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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인물]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3) 마침내 가나안으로

은바리라이프 2008. 4. 23. 19:40
[성경인물]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3) 마침내 가나안으로
기근을 피해 남쪽으로 내려가는 아브라함과 그를 기다리는 하나님
입력 : 2005년 05월 07일 (토) 17:56:50 / 최종편집 : 2005년 05월 15일 (일) 17:38:49 [조회수 : 1639] 이용대

"이에 아브라함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오 세였더라. 아브라함이 그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아브라함이 그 땅을 통과하여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하였더라.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그가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거기서 벧엘 동편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는 벧엘이요 동은 아이라. 그가 그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점점 남방으로 옮겨갔더라"(창 12:4~9)

말씀을 좇아가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이 위대한 사람임에 틀림없지만, 세상의 위인과는 다른 시각에서 접근해야 합니다. 세상의 위인들은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말처럼 태몽이 유별나든지 어려서부터 하는 짓이 다르다든지, 무엇이든 일반인과 구별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성경은 불 병거를 타고 승천한 선지자 엘리야도 우리와 성정이 같다고 말합니다(약 5:17). 마찬가지로 아브라함도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인데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  마침내 위대한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위인의 전기나 읽고 감탄만 하는 구경꾼이 아니라, 신앙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당당하게 천국을 침노하는 자로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에 아브라함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오 세였더라."

성경은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조카 롯을 데리고 가는 아브라함을 '말씀을 좇아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따라 갔으면 친척인 조카 롯과 함께 가지 않아야 하고, 조카 롯과 같이 갔으면 말씀을 따르지 않았다고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조카 롯을 데리고 가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갔다는 이 말씀에는 하나님의 심정이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본토와 아비 집'을 떠난 사실을 인정하고 칭찬하시면서, 조카 롯을 데리고 가는 것을 문제 삼지 않으십니다. 문제 삼지 않는다는 말은 묵인한다는 말이 아니라 아직 그럴 수준이 아닌 아브라함을 용납하신다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이 그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75세의 아브라함이 아내와 조카 롯과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종)을 이끌고 하란을 떠나 긴 여행 끝에 마침내 가나안 땅에 도착합니다. 여기서 '마침내'라는 표현은 아브라함의 결단과 그 동안의 노고와 도착에 대한 칭찬과 격려의 뜻으로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죽은 자 데라'처럼 중도에 포기하지 않고 마침내 가나안에 도착한 아브라함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기뻐하심은 물론, 앞으로 전개될 일에 대한 기대감을 포함한 하나님의 심정을 담아낸 표현입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하나님께서는 즉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격려의 말씀을 주십니다.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언제든지 주목하여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반복해서 하시는 약속은 ‘후손과 땅’입니다. 지금 아브라함은 자식이 없고 나이는 75세나 됩니다. 그런데 자식을 주신다니 얼마나 감사하고 기대가 되겠습니까?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약속을 반복하시지만 자녀도 땅도 주지 않으십니다. 땅을 차지하려면 자손이 있어야 하는데 75세나 된 아브라함에게는 자식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면서 '가나안'이라고 하지 않으시고 '내가 네게 지시할 땅'이라고 하신 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제 가나안 땅에 들어왔지만, 땅과 후손에 대한 약속만 반복하시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으로 왔다고 목적지에 도달한 것이 아닌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기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가나안은 그 믿음의 조상이 되기 위한 훈련장입니다. 그래서 땅과 후손에 대한 약속이 반복되고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믿음이 자라고 가나안이 상징하는 천국을 소유하는 믿음의 조상이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훈련 

"그가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거기서 벧엘 동편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는 벧엘이요 동은 아이라. 그가 그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점점 남방으로 옮겨갔더라."

아브라함은 자기에게 나타나 격려해주신 하나님을 위하여 단을 쌓고, 벧엘로 옮겨서도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단을 쌓았으니 많은 분들이 감동합니다. "봐라, 아브라함이 단을 쌓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을 섬기자!" 그렇지만 너무 성급한 판단입니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에서 우상을 섬기던 데라의 장남입니다.

데라가 갈대아 우르를 떠났고 아브라함도 하란을 떠나 가나안에 왔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어쩌다가 그렇게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셈의 후예가 온 땅에 펴진 이후로 하나님을 아는 세대는 공식적으로는 없습니다. 제가 왜 '공식적'이라고 하는가 하면, 멜기세덱과 '발람' 같은 인물 때문입니다. 멜기세덱도 그렇지만 발람이 어떻게 하나님을 알고 그의 선지자가 되었는지를 전혀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의 종인 것만은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 외에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만나는 첫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전혀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느 날 어떤 대단한 신이 나타나서(꿈인지 환상인지는 모르지만) 가나안 땅으로 가라고 하시니 따라 나서기는 했지만, 그가 어떤 분이신지 어떻게 섬겨야 하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우상을 섬기던 방식대로 단을 쌓고 제사를 드렸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하나님께서 제사법을 알려주셨을 수도 있겠지만, 여기선 그쪽으로 갈 일이 아닙니다.

여기서 자꾸 아브라함의 위대함을 찾으려다가 하나님을 놓칠까봐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고 여호와께서 그의 의로 여기신 곳이 15장인데, 여기는 12장이니 믿음이 없는 제사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아브라함의 제단에 지나치게 감동하며 호들갑을 떨지 말자는 것이고, 그보다는 그런 아브라함을 기다리시며 믿음을 주시고 마침내 위대한 믿음의 조상으로 만들어내시는 하나님에게 초점을 맞추자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약속에 대한 믿음

아브라함은 벧엘과 아이 사이에 장막을 치고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릅니다. 그러나 점점 남방으로 내려갑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아브라함이 쌓는 단과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그가 과연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가'이며 '약속에 대한 믿음이 어떠한 행동으로 나타나는가'인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배워야 하는 것은 '믿음'인데, 이 믿음은 아브라함의 어떤 '믿음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얼마나 믿는가하는 '약속에 대한 믿음'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그 이름을 부르지만, 짐승들에게 먹일 풀이 있는 남쪽으로 남쪽으로 가고 있습니다. 지금 아브라함에게 여호와라는 신은 단을 쌓고 제사를 드려야 하는 '섬김의 대상'이지, 약속을 하시고 그 약속을 이행하시는 분이라는 '믿음의 대상'은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거창한 축복의 말씀을 하셨고, 땅과 후손에 대한 약속을 하시지만, 그 약속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기근을 피해 환경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런 아브라함은 비난의 대상도 칭찬의 대상도 아닌, 믿음을 얻기 위한 과정을 밟아가고 있음을 인정하여야 합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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