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주석강해/복음서

연구 1 그리스도의 증거(요14장)

은바리라이프 2008. 4. 26. 20:20
연구 1 그리스도의 증거(요14장)
연구 1 그리스도의 증거(요14장)

본 연구는 요한복음의 서론 부분과 함께 예수께서 행하신 공생에 초기사역이 중심을 이룬다. 사도 요한은 본 서신에서 로고스의 개념을 통해 성육신하신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다. 예수께서 행하신 많은 이적들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증거하는 표적임을 보여 주고 있다.

 

1. 서론(요1:1-1:18)

 

본문은 요한복음 전체의 서론에 해당하는 부분으로서 간결한 문장 속에 그리스도의 신성을 무게 있게 묘사하며 고도의 신학성 또한 가미하고 있다. 요한은 헬라 사고에 익숙한 독자들에게 예수그리스도를 증거하기위해 로고스 개념을 도입하고 있다. 요한의 로고스 개념은 무엇인가? 성육신 개념 도입 의도는 무엇이며 또 성육신의 신학적 의미는 무엇인가?

 

1) 말씀과 지혜 개념

유대교의 지혜 개념 (hmqj;호크마)에서는 하나님의 현존 안에서 독립적인 존재를 지니고 있고 피조된 세상과도 특정한 관련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헬라인들은 로고스를 세계 가운데 내재하는 법 또는 이성으로만 인식하였다.lovgo"(로고스)에 대한 요한의 사상은 본질적으로 새로운 것이었다. 그에게 있어 말씀은 하나의 원리나 인격화된 표현이 아니라 생명의 근원이요, 모든 사람의 빛이신 하나님이었다. 비록 그가 당시 널리 알려져 있고 또 매우 다양한 배경을 이면에 가지고 있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하더라도 그가 의도한 로고스의 의미는 본질상 기독론적이었던 것이다.

 

2) 말씀의 성육신

요한 생존 당시의 가현론자들은 거룩하신 하나님이 추악한 인간이 되어 자신의 신성을 더럽힐 수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실제로 인간이 된 것이 아니라 인간인 것처럼 보이려고 행동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저자는 그러한 황당무개한 이론을 단호하게 배척한다.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1:14)라는 말은 성육신이 이 세상에서 이루어졌으며, 우리 인간들 속에서 발생한 역사적 사건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2. 증거와 계시의 주간(요1:19-2:11)

 

요1:1-18까지가 요한복음의 서론이라면 본문은 본론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본문은 본론 중 하나의 연속되는 주제인 '증거되는 하나님의 아들'(요1:19-2:11)에 속해 있는 단락이다. 요한은 예수의 사역의 출발을 제자들을 부르는 일에서 시작한다. 세례 요한은 자기를 어떠한 인물로 인식하고 있었는가? 또한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어떤 분으로 알고 있었는가? 한주간 동안 예수의 사역의 중심은 무엇이었나?

 

1) 세례 요한

기나긴 고난과 어두움의 역사에 찌들렸던 유대 민족의 기대감은 세례 요한에게로 집중되었다. 그러나 요한은 '드러내여' (요1:20) 자신이 결코 메시야가 아니라고 했다. 비록 그는 '선지자보다 나은 자' (마11:9)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추종하는 자였지만 자기가 그리스도께는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해드릴 만한 자격이 없다고 고백한다(요1:27). 이렇듯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를 이사야의 예언대로 기다리며 예비한 그 '주'(Lord)가 되며 그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권위가 있으신 분(요1:27), 유한적 존재가 아닌 영원 속에 존재하신 분이 되시며(요1:30),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능력자(요2:33)로 이해했다. 예수에 대한 세례 요한의 증거는 무엇보다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노라"(요1:34)에서 절정을 이룬다. 세례 요한은 예수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요1:29)이라고 이해했다. 이렇게 요한은 공관복음서 기자들이 다루지 못한 세례 요한의 증거를 보다 구체적으로 증거함으로써 예수께서 참된 그리스도 되심을 알리고 있다.

