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인물]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4) -애굽에서의 수모 | ||||
비난과 판단의 자세를 버리고, 사랑과 이해의 눈으로 보아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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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12:10~20) "그 땅에 기근이 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우거하려 하여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창 12:10) 기근을 피해 애굽으로 가축에게 먹일 초장을 따라 남방으로 내려가던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기근이 들자 애굽으로 내려갑니다. 성경은 아브람이 ‘우거하려 하여’ 애굽에 내려갔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아브람은 가나안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기근을 피해 애굽으로 내려가지만 그곳에 정착하지 않고 가나안 땅으로 돌아올 계산을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을 떠나 애굽으로 내려간 아브람을 비난하는 분들이 있습니다만, 지금 아브람에게는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가나안 땅과 후손을 주겠다’는 약속은 하셨지만, 가나안을 떠나지 말라고도,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라고도 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아브람을 책망할 아무 근거가 없습니다. 만일 아브람이 애굽으로 정착하러 갔다면 문제가 되겠지만, 기근이 지나면 돌아오려고 내려갔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삭에게는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라고 하였고, 출애굽 이후 애굽은 절대로 내려가서는 안 되는 금지된 땅이 되고, 심지어 왕은 말을 사려고 백성을 애굽에 내려 보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신 17:16). 그런데 솔로몬은 애굽에서 말을 많이 사왔기 때문에 책망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지만, 아브람은 아닙니다(왕상 10:28). 교중 사람이야 우리가 판단할 수 있지만(고전 5:12),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이 기준이 됨을 기억한다면, 무고한 아브람을 비난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누이라 하라" "그가 애굽에 가까이 이를 때에 그 아내 사래더러 말하되 나 알기에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고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 원컨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대로 인하여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인하여 보존하겠노라 하니라"(창 12:11~13) 아브람은 애굽으로 내려가면서 아내 사래에게 ‘당신의 빼어난 미모 때문에 내가 남편인 줄 알면 당신을 빼앗으려고 나를 죽일 것이니, 내 누이라고 해서 그대로 인하여 내가 안전하고 목숨을 보존하게 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아브람이 아내를 누이라고 해서 안전을 도모하겠다는 발상은 아무리 좋게 이해하려 해도 비겁하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가 평범한 사람이라면 몰라도, 위대한 믿음의 조상인 아브람이 그럴 수 있나 싶어 더 실망스러운 것입니다. 그렇지만 아내를 누이라고 해서 얻으려는 것이 목숨이라니, 함부로 비난할 수도 없는 것이 목숨을 잃으면 모두 다 잃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니 주님도 ‘목숨을 잃으면 천하를 얻어도 유익이 없다’ 하셨고(마 16:26) 솔로몬도 ‘살아 있어야 소망이 있다’고 했으니(전 9:4-5), 여기서도 아브람을 비난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후손과 땅을 주신다’고 하셨고, ‘너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하겠다’고 약속하셨으니 그 약속을 믿고 의연하게 처신하였으면 좋겠지만, 아브람에게는 아직 그런 믿음이 없고 하나님께서도 그의 믿음 없음을 책망하지 않으시니, 그냥 믿음의 조상으로 다듬어져가는 삶의 한 과정으로 받아들이면 좋을 것 같습니다. 바로의 처남 아브람 "아브람이 애굽에 이르렀을 때에 애굽 사람들이 그 여인의 심히 아리따움을 보았고 바로의 대신들도 그를 보고 바로 앞에 칭찬하므로 그 여인을 바로의 궁으로 취하여 들인지라 이에 바로가 그를 인하여 아브람을 후대하므로 아브람이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약대를 얻었더라"(창 12:14~16) 애굽에 도착하자, 염려한 대로 사래의 빼어난 미모에 대한 소문이 바로에게까지 들렸고 바로는 그녀를 데려다가 아내를 삼습니다. 아브람이 염려한 대로 사래의 빼어난 미모는 애굽을 떠들썩하게 했고, 만일 누이라고 하지 않았더라면 우려했던 목숨을 잃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었겠다 싶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지켜주셨겠지만 지금 아브람은 그런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하니 꼼짝 못하고 당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아브람은 아내를 빼앗겼지만, 애굽의 왕 바로의 처남으로 많은 노비와 나귀와 약대를 얻고 융숭한 대접을 받습니다. 얼핏 생각하면 늘어난 재산을 기뻐하는 것 같이 보이지만, 그럴 리가 없을 것입니다. 그는 죽지 않으려고 아내를 누이라 했고, 말이 씨가 되어 아내를 내주고 처남 노릇을 하고 있지만 그 쓰린 마음이야 오죽하겠습니까? 아내가 다른 남자와 조금 각별한 듯해도 질투하는 것이 남편인데, 사랑하는 아내를 다른 사람의 품에 내주고 목숨을 구걸한 자신이 얼마나 저주스럽고 비참했겠습니까? 또 사랑하는 남편을 두고 남의 남자 품에 안겨야 하는 사래의 심정은 얼마나 참담했을까요? 