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주석강해/복음서

연구 4 인자의 수난과 승리(눅19:28-24:53)

은바리라이프 2008. 4. 26. 20:18
연구 4 인자의 수난과 승리(눅19:28-24:53)
연구 4 인자의 수난과 승리(눅19:28-24:53)

여리고에서의 삭개오의 사건과 므나에 대한 비유가 조용히 끝을 맺으며 주님께서는 안식일을 평온하게 보내셨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부터 주님은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이 입성하시어 온 예루살렘을 '호산나'의 환호성으로 들끓게 하시더니 어느새 성전을 바라보시며 눈물을 흘리신다. 그리고는 제자들에게 떡과 잔을 기념케 하시며 당부하시고는 모진 고통속에 십자가의 죽음을 감당하신다. 그러나 그분은 다시 살아나셨다.

 

1. 인자의 영광과 눈물(눅19:28-21:38)

 

인자가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이 입성하신다. 진정한 왕권을 행사하는 영광스런 입성이다. 그러한 명예로운 왕으로서의 입성에 귀하고 멋있는 백마를 타시지 않고 왜 어린 나귀를 타셨을까? 또한 어떤 수모와 고통에도 감정의 동요가 없으신 주님께서는 예루살렘 입성 후 곧바로 성전을 보시며 진한 눈물을 흘리셨다. 무엇이 우리 주님으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시게 했는가.

 

1) 겸손한 왕의 눈물

예수가 탄 것은 왕의 준마가 아니라 나귀 새끼였다. 인자로 오신 그의 왕국은 과시나 세상정 영광이 아니라 철저히 겸손과 섬김의 표상이다. 이것은 예언의 성취이다(슥9:9). 나귀 새끼는 천하고 멸시받는 동물로서 그것을 택하심은 인자의 겸허성을 나타낸다. 그는 즉석의 떠들썩한 환호성에 응답하신 후 폐부로부터 흐르는 눈물을 보이셨다. 말은 없었으나 그것은 인생들에 대한 그의 깊은 동정이다. 예루살렘이 높고 거룩한 사명을 감당치 못하여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될 것을 슬퍼하시고 연민하시는 것이다.

 

2) 영광과 눈물의 승화

인간의 고뇌에 대한 우리 주님의 뜨거운 연민의 정은 그의 몸을 다 내어 주도록 지극한 것이다. 지금도 그가 거룩한 친구로서 우리에게 소중한 것은 눈물을 흘리는 인자의 모습이 있기 때문이다. 그분은 '호산나'하고 옷을 깔며 외치는 자들이 며칠뒤에는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칠자들임을 알고 계신다. 그럼에도 바리새인의 간섭에 제자들이 잠잠하면 돌들이라도 찬양할 것이라면서 굴욕을 온유로 받아내셨다. 실로 인자로 오신 그분의 마음이  겸손하고 온유한 분이시다.

 

2. 인자의 수난(눅22,23장)

 

주님의 때가 이르는 바로 전날 만찬석상에서 자기의 고난을 받을 것을 예증적으로 보이셨다. 떡을 떼어 주며 이것은 내 살이라, 또 포도주는 너희를 위한 나의 피라고 하시며 나를 파는 자의 손이 나와 함께 있다고 말씀하신다. 왜 주님은 떡과 포도주로 자신의 몸을 말했으며 그것의 참뜻은 무엇인가? 그리고 왜 하필이면 사랑하며 지도했던 제자의 손에 겨우 은전 삼십에 매도되는가? 왜 가시면류관보다 더 아픈 제자의 가시를 택했는가.

 

1) 화목제물이신 인자

떡과 포도주 이것들의 뜯겨짐과 부어짐은 고통받는 생활의 수고로 일그러진 피곤, 가난, 수치와 어두움 그리고 죽음의 형상이다. 그분은 십자가에서의 자신의 모습을 미리 예증적으로 보여 주면서 나를 기념하라고 부탁하신다.

슬픔과 사랑이 섞인 그분의 부탁과 희생 그리고 용서와 감내, 인자는 가룟 유다에게 영혼을 뚫는 칼을 허용하신다. 사랑하는 제자 중에서의 배신, 사단은 언제든지 가장 가까운 자, 가장 사랑하는 자를 통하여 무섭게 역사하는 것을 알고 모든 신자는 경계해야 한다.

 

2) 핏방울과 포용의 기도

돈은 선한 면에서든 악한 면에서든 인간 생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돈을 맡았던 유다는 돈을 만지며 탐욕이 늘어났다. 부도덕과 범죄적인 행동을 증오하도록 강력하게 훈련받은 예수의 제자가 빠진 이 엄청난 악행의 굴레, 인자는 지성소에 가장 가까운 겟세마네의 은밀한 장소를 찾아 그의 이 비참하도록 당한 배신의 쓰라림과 내일의 고난을 아버지께 아뢰었다.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드리는 처절한 모습에서 우리는 인자의 고뇌와 포용과 그의 사랑의 희생을 본다.

 

3. 인자의 승리(눅24장)

 

전날에 어떤 참혹한 일이 있었든지, 얼마나 그를 증오하고 경멸하며 살해했든지, 아무도 기억조차 하기 꺼림칙하고 칙칙한 그 시점에 주님은 무덤 속에 계시지 않았다. 안식일 다음날 새벽 그는 부활하셨다. 왜 유대인들이 꺼려하는 안식일에 그리고 첫 목격자가 그 동안 훈련시켰던 제자들이 아닌 여인들이었을까?

 

1) 선구적인 신앙 열정의 보상

주님은 안식일의 주인이시다. 그 주님이 주일에 부활하심으로 그의 사역의 절정을 이루셨고 교회의 기초를 세우셨다. 당연히 부활을 기대하고 주님을 만나러 가야 할 사도들(남성)이 주저하는 판에 선구자적인 여인들이 주저함 없이 새벽에 갔다. 아끼고 예비해 두었던 귀중한 향품을 가지고 갔다. 열정적인 신앙 앞에서는 고난도, 두려움도, 장애물도 맥을 못쓴다. 여인들이 염려하던 돌문(장애물)은 이미 제거되었다. 그들의 신앙은 천사를 보는 영안을 뜨임받았고 부활의 소식을 최초로 접하고 전하라는 영광을 얻었다.

 

2) 복음의 진수 확정

죽음은 패비일 수밖에 없으나 하나님은 인간이 알지 못하는 시야의 은신처에서 크고 비밀한 승리를 창출하셨다. 이 역사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너무도 훌륭한 인류에의 선물이다. '길이요 진리,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를 지속적으로 믿고 따르는 참신자에게 주어지는 놀라운 은총이다. 이 은총을 입은 자는 세상의 지위가 바뀌어진다. 살아 있는 복음의 씨앗을 인자가 안겨 주셨고 그 씨앗을 받은 성도는 영원의 차원을 살아가는 승리의 증인이 된다.

 

인자는 겸손하고 겸허하게 고난을 감당하시고 그의 모든 사역을 남김없이 '다 이루시고' 죽으셨다가 부활하셨다. 우리는 그 인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는 어리석음에서 이제는 벗어나야 한다. 제자들은 그렇게도 미리 '고난받고 죽었다가 삼일만에 살아나리라'는 주님의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막상 그날 아침에 여인들이 먼저 목격하고 전해주는 것도 확실히 믿지 못하고 의아해 하는 우를 범했다. 우리는 확실하게 승리하신 주님을 확실히 믿고 증거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