패에서의 자유(골2:8-15)

 

철학은 우리로 하여금 체계적인 사고 능력을 키워주지만 풍성한 삶과 영생을 확신케 하지는 못한다. 그리스도만이 공허한 인간의 삶을 충족시켜 줄 수 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는 어떻게 우리의 공허를 채우시는가? 그리고 십자가 사건이 어떻게 우리의 실패를 말할 수 있는가?

 

1) 실패로부터의 자유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 참여함을 통해 그분의 충만에 동참하고 성령의 충만이 우리 안에 들어오심으로 가능하다(골2:11,12). 그래서 초대교회는 그리스도를 통한 새 생명의 증거로 세례를 베풀었다. 그리고 골2:13,14ejxaleifw(엑살레이포)는 '씻어 버리다, 지어 버리다'는 뜻으로 십자가의 대소의 피가 모든 실패의 죄목들을 지웠기 때문이다. 즉 대속적 죽음으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손에 움켜져 있는 증서를 빼앗아서 태워버리신 것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정사와 권세, 즉 우리를 정죄하는 악한 존재로부터의 자유를 선사하셨다.

 

2) 이원론적 삶

현대 기독교인들은 말로는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고백하지만 실제 삶은 항상 공허와 불안 속에 자유를 결박당하고 있다. 이것은 십자가의 사건을 2000년 전의 한 역사적 사건으로만 인정하고 오늘 우리와는 무관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은 이것은 시대를 초월하여 적용됨을 말하고 있다(롬5,6장). 더욱이 목회자들이 오늘의 성도들에게 위로가 되고 생명력있는 말씀을 선포하기 위해서는 십자가의 은혜가 매일의 삶 속에 체험되어야 한다.

 

3. 거짓 교훈에서의 자유(골2:16-23)

 

바울이 안타까워 하는 것은 해방된 그리스도인이 영지주의와 율법주의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러면 거짓 교훈의 오류는 무엇인가? 그리고 거짓 교훈들로부터 흔들리지 않으려면 그리스도께 의존하는 연합이 되어야 한다(골2:19). 그렇게 되면 어떤 결과가 초래되는가?

 

1) 생명의 연합

엣센파는 음식의 금욕을 성결한 삶의 도구로 보았다. 그리고 월식을 숭배하는 점성술은 샛별이신 그리스도를 부인하였다. 그리고 안식일 숭배자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간파하였다. 이것들은 예수그리스도의 모형에 불과한 것인데 오히려 실제는 뒤로하고 허상만 앞세우고자 하는 교훈들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하면 우리의 행동과 윤리와 실천에 대해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선별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 감정과 의지도 그분의 안도를 받게 된다(엡4:15,16). 그리스도와의 연합에도 불구하고 옛 생활이 남아 있는 이유는 우리가 이미 구원은 받았으나 그리스도의 재림까지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 성령을 통해 그 옛 모습은 조금씩 도려내지고 해방되어져 갈 것이다(롬7:25-8:2).

 

2) 전통주의

오늘의 우리들은 골로새의 거짓 교훈자들처럼 종교적 전통과 문화 양식을 그리스도보다 더 우위에 두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한 번 세워진 종교 의식과 순서는 그리스도의 말씀보다 더 중요시되어지고 있다. 우리 목회자들 역시도 교회 안에서의 행동만 강조하다보니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위한 삶의 행동보다 남의 안목을 생각한 행동이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제 행동주의보다는 구속의 은혜의 감격을 통한 자유스러운 삶이 드러나도록 하는 가르침이 필요할 때이다.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 된 이후에도 복음에 옛 가르침과 문화 양식을 가미하고 있다. 그 좋은 예가 교회 안의 지방색 모임일 것이다. 에베소서는 우리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되었음을 강조한다. 그러나 교회는 여전히 같은 지방 사람끼리 모이고 있으니 이것은 우리의 문화적 현실을 말씀보다 더 우위에 두려는 처사라 할 수 있다. 오늘 그리스도는 우리의 입술만 아니라 삶까지도 새롭게 되기를 원하고 계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