아마 남편의 목숨이 자신에게 달려있지 않다면 혀를 깨물고 죽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런 비참한 결과가 온 것이 가나안을 떠났기 때문이고,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아내를 누이라고 거짓말하였기 때문이라는 비난과 책망의 소리는 많이 들어봤어도, 고향을 떠난 아브람 부부가 겪는 나그네의 서러움에 대해 공감하는 이야기는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성경은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고 말씀하셨는데(롬12:15), 우리는 아브람과 사래의 두려움과 슬픔을 이해하고 공감하기보다는, 잘못을 판단하고 정죄하기에 발이 더 빨랐다고 생각하며, 이것이 사랑이 없고 매몰찬 우리의 실상이 아닐까 싶어 서글퍼집니다. 그래서 이제는 재판관의 자리에서 피고(당사자)의 자리로 내려오고, 구경꾼의 자리에서 무대 위로 올라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섣불리 성경 구절을 갖다 대며 어떤 교훈을 얻으려고 하기 전에, 그 사람의 입장이 되어 차분히 생각해보았으면 하는 것입니다. 아브람이 믿음이 없는 것이 사실이고, 그래서 애굽에 내려갔다가 곤경에 처한 것도 사실이며 아내를 누이라고 한 것도 문제지만,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의 믿음을 거론하지 않으십니다. 고향을 떠나 외롭고 고단한 나그네로 살아가는 아브람을 하나님께서는 긍휼과 자비가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고 계셨으며, 그래서 아브람의 생애에 개입하셔서 그를 곤경에서 건져내신 것이라 여겨집니다. 아내를 되찾는 아브람 "여호와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연고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 바로가 아브람을 불러서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이렇게 대접하였느냐 네가 어찌하여 그를 네 아내라고 내게 고하지 아니하였느냐 네가 어찌 그를 누이라 하여 나로 그를 취하여 아내를 삼게 하였느냐 네 아내가 여기 있으니 이제 데려가라 하고 바로가 사람들에게 그의 일을 명하매 그들이 그 아내와 그 모든 소유를 보내었더라"(창 12:17~20) 아브람은 바로에게 아내를 내주고도 속수무책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많은 재물을 얻었지만 아내를 내준 대가로 얻은 재물이 위로가 되지도 못하였을 것입니다. 이때에 하나님께서 나타나 바로를 꾸짖으시면서 사래가 아브람의 아내이니 그녀를 돌려보내라고 하셨고, 그제야 모든 상황을 알게 된 바로는 크게 두려워하며 아브람을 불러 나무라며 사래를 돌려줍니다. 하나님께서 바로와 그의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시고 아브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고 하시지만, 사실 바로는 재앙을 받을 만한 잘못이 없습니다. 굳이 잘잘못을 따진다면 부부이면서 남매라고 한 아브람이고 사래이지, 바로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의 아내를 돌려주게 하시는 것은 당연하지만, 애매한 바로에게 재앙을 내리시는 것은 지나친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고, 아브람의 하나님만 아니라 온 천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굳이 바로에게 재앙을 내리신 것은 ‘너를 축복하는 자는 복주고, 저주하는 자는 저주하겠다’(창 12:3)고 아브람에게 하셨던 약속을 이행하신 것으로{아브라함(2) 참조} 아브람은 하나님이 막강한 힘을 가진 바로까지 굴복시키는 큰 능력의 소유자이심에 놀라고, 곤경에 빠진 자신을 구해주신데 대해 감격하고, 깊이 감사하였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의 잘잘못을 따지지 않고 바로에게 재앙을 내리시면서 ‘나는 네 편’이라는 것과 ‘언약을 지키시는 분’임을 알기를 원하셨지만, 아브람은 아직 그 깊으신 뜻을 깨닫지 못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것은 아브람에게 믿음을 주시기 위하여 애굽에 내려가는 것도 허락하시고, 심지어 아내를 누이라고 거짓말을 해도 문제 삼지 않으시는 분이심을 아는 것입니다. 또 아브람이 하나님을 만나긴 했지만, 하나님을 아직 모르기 때문에 모든 상황을 자기 경험과 판단에 따라 대처할 수밖에 없으며, 그런 아브람을 책망하지 않으시고 약속을 지키시며 믿음을 주시기 위하여 수고하시는 하나님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맹자의 어머니가 아들 교육을 위해 세 번 이사한 것을 일러 맹모삼천(孟母三遷)이라 하는데 맹모가 세 번 이사한 것을 우연이 아니라 의도적이었다고 보는 시각이 있습니다. 맹자로 하여금 시장에서 생존 경쟁이 치열한 삶의 현장을 보게 한 후, 공동묘지에서 인생무상(人生無常) 곧 모든 인간의 귀결을 보면서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를 준비시켰다는 관점인데 수긍이 됩니다. 그래서 자녀 교육에 관심이 있는 부모는 자녀들을 여행을 시키거나 여러 경험을 하게 합니다만, 요즘 부모는 치열한 경쟁 구조 때문에 그럴 여유가 전혀 없다며 그저 공부만 하라고 밀어붙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다양한 경험을 허락하시는 쪽을 택하시는 것 같습니다.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이 주님을 배반할 줄 아시면서도 배반하지 못하게 단속하지 않으시고 돌이키기를 위해 기도하셨으며(눅 22:32), 다윗이 밧세바를 범하고 임신한 사실을 감추려고 음모를 꾸미다가 끝내는 그 남편 우리아를 죽이기까지 막지 않으시고 “칼은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나 죽이느니라”하면서 다윗의 교활한 모습이 드러나기까지 기다리십니다(삼하 11:25). 이후에 다윗은 자신의 죄인 됨을 자백하면서 의로우신 주님 앞에 온전히 무릎을 꿇게 됩니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시 51:4) 여기서도 아브람이 아내를 누이라고 하지 말라고 하셔도 되고, 바로가 딴 마음을 먹지 못하게 하실 수도 있었고, 최소한 잠자리를 같이 하지 못하게 막을 수 있었을 텐데, 아내를 되찾아 주시면서도 아브람 부부에게 가슴 아픈 경험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을 뵙게 됩니다. 왜 그러시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이런 뼈아픈 경험들이 아브람을 아브라함 되게 하는데 유익하기 때문에 허락하셨을 하나님을 우리는 믿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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