 

2) 첫 주간의 사역

사도 요한은 예수의 공생애 초기의 첫 한주간 동안에 일어났던 사건을 통하여 예수께서 어떤한 분이라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본 서의 본론이 시작되고 있는 요1:19-2:11까지에서 저자는 예수에 대한 세례 요한의 증거를 통해 예수의 하나님 아들 되심을 모든 사람에게 알려 주고 있다. 계속해서 처음 제자들에 대한 소개와 나다나엘을 통한 이스라엘의 임금되신 예수를 표현하고 있으며, 가나의 혼인 잔치를 통해서 전개되는 그의 표적들은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전개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3. 새 성전, 새 출생, 새 예배(요2:12-4:54)

 

저자는 예수의 공생에 초기에 예루살렘을 방문하시고 성전 정화 소동을 행하신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렇다면 요한이 예수의 예루살렘 성전 소동 사건을 그의 사역 초기에 기록하고 있는 의도는 무엇인가? 또한 니고데모를 통해 가르치신 중생의 도는 무엇인가? 사마리아 여인을 통해 우리에게 제시하시는 말씀은 무엇인가?

 

1) 예루살렘 성전 소동

예루살렘 성전 소동은 공관복음서의 성전 소동(마21:12-17 ; 막11:15-19 ; 눅19:45-48)과 시간적인 차이를 보여 주고 있다. 즉 본문에서 예루살렘 성전 사건은 공생애의 초기에 발생했지만 공관복음서에는 공생애 말기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기술상의 차이이다. 공관복음서가 예수의 공생애를 '갈릴리-예루살렘' 이라는 도식으로 구성한 반면에 요한은 공관복음서와 다른 관점에서 그리고 공관복음서의 누락된 부분을 보충하기 위하여 예수의 예루살렘 사역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예수는 공생애 말기뿐만 아니라 공생에 초기에도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으며 성전 소동 사건도 한 번만 일어난 것이 아니다. 계속해서 예수는 많은 표적들을 행하셨고, 그 표적들을 통해 예수는 본 서의 중심 교리인 '예수의 하나님 아들 되심'을 상징적으로 증거하고 있다. 이러한 표적을 배경삼아 찾아온 니고데모(요3:3)를 통해 예수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방법을 설명해 준다. 예수와 니고데모 사이에 있었던 대화의 주제가 되는 것은 중생에 관한 일이다.

 

2) 우물가의 여인

앗수르에 의한 사마리아 함락 이래(B.C.722년, 왕하17:6) 유대와 사마리아 두 지방 간에는 오랜 세월 동안 뿌리깊은 반목이 형성되어 있었던 관계로 유대인들은 통상 사마리아를 거치지 않고 유회하였으나 예수는 의도적으로 사마리아 땅에 들러 그것도 부정한 과거를 지닌 한 여인에게 전도하심으로써 육체의 혈통이나 신분을 초월한 구원의 은총을 밝히 드러내었다. 여기서 예수는 자연스러운 일상적 대화를 통해 이른바 '생명수'에 관한 복음 메시지를 유도해 내셨으며 더불어 참예배의 본질을 가르치셨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예수는 이 땅에 오셨다. 그의 기적들은 그가 하나님 아들 되심을 증거하는 분명한 표적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표적을 우리의 눈으로 목도하면서도 이스라엘의 많은 사람들처럼 영적 무지 속에 참된 주님을 영접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였다.

 

연구 1 그리스도의 증거(요14장)

1. 로고스의 이해

 

1) 헬라어에서의 로고스 개념

헬라인의 로고스(Logos) 관은 근본적으로 우주는 저절로, 자연히 존재하며 영속하는 것이 라는 사상에 입각한 것으로서, 이처럼 자연 발생한 우주와 역사속에 보편적으로 배재한 법또는 신적 정신 또는 원리가 있는데 이것이 바로 로고스라고 생각하였다. 한편 이러한 로고스가 인간의 영혼의 이성에도 들어 있기 때문에 인간의 영혼과 그를 반영하고 표현하는 인간의 말에도 로고스가 들어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우주 만물속에 보편적으로 내재해 있는 법 또는 원리인 로고스에 의하여 세계는 통일과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또 로고스를 통하여 인간은 우주의 신적 원리 또는 정신과 교감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로 볼 때 헬라어에서의 로고스는 자연 발생론적 우주관 및 범신론 사상에서 우러나온 개념임을 알 수 있다.

2) 성경에서의 로고스 일반 개념

헬라인들은 자연 발생된 우주 만물들에 범신론적으로 깃든 우주의 이법 원리 등이 로고스 라고 보았다. 그러나 성경은 절대 초월자로서 우주 만물을 지으시고 그것이 조화를 이루게 경륜하시는 하나님의 의지와 주권에서 우러나온 계경에서 '알레데이아'는 일반적으로 '진리'(요17:17 ; 벧전1:22) 및 '진실함'(엡5:9)으로 번역되고 있는데, 이것들은 '숨기지 않고 드러낸다'는 뜻을 반영하고 있다. 따라서 요4:23에 나타난 '진정으로'의 정확한 의미는 '있는 모습 그대로 숨기지 씌의 전달자로서의 그리스도 예수는 성육신 이전에도 여호와의 사자로서 하나님의 주요, 계시의 전달자의 사역을 하였거니와 결정적으로는 성육신 하셔서 하나님의 구속의 섭리를 복음으로 제자들에게 전달하셨다.

③ 로고스 자체로서의 그리스도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 계시의 궁극적 메시지는 결국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죄인의 구속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그리스도는 로고스(Logos) 그 자체이시다. 이상의 세 의미에서 주님은 전우주와 구원의 원리를 세우신 로고스의 근원이시며 그 로고스의 전달자이시며 로고스 그 자체이시다.

 

2. 신령과 진정으로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enpneuma ti kai alleqeia이다. 먼저 '엔'은 '~안에서(in)' 라는 뜻의 전치사이다. 그리고 '카이'는 '그리고' (and)라는 뜻의 단순 접속사이다. 한편 프튜마티의 원형은 '프뉴마'로서 이는 바람 따위가 '불다'(마7:25 ; 요3:8)라는 뜻의 '프네오'에서 유래하여 '영'(고전15:45 ; 갈4:6) 또는 '영혼'(마27:50) 및 마음의 '중심' (막2:8)이나 '귀신' (막1:6 ; 눅9:39)을 의미한다. 이것은 인간의 영혼이나 심령 및 귀신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바람의 속성에서 이같은 의미가 파생된 듯하다. 그러나 문맥상 '신령'의 의미가 예배자의 자세와 관련되어 사용되었기 때문에 요4:23의 '신령으로'라는 뜻은 '귀신'이라는 의미보다는 인간의 내면 깊숙한 것을 뜻하는 '영으로' 또는 '마음의 중심으로'라고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한편 '진정으로'에 해당하는 헬라어이 'alleqeia'는 그 원형이 '알레테이아'이다. 이것은 '숨기다'(막7:24 ; 눅8:47) 또는 '알지 못하다' (행26:6) 및 '잊다' (벧후3:5,8)를 뜻하는 '란다노'에 부정적 의미를 갖는 접두모음 '아'가 합쳐져 명사화된 단어이다. 따라서 그 의미는 '숨김이 없는 상태' 또는 어떤 일을 '깨달아 아는 것' 및 하나님 뜻을 '잊지 않는 것'을 뜻한다. 개역 성경에서 '알레데이아'는 일반적으로 '진리'(요17:17 ; 벧전1:22) 및 '진실함'(엡5:9)으로 번역되고 있는데, 이것들은 '숨기지 않고 드러낸다'는 뜻을 반영하고 있다. 따라서 요4:23에 나타난 '진정으로'의 정확한 의미는 '있는 모습 그대로 숨기지 않고' 혹은 '사실을 정확하게 깨달아 알며 하나님의 뜻을 잊지 않고'라는 것이 된다. 결국 이상을 통해'신령과 진정으로'의 의미는 사람이 '마음 중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깨달아 알고' 하는 뜻을 풀어 설명하면 예수님께서는 장차 사람들이 하나님께 온전한 예배, 곧 사람의 그 마음 중심을 드리며 또 하나님의 뜻을 잘 깨달아 예배드리는 때가 올 것이라고 예언 하신 것이다.

 

3. 요한복음에서의 예수

 

요한복음에서 예수가 행하신 기적은 기적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기적의 의미가 중요한 것으로 나타난다. 기자 요한은 예수가 행한 모든 이적들은 하나님의 일이었음을 나타내는 표적임을 보여 주고자 한다. 즉 요한은 '하나님의 일'로써의 기적은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눈으로만이 그 참된 의미를 올바로 이해할 수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우리의 신앙은 그의 기적을 통해 그